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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인문학 여행 이야기 1 -나라시대(奈良時代)의 한국인의 흔적: 코후쿠지, 토다이지, 도래인 이야기, 정창원-

by 뜨르k 2017.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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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시대(奈良時代)의 한국인의 흔적: 코후쿠지, 토다이지, 도래인 이야기, 정창원-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넘어설 수 있다.”

 

토다이지 대웅전

 

 여행이 즐거운 것은 때론 일상성에서 탈피하는 때문이고 또한 자기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탐색하는 일종의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해외여행을 가기 위한 조건으로 첫 번째로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하고 두 번째로는 경제적인 필요일 것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여행을 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며 한 가지 조건만 있는 경우도 여행을 얼마든지 시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여행에 대한 열정으로 가능하다. 비록 경제적 비용이 좀 모자란다 할지라도 그에 맞는 여행을 선택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도 가족여행을 가기로 과감하게 시도한 것도 조건이 다 채워져서가 아니다. 일상성을 탈피하여 미지의 세계에 열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행을 가기로 결정하면 여행 준비를 위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여행갈 장소와 일정을 짜야하고 때론 그 나라의 날씨와 기후등도 알아야 하고 교통체계도 숙지하여야 무난한 여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먹는 음식에도 관심을 가져야만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제대로 준비되지 않는 여행이라면 최악의 여행이 될 수 있다. 필자는 이번 여행을 가족여행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여행 목적지를 일본 간사이 지역으로 선택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비행기 항공료 때문이다. 한 사람이 떠나는 여행이면 항공료가 부담이 되지 않겠지만 가족이 최소한 10일 이상을 머무는 여행이라면 항공료도 가만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교육적 측면이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우리나라는 가까우면서 아주 먼 나라로 인식된다. 그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일본이 가깝고도 먼 이유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여행을 통하여 교육할 필요성 느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여행을 통하여 생생한 과거에 대한 흔적을 보고 만지고 교감하며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현장에서 느낌으로서 더 높은 차원에서 과거의 역사를 성찰을 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선택했고 일본 중에서도 가장 일본다운 간사이(관서) 지방을 선택하게 된 이유이다.

 

 

간사이는 일본을 관동과 관서로 구분할 때 관서를 부르는 일본식 발음이다. 관서(간사이)는 오사카 주변을 의미하고, 관동(간토)은 도쿄 주변을 의미한다. 간사이의 중심은 오사카이고 그 주변에 교토, 고베, 나라 등이 있다. 이번 여행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교토, 고베, 나라 등을 방문하였다. 일명 일본 간사이 지역 여행이다. 여행의 순서는 나라, 고베, 교토, 오사카 등의 순이다. 이렇게 한 이유는 여행에 대한 부담감을 줄이기 위해서 작은 지역부터 시작했기 때문이고 또한 오사카를 중심에 두고 각 지역을 탐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른 방법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 탐방 도시는 나라이다. 나라는 일본의 고즈넉한 도시이다. 현재는 도시인들의 휴식처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일본의 수도이면서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인 아스카 문화가 발생한 곳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유적이 많아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 여러 곳 있다. 여기에서 나라라는 말은 우리가 국가라고 하는 ‘나라’와 단어와 발음이 같다. 이것은 어떤 학자는 ‘나라’라는  지명은 이곳에 살았던 신라 사람이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무튼 일본의 아스카 문화는 백제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확실하다.

 

나라 사슴공원 

 

보통 나라로 가는 방법은 나라에는 공항이 없어서 교토나 오사카를 통해 들어가야 한다. 필자도 그랬다. 나라는 JR 나라역의 동쪽인 히가시 나라와 니시나라로 구분한다. 히가시 나라가 나라의 중심이지만 화려한 유적의 흔적은 흔히 니시나라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여행지는 히가시 나라에 몰려있다. 그 중 하나가 나라공원, 코후쿠지, 토다이지(東大寺) 등이다. 나라공원은 헤이조코의 외궁에 있던 자리를 1880년에 정비한 아주 넓은 공원으로 사슴 1200여 마리를 방목해 사슴공원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마음껏 뛰노는 사슴들을 만날 수 있다. 실질적으로 여기서 인간과 사슴은 하나이다. 그 어떤 경계도 없이 서로 가까이 갈 수 있다. 마치 인도에서 소를 신성시하여 소의 행동에 아무런 제제를 하지 않듯이 나라 공원의 사슴 역시 카스가타이에서 온 신의 사자로 여기고 있는 듯 했다.

코후쿠지

 

그 다음에 관심 있는 장소는 코후쿠지이다. 코후쿠지(興福社)에는 웅장한 오층탑, 도콘도 그리고 사루사와 연못 등 아름다운 건축물 등이 있다. 코후쿠지는 669년 가가미노 오오키미가 남편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여 지은 야마시나데라가 시초이다. 코후쿠지(興福寺)는 토다이지(東大寺)보다도 반세기나 일찍 지어졌고 토다이지가 지어지기 전까지는 새로운 수도였던 헤이조쿄(나라)의 대표적인 절이다.

 

 

지금은 옛 모습이 거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그 때 당시에는 절의 규모가 엄청났다고 한다. 이런 거대하고 화려한 절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막대한 권력을 소유했던 가문이 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가문이 '후지와라(藤原)씨'이다. 한마디로 코후쿠지는 후지와라노 집안의 개인 소유의 절인 셈이다. 후지와라 가문은 아스카시대를 주름잡았던 소가씨 가문 다음에 등장하는 최고의 귀족 계급이었다. 여담이지만 소가씨 가문의 조상은 백제라는 설이 있다. 아무튼 엄청난 권력을 등에 업고 지었던 절이 지금 현재의 모습 밖에 남아 있지 않는 데는 그만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메이지유신(明治維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은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보하기 위하여 불교타도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이 '폐불훼석(廢佛毁釋)'이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전통 종교인 신도(神道)와 융합되어 천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신불습합(神佛習合)이 1867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일어나자 신정부의 종교정책에 의해 신(神) ·불(佛)이 분리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메이지 천황이 ‘막부체제’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를 꾀한 변혁운동이다. 이러한 메이지유신이 일어나자 천황의 권력과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계획으로 '국학'을 장려하고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 '천황교'가 국교로 자리 잡게 된다. 결국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제정일치의 사회가 전통신앙이며 천황가(天皇家)의 신앙이기도 한 신도에 의해 운영되는 것을 지향했다. 아무튼 “메이지 유신”의 '폐불훼석(廢佛毁釋)'은 일본인들의 성격과 사고방식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일종에 전체주의 사고가 고스란히 배여 있다. 불교를 숭상하던 일본인들이 하루아침에 불교를 버리고 천왕교를 국교로 전환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편 코후쿠지의 경내 오른 쪽에 오층탑이 있는데 메이지 유신의 대형 태풍인 폐불훼석의 휘호리 바람에도 이 아름다운 오중탑(고주노토)이 남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에 메이지 정부는 코후쿠지에 있는 모든 전각은 불태워 없애버리고 이 오중탑을 팔아버리려고 단돈 25엔(한화 약 250원)에 내놓았다고 한다. 그러자 한 상인이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 오중탑을 사려고 했는데 그러나 탑을 해체하고 쇠붙이를 떼어내는 비용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아서 결국 탑 전체를 태워 쇠붙이만 건져낼 생각을 했는데 쇠붙이만 해도 25엔의 가치는 나간다고 보았다. 그러자 주변에 이웃들이 오중탑(고주노토)을 불태우면 불씨가 날라 온다고 반대를 했기 때문에 결국 오중탑이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 흥미로운 애기이다. 이러한 오중탑(고주노토)이 나라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국보가 되었다는 아이러니한 이야기이다.

코후쿠지(興福寺)는 원래 금당도 3개나 있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동쪽에 있는 동금당 뿐이다. 중금당은 현재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지 가리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또한 고후쿠지에는 일본의 국보급 불상들이 많다. 이러한 불상들은 코후쿠지 안에 있는 국보관에 전시되어 있는 데 그 중에 대표적인 보물이 하쿠호시대의 청동 불두(佛頭)이다. 일본에는 하쿠호 문화라는 것이 있는데 하쿠호 문화는 아스카시대 후반에서 나라시대 초반에 걸쳐 나타난 문화로 이전의 백제 문화에서 벗어나서 신라와 당나라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이고 일본식으로 재해석된 새로운 문화의 한 형태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코후쿠지 옆에 있는 토다이지로 향했다.

 

토다이지 東大寺(동대사)

 

토다이지(東大寺)를 가기 전에 현재의 토다이지의 정문격인 난다이몬(南大門)가 보인다. 난다이몬도 창건 당시의 모습은 사라지고 1180년 화재이후 1203년에 복원된 것이다. 난다이몬 문 역시 웅장하다. 난다이몬 위로는 거대한 금박치미를 올린 지붕이 하나 더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토다이지의 다이부츠(대불)로 유명한 다이부츠덴이다. 토다이지(東大寺)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절이다. 절의 규모도 웅장할 뿐만 아니라 남도(南都) 7대사의 하나이고 높이 47.5m나 되는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태어나서 일 년도 못 살고 죽은 아들을 위해 세운 콘슈지(金鐘寺)가 토다이지의 전신이다. 749년 다이부쓰(大雄殿)가 완성되었지만 1180년 헤이시의 공격으로 불타고 1567년 마쯔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산닌슈의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1709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원래 토다이지는 현재의 토다이지 모습보다는 규모가 3배 정도 큰 절로 알려져 있다. 본존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로 앉은 키 16m, 얼굴 길이가 5m나 되어 속칭 나라 대불(大佛)이라고 한다. 앉은 키가 16m라면 현재의 아파트 높이로 말할 것 같으면 7층 정도에 해당된다. 엄청난 규모이다.  토다이지가 건설된 이유를 잠시 살펴보면 서기 710년경에 일본 조정은 아스카 북쪽에 '헤이조쿄(平城京)'를 건설하여 수도를 옮기는데 그 도시가 지금의 나라(奈良)이다. 헤이조쿄(平城京)는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의 구조를 본 떠 야심차게 건설된 도시이다. 이렇게 헤이조쿄의 나라(奈良) 시대가 열리자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이 강화되고, 귀족들의 화려한 문화도 꽃피우기 시작했지만 얼마 안 있어 인구가 증가하고 농지도 부족하고 세금도 늘어나고 더불어 전염병이 돌아 헤이조쿄 절반이 죽자. 쇼무 천황은 대화엄(大華嚴)사상으로 이를 극복하겠다며 거대한 대불(大佛)제작을 명한다. 이것이 세계 최대 청동 대불로 유명한 바로 토다이지(東大寺)이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8년 만에 거대한 대불을 완성했다고 한다. 452톤의 청동이 들어갔으며 166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 그리고 청동 대불이 완성된 후 금박을 입히는 데 만에도 7년이 걸렸으며 얼굴에만 1년 동안 금박을 입혔다고 한다. 이러한 대불을 자랑하고 싶은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일본 나라는 752년 경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해진지 200주년을 기념해 세계 각국의 주요 국빈을 초청하여 '대불개안공양회'를 성대하게 열어서  대불개안공양회는 불상의 눈에 눈동자를 그려 넣음으로서 불상에 혼을 불어 넣는 의식이다. 신라에서도 700여 명의 승려가 축하사절로 갈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국제적 행사였던 것이다. 토다이지(東大寺)안에 있는 불교 조각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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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장보살상노사나불의 협시불인 허공장보살상(虚空蔵菩薩像)이다. 허공장보살은 광대한 우주처럼 무한한 지혜와 자비를 지닌 보살인 데 높이가 7.1m로, 1752년에 완성되었다. 에도시대의 대표적인 불교조각상이라고 볼 수 있다. 여의륜관음상노사나불의 협시불인 여의륜관음상(如意輪観音像)이다. 여의륜관음은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세간(世間) 출세간(出世間)의 이익을 베푸는 보살이다. 세간의 이익은 금·은·동의 보석을 말하고, 출세간의 이익은 복덕과 지혜를 말한다. 높이는 7.22m로, 1738년경에 완성되었다. 에도시대의 대표적인 불교조각상이다.

 


 광목천왕상대불전 북서쪽 면에 있는 광목천왕상(広目天王像)이다. 왼손으로는 권물(巻物)을 쥐었고, 오른손으로는 붓을 들어 뭔가를 적으려 하고 있다. 에도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나라시대(奈良時代) 양식을 따랐다.

 

다음으로 토다이지(東大寺)와 관련되어 있는 도래인 이야기와 정창원에 관한 이야기로 나라 인문학 여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도래인 이야기

 

4-7세기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이주한 도래인에 관한 이야기로 나라여행을 하고자 한다. 일본에선 귀화인(歸化人)란 말을 많이 쓴다. 다만 도래인이란 말도 쓰긴 쓴다. 물을 건너온 사람이란 뜻인데 일본에선 넓은 뜻으론 해외에서 일본으로 들어온 자라고 하였다. 하지만 역사적인 의미론 주로 4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일본으로 들어온 한반도나 중국 출신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도래인 중에는 선진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우대하였다. 일본은 이들이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후 이들은 주요 가문을 이루었는데, 하타씨, 아야씨 등이 대표적이다.하타(秦)씨는 교토 지방에서 관개 농업을 시작하였고, 우수한 토목 기술로 토지를 개발하였다. 또한, 양잠과 방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고 권력을 누렸으며, 고류 사를 짓기도 하였다. 아야(漢)씨는 마구 제작, 고급 견직물 제조, 철공 등의 뛰어난 기술을 전해 주었으며, 중앙 정계에서 활약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6~7세기에 걸쳐 100년간 일본을 지배하였던 명문가 소가(蘇我)씨 또한 백제와 관계가 깊다. 8세기에 집권한 칸무 천황의 어머니 등 백제 왕실의 자손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왕가와 혼인하기도 하였다. 또한, 백제의 아좌 태자는 일본 고대 회화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는 쇼토쿠 태자의 화상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한반도 도래인은 일본열도의 곳곳에 뿌리를 내려 고대 일본국가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고대율령국가는 성립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세기 이후 일본율령국가의 성립과 함께 신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왜곡되거나 축소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일본으로 이주한 규모에 대해 알아보면 일본으로 이주 규모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하지만 일본인과 한국인이 조상이 같을 만큼 숫자는 아니라는 것이 현재 일본 학계의 정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많은 한국인이 일본으로 이주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총, 균, 쇠의 저자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7세기 일본 인구(540만)의 80% 가량이 기원전 3세기부터 7세기까지 1천여 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이주해오면서 점점 증가했다는 일부 일본 학계의 주장을 주목하고 있다. 기원전 3세기 일본의 인구가 10만여 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벼농사 문화를 가진 한반도의 도래인의 이주로 인해 인구수가 무려 50배나 증가한 것을 보면 일본 야
요이 시대를 연 주역도 한반도에서 이주한 도래인의 세력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 나라는 한국의 역사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창원(正倉院,しょうそういん)

 

 정창원은 즉 쇼소인(일본어:正倉院(しょうそういん))은 일본나라 현 나라 토다이지(東大寺)의 대불전 북서쪽에 위치한 창고로 지금은 대부분 불타고 현재 1동만 남아 있다. 원래 예전의 큰 사찰에는 각종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는데, 현재는 동대사의 정창원이 유명하여 고유명사로 불린다. 정창원에 전하는 유물은 광명황후(光明皇后)가 남편인 성무천황(聖武天皇, 701~756)의 사십구제일(祭日)에 명복을 빌기 위하여 평소 아끼던 600여종의 물품을 토다이지(東大寺)에 헌납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후 황실에서 추가로 기증하거나 토다이지에서 사용한 물품이 포함되어 현재는 약 8천 여 점에 달하는 보물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소장품의 종류로는 조각, 회화, 공예 등 미술품과 각종 생활 유물,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일본의 유물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중앙아시아, 인도 등 여러 지역에서 만들어진 물품들도 있다. 게다가 유물의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고 각각의 유물에 관련된 문헌기록도 있어서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상당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정창원 소장품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정창원(正倉院)

 

문제는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된 유물이 한국과 상당히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기에 소장된 많은 유물들이 통일신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8세기 중엽 일본이 통일신라의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 제출했던 문서의 단편들인『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가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는 당시 황실과 귀족층들이 신라를 통해서 구입했던 다량의 물품이 기록되어 있으며 대략 30여점에 달하는 문서가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 752년, 토다이지(東大寺) 대불(大佛) 개안공양회(開眼供養會)를 개최할 즈음에 700여인에 달하는 대규모 신라 사신이 방문한 기록도 보존되어 있다. 이것은 신라와 일본의 교역이 국가적인 관례 속에서 전개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정창원에는『신라장적(新羅帳籍)』이라는 문서가 남아 있다. 이것 역시 신라의 농촌 구조와 토지제도 등을 연구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문서 외에도 통일신라의 유물로 추정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신라 양가상묵(新羅楊家上墨), 신라 무가상묵(新羅武家上墨)이라고 양각된 두 점이 신라의 먹으로 보인다. 그리고 묵서(墨書)가 있는 베 조각을 실로 꿰매어 단단히 붙여 놓은 모전(毛氈)과 청동가위, 그리고 촛대와 접시, 대접, 숟가락, 가반(加盤), 병 등 여러 종류의 사하리(佐波理) 용기가 전한다. 사하리란 보통 15~20%의 주석을 함유한 청동을 지칭하는데, 고대 일본에서 사용된 さはり라는 용어가 신라의 ‘사발’에 유래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사하리 제품은 신라에서 제작되어 일본으로 수출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정창원의 문헌기록인『국가진보장(國家珍寶帳)』에는 백제와 연관된 내용도 확인되고 있다. 의자왕(641~660)이 일본의 내대신(內大臣)에게 하사한 주자(廚子)와 그 안에 들어있던 물품에 관한 애기가 적혀있다. 물품 가운데 일부인 바둑돌이 들어 있는 은평탈합이 현재 4점 보관되어 있다.

 

지금까지 위에서 언급한 유물들은 한국에서 전래된 유물이라는 생각은 학자들 간에도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그 외에도 통일신라의 유물일 가능성이 높은 유물이 상당수 존재한다. 정창원(正倉院)이 한국에 있는 보물창고가 아니라는 사실에 아쉬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정창원에 남아 있는 유산은 일제 시대나 후대에 해외로 반출된 유물과 성격이 분명 다르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의 선진문화 전파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창원에 보존된 유물들은 우리 선조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기에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2017/8/21 / 혜윰인문학연구소 /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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