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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즐기라(Renounce and enjoy)”: 바가바드기타 (Bhagavad Gītā) 읽기

by 뜨르 K 202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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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즐기라(Renounce and enjoy).”: 바가바드기타 (Bhagavad Gītā) 읽기

 

 

 

이 책은 인도 40일 배낭여행 가기 전 거의 20년 전에 읽었던 책이다. 책에는 여전히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배어져 있어서 필자에게 감회가 새로웠다. 바가바드기타는 국내에 번역한 책은 의외로 많다. 30여 권 이상으로 추측된다. 함석헌옹을 비롯하여 이현주 목사, 길희성 교수 등 다수 사람이 번역과 해설해 출간했다. 필자는 선택한 책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간디가 해설한『바가바드기타』(Bhagavad Gītā)’ 로 이현주 목사가 번역한 책이다. 참고로 이 책《바가바드기타》는 인도의 ‘위대한 영혼’으로 불린 간디가 영국 유학 시절 에드윈 아널드 경의《바가바드기타》 영문 번역서 The Song Celestial을 읽고서 큰 감명을 받고 평생 자기 삶의 확고한 지침서로 삼았다고 해서 유명해진 책이기도 하다. 간디가 해설한 바가바드기타에서 강조한 대목은 대체로 ‘행위’인듯하다. 간디가 이 책을 해설할 당시 인도는 여전히 계급주의 사회였다. 종교 이름으로 인권유린이 극심한 시대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간디는 사람들이 자신이 맡은 소임과 책임을 받아들이고 극복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인도에서『바가바드기타』(Bhagavad Gītā)는 ‘베다’ ‘우파니샤드’와 함께 힌두교 3대 경전의 하나로 꼽히는 철학서이다. 인도인의 영적 지침서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중요한 종교적 고전 중 하나로 ‘경전 중의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인도의 정신을 나타내는 한 권의 책을 선택하라면 이『바가바드기타』를 들 수 있을 정도이다. 아마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무수한 종교철학서 중에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숭앙받는 고전은 아마 없을 것이다. 힌두교의 바이블처럼 말이다. 또한, 바가바드기타는 산스크리트어로 ‘거룩한 자의 노래’란 뜻으로 ‘신(神) 또는 지고자(至高者)의 노래, 또는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5세기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5천 년 전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마하바라타》의 일부분으로서 약칭하여《기타》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기타》는 제6권인《비스마파르바(Bhishma Parva)》25장부터 42장까지 18장으로 700편의 시로 이루어졌다. 주로 철학과 영성(spirituality), 그리고 신성성이 체현된 시이다. 저작자는《마하바라타》의 편찬자인 비아사이다. 8세기 베단타 학자 샹카라 이후 라마누자, 마드바, 발라바 등 여러 비슈누파 철학자들이《바가바드기타》에 대한 많은 논평을 남겼다. 현대에 와서는 마하트마 간디를 비롯하여 오로빈도 고시, A. C. 박티베단타 스와미 프라부파다 등 여러 사람이 비중 있는 주석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만큼『바가바드기타』는 인도인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간디의《기타》해설서에서 무심하고 온전히 헌신적인 사람만이 삶을 즐긴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스물다섯 단어 정도”로 요약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주저 없이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이샤 우파니샤드를 인용해서 “버리고 즐기라(Renounce and enjoy).”고 말했다.

 

바가바드기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골육상잔의 비극에 회의를 느낀 고대 인도 왕자 아르주나가 스승인 크리슈나에게 자신의 고뇌를 털어놓으면서 나눈 대화를 엮은 것이다. 아르주나는 판다바 족의 가장 용맹하고 훌륭한 용사이고 크리슈나는 신의 화신(아바타)이다. 형제간의 피를 부르는 싸움에 뛰어드는 것이 맞는지 고민하는 아르주나에게,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옳다고 크리슈나가 설득하는 내용이 그 대화의 큰 줄기이다. 바가바드기타를 읽다 보면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온통 전쟁 이야기도 그렇고 예매한 문장 등도 한둘이 아니다. 혹시 저자의 의도인가? 아니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하는 여백인가? 필자는 궁금하다.《기타》의 주제도 그렇다. 단순히 브라만(brahman)의 체현과 그 방법들인데도 그 내용을 온통 싸움뿐이다. 싸움과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 전투 자체가 물리적 싸움으로 해석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니면 정신적 아니 영적 싸움의 이야기일까? 이에 간디는 명확하게 접근한다. ‘우리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카우라바와 판다바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으로 내적이고 영적인 전투로 해석한다. 따라서, 마치 필자가 보기엔 싸움의 참여 문제가 아니라, 신앙과 인생에 대한 화두처럼 들인다.

 

간디에 따르면 여기서 싸움은 다만 그 가르침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비아사가 그토록 아름다운 서사시를 쓴 것도 전쟁의 무용(無用)함을 서술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본문 2장에서 18장까지의 토론에서 서사시 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폭력을 대변하지도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 비폭력이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맹목의 사랑이나 증오에 휘둘리지 않으면, 폭력은 생길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기타》는 우리가 분노에 무력해지기를 바라고 세 가지 ‘구나’(guna, 성질)에 영향받지 않는 상태에 이르기를 바란다. 그런 사람은 분노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분별 있는 사람은 폭력을 통해 존재하는 이 육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쓸 의무, 곧 ‘모크샤’(mosksha, 해탈)를 위해 힘쓸 의무를 가르친다. 그리고《기타》에 의하면 우리 존재 안에는 두 가지 충동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두료다나와 그의 동료들의 악마적 충동과 다른 하나는 아르주나와 그의 제자들의 신적 충동이다. 이런 충동의 전쟁 마당이 바로 우리 몸이라는 것이다. 폭력도 몸에서 이루어진다. 이처럼 《기타》의 가르침 속에도 폭력이 들어 있다. 우리 누구든지 재산을 쌓아두고 육체의 쾌락에 빠져드는 사람은 폭력을 행사하면 싸울 것이다. 그렇다고 폭력이 그의 다르마(dharma, 종교의 가르침 또는 법)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우리를 그 폭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을 가르쳐 주면서 먼저, 인간의 본체, 즉 개아(個我)는 영원불멸이며 육체만이 생겨나고 소멸하기 때문에 죽이든지 죽임을 당하다 든 지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각자의 의무는 세 가지의 구나(guna, 성질)의 결합으로 제한되고 인간의 행동은 신의 현상세계를 움직이는 마야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욕망에서가 아니라는 말이다.《기타》에 의하면 일과 본분에 상관없이 각자의 맡은 일을 행하면 그것이 해탈로의 길이라고 가르친다. 행위는 이행하고 결과는 포기하라는 말이다. 행위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 행위의 결과는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위 결과의 포기는 행위의 이행이 있는 다음에야 기능하고 욕심 없는 행동이 가능하여지려면 신에 귀의하고 위임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이 신애(바크티)의 길이다. 마치 인격신의 교의를 주장한 듯하다. 게다가 스승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다르마(의무)의 개념 외에 카르마(행동) 요가, 즈나나(지식) 요가, 박티(신애, 信愛) 요가 등 신에게 이르는 다양한 길을 제시한다. 이제 직접《기타》의 책으로 들어가서 본문과 해설 등을 살펴보자.

 

​행위는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행위보다 훨씬 열등한 것이니, 초연(超然)한 태도에 들어 안도할지어다. 결과를 바라고 행동하는 자야말로 한심한 자들이니라 (제2장 49)

 

초연한 태도에 안식처를 구하면 영적 자각의 부를 축적할 것이고 행위의 결과에 동기부여 된 사람은 비참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 행위의 결과에 끊임없이 조바심을 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간디는 일단 한번 결단이 내려지면 그 일로 더는 논란이 있어서는 안 되고 보상을 바라고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크리 판(kripan)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확고한 목적이 없는 사람은 늘 불안하다고 더 붙인다.

감각의 대상(對象)들을 품에 안고 있는 사람한테서 그것들에 대한 애착(집착)이 솟아나느니. 애착(집착)은 열망을 낳고 열망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마비(麻痹)를 낳고 마비는 기억상실을 가져다주고 기억상실은 이성(異性)을 파괴하고 이성의 파괴는 철저한 파멸을 이끄는 도다. (제2장 62-63)

 

감각을 즐겁게 해주는 대상에 계속 머물다 보면 그것들들에 대한 애착(집착)이 생긴다. 여기서 필자는 애착을 집착으로 대체해 본다. 집착은 마침내 그 바라던 것을 얻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화를 낸다. 그리고 분노는 사람의 눈을 가리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잊게 한다고 해석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렇게 질문하는 것을 잊는다. 마치 송장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감각의 대상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궁극의 파멸을 안고 있어야 한다.

사람은 결코 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행동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즐길 수 없으며, 단순히 행동을 포기함으로써 그 자유를 얻는 것도 아니니라. (제3장 4)

 

단순히 행위를 거절하는 것으로 사람이‘니슈카르미아’(nishkarmya, 행위의 결과를 경험하는 데서 벗어나는 자유)의 상태에 들거나 ‘모크샤’를 성취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라고 간디는 해석한다. 따라서 카르마는 모든 행위를 의미하고 몸으로 하는 동작과 행위가 카르마라는 본다. 심지어 생각까지도 카르마에 들어가고 카르마를 피하는 것도 카르마에 속한다. 그 누구도 한순간을 카르마에서 떠날 수 없다는 결론이다.

공로가 없더라도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남의 일을 해 주는 것보다 나으리라. 자신의 임무를 다하다가 죽는 것이 나으니, 남의 임무는 위험으로 가득 차 있도다. (3장 35)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해석한다. 각자에게는 자신에게 적합한 특별 임무가 있다는 것이다. 청소하는 일, 계산기를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시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자신의 다르마를 가장 훌륭하게 지키고 있다. 어째서 너는 자기가 무거운 짐을 실려 있는 수레를 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처럼 행동하며, 자기 본위로 말을 해야 했는가?라는 말처럼 다르마를 따르다가 어떤 죄를 짓는다면 거기에 대한 책임은 크리슈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나의 본질(essence)은 태어나지 않고 소멸하지도 않거니와 나는 존재의 주인이면서 오히려 내 본성(nature)을 통제하여, 나의 신비로운 능력으로 세상에 태어났느니라. (제4장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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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avatar)은 신의 강화이다. 왜냐하면 신(神)은 모든 존재 모든 사물 속에 현재(現在) 하기 때문이다. 그 모두가 그의 ‘마야’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트만’은 모든 때, 모든 공간에 존재하고 태어난 적은 없다. 우리는 ‘아트만’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우리가 ‘아트만’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고 해석한다. 만일 우리가 그 사실을 안다면 “나”와 “당신”은 한 몸이 된다. 그러나 자기 중심성(egotism)을 버린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행위가 열매 맺기를 바라는 자들은 이곳에서 신들을 예배하나니, 인간들의 세상에서는 행위의 열매가 신속하게 맺히기 때문이다. (제4장 12)

 

모든 욕망에 따라서 그에 부합한 열매를 맺고 조금이라도 욕망이 존재한다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욕망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자기에게 맡겨진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그래서 세상의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한다. 그래서《기타》는 만일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황제의 일과 변소를 청소하는 신(神)의 법정에서 동등하게 평가될 그것이라고 말한다. 에고에 집착하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하게 일하는 사람이고 ‘모크샤’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모든 행실이 욕망과 이기적인 목적에서 해방된 사람, 자신의 모든 행위가 지식의 불꽃에 타버린 사람, 그런 사람을 현자(賢者)는 ‘판티타’(pandita, 자기를 실현한 사람)라고 부르느니라. (제4장 19)

 

자신의 모든 행실이 이기적인 욕망이나 사적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자연발생으로 이루어지는 사람, 그의 카르마가 지식의 불꽃에 따버린 사람, 그런 사람은 카르마에 대하여 목석(목석)같이 되지는 않는다고 해석한다. 오히려 온갖 카르마를 행하면서도 그 모든 카르마를 지식의 불로 태워버린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지식으로 불붙여진 자기 통제의 불에 모든 감각 작용과 호흡을 태워 공물로 드리느리라. (제4장, 27)

 

모든 감각기관의 기능을 멈추고 ‘프라나’의 운동까지, 그리고 호흡까지, 멈추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미동(微動)도 하지 않고‘사마디’(삼매경)에 들어가 ‘아트만’ 속에 확고히 서서 지식의 불로 이 요가를 밝히고 모든 감각 관을 그 불에 태워 공물로 바친다고 해석한다. 마치 모든 감각기관을 정지시키고 ‘아트만’의 통제가 이루어지게 하는 요가의 불을 붙이는 것이다.

행위의 포기와 행위의 성취가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도다. 그러나 이 둘 가운데 카르마 요가(성취)가 산냐사(상키아, 포기) 보다 더 나으리라(제5장 2)
그러나 마하바후여, 요가 아니면 행위의 포기는 행위의 이행 없이는 이루기 어려우니라. 요가로 단련된 금욕 수행자는 머잖아 ‘브라만’을 성취하리라. (제5장 6)
요가를 아는 사람은 행위의 열매를 포기함으로써 영원히 계속되는 평화를 누리거니와 요가에 무지(무지)한 자는 이기욕으로 열매에 집착하여 그 사슬에 묶이는 도다. (제5장 12)

 

아르주나는 질문한다. “세속적인 행위를 포기하는 ‘상키야 요가’ 수행 방법과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카르마 요가’ 수행 방법 중 어떤 것이 더 좋은 길이냐?” 묻는다. 다시 말하면 수행하면서 브라만, 승려, 수도승들과 같이 세속적인 행위를 포기하고 오로지 수행자의 길을 가는 것이 좋으냐? 아니면 세속적인 세상에 살면서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며 살아가는 방법이 좋으냐? 에 대한 물음이다. 이때 크리슈나의 답변은 ‘상키야’ 방법이나 ‘카르마’ 방법 둘 다 지고한 목표에 이르게 한다고 답변을 한다. 마치 우리가 산에 올라갈 때 여러 길이 있지만, 정상은 하나처럼 말이다. ‘상키아’를 통해서 즉, 카르마의 포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경지에 카르마 요기 또한 도달한다는 말이다.

자기밖에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아트만’ 안에서 지복(至福)을 찾는 자는 ‘브라만’과 합일을 이룸으로써 영원한 지복을 누리는 도다(제5장 21)
밖으로 향하는 감각의 대상을 모두 끊어버리고, 눈썹 사이에 눈길을 고정하고 앉아 들숨과 날숨을 고르게 하며 자신의 감각과 생각과 지성(지성)을 놓치지 않고 보는 사람, 동경과 두려움과 분노를 모두 제거하고 다만 자유에 뜻을 둔 사람, 그 사람은 이미 해방된 사람이로다. (제5장 27-28)

 

각각의 모든 사람에게는 아트만이 있다. 그것은 어둠(무명) 혹은 더러움(욕심)으로 가려져 있다. 사람의 아홉 개의 문 즉, 두 눈, 두 귀, 두 콧구멍, 입, 항문, 생식기로부터 오는 행위의 결과에 대해 집착을 하지 않으면 그 지고한 목표에 다다른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행위를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냥 보고, 듣고, 먹고, 마시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자고, 싸고 하면서도 이것은 감각기관이 대상을 만나 반응한다고 알고 그저 행해야 할 일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사람이 감각의 대상이나 행위에 집착하지 않고 이기적인 목적을 버릴 때, 그때는 그는 요강의 고지(高地)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느니라. (제6장 4)

 

감각 대상이나 일 자체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대상을 감지하고 일할 때, 그때 자신의 이기적 동기(動機)를 포기한 그 사람을 두고 요가 안에서 자신을 확립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요기로 하여금 자기 생각을 끊임없이 ‘아트만’에 모으고 조용한 곳에 홀로 머물며 그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욕망과 소유를 버리도록 할지어다. (제6장 10)

 

요기는 언제나 혼자 살면서 ‘아트만’과 하나 되어야 한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욕망을 버리고 소유를 포기하고 명상 속에서 ‘아트만’을 ‘파라마트만’(Paramatman)와 결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몸에 필요한 것을 최소한으로 채워주어야 하고 더 많이 늘리려고 말아야 한다고 해설한다. 몸에 필요한 그것을 늘리려고 하다 보면 우리는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끝없이 반복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육신을 보살피는 데 언제나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힘센 자들의 힘이로되, 탐욕과 욕정에 섞이지 않는 힘이요, 만물 속에 있는 욕망이로되 정의에서 떠나지 않은 욕망이니라, (제7장 11)

 

애착 없이 작용하는 힘을 말한다. ‘다르마’에 모순되지 않는 ‘카마’란 ‘모크샤’를 위한 욕망 또는 중생(중생)의 고통을 끝내주려는 욕망을 말한다. 산스크리트어에서는 남들의 고통을 끝내주려는 욕망을 ‘마하스와르타’(mahaswartha, 최상의 이기주의)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중생의 ‘모크샤(mosksha, 해탈)’를 바라는 욕망이다. 누구든지 이란 욕망을 품은 사람은 자신의 ‘모크샤’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 파르타여. 끊임없는 수련으로 안정된 생각을 품고서, 이리저리 헤매지 않고, 가장 높은 천상(天上)의 존재를 명상하는 자는 그에게로 가느리라. (제8장 8)

 

숨지는 순간에 하면 안 되고 늘 어려서부터 그 방향으로 노력을 한 사람이 전쟁에 승리하게 되고 나머지는 패배한다는 해설이다. 우리 모든 행위가 스리 크리슈나에게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는 열심히 물레질하고 있는데 누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겉으로 보아서는 함께 물레질을 돌리고 있지만, 그들은 함께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열(熱)을 주고, 비를 내리고 거두며, 나는 불사(不死)요 또한 죽음이니라. 오, 아르주나여. 나는 존재면서 비존재라. (제9장 19)

 

이 우주 안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대상(object)과 모든 상태(state)가 다 신(神)이라는 말이다. 신(神)은 모든 것일 뿐 아니라 악한 모든 것이기도 하다. 신은 선이고 악이라는 의미이다. 존재와 비존재, 덕(德)과 죄, 불사(不死)와 죽음, 이것들은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다. 사람에게는 진리가 될 수 없고 오직 신(神)에게만 진리가 될 수 있다.

오, 구다케사여, 오늘 내 몸 안에서 생명 있고 생명 없는 우주 전체를 볼지어다. 하나 안에 있는 모든 것과 그 밖에 그대가 보고자 갈망하는 것들을 볼지어다. (제11장 7)
끊임없이 헌신으로 당신을 예배하는 자들과. 불멸(불멸)의 드러나지 않는 분을 예배하는 자들, 이 둘 가운데 누가 더 나은 요기입니까? (제12장 1)

 

신(신)을 사랑한다는 것과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일에 대한 이기적인 집착 없이, 단순히 신(神)을 사랑하기 위해서 해야 한다고 해설한다. 자기 마음을 오직 내게 비끄러매고, 무상(무상)의 신앙으로 나를 예배하는 자들은 나는 가장 훌륭한 요기로 본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명상은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아트만’을 자각(자각)하고 어떤 사람은 ‘상키아’ 요가를 통해, 어떤 사람은 ‘카르마’ 요가를 통해 자각하느니라. (제13장 24)
다양한 존재들이 모두 하나인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 하나인 것에서 생겨났음을 볼 때, 그는 마침내 ‘브라마’을 보게 되느니라. (제13장 30)

 

제13장은 스리 크리슈나는 장(場)의 본성(nature)과 장(場)을 아는 자의 본성을 설명했다. 자만이 있는 곳에 지식은 없다. 참된 지식을 얻은 사람은 뽐내거나 거만하지 않고, 자기 스승을 바로 섬기며, 순결하고 든든하고 자기를 다스리고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다.

확고하고 한결같은 ‘바크티 요가’로 나를 섬기는 자는 이 ‘구나’들을 초월하여, ‘브라만’과 하나 될 만한 가치가 있는 자로다. (제14장 26)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어쩌면 이번 생(생)에서는 그것들을 모두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로 말미암아 유익이 있으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즉 열심히 노력하면 평화는 그 안에 있다.

이 생명의 세계 안에서 영원한 ‘지바’인 나의 한 부분이 마음과 다섯 감각을 프라크리티 안에 있는 그것들의 장소에서 끌어당기느니라. (제15장 7)

 

(육신의) 주인이 몸을 취하고 버릴 때, 그는 가는 곳마다 이것들을. 마치 바람이 꽃에서 향기를 옮기듯이, 옮기느니라. 자기 자신의 감각들-눈, 귀, 감촉, 맛, 냄새-속에다가 마음과 함께 머물러 있게 하면서 그것들을 통하여 그것들의 대상을 언제나 곁에 두는 도다.

제사와 고행과 자선에 있어서 그 한결같음을 ‘사트’라 하고 이를 목적으로 한 모든 행위를 또한 ‘사트’라 하느니라. (제17장 27)

 

이 모든 행위 앞에 ‘옴’이 있다. ‘사트’는 그 행위들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나타낸다. 우리가 ‘야즈나’와 공물(供物) 바치는 일에 흔들림이 없기를 바란다면, ‘오옴’은 그 개시(開始)를 나타내고 ‘사트’는 그 과정을 나타낸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집착하지 않고, 싫어하거나 좋아하지도 않고, 열매에 대한 기대도 없이 할 때 그런 행위는 ‘삿트만’의 행위라고 일컫느니라. (제18장 23)

 

‘삿트비크’한 사람은 일거리를 찾아다니지 않는다. 무슨 정신으로 하는 게 중요하다. 만일 돈을 벌겠다는 마음으로만 일을 한다면 ‘라자시크’ 한 일이고, ‘아즈나’ 정신으로 세계의 선(善)을 위해 일을 한다면 ‘삿트비크’ 한 일이 된다.

 

지금까지 간디가 해설한『바가바드기타』(Bhagavad Gītā)을 읽었다. 이 책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버리고 즐기라(Renounce and enjoy)”라는 말이다. 책은 온통 버리(포기)라는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버리라는 것인가? 《기타》는 여러 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즈나나(jnana, 깨달음, 지식)’ ‘바크티(bhakti, 신에게 몸을 바침, 헌신)’‘카르마’ 등으로 말이다. 그중에서 ‘카르마’가 가장 핵심적인 내용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다른 요소가 필요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바크티’ 없이 노력만 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고 ‘즈나나’ 없는 ‘바크티’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 ‘카르마’를 행하기 위해서는 ‘바크티’와 ‘즈나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또한, 《기타》는 즐거움을 주지 않는 참된 포기란 없다고 주장한다. 아무도 즐거움 없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기타》가 말하는 카르마는 사람이 자유의지로 이루는 카르마이다. 카르마는 몸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카르마 없이는 그 누구도 살 수 없다. 하지만 카르마는 또한 악과 폭력(violence)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카르마에서, 몸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모크샤’이다. 모든 것이 카르마인 세상을 아카르마(akarma, 무위)의 상태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기타》의 목표인 듯하다. 이 책 해설자 간디가 강조하는 행위를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완전한 몰입이고 둘째로 결과를 바라지 않고 행위 차체에 노력을 두는 것이다. 셋째로 다른 욕심을 품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에 완전히 녹아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행위의 열매와 에고(ego)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가 자신의 몸을 버릴 때, 모든 욕망과 집착이 그칠 때에 남을 섬기고 완전한 평화를 얻을 수 있음을 《기타》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2023/3/16/ 혜윰인문학연구소 /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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