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문학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예술, 종교, 철학 그리고 문학과 역사 가르치고 배우기: 인문학의 미래
요즘 한국에는 인문학이 열풍이 불고 있다. ‘도심 속 인문학’ ‘인문 경영’, ‘소통의 인문학’, ‘도심 속 인문학’, ‘생활 속의 인문학’ 등을 비롯한 ‘인문 경영’이라는 말까지 들린다. 인문학 이름으로 각종 행사와 강연이 넘쳐난다. 드디어 인문학이 대학을 벗어나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서 다행이다. 심지어는 경영학이나 자연과학에서까지 범위를 확대하였다. 이제 인문학을 연구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인문학이 대중화되었음에도 대학의 인문대학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불행하게 우리는 인문학의 유행과 대학 인문학의 위기가 공존하는 현상을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 인문학의 위기의 단적인 예가 바로 인문학 전공 통폐합 문제이다. 저자도 이 문제를 주의 깊게 다루고 있다. 고로 인문학의 위기에 관해서는 저자의 책을 참고했으면 한다. 이 책이 비록 1970년도에 출판한 책이지만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1970년도 미국 상황이 자금에 한국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미래』는 한국에도 세 번째로 번역하여 소개되는 책이다. 1998년 미리내 출판사에서 출간했고, 2011년에 동녘에서, 그리고 2022년 다시 출판사 반비에서 다시 번역하여 출판했다. 물론 필자는 여러 번 출판 사실을 몰랐다. 이 책 저자가 지적했듯이 여러 번 재출판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중심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인문학은 왜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이다. 아주 근본적인 물음이다. 철학과 교수, 편집자, 번역자, 서평가 등 다양한 이력을 지닌 저자답게 1970년대 당시 미국 대학 교양 교육의 현실과 인문학 교육을 통해 예리하게 진단하며 질문한다. 인문학자는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 인문학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등 다각적인 질문 말이다. 이런 질문 바탕 위에 그는 인문학 교육의 목표, 비판적인 독서 방식, 종교 교육 및 학제 간 연구의 중요성을 이 책에 담아냈다. 저자에 의해 분류된 네 가지 종류의 정신, 읽기의 기술, 서평의 정치학, 번역과 편집의 윤리학, 고등 교육에서 종교의 위치, 선견은 가르칠 수 있다. 하지만, 학제 간 시대 등을 차례대로 살펴보자.
네 가지 종류의 정신
저자는 먼저 “네 가지 종류의 정신”을 언급한다. 즉 인문학자의 네 가지 유형을 분류함으로써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을 펼친다. 선견자, 현학자, 언론인, 소크라테스 유형이 바로 그것이다. 선견자란 문자 그대로 선견(vision, 통찰가)을 가진 인물로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가기 때문에 종종 대중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다. 선견자는 기존의 언어나 합의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고 자신의 의견을 상술하기를 좋아한다.
현학자가 들어가서 다양한 퍼즐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전체 틀을 의문시하는 사람이 바로 선견자다.
현학자(사변가) 유형은 ‘현미경주의’이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와 유사한 유형으로 이들은 엄밀함을 강조하지만, 자칫 사소함에 매몰될 수 있다. 저자는 현학자 일변도의 현실을 비판한다. 학문연구에서 활력과 생기를 되찾기 위해서는 대안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언론인은 즉각적 소비를 위한 글을 쓴다. 언론인(저널리스트) 유형은 그 특성상 엄밀한 검토나 연구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가령 한나 아렌트의《전체주의의 기원》의 주요 개념인 ‘악의 평범성’이 당시 끊임없이 뉴스에 등장하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순간적인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저널리스트 유형의 저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필자는 이 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전체주의의 기원》의 ‘악의 평범성’은 순간적인 읽을거리가 아니라 상황의 근거를 가지고 하나의 이론을 정립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 유형이다. 일종의 비평가이다. 이 유형을 저자는 가장 모범적인 유형으로 본다. 소크라테스에서 알 수 있듯 기존의 합의와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소크라테스는 현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외톨이였고, 당대의 상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자신의 상견을 상술하지 않았다. 그는 선견자가 되지 않을 것을, 그리고 사실상 반(反) 현학자가 되는 것을 핵심으로 삼았다. 그는 당대 믿음과 도덕을 검토했고, 합의에 대한 무비판적인 의존에 근거한 지식의 주장을 조롱했고, 대부분 사람이 얼마나 무지하고 혼미하고 잘 속는지를 보여주려 애썼다. (p.43)
소크라테스 유형은 가장 필요한 존재인 동시에 가장 희귀한 존재라고 언급한다. 저자가 굳이 네 가지 유형을 언급한 이유는 전문가임을 자처하는 인문학자, 인문학 대학의 교수들, 인문학 행정가들의 위치와 역할을 다시 묻는 것이 곧 인문학의 위기를 타진할 방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유형들 모두 각각의 필요와 장점을 갖고 있지만, 현대 대학 현장에서 주로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는 이들이 현학자(사변가) 유형으로 채워지면서 선견자(통찰가)와 소크라테스 유형이 설 자리를 잃게 됐다고 비판한다. 더는 인문학을 왜 가르쳐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주 좁은 분야에만 몰두하거나, 유행하는 이론을 따라가는 꼴이다. 그래서 저자는 무엇보다 토론과 비판 능력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소크라테스 유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어떤 유형이 우월하다는 가치판단이 아니다.
읽기의 기술
저자는 글을 잘 읽는 것이 학생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학생뿐만 아니라 인문학자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읽기는 인문학의 핵심이며 또한 사회과학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학생은 읽기를 잘 배우지 못했다.
저자는〈읽기의 기술〉에서 텍스트를 읽는 방식을 주해적 독서, 독단론적(dogmatic) 독서, 불가지론적 독서, 변증법적(dialectical) 독서인 네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로, 주해적 독서는 자기가 텍스트에 권위를 부여하고, 자기 생각을 투사하여 텍스트 읽는다. 둘째로, 독단론적(dogmatic) 독서는 자기 폭로를 회피하고, 대안과 반대에 눈을 감는다. 즉, 다른 텍스트 읽기를 거부한다. 셋째로, 불가지론적 독서는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저자도 마찬가지라는 접근법이다. 넷째로, 변증법적(dialectical) 독서이다. 그중에서 텍스트의 저자와 대화를 시도하고, 시대 배경과 연결해서 이해하는 ‘비판적/변증법적 독서’를 강조한다. 예를 들면 한 작품뿐만 아니라 그 작가의 전체 작품, 그 작가가 속한 역사적 배경 등 종합적 읽기를 말한다. 저자는 철학자 하이데거를 비판한다. 하이데거가 종합적 읽기인 변증법적 읽기로서가 아니라 주해적 독자라서 니체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변증법적 읽기의 필수 요소는 바로 문화 충격이다. 자신을 스스로 다중적인 문화 충격에 노출한다. 반면에 주해적인 독자는 이를 회피한다. 그 외에도 대화적 요소와 역사적, 철학적 요소 있다. 소크라테스적 요소와 두 요소가 하나로 융합되어야 진정한 변증법적 독서라고 주장한다.
서평의 정치학, 번역과 편집의 윤리학
사회 안에서 저자와 독자 사이에 지식을 유통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종의 지식유통업자이고 중개상이다. 흔히 서평가, 번역가, 편집자 등을 일컫는다. 현대의 독자는 그들에게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저자는 이러한 중개자에게도 자기 일을 견주어볼 수 있는 윤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출판물에 무엇을 집어넣을 것인가, 어떤 텍스트에 관해 다룰 것인가, 무엇을 번역하고 어떻게 편집할 것인가의 문제는 아주 중요해진다. 또한, 저자는 식별 능력이 없는 편집자는 특정 학파의 편중 지면을 만드는 등 문제의 심각성을 찾아낸다. 특히 서평에 다양한 잡지의 신간 서평에 숨어 있는 학파 간의 권력도 읽어낸다. 이런 권력이 발생한 이유는 강력한 홍보 방법이자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정치적 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평가, 번역가, 편집자 등에게 엄밀성, 정확성,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라는 것이다. 그리고 번역자의 경우 저자의 목소리를 최대한 포착해야 하는 의무, 그 과정에서 상실되는 원문에 관해 독자들에게 설명할 의무에 대해서도 논한다. 무엇을 번역하는가의 문제는 곧 출판사의 출판 목적과 결부되고, 어떤 책을 서평으로 다룰 것인가의 문제 역시 편집자의 판단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역시 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번역자가 화려한 문체를 무디고 지루한 표현으로 바꿔놓는다거나 저자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말하도록 만든다면, 번역자는 저자에게 제대로 봉사하지 못하는 셈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어떤 지식을 독자들에게 왜 소개하는지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지식을 보전하고 육성하는 인문학의 책무이고 인문학의 미래를 움직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똑같은 고전을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반복해서 출판하고, 자신의 논문 주제임에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번역본에 의존해서 글을 쓰고 발표하는 행위, 그리고 저자의 모든 작품을 전집으로 담는 식의 출간 방식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편집 과정에서 갖추어야 할 식별 능력으로 작품을 비판적으로 선별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등 교육에서 종교의 위치
또한, 저자는 평소 이 세상에 종교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없다고 할 만큼 종교라는 단어에 비중을 두었다. 또한, 종교 교육이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점검하는 데 가장 유용한 도구라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종교는 서구사회에서 문명을 이끌어온 힘으로 본다. 왜냐하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창세기〉를 중요하게 꼽으며, 성서로 할 수 있는 10주짜리 강의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죽음’, ‘처벌’ 등과 같이 인간존재에 관해 탐구할 수 있는 주제로 한 학기를 진행해 보라고 제안한다. 수업에는 문학, 미술, 철학 등을 돌아가면서 다루면서, 주제를 여러모로 생각하게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학생들은 공부하는 방법과 생각하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 역시 학생들이 추구했던 것을 되돌아보며, 대안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곧 선견을 가르치는 일이며, 인문학의 존재 이유기 때문이다.
선견은 가르칠 수 있다. 하지만...
《인문학의 미래》를 관통하는 핵심어 중 하나가 ‘선견’이다. 저자에게 선견은 비판 정신과 상통한다. 앞에서 언급한 ‘소크라테스 유형’과 ‘변증법적’ 독서도 결국엔 선견과 관계가 있다. 인문학 교육은 양심 있는 시민, 즉 비판 정신을 지닌 시민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인문학의 목적도 고로, 선견을 가르치고 비판적인 정신을 육성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문학자와 학생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법, 사회제도, 의학 등 여러 분야에 인문학의 선견과 비판 정신이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이다. 그리고 이런 협력과 기여를 외면할 때 인문학에 미래가 있을지 의심스럽다.
또한, 인문학은 “진지한 문제들에 대해서 더 나은 이해를 얻도록, 그리하여 우리가 더 인간적으로 되도록” 도울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겨냥하는 일차적으로 독자이지만, 변화를 촉구하는 대상은 일명 ‘인문학자’이다. 인문학이 침몰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목표를 잃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저자는 인문학을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힌다. 첫째, 위대한 고전을 보전하고 양육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학생들이 목표를 숙고하고 다른 대안에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선견(vision)을 가르치기 위해서이고 넷째, 비판적인 정신을 길러주기 위해서이다. 저자는 책에서 이 네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고심하고 어떤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자 길잡이다.
학제 간 시대
또한, 저자는 지나치게 분절되고 전문화된 대학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학제 간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저자는 “학과별 접근법은 항상 추상적이게 마련이다.” 라고 언급하면서 “인류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주요 주제로 다루는 강의를 통해 이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주제 영역은 인위적으로 제한될 수 있으면, 세부적인 특성은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형벌’이라는 문제를 놓고 한 학기의 수업을 구축한다고 하자. 이 통합 강의에는 철학, 종교, 고전학과의 그리스 비극, 러시아 소설, 정치 이론과 심리학과 사회학과 인류학, 법학 등 여러 분야의 교수들과 문헌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에 더해 학생들이 직접 재판을 방청하고, 관련 예술 작품으로 강의를 보충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가 예시하는 또 다른 주제는 ‘죽어감’이다. 이 역시 다양한 학문 분과에서 필수로 다루어지는 주제다. 이 강의에서 괴테와 릴케 등이 쓴 죽음과 관련된 시, 케테 콜비츠와 같은 예술가의 작품을 과학과 의학의 문제와 밀접하게 다룸으로써 죽어감이라는 문제를 숙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다각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학제 간의 연구가 학문연구에 있어서 필요하다. 왜냐하면 실(失)보다는 득(得)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도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동료들에게 학제 간 연구 필요성을 설득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학제 간 연구를 통해 학생들은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운다. 또한, 여러 측면에서 주제를 살펴볼 수 있고 게다가 현실 문제와의 관련성을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는 “인문학은 왜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이다. 아주 근본적인 물음이 왜 필요한지 저자의 책에서 살펴보았다. 인문학에 잘못된 부분을 진단하고 인문학을 어떻게 가르쳐야 마땅한지를 제안한다. 저자는 한마디로 소크라테스적 자기비판이라고 역할이 이 사회에서 거세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진지한 성찰을 촉구한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 인문학자 대다수는 거머리의 두뇌만 연구하는 자라고 비난한다. 무엇을 공부하는지, 왜 공부하는지를 잊어버렸고 진지한 비판 정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인문학이 선견을 가르치고, 목표를 숙고하고 대안에 관심을 기울이고, 비판 정신을 육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2023/2/13 혜윰인문학연구소/ 뜨르
서론
1장 네 가지 종류의 정신
2장 읽기의 기술
3장 서평의 정치학, 번역과 편집의 윤리학
4장 고등 교육에서 종교의 위치
5장 선견은 가르칠 수 있다. 하지만…
6장 학제 간 시대
감사의 말
개정판 서문(솔 골드워서)
해제│소크라테스적 질문을 되살리기 위한 브레이크는 어디에?(조형근)
옮긴이의 말│21세기에 다시 묻는 인문학의 미래(박중서)
■ 추천사
카우프만이 30년 전에 분석한 미국의 상황이 작금의 한국 대학에서도 반복되는 것이 안타깝다. 학문과 교육은 반드시 선견(비전)을 추구하고 목표를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 대학과 인문학은 인간에게 무엇이 귀중한 가치인지 묻고, 그것을 어떻게 보존하고 발전시킬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인문학자와 교육자가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는지 의문스럽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만의 확고한 대답하고 있는 지도 분명치 않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학문과 교육이 맹목적이고 허무주의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돈과 연구자들만 있다고 학문의 수준이 높아지고, 창조적 업적이 자동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자나 교수들의 선견에 대한 갈증과 미래의 인류를 위한 탐구의 열정과 진정성이다. 이런 몇 가지 점만으로도 이 책은 한국의 인문학자와 교수들, 대학생들, 교육 행정가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줄 수 있을 것이며, 반드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 박이문(철학자,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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