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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인문학▣/인문학읽기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이란 무엇인가?

by 뜨르 K 2022.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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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이다. 교양있는 사람은 인문학책 몇 권 정도 읽어야 할 것 같다. 때론 우리는 인문학이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여긴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작, 인문학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잘 모른다. 사전에서 인문학은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정의한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인문학’이라는 개념과 고대로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인문학’이라는 개념은 여러 면에서 결이 다르다. 우리가 현재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인문학이란 말은 원래 19세기 독일학자로부터 유래한다. 이 말은 문법, 시, 수사학, 철학, 역사 등의 고전 텍스트의 학문을 지칭하는 개념이었다. 문·사·철 말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인문학의 출발을 보면 기원전 55년경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그리스인들이 교양을 쌓기 위해 배웠던 웅변술(수사학)과 같은 것들을 인간다움의 지표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교양’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를 인간다움을 의미하는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단어로 번역하였다. 교양을 갖춘 사람이 인간다운 사람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후마니타스’였던 것이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가 교육프로그램 만들 때 원칙으로 삼았던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처음 유래했다.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말을 만든 사람도 정치가 키케로이다. 키케로에게 이상적인 인간이란 인문 교양을 두루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이 말이 뒤에 교양 교육(liberal arts)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문학의 주요 범주는 산술(算術, arithmetic)과 천문학(天文學, astronomy) 문법(文法, grammar)과 수사학(修辭學, rhetoric), 논리학(論理學, logic), 음악(音樂, musicology)이나 기하학(幾何學, geometry) 등이었다. 이 시기의 인문 교육은 일종의 지도자 교육이었다.

 

 

 

 

이러한 인문학은 서양 중세 시대에서는 문법, 수사학, 논리학의 3학(트리비움: trivium)과 산술, 기하, 음악, 천문학 등의 4과(퀘드리비움: quadrivium)을 묶어 자유 학문(liberal arts)이라 칭했다. 중세 인문학 교육은 주로 사제교육이었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기존 7과목에 역사(고어)와 문예(문학) 등이 추가되었다. 르네상스는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회복하자는 ‘인문주의(humanism)’ 운동이 일어났을 때 ‘후마니타스’라는 말은 다시 주목받았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선구자는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이다. 그는 사실상 르네상스 시대를 연 최초의 인문주의자이고 키케로의 인문학을 수용하여 인간 연구(studia humanitais)에 초점을 맞추어 학문으로 발전시킨 사람이다. 이제 신 중심적 부정적 인간관을 극복하고 고전적인 개념의 인문학 전통을 이어받는다. 인문학이 인문과학(studia humanitatis, 인문교육)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인문과학(studia humanitatis)은 일종의 ‘인간성 함양을 위한 공부’을 의미한다. 주로 철학, 문학, 역사, 어학, 예술을 일컫는다. 요즘 대학으로 말하면 liberal arts(인문대학, 문과대학) 즉 문·사·철이다.

 

 

흔히 우리는 자칫 대학에서 일컫는 문·사·철을 인문학 영역 전부라고 여긴다면 인문학의 범위를 축소될 수밖에 없다. 필자에게 인문학은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에 관한 탐구이다. 동물이나 자연 말고 인간 말이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은 자연과학(自然科學, natural science)의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사회과학과도 다르다. 자연과학은 객관적인 자연현상을 다루는 학문으로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현상에 대해 경험적으로 접근 또는 특정한 법칙을 유도한다. 하지만 혹자는 자연과학도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 이유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도 결국 인간을 위한, 인간을 의한, 인간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타당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통해서 인문학의 개념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인문학이 인간에 대한 학문인가? 아니면 인간에 의한 학문인가? 물음에서 말이다.

 

전자는 대학의 인문학으로 문학, 역사, 철학을 말하고 후자는 신학(神學, theology)을 넘어서는, 아니 상반되는 개념으로 르네상스 인문학이다. 휴머니티스도 르네상스 이후 인문주의자들에 의하여 재발굴된 라틴어 단어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유래한다. 이것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라는 이성주의(Rationalism)의 영향이 크다. 이제 신 중심의 세계관 대신해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전환을 의미한다. 이처럼 ‘합리적 이성’에 바탕을 둔 인간이 가진 사유 그 자체의 기능을 학문의 중심에 두게 되었다. 만약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면 대상이 자연현상인 자연과학(自然科學, natural science)은 인문학이 될 수 없다. 필자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반대로 인간에 의한 학문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인문학의 영역이 광범위해질 뿐만 아니라 개념의 모호성 늪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liberal arts도 수학과 자연과학 같은 인문학에 포함되지 않는 기초 학문을 폭넓게 아우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인문학을 일컫는 단어도 Humanities와 Liberal arts가 혼용되어 쓰고 있고 융합형 인재교육의 명목으로 자유전공학부를 통해 간 학문적 교육을 시도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정확히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이란 무엇인가? ‘인문(人文)’을 한자를 분리하여 풀이하면, ‘인간(人)’과 ‘문(文)’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人)은 사람인으로 말 그대로 인간이고 ‘文’은 글월 문(文)이다. 문(文)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낸 문자나 문화를 일컫는다. 일종의 무늬 말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인간 삶의 무늬(흔적)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인문학을 인간을 위한, 인간을 의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학문으로 한정하고 싶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후마니타스(humanitas)’는 ‘인간다움’을 스튜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는 인간다움에 관한 연구 혹은 인간에 대한 학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성찰 없는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이 ‘인간다움’을 담보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만약 인문학이 인간다움을 모색하는 노력이라고 한다면 인간 무한한 욕망의 도구로 여기는 것을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혹자는 인문학을 인간의 변하지 않는 가치를 성찰하고 그것을 탁월함으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앎과 삶의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문학의 방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필자에게 인문학이 무엇인가? 라고 다시 묻는다면 두 가지 점을 염두에 두고 싶다. 첫째로 인문학은 인문학을 통해 인간다움에 근접할 수 있고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 해주는 학문이 되어야 하고, 둘째로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은 성찰하는 사유의 토론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즉 비판적 사유 말이다. 만약 인문학이 사유의 성찰과 비판적 사유가 없다면 인간의 ‘인간다움’은 무게감을 잃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모든 과거의 문헌을 재해석, 재평가하여 새로운 인식과 대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인문학이란 인간다움의 새로운 가치를 탐구하는 학문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22/9/16 혜윰인문학연구소 /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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