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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Müdigkeitsgesellschaft)』읽기 : 현대사회 긍정성 과잉의 폭력과 우울증

by 뜨르k 2022.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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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Müdigkeitsgesellschaft)읽기 : 현대사회 긍정성 과잉의 폭력과 우울증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의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 못한다. 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

요새 카페나 음식점에 가서 인증사진을 찍은 후 SNS에 올리는 일이 많은 사람에게 필수코스가 되었다. 또한, SNS에서 회자하는 이야기를 모르면 대화에서 소외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친구를 만나면서도 쉴 새 없이 SNS에 들락날락한다. 중독이 심하면 SNS에 날마다 글을 올리고 올린 사진에 ‘좋아요’와 댓글에 대한 반응을 수시로 확인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SNS에 접속한다. 이런 행위 자체가 자신의 게시물에 타인의 긍정적 반응이 긍정성 강화를 일으켜 중독으로 연결되고 또한 지속적인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실제로 실험에서 SNS에 중독된 사람들이 SNS를 할 때 뇌 영상을 확인한 결과 코카인 중독자가 코카인을 흡입할 때와 같은 변화를 보였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대다수 현대인에게 나타난다.

그래서 SNS에 대한 강박과 집착으로 인한 증상을 말하는 신조어도 생겼다. 아직도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이나 청소년이 겉으로는 어른 같지만 실제로 정신상태는 미성숙을 일컫는 “인공성숙” 현상, 휴대전화 없이 생활하는 것을 두려워할 때의 심리적 상태를 뜻하는 “노모포비아(Nomophobia)”증후군, 세상 흐름에서 자신만 흐름을 놓치거나 소외되는 것에 대한 불안 증상으로 일종의 고립공포감인 포모(FOMO·Fear Of Missing Out)증후군 등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언급하고자 하는 초점은 단지 SNS 중독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SNS에 자신이 올린 게시물이 ‘좋아요’와 감탄사나 댓글이 많이 달리기에 집착하는 긍정성 강화 즉, 긍정성 과잉의 부작용이다. 마치 『피로사회』가 말하고자 하는 긍정성의 과잉처럼 말이다. 긍정성의 과잉은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넣고 우리 스스로를 마모시킨다는 것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저자는 국내에서 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을 공부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현재 독일에서 교수로 활동 중이다. 독일에서 ‘피로 사회’가 출판될 당시 베스트러에 오를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이 책은 저자가 독일어로 쓴 책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저자는 거의 해마다 한국을 찾았다고 한다. 거기서 ‘피로한’ 한국 사회를 보게 된다. 짧은 시간에 근대화를 이루어야 했던 한국 사회는 과다한 노동과 빠른 성과 창출을 요구했고 사람들은 점점 자신을 착취하기 시작하며 지쳐간다는 현상을 발견했다. 필자가 볼 때도 한국 사회를 정확히 진단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저자는 왜 현대 사회의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는가? 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이에 대한 대답을 철학적으로 명쾌하게 제시한 책이 바로『피로사회』이다.  필자가 『피로사회』라는 책을 읽었을 때는 오래전 일이다. 책 두게도 얇고 그래서 쉽게 읽힌다는 착각을 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읽어도 여전히 쉬운 책은 아니다. 그 이유는 여러 사상이 녹아있는 철학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거론한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면역성 이론, 장 보드리야르:폭력이론, 미셸 푸코: 권력에 대한 분석-규율사회, 알랭 에랭베르: 우울증, 발터 벤야민: 깊은 심심함, 데카르트: 경이감, 폴 세잔: 탈내면화, 한나 아렌트: 활동적 삶, 니체: 사색적인 삶, 키케로 카토의 경구, 조르조 아감벤: 허먼 멜빈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존재신학적 해석, 페터 한트케: 피로에 대한 시론, 프로이트: 자아, 칸트: 도덕성 리처드 세네트, 나르시시즘적 장애 등이다. 필자에게도 아는 사람도 있고 전혀 모르는 사람도 눈에 띈다. 아무튼, 저자는 위에서 언급된 사람들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 개념과 논리의 오류를 지적하고 탁월한 비판력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간다.

저자는 첫 장에서 신경성 폭력에 대해 언급한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고 말한다. 과거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적이었다면 21세기에는 신경적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 증후군 등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질병이 전염성 질병이었다면 21세기 질병은 경생적 질병으로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라고 진단한다.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면역학은 그러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은 아니다. pp. 18-19 신경성 폭력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퍼지며 그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보다도 눈에 덜 띈다. 긍정성의 폭력이 깃드는 곳은 부정이 없는 동질적인 것의 공간,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 … 신경성 폭력은 어떤 면역학적 시각에도 포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부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privativ)하기보다 포화(saturativ)시키며, 배제(exklusiv)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exhaustiv)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 지각되지 않는다. p. 21 신경성 폭력

그러면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긍정성 과잉이다. 근대까지 서양 사회를 지배해온 부정성의 패러다임, 즉 면역학적 패러다임 -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타자에 대한 거부-등이 20세기 말부터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 성과. 자기 주도, 괴잉, 타자성의 소멸- 등으로 전환되었거나 전환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논리이다. 20세기까지의 사회는 규율사회였다. ‘~을 해서는 안 된다,’ ‘~을 해야 한다,’ 등 권위의 목소리 지배와 규율에 예속된 사회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복종의 주체이다. 그러나 21세기 이후, 오늘날에는 성과사회, 성과 주체 사회라고 저자는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 역시 ‘성과사회’로의 지향이라는 보고 있다. ‘~을 하지 마라’라는 말 대신에 ‘당신은 뭐든지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지배하는 긍정의 과잉 사회 말이다. 이런 사회는 긍정적인 것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판단하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인식한다.

일종의 냉전 종식, 다문화주의, 바이러스성 질병의 효과적 퇴치, 규제와 억압의 철폐와 개인적 욕망의 긍정 등이 긍정성의 패러다임에 속한다. 긍정성의 패러다임은 마치 포스트모더니즘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제동을 건다. 무한한 긍정의 가능성을 열어둔 사회는 오히려 더 폭력적인 사회일 수 있다는 것이다. 더더욱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갈 수 있다고 진단한다. 또한, 성과 주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면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마모시켜간다. 그 결과 자신을 스스로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가 넘쳐난다. 실제로 성과를 위해 약물도 불사하고 도핑 주체도 증가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제 주체는 오히려 무한한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다. 이는 금지, 강제, 억압의 철폐, 타자에 대한 관용의 확대가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유토피아로 이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니체에 의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회는 자유와 강제가 동등하다. 그러기 때문에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을 혹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착취는 결국 스스로가 자유롭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왜냐하면, 타자로부터 착취 받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저자의 지문을 직접 읽으면서 음미해 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저자는 규율사회를 부정성의 사회라고 말한다. 일종의 금지 부정성이다. 그래서 ‘노(no)’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우울증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난다. 성과사회의 오직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명령이 우울증을 낳고 성과에 대한 압박은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 결국, 규율사회는 광인과 범죄자를 낳고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본문을 음미해 보자.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능력(Konnen)의 긍정성은 당위(Sollen)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 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다. p. 24-25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animal lav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 성과 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pp. 27-28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 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pp. 28-29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또한, 저자에 의하면 이런 성과주의가 결국, 피로의 만성질환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진 특권은 무한 긍정이 아닌 부정이라는 역설적인 문구들을 여러 곳에 심은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는 머뭇거림 또한 인간으로서 가진 깊은 사유에 대한 행동으로 설명했다. 인간이 아무리 시대가 발전해도 기계는 굴려야 하는 대체 제품이지 기계가 되려 하면 안 된다고 것이다. 이러한 성과사회의 문제점으로 저자는 사색의 능력을 잃는다는 것이다.

멀티태스킹은 …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 … 동물들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까닭에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먹이를 먹을 때도, 짝짓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pp. 30-31 깊은 심심함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 가고 있다. p. 32 깊은 심심함
걸으면서 심심해하고 그런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거나 이런저런 다른 활동을 해볼 것이다. 하지만 심심한 것을 좀 더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어쩌면 걷는 것 자체가 심심함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그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움직임을 고안하도록 몰아갈 것이다. p. 33 깊은 심심함
인간은 사색하는 상태에서만 자기 자신의 밖으로 나와서 사물들의 세계 속에 침잠할 수 있다. … 존재를 의지로 대체한 니체조차 인간에게서 모든 관조적 요소가 제거된다면 인간의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끝나고 말 것을 알고 있었다. p. 35 깊은 심심함
존재를 의지로 대체한 니체조차 인간에게서 모든 관조적 요소가 제거된다면 인간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끝나고 말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pp. 35-36 깊은 심심함

 

​니체는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원의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경우에, 활동적인 사람들은 게으르다. 컴퓨터는 다양한 수 그리고 식을 빠르게 틀림없이 계산해낸다. 목적 지향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망설일 줄을 모른다. 다만 아무 사유 없이 그 일만 수행할 뿐이다. 쉼과 망설임 없이 빠르게 자신을 몰아치는 것이 우울증을 만든다. 저자는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여 ‘깊은 심심함은 경험이 알을 품고 있는 새’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잠이 육체적 이완이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라고 소개한다. 또한,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활동적 삶을 비판적으로 해석한다. 근대가 낳은 노동하는 동물에 대한 아렌트의 주장은 성과사회의 관찰 결과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근대를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 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라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런 강제 사회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니고 그 안에서 지배 없는 자기 자신의 착취가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다시 본문을 탐독해 보자.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간 삶을 극단적인 허무 속에 빠뜨린다. … 세계 자체도 그러하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p. 41 활동적 삶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날 진행 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동 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강제 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우울증,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 증후군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나치 수용소의 무젤만과 유사한 증상을 나타낸다. p.43 활동적 삶
​근대의 부정적인 발전으로 인한 손상을 가장 덜 입은 것이 사유라는 것이다. 비록 세계의 미래가 사유보다는 행동하는 인간의 힘에 좌우될 터이지만, 사유도 우리의 미래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는 활동적 삶의 활동 가운데서도 가장 활동적이며 순수한 활동성의 면에서 모든 활동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 여기에서 강조하는 활동성은 오히려 후기근대적 성과사회의 활동 과잉과 히스테리를 많이 닮은 것처럼 보인다. p.45 활동적 삶

또한, 저자는 사색적 삶은 특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니체를 인용하며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래 천천히 볼 수 있는 능력 말이다. 머뭇거림도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마치 컴퓨터가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저자에 따르면 가속화와 활동 과잉은 분노하는 법을 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활동 과잉과 분노는 양립할 수 없고 넓은 시간적 지평을 용납하지도, 부정적 태도도 싹틀 여지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분노는 짜증과 다르다. 짜증은 공포지만 분노는 불안이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정성 결핍과 긍정성 과잉인 사회인 성과사회와 활동 사회는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을 동반할 수 밖에 없다.  본문을 읽어보자.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는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 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실상 활동 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림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활동적 인간의 주된 결함』이라는 아포리즘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쓴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 돌이 그루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음에 걸맞게 굴러간다." p. 48-49. 보는 법의 교육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하여간다. …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 사회의 긍정성이 증가하면서 불안이나 슬픔처럼 부정성에 바탕을 둔 감정, 즉 부정적 감정도 약화한다. 사유 자체가 “항체와 자연적 면역성으로 이루어진 그물”이라면, 부정성의 부재는 사유를 계산으로 변질할 것이다. pp. 50-52. 보는 법의 교육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 오라고 말할 힘이다. … 무언가를 할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 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p. 52 보는 법의 교육

저자는 허먼 멜빌의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을 인용하여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한다. 이 소설에 대한 해석은 형이상학 관점이나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했지만, 저자는 병리학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소설의 내용은 ‘월(Wall)가 이야기’로 비인간적 노동 세계를 담고 있다.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사무실의 분위기를 그려낸다. 창에서 3m도 안 되는 거리에 ‘오래되고 늘 그늘져서 검게 변한 높은 벽돌벽’ 에 음울하고 반생명적인 마치 수직 갱도처럼 느껴지는 업무공간 말이다. 변호사의 조수들은 과도한 활동으로 인하여 신경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과도한 공명심을 가진 조수 “니퍼”는 소화불량으로 고통받고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라고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바틀비 역시 신경쇠약증에 걸려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이 소설 역시 탈창조인 메시아적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탈진(Erschopfung)에 대한 이야기라도 보고 있다.

허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 ‘월Wall가의 이야기’가 묘사하는 것은 모든 주민이 노동하는 동물로 전락해버린 비인간적 노동 세계이다. … 신경증적인 과다활동성과 과민함을 드러내는 이들 인물은 침묵하며 돌처럼 굳어 있는 바틀비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 바틀비는 신경쇠약의 특징적인 증상을 보인다. … 아무런 의욕도 없는 무감각 상태의 징후이다. pp. 55-56. 바틀비의 경우
벽은 언제나 죽음을 연상시킨다. 가장 대표적인 규율사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두꺼운 담장으로 둘러싸인 감옥은 멜빌의 소설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티브이다. 멜빌은 이를 툼즈(Tombs), 즉 무덤이라고 부른다. 그는 복종적 주체이다. … 후기근대적 성과사회의 표징인 우울증의 증상 … 끝없는 자책과 자학은 그에게 낯선 것이다. 그는 ‘너 자신이 되어라’라는 후기근대적 성과사회의 특유한 명령에 부딪힌 적이 없다. p. 57 바틀비의 경우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라는 바틀비의 상용구는 결코 기독교적·메시아적 의미로 해석될 수 없다. 이 "월가의 이야기"는 “탈창조(Ent-Schopfung)”의 이야기가 아니라 탈진(Erschopfung)의 이야기다. pp. 63-64. 바틀비의 경우

 

저자는 피로에 대한 정의도 새롭게 정의한다. 긍정적인 힘의 피로는 우리가 더는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드는 피로다. 반대로 부정적인 힘의 피로는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영감을 주는 피로라는 것이다. 즉, 무위의 피로이다. 종교로 말하면 안식일이다. 안식일은 목적 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해방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은 즉 무위의 날, 즉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이다. 마치 아이들이 신나게 물놀이하고 와서 지쳐있는 그 상태 즉, 무언가 집중하고 나서 지쳐있는 그 상태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그 피로처럼 말이다. 또한, 저자는 문학가 한트케의 ‘피로에 대한 시론’을 인용하여 분열적인 피로에 대해 언급한다. 한트케는 “예수 부활 후 성령을 맞는 오순절의 사람들은 언제나 피로한 모습일 거라 상상한다.”라면서 그 피로를 “나는 너한테 지치는 게 아니라 너를 향해 지친다.”라고 말한다. “말 못 하고, 보지 못하고, 분열시키는 피로”가 아니라 “말 잘하고, 보는, 화해시키는 피로”가, “근본적인 피로”가, “눈 밝은 피로”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피로에 대해 “깊은 우애를 낳고 소속이나 친족에 의존하지 않은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라고 평한다. 피로는 흩어져 있는 개개인을 하나의 박자 속에 어울리게 한다. 현재의 병리학적 상황은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이다. 무위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부정적 힘으로 하지 않은 힘은 무력함과 능력의 부재와 다르다. 본문을 읽어보자.

성과사회, 활동 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인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p.66 피로사회
한트케는 이런 말 못 하는, 보지 못하는, 분열시키는 피로에 대한 대립자로서 말 잘하는, 보는, 화해시키는 피로를 내세운다.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으로서의 피로는 자아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틈새를 열어준다. … 자아의 피로가 고독한 피로이고 세계가 없는, 세계를 없애버리는 피로라면, 한트케의 피로는 “세계를 신뢰하는 피로”이다. P. 67 피로사회
근본적 피로는 오히려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피로의 영감”은 무위에 관한 것이다. … 피로는 특별한 태평함, 태평한 무위의 능력을 부여한다. 그것은 모든 감각이 지쳐 빠져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피로 속에서 특별한 시각이 깨어난다. p. 69 피로사회
한트케는 노동하는, 움켜쥐는 손에 놀이하는 손을 맞세운다. 놀이하는 손은 결연하게 움켜쥐지 않는다. “매일 저녁 여기 리나레스에서 나는 많은 꼬마 녀석들이 노곤해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는 탐욕도 없고 손에 움켜쥔 것도 없고, 그저 놀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깊은 피로는 정체성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한트케의 피로는 자아 피로, 즉 탈진한 자아의 피로가 아니다. 한트케는 오히려 “우리-피로”라고 말한다. 이때 나는 너에게 지치는 게 아니라, 한트케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너를 향해 지치는 것이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인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 그것은 막간의 시간,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이다. pp. 70-73 피로사회

또한 저자는 활동 과잉으로 인한 사색적 능력의 상실은 근대 활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의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필경사 바틀비'라는 소설과 연결해 아감벤의 소설 해석을 비판하고 있다. ​과도한 긍정성, 활동성으로 인한 피로로 현대적인 질병인 우울증, 번아웃, 주의력결핍, 과잉 행동장애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아 피로는 자아의 잉여와 반복에서 비롯되는 피로다. 하지만 치유적 피로는 이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한 피로 속에서 자아는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긴다. 그것은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으로서의 피로, 건강하고 "세상을 신뢰하는 피로"이다. 반면 자아 피로는 고독한 피로, 세계가 없는, 세계가 부족한, 세계를 지워버리는, 개개인을 고립시키는 피로이며,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의 대가로 타자와의 모든 관계를 파괴해버리는 피로다. … 프로이트의 심리 장치에서는 부인(Verneinung)과 심적 억압(Verdrangung), 위반에 대한 불안이 지배적이다. 자아는 "불안의 장소"이다. 하지만 후기 근대의 성과 주체는 부인할 일이 거의 없다. 그는 긍정의 주체다. 만약 무의식이 필연적으로 부인과 심적 억압의 부정성과 결부된 것이라면, 후기근대적 성과 주체에게는 더는 무의식이 없다. pp. 82-84 우울사회
자기애는 자기 자신에 비해 타자를 폄하하고 거부한다는 점에서 아직은 부정성의 영향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아는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정립한다. 이로써 자아와 타자를 분리하는 경계선이 유지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타자와의 대립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반면 나르시시즘에서는 타자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나르시시즘적 장애를 겪는 사람은 자기 자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타자 관계가 소실되고 이에 따라 안정된 자아의 이미지도 형성되지 못한다. p.88 우울사회
우울증, 번아웃, 주의력결핍, 과잉행동 장애와 같은 오늘날의 정신질환은 심적 억압이나 부인의 과정과는 무관심하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 주인 부인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안 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서 비롯한다. p.92 우울사회
이상 자아에 비하면 현실의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로 나타난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모든 외적 강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괴적 자기 강제의 덫에 걸려든다.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 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을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p.103 우울사회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요약하면 근대사회는 면역학적 시대이며 규율사회이고 주권 사회이다. 반면에 후기 근대사회는 신경증적 시대(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 증후군 등), 성과사회, 활동 사회, 자기 착취의 사회, 도핑 사회 등으로 규정한다. 개념과 이유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공감한다. 과거 규율사회에서 이제는 성과사회로 세상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고 성과사회는 점증하는 탈규제로 자신이 자신을 착취하는 사회로 나아간다. 결국, 피로사회가 도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규율과 제약은 없어지고, 자본주의와 협력한 과도한 긍정성이 스스로가 소진(Burn out)될 때까지 자신을 몰아가고 결국 피로와 우울의 늪에 빠지는 시대에 봉착했다는 논지이다. 

우울증은 성과사회의 질병이다. 현대사회에서 무한한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다는 현상이 바로 우울증과 약물중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과사회가 서서히 도핑 사회로 발전해 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과사회는 부정성의 결핍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하여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일으키고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여기에서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는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의 압력은 단순한 외부 압력에서 아니라 유혹의 형태로 취한다고 말한다. 그 속에는 성공을 향한 끝없는 자신의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러한 유혹은 개개인의 성찰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고 본다. 우울증은 성과사회의 질병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사회인 것처럼 말한다. 다만 얼마만큼 노력했는가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더 많은 성취를, 더 많은 돈을, 더 높은 지위를, 더 성공적인 삶을 위해 무한 경쟁에 돌입했었다. 여기에는 상한선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긍정성의 과잉으로 몰아넣는다. 결국,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면 자신을 낙오자로 인식하면서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올바른 삶과 가치에 대한 고민이 없다.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도 더더욱 우리에겐 없다. 그래서 쉽게 가난한 사람은 게으름의 결과라고 인지하기 쉬웠고. 그래서 우리는 더 쉬면 안 되고 성공하려면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강요하지 않았는지 성찰의 때가 왔다고 본다. 저자가 주장한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부정성의 패러다임에서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필자가 100%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한 도구라고 본다. 긍정성의 과잉은 우리를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2022/06/19 뜨르/혜윰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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