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의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
우리는 앞 장에서 암흑으로서 신, 신의 비본질적인 앎을 통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의 불가해성을 고찰했다. 토마스에 의하면 비본질적인 앎은 비직관적이고 불가해성이다. 신은 어떤 범주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대상으로 신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신의 불가해성에 대한 논리도 확인했다. 또한 창조된 지성으로는 신의 본질을 전혀 볼 수 없다는 신의 불가해성의 입장을 고찰했다. 토마스에 의하면 신의 불가해성은 신이 모든 종류의 앎을 초월하기 때문이고 뿐만 아니라 신의 무한성 때문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또한 신은 어떤 창조물과 비교될 수 없는 초월적인 신이기 때문에 신의 불가해성은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이것을 바탕으로 이 장에서는 토마스의 부정신학에 접근하고자 한다. 먼저 토마스의 부정신학을 고찰하기 전에 먼저 토마스에게 막대한 영향을 준 위 디오니시우스를 비롯하여 플라톤,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노스, 초대교부들 등 전통적인 부정신학을 더듬고자 한다.
이러한 부정신학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기독교 교부들에게도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신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신 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에 의해서이다.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신에 대한 앎은 부정의 방법을 신을 인식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위 디오니시우스를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부정신학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학자이다. 위 디오니시우스 부정신학도 신 플라톤 부정신학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토마스는 위 디오니시우스 부정신학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부정신학을 살피고자 한다. 토마스의 부정신학은 부정의길, 삼중 조합의길(인관관계의 길, 탁월함의길, 부정의길)을 언급한 다음 토마스 부정신학의 세 가지 유형인 질적 부정, 객관적 부정, 주관적 부정에 대한 구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정신학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탁월의 길을 더듬을 것이다.
3.1 전통적 부정신학
3.1.1 위 디오니시우스 이전의 부정신학
기독교 신 담론의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신 담론은 3가지 형태가 존재했다. 첫 번째는 계시신학(theologia revelata) 이다. 이것은 신의 자기 계시( revelatio Dei)를 통하여 신은 인간들에게 자신을 알려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러한 계시와 무관하게 인간이 오로지 자기 지성만으로 자연과 질서 그리고 이성 안에서 신을 인식해가는 방식인 자연신학(theologia naturale) 이 있다. 마지막으로 부정신학으로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에 대한 유한한 인간의 파악 불가해성을 나타내는 신 담론이다. 부정신학은 플라톤에게 나타난 초월성을 근거하여 이미 신 플라톤주의자들인 플로티누스와 프로클로스에게서 그 원형이 나타난다. 절대자 신을 믿는 종교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을 어떻게 부르고 표현하며 설명할 것 인가의 문제에 부딪친다. 그 이유는 신의 무한성과 초월성에 대한 유한한 인간이 불완전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성이 대단하다고 할지라도 인간에게 이해되거난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신학은 긍정신학과 달리 신에 대한 인간지성과 언표의 사용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사유에 대한 작용이나 언어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관조와 침묵 속에서 신에 관한 직관을 함으로 신비주의적 신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신과의 합일(unio mystica)을 지향하므로 수도자나 신비주의자와 직결되어 있고 부정신학과도 무관하지 않는다. 이러한 부정신학의 전통은 긍정신학과 더불어 기독교 신학 역사에서 면면히 내려오고 있는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오늘날 역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필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부정신학을 더듬기 전에 부정신학을 역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봄으로서 부정신학에 대한 이해도를 놓이고자 하다.
부정신학의 근저는 신의 초월성이 있다 이러한 신의 초월성은 플라톤 사상과 중기 및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핵심적 주제이다.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는 존재가 아니며 요구와 힘을 너머서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존재마저 초월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플로티노스와 같은 신 플라톤주의자들은 일장의 초월성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다 플로티노스의 일자는 선마저 초월하여 ‘선의 피안’라고 칭하고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일자자체는 ‘존재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이성도 초월하고 실체도 초월한다. 그렇다고 비존재도 아니다. 따라서 일자자체는 알 수도 없는 초월자일 뿐이다. 신플라톤주의 사상의 핵심은 이성이나 영혼이 일자에게서 유출되었다는 것이고 “유출된 자연의 세계와 그리고 물질의 세계로부터 그 출발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부정의 길(via negationes)을 제시해 준다.. 여기서 초기 플로티노스처럼 후기 프로클로스도 일자자체는 절대적 초월성으로 인해 전적으로 인식될 수 없으며 유비로 인하여 일자자체를 알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였다. 그는 오로지 부정신학과 신과의 신비적 합일(unio mystica)의 길의 개연성을 열어두었다. 프로클로스는 부정신학의 방법을 통하여 일자에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일자의 본질에 대한 진정한 표현이 아니고 단지 일장에 대한 개념이요 표상에 불과하다고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일자’라는 개념도 단지 일자 그 자체(ipsius unius)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부정신학의 방법을 통하여 일자로 올라 갈 때 그 궁극적이 단계는 지양(Aufhebung) 또는 ‘부정에 대한 부정’(negation negationes), 즉 부정에 대한 변증법을 통한 신비적 합일(unio mystical)이다.
이러한 부정신학은 기독교 신학 역사에서 오랜 전승을 가지고 있는데 먼저 알렉산드리아나 갑바도기아의 교부사상에서 잘 나타난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았으며 신플라톤주의 특히 플로티노스에게서 배운 ‘부정의 방법’(via negativa)을 통하여 인식할 수 있는 신의 앎이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신 플라톤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것들은 동방교부사상사 즉 비잔틴 신학사를 통하여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정신학은 다양한 전승사에서 기초하고 있다. Emil Breehier는 부정신학 기초를 인도에 찾는다. 그는 플로티노스에게서 보이는 부정신학 기원이 고대 인동의 힌두교사상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이러한 추정은 플로티노스가 활약한 알렉산드리아가 후기 고대에서 동서양의 문물교환의 중심지였고, 이곳에서 신플라톤주의 기초를 세운 플로티노스가 바로 여기에서 인도사상과 철학을 만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성립된다. 또 신플라톤주의가 성립되기 전에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사상에서도 부정신학에 대한 원형을 찾기도 한다.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유대교와 플라톤 철학을 결합시켰다. 그는 구약의 신에게서 이 세계의 모든 특성들과 규제들을 없애고자 하였다. 그에게서 유대교 신은 세계와 인간에게 인식되거나 규정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인 것이다 신는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분으로 다만 인간은 그 업적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의 형언불가능성을 강조했다. 부정의 신학의 원조에 대한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필로가 부정신학의 ‘아버지’라고 말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신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면 신의 본질은 인간의 앎으로 헤아릴 수 없다. 인간이 신을 찾고자 할 때, 신는, 항상 뒤로 물러나 있으며 또한 먼 곳에 서있으면 찾고자 하는 자로부터 무한한 거리를 유지하며 달아나시며 그래서 실제로 접촉하기 어려운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필로는 플라톤과 다르게 그가 유대교의 신과 동일하게 인정한 제일원리로부터 존재를 인정할 수 있고 신에게는 타낙(히브리어 구약성경 즉 유대교 경전)에 자신을 존재하시는 분으로 계시한다고 인정했다. 필로는 신께 어떤 특성을 부여하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 인간은 그분께서 어떤 분인지 말할 수 없고 오로지 그가 존재하시고, 그의 존재는 모든 특성들로부터 자유로우시고 말할 수 있다. 했다. 그는 신에게 명칭을 붙일 수 없는 분이시고 인간의 언어로 파악할 수 없는 분이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론은 신의 본질과 신의 활동을 구별한다. 신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지만 그분의 활동의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처럼 신의 불가지성(不可知性)에 대한 가르침은 필론의 저술 전체를 통하여 자주 등장하며 플라톤이 『타마이오스』에서 “이 우주의 조물주인 동시에 아버지이신 분을 찾아낸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28C)이라는 말을 자주 인용하며 반복적으로 사용함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며 회의주의자도 아니다. 신의 존재는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에 대한 관상을 통하여 찬란한 신의 업적을 통하여 신의 존재를 확신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에 대한 앎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신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고 인간과 관계 안에서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즉 신의 권능(dynameis 또는 energeiai)을 통하여 인간관계를 맺으시고 알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가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전에도 기독교의 교부들에게서도 이러한 철학의 흔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독교신학의 역사에서 부정신학은 먼저 알렉산드리아 Clemens와 동일한 알렉산드리아 교부들, 닛사의 그레고리와 갑바도기아교부들에게 보여진다.
초기 교부시대의 학자들은 부정신학에 대한 방향에 많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들은 특별히 그 당시의 이교도(異敎道)에 대한 신인 동형동성적(anthropomorphism: 神人同形同性的) 사상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부정신학을 사용했다. 이미 2세기에 교부 저스틴(Justin)도 신께서 “형언할 수 없는 분”이시고, 신의 존재의 앎은 가능하지만 신의 본질은 알 수 없다는 논지를 주장 했다. 그리고 “창조주”, “주님”과 같은 명칭들도 심지어 “신”이라는 말도 적절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적절하지는 않으며 단지 제한된 인간의 시각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지 결코 신 자체에게는 그 어떠한 것도 유효하지 않다. 따라서 인간은 신(神)께 명칭을 부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명칭을 주는 자가 명칭을 받는 자 앞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은 유일한 분이기 때문에 그 어떤 구별하는 특성이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을 볼 때, 저스틴 Justin은 플라톤적 사고체계를 따른다.
이어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는 부정신학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이 둘 역시 필로의 신(神)의 불가해성 사상을 전통을 이어 받아 부정신학의 맥을 이어간다. 이들도 저스틴과 동일하게 클레멘스 역시 앎이 가능한 창조세계로부터의 추론을 통해 신의 존재가 인간의 앎을 통해 가능하고 개방성은 존재하지만 신의 본질은 지적(知的)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언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은 접촉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고, 형체도 명칭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불어 “선(善)”이나 “존재(存在)”와 동일한 개념들도 오로지 한정적으로 사용할 뿐이고 본질적 의미로는 유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에게 부여되는 이름들은 단지 기지(旣知)의 것과 비슷하다는 의미에서 정당성으로 인정될 뿐이고, 실제 인간의 앎은 전달하지 못한다. 진정한 통찰은 신께서 어떤 존재가 아닌지를 아는 자에게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멘스는 긍정적 묘사들을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고 단지 인간에 대한 앎의 활동이 허용되는 한정된 범위 내에서 그 어떤 가치가 그 언표들에 부여된다. 오리게네스가 볼 때 신의 불가해성은 신의 비(非)물질성(육체성)에 유래한다. 신의 본질은 인간의 앎의 경험에 근거한 형태로는 도달할 수 없다. 오직 신의 일들을 통하여 존재의 일면이 알게 될 뿐이다. 명칭들은 신의 원래적 본질을 나타낼 수 없지만 신이 암시하는 한 한정적 정당성이 존재한다. 신을 불이나 빛으로 표현한 성서 말씀들은 은유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신학에 대한 본격적으로 구축한 사람은 무엇보다 신플라톤주의 창시자인 플로티노스이다. 암스트롱에 (A. H. Armstrong)에 의하면 플로티노스에 대한 부정신학은 세 가지 양식을 지니고 있다. 1) 수학적 부정신학 내지는 전통의 부정신학, 2)적극적인 초월의 부장신학, 3) 무한한 주체의 부정신학이 그것들이다. 또한 A. H. Armstrong은 부정신학에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중세를 통하여 내내 내려왔다고 주장한다. Armstrong은 그것은 하나의 살아있는 전승 a living tradition이라고 보았다. 중세 유대철학자 Maimonides도 유대교 신앙에 대한 내용의 일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또 다른 부분은 신플라톤주의적 사상과 합일하여 부정신학적인 시각에서 접근하려고 하고 있다.
이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학자들은 초기 서방에서는 Augustinus이며 동방에서는 Pseudo-Dionysius Areopagita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위 위 디오니시우스는 부정신학의 수립과 중세신학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부정신학의 기독교 버전은 위 위 디오니시우스 저작과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신학을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으로 구분하는데 이것 역시 프로클로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신은 초월적이고 모든 술어를 뛰어넘는 자로서 단지 무지 가운데에서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De divinis nominibus에서 위 디오니시우스는 신을 존재, 생명, 선, 통일성 등으로 정의하는 모든 신적 정의들을 초월하고 De mystica theologia에서 그 어떤 것도 신의 고유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부정신학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스콜라철학에서는 누구보다 위 위 디오니시우스의 전집 대한 라틴어 역본을 Corpus Dionysiacum을 발행한 Eriugena, Thomas Aquinas, Meister Eckhart, 그리고 Nicolaus Cusanus등이 대표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신은 아무런 존재가 아니고 심지어 이성적 존재도 아니므로 아무 사물을 인식하지도 못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제자이면서 부정신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Heinrich Seuse도 인격적인 삼위일체인 신을 모든 세상의 현상과 함께 인식 불가능한 일자에로 초월시키려했던 것이다. 쿠자누스는 신학을 긍정적인 신학과 부정적인 신학을 구분하고 부정신학에는 상징 신학, 부정신학, 그리고 신비신학으로 나누었다.
부정신학의 초기 역사에 갑바도기아 교부들에 의해서 전개된 부정신학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데 그 한 부분은 신의 절대적 초월성이고 다른 하나는 초월해 계신 신에 대한 앎과 접근의 문제이다. 신은 초월적이기 때문에 알 수도 없고 명명할 수 도 없다는 사상은 신플라톤주의 중심사상이며 초기의 플로티노스에게 보다는 후기의 프로클로스에게서 명확히 드러난다. 신에 대한 이러한 不可知性과 不正義性은 원리는 갑바도기아 문헌에 편만해 있다. 닛사의 그레고리에 의하며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인 이론에서 나타나듯이 유한한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자로서 그 유한한 모든 존재자들의 피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신의 본질은 유한자와 관련해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오로지 자신과의 연관에서만 가능하다. 그는 자기자체 내에서 모든 한계설정을 배재하고 그 밖의 모든 것과 비교함도 배재한다. “신의 절대성과 무한성은 자기 자신 내에서 정초되어진다.(42)그의 이러한 사상은 한편으로는 일자의 무한성을 주창한 플로티노스의 사상과 관련 있어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플로티노스의 일자는 모든 속성과 다양성을 초월한 단순성 가운데 있고 그것은 심지어 무한성마저도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이런 점에서는 닛사의 그레고리 신관은 플로티노스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플로티노스의 경우와 달리 후대의 프로클로스에게서는 인식이나 명명은 물론, 속성이나 존재마저도 초월한 일자의 피안즉 절대성이 등장하는 것이다.” 한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도 신의 무한성을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이것은 다른 특성과 마찬가지로 부정의 방법을 통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특성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갑바도기아 교부들에게서 이러한 무한하고 절대적인 신에 대한 유한한 인간의 앎이 도대체 가능한 것이다. 또 만약 가능하다고 여기면 어떻게 가능한지 물음이 제기 된다. 나지안주스 그레고리는 근본적으로 지상에서 인간은 완전한 신에 대한 앎이 불가능하지만 그는 그것을 향하고 기대한다고 보았다. 닛사의 그레고리도 신의 무한성을 주창했지만 그렇다고 신에 대한 앎에 회의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는 인간이 신의 본질의 원리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신의 존재성, 즉 ‘신이 계신다’ 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유일한 앎이라는 것이고 성인들의 전승이라고 하였다. 그는 어떤 포괄적인 앎 위에 사랑을 내세웠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앎이란 유한한 사유에만 머물러 잇는 것이므로 그것으로는 무한한 신을 인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을 보기를 열망하면 사랑과 신앙으로 신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의 본질은 사랑이므로 우리가 참으로 신을 사랑하여야 신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는 신에 대한 본질은 이성을 넘어선 것이므로 신에게는 이성을 통하여 인식해야 한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과는 다르다. 이처럼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은 신의 절대적 초월성으로 인해 인간의 앎의 파악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관점에서는 신 플라톤주의적 부정신학의 근본전제는 공통적으로 존재하나 신앙과 사랑을 통한 다른 앎을 열어두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3.1.2 위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
부정신학의 전승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학자는 초기 서방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 동방에서는 위(僞)-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지타를 들 수 있다. 동방의 Maximos에서 서방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도달하기 까지 위 디오니시우스는 매우 존경을 받을 만큼 훌륭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위 디오니시우스 사상의 많은 부분이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인 프로클로스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위 디오니시우스가 사용한 여러 개념들 가운데 ‘부정신학’ (theologia negativa) ‘초탈’ (excesus), ‘엑스타시스’ (ecstasis), ‘신적흑암’, ‘침묵’ (silentia) 과 같은 개념들도 사실상 프로클로스를 포함한 신 플라톤주의자들에게 차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 플라톤주의에 근거를 둔 위 디오니시우스 사상은 그의 신비신학 (De mystica theologia) : 에서 나타난 파악불가능하고 불가해한 신에 대한 초월성이 나타나고 다른 측면에서는 신과 신비적 연합을 위한 영혼의 상승이 다루어진다. 이러한 위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은 지금까지의 부정신학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종합하는 작업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하여 수많은 후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의 직관은 서방 세계에 계승되었으며, 필론(Philon Alexandrianus, B.C.20~50) 그리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335~394)에 뿌리를 둔 부정신학(否定神學)의 전통은 위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 (De mystica theologia) 에 요약” 되었다.
이와 같이 부정신학을 기독교적으로 토대를 세운 사상가인 위 위 디오니시우스는 신에 앎의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가 긍정의 길을 통한 긍정신학이고 둘째는 부정의 길을 통한 부정신학이다. 그리고 다음은 감각적인 것들에서 개념들을 들추어내어 그러한 것들을 신에 대한 초월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상징 신학이다. 세 가지 유형가운데 첫째와 셋째는 전통적으로 교부들이 취해온 신학의 방법들이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유형 가운데 필자는 특히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긍정신학(cataphatic theology)은 신에 대한 앎들로 안내하는 불완전한 길인 반면,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 전적 무지에 도달하게 하는 완전한 길, 신의 본성을 알 수 없는 신으로 가는 유일하게 적합한 길이다. 만약 우리가 신을 보았거나 신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 자체를 본 것이 아니다. 앎의 가능한 모든 대상 위에 있는 분에 대한 앎은 바로 무지를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신의 앎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위-위 디오니시우스는 어떻게 우리가 지성적이지도 감성적이지도 않는 신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가? 우리가 그분을 안다는 것은 신에 대한 본질이 아니고 창조된 사물들의 분유를 통하여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긍정신학은 선이나 지혜와 같은 창조물의 속성으로부터 창조물들의 원인이신 신의 속성들에 상응하는 것을 추론한다. 창조주께서 창조물들에게 이러한 속성들을 주었기 때문에, 신의 소유이다. 왜냐하면 신은 그로으로부터 나온 존재보다 더 작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부정신학(via negationis)에서 위(僞) 디오니시우스는 이런 이름들과 명칭들이 실제적으로 신께로 돌려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신의 초월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신의 본질에 대한 적당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이 부정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위(僞) 디오니시우스는 부정이 옳고, 긍정이 거짓이라고 했다. 하지만 부정 또한 역시도 실질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 부정 또한 부정되어야 한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부정신학이 긍정신학보다 우월하다고 말하면서 부정신학을 부각시키고 있다. 부정의 길을 집중적으로 다룬 신비신학를 통해서 위 디오니시우스는 동방교회의 모든 신학적 전통에서 차지하는 부정신학에 대한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절대적 무지 속에서 모든 존재와 앎 너머에 계시는 분과 결합하기 위해 모든 이성적 활동과 함께 감각들, 모든 감각적이거나 지적인 대상들,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과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거부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임을 본다. 거기에는 정화가 요구되고 모든 부정(不淨)한 것과 함께 모든 정결한 것도 버려야만 한다. 우리는 이어서 덕(德)의 최고로 높은 고지들을 넘어서야 하고, 또한 모든 신적인 빛들, 모든 천상의 소리들과 언어들도 뒤에 두고 나아가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모든 것 밖에 계시는 분이 거주하시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의 신비신학 De mystica theologia에서 그는 신의 본질적인 불가지성과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apophasis, 즉 부정에 대한 방법 즉 부정신학을 통하여 신적 신비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하므로 인간은 이러한 부정신학을 통하여 신에게로 회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에서 신으로부터 추상된 그 어떤 개념도 부정하며 부정신학의 신비는 그자체로 이름 지을 수 없지만 이름이 있는 신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 있고, 또한 신이 있는 공공연한 은밀한 장소는 신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술어적인 관련성에서 자유로운 부정성 또는 타자성의 위치라고 역설한다. 이곳은 인간의 사유로는 근접될 수 없는 자리이며 그러므로 인간은 그것을 “신비적 무지의 흑암”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위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은 신을 ‘신적 흑암’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언급하기를 “그러나, 친애하는 디모데여, 부지런히 신비적 관조를 실행하여 감각들과 지성의 작용들, 그리고 감각적이고 예지적인 모든 것들, 존재와 비존재의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떠나 무지無知의 방식으로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모든 존재와 모든 앎을 초월해 계신 그분과의 영합을 향해 일어서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의 부정신학에서 신은 초월적이시고 모든 술어들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단지 무지(無知) 가운데서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의 이름들(De divinis nominibus)에서 위-디오니시우스는 신을 존재, 생명, 선, 통일성 등으로 말하는 모든 신적 개념들을 넘어서면서, 신의 본성(Natura Dei)이란 어떤 존재자도 아니며 모든 존재자도 아니다. 심지어 존재자의 부정인 없음(無)도 아니고, 절대무도 아니다. 존재자와 부정의 관계에 있는 ‘없음’까지도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절대적 타자(他者)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과는 결코 동일하지 않는 다른 그 모든 사물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인간의 앎은 모든 사물의 부정을 통하여 신의 본질에 다가간다. 동시에 부정되는 모든 사물에 대한 사유를 동반한다. 결국 신과 창조물이 함께 관계를 맺고 있는 인과관계와 초월에 대한 논리적인 귀결이 바로 위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인데, 신비신학(De mystica theologia)에서 그는 그 어떤 것도 신의 고유한 본질을 나타낼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부정신학을 말한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신과 관련된 모든 서술에서 부정이 긍정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방식 모두 필요하다는 방식을 고수한다. “그러므로 신은 만물 안에서 알려지며 만물과 구분된다. 신은 앎을 통해서 알려지며 무지(unknowing)를 알려진다.…한편 신은 이해될 수 없으며, 단어들은 그분을 포함할 수 없고 어떤 이름으로도 그분을 포착할 수 없습니다. 신은 존재하는 생물들 중 하나가 아니며 생물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무지에 통한 앎이 위 위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은 만물 안에 알려지면서 동시에 만물과 구분된다.
신은 앎을 통해서도 무지를 통해서도 알려진다.” 역설(paradox)처럼 보여 지는 위 위 디오니시우스의 진술 속에는 이미 보여 지듯이 신의 신비 속에서 인간의 앎 및 언어의 한계에 대한 흔적이 여실히 보여 진다. “그분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은 말할 수 없고, 그것에 대해 이해되어야 할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편지 이러한 부정신학은 위 디오니시우스에게서 세 가지 사상으로 존재한다. 첫째는 신은 존재를 초월하시고 불가언적인 분이다. 그는 빛을 초월하시는 흑암 속에 계신다. 이러한 신비적인 흑암은 먼저 신의 본질적인 불가해성과 인간의 무지를 의미한다. 나아가 흑암은 자신을 포기하고 신에게로 올라가려는 인간의 노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 신에 관한 경험은 역시 빛을 넘어서는 흑암으로 드러난다. 둘째 이러한 논쟁에서 나온 것으로 신에 대한 적당한 언표는 긍정적 방법으로만이 아니라 부정적 방법이 첨가되어야 가능하다. 즉 신에 대한 파악할 수 없는 신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긍정적인 표현에 부정적인 표현이 뒤 따라야 하고 그로인하여 초 탁월성(supereminenz)인 표현을 통하여 완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코르빈(Michel Corbin)은 “초-탁월” (sur-eminence의 형태를 보통 탁월한 언어를 넘어서서 ‘x가 아닌 것이 최고의 x보다는 더한 x이다.’는 형식을 따라 이중부정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위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주의 신학의 목표는 정화, 조명, 합일이라는 세 단계를 통하여 신과의 신비적 연합”에 도달하는 것이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신비적 연합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로 보는 위계의 최종 목표는 신과한 몸이 되는 것이요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위계 전체는 질서 정연한 활동 체계이다. 이것을 상승이라고 부른다. 위 디오니시우스의『The Mystical Theology』3장에서 부정신학으로 가는 길은 자신의 정화를 마친 후에 자연의 만상을 통한 관상, 즉 신 안에 세상을 관상하는 경지에 까지 올라가는 영혼이 들어갈 수 있다. 그러한 영혼은 앎을 부정하므로 더 높이 상승한다. 여기에서 명백하게 부정의 길은 영혼이 감각세계를 벗어나 순수지성 세계에만 몰두했을 때 이를 수 있다. 이처럼 부정신학에 이르는 길은 우리의 언어에 한계에 이르러 언어가 없는 상태가 된 다음 다시금 도달하는 단계이다. 따라서 부정신학은 무언(無言)과 침묵(沈黙)으로 인도한다. 앎에 근거한 개념들과 추리적 사고(思考)과정을 통해 목적을 이루려는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이러한 실패는 그가 신과의 실재적 관계에 도달하기 위한 전제이다. 위 위 디오니시우스는 이러한 부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만물을 부인함으로써 초월자를 찬양하는 것이 진정으로 보는 것이요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각상을 조각하기 시작한 조각가들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감추어져 있는 형상을 깨끗이 보기 위해서 장애물을 모두 제거하는데 이처럼 깨끗이 제거하는 행위(부인)에 의해서 감추어져 있는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이 같은 부정은 신이 있는 곳에 어느 정도는 다다르지만 신께 도달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다음 단계로 영혼은 신이 있는 암흑 속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알 수 없는 신과 알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가 된다. 결국 암흑 속에 있는 형언할 수도 없는 신에 대한 부정신학과 영적이면서도 물질적인 상징들이 질서정연한 서열이 보이는 하늘나라와 교회의 위계는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신에 대한 어떤 상징도 이미지도 거부되며 그것이 영적인 것일지라도 마송영지이다. 따라서 “신은 만물을 통하여 만물에게 알려지지만 누구에게도 임의의 것을 통해서 알려지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속성들을 그분의 속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지만 그 분은 하나의 생물이 아닙니다.” 이처럼 부정신학과 상징 신학은 또한 아이콘 신학(icon theology)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두 신학은 동전의 양면이다.
위 디오니시우스의 이러한 사상이 담긴 글의 The Mystical Theology : Mystica Theologia 는 중세신비주의 기본 저서가 되었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적 이름들 (De divinis nominibus)을 주석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더 나아가 에크하르트에게서 나타나는 자기 자신에게로의 귀환에서 영혼의 발현에 이르는 가르침은 위 위 디오니시우스의 사상에 빚지고 있다. 그리고 니콜라스 쿠자누스의 박식한 무지 docta ignorantia 사상도 궁극적으로는 위 위 디오니시우스에게서 온 것이다. 중세에 나온 신비주의 저서 무지의 구름(Cloud of Unknowing)은 기독교 부정신학의 대표적인 저서로서 신은 지성 (intellectus)으로 파악될 수 없고 단지 신비롭고 은은한 사랑으로만이 파악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저서는 신을 무지와 흑암, 그리고 사랑을 통해 알려질 뿐이다. 이와 같이 부정 신학의 역사적 의미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어떻게 전개되고 해석되는지를 다음 장에서 고찰해 보자.
3.2 토마스 아퀴나스의 부정신학
신의 파악불가능성의 논쟁에 더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의 부정신학은 부정의 길(via negativa)의 논의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신에 대한 삼중의 방법에 대한 전반적인 구조 안에 어떻게 그것이 위치해 있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3.2.1 부정의 길과 삼중의 길
토마스 아퀴나스 그 자신이 위 디오니시우스 전통의 훌륭한 계승자임을 보여 주었다. 그는 부정(remotio)의 방법을 통하여 신과 연합되어진다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앎은 사유의 모든 것을 넘어서는 신과 부정을 통한 신과의 역설적 접촉으로 합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에 대한 완전한 앎이고 하는 것은 신의 인식적 초월에 대한 바로 인간의 자각이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지성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 위에 있는 신을 깨달을 때, 즉 잘 알려지지 않는 신와 연합되어질 때 가장 완전하게 신을 알게 된다.” 이것은 위 디오니시우스 학풍의 중심이다. 그러나 만약 신이 인간에게 알 수 없는 분으로 남는다면 우리 인간은 제거의 길을 통하여 인간의 욕망과창조물을 계속 부정해야 한다. 따라서 부정의 길은 신에 대한 인간의 앎의 가장 완전한 방법이다. 인간이 신의 초월에 대하여 자각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통하여 가능하다. 우리는 부정의 길을 통하여 암흑, 초월 그리고 신비적 연합을 경험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이러한 부정들은 인간들에게 혼란을 야기하지만 언젠가는 신으로부터 제거되어진다. 우리가 신과 최고로 연합되어질 때도 여전히 무지의 암흑 속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신이 거주하는 일종의 암흑의 안개이다. 토마스는 자신의 부정신학 혹은 부정의 길(via negativa)의 표현을 위하여 세 가지 기본적인 문법적인 형태를 사용한다. 이러한 세 가지는 의미와 형태에서 긍정적 서술을 사용하는 부정적 비례(신은 몸이 아니다), 의미와 형태에서 부정적 서술을 사용하는 긍정의 비례(신은 비물질적이다), 또한 형태에서는 긍정적 서술을 사용하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부정적 서술을 사용한다.(신은 단순하다)
토마스는 부정신학의 유형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이것이 삼중의 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삼중의 길은 신의 앎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방법이다. 토마스에게는 이러한 삼중의 방법은 아주 유동적이다. 먼저 인과관계의 길은 원인causa(cause), causalitas 그리고 드물게 habitudo(relation)에 의하여 표현된다. 탁월함의 길은 cessus(excess), eminentia(eminence 또는 preeminence), excellentia(excellence) 그리고 접두사 super(above)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부정의 길은 ablatio 그리고 privatio (removal), separatio 그리고 gregatio (separation), abnegatio(denial), remotio(removal) 그리고 egatio(negation) 의하여 표기된다. 마지막 두 단어는 가장 자주 사용되어진 용어들이다. 아래에서 사용하는 약어는 원인성 C(causality), 부정 N((negation), 그리고 탁월 E(eminence)사용한다. 여기에는 CNE, CEN, NCE, NEC, ECN, 그리고 ENC 등 여섯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ENC을 제외한 모든 조합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품에서 발견되며 첫 번째 두 번째 조합이 그것들 중 대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색다른 것을 받아들이거나 부정으로 시작하는 3인조 조합은 그의 작품 도처에 퍼져있는 있다. 인과관계로 시작하는 3인조는 숫자상으로 지배적이라고 할지라도 CNE 그리고 CEN 둘 중 어떤 것이 우세한지는 알 수 가 없다. 그러나 대부분 CNE 조합을 가지고 있다.
토마스는 인과관계의 길에 있는 두 3인조로 시작한다. 신을 향하는 삼중의 길의 최초의 언급은 토마스의『명재론』(Sentences)의 주석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서 그는 디오니소스들의 방법을 언급함으로서 신의 존재를 위한 롬바르드의 증명들을 설명한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인간이 인과관계, 제거, 탁월성 등 세 가지 방법들(modus)에 의하여 신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창조물의 존재는 또 다른 것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과관계의 길은 창조물의 존재하는 원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완전성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신에게 다가설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들이 있다. 제거: 불완전성이 신으로부터 제거되어 지는 것 그리고 탁월성: 창조물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더 완전하게 창조주 안에 있다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토마스는 CNE의 조합에 첫 번째로 인과관계(causality)를 놓는다. 비록 그는 위 디오니시우스에게서 언급된 인과관계를 뒤이은 제거/탁월의 질서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토마스의 해석은 위 디오니시우스가 가지고 있는 질서를 최대한 손상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탁월의 방법은 부정의 방법을 위한 토대이다. 예를 들면 신은 지혜로운 그리고 지혜롭지 않다고 둘 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초 지혜로 말해진다. 왜냐하면 지혜는 결핍의 근거로서 신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지혜를 탁월하게 소유하기 때문이다. 신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원인이기고 하며 원인이 아니기도 하다. 그리고 신은 존재에 결핍으로서 아니라 모든 존재들로부터 탁월하게 분리된다.
인과관계로 시작한 또 다른 조합인 CEN은 부정의 기초로서 탁월의 요소를 인식한다. 토마스가『대이교도대전』에서 주장하기를 인간과 천사는 신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신이 모든 것의 원인이고, 모든 것을 넘어서서 탁월하며, 모든 것으로부터 제거되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서 삼중의 방법은 신에 대하여 결과를 통하여 이성에 의한 파악에 달려 있다. 그리고 신을 볼 수 없는 것들은 부정을 통하여 알려지고 인과관계를 통하여 신의 영원한 능력이 알려지며, 그리고 탁월의 방법을 통하여 신의 신성이 알려진다.
신은 인과관계의 방법에 의하여 모든 사물들 안에서 알려진다. 그러나 부정과 초월의 방법들에 의해서는 모든 사물들로부터 분리됨으로서 알려진다. 신의 초월이 조합의 두 번째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부정을 위한 근거이다. 토마스는 위 디오니시우스의 이중의 방법으로부터 삼중의 방법을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디오니시우스가 부정과 초월의 방법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방식을 중요시 하게 여긴다. 토마스의『명제집』에서 조합 NCE의 두 가지 사례가 있다. 또한『보에티우스 삼위일체 주석』에서 그는 우리가 신과 천사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성인지 계시에 의한 것인지 논의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대신에, 우리는 부정을 통하여, 인과관계를 통하여 그리고 초월을 통하여 그것들의 앎을 가지고 있다.
제거를 통한 첫 번째 방법은 우리에게 신이 모든 능력과 물질로부터 자유롭다는 것과 존속적인 형상 그 자체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다. 인과관계를 통한 두 번째 길은 제거의 길의 동인으로서 신이 자연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앎과 의지에 의하여 행동하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위 디오니시우스 신명론』 에 대한 토마스의 주석인『위 디오니시우스 신명론 주석』은 그의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삼중 방법의 유일한 설명을 제공한다.『위 디오니시우스 신명론』에서 위 디오니시우스는 첫 번째로 어두운 밤과 유사한 신비적 명상의 가장 달콤한 열매로서 부정의 방법(aphairesis)에 대해 말한다. 그 다음에 신이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라고 말해지는 이중의 길에 대해 언급한다. 신은 모든 존재들의 원인으로 언급되고 또 다른 곳에서는 무(無)로 언급된다. 왜냐하면 초 본질적으로 제거되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 디오니시우스는 초 본질적으로 원인이 된 부정에 집중하다. 『위 디오니시우스 신명론』1.5에서 대부분은 원인으로서 신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여『위 디오니시우스 신명론』1.6-7에 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두 부분들에서는『위 디오니시우스 신명론』1.6에서는 원인이 근거인 사물들의 신의 지적인 이름들을 주로 다룬다. 우리는 토마스의 신적 환상에 받아들여진 물질적 이미지 그리고 인과관계, 제거에 의한 신의 이름의 삼중의 방법을 살펴보았다. 그 첫 번째 방법은 신이 인간의 앎을 초월하고 모든 사물들 위에 그리고 모든 사물로부터 탁월하게 분리되어진 사실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인으로서 신을 이름 짓는 성서적 논리를 사용하는 두 번째 방법은 일의적인 아니라 초월적으로 신을 찬미하며 세 번째 방법은 신이 신적 환상으로 들러나는 물질적 이미지와 형태 위에 근거하는 신을 명명할 때 발생한다. 여기에서 위 디오니시우스의 상징 신학(Symbolic Theology)이 신적 환상을 받아들이는 물질적 이미지에 근거한 이름들을 다루는 반면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적 이름들(Divine Names)은 신으로부터 창조물로 나아가는 지적 완전성으로부터 취한 지적 이름(예를 들면 존재, 삶)들에 대한 논의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위 디오니시우스의 말뭉치에서 신의 이름에 대한 세 가지 방법들을 분류하면서 결론을 짓는다. 제거의 방법은 신비신학에서 다루어진다. 그리고 가지적 완전성에 근거한 방법은 신적 이름들에서 발견되다. 그리고 물질적 유사성에 근거한 방법은 상징신학(Symbolic Theology)에서 논의된다. 여기서 토마스는 자신에게 필요한 세 가지 방법들을 해석한다. 그리고 위 디오니시우스의 단일 작품으로서 각 사람을 연결했다. 창조물 안에서 신의 가지적 완전성에 근거한 방법들과 함께 인과관계의 방법과 표면상으로 동일하다. 그리고 그것이 신의 독립적인 길로서 알 수 없다고 할지라도 첫 번째 두 가지의 방법의 중심에 탁월성의 현존을 표시한다.
토마스의 삼중의 방법은 위 디오니시우스의 이중의 방법을 새롭게 해석한 방법이다. 토마스가 첫 번째 요소(ECN)로서 탁월로 시작하는 삼중의 길은 단 한 구절만 발견된다. 여기서 신(Deus)은 탁월성과 인과관계 그리고 부정을 통하여 신적 본성에 접근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실재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며 또한 모든 실재로부터 제거되어지기 때문이다. 토마스가 다루고 있는 신에 대한 삼중의 길은 상황과 요소의 질서 그리고 종말론에 따라서 다양성을 보여준다. 부정으로 시작하는 조합은 인과관계로 시작하는 보다 더 많지 않다. 왜냐하면 인과관계는 토마스의 철학적 신학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삼인조의 윤곽에 대한 각각의 방법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신에 대한 긍정신학의 한계 안에 긍정적인 진리들을 확립하는 수단으로서 부정/초월의 이중의 길을 말하는 반면에 토마스는 자연적인 독창성에 영감 받아 유연성이 있는 삼중의 방법을 언급 한다. 예를 들면 지혜와 같이 긍정적인 특성이 신에 대해 긍정되어지는 곳에서 부정되고 그리고 탁월의 방식에서 다시 긍정된다. 토마스는 긍정-부정-재긍정의 구도를 취하고 있다.
3.2.2 부정신학의 세 가지 유형
비록 토마스 아퀴나스가 공식적으로 세 가지 다른 종류들의 신학적 부정을 서술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에서 세 가지 유형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질적 형태, 객관적 형태, 주관적 형태의 부정이다. 질적 부정은 신에 대하여 질, 속성, 특징 등의 전체적이고 절대적인 부정이다. 예를 들면 ‘신은 비물질적이다’라고 하는 의미는 물질과 관계가 있는 무(無)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계의 용어로 말해질수도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질적 부정의 의하여 부정되어진 술어는 그것이 비록 탁월한 것조차 신을 단언할 수 없다. 개관적 양식부정은 신에 대한 창조물의 완전성에 대한 객관적인 양식을 부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월성의 신적 양식에 따르면 그러한 완전성 그 자체가 아직은 신에 대한 긍정될 수 있다. 주관적 양식부정은 신을 주관적으로 부정한다. 예를 들면 인간들이 신적 속성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방법들은 불가피하게 명제들에 의하여 이해하는 방식이다.
토마스는 진술하기를 부정의 방법이 영적 실체로부터 제거되었을 때 그 방법은 물질적인 실체에서 찾았다. 그가 말하는 질적인 의미에서 부정은 물체의 형질이나 속성이 영적 실체의 영역으로부터 전반적으로 제거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방법 안에서 물질성과 세속적인 것은 신으로부터 제거된다.그래서 신은 불변하고 무한하다고 말할 수 있다.또한 토마스는 객관적 양식부정들을 말한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부정과 일치한다. “우리가 선 그자체로부터 모든 특성들의 측면을 제거한다면 신적인 선 그리고 완전하고 필수적인 선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남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선 그 자체는 신으로부터 제거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마 창조물의 방식에서 신적인 선을 제약하거나 축소하는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신은 창조물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 안에 “실재의 본성이 탁월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조차도 “그것이 창조물에게 적합한 방식과 관련됨으로서” 신으로부터 제거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신은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고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현재에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고 또한 시간에 의하여 측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객관적인 양식부정에 의하여 신이 부정되어는 경우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신에 대해 말해지는 불완전성을 암시하는 사물은 제거되어지도록 항상 탁월의 방법에 의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의 앎은 불완전한 이성에 의문이 있는 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객관적 양식부정은 신적인 초월 때문에 신으로부터 분리된다. 이것은 인간과 창조물의 한계이고 불완전함이다. 이러한 불완전성은 창조된 앎을 수반한다. 그러나 인간의 방식 너머에 있는 신적 방식은 실재로 양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없음의 무한한 방식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완전성으로 이해되어지는 무한성은 유한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은 유한하고 제한된 양식에서 보면 존재하지 않지만 보편적으로는 무한적으로 존재전체를 소유한다. 따라서 탁월한 방식의 신의 초월은 실재적으로 무한한 유형 없음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비실체적이고 구성의 불완전성을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신을 묘사하는 술어로 경계한다. 이것은 인간 주체에 의하여 의미된 양식일 뿐이다. 왜냐하면 신적 완전성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화의 인간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완전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서술된 모든 이름들은 인간의 지성이 판단하는 양식 안에서 의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주체에 의하여 앎의 과정에서 생기는 함축은 의식적으로 신이 부정되어져야 한다.
주관적 양식부정의 예로서 신이 지혜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하여 지혜가 주체에 비실체적 본질로서 신과 함께 거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고유한 방식이 유도한다고 할지라도 일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혜는 인간에 의하여 활용된 이름들로 의미되는 것 보다 훨씬 고귀한 방법들이 신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술어들은 신에 대하여 결코 어떤 정의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항상 “어떤 확고한 형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은 사물의 명확한 형태가 없는 것을 소유하는 반면에 신에 대하여 긍정한 모든 사물들은 신에 대하여 또한 부정되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창조된 사물들 안에서 발견되고 의미되는 것이지 신에게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질적 그리고 객관적 양식부정 사이의 구별은 명확하다. 처음에 인간은 신에 대하여 물질의 실재들을 부정한다. 그 다음에 창조물들에서 발견되어진 지혜와 선과 같은 영적인 실제들(선과 지혜 등)도 부정한다. 첫 번째 부정은 절대적 질적 부정인 반면에 두 번째는 창조물의 의해 수정된 객관적 양식부정이다. 또한 신에 대해 말해지는 무無는 창조물 안에서 발견되어진 것처럼 이해되어져야 한다. 동시에 이것은 물질의 실재는 신으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 그리고 영적인 완전성들도 신으로부터 제거되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정신이 잡을 수 있는 것 보다 더 탁월한 방식 안에서 소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적 성질은 “신으로부터 완전하게 제거되어진다.” 그리고 신으로부터 어떤 사물들의 제거 안에 인과관계와 탁월을 통하여 술어가 동시에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이것은 신은 몸이 아니다 라고 말해질 때처럼 신에 대하여 서술되는 어떠한 방법도 없다 그리고 오로지 부정되는 실재들만 존재한다.
질적 그리고 주관적 양식부정 사이의 구별은 분명하다. 토마스는 위 디오니시우스를 재해석한다. 어떤 종류의 이름들은 신에 대해서 긍정될 수도 있고 부정될 수 도 있다고 언급한다. 두 사물들은 술어에 의해서 고려되어질 수 있다. 그는 의미하는 양태와 의미되는 실재를 구분한다. 둘 다 참되게 신에 대하여 부정되는 반면 오로지 전자는 신에 대하여 긍정될 수 있다. 즉 부정은 어떤 실재가 전혀 신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고 (신은 형체가 없음 질적인 부정) 혹은 의미하는 양태는 신에 속하지 않기 때문(신은 지혜가 아님, 주관적 양식부정)이다. 그러나 긍정은 오직 의미되는 실재(지혜)에만 연관되어 사실이다. 그리고 의미하는 양태(긍정과 대조하기 위하여, 신은 지혜가 아니다. 주관적인 양식부정 해석이 항상 가능하다)에 관련하여 사실이 아니다.
신이 참이면 부정은 실재적으로 긍정보다 더 참되다. 왜냐하면 참된 긍정은 결코 전체로서 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에 관하여 말하면 긍정은 의미된 실재와 관련하여 단지 참되고 의미하는 양태와 관련하여 참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의 양식은 인간이 의미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심오하기 때문이다. 신의 주체와 신적 술어사이의 결코 어떤 긍정에 대한 완전한 양식의 일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긍정에서는 주체와 술어는 단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위 디오니소스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해석은 질적 부정에 의한 참되 부정과 주체 없이 주관적 양식 부정에 의하여 부정되는 참된 긍정이다.
양태부정이 부정들과 연관되어있는 반면에 질적 부정들은 절대적인 부정이다. 객관적 양식 부정은 신으로부터 유한한 창조물의 양식을 제거하는 반면에 주관적 양식 부정은 의미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방식의 불완전성, 즉 신에 대하여 명확하게 하는 것을 부정한다. 질적 부정은 신에 대하여 부정된 속성 안에 타고난 불완전성 때문에 참되다. 반면에 양식부정은 신의 초월 때문에 참되다. 질적 부정은 원칙적으로 물질과 물질적 조건들을 신으로부터 제거된다. 반면에 주관적 양식 부정은 원칙적으로 세속적인 방식을 제거하다. 창조물의 방식은 유한성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신의 방식은 실재적으로 신적 무한성의 양식 없음이다.
신의 유한성의 절대적인 부정과 같은 신의 무한성에 대한 언설은 부정의 독특한 경우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또한 신의 방식과 관련되어있다 할지라도 절대적 질적 부정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창조물을 정의하는 유한성을 분리한다면 그 유한성은 절대적으로 신에 대하여 부정된다. 왜냐하면 신은 창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이 신에 대하여 완전하게 서술될지라도 유한성에 매여 있다. 결국에는 이것은 모든 긍정 속에 있는 유한한 인간과 창조물의 요소들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양태부정의 바로 목적이다. 이것은 양태부정에 의하여 인간에게 신에 대하여 참되게 서술할 수 없다는 보여주기 위해서 이다.
3.2.3 부정신학의 성장과 발전과 탁월의 길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는 세 가지 상황들이 존재한다. 신에 대한 앎의 성장과 발전은 부정신학의 실천을 통해서 일어난다. 하나는 질적 부정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두 가지는 양식 부정에 관한 것이고 셋째는 신비적 무지에 대한 암흑으로 절정에 이른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우리의 삶에서는 인간은 결코 신의 본질을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연속적인 질적 부정을 통하여 인간은 그 앎에는 접근할 수 있다 그는 부정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서 신의 속성을 논의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신이 무엇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인간이 실재를 제거하는 정도에 신적 존재의 더 명확한 앎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연속적인 부정들에 의해서만 모든 다른 존재들로 부터 신을 구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은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긍정적 차이는 일반적인 범주에서 덜 일반적인 범주까지 내려오는 것처럼 또 다른 것을 축소한다. 그래서 부정들이 또 다른 것을 위축시킨다. 만약 신이 모든 질적인 것들과 부정되어진 다른 서술적인 우유들을 소유함으로 실체에 맞추어 조정된다면 신은 물질성의 부인으로 인하여 물질적 실체로부터 더 구별된다. 그리고 더욱이 어떤 구성과 분열이 없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신을 말하는 질적 부정에 대한 설명들도 완전한 신이 아니다.
인간의 신에 대한 앎은 신이 모든 다른 존재들로부터 구별될 때 가장 정확하고 확실하다. 그러나 이런 앎은 역시 완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재에 대한 고유한(propria) 앎이 긍정을 통하여 얻어질 때 사람은 실재가 무엇이지 다른 실재들로부터 어떻게 분리되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의 앎은 부정을 통하여 얻어진 구별되는 앎을 소유한다할지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려지지 않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적 부정의 앎은 특별한 앎이다. 사실상 토마스는 신이 순수태이고 무한한 존속적 존재인 것을 주장하는 긍정은 부정에 기초하고 있다. 신이 존재의 순수한 긍정이다. 그러나 부정은 긍정으로부터 존재한다.
발전의 두 번째는 신의 긍정적 완전성의 양태의 두 가지 부정들을 통하여 발생한다. 토마스의 의도는 신에 대한 앎을 특별하게 얻기 위하여 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긍정적 완전성들이 신에 대해서 말해질 수 없는 모든 방법들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긍정신학에 대한 수정을 함으로 정화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긍정신학이 모든 순수 지성에 입각한 추구들의 제한을 부수고 무지의 암흑으로 들어 갈 수 있는가? 여기에서 해답은 긍정신학과 부정신학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부정과 긍정, 긍정과 부정의 상호 얽힘을 통한 접근만이 가능할 것이다. 다시 부정신학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부정(remotio)의 방법을 통하여 신으로 나아갈 때 첫째는 모든 물질적인 실재를 부정한다. 그리고 다음 지혜와 선과 같은 창조물 안에 발견되어지는 같은 지성조차도 부정한다. 그것이 일종의 혼란을 겪기 위하여 신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이해 안에 남아있다. 더 나아가 무(無)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으로 창조물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우리도 신의 존재를 신으로부터 제거한다. 따라서 이런 현재의 삶의 상태 안에서 위 디오니시우스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신과의 최고의 연합되어지는 것에 따라서 우리의 이해는 확실한 무지의 어둠 안에 남는다. 이것은 신이 거주하는 것이라고 하는 일종의 짙은 안개이다.
그 첫 번째 부정은 질적 부정이고 마지막 둘은 양식 부정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에 대하여 유사한 본질적 앎을 산출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신학이 보다 더 긍정들로서 계속나아하기 위해 어떤 긍정을 수정하려는 시도도 아니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는 신과 신비적 연합에 대한 암흑으로 들어가는 정신의 마지막 도약에 대한 단지 예비적 발걸음이다. 토마스의 부정들은 위 디오니시우스에 대한 신비적 영감들과는 다르다. 토마스에 의하면 모든 부정들에 대한 궁극적인 목표는 모름(unknowing)의 어두운 안개 속에 신의 신비와 인간 정신의 연합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주 부정과 탁월을 밀접하게 관련시킨다. 실재로 신에 대한 하나의 길에 오로지 두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말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부정은 실재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기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은 당나귀가 아니다 라는 주장의 사실성은 인간과 당나귀의 실재하는 속성에 입각한다. 왜냐 하면 모든 부정은 긍정을 통하여 증명되고 긍정은 부정을 통하여 자가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 지성이 신에 대한 긍정의 어떤 것을 알지 않았다면 이것은 신의 어떤 것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신에 대하여 서술된 어떤 것이 긍정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조금도 신의 어떤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토마스가 신에 대하여 부정적인 판단을 입증하는 논의에 대한 입장을 가진다면 신학의 긍정을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면 그는『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신의 단순성을 증명한다. 즉 신은 행위 안에 존재이고 존재 자체이고 첫 번째 존재이며 순수 현실태라고이다. 여기서 이러한 주장의 전제는 신의 비합성물의 속성을 가리킨다. 토마스에 의하면 여기서 모든 부정은 일반적으로 어떤 긍정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부정은 신의 초월의 자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특별한 방식이다.
또한 토마스의 시각에서 보면 신의 탁월에 대한 의식은 부정에 대한 중요한 근거이다. “탁월을 통하여” 신은 우리의 지성이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양식을 벗어난다.그리고 인간은 신적 본질이 암흑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 지성의 모든 가능한 표현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은 “어떤 탁월성의 이유로 의하여 분리”되고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탁월하게 분리”된다. 신의 초월과 탁월은 신적 서술의 모든 불완전성을 제거하도록 유도한다. 토마스는 위 디오니시우스의 제자로서 초월(excessus)이 부정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규칙을 밝힌다. 왜냐하면 이름들은 신으로부터 제거되기 때문이다. 신은 완전성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창조물들을 초월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탁월의 방법에 의한 부정은 신에 기인되는 영적 완전성들에 적용되다. 그러나 물질적 조건들은 “신으로부터 제거된다. 그리고 결코 서술되지 않는다.” 따라서 신에 대한 서술된 영적 지혜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는 신의 우월성 때문에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신은 비존재로 불릴 수 있다. 이것은 존재에 결함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존재들을 초월로서 이다. 그리고 신은 비이성적이라고 불려진다. 왜냐 하면 이성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신에 대해 부정된 본질의 고유한 불완전성은 질적 부정들을 위한 근거로 주어진다. 그리고 그는 또한 질적 부정들에 대한 근거로서 신적 탁월을 언급한다. 물질성은 신의 존재의 순수 현실태의 덕분에 신으로부터 제거된다. 이것은 신의 탁월성과 궁극적으로 동일하다. 초월적 원인으로서 신이 왜 불변성과 무한성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또한 신의 탁월성은 부정의 모든 세 가지 유형에 대한 명확한 근거이다 그러나 신적 탁월성은 그것을 표현하고 강조하는 의미 안에서 부정들의 목표이다. 또한 신의 탁월성은 신에 속하지 않는 속성을 제거함으로 명확하게 보여 진다. 신의 탁월성은 신적 본성 혹은 본질에 대한 탁월함을 표현하기 위해 영원하고 이해불가능하고, 형언할 수 없는 신으로 불려진다. 예를 들며 신은 무한성(immensus)로 불려진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창조물의 규모를 초월 때문이다.
토마스는 신의 초월(omniptent), 전능, 최고의 선을 긍정적으로 의미하는 이름들과 부정적인 이름들(영원 그리고 무한)과 상호 얽혀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완전성도 마찬가지이다. 신적 탁월은 개념적으로 신을 붙잡으려는 인간의 인식론적인 무능력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신적 선(goodness)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 위에 존재하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정신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 위에 있는 신의 본질을 알 때 최고의 앎으로 발전된다. 신은 감각지각에 근거하고 있는 앎의 방법들을 초월한다. 신에 대한 앎의 초월은 신적 탁월성에 기초되어진다. 신은 탁월(excellentia)을 통하여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 그러면 토마스는 신의 자신의 초월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신의 초월은 본질을 첨가하는 신이 무(nohing)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절정(sublimity)은 본질적이고 불변하다 그리고 신의 은총과 선은 무한하다. 또한 토마스에 의하면 신의 완전성에 대한 탁월은 세 가지로 구성된다. 보편성: 신은 창조물에서도 수집되지 않은 것을 함께 연합하는 모든 완전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풍부함: 완전성은 창조물로서 흔히 없는 경우이고 어떤 결점 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치: 창조물 안에 다양하게 있는 완전성들은 신 안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신적 탁월을 묘사하는 또 다른 방법은 신적 무한이다. 신은 본성의 범위와 모든 정의와 구별도 초월한다. 탁월하게 신은 모든 것과 비교된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범주 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이 무한한 존속적인 존재 그 자체이라고 부른 것은 신적 본질과 존재가 실재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따라서 신의 탁월은 신적 무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무한한 존재 그 자체(ipsum esse infinitum)”은 존재자 위에(supra ens) 존재한다. 역시 신의 본질은 존재 그 자체이고 인간의 이해하는 것 넘어선다. 신의 인식적 초월은 존재론적인 초월을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신적인 존재의 무한성과 동일하며 신의 본질과 존재가 동일하다.
신적인 탁월을 인식하는 것은 신이 인간의 정신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앎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신에게 봉사하고 찬미한다 하더라도 충분하지 않는다. 이것은 깨달음에서 생겨난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이 신을 찬미하는 것보다 더 위대하기”때문이다. 욥기 36:26절을 인용하면 “우리의 앎을 이기는 위대한 신을 바라보자” 그리고 “모든 사물들을 초월하는 즉 인간의 열망과 이해조차도 뛰어넘는 신적 숭엄함과 열망되어지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신보다 작다” 여기서 지성은 태양에 대한 올빼미의 눈과 같다는 의미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천사도 신의 본질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마지막으로 토마스는 바로 일반적 철학적 원리 토대위에 신의 탁월을 결론을 짓는다. “모든 결과는 그의 능력에 따라서 보다 더 탁월한 방식 안에 원인에 있다 그러므로 신은 모든 것 중의 첫 번째 원인이다. 모든 사물들은 그들 자체에게 본래 하던 것 보다 더 탁월하게 존재해야만 한다.” 이러한 원리는 결과들로서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일의적 원인들을 유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 일의적 원인들 혹은 다의적 원인들도 유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물들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완전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동일한 그 정의에 따라서 일의적으로 신 안에서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탁월한 신은 신적 이름에 의하여 일의적으로 찬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탁월하게 찬미되어진다. 여기서 토마스는 원인과 결과의 철학적 원리를 폭넓게 사용한다. 이것은 이성이 신의 탁월성에 대해 인식을 도와주는 역할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성은 신의 탁월성을 인정하도록 우리를 유도한다. 여기서 우리는 신에 의하여 원인이 된 실재들의 질서, 선, 그리고 규모에서 신적인 지혜, 선, 그리고 탁월성을 알게 된다.『신학대전』에서 언급하기를 우리는 신의 결과들에 근거한 자연적 이성을 통하여 신의 존재하는 가를 알 수 있다.
3중의 방법은 여기에서 이성의 빛에 대한 논의로서 묘사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인간은 결과들을 통하여 그리고 천사들은 자신의 본질을 통하여 신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은 모든 것의 원인이고 모든 것을 넘어서는 초월, 모든 것을 제거한다. 만약 탁월이 부정의 근거이고 그리고 이성을 통한 인식의 인과관계가 탁월의 근원이면 이성에 대한 결과들은 완전한 삼중의 방법의 배후에 숨어있다. 여기서 신의 존재에 대한 앎은 초월적 창조자로서 신에 대한 앎과 일치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다. 부정신학 방법과 삼중의 부정신학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부정의 길은 위 디오니시우스가 주로 이성적 신학의 영역들을 넘어서는 질적인 부정만을 이야기했다면 토마스는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의 상호관계를 논의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부정의 길(via negativa)은 확실하게 이성적이고 순수 지성에 입각한 것이지만 부정적 신비주의와 흑암까지 확장하고 있다. 또한 아퀴나스의 부정의 길이 존재자(ens)위에 그리고 존재를 초월해서 있는 반면에 신이 존속적 존재(Subsistent Being : esse)그 자체이라고 하는 신학의 근본적인 선언이다. 그리고 긍정과 무한성은 모든 부정들에 대한 풍부한 근원들이다.
둘째로 위 디오니시우스의 기본적이 이중의 방법과는 달리 토마스는 구성요소들의 질서와 다양한 종말론과 함께 3중의 방법을 제시하고 통합적인 전체로서 삼중의 방법을 사용한다. 여기에서 긍정적 서술은 처음에 신에 대하여 긍정되고 그리고 부정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월적 방식으로 다시 한 번 긍정하는 방식이다.
셋째로 공식적이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토마스 아퀴나스 안에는 부정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질적, 주관적 양식, 그리고 객관적 양식이다. 질적 부정들은 신의 본성의 순수성으로 더 멀어져 있는 신 실재들을 절대적으로 부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질적 부정은 근본적이다. 따라서 질적부정은 신으로부터 보다 더 분명하게 제거되어진다.(예를 들어 모든 그의 결과를 가진 물질계 실재) 그러나 완전성의 창조물 그리고 유한한 측면들, 즉 양태 부정들은 신에 대한 어떤 긍정의 중심에 있는 의미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신에 관한 일의적 완전성의 결과로 보려는 정신의 경향을 축소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네 번째로 위 디오니시우스 경우와 같이 부정의 원인과 목표는 토마스가 존속적 존재에 대한 신의 무한한 행위와 동일시하는 신적 탁월성이다. 2022/9/7 혜윰인문학연구소 /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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