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에서는 토마스의 아퀴나스의 철학의 출발점인 부정신학에 대해 논의되었다. 우리는 신의 불가해성으로서 토마스 부정신학은 우리가 신을 붙잡거나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사실의 확인했다.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신을 알 수 없을뿐더러 신은 인간의 모든 종류의 앎의 초월하기 때문에 신의 근거로서 불가해성하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부정신학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최고의 불가지론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부정신학의 강도를 완화시키고 긍정신학을 가능성의 개연성을 담지하고 있다. 또한 토마스의 부정신학이 신의 탁월성의 의미에 근거되어 있다. 신적 무한성도 신이 존속적 존재자체라고 하는 진술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이것의 신의 불가해성의 의미를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한다. 결국 부정신학의 풍부한 근원들이 긍정신학과 무한한 확실성이다. 이것은 극단적 부정신학을 넘어서서 긍정과 부정의 역설적으로 얽힘의 가능성을 이미 내재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제Ⅱ부에서는 긍정신학으로서 유비의 대해 논의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부정신학을 말하고 긍정신학을 말하는 이유는 신이 본질적으로 불가해한 모든 이름들과 사고를 벗어나는 신이라면 신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손에 잡히는 대상은 창조물의 체험과 관계, 속성들이다. 초대 기독교는 신에 대한 직접적인 해석과 표현을 피하기 위해 긍정과 부정 그리고 초월의 방식으로 신을 표현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은 보완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이처럼 인간이 체험하고 알려진 의미는 신에 대한 긍정이다.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유비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긍정신학을 말한다. 우리가 신에 대한 말할 때 창조물과 신이 동일한 의미를 갖는 일의적인 것이면 신과 창조물의 차이를 모르는 것이고 만약 다의적이라면 전혀 다른 의미를 적용하여 그 표현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에 유비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비는 긍정과 부정 또는 탁월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유비는 신의 모든 것을 표현하지 못하지만 신에 대한 방향을 설정함을 볼 수 있다. 또한 유비는 개념이 아닌 인간 정신의 판단으로 성립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유비의 또 다른 측면은 유비가 단지 술어들을 열거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유비 자체는 술어의 망으로서 긍정신학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몸부림을 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강조하기를 “신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긍정은 사실과 다르면 신은 그것들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 그것도 사실과 다른 것이다.” 라고 언급한다. 이것은 유비는 인간의 인간정신이 소유하고 있는 긍정적 개방론에 문제를 제기하고 빛에서 어둠으로 다시 더 빛나는 어둠으로 가는 역설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제Ⅲ부에서는 긍정과 부정을 넘어서는 존재와 무 그리고 신의 공속성에 대해 논의된다. 먼저 부정과 긍정의 상호 연결로서 유비와 부정과 긍정의 상호 분리로서 신의 불가해성을 다룰 것이다. 토마스는 부정신학의 앎이 최고의 앎이라고 주장하지만 긍정신학 비록 불완전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긍정신학의 불필요성을 주장하지 않았다. 인간은 신에 대한 술어와 인간의 술어가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고 신은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다양한 술어들의 표상을 나타낸다. 이것은 결국 종교언어의 우상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토마스는 인간의 언어와 신을 동일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의 부정신학과 긍정신학의 유비를 통하여 신적 실재에 이르고자 하였다.
6장 부정과 긍정 사이의 상호 분리와 연결로서의 불가해성과 유비 그리고 우상파괴
앞 장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긍정신학에 대해 논의했다. 이번 장에서는 2장과 3장에서 논의한 부정신학과 4장과 5장의 긍정신학이 토마스 신 담론에서 밀접하게 상호 역설적으로 얽혀 있음을 논의할 것이다. 부정으로서는 상호분리의 신의 불가해성과 긍정으로 상호연결인 유비는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신의 불가해성은 창조물인 인간과 신의 거리는 연결할 수 없을 만큼 질적 차이로 인하여 분리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리는 신의 초월성에 근거하고 있다. 반면에 토마스의 유비는 인간과 신의 거리를 최대한 연결하려는 시도이다. 유비에 따르면 모든 창조물은 본질적으로 신의 동적 실존인 “존재”안에 참여함으로 신의 안전성을 공유한다. 만약 인간이 신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언어를 통한 매개 항이 필요하다. 이것이 토마스는 유비로 보고 있다. 이것이 긍정으로서 연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마저도 내적 운동의 부정과 긍정의 역설을 가지고 있다. 유비는 상호 잘 얽혀져 있는 술어의 그물망이다. 이것은 동일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지닌 의미로서 긍정과 부정의 역설적 얽힘이며 같음과 다름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유비는 같음과 다름, 긍정과 부정(초월)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또한 유비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담론에서 신에 이르는 데 있어서 목적이 될 수 없고 수단이다. 신의 불가해성에 대한 주제들, 종교언어의 유비적 성격, 그리고 신의 다양한 명칭이 요구되는 것은 신의 해방적 언어를 위한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는 오직 창조물에서부터 신에게 명칭을 붙일 수 있기 때문에 신의 신비에 대한 핵심적 유비를 제공해 준다. 이처럼 부정과 긍정은 인간과 신의 연결하거나 분리한다. 토마스에 의하면 판단으로서 유비도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문법을 통하여 하나의 개념을 또 다른 개념에 비교하는 부정적인 또는 긍정적인 진술을 만든다. 더욱이 이것은 부정 또는 분할 그리고 긍정 또는 합성이 존재와 비존재를 의미한다.
6.1 유비와 우상파괴의 토대
6.1.1 유비의 불가해성과 술어의 망
토마스 아퀴나의 부정신학의 방법은 신을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는 진술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이 부정신학 입장에서만 신학을 논한다면 종교적 예배나 기도가 불가능할 수 있다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오직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러한 부정신학만 주장한 것은 물론 아니다. 부정 신학이 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아는 앎이 최고의 앎이라고 선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 대한 긍정신학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여백을 두었다, 물론 긍정신학은 전적으로 완전하지 못하고 불안전한 요소를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만 하다. 신에 관한 긍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신학을 진술을 하는 것이 긍정신학이며 그것의 핵심은 유비(analogy)이다 토마스의 유비이론은 신에 관하여 직접적인 앎을 아니라 창조물을 통한 간접적인 앎을 통하여 신에게 접근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절에서 이러한 토마스의 유비이론을 바탕으로 긍정과 부정의 상호연결로서 유비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를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유비가 어떻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담론에서 우상 파괴의 장치로서 기능한지도 더듬을 것이다.
토마스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신학대전』에서 유비의 문제가 신의 앎의 문제를 다룬 이후에 ‘신의 이름’의 등장하는데 거기서 유비를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대이교도대전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 신 존재증명을 다루고 그 다음에 제거의 방법을 제시한 후에 부정의 방법을 그리고 마지막에 신의 명칭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유비는 주로 술어를 적용된다. 신에게 적용된 술어들이 인간에 적용되었을 때 일의적 의미가 아니다. 유비에 대한 해석은 앞에서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생략한다. 신과 창조물의 관계에서 둘의 속성이 다르게 때문에 토마스는 신에 대해 언급하기를 파악되지 않는 ‘파악되지 않는’(uncomprehended)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토마스 아퀴나스에 ‘파악한다’는 말은 그 대상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신의 본질을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신의 불가해성이다. 따라서 신은 본질적으로 불가해성하다. 이런 신의 불가해성은 신적 초월성에 근거하고 있다. 신의 초월성은 유대 전통과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 사상이다. 신의 초월은 유한한 인간의 삶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흑암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의 불가해성인 신의 본질은 유비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접근해야한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에게 적용되는 술어가 유비적이라고 말한다. 토마스가 언급하는 유비는 중도를 의미한다. 이것은 동일성과 차이성을 역설적으로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이론이 신에 대해 언어를 사용하여 말을 한에 있어서 문제는 여전히 있을 것이다. 유비이론 자체가 이미 언어의 불완전성을 통해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신에 대해 언급하는 자체가 무리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인간이 신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언어를 통한 매개 항이 필요하다. 이것이 토마스는 유비로 보고 있다. 유비는 종교언어이다. 일종에 은유이다. 종교의 우상화는 종교언어의 우상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언어는 이미 인간의 욕망의 투사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언어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언어의 다양한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속에 그 언어가 함의하고 있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종교 언어는 보통 언어와는 다르게 다른 이미지를 함의하고 있다. 그 종교언어는 비유적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비유적 표현은 직유(simile)도 아니고 어떤 형상(figure)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은유적 표현은 상징(symbol)과 유사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샐리 맥퍼이그(Sallie McFague)에 따르면 은유는 상징적 언어와 판이하게 다르다. 우선 비유는 비유를 듣는 청중의 믿음이나 종교적 관점을 상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과 초월적인 세계의 연속성이 아니라 불연속을 강조한다. 이것은 창조물의 언어이며 신의 방식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방식과 신의 방식 사이의 불연속성을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종교언어를 말하는 것은 어떤 삶의 형태에서 나오는 삶의 한 부분이라고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에 대한 신앙 자체가 삶의 형태가 되어 종교언어의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종교언어의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앎의 문제이다. 결국 앎의 문제는 지배의 문제와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종교언어의 합리화는 종교인의 욕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신적 본질을 표현하는 종교언어 조차도 개념화하여 숭배하는 경우가 된 것이다.
결국 인간들은 신에 대한 술어와 인간의 술어가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고 신은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다양한 술어들이라는 표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결국 종교언어들을 우상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우리의 언어와 신적인 실재를 동일시하는 데서부터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신의 초월성을 알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와 신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 속에서 ‘부정의 길’(via negativa)과 유비를 통하여 신적인 실재에 이르고자 하였다. 다석 유영모도 “큰 얼(大靈)이신 신은 본래 이름이 없다. 신에게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신에게 이름을 붙이면 이미 신이 아니요, 우상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종교적 언어가 지니는 유비를 알지 못한 것이다. 샐리 맥페이그는 종교언어의 우상화로 인한 문자주의에 대해 언급한다. “손가락과 달을 동일시하는 거나 달은 모르고 손가락만 아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라는 필리스 트리블의 말을 인용하면서 ‘은유적인 방법’을 제안한다. 그가 은유법을 말하는 이유는 단지 문자주의에만 연관된 것이 아니다. 종교 언어는 우상화뿐만 아니라 삶에서 있음과 앎 사이의 거리가 결국 양자를 무관하게 떼어놓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서 맥페이그는 종교언어의 은유성을 경작해야 함을 제안한다. 맥페이그도 종교적 상황과 멀어진 종교언어는 우상화되어 질 수 밖에서 없음을 강조한다. 경외감, 놀라움, 신비감을 무시한 언어는 인간의 언어와 신적 실재 사이에 놓일 수밖에 없는 거리를 망각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우상적이 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토마스도 일의적 의미나 다의적 의미도 일종의 우상화라고 언명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유비가 우상 파괴적 장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창조물로부터 파생된 언어를 출발하여 신에게 접근한다. 토마스는 이것을 다른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다의적 진술은 어떤 것이 그 명칭만 같고 그것의 정의가 다양한 적용에서 다른 사물들을 다의적으로 진술될 때 나타난다. 예를 들면 개라는 말은 짖는 동물과 별자리를 말한다. 그 둘은 명칭에서는 일치하지만 정의에서는 다르다 왜냐하면 명칭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정의이기 때문이다 유비적 진술은 한 사물이 정의는 다르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사물과 동일한 것에 관련될 때 유비적으로 진술된이처럼 유비는 한사람의 정의는 다르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사물과 동일한 것에 관련될 때 유비적으로 진술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볼 때 유비는 이미 자체적으로 술어의 망을 소유하고 있다. 유비 문제는 앞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대략적인 예를 살펴보면 유비는 관계의 다의성으로서 유비와 유비의 일차적 의미와 이차적 의미를 통해서 유비의 술어망을 확인할 수 있다. 유비적 용어들은 어떤 하나에 대한 것을 언급함으로 다른 의미를 수반한다. 유비적으로 서술된 용어들은 의미에 있어서 불완전한 유사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신학대전』는 아래와 같이 유비를 서술한다. 유비적 서술은 순수 다의적인 것과 단순 일의적인 것 사이에 있다. 유비적으로 말해지는 것들에 있어서는 일의적 것들에 있어서 (in unvocis)와 같이 하나의 개념(이유, ratio)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다의적인 것들에 있어서와 같이 전혀 다른 개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수로 말해지는 명칭은 하나에 대한 다양한 비례들을 표시한다. 예를 들면 병에 대해 말해지는 ‘건강한 것’이란 명칭은 동물의 건강의 표징(signum)을 표시하고 의약에 말해지는 ‘건강한 것’ 이란 명칭은 동물의 건강의 원인을 표시한다.
위에서 언급한 유비는 신에게도 적용된다. 우리가 ‘신이 선하다’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신이 선의 근원’임을 말하지만 신의 본성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창조물들을 특성을 너머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에게 부여할 수 있는 술어는 그 원래의 뜻을 초월한다. 이와 같이 토마스 유비이론은 신의 본성과 인간 언어 초월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초월은 넘어선다는 의미이다. 신을 일의성 의미를 넘어서서 유비적으로 서술함으로 하나의 정의에 하나의 의미만 부여하는 주어와 술어의 일치를 극복하고 술어의 관계 망으로서의 접근함으로 원래 인간의 언어의 의미를 초월하게 된다. 결국 유비는 술어의 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유비의 일차적 의미와 이차적 의미의 연결, 판단으로서 유비의 술어의 다양화 등이 결국 유비가 술어의 망인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토마스의 유비이론은 인간이 신에 도달하는 사다리에 불과하다. 사다리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수단이지 목적지는 아니다. 따라서 목적에 도달하면 사다리는 버려야 한다. 유비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종교언어에서 토마스에게 유비가 아닌 일의성의 의미를 고집한다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동일성의 과정을 통해 우상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담지 할 것이다. 종교언어가 개념화되고 관념화되어 굳어진다면 이것이 바로 우상화이다. 토마스는 이러한 개념화와 화석화된 언어를 피하기 위한 장치로 유비를 언급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맥페이그도 은유의 한 형태인 비유을 살펴보면 은유 안에 이미 우상을 경계하고자 의미들이 함축적으로 들어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맥페이그는 다음과 같이 비유는 전통적인 세계 이해 방식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안위와 안전을 목적으로 쌓아올린 사회적, 경제적, 신화적인 구조에 대한 모욕이다 비유는 그러한 구조들을 뒤집고 전복하려고 할 뿐 아니라, 신의 세계의 방식은 세상의 방식과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비유나 유비는 결론을 열어놓은 종교언어이다. 신에 대한 개념이나 일의적 의미와 다의적 의미를 근거로 삼지 않기 때문에 동일성의 우상숭배의 덫에 빠질 수가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마저도 내적 운동의 부정과 긍정의 역설을 가지고 있다. 유비는 상호 잘 얽혀져 있는 술어의 그물망이다. 이것은 동일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지닌 의미로서 긍정과 부정의 역설적 얽힘이며 같음과 다름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유비는 같음과 다름, 긍정과 부정(초월)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또한 유비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담론에서 신에 이르는 데 있어서 목적이 될 수 없고 수단이다. 마치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본다” 말처럼 유비는 손가락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유비는 신에 접근하는 사다리이며 목적이 될 수 없고 수단일 뿐이다. 유비는 우상숭배적 일의성과 다의성을 넘어서서 개념보다는 판단에 기초에 하고 있다. 유비는 신과 창조물과 인간의 거리두기이다. 유비는 긍정의 길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이자 신 담론의 정적인 개념이 아닌 역동적 개념으로 앎의 주체에게 다가온다. 유비는 판단이다 판단은 직관적 인식 대상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분으로서 판단이 가능하다.
6.1.2 유비와 이름의 신비
앞에서 우리는 술어의 망으로서 유비가 어떻게 우상파괴가 가능한지를 살펴보았다. 이것을 바탕으로 유비와 관련된 신적이름의 신비와 우상에 대해서 논의할 것이다. 기독교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신에 대한 앎에 대한 표현의 한계와 가능성의 성찰했다. 위에서 우리가 충분하게 살펴 본처럼 어떻게 보면 신은 접근할 수 없는 빛이기 때문에 신의 신비를 언급하기 위해 인간이 사용하는 이름이나 상징이나 개념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신의 이름은 표현 불가능하다. 신의 참 이름은 하나의의 신비이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신께서는 모세에게 이르셨다.…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 되리라”(출 3:15)라는 이 말 중에“영원한”(레올람, leolam)이 여기서는 ‘감추다’를 뜻하는 ‘레알렘’(lealem)으로 표기되는데 이것은 “신의 이름은 숨겨져 있다.” 앞에서 언급한 야훼의 4자로 된 신의 이름조차 표기하는 것조차 꺼리게 되었다. 신의 이름은 표현 불가능한 이름이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도나이’(Adonai, 나의 주님)로 옮겼고 사마니아인들은 ‘하셈’(Hashem)으로 헬라어로 번역한 사람들은 ‘카이러스’(Kyrios, 주님)로 옮겼다. 이 처럼 신의 이름은 신비이면 신은 신비 그 자체이다. 함부로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암흑이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개념, 말, 상상 등 창조된 존재 안에서는 신의 실재를 정의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신적 존재에 대한 모든 개념들이 완전성을 표현하기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미숙하지만 긍정적 이든 또는 부정적이든 어떤 매개를 통하여 신을 표현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 위 디오니시우스와 같이 토마스 아퀴나스도 인간은 종교적 실재를 말하기 위해 그 실재를 지향하고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은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실재를 인식하고 그 실재에 명칭을 붙이고 그것을 표현하기 적당한 언어를 만든다. 신에 대한 명칭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때문에 우리는 신에게 많은 이름을 부여해야 한다.” 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러한 신에 대한 모순의 불가해성이 일종의 신적 신비이다.
신의 불가해성에 대한 첫 번째 설명은 그 이름과 개념과 상징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신의 초월적인 면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가 만일 신의 핵심적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면 신에 대한 설명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신에 대한 명칭을 붙이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고 신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결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다양한 세계는 실제의 한 면인 신의 흔적을 보여준다. 곧 현실적 존재는 다양한 형상으로 형언할 수 없는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신과 창조물의 유사성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창조주와 창조물 사이의 유사성이 생기는 것은 단지 창조물의 그림자가 아닌 신의 본질이 신과 창조물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이 유비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창조물이 신과 유사하다는 의미이지 신이 창조물과 유사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비는 유사성과 차이성(같음과 다름)을 토대로 하여, 신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긍정적 방법과 부정적인 방법을 모두 포함한다. 유비가 신에 대한 서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의 본질은 암흑 속에 머물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신에 표현을 전혀 언표될 수 없다면 우리는 신에 대한 명칭을 부를 수도 신앙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유비는 불가해한 신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신적 이름에 대한 신비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신에 대한 많은 이름은 신적 신비에 대한 깊은 체험과 그것을 유지하려는 행위에서 연유된다. 성서와 기독교 그리고 세계의 종교들은 많은 신적 은유와 상징들을 가지고 있다. 그 신성은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한다. 폴 리꾀르가 언급한 것처럼 성서 안에는 공동체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여러 형태의 다양한 소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근본적으로 비형이상학적이다. 성화 ‧ 예언 ‧ 계명 ‧ 지혜서 ‧ 찬미가와 애가 등의 이 이야기들은 각각 거룩한 신비와 맺는 다양한 해석을 반영한다.“그러므로 이 ‘신’은 여러 부분적 표현들의 수렴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은 여전히 그 모든 것을 절묘하게 빠져나가는 실재이다. 이 이야기들을 모체로 엄청나게 많은 상징들이 역할에 참여한다. 신은 어머니 ‧ 아버지 ‧ 남편 ‧ 사랑받는 여인 ‧ 동반자 ‧ 친구와 같이 인간적인 관계에서 취한 용어들과 변호자 ‧ 해방자 ‧ 왕 ‧ 용사 ‧ 판관과 같이 정치적인 삶에서 나온 상징들로 표현된다. 성서는 인간의 기능들과 직업들을 폭넓게 열거하며 신을 묘사한다. 세상과 함께 활동하는 신은 농어인 ‧ 목동 ‧ 농부 ‧ 세탁부 ‧ 건설 노동자 ‧ 옹기장 ‧ 어부 ‧ 산파 ‧상인 ‧ 의사 ‧ 빵 굽는 여인 ‧ 교사 ‧ 작가 ‧ 예술가 ‧ 유모 ‧ 광부 ‧ 주부로 묘사된다.
위에서 살펴보는 것처럼 신은 출산과 어린이 양육, 돌보는 여성 등의 신의 모습을 나타낸다. 신에 대한 암시들은 신을 동물 세계를 포효하는 사자, 하늘을 나는 어미 새,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 닭으로 묘사하며 빛 ‧ 구름 ‧ 바위 ‧ 불 ‧ 시원한 물 ‧ 생명 자체와 같은 우주적 실재를 통해서도 묘사된다. 이것은 모든 것의 근본이며 목적, 우리의 존재의 근거, 실재의 깊이, 우리를 초월하는 존재, 궁극적 미래, 존재 그 자체로서 신이다. 성서 권 밖의 유다의 용법은 신에 대한 많은 이름들을 드러내는 풍요한 근거다. 신성의 본질을 가장 참되게 잘 설명한 이름은 바로 침묵이다. 그것은 발음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이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형언할 수 없다. 이것이 신의 불가해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유비가 신과 신의 이름의 신비를 연결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풍요롭고 많은 이름을 부른 다음 인간은 침묵으로 신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몇 세기동안 이루어진 서양의 표현은 신에 대해 적용하는 이름들을 찾는 인간의 노력에서 나온 이 다양한 소리에 비추어볼 때 정말로 빈약하고 보잘 것 없다. 신에 대해 참으로 다양한 명칭을 소유하고 는 성서와 전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보면 지리멸멸하다. 신의 신비에 대한 적절한 이야기를 위해 종교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신 표현을 다시 새롭게 하는 공간을 열어 줄 수 있는 토마스의 유비이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아퀴나스가 “우리 어휘의 부족함”이라 고백한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다양한 명칭을 요청한다 할지라도 신에 대한 결정적인 것은 신의 불가해성이다. 앙리 드 뤼박의 은유를 빌려와 보자. 신의 호칭록을 편집하여 신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금덩어리 같은 비싸고 귀중한 것을 긁어모으는 식으로 진리를 양적으로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오히려 수영하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곧 그들은 오로지 팔을 번갈아 가며 새 물결을 갈라내는 운동을 통해서 떠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오로지 신을 표현하는 상징들을 늘 새롭게 형성하고 제거함으로써만 신에 올바른 앎을 지니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신의 모습을 한 틀에만 고정시킨 채 새롭게 사고하지 않는다면 결국 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이해했다면 당신이 이해한 것은 신이 아니다. 신의 불가해성에 대한 주제들, 종교언어의 유비적 성격, 그리고 신의 다양한 명칭이 요구되는 것은 신의 해방적 언어를 위한 당연한 귀결이다. 결론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험적 방법론에서 우리는 오직 창조물에서부터 신에게 명칭을 붙일 수 있기 때문에 신의 신비에 대한 핵심적 유비를 제공해 준다.
6.2 존재 자체와 우상파괴의 토대
6.2.1 존재자와 존재자체의 차이
존재(esse)에 대한 신의 불가해성을 다루기 위해서는 존재와 존재자 그리고 존재자체에 대한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가능하다. 토마스 신학을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존재(esse)와 존재자(ens) 그리고 존속적 존재자체의 구별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필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마스의 신학을 존재로서의 존재자의 학문이라고 하는 점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존재를 존재자로로 종속시켰다. 토미즘 형이상학은 존재자에 주의를 집중한 듯하다. 존재라는 관념을 도입하는 목적은 존재자(ens)를 설명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존재자가 겉보기에 형이상학의 주제, 사안 때문이다. “실존주의”라는 말은 잘못된 명칭이다. 그 이유는 존재(esse)보다 존재자(ens)에 더욱 방향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형이상학도 “존재자의 학”(ontoloy), 즉 존재(esse)의 철학이 아니라 존재자의 철학이다. 존재(esse)가 에쎈티아의 우위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고 존재자에 대해서 동일한 우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esse)가 존재자(ens)에 종속적이라고 주장하기는 커녕 도리어 실제로는 그 반대를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존재자가 그 의미를 존재로 부터 취한다는 점을, 곧 존재자(ens)가 부정사로부터 파생한 분사라는 점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존재자(ens)는 존재에 대한 한정을, 곧 무한한 완전성에 있어 존재인 것을 한정지은 하나의 참여를 가리킨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신에 대한 가장 적절한 지칭은 존재자보다는 존재(esse)의 견지에서 표현된다. 토마스에게 신은 가장 고유하게는 제일의 존재자(prima ens)로 언급되기보다 존속적인 존재자체로 언급된다. 존재자라고 말하는 것보다 존재(esse)라고 말하는 것이 신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신에게 있어서 존재자와 존재의 구분은 타당하지 않다. 신은 그분 자신의 존재(esse)이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로부터 파생된 낱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존재 자체, 존속적인 존재라고 말해야하는, 이 말은 사실상 존재에 관한 토마스 어휘 속에 참으로 기본적인 표현이다.
토마스는 여기서 존재와 존재자(ens), 존재(esse) 자체와 유한한 존재자를 가능한 한에서 날카롭게 구분한다. 존재자는 존재의 유한한 양태이고 그 유한성의 정도는 그것의 본질에 의해 측정되는 방식으로 본질과 존재자가 모두 무한한 존재자체라는 중심적인 개념에 종속되어 있다. 존속적 존재 자체인 신은 존재자를 초월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비존재(無)라는 의미에로까지 개연성이 있다. 존재자(ens)와 다르면서 존재자에 의해 은폐되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점은 토마스 사유에서의 신비적 차원을 개방하는데 왜냐하면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인 존재는 우리 지성의 능력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성은 존재자(ens)에만 정통할 뿐이고 존재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 토마스의 중심적인 언설로 등장한 사상, 존재의 참여라는 사상의 심장부다. 사실상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틀로부터 플라톤의 틀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것이 바로 참여이다. 이 사상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존재자(ens)는 그것이 존재자체를 참여로 인하여 존재자(ens)가 된다. 존쟁의 참여에 대한 문제는 앞에서 다루었음으로 생략하고 필요한 부분만 논의할 것이다. 존재에 대한 참여를 다루는 논의의 출발점은 토마스가 쓴『보에티우스의 제7일론에 관한 주석』에서이다. 이 책에서 보에티우스는 있는 것(quod est)과 있음(esse),을 구분하고 있는 것은 실존하기 위해 있음을 참여하지만, 그러나 있음은 그 자신 이상의 아무것도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토마스는 존재(esse)와 존재자 간에 세 가지 차이를 열거한다. 첫 번째 차이 “존재 자체는 있는 일의 주체로 작용하지 않는데 이는 사실상 달리기가 달리는 일의 주체로 지시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존재 자체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존재자는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두 번째 차이는 바로 참여라는 관념으로부터 취해진다. 토마스에 의하면 참여한다는 것은 “부분으로 잡는다”(partem capere)는 것이다. 이것은 참여하는 주체가 완전성을 부분적인 특정한 방식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존재라는 비-한정적인 명사는 ”무규정적이고“ 그 자체로 존재자의 특정한 존재나 양상에 제한되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 차이는 존재 자체는 ”순수한“ 완전성이라는 것이다. 즉 외적인 아무 것도 부가되거나, 그것과 더불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사물과 다르다. 존재는 자신의 분여되지 않은 상태에 있어서 순수한 존재(esse) 오직 존재일 뿐이다. 왜냐하면 불을 갖지만 그 자체는 불이지는 않는 것이 참여에 의해 불타고 있는 것 같이 존재를 갖지만 존재이지는 않는 것이 참여의 의해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은 그 분 자신의 본질이다. 따라서 만약 그분이 그 분 자신의 존재이지 않다면 그 분은 본질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참여된 존재자일 것이다. 그 분은 최초 존재자가 아닐 것이다.
토마스의 형이상학에 대한 전통적인 정식들은 토마스가 가진 존재(esse)와 존재자(ens) 간에 구분에 대한 해석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생기를 북돋는 통찰을 은폐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토마스 철학을 하이데거가 행하는 존재망각이라는 비난이 사실로 인정하는 대 중요한 역할을 했다.유명한 토마스 학자 질송에 의해 처음으로 존재(esse)의 우위성이 명료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이거(Geiger), 파브로(Fabro)등등에 의해 연구된 참여론과 존재를 함께 고찰하고 그리고 이러한 해석들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ens)간의 차이에 의하여 보면 토마스가 존재(esse)의 문제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토마스는 한갓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를 사유의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토마스에게서 신은 하나의 존재자, 심지어는 “최고의 존재자” 조차도 아니라는 점이다.사물들이 상이한 것은 그러므로 각자 본성에 비례해 상이하게 존재를 수용하는 그들의 상이한 본성 때문이다. 그런데 신의 존재는 어떤 다른 창조물에 의해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바로 신의 본성이나 본질이다. 그래서 만약 신의 존재가 모든 사물들의 존재와 동일시 될 수 있다면 모든 사물들은 함께 연합하여 절대적 통일성의 단일한 한 존재자로 될 것이다.
비록 창조물은 존재(esse)를 참여하고 신은 순수한 존속적인 존재일지라도 그 창조물이 신의 존재를 참여함이 신이 창조물의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물들이 바로 신의 존재(esse)를 가짐에 하나가 되는 그런 파르메니데스적 범신론도 거부한다. 또한 창조물들이 신의 존재를 참여함에 의해서 한갓 신의 그림자나 반영들로서, 곧 존재(esse)가 고유하게 포함되어 있지 않는 이미지들 또는 존재(esse)의 희미한 모사들로서, 신으로 구분되어질 그런 엄밀한 플라톤적 참여도 거부하다. 토마스는 고유한 존재자, 진정한 실재에 대한, 곧 각각의 개별적인 존재자나 존재자에 대한 건강한 감각을 가졌다. 토마스의 참여론은 창조물들이 공통적인 존재, 존재일반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보에티우스의 제7일론에 관한 주석』에서 존재(esse)가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오직 존재자가 있다고만 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때에 그는 공통적 존재(esse in communi)를 언급하는 것이지 신의 존속적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존재일반(esse in communi)은 하나의 추상이기 때문이다. 신을 참여하는 창조물은 신의 존재의 일부를 갖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창조물의 존재는 신의 존재의 확산을 나타난다.
6.2.2 존재 자체(esse)와 신의 신비
존 카푸토에 의하면 토마스 형이상학의 해체의 과제는 존재(esse)의 해석과 지성의 해석이라는 방향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토마스 안에서 지성과 존재의 무매개적 통일성 즉 사유와 존재의 공속성이다. 질송이 볼 때 토마스 신학의 핵심은 존재를 본질적인 구조에로 환원토록 하는 형이상학의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다. 존재를 형상이나 구조인 듯이 사유하지 않는다. 존재(esse)는 본질과 같은 방식으로 다뤄질 수 없다. 본질은 한 사물의 정의에 의해 가리킨다. 이 점은 존재가 정의 완전 밖에 놓임을 의미한다. 존재가 무엇인가라고 말하거나 묻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바로 본질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형상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나 결코 어떤 형상이 아니다. 개념파악이라는 의미에서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그렇다면 존재가 정의될 수 없다면 무엇인가. 존재(esse)는 개념적인 것은 아닌 어떤 의미(가지성, 이해가능성)를 갖고 있다. 지성은 판단함의 현실 속에서 실존의 현실에 도달하며 판단적 현실은 그 편에 있어서 사물자체에 의해 발휘된 현실에 대한 반응이다. 존재의 정의 해줄 가능성은 존속하는 존재자체라는 신의 언설을 조사할 때 강력하게 확신된다. 왜냐하면 존재가 정의하는 능력을 피한다면 존재인 신은 최대로 정의 불가능이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가 형상과 구조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신은 마음의 개념화 능력에 대해 최대로 낯선 것이 된다. 미국의 탁월한 토마스 학자인 노리스 클라르케(W. Norri Clarke)가 주장하는 것은 토마스가 존재가 언어의 범위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만약 신이 존속적인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면 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클라르케(W. Norri Clarke)는 토미즘의 존재의 개념화 불가능성의 반향들은 언어의 수준에서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부정신학은 놀라운 일이 되지 못한다. 질송은 이 점을 매우 훌륭하게 지적하고 있다.
토마스의 부정신학은, 자신이…최고대상의 본질을 안다는 자기기만의 태도에 맞서려는 마음 자신의 활력 있고 탁월하게 적극적인 노력이다. 인간의 지성 안의 어떤 것이나 그런 태도에 반역한다. 인간이 …지성의 대상들을 알지 못한다는 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지성의 대상들에 종사하는 일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껏 있어온 것 중 가정 철저하게 상상력 없는 신비주의, 곧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Clairvaux)의 신비주의와의 깊은 일치 속에서 토마스는 우리가 신에 관한 모든 표상이나 형태적 묘사를 초월하도록 만든다. 질송이 지적하는 토마스의 주장들은 우리가 신에 대해서 오직 그 분이 있다는 것만을, 그리고 그 분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분이 무엇이 오직 아닌지를 안다는 것이다. 만약 존재(esse)가 우리가 아는 창조물 안에서 개념화될 수 없는 것이라면 순수하고 존속적인 존재인 신은 우리 마음의 현재 상태의 능력들로부터 가장 머리 떨어져 있다. 부정신학의 범위 내에서 사람들이 최선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신의 존재(esse)가 무엇이 아닌 것을, 즉 그것은 시간적이지도 복합적이지도 신체적이지도 않다는 것 등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점은 바로 토마스가 다음과 같이 쓰게 된 이유이다. “신에 관한 인간의 앎 속에서 궁극적인 것은 우리가 그 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토마스 신학의 절박함은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형이상학 이상의 것을 향한 갈망, 신적인 존재와의 만남을 향한 경향성, 다시 말해 이승의 삶 속에서는 가능한 정도만큼만 오직 신비주의자에게만 허용되고 결국 행복에 찬 봄 안에서만 충분히 가능한 그런 어떤 직접적인 봄을 향한 경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형이상학 안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제1원인이 사실상 실존한다는 단지 표상적으로 그리고 연역적으로 안다. 우리는 신적인 존재에 관해서 추상적으로 안다. 신의 불가해성, 즉 부정신학에 의하면 토마스가 황홀(raptus, 신에 의한 붙들림)이라고 부르는 신비적인 내밀성이다. 이것은 모든 환영들과 개념들, 그리고 연역적 형이상학의 모든 도구들은 다 버리고 나아가 신에로의 의지조차 포기하는 자들에게만 가능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신학대전』저자인 동시에 “나는 네가 현신하기를 원한다. 숨어계신 하나님”의 찬송가 작자이다. 제럴드 맥쿨(Gerald Mccool)은 금세기 초반에 스콜라 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토마스 신(神)의 형이상학을 그의 개인적인 종교적 경험에 연결시키는 이해 가능한 연관에는 주목하지 않았고 더더욱 개척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오도적인 소개 속에서 토미즘은 최고의 합리적인 체계라는 인상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사실상 비개인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학문으로만…간주되었다. 신에 대한 종교적 인식에 있어서 개인적인 경험과 비개념적인 직관이 갖는 중대한 역할에 대해서는 평가가 거의 제시되지 않았다.맥쿨(Mccool)이 말하는 바로 이러한 “개인적인 종교적 경험”이 토마스의 진정한 침묵을 구성하는 것이자 그의 사유에 대한 어떠한 해석을 위해서나 불가결한 지평을 형성하는 것이다. 토마스의 의해 예증된 신학은 “존재”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그 신비, 곧 불가해한 생명력을 가장 훌륭하게 정의하고 있다. 신에게서 존재와 본질은 하나이고 같은 것이기에 신의 본성은 바로 존재(esse)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적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하니 신적 존재는 그 구별된 유한한 존재력을 주기 때문이다. 신은 자립하는 존재, 그 자체 (ipsum esse subsistens) 이다.
오늘날 이런 존재의 개념으로 많은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서방 교회는 존재를 유 類개념으로 붕괴시킨 유명론(唯名論)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는데 그 때문에 신의 사랑 있는 신비를 드러낼 수 없었다. 심지어 신 토미즘의 형이상학에서도 존재를 본체론자의 용어로 언급하여 일종의 객관적 본질을 뜻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존재(esse)의 개념이 전통적으로 신에게 적용될 때 그것은 관계있는 어떤 것도 즉시 상기시키지 않고 오히려 효력을 손상시킨다. 오늘날 서방 교회의 대부분 지성인들에게 존재(esse)라는 언어는 무언가 정적이고 제한되고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임을 의미하며 따라서 불가해한 신비의 역동적이고 필수 관계적 본성을 나타내기에는 부적절하다. 그러나 필로(philo)에서 메리 데일리에 이르기 까지 오랜 신학적 전통이 발견한 것은 사물의 실제적 존재에서 그리고 비존재와 악의 세력에 대하여 존재를 지향하는 그들의 투쟁에서 생긴 존재(esse)의 직관이 신의 언급을 위한 유비적 선택을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언어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면서도 실재에 대하여 자유로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범주를 제공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적 곤경에 너무 많이 집중함으로써 우주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지 않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신 개념과 연관된 존재(esse)라는 언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들 존재의 원천인 신과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여기에서 연유하여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창조물인 우주의 상태에 대한 암호문자이다. 그리고 악에 대한하는 암호문자이다.
우리의 존재직관은 부정적 체험, 긍정적 체험 둘 다 모두에서 생겨난다. 고전적 토론은 거의 배타적으로 긍정적 체험만을 다루고 있지만 존재개념은 오히려 그 대조적 부정적 체험의 변증법에서 유비적으로 더욱 경이로울 뿐만 아니라 더욱 형성될지 모른다. 생명과 선을 파괴하는 강한 부정적 체험은 인간 정신의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는 저항을, 황폐화시키는 악에 대항하는 고통의 울부짖음을 불러일으킨다. 존재란 비록 부족해도 거기에 꼭 있어야 하는 것으로 고통과 대비되어 희미하게 감지된다. 존재(esse)는 창궐하는 비존재의 힘과 대비되어 확언된다. 오히려 존재란 물체의 참된 실재도 존재자체이며 실제로 존재의 모든 특성들을 주는 활동이다. 존재는 비록 파악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가정 역동적이고 생생한 실재로서 사물을 거기에-존재케 하는 현실act-there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신은 존재활동 그 풍부한 생명력의 불길이며 우주의 원인이며 그 존재의 동력이다. 신의 거룩한 그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모든 사물은 존재의 불길 속에 있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신학의 역사는 두 가지 명백한 규정이 적용된다. 첫째로, 초기 신학에서는 존재가 외면적 관계의 범주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신의 존재(esse)는 본질적으로 사랑이다. 신의 존재는 단일한 본체가 아니고 친교의 행위로 본래 관계적 존재이다. 기억해야할 둘째 조건은 신을 서술할 때 존재는 그 어떤 특유한 개성이나 속성의 언급이 아니며 신이 첫 구성원이라는 식의 상류 등급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신이 “신이 존재 그 자체”라는 주장은 세상을 포함하는 존재론적 연속이라는 개별적 존재자를 분명히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을 잊을 때마다 신이 전 실체의 부분이 되고 또한 큰 전체의 한 요소로 감소되는 오해가 생긴다. 신성도 존재의 범주, 곧 아무리 크고 더 좋다 해도 바로 그 존재자체 거기에 갇혀 있게 된다. 이 경우 신은 “존재보다 더 큰 분이다”는 에리우제나 (Eriugena)의 주장은 사실이다. “‘신은 존재(esse)한다.”는 말은 불충분한 진술이다.” 라는 아브라함 헤셸 (Abraham Heschel) 의 통찰은 그렇다. 만일 범주를 더 고찰한다면 순수존재인 신은 그 어떤 유類, 어떤 개념, 심지어 존재 그 자체도 초월하는 분이다. 지평선 그 자체는 지평선 안에 나타나지 않고 모든 것을 한정하는 경계는 더욱 궁극적 경계에 의해 한정된 그것일 수 없다. 토마스는 언급한다. 곧 “신은 어떤 유類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지닌 개념의 한계를 드러내 준다. 신의 생명력은 개념상 주제로 파악할 수 없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긍정되고 암시될 뿐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종교 사상가들은 존재의 초월적 역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가 명사 이외의 다른 말로 언급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신을 표현하는 “존재-하는 Be-ing”이라는 이 말은 명사가 아니라 역동적 행동을 암시하는 품사인 동사로 이해해야 한다. 존재-하는 Be-ing은 그 안에 모든 존재들이 참여하고 살아 있고 움직이고 자신의 존재를 갖는 “동사”Verb이다. 이것은 자동사이다. 곧 어떤 대상에 의해 한계지어지지 않고 어디서나 높이 솟아오른다. 존재-하는 Be-ing이라는 이 동사의 보편적 현존은 비존재의 파괴에 저항하는 창조적 희망을 일으키면서 세상 도처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동사들 중의 동사인 이 무제한의 자동력이다.
캐서린 라쿠냐(LaCugna)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의 신에 대한 질문을 구조적으로 연구하면서 이와 비슷한 수단을 택하여 존재(esse)라는 중심적 용어를 명사가 아니라 주격술어 “존재한다.” to-be로 번역한다. 윌리엄 힐(Hill)은 존재를 명사가 아닌 분사로 번역하여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닌 행위를 암시하는 말의 형태, 곧 “존재한다.” to be의 실행으로 본다. 존재의 역동성에 대한 이런 강조는 존 맥커리가 신의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letting -be 역동적 행위로 멋지게 바꾸어 말하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존재로서의 신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더욱 철저하게 존재하게 한다. 다시 말해 창조물을 무관하거나 하거나 무관심하는 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거기에 존재하라”고 말함으로써 곧 그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생기를 불어넣고 능력을 주며 존재하게 함으로써 존재한다.아브라함 헤셜(Abraham Heschel)은 우리가 신의 본성을 말할 때 명사의 사용을 피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명사는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것을 이해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에 대한 깨달음은 접촉을 통해서만 점점 분명해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구하고 만나는 신과의 관계를 나타내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다가오는 방식을 가리키는 부사만 있을 뿐이다.
동사, 주격술어, 분사, 부사, 존재케 하는 존재 등은 같은 언어는 형언할 수 없이 충만한 거룩한 지혜의 본성을 표현하려는 본성을 깨고 긴장시킨다. 이 지혜는 심오하고 절대적인 영원한 신비를 암시하니 몇몇 신비가 들은 이를 영원한 무(無)라고까지 부른다. 존재 그 자체는 신의 존재(esse)를 정의하지 못하니 그분의 존재(esse)는 언제 어디서나 정의를 넘어선 분이다. 이 끊임없는 부정은 우리가 긍정한 존재의 한계 외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희미하게 빛을 밝혀준다. 사고思考의 끝에서 오는 무지(無知)는 실제로 깊은 종교적 깨달음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존재(esse)의 언어가 암시하는 것은 살아계신 신으로서의 신과 맺는 세상의 관계이다. 창조물의 존재에 대한 경탄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이해력을 벗어나기 까지 무한한 신비를 향해 이 생각을 뻗쳐 나가고 마침내 거룩한 신비의 그 본질이 “존재하다”to be라고 말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순수한 생명력과 풍요로운 작용력으로 신을 생각하는 것이다. 초월적이고 근원적 의미에서 이것은 신을 창조물의 그 존재 안에서 마주친 그 모든 생명력, 근본적인 힘, 독창성, 자발성, 매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고통과 악에 대항하여 투쟁하다 죽은 자의 수낭에서부터 출발하거나 저항과 치유와 해방의 힘인 신에게 울며 호소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존재의 관점에서 신을 명명하는 것이다. 초월적이고 근원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신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변증법적인 기초가 아니고 그보다는 존재해야만 하는 것과 존재하기를 희망하는 것과 비존재의 파괴를 거슬러 극복하려는 존재의 힘의 기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의미 없는 추상적 개념과는 달리 존재로서의 신 개념은 관계안의 순수한 생명력으로서 궁극적 실재, 전 우주가 참여하는 충만한 생명의 근원적 솟구침을 의미한다. 신적 존재의 이 상징은 신의 신비에 관한 논의를 강화하며 아름답게 할 수 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에서는 불가해성한 신과의 모세의 만남이 언급된다. 불꽃이 있는데도 타지 않는 광야의 떨기이다. 거룩하신 분의 현존 앞에서 경외심을 갖고 모세는 신을 벗는다. 떨기에서 모세는 종살이 하는 백성들에 대해 연민 가득한 신의 말씀을 들으며 해방자 신, 그분과 함께해야 할 소명을 체험한다. 이런 상황에서 쫓겨난 목동은 선조들의 신께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주시길 청한다. 자비롭게도 신성한 네 문자 야훼(Yhwh) 안에 보호된 “나는 곧 나다”(출3:14)가 주어진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실제로 번역할 수 없는 이름을 놓고 학자들은 여기서 신의 신비에 대한 확언을 본다. 야훼(Yhwh)라는 이름이 아니라 이름붙일 수 없는 분이라는 한계적 표현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만족하게 신을 드러내 줄 이름은 없다. 우리는 적당한 어둠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타는 떨기에서 주어진 이 이름에 대한 해석 중에서 후대에 일어나는 신학적 전승에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것은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의 개념을 지닌 이름이다. 야훼(Yhwh)라는 이름은 신의 신비를 존재 그 자체와 동일시하는 의미에서 “나는 곧 나다” 혹은 “나다”를 의미한다. 성서주석가들은 최초의 본문과 사건을 포함하여 이것에 기초하여 이러한 철학적 의미로 해석하는 시대착오적 경향을 비판하는데 모두 일치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 문화와 접촉하기 이전에 히브리인 사고방식에는 그런 형이상학적 사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인 역 이후부터 야훼(Yhwh)라는 이름은 신의 존재론적인 본성을 드러낸다는 사고가 유대교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또한 초기 기독교 신학에서 널리 통용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아퀴나스이래. 유서 깊은 오래된 전통이다. 곧 그가 신적 본질은 신적 존재와 동일하거나 또는 신의 본성은 바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논증을 뒷받침하기 위해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했다. 그가 “존재하는”being(esse)이라는 아주 적절한 용어를 발견했는데 이것은 신을 부분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한 태양과 같이 불확실한 방법으로 전체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신의 유일성을 강조할 때 그 탁월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 외는 어떤 누구도 그들의 본질은 존재하는 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 논증 절정에서 존재라는 이 말이 심지어 신의 이름으로도 매우 적절하게 쓰일 수 있다고 제시한다. 그는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된 불타는 떨기를 언급하면서 “그러므로 있는 자 이라는 명칭이 신에 대한 가정 적합한 명칭이다.”라고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아퀴나스는 그의 체계로 그 이름을 순수하고 절대적 존재에서 생기는 초월적 의미로 가득 채운다. 고유한 명칭이 있는 자인 신은 그의 존재 안에 창조된 전 우주가 참여하는 순수하고 상상할 수 없는 생명력이다.
6.2.3 존재 자체(ipsum esse)와 무규정성으로서 무
앞에서 우리는 역설로서 존재의 신비를 살펴보았다. 이 절에서는 토마스의 존재자체가 무(無)가 될 수 있는가?라는 논의에 앞서서 신이 존재 자체가 될 수 있는가 에 문제부터 접근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토마스는 존재(esse)와 존재자(ens) 그리고 존재자체를 명학하게 구분한다. 존재자는 존재의 유한한 양태이고 그 유한성의 정도는 그것의 본질에 의해 측정되는 방식으로 본질과 존재자가 모두 무한한 존재자체라는 중심적인 개념에 종속되어 있다. 존속적 존재 자체인 신은 존재자를 초월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비존재(無)라는 의미에로까지 개연성이 있다. 토마스의『신학요강』에서 신은 어떤 유(genus)가 아니라고 언급하면서 신이 존재자체라고 서술한다.(신학요강 11장, 12장, 13장, 15장, 68장, 215장 참조) 신이 유인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사실로 밝혀져야 한다. 유로부터는 한 사물이 무엇인지가 얻어지지, 그 사물의 존재함이 얻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 사물은 종차의 차이를 통해서 그 고유한 존재로 구성도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인 바로 그것은 존재자체(ipsum esse)이다. 그러므로 신은 유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은 어느 가능성의 혼합도 없는 순수 현실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그의 본질은 궁극적인 현실태여야 한다. 궁극적인 것을 향해 있는 모든 현실태는 궁극적인 현실태를 위한 가능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궁극적인 현실태는 존재자체(ipsum esse)이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신은 현실태로서 존재자체이고고 언급한다.『신학요강』외에 『대이교도대전』도 마찬가지이다.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에 참여할 수 있지만 존재자체는 어떤 것에 참여할 수 없다. 참여하는 것은 가능태이지만 존재는 순수 현실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증명된 대로 신은 존재자체(ipsum esse)이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은 존재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존재자체는 존재의 근원적인 통일성이며 실재성과 완전성의 무한한 충만으로서 토마스에게는 신(神)개념이다. 존재자체는 모든 존재자의 공통적 존재(esse commune)를 뜻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 안에 확립하는 곧 자존적인 절대적 존재라는 의미이다.또한 토마스에 의하면 신은 단순하고 복합성이 없음을 말한다. 만약 신이 존재자체이고 존재자체가 신이 되면 존재자체는 무규정성이 된다. "질료와 형상으로 합성된 모든 것은 물체다. … 그러므로 신은 질료와 형상에서 합성되지 않는다." 신에게는 질료도 형상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신을 직접적으로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신은 어떤 규정성이나 제한성이 있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무규정성은 무(無)이라고 볼 수 있다. 무규정성은 무한한 실재성으로서 결국 순수현실태에 귀착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신은 어떤 감각이나 표상, 조합과 추리로서 이해될 수 없음을 말한다. 만약 어떤 것이 규정성을 소유한다면 타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적 시원(始原)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무규정성이다. 신은 결코 존재자가 아니다. 그리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다음과 같다. 존재자체는 신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다가감 이전의 존재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자의 존재도 아닌 존재자체이다. 베르하르트 벨테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신은 본래적 의미에서 사물 res이나 어떤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에게는 그의 존재와 구분될 수 있는 본질-존재(was-sein)가 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도대체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 Ist는 그것에 아무 것도 귀속하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은 이미 존재 자체이다. 신은 사물이나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신은 어떤 것이 아니거나(Nicht-etwas) 무(Nichts)이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진술을 엄격하게 말하면 참이고 동시에 거짓이다. 그리고 항상 부과와 종합을 생각하는 존재자에 대한 존재의 사유는 존재 자체의 단순성이 가진 심연에서 필연적으로 ‘파선’하고 만다."여기서 신은 존재자체이다. 신은 사물이나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무(無)라고 말한다. 토마스에 의하면 신은 비존재로 불릴 수 있다. 이것은 존재에 결함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존재들을 초월로서 이다." "신은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자들을 초월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은 가지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지성을 초월한다." "어떤 결과가 원인의 종에 이른다면 그 결과가 동일한 존재 방식에 따라 동일한 종적 형상을 취하지 않는 한 일의적 서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그러나 나머지 사물들이 온전히 동일한 사물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동일한 존재 방식에 따라 성취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데서 밝혀지듯이, 신 안에는 신적 존재 그 자체가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사물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신과 다른 사물에 대해 일의적으로 서술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토마스는 신 안에는 신적 존재 그 자체가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른 사물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토마스는 존재자와 존재자체를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유한한 존재자는 “존재자체”와 초월적 유비를 이룰 수밖에 없다. 결국 모든 존재자의 토대인 존재자체는 결코 존재가 될 수가 없다. 여기서 토마스가 말하는 존재를 공통 존재로 본다면 공통존재와 존재자체도 구분된다. 존재자체가 존재가 될 수 없다면 존재자체는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가 존재자체가 신이라고 본다면 신은 무규정성이다. 곧 존재자체는 무규정성이며 무(無)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존재가 존재의 부정으로 무(無)이라고 한다면 무(無)에 의하지 않고서는 존재라는 개념은 발생할 수 없다. 이것은 존재라는 개념의 추상화는 무와 관련에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존재라는 개념이 비실재까지 포함하고 있으므로 존재의 정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존재와 무를 인식론적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도 접근한다고 할지라고 얘매함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없음, 곧 무(無)는 두 가지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무는 존재와 관련해서 존재의 부정으로 비존재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비존재로서 무는 단적으로 없음으로 절대 무이다. 이 절대 무는 ‘없는 것은 없다’(無無) 라는 명제가 확립된다. 헤겔은 은 자신의 논리학에서 있음을 ‘순수존재’라 하고 이 ‘순수존재’는 단지 있음일 뿐이므로 그 내포가 절대적으로 공허함으로써 없음, 無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헤겔의 변증법에 의하면 순수 무와 순수 존재는 동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동양 사상가들, 특히 노장사상에서는 무가 개념의 논리적 반성보다는 오히려 존재의 무한성이라고 말한다. 『노자』에는 ‘유생어무(有生於無)’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무(無)는 곧 도(道)로서 존재의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무제한성 또는 무한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이처럼 노장은 無를 존재의 무한성 또는 무규정성, 즉 무제한적인 존재 또는 무규정적인 존재 사용했다. 이것은 무(無)를 부정의 원리로서 사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토마스 아퀴나스로 돌아가 보자. 토마스는 자신의 저서 많은 곳에서 신을 순수 현실태(ST 1.3.1-2.4.6-7; SCG 1.16-27; CT 1.9-17), 존재무한성, 그리고 존재자체라고 말한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어떤 제1유가 존재하면 이런 제1유는 어떤 가능태 혼합도 없는 순수 현실태이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자체가 무가 될 수 가능성들을 무규성, 존재와 무, 순수존재와 순수 그리고 노장사상을 통하여 접근하였다. 여기서 결국 존재자체는 무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토마스가 존재자체가 무라고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엔 실제로 무를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선언 단계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왜냐하면 토마스의 충실한 제자인 에크하르트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크하는트는 토마스의 존재자체의 무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실행한 것이다
7장 역설로서 존재와 무 그리고 우상파괴
앞 장에서 부정과 긍정 사이의 분리와 연결로서 신의 불가해성과 유비를 논의 했다. 이것은 신의 불가해성과 유비가 부정과 긍정으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상호 공속적으로 얽혀 있다는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토마스는 신에 대한 말하기를 존재와 본질의 일치라고 말하다. 이것은 존재와 본질이 연결을 의미한다. 존재와 본질의 연결이 무한자 또는 신의 경지를 의미한다면 존재와 본질의 분리는 인간의 유한성이다. 정재현에 따르면 인간에서의 존재와 본질의 분리는 인간 유한성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역설적으로 초월성의 터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외현적으로 상호모순성을 지니는 유한성과 초월성은 역설적으로 연합할 수 토대이다. 이를 토대로 신의 불가해성과 유비의 공속성 그리고 신의 신비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7.1 부정과 긍정의 공속성 그리고 신의 신비
만일 신이 본질적으로 불가해하기 때문에 모든 이름들과 사고를 벗어나고 뛰어넘는 신이라면 도대체 신에 대하여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이름과 상징과 이야기와 개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물음 안에서 유비 안에서 벌어지는 토마스의 긍정과 부정의 상호 역설적 얽힘을 살펴볼 것이다. 토마스는 신 실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와 해석을 피하기 위해 신에 대한 표현을 긍정과 부정과 탁월의 세 가지 방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 체험을 통해 그 의미가 알려지고 선택된 용어는 신에 대한 긍정이다. 여기서 신에 관한 서술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탁월한 방식이다. 예를 들면 신은 선하다고 말할 때, 그 참된 의미는 신에 연관된 것으로 창조물이 선하다는 방식으로 신이 선한 것이 아니며 신은 다만 모든 선의 원천으로서 탁월하게 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불구하고 더 이상 선하다는 단어의 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개념과 상징은 이중의 부정, 긍정을 부정하고 부정을 부정하는 과정을 통해 정화되고 그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 과정에서 신은 여전히 불가해한 존재로 남는다. 그러나 신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만함과 생생한 실재로 직관된다. 우리가 앞에서 다루었듯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양한 유비를 사용한다. 이러한 유비에 따르면 유비의 3중적 관계는 다른 두 가지 가능성과 대조될 때 명확해 진다. 한편으로 신에 대한 말들은 창조물(創造物)에 대해 언급할 때 동일한 의미를 갖는 일의적이 것이 아니다. 의미가 동일하다면 신과 창조물의 사이의 차이를 전혀 없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양의적인 것도 아니다. 창조물에 사용되어진 것과 전혀 다른 의미이라면 그 표현 자체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것은 유비적으로 긍정(肯定)과 부정(不正) 그리고 신을 향한 탁월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우리가 신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그래도 신을 향한 방향은 설정될 수 있다. 유비적 서술은 우주만물의 원인이 신이며 신에 의해 지탱된다는 창조론의 원리와 해석에 토대를 둔다. 곧 인과율 자체가 유비적 개념이다.
예를 들면 자연적 불을 보면 나무에 불이 붙으면 나무는 불이 탄다. 이와 같이 창조물은 신의 불로 인하여 밝혀지며 존재한다. 곧 모든 창조물은 신적 존재의 신비인 그 불에 참여함으로 존재한다. 창조물에 전달된 이 불길은 자유롭게 타오르며 그 어떤 강요나 압력 없이 함께 참여의 관계를 유지한다. 모든 창조물은 본질적으로 신의 동적 실존인 “존재”안에 어느 정도 참여하게 마련이다. 비록 신이 창조물과 동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존재론적인 참여에 의하여 모든 창조물은 신적 완전성을 공유한다. 그러므로 창조물의 한계적 앎의 용어로도 창조주 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불타는 나무가 결코 불 자체는 아닌 것처럼 언어 안에 신적 실재 모두를 담을 수 없다. 창조 관계로 인하여 언어도 창조물의 근원과 원천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결국 신과 창조물을 표현하는 언어는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유비적 과정에서 신에 대한 앎은 상대적 앎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념이 아닌 인간 정신의 판단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에게 신에 대한 앎은 인식 가능한 직관의 대상인 긍정적 요소와 여전히 신은 이해 불가능하다는 부정적 요소를 동시에 역설적으로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은 신적 실재에 대해 창조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과 신은 본질적 개념상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는 하는 긍정과 부정의 모순과 역설이 존재한다.
유비는 신에 대해 말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들의 모든 범주를 만들어 낸다. 신은 창조주, 구세주, 선물이라고 하는 긍정적 용어들은 신의 창조물과의 연관을 토대로 신을 명명한다. 신은 무한하고 불변하고 고통이 없는 등 부정적 용어들은 신에게는 불완전한 요소가 없음을 진술한다. 은유적이고 상대적이고 부정적 종교적 표현들은 신은 그 자체라는 것이 무엇인지와 유비의 역할이 쉽게 보여주는 그 범위를 직접적이고 긍정적으로 명명하지 않는다. 형상적 존재 용어를 사용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런 용어들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이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신은 선하시고 살아계시고 지혜롭다. 또는 신은 위격적이다. 또는 신은 존재한다와 같은 경우이다. 이 존재적 용어들도 결코 신적 실재를 직접 표현하는 긍정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동일한 긍정과 부정과 긍정을 초월한 해방의 얽힘은 역설적이다. 이것은 긍정과 부정 그리고 다시 부정과 긍정을 의미한다. 창조물에 대해 언급한 단어가 동일한 뜻으로 신의 존재(esse)에 적용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유비는 인간의 정신이 지닌 긍정적 개방론에 제동을 건다. 그리고 빛에서 암흑으로 그리고 다시 더 빛나는 암흑으로 향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강조하기를 “신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긍정은 사실과 다르며 신이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 그것도 결국 사실과 다른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신의 불가해성에 대한 앎을 불러일으키는 부정적 방법론은 아퀴나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유대 철학자 모세 마이모니데스(Moses Malmonides)에 의해 밝혀진다.
어떤 한 사람이 실제로 “배” 한 척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배의 재료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본질적 요소인지 부차적 요소인지는 잘 모른다. 그런대 두 번째 사람은 배가 부차적인 것이 아님을 배워 알게 된다. 세 번째 사람은 그것이 광물질이 아님을, 네 번째는 그것이 땅에서 자라는 식물이 아님을, 다섯 번째는 그것이 자연 본성상 유기적으로 연결된 몸통이 아님을, 여섯 번째는 그것이 판자나 문과같이 평평한 것이 아님을, 일곱 번째는 그것이 공과 같은 모양이 아님을, 여덟 번째는 그것이 뾰족한 것이 아님을, 아홉 번째는 그것이 둥근 모양이나 다각형이 아님을, 열 번째는 그것이 견고한 것이 아님을 배워 알게 된다. 이 열 번째 사람은 부정 否定의 과정을 통해 “배”에 대한 어느 정도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된다. 그는 이제 배라는 것은 결국 우묵하고 긴 나무의 원재료와 여러 나무 조각으로 만들어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은 개념을 지니게 된다. 말하자면 긍정적인 사고를 통해 인식하는 것이다. …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반복된 부정을 통해 신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 … 창조주의 것이란 믿었던 그것이 부정되어야 함을 확신할 때에만 비로소 신께 대한 올바른 앎에 분명히 접근하게 된다.
이처럼 유비의 부정은 사고를 폐쇄한 것이 아니고 긍정을 수용하고 동시에 역설적으로 얽힘으로 넘어서는 공속적인 것이다. 이것은 첫째 신에 대한 초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으로 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다. 즉 이것은 우상파괴를 위한 도구이다. 부정은 결코 긍정을 거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결국 불가지론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긍정의 한계점을 초월하여 결국 신의 향해가는 장치이며 도구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비 언어가 신과 창조물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신과 창조물의 관련해서 때로는 긍정으로 때론 부정으로 접근한다. 이것이 긍정과 부정의 공속성이다. 이것은 유대교가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던 경건한 절제와 상통한다. 또한 긍정과 부정의 공속성은 우상숭배를 배제하는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공속성을 통하여 인간은 사유가 끝내고 신의 신비로 들어간다. 즉 신의 신비는 긍정으로나 부정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나 종교적인 찬미와 흠모 속에 드러나게 된다. 20세기 가톨릭은 부정론을 포함한 유비 이론의 복잡한 구조를 발견하게 되었다. 칼 라너는 유비가 일의성과 다의성의 혼합이라는 점을 거부하며 그보다는 유비적 관계의 핵심을 강조한다. 유비적 관계이라고 하는 것은 유비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존재란 창조물을 초월하는 거룩한 신비에 토대를 둔 것으로 그것을 통해서 가능하다. 바꾸어 말하면 이 실재들이 바로 우리가 신을 인식할 수 있는 출발점이며 매개이다. 에리히 프르지바라의 유비적 이론은 신의 계시에도 적용되어 신은“언제나 더 위대한 분”이라는 생각으로 이끈다. 데이비드 트레이시는 유비 이론과 변증법을 교묘하게 비교하여 세상에 내재된 은총을 감지한 공동체의 깊은 종교적 체험과 비유를 연결시키면서도 동시에 부정적 방법론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이 처럼 여러 학자들의 연구결과로 유비에 대한 이해가 심오해 졌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부정과 긍정을 통해 신의 신비의 가능성을 열었다.
물론 개신교와 가톨릭 주장 간의 차이점이 여전히 미해결 문제로 남아 있다. 개신교 비판원리는 창조물이 창조주의 권위를 침범한다는 식의 주장을 거부하고, 가톨릭의 비판원리는 비록 죄로 신과의 매개가 깨어진 상황에서도 신의 현존은 여전히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은유신학, 상징 신학, 유비신학 등 어떤 신학의 설명이든 근본적 일치점은 신의 신비는 우리의 앎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따라서 우리가 신께 부여한 그 모든 명칭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이것은유비이론이 긍정과 부정을 공속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신 담론을 정화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유비이론은 신 담론에 대한 막강한 비판 기능을 담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유비이론의 비판적 부정과 긍정의 역설적 얽힘 즉 공속성이 신의 개념화에 거부할 뿐만 아니라 신의 신비의 통로이다. 우리는 신의 신비에 충실하며 신의 불속에 참여한 신비라는 해방적 언어가 유비라고 볼 수 있다. 신학대전 1.13.5에서는 유비는 유한한 인간의 언어와 무한한 신의 언어가 상응할 수 없다는 논리에서 출발한다. 동일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지닌 의미이다. 같음과 다름과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역설적 얽힘이라고 임을 암시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는 고정적 자기 동일성의 우상을 파괴한다. 유비는 일종의 신과 창조물의 거리두기이다. 이 거리는 신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의 거리이다. 거리는 분리의 길을 연다. 거리는 신을 범주화 하지 않는다. 주체와 대상이 될 수 없다. 주는 그 자체이다. 우상의 속성은 주체화된 신이다. 거리는 모든 표상과 대상과 주관성을 벗어난다. 언어보다도 우선한다. 토마스의 무한자는 일종의 우상 파괴적 순간으로 유래하는 거리이다. 즉 無의 나타남이다. 이때 부정신학이 나타난다. 여기서 존재는 無(케노시스)이면서 초과이며 충만이며 동시에 텅빔에 근거를 두고 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재현에 의하면 이것은 일종의 앎의 문제라고 단언한다. 앎에 앞선 있음이라도 앎에 파악하는 범위까지만 있음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첫째로, 주체가 ‘대상’을 보기 때문에 ‘대상’을 ‘주체’로 갖고 들어와서 보게 된다. 말하자면 ‘대상’을 자체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주체 안의 대상에 들어 온 만큼 본다는 논지이다. 둘째로, 그리고 나서 주체적으로 본 것이 그대로 ‘대상’이라고 착각한다. 이런 문제는 결국 자기가 중심에 놓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중심성이다. 그러나 자신은 이러한 것을 의식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자기중심성의 결정적인 함정이 있다. 이 함정이 바로 우상의 늪이다. 여기서 우상이란 인간 자아의 투사와 주체의 욕망에 투영된 이미지 속에 자신이 고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상은 주체의 응시로 더 이상 여백을 허용하지 않고 고정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종교언어의 문제이다. 그리고 앎의 문제이다. 결국 앎의 문제는 지배의 문제와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종교언어의 합리화는 종교인의 욕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신적 본질을 표현하는 종교언어 조차도 개념화하여 숭배하는 경우가 된 것이다. 특별히 종교언어에서 토마스에게 유비가 아닌 일의성의 의미를 고집한다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동일성의 과정을 통해 우상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담지 할 것이다. 종교언어가 개념화되고 관념화되어 굳어진다면 이것이 바로 우상화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개념화와 화석화된 언어를 피하기 위한 장치로 유비를 언급하고 있다. 유비로서의 판단도 일종의 개념에 대한 유사성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다. 판단은 “비 개념화된 용어와 무한하게 제거되어진 용어로서 신을 긍정한다.” 이러한 유비는 더 깊은 개념화에 의존하지 않고 신의 진리를 찾아가는 도상이다. 이처럼 살펴 본 것처럼 현대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현재보다 훨씬 이전인 토마스 아퀴나스 조차도 신의 불가해성을 통하여 긍정과 부정의 역설적 연합을 통하여 그리고 존재 자체와 유비를 통하여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장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이러한 역설은 고대나 중세 사상가들에게도 가끔 볼 수는 있지만 부정이나 긍정이라는 역설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신의 불가해성을 설명한 학자는 흔치는 않다. 그리고 토마스의 이러한 우상파괴의 장치는 인간의 욕망이 선이 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록 문제 많은 중세 기독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성찰을 준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7.2 비대상화로서 신과 존재 그리고 무(無)
이러한 해석을 토대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와 무 그리고 비대상화로서의 신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토마스에게 있다는 것(ens)은 ‘무엇임’과 ‘있음’을‘동시에’표현한다. 존재현실력(actus essndi)인 존재esse)는 존재 실재성의 원리로서 현존재(Existenz)의 원리이기만한 것이 아니라 존재자 안에 현실적으로 설정된 모든 존재내용들 또는 존재완성들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존재자에게 귀속되는 모든 긍정성과 현실성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존재자체는 아직 있지 않기”(ipsum esse nondum est) 때문에 존재란 ‘있는 것’(quod)이 아니며 있는 것이 ‘있게 되는 원리’(quoest)일뿐이다
우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의 개념화의 거부이다. 첫째로 토마스 존재의 해석문제에서 존재(esse)를 존재자(ens)로 오해해서 해석하므로 오는 문제이다. 존재를 존재자로 해석함으로 신의 개념화에 해석의 단초를 제공했다.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의하면 존재자의 모든 형태를 10개의 범주에 사유하고 언표 한다. 그러나 토마스에 의하면 신은 이러한 범주의 체계 속에서 사유되고 판단될 수 없다. 범주에 입각해서 사유하는 것은 존재자이다. 신은 존재자가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도 개념화되는 대상이 아닐뿐더러 대상화될 수 없다.
그것은 ‘다르게(otherwise)’라는 이 부사는 ‘인식한다(intelligit).’라는 동사를 인식의 대상(客體)의 편에서(ex parte intellecti) 혹은 인식하는 주체의 편에서 규정할 수 있는 데서 二重的(duplex)인 것이다. 만일 이것이 이 인식된 것, 즉 대상 편에서의 규정이라면 이 명제는 참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의미는 다음과 같다. 사물을 있는 것과는 다르게 있는 것으로(rem esse aliter quam sit) 인식하는 지성은 그 어떤 지성이든 잘못된 것이다. … 그것은 신께 대해 명제를 형성하는 우리의 지성이 신을 단순한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식하는 자의 편에서의 규정이라면 이 명제는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인식함에 있어서(in intelligendo) 지성의 양태는 존재함에 있어서(in essendo)의 양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 이 때 우리의 지성은 그런 사물들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이해함에 있어서 비물질적인 양태를 갖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자기보다 상위에 있는 단순한 것들을 이해할 때도 그것들을 자기 양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위처럼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체와 대상을 논하면서 비대상화 문제를 접근하고 있다. 신은 어떤 유(genus)가 아니다. 신과 존재(esse)는 어떤 범주적 방식으로 다가올 수 없다. 언어의 표현으로도 파악할 수 없다. 존재가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존재인 신 역시 정의 불가능하다. 만약 존재가 형상과 구조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신은 정신의 개념화 능력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토마스는 개념의 우상화의 문제를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이런 명칭들의 많은 개념들이 쓸데없고 공허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단순한 하나가 그런 모든 개념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는 이와 같은 모든 명칭을 통해 다수로서 그리고 불완전하게 표시된 하나이다.
그렇다 단순한 하나가 그럼 모든 개념에 대응하는 것은 개념이 명사로서 고정된다. 시선이 고정되거나 개념화는 우상화가 농후하다. 반대로 우상과 반대되는 “아이콘은 절대 보이는 것으로 굳어지지 않음으로써, 그 것 자체를 넘어서게끔 시선을 불러 온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의 관점으로 만 자신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아이콘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우리의 시선을 전환시키므로 획일적으로 명사화를 방지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콘은 “비-대상의 현전”이다. 비-대상의 현전은 시선의 고정으로 발생하는 개념화를 넘어서서 무한한 가능성을 열러놓고 대상을 포착할 수 없도록 한다. 반대로 포착은 주체가 대상을 대상화하여 지배하며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다. 여기서 우상이 발생된다. 아이콘이 비-대상의 현전이며 고정된 시선을 역전하여 고정되지 못하도록 한다. 반면에 우상은 시선이 향하는 것을 고정시킨다. 우상은 신을 인간의 시선의 차원에 머물게 한다. 그래서 우상은 어떤 것을 형상화화 낸 상, 표현물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다시 인간의 시선을 고정한다. 인간의 사상이나 욕망이 투영되는 그 형상이 바로 곧 우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 안에서 이해되는 대상은 인간의 대상 자체에게 고정시킨다. 그리고 대상을 지배하고 관리한다. 토마스가 말하는 존재(esse)나 신도 마찬가지이다. 신과 존재도 언어의 범위를 벗어날 수밖에 없다. 만약 신이 존속적인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면 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토마스의 존재의 개념화 불가능성은 결국 토마스의 존재를 대상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정신학은 놀라운 일이 되지 못한다. 질송은 이 점을 매우 훌륭하게 지적하고 있다.
토마스의 부정신학은, 자신이…최고대상의 본질을 안다는 자기기만의 태도에 맞서려는 마음 자신의 활력 있고 탁월하게 적극적인 노력이다. 인간의 지성 안의 어떤 것이나 그런 태도에 반역한다. 인간이 …지성의 대상들을 알지 못한다는 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지성의 대상들에 종사하는 일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껏 있어온 것 중 가정 철저하게 상상력 없는 신비주의, 곧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Clairvaux)의 신비주의와의 깊은 일치 속에서 토마스는 우리가 신에 관한 모든 표상이나 형태적 묘사를 초월하도록 만든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과 존재의 개념화 거부는 일종에 신의 비대상화이다. 이러한 신의 비대상화는 인간의 욕망이나 신의 절대화를 자기 절대화로 착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우상파괴의 장치이다. 물론 존재자(있음)의 형이상학은 우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과 존재 그 자체는 대상이 아니라 비대상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욕망으로 발생하는 우상숭배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를 극복하고 우상파괴의 길로 가는 길은 존재가 존재로서 힘과 탐욕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무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존재와 무의 역설적으로 얽힘을 통한 존재의 겸손함을 통해 우상파괴에 접근하는 것이다.
존재와 무의 관계는 서양 근대철학과 교토학파에서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다. 이러한 특히 존재와 무는 서양의 하이데거와 동양의 교토학파의 대결이 있을 만큼 첨예하게 대립된다. 먼저 존 카푸토 의하면 에크하르트에게 신의 존재가 존재인 동시에 무이고 무인 동시에 존재라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지성”은 봄의 문제가 아니라 내버려 둠과 신비에로 개방되어 존재의 문제라는 점이다. 하이데거에게도 영향을 준 신적인 심연(Abrund), 무(das Nichts), 내맡김(Gelassenheit)에 대한 언설도 에크하르트의 독창적인 언설로 보이지만 많은 부분이 토마스 논제에서 힌트를 얻어다는 사실이다. 에크하르트는 그것들의 신비적 단계들로 재해석하여 토마스 사상을 압축하여 신비적인 의미를 산출했다. 베르나르 벨테가 주장하듯이 토마스 내의 가능성이 에크하르트 현실 속에서 전개된 것이다. 예를 들면 지성이 토마스에게 있어서 직관을 의미하다면 에크하르트에게 있어서 그것은 “초연”(detachment)을 의미하며 그리고 이러한 지성을 종교적인 초연이 되도록 변형시킨다. 초연은 내맡김(Gelassenheit)이다. 또한 에크하르트는 토마스의 철학이 무미건조한 논제들 안에서 하나의 역동적 무(無)와 신비주의를 이끌러 낸다. 존재가 신이라는(ess est deus) 이 말도 에크하르트의 무(無)와 신비적인 공식 아래서 신은 그분 자신의 있음의 현실(deus est suum esse)이라는 토마스의 언설은 한정된다. 토마스의 이성의 작은 불꽃(scintilla rationis)은 에크하르트의 “영혼의 작은 불꽃” 명백한 전신이다. 이처럼 토마스의 ‘지성’과 ‘이성의 작은 불꽃’을 볼 때 토마스기 존재와 무 그리고 신의 공속성을 이미 담지하고 있다. 그리고 존재와 무 그리고 신의 공속성의 출발이자 토대이다.
토마스는 거듭 반복하여 “신은 그 어떤 존재 방식으로 있는 자가 아니며” (Quod Deus non sit in alique genere), “우리는 신에 관하여 그분이 어떠한 분인지 알 수 없다” (De Deo scire non possumus quid sit) 고 명제적으로 주장하였다. 이 명제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근본 명제이다. 신은 “ 결코 존재자가 아니다. 그리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는 이 말의 의미는 신은 존재자체이면 무라고 해석한다. 존재와 무 그리고 신은 공속적이고 역설적 연합이다. 존재가 신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왜 다가가지 않는가? 신은 모든 다가감 이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존재성은 떨어지고 엄격한 의미에서 존재자가 아니고 또한 존재자의 존재도 아닌 존재가 맞닿게 된다.” 신은 “모든 개념적 파악으로 가능한 진술이나 판단 밖에 존재한다. 신은 파악할 수 없는 분, 말할 수 없는 분이다.” 신은 초범주적이며 탈 범주적이다. 신은 존재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신에게 도무지 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토마스에게 신은 존재자체임과 동시에 존속적 존재자체이며 존재와 본질이 일치하는 존재자체이다. 따라서 인간의 앎은 존재자체로서 신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처럼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이 단지 긍정신학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과 부정의 상호 역설적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경이감과 존재 물음에서 자신을 알리는 존재는 모든 존재자가 생각되고 구성될 수 있는 “존재”-진술의 근본형식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존재는 생각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으며 진술할 수도 없는 무이다. 존재는 침묵 속에서 등장한다. 이것을 우리는 성스러움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절대적 높이와 절대적 서열과 절대적 순수성”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을 멀찌감치 비켜가 있으며 그러나 인간과 존재 전체를 가장 내면에서 포괄하고 우리와 침묵과 기도 속에서 관계하는 자를 우리를 존재인 동시에 무라고 부른다.아베에 의하면 공은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하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인 우위를 어떤 형태에 있어서도 절대로 지닐 수 없다. 이것과 관련해서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점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자어로 표기할 때 서로 상호 대립되는 두 개의 언어, ‘존재(存在)’와 ‘무(無)’는 서로 서로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무’는 결코 ‘존재’의 결여태가 아니라 ‘존재’와 불가분리로 결합하면서 ‘존재’와 동일한 반열에 놓이는 것이다. 이어서 아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존재가 ‘존재는 존재론적으로 비존재보다 우월하다’라는 전제하에서의 궁극적 존재이며 그래서 존재가 이원론적으로 이해된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묘유는 서양에서 말하는 ‘존재’와 분명 구별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적극적, 긍정적이 것이(存在) 소극적, 부정적인 것(非存在)에 대해서 존재론으로 우월하다고 여겨질 때에는 ‘존재’ 자체가 궁극적으로 보여 지고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에 의해서 극복될 때는 ‘속박으로부터 자유’라고 간주된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불교에서와 같이 긍정적인 것(存在)이 부정적인 것(無)과 대등하고 서로 상호적으로 파악될 때 긍정과 부정 사이의 이율배반적이고 상호모순적인 긴장인 역설적 연합이다.
우에다 시쯔데루는 에크하르트에 관한 그의 저서에서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신이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신은 충만된 존재이고 존재를 뛰어넘는 무이다.” “신은 무이다. 그렇다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신은 언표 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존재를 초월하는 존재이다. 신은 상(相)없는 존재이다” 이것은 신은 존재 그 자체라는 의미이다.
요한복음 1장9절, 1장 5절절에 관한 에크하르트의 강독 중에는 어두움에 관한 세 가지 해석이 등장한다. 이것과 연관해서 에크하르트 세 가지 무 이해가 드러난다. (1) ‘결여태’(privatio)로서의 무, 즉 존재자체의 신과 구별되는 신과 구별되는 창조물의 무 (2)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의 무. 신은 인간과 일체의 창조물에 대해서 초월적 존재이다. (3) 신과 창조물, 신과 인간이라는 일체의 대립의 피안에 있으면서 그 자신에 있어서 존재하는 신의 무(無). “이 무는 존재도 아니고 또 무(無)도 아니다” “무(無)는 그 자신에 있어서는 어떤 긍정적인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서 무(無)는 긍정과 부정의 역설적 얽힘으로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공속성을 지님으로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이것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역설적으로 접근하면 아래와 같다.
“무(無)는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고 또 대상이라는 의미에 있어서 어떤 것도 아니다. 무는 존재 그 자체이고 인간은 이 존재의 진리에 맡겨져 있다. 즉 인간이 주관으로서 스스로를 극복할 때 인간의 존재를 객관으로 표상하지 않을 때 인간은 이 존재의 진리에 내어맡겨지는 것이다.”
서양 역사 속에서 무의 문제를 가장 진지하게 그리고 가장 깊게 다루었던 학자는 하이데거이다. 존재와 무가 ‘동일’하게 되는 하이데거의 사유의 장은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즉(卽)을 말하는 대승 사상과 유사하다. “有 즉 無라는 비논리의 논리이다. ‘즉’(卽)에서 有를 有로서, 無를 無로서 본다는 의미이다. 물론 우리는 통상 有를 단지 有만으로 보면 유에 얽매여 있다. 따라서 그러한 이중의 집착에서 벗어난 완전한 무집착의 ‘공’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공은 존재와 무의 상호 역설적 공속성이다. 이것이 불교가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 안에 나타나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는 니시타니에게 있어서는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된다. 즉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 “유 즉 무, 무 즉 유”, “생 즉 사, 사 즉 생”, “긍정 즉 부정, 부정 즉 긍정”등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니시타니가 ‘긍정’ 즉 ‘부정’, ‘부정 즉 긍정’에서 말하는 긍정을 지양해 나갈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이다. 한편으로 부정은 긍정과 전적으로 마찬가지로 최후의 언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중도적 위치를 견지하여야 한다. 이처럼 교토학파의 ‘즉비’(sive-non)의 논리에 따르면 동일성은 부정에 의해 실현된다. ‘즉’(卽)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일의적인 동일성이 제거된다. 이처럼 토마스 아퀴나스도 일의성과 다의성의 중도인 유비와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을 동시에 언급했으면 유비마저도 긍정과 부정의 역설적 얽힘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토마스는 존재와 무 그리고 신의 공속성의 토대이자 선구자이라고 볼 수 있다.
7.3 침묵과 케노시스 그리고 우상파괴
7.3.1 제거의 길 그리고 침묵과 무 경험
신의 존재방식은 인간과 “다르고”(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면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사 55:8) 인간 통제 너머에 있다. 모든 주권은 신에게 속한다. 신은 조종될 수 없는 분이다. 신을 우상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여기서 우상이란 신앙의 이름으로 신앙인들의 인간적 욕구충족을 의미한다. 신은 인간의 욕구충족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토마스에 의하면 초월성의 신은 물질성의 부정뿐만 아니라 유한성의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알려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신의 “불가해성”이다. 신은 이미지든 언어이든 혹은 개념이든 유한한 정신의 모든 포착 너머에 있다. 신의 불가해성은 신의 본질적인 무한성으로부터 온다. 바로 이것이 유한하고 창조된 인간지성으로 하여금 이러한 존재의 절대적 충만성 속에 포함되어 있는 지식과 진리의 가능성들을 다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만든다. 신의 불가해성은 신에 대해 어떤 것은 알려지고 어떤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신의 분할되지 않는 존재가 동시에 알려졌고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신에 대한 가장 높은 앎은 신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앎 모두를 초월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지성은 신의 실체를 아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신의 실체는 우리의 지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성한 실체는 우리에 의해 알려지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신에 대한 인간의 궁극적인 앎은 우리가 신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신의 실제적 존재가 우리가 신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의 불가해성의 언설은 인간의 유한성과 앎의 한계를 대한 것이다. 이러한 앎은 대상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신비의 현존으로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주체로서 인간은 자신을 통제적이고 절대적인 주체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존재가 신비에 의해 자신에게 증여되는 것을 말한다. 칼 라너에 따르면 신에 대한 ‘지복의 앎’의 본질은 신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불가해성은 인간에 있어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과 사랑의 실체이다. 존재론적으로 기초된 신의 불가해성은 신이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 사용될 수도 혹은 거기에 종속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신은 인간 실존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나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 실존은 “자기중심성에서 탈피하여 자신의 바깥에 있는 신 안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이에 칼 라너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인간의 삶 전체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신께 호소하는 것은 올바르고 또한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버리고 신의 불가해성의 현존 속으로 자신을 비우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로서 신 관념은 또 하나의 인간적 우상이다.” 그래서 토마스는 제거의 방법을 제시한다.
신에 대한 완전한 앎은 제거의 앎이다. 우리는 무지를 통해 신을 알며 마음의 본성을 넘어서는 신과 합일하게 된다.
우리가 제거의 방법을 통해서 신을 향해 나아갈 때 처음에는 그에게서 물질적인 것을 제거하고 이어서 인간에게 발견되는 지성의 것, 예를 들어 ‘선함’, ‘지혜’ 등등을 부정한다. 그리고 나면 우리의 마음에 남는 것은 그가 존재한다는 관념 외에 어떤 것도 남지 않는다. … 그리고 마지막 이러한 존재자체에 대한 관념마저도 그에게서 제거한다. 그 때 우리의 마음은 무지의 어둠 안에 있게 된다. 위 디오니시우스가 말한 것처럼 이것이 신의 거주하게 있다고 말하여지는 무지의 구름이며 이러한 무지에 의해 우리는 이승에서 신과 가장 합일하게 되는 것이다.
토마스가 위 텍스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토마스의 부정의 방법이 무지의 체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 속에 있는 모든 표상과 관념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신을 표상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에 있다. 그러한 매개물이 살아있는 초월적 실재와의 만남 그리고 “기억”의 수단으로 사용되는지 아니면 자기-숭배적 투사물로 사용하는지가 우상숭배의 여부를 결정한다. 신에 대한 인간의 모든 표상은 - 물리적 이미지들, 언어적 이미지들, 메타포들, 개념들, 그리고 신에 대한 개념 자체를 포함하여 - 우상숭배로 전락할 수 있다. 칸트는 신에 대한 합리적 개념이 종교적 계시의 그것을 포함하는 모든 신에 대한 표상의 “시금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신을 위해 우상 숭배적 신을 창조하는 심각한 위험에 빠질 것이다. 우상숭배란 종교에서 ‘감각적 표상력’에게 합리적 관계와 동일한 혹은 우월한 가치를 부여할 때 생긴다. 피히테는 신을 상상하고 표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그것이 비록 개념적일 때조차도 부정한다. 그는 우상 숭배에 대한 성서적 금지령을 형이상학적 사유까지 확장시킨다.
신은 사유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유 속에서 어떤 것이 이해된다면 그것은 신이기를 멈춘다. 그리고 모든 소위 신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상의 개념이다. ‘너는 너 자신을 위하여 신의 개념을 만들지 말라’ 는 것은 ‘너는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무의 경험의 장은 인간이다. 인간이 삶을 체험을 통해 획득하는 것은 인간 유한성의 통찰이다. 이러한 통찰에까지 이르는 지혜는 체험에 대한 성찰에서 주어진다. 인간의 체험은 특정한 전 이해적 해석의 틀을 원초적으로 지님으로서 체험도 그 자체로 유한하기 때문에 유한성의 체험과 체험의 유한성은 상응하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유한성에 대한 체험이 체험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적 체험에 까지 이르면 바로 그 한계에서 부정의 가능성이 일어난다. 따라서 유한성에 대한 체험은 곧 초월성에 대한 체험이다. 이것이 바로 삶의 체험 안에서 유한성과 초월성이 만나 역설적 얽힌다. 그러므로 역설적 유한성과 초월성의 역설적 연합은 이론적 개념화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삶의 구체적 체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간다. 마치 세계는 신이 불필요한 것처럼 우리를 유혹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역설적으로 신체험의 물음이 제기된다. 여기서 우리는 신의 증명에 대한 물음보다 신체험이 우선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은 가장 모범적인 역사적 예수의 신체험을 성찰하고 오늘의 신체험을 모색하는 것도 하나에 방법이다. 피셔(K. P. Fischer)는 라너(K. Rahner)의 신학에 대해 말하기를 “본래 자신의 체험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번역해서 그들을 함께 은혜에 참여하도록 신비주의주의자의 시도”라고 언급하듯이 라너는 오늘날의 신체험의 어려움을 말한다.
모든 인간 속에 부여되어 있는 신체험을 숙고하는 일에 있다. 이러한 경험은 한편으로-달걀로부터 닭을, 번개로부터 천둥을 유도해 내는 것처럼-세계로로부터 창조자를 인과율에 의해 추론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해명할 수 있는 거을 인식하지 못하는 합리적 계산보다는 한층 근원적이고 한층 불가피한 경험이다. 그러나 이 경험은 그 경험으로부터 명백하고 의식적으로 해석되고 설명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집요하거나 억제할 수 없지는 않다는 점에 이 주제가 어려움이 있다.
신체험은 신을 대상으로서 체험할 수 없다. 직접 나타나는 대상처럼 직관될 수 없다. 초월의 체험이다. 이 체험은 세계로부터 신적 요소를 제거하여 신을 신이 되게 한다. 칼 라너에 의하면 신에 대한 체험은 인간이 신뢰 안에서 스스로를 해방하고 신의 불가해성의 신비 안으로 스스로를 던짐으로서 신체험을 실존적으로 동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숨어있는 신처럼 신을 절대화를 인간의 절대화로 여기면 모든 것을 장악하려고 한다. 이러한 인간의 욕망에 제동을 거는 것이 부정신학이다. 부정 신학 일차적 장소는 성서 안에서 아니라 성서 밖에서 찾으려는 노력이다. 부정을 통한 긍정, 이사야 43,10-13을 보면 신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부정신학을 보여준다. 신은 자기 긍정 속에 동시에 부정을 가지고 있다. 신은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인간이나 인간이 만든 우상들은 강하게 부정한다. 신의 자기 긍정과 인간의 부정은 성서의 안에 흐르고 있는 맥이다. 닛사 그레고리가 신이 무엇인지 말하기 어렵지만 이해하기는 더 어렵다. 토마스도 신이 무엇인지는 결코 알 수 없으며 오직 신이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부정신학은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한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버림으로 신을 찾아가는 부정의 긍정이다. 신의 초월성은 인간의 무지의 지를 나았다. 부정신학은 신의 드러남 안에 감추어 있음을 표현하고 감춤의 현존(presence of absence)을 말한다. 부정신학은 신을 제한된 개념 속에 속박하려는 것을 부정한다. 드러남 속의 감춤임의 현존은 바로 침묵의 현존이다. 침묵은 단순히 묵언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이상의 것으로 다가와 체험된다. 침묵으로 다가온 신 앞에 선 인간의 유한한 언어의 속박에서 벗어나 침묵을 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정신학은 이런 드러남과 감춤 속에 있는 신을 향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역사는 신성의 정체를 표현하는 소위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의 긴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긍정’과 ‘부정’의 서술 방식은 초 본질적 신성에 대한 인지가능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현실적 삶의 태도에 까지 적용된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의 대립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총체적 이해를 위하여 분리의 편파성을 극복하고 긴장의 상보성을 도출한다. 이러한 ‘대립의 일치’를 근거로 ‘존재와 무’의 역설 변증법을 시도한 학자로서 보나벤투라를 들 수 있다. 보나벤투라는 창조된 세계의 풍성하므로 신의 존재를 예찬하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무의 사건으로 서술한다. 반면에 에크하르트는 창조물을 ‘무’로 출발하여 우주의 심연의 신격의 무성에 이른다. 이러한 표현은 상호모순이 아니라 신성과 인성의 총체적 이해를 돕는다. 존재와 무의 역리적 합일이 신 담론에 적용될 때 긍정성과 부정성의 분리에서 일어나는 논리적 편파성과 일관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초월적이고 자기 충족적이기만 한 신은 진정한 신은 아니다. …신이 초월적이고 내적적인 신의 역설에 의한 것이다.… 신은 세상을 창조했다면 신의 절대적 사랑은 신 자신의 절대적 부정으로서의 창조행위에 본질적이어야 한다. 창조물은 여분에 의한 신의 임의적 작품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신의 아들은 자기비움(self-emptying)을 통해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기 비움의 역동적 본체 속에서 진정한 인간인 동시에 진정한 신이다.
이처럼 존재과 무의 총체성은 이분법적인 것도 아니요. 형식 논리적 무모순도 아니다. 이것은 초 논리의 구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신론에서 배치된 존재와 무가 ‘대립의 일치’라는 신비적 원리를 통해 역설적 얽힘을 이룬다. 존재와 자유는 각각 존재와 무의 역리성을 내재화함으로써 존재는 그 무로 자유를 구성하고 자유는 그 충만으로 존재를 구성하는 초 실체적 관계 자체여야 한다. 즉 존재는 존재자들의 존재성을 위해 충만을 행사함으로써 그 자신을 존재자들에게 내어주는 공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자유는 그 개방성과 초월성에서의 공허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실현의 근거라는 충만으로 들어난다. 존재과 무의 역리성에 의한 존재와 자유의 상호 구성적 공속성은 자기 비움과 연결된다.
자유(無의 體驗)는 전제군주적 전능성에 대한 모방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제한이나 심지어는 자기 비움을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 고난의 십자가 없이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을 수 없다. 자기 비허 야말로 자유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자체의 원리요.
존재와 무의 상호 구성적 공속성은 어떤 것이 다른 것을 변수로 취하는 상수로 등장함 없이 상호 동시적 변수로 구성되는 함수관계이다. 이제 존재와 자유는 존재과 무의 역리성을 그 자체 안에 체득함으로써 ‘존재-즉-무/무-즉-존재’라는 초 논리적 일치의 도식에 다다른다. 존재와 무의 상호 구성적 연합은 그것 없이는 창조물의 유한성을 구조화할 수 없으며 동시에 초월성을 수행할 수 없는 인간의 ‘유한한 초월성’을 총체화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청이다. 존재는 인간의 초월성을 위해 자유를 구체화 하며 자유는 인간의 유한성을 위해 존재를 현실화 한다. 즉 유한성은 자유와 동치 되는 초월성을 통해서 체험될 수 있다. 자유 없이는 존재는 유한성을 지시할 수 없으며 한 존재의 제한으로서의 유한성의 체험에 의해서만 초월이 수행될 수 있기 때문에 존재 없이 자유는 초월성을 포함할 수 없다. ‘초월성 없이 유한성은 불가하며 유한성 없이 초월성도 불가하다’ 는 실존적 인간 구성의 도식은 이제 존재과 무의 역리성에 입각하여 자기 성취와 자기 비허의 일치라는 종말론적 실존구성을 가능하게 한다. 자기 비허와 자기 성취의 역설적 일치는 유한성이 초월성보다 우선될 때 자기멸절로 반대로 초월성이 유한성에 대해 우위를 점할 때 자기 절대화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치는 ‘유한한 초월성’이 ‘초월적 유한성’을 동시에 함축하도록 함으로써 통전적 이해가 가능하다. 토마스도 무의 경험을 한다. 이것이 토마스 신학의 신비적 요소이다. 토마스 신비주의는 비-형이상학적이고 비-존재자-신-논리학적이다. 그것은 이성의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존재 경험의 문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토마스에게도 마찬가지로 형이상학 극복이 있다. 탁월한 독일 토마스 학자인 요세프 피이퍼(Josef Pieper)에 의해서 “토마스 침묵”에 관해 에 논의된다. 토마스 사유의 말해지지 않는 지평을 그의 저작에 생기를 불어넣는 신비적-종교적인 생활 경험에서 찾고자 하는데 그 경험은 표현될 수 없는 까닭에 표현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상 토마스가 더 많이 말할수록 이러한 신비적 요소는 더 많이 숨겨질 것이다. 왜냐하면 토미즘적 언설은 하이데거가 일컫는 “존재자-신-논리학”의 형태로 매우 강력히 주조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당한 정도로 이성의 포로이고 하이데거가 일컫는바 이성의 사안이다. 이성을 중지하고 지성의 직관적 통일 속으로 들어서라는 토마스 저작 속에서 발언하는 소리 없는 외침이다. 토마스가 말하는 모든 것 속에서 말해지지 않는 것은 형이상학적-신학적인 사유 방식을 딛고 올라선 이후에는 버려져야하는 사다리라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극복되어야할 바의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안이 토마스의 형이상학이 데카르트 이전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데카르트 이후 체계들의 잣대로 제단해서는 안된다. 강한 의미에서의 존재자-신-논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토마스에게서 이성은 신앙에, 신비주의에 종속된다. 이성의 정체를 밝혀낸다. 그것이 은폐를 비 은폐로, 비 은폐를 은폐로 드러낸다. 그것은 자아의 목적이 신과 무의 합일이라는 점이다.
토마스의 무에 경험은 레지날드가 다시금 간청하였을 때, 토마스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썼던 모든 것은, 내가 보아온 것과 내게 계시되었던 것에 비교할 때 지푸라기같이 여겨지네.”토마스 생애의 마지막 며칠 일 간은 신비적인 침묵과 신비적인 주석을 다는데 활용할 정도였다. 토마스는 존재자체의 경험, 즉 무의 경험은 그의 자신의 형이상학적, 신학적 저술들이 지푸라기로 여겨지는 경험이었다. 이점은 토마스가 표상적 사유의 영역인『신학대전』의 개념들, 판단들, 추리들의 영역에서 비 은폐된 영역인 빛과 개방성의 영역에로 이행했음을 의미한다.
토마스는 추리적 이성의 시끄러운 소리로부터 사유의 침묵으로 이행한다. 따라서 토마스의 마지막 며칠간의 이야기는 형이상학으로부터의 “물러섬”이다. 존 카푸토에 의하면 토마스의 원문들의 해체적인 해석에 착수해야만 한다. 언어는 이성(ratio)을 전적으로 초월하는 것을 이성의 양태로 표현한다. 침묵은 말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말의 참된 의미이다.『신학대전』을 침묵으로 읽어야 함을 암시한다.
이러한 토마스의 침묵도 일종의 무의 체험이다. 무에 대한 체험도 .일종의 유한성의 체험이다. 인간은 질병과 죽음, 실패와 고통에 직면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체험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 소외에 대한 체험들은 불안을 양산하기도 한다. 이런 위기 안에서 인간은 전체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 않을 없다. 이러한 물음을 해명하기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현존재와 언제나 존재하지 않을 현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것이다.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경험의 개방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존재하지 않거나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간략하게 표현하면 ‘無’라는 부정적 사실이다. 이런 부정적인 사실로서의 비 현존함은 단순히 아무것도 아니 것도 아니며 현존함과 관련되어 있고 일체의 인간 현존재에 대한 부정이다. 그러나 무는 일체의 것에 부정이므로 그것은 어떤 실체처럼 이용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언어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언어로 표현되고 있는 무는 형식적으로 어떤 부정의 특성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는 이러한 부정적 특성 안에서 어떤 적극적인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불안 존재한다. 불안은 인간의 내적 구조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존재의 유한성을 알면서 동시에 무한한 지평을 가지고 있다. 이미 B. 파스칼이 언급했듯이현존재의 유한성과 현존재의 지평의 무한성 사이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살아가는 존재이다. 여기서 ‘그러나’라는 부정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우리는 이 세계 내에서는 오직 유한한 것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한한 것은 전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의 무이다. 이러한 유한한 경험은 불확실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은 유한한 현실적 존재의 ‘무한에의 욕망’ 안에 감추어져 있다. 이 안에 감추어진 것이 불안이다. 현존재의 근본적인 무한성은 어둠의 심연에 감추어져 있는 죽음이다. 이러한 어떻게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신뢰심이다. 신앙적으로 보면 일종에 믿음이다. 믿음이 불안에 방어망을 구축할 수 있다. “일체의 삶과 죽음을 망라하는 신의 권세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이것은 선험적이다. 우리의 통제의 한계 넘어서 미래로 선행하여 대비한다. 안전이 신앙의 계기이다. 무한에로의 모든 욕망은 죽음이라고 하는 확실성이지만 그것의 침묵의 심연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침묵과 어둠 밖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는 침묵하기 때문에 무(無)를 경험하는 사람은 공허한 무를 경험하든지 절대적인 숨김의 경험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전자는 허무주의 무의 경험이다. “일체의 모든 것은 무(無)다”라는 허무주의적 주장은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한다.”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에 무”이다. 이러한 무의 경험은 현상학적으로 보면 부정적 판단이다. 무(無)는 그 자체로 우리가 그것을 사유하지 못하게 하고 심연으로 내려간다.
또한 무(無)는 무한한 특징이 있다. 즉 이것은 한계의 부정이다. 왜냐하면 무에 빠지면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무(無)는 사물이 아니다. 또한 무는 어떤 주체도 어떤 사물도 사물들의 특성도 아니고 오직 모든 것의 부정이다. 이것은 현존재의 타자로서 현존재의 활동 안에 드러난다.이것은 부정적인 특성 안에 긍정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어떤 무엇을 의미하고 현재 현존하지 않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무(無)가 단지 단순히 형식적인 부정적 특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긍정적인 특성의 타자로서 긍정적인 특성의 부정으로서 주어져 있다. 이들은 부정적인 것, 무가 긍정적으로 주어져 있음을 말해주다. 여기에 삶의 존재와 무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고 긍정적인 특징들을 신비의 방식으로 드러낸다. 이것은 토마스가 유비의 술어의 망을 통하여 일체의 명제인 존재자를 넘어서는 경험이다. 존재자는 존재가 그것에 귀속되기 때문에 언어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존재는 귀속될 수도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제한된 것이다. 그러나 무 안에서는 신비는 일체의 그러한 제한과 사실성을 뛰어넘어서 존재한다. 그런 이유로 신은 존재자의 범주를 뛰어넘어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신의 신비이다.
7.3.2 무지의 지와 케노시스
앞 절에서 우리는 침묵과 무의 체험에서 긍정 즉 부정, 부정 즉 긍정을 논의했다. 모든 성찰은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다. 경험은 자연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상당하게 의미가 퇴색되었다. 그러나 경험은 반복될 수 없다. 또한 경험은 인간 존재의 한계에 대한 통찰이고 신적인 것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의 제거할 수 없다는 통찰과 인간의 유한성의 의식하는 경험일 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앎은 현재 그곳에 무엇이 존재하는 가에 대한 앎이 아니라 기대에 의해서 해결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한계에 대한 통찰을 한다. 따라서 진정한 경험은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경험이다. 결국 인간은 유한성의 한계까지 나아가서 ‘무지의 지’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언어와 언어로는 표현될 수 체험의 관계. 즉 철학적 성찰과 신비적 경험 사이의 관계이다. 이와 관련하여 언어에 의한 긍정(kataphatisch)신학과 언어에 의하지 않는 부정(apophatisch) 신학 사이의 오랜 역사의 관계를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무지의 지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비록 중세신학이기는 하지만 많은 신학적 의미 및 종교철학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토마스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표상과 개념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의 본성 그 자체는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알려질 수 없다. 또한 초자연적인 은총에 의하여서도 우리의 삶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이 세상의 삶에서는 전혀 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디오니시우스가 말한 ‘신성한 어둠’이며 인간적 앎의 사막이다. 이것이 토마스가 말하는 부정신학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것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앎의 능력에 대한 한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에 대해 우리는 그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이라고 하는 ‘無知의 智’이다.이것은 인간이 고백인 동시에 성찰이다. 토마스는 이러한 무지의 지를 최고의 지혜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인가?
신은 우리의 지성의 개념에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우리가 그에 대해 생각하는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이 우리가 신을 전혀 닮아갈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신에 대한 완전한 앎은 제거의 앎이다. 우리는 무지를 통해 신을 알며 마음의 본성을 넘어서는 신과 합일하게 된다.
우리가 제거의 방법을 통해서 신을 향해 나아갈 때 처음에는 그에게서 물질적인 것을 제거하고 이어서 인간에게 발견되는 지성의 것, 예를 들어 ‘선함’, ‘지혜’ 등등을 부정한다. 그리고 나면 우리의 마음에 남는 것은 그가 존재한다는 관념 외에 어떤 것도 남지 않는다. … 그리고 마지막 이러한 존재자체에 대한 관념마저도 그에게서 제거한다. 그 때 우리의 마음은 무지의 어둠 안에 있게 된다. 위 디오니시우스가 말한 것처럼 이것이 신의 거주하게 있다고 말하여지는 무지의 구름이며 이러한 무지에 의해 우리는 이승에서 신과 가장 합일하게 되는 것이다.
토마스가 위 텍스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토마스의 부정의 방법이 무지의 체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긴 속에 있는 모든 표상과 관념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무지의 지를 현대의 철학자나 신학자의 입장을 더듬어 보자. 무지의 지(無知의 智)를 신 경험의 물음으로 옮겨 갈 때, 다시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의 필연적 연관을 드러내준다. 마리땡과 니시타니는 ‘無知의 智’에 대한 시각을 드러낸다. 니시타니는 무지의 지에 대한 자각적 무지로서의 ‘無知의 智’, 또는 마리땡은 인지하는 무지로서의 ‘無知의 智’를 말한다. 이것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상적인 것이 ‘비 본래적인 것’ 즉 참된 실재가 아닌 것으로서 인식되고 또 그것으로부터-거부의 길(via remotionis)을 통해서- 멀어져서 , ‘본래적인 실재’의 경험으로부터 다시금 현상적인 것을 향하게 될 때 이러한 일은 가능하다. 이렇게 이 세계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부정에 의해서 매개되어야 한다. ‘부정의 길’(via negatonis)을 나타내 주는 두 가지 계열의 텍스트가 있다.
첫째로 앎의 과정에 관련된 텍스트: 이 텍스트에 있어서는 여전히 주장이 명확하게 표현된다. 예를 들면 아퀴나스는『보에티우스의 삼위일체론 주해』(Boethium de trinitat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이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이 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사실은, 신에 대한 학문에 있어서는 신이 무엇인가를 아는 앎과 같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정은, 어느 하나의 사정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의해서 다른 사항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처럼, 또한 그것은 그것이 무엇이 아닌지에 의해서 구별되기 때문이다.
『대이교도대전』(Summa contra Gentiles)에서도 신의 실체를 고찰할 때 부정의 길이 주로 기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오성이 도달하는 일체의 형식을 신의 실체는 그 측량할 수 없는 무한성에 의해서 능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의 실체를 그 실체가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방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신의 실체가 무엇이 아닌가를 인식함으로써 신의 실체에 대한 인식을 지닌다. 따라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오성에 의해서 신을 부정할 수 있으며 있을수록 신에 대한 앎에 가깝게 접근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나의 사물과 다른 사물들의 차이를 잘 숙지할 때 그만큼 각각의 존재를 더욱 완전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며 각각의 사물은 그 자신 안에 그의 특유의 존재, 즉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는 존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이 진리가 오직 인식될 뿐이고 경험되지 않는다면, 즉 이 진리가 단지 기술될 뿐이고 체득되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긍정신학의 영역을 떠나지 못하며 (왜냐하면 어떤 학문에도 부정적인 여러 주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높은 단계의 지혜로 이행하지 못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명제집 주해』에서도 분명하게 언급하기를 부정신학을 통해서 신에게 나아가는 경우 우리들은 신에 있어서 우선 신체적인 것을, 두 번째로는 창조물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호의라든가 지혜와 같은 정신적인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우리들의 정신에 남게 되며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이 경우 신의 존재는 모호해 진다. 그러나 마지막으로는 그러한 존재 자체조차도 그것이 창조물 안에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 신에게는 부정된다. 그래서 이 경우 신의 무지의 그림자 안에 머물게 된다. 도(道)의 상태에 속하는 이 무지 안에서 아레오파기타의 위 디오니시우스가 말했던 것처럼, 신과 가장 잘 결합한다. 그래서 이 無智의 신이 거하는 어두움이다.이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부정신학은 긍정신학에 덧붙여짐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전자는 후자와 나란히 나아가는 것도 아니며 후자를 대신하는 것도 아니다. 전자는 후자의 어깨를 올라타고서 동일한 사물을 보다 낫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 부정신학은 다른 신학이 주장하는 것을 단순히 부정하기 위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긍정과 부정에 의해서보다는, 즉 간접적인 주장에 의해서 보다는 목표에 더 잘 도달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 다른 신학이 결코 만족하게 주장할 수 없는 현실성을 무지의 지에 의해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가 앎과 무(無)에 대한 체험의 적극적인 개시로서 확보되어야만 부정신학은 단순한 불가지론이나 부정주의에서 끝나지 않는다. 신플라톤주의의 언어 이탈(Apophasis,언어 부정)을 “신비주의라고 간주하면서도 형이상학으로 보고, 그것 자체를 신비적 ‘탈자’의 방향으로 변증법적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마리땡은 신플라톤주의와 그 후계자들에게 말한다. 이에 반해서 마리땡은 신비적 명상(관조)란 본질상 초자연적주장한다. 이와 유사한 고찰이 교토학파의 공의 철학에 적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토학파 역시 언어를 통하여 논쟁을 벌여 나가므로 우리들은 언어에 대한 그들 자체의 평가를 묻지 않을 수 없으며 또 그처럼 묻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말에 ‘자아’가 개입되지 않는지 문제이다. 올바르게 생각한다면 인간은 언어 없이도 마음을 열고 자유롭게 될 수 있다. 때문에 인간이 놀라움이나 행복 앞에서 말을 잃어버리게 될 때,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말은 ‘말없는 말’의 영역을 가리키고 있다. 칼 라너는 좋은 성찰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인간이 신의 이해 불가해성에 의해 산산이 부수어지지 않고 … 그것을 허용하고 수용할 수 있는 행동은 … 바로 이러한 불가해성을 완전히 신뢰하면 그것에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행동이다.
7.4 해석과 성찰 그리고 실천
기독교 전통은 그 역사적 과정을 통해 신에 대한 앎과 표현의 가능성과 한계들에 관해서 매혹적인 해석과 성찰들을 축적했다. 이 지혜는 중세신학 명제들 안에 명료하게 성문화되었으며 그들 중 특히 아퀴나스의 사상은 고대 그리스와 기독교 원천들뿐만 아니라 유다와 아랍의 지혜까지 포함하는 지적 논증으로 풍요롭다. 그것은 신의 감추어짐 또는 불가해성에 대한 교리, 신성에 대한 유비적 표현, 신에 대한 많은 명칭에 대한 논의이다.
신의 거룩함과 완전한 초월성은 항상 유다 전통과 거기에서 파생된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 중심 주장이었다. 신은 내적으로 현존해도 측정하가나 만져보거나 대조해 볼 수 없는 무한한 신비이다. 신의 불가해성 또는 감추어짐에 대한 교리는 이 신적 초월성의 당연한 결과이다. 본질적으로 신은 영육이 유한한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분이다. 참으로 인간 존재는 신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개념 · 말 · 상상 등 창조된 실재의 체험 안에서 생겨난 그 어떤 것도 신의 실재를 정의 할 수 없다. 형언할 수 없는 신의 신비는 인간의 어떠한 개념이나 말로도 적절한 형태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신은 어떤 창조물과 비교될 수 없는 초월적인 신이며, 신은 결코 본질적으로 우리가 알 수 없는 신이기 때문이다. 옛 그리스 신학자들의 사상을 반영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고백
“만일 네가 이해했다면 그분은 이미 신이 아니다.”(Si comprehendis, non est Deus)
에서처럼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신의 이 큰 영광의 심오한 신비는 신 언명의 종교적 의미를 드러낸다. 이 언명은 결코 그 대상인 신을 모두 장악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을 언명함으로써 더욱 깊은 찬미와 흠숭의 자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유형으로 해석되든 신의 신비를 다 풀어낼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신의 불가해성을 자유와 해방이라고 하는 사랑의 신비로 이해한다. 사랑이란 아주 가깝게 이끌고 부족한 우리를 선택하며 돌보고 동행하고 투쟁의 길을 함께 걷고 승리를 약속하며 우리를 하나로 모아 우리 안에 머무름이다. 칼 라너는 이것을 역설적으로 말했다.
“신이 주신 영지 곧 신을 직관한다 하더라도 계시는 신비의 결코 신비를 능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계시란 다만 신을 그 신비로서 깨닫는 한 과정일 뿐이다.”
서방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아우구스티누스 작품의 영향으로 큰 설득력을 지닌다. 사실 신은 형언할 수 없는 분이기에 신에 대한 모든 언급은 결국 침묵과 무지에서 맴돌 뿐임을 그는 역설하고 있다. 사시 우리가 많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신은 궁극적으로 이름이 없는 분일 뿐 아니라 그 어떤 이름도 그 분의 신성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물이 아무리 완전하다 해도 그것은 신의 반영일 뿐이기 때문에 신의 언급이 비록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충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은 우리가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신은 이런 분이라는 것보다 신은 이런 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해했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이해할 수 있었다면 당신은 신이 아닌 것을 이해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부분적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면 당신의 생각에 속았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신을 알 수 없다는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되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 대한 무지가 필연적임을 말하면서도 사실은 사랑만이 종교의 순수한 목표, 즉 신께 대한 인식에 이를 수 있는 것이라 역설하고 있다. 창조물과 전혀 다른, 그리고 상징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신은 인간의 깊은 사랑 속에서 확인되는 사랑 자체이다. 사랑을 통해서만 우리는 신을 깨달을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 신학에서 우리가 수용한 것은 바로 긍정과 부정으로 이둘 모두는 본질적으로 신의 진리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신을 맛보며 알 수 없는 신과 일치할 수 있는 것이다.
신의 불가해성은 새로운 역설적 방법을 통해 명명되었다. “지금 우리는 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다만 신이 이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의 존재 양식보다는 신의 부재 양식을 더욱 고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앎과 신의 이름에 대해 처음부터 본격적으로 논하고 있다. 사실 그 어떤 창조물도 신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신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신이 어떤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자체가 틀린 것이다. 이처럼 아퀴나스는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 다마스코의 요한 그리고 위 디오니시우스를 언급하면서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있어온 신의 불가해성에 대한 전승을 체계적으로 종합했다.
신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앎은 디오니시우스에 의하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시는 신을 제대로 인식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앎은 최고에 달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최고의 앎은 우리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종교적 깨달음이고 성찰이다. 신의 숨겨짐이라는 진리는 고전적 전통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현대 신학 안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다. 그렇다고 토미즘을 부활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토마스를 재해석하므로 신학의 풍부함을 공급받자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과 같이 현존의 무상함이 포스트 모던리즘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칼 라너의 분석에 의하면 만일 인간의 실존적 의미가 어둠에 쌓여있더라도 인간이 참으로 신의 신비를 믿기만 하다면 이 ‘부정신학의 강력한 체험’은 오히려 긍정적인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영적 풍토에서만 가능한 신에 대한 언어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신의 스쳐 지나감은 바로 신앙이 싹틀 수 있는 기본 관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신의 불가해성에 대하 깊은 체험에서 시작된다는 생각과 함께 월리암 힐은 삼위일체의 신의 본성에 대한 성서 계시에서 “캄캄한 어둠에 대한 긍정”의 자리로 되풀이해서 돌아온다. 신의 드러남은 곧 감춰짐이며 역사적으로 언제나 조건적이고 완전히 빛날 수 없는 것이다. 어째든 신의 앎이 아무리 분명하다고 해도 이성과 신앙은 둘 다 여전히 난제를 지니게 된다. 곧 그것은 창조물계에서 형성된 개념과 모형들이 어떻게 신의 신비를 다 나타낼 수 있는 가이며 그것은 결국 부분적이며 늘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초월적 사고체계로 이 주제를 해석하면서 칼 라너는 신의 불가해성은 신학의 부록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신학의 핵심사상이라고 주장한다. 신의 무궁무진함이 바로 인간의 앎과 사랑 안에서 자기 초월의 가능성과 조건을 이루어 주기 때문이다. 불가해한 신의 지평과 궁극적 충만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곧 인간의 계획 자체는 결국 영의 그 무한한 깊이를 잴 수 없다. 계시는 인간이 신적 신비를 꿰뚫어보는 “조명(enlightenment)”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발터 카스퍼는 기술한다. 성삼위의 신비에 관한 계시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은 단순히 신 신비의 계시에 대한 종합이 아니라 그것은 또한 모든 계시의 근원이고 목적이며 핵심인 신의 감추임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다.
그리고 계시를 통해 신은 전적 타자나 불가해자 존재는 아니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폰 발타사르 “성서에 나타난 신의 놀라운 불가해성”이라는 훌륭한 답변을 제시했다. 곧 신의 사랑은 그 어떤 철학적 개념의 불가해성도 훨씬 넘어서 신적 신비를 드높여 준다. 신은 자기 계시를 통해서 여전히 자신을 숨긴다.
그러므로 신은 “삼위일체”라는 이 모든 선언을 불가해한 신비이며 여전히 그렇게 남아 있다. 우리가 신 안의 위격들을 말할 수 있음은 오직 유비적일 뿐이다. 우리가 “낳고” “발하고” 또는“숨을 내쉬며”라고 말할 수 있음도 오직 유비적일 뿐이다. 우리가 “셋”이라 말할 수 있음은 유비적일뿐이다. 왜냐하면 “셋”은 절대와 관계된 것으로 숫자상 세상에서 보통“셋”이라고 말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고전신학과 보완된 현대신학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하고 객체화할 수 없는 신을 인간의 언어와 상징 그리고 개념 등으로 표현하는 데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하는 성찰이 필요하다. 2016/11/22 혜윰인문학연구소 /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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