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리쾨르 해석학 이해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의 비판을 중심으로-
Ⅰ. 들어가는 말
현대 해석학은 하나의 독자적인 학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해석학이란 쉴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되는 해석학을 말한다. 이제 해석학은 19세기 쉴라이에르마허가 제창한 것처럼 단순히 텍스트를 해석하는 이해의 기술이 아니라 사실과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보편적 이해의 학으로 그 방향을 잡고 있다. 불트만, 본 훼퍼, 에벨링은 하이데거에 의해서 제시된 실존적 해석학을 신학적 해석학으로 유용화시켰으며, 판넨베르크는 가다머에 의해 제시된 영향사적 해석학을 보편사 해석학으로 유용화시켰다. 리꾀르는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존재론적 해석학의 착상을 수용하면서, 리꾀르가 출발한 훗설의 관념론적 현상학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화와 상징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현상학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리꾀르는 해석학을 텍스트 이론으로, 그리고 전통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비판 해석학으로, 과거를 재 형상화하는 서사 해석학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도들은 해석학이 단지 하나의 이해의 기술임을 넘어서서 사실과 인간과 현실을 이해하는 하나의 포스트모던 철학 내지 신학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석학은 한계에 부딪힌 선험 철학과 현상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 말씀의 신학으로서의 기독교 신학이 나아갈 방향을 해석학적 신학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 논문은 리꾀르의 해석학을 이해하는 기초과정으로서 해석학적 현상학과 상징 해석학을 이해하고 그 바탕위에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을 비판하는 진위가 무엇이며, 왜 리꾀르가 이러한 해석학적 시도를 하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Ⅱ. 폴 리쾨르의 해석학적 시도 : 해석학적 현상학
지금까지 서양철학은 인식론과 존재론이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리꾀르는 해석학에서 이 두 길을 하나로 묶으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의 주체성도 살리면서 존재의 주재도 살리려는 시도이다. 주체성을 둘러싼 인식론과 존재론의 대립을 하나의 궤도에 묶어 주체성을 이루려는 해석학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해의 문제를 존재의 방식으로 보았다. 그럼으로써 인식론을 존재론을 바꿔버렸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주체 상실의 우려이다. 추체가 상실되면 전체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리꾀르는 인식론을 존재론에 흡수시키지 않고 구조주의나 정신분석이 제기한 문제, 그리고 의미론을 거쳐 존재론으로 간다. 여기서 현상학과 존재론 사이에 언어철학이 들어가고, 해석학의 언어철학은 현상학과 존재론을 이어지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리꾀르는 『악의 상징』을 통하여 해석학을 파종하고 『해석의 갈등』을 통하여 제4장 리쾨르 해석학의 돛을 올리고 있다. 리꾀르가 노리는 것은 현상학 방법에 해석학의 문제를 접목시키는 것이다. 그는 해석학을 현상학 위에 세우는 두 가지 방법 곧 하이데거식의 이해 존재론이라는 가까운 길과 언어학 이론을 거쳐 가는 좀 더 멀고 힘든 길 가운데 자신은 두 번째 길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해석의 갈등’이라는 표제 자체가 의미심장한 제목이다. 왜 해석의 갈등이라는 말인가? 과연 리꾀르 ‘해석의 갈등’을 통해서 과연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가? 20세기 들어 담론의 분해와 해체를 야기한 다양한 분과 학문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암시한다. 기호 논리학이나 주석학이나 인류학이나 정신분석학 같은 잡다한 그리고 서로 쉽게 화합하지 않는 분과 학문들의 진보는 오늘날 언어적인 것의 단위를 확정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해석의 갈등』에 묶인 에세이들은 이 시대의 담론의 공간 한가운데서 발견되는 그런 갈등들을 탐색한다. 예컨대 구조언어학과 의미론, 해석학과 정신분석학, 이런 경쟁적 해석들의 갈등을 어떻게 중재할 것인가? 왜 리꾀르는 언어의 문제에 집착하는가? 리쾨르는 언어 문제를 붙잡고 늘어짐으로써 다른 논쟁적 철학 문제들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석학이 자신과 현상학의 만남을 주선하는 의미론을 중심에 놓을 때, 그것은 인간이라는 의미의 다원적 기능을 해명할 거대한 언어철학의 탄생에 기여하리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체험의 조건은 언어적이고, 모든 해석은 다의적이며, 이해되는 것은 ‘텍스트 앞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폴 리쾨르는 의미론의 중심을 이루는 다의적 표현들을 ‘상징’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해석이란, 문자적 의미에서 출발해 거기 숨겨진 모든 수준의 의미를 탐색하는 작업이다. 그러니 상징 표현의 영역과 해석 활동의 영역은 서로 꼭 겹친다. 이제 상징과 해석은 대조 개념이 아니라 동반 개념이 되었다. 여러 가지 뜻이 있는 곳에 해석이 있고, 여러 가지 뜻이 드러나는 것은 해석을 통해서다. 해석은 복수(複數)의 의미가 있는 곳에 개입해서 그 복수성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해석의 갈등』에서 해석학이 순차적으로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현상학, 악의 상징 해석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교와 믿음을 만나는 것은 이런 전제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의미론의 도움만으로는 해석학이 철학이 될 수 없다. 의미 형성을 자기 안의 닫힌 체계로 보는 언어학적 분석은 언어를 절대자로 만들고, 자기가 겨냥하는 것 앞에서 사라짐으로써 어떤 존재에 이르기를 바라는 언어 기호의 원래 의도를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상징 표현을 이해하는 것이 곧 ‘자기’를 이해하는 계기임을 밝히지 않은 채, 오직 의미론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헛된 짓이다. 그래서 의미론 단계 다음에는, 기호들의 이해와 자기의 이해를 연결하면서도 그 자기를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우위와 동일시하지 않는 반성 단계가 와야 한다.
리쾨르의 반성 철학은, 직접 의식이 또한 허위의식이기도 하다는 정신분석학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있는 만큼, 결코 의식의 철학이 아니다. 의식 비판을 거쳐서 심리학은 이해의 존재론을 향한다. 여러 가지 해석학들은 매우 다르면서도 모두 이해의 존재론이라는 뿌리를 향한다. 정신분석학(주체의 고고학)은 욕망을 통해서, 정신현상학(주체의 목적론)은 정신을 통해서 그리고 종교현상학(종말론)은 거룩한 상징을 통해서. 신학적 해석학은 철학적 해석학의 원리로부터 선포된 생생한 말씀과 문서화된 성서를 구분할 것을 배운다. 즉 하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형성되어 주어져 있는 구약이나 헬레니즘문화에서 형성되어 전승되고 있는 문서의 전 이해를 필요로 한다. 말씀선포의 원천인 증언들과 증언들에 대한 해석이라는 이중성이 신학적 해석학이 출발하는 거리두기의‘해석학적 상황’이다. 리꾀르의 해석학의 눈으로 보았을 때 신앙은 해석학적 상황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하면 신앙은 해석의 결과이다. 신학은 신앙이 해석을 낳는다고 말하지만 리꾀르가 볼 때 해석을 낳는 신앙 이전에 해석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앎과 믿음의 순환 관계와 관련된 문제이다.
Ⅲ. 폴 리쾨르의 상징 해석학
과연 리꾀르는 상징을 어떻게 해석 하였는가? 그의 해석학에서 무엇보다도 상징이 중요한 이유는 그 상징이 언어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의 상징 개념은 하나의 시니피앙이 그에 대응되는 하나의 시니피에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적이고 명백한 일차적인 의미를 포함하되 그런 문자적 의미를 통해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이중적 언어 표현들을 총칭하여 상징이라 부른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리꾀르에게 해석학의 한 영역으로 포섭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사실, 정신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엄밀히 말해 꾸어진 꿈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꿈을 언어로 표현한 꿈의 이야기라는 하나의 텍스트가 그 분석의 대상인 것이다. 리꾀르는 인간 삶의 제 영역에 있어서 상징이 출현하는 영역을 첫째로는 종교적 영역에서의 고백의 언어와 우주적 상징들을 들고 있으며 둘째로는 꿈의 이중적 언어영역인 정신분석 세 번째로는 앞서의 두 영역을 통해 더욱 풍부해진 시적 상상력의 영역을 제시하고 있다. 상징이 넓은 의미에서는 반성 철학과 해석학에 좁은 의미에서는 주체의 문제에 중요한 것은 상징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의미를 이미 그 속에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징은 우리를 지향적으로 상징의 상징된바 그것에 우리를 실존적으로 동화시키는 운동이자 힘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은 사유를 불러일으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 상징이 말하며 우리는 그 풍부하고도 충만한 언어적 힘에 불러 세워진 주체가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반성철학의 직접적인 주제인 의식이나 자아는 상징을 대면함으로써 상징을 해석함으로써 의미의 기원이 그 자아나 의식과는 다른 영역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상징 해석을 거치지 않았던 소박한 의식이나 자아는 포기되고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되며 의미의 기원은 적어도 그런 의식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진다. 그 기원이란 종교적 영역에서는 성스러움 일 것이고 정신분석에서는 무의식과 그 욕망이 될 것이다. 데카르트가 사물에 대한 의심을 의식의 명증성으로 극복했다면 이제 의식에 대한 의심을 우리는 프로이트와 종교현상학 덕분에 그 의식의 표현물들에 대한 해석과 주석을 통해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철학적 반성은 해석을 요구하며 반성 철학은 상징의 인식론을 통해 구체적이 되며 그 스스로 해석학이 되는 것이다.
Ⅳ. 폴 리쾨르의 불트만 실존론적 해석학의 비판
리꾀르는 인간의 의지, 악, 신화와 상징, 은유와 이야기 등의 다양한 주제와 실존주의, 현상학,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이데올로기 비판, 분석 철학 등의 현대철학의 방법들을 해석학의 관점에서 종합하려는 연속의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사상은 끊임없는 ‘해석의 모험’이라고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 리꾀르의 해석학은 현대의 성서 해석들- 불트만, 구조주의 성서 해석, 문학적 성서 해석-과의 대화 및 대결을 통해 성서 언어의 특징과 구조를 해명함으로써 케리그마와 성서의 긴장 속에서 성서의 통일된 이해를 추구하는 데 있다. 리꾀르의 불트만 비판은 불트만의 신학적 기획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 아니다. 불트만의 작업을 현대의 해석학적 상황에서 성서의 말씀의 신앙적 의미를 발견하려는 진지한 시도로서 인정하면서 그 해석학적 의도와 구조를 해명하고 거기서 제기되는 문제점을 제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리꾀르에 따르면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했다는 소식”을 성서 독자요 말씀을 듣는 청중인 현대인에게 이해시키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작업은 “현대인에게 무의미한 신화적 세계상을 묘사하는 것에 불과한 잘못된 이해들을 파기하고 모든 인류에게 항상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진정한 이해들, 즉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나타나는” 일이다.
리꾀르는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이 가지고 있는‘해석학적 순환’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불트만이 제시하는 성서 해석의 상황은 이해와 신앙의 순환 구조에 의해 규정된다. 성서의 이해는 해석자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가 이해하려는 의미, 즉 성서 텍스트 자체가 말하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왜냐하면 텍스트가 제시하는 신앙의 세계는 텍스트에 이해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반면에 텍스트의 이해는 항상 신앙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리꾀르는 이해와 신앙의 순환논리에 의해 본래적 케리그마의 의미와 그에 대한 신앙의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불트만의 해석학적 기획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러면 리꾀르가 바라본 실존론적 해석학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 불트만은 성서 텍스트의 신화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신화적 진술의 의미 자체는 더 이상 신화적이 아니다.”라는 전제 아래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에 직면한 세계와 인간의 유한성을 표현하는 의미들은 신화적 표상에 의해 대상화된 언어에 속하지 않는 순수한 언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언어로서 하나님의 행하심, 행위로써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미래를 예시한다는 것이다. 불트만 이러한 언어를 단일적 의미로 취급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둘째,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존재론, 특히 철학적 인간학의 측면으로부터 “성서적 인간학에 접근하고 성서의 우주론적이고 신화론 적인 진술을 인간 실존의 개념들로 해석할 수 있는” 적합한 개념적 도구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불트만이 하이데거로부터 채용한 것은 실존적 존재론이 갖는 풍부한 내용이 아닌 “ 실존 범주로 환원된 단순한 형식”이었다. 리꾀르는 기독교 신학이 하이데거 철학과 의미 있게 대결하려면 그의 사유의 기나긴 길을 전체적으로 조망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셋째, 리꾀르는 불트만이 신과 사람 사이의 인격를 표현하는 말들은 더 이상 비신화화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을 비판한다. 그런 인격 관계를 가지고 불트만은 실존론적이지 않고 실존론적 결단의 문제로 갔지만, 리꾀르가 볼 때는 결단 이전에 텍스트 이해가 있고, 텍스트는 존재가 언어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관적인 결단을 하기 전에, 객관적인 존재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단계를 거쳐야 함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리꾀르의 해석학은 어떤가? 리꾀르의 해석학은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학이 강조하는 실존의 자기 이해에 대해서 전승된 텍스트의 의미와 주어진 텍스트의 이해를 강조한다. 이러한 리꾀르의 텍스트에 정위 된 해석학은 불트만의 실존에 정위 된 해석학에 대한 양자택일이 된다. 그러나 불트만의 해석학은 첫째 말씀의 내용적으로 객관화하는 설명을 신앙을 비 경건하게 안주시키려는 것을 거부하고, 둘째 신앙 언어의 의미성과 사고 내용에 대한 질문을 도외시하고, 성서 텍스트의 차원에서 떠나서 그것의 객관적 의미성의 해석을 약화시켰다. 는 측면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리꾀르의 신학적 해석학은 첫째, 전승된 텍스트 의미 해명을 주요시하는 해석학이고, 둘째 주어진 텍스트의 이해를 주요 과제로 삼는 해석학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리꾀르는 철학적 형이상학의 현대적 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전승의 분석으로부터 초월과 형이상학의 의미 내용과 차원을 되찾고 다시 논구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간과 공간 저편에 있는 존재와 초월에 대한 의미 해명은 불트만이 주장하는 실존의 선행적인 이해를 통해서보다는 초월과 초세 계적 존재에 관한 전승된 진술의 의미 의도를 분석함으로써 밝혀져야 한다고 리꾀르는 주장한다.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에 반대를 제기하면서 리꾀르는 텍스트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신학적 해석학의 첫째 과제라고 말하면서, “해석학의 첫째 과제는 독자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텍스트의 사실인 존재 세계가 전개되도록 하는 것이다. 리꾀르는 텍스트의 사실이 가장 주요한 범주로서 이해된다면 ”,“텍스트가 기획하는 의미가 저자에게 주어지는 것처럼 심리주의 화하는 개념 속에서 성서의 영감에 관한 질문을 제시하는 것이 중단된다”라고 말한다.
Ⅴ. 종교언어와 계시
폴 리꾀르에 의하면 일반적인 언어와 종교적인 언어 이해에 중심이 되는 것은 담론의 양식과 담론의 의미 사이의 관계이다. 종교적 경험과 현상들은 특수랑 담론 형태를 통하여 언어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종교적 언어에 대한 해석은 담론의 양식에 주의를 요한다. 이러한 기본 원칙이 리꾀르의 종교 해석 전체에 반복해서 나타난다. 이러한 원칙의 한 예가 계시의 개념에 대한 그의 해석이다. 그가 보기에는 종래의 계시 이해가 담론의 양식의 다양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리꾀르는 계시 사상의 해석학을 발전시킴에 있어서 계시를 설명하려는 과거의 시도가 단일론적이라고 지적한다. 그럼 여기서 불트만의 계시 개념을 살펴보자 불트만에서 있어서 중요한 계시 개념은 단연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교훈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개인의 사건임을 말한다. 어떤 사건인가? 그것은 인간의 한계성에서부터 본래성으로 나아가게 되는 한 점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신약성서에서 한계성은 무엇이고, 또한 본래성은 무엇이냐? 불트만은 그것을 사망과 생명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계시라는 것은 사망을 극복하고 생명을 선사하는 것이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는 새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롭게 창조되는 구원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생명을 선사하는 사건은 미래를 희망하는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에서 이 생명은 증명된다. 고 불트만은 말한다.
이에 반하여 리꾀르는 담론에 있어서의 다양한 계시 형태를 지적하면서 다원적, 다의 미적, 유비적 계시 이해를 제시한다. 철학의 일관된 주제, 즉 의미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의 언어학적 구조와 양식의 중요성이 계시 사상에 적용된다. 리꾀르는 성서에 예언, 설화, 규정, 지혜, 찬양과 같은 담론을 포함하는 다양한 담론 형태가 있다고 지적한다. 전통적인 계시 개념은 이러한 양식의 다양성을 간과하며 계시를 특수한 담론, 예컨대 예언과 규정적 양식으로만 축소시켰다. 따라서 의미의 엄청난 다양성과 계시의 용법을 감상하는데 실패한다. 문학적 양식의 다양성에 대한 이와 똑같은 관심이 리꾀르가 루돌프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을 다루는 데서도 나타난다. 리꾀르는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이 언어의 다양한 양식과 분명한 담론에 나타난 충만한 의미를 탐구하지 않고서, 신화에 관한 언어로부터 너무 빨리 실존적 해석 에로 나아갔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불트만이 비신화화 프로그램이 함축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이며 존재론적인 문제도 발전시키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해석학적인 상황을 거치는 것이지 직접적인 대화나 대면이 아니다. 계시는 해석학적인 사건이라고 봐야 한다. 성서의 종교인 기독교의 계시의 실체가 그렇다. 말하자면 계시란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뜻은 말의 뜻을 통해 드러난다. 말뜻을 풀면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계시에 사람이 참여한다. 계시한 하나님의 일방적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참여하여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지만, 동시에 계시에는 인간의 주체성도 들어간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리꾀르는 성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리꾀르는 성서의 이해란 성서본문이 전개하는 텍스트의 의미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 현실로부터 이탈하여 성서 자신이 지시하는 새로운 의미 세계로부터 우리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부름을 이해하는 일이다. 동시에 텍스트의 세계의 자기 제시 앞에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자기에 대한 가상과 왜곡을 파괴하는 작업이다. 이처럼 해석학의 독특성과 독자성은 성서 텍스트 역시 여러 텍스트 가운데 하나이지만 성서가 지시하는 새로운 존재는 오직 성서의 고유한 텍스트 세계에서만 발견될 수 있고 성서의 모든 의미 내용들은 오직 하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뗄 수 없이 연결된 하나님에 의해 통일성을 얻는 점에 있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리꾀르는 종교 언어의 은유적 성격에 대하여 강조한다. 리꾀르에 따르면 은유를 여러 수사학적 표현 방식 중 언어의 의미 창조 기능을 대표하는 표현양식이다. 모든 문학적 장르 글에서 이러한 은유적 표현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글에서 기존의 의미와 다른 새로운 의미가 창조되고 인간 실존과 현실이 새롭게 기술된다. 성서 비유의 은유적 성격에 대한 반박을 리꾀르는 현대 비유 연구의 창시자 윌리허에서 찾는다. 월리허는 복음서의 비유의 기능을 은유로서 규정하는 것을 단적으로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은유적 해석이란 일종의 알레고리적 해석으로서 비유 속의 각 단어들에 숨겨진 ‘참된’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리꾀르는 성서 비유의 기능을 그가 ‘긴장이론’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은유 이론에 의해 해명하고자 한다. 이 이론은 은유 과정을 한 단어의 의미가 문장 맥락과의 관계에서 수시로 변형되어 다양한 의미로 형성되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과정에서는 삼중의 긴장관계가 성립한다. 삼중의 긴장 관계란 첫째, 은유적 표현이 사용된 문장들과 비유 전체 사이의 긴장. 둘째, 한 단어의 은유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새로운 의미를 순간적으로 형성할 때의 긴장. 셋째, 최종적으로 은유를 통해 복합적으로 그려지는 장면과 일상 세계의 현실과의 차이에서 오는 긴장이다.
Ⅵ. 나가는 말
결론적으로 리꾀르의 현상학은 훗날의 관념론적인 현상학의 길을 해석학적 현상학의 길로 전환시킴으로써 현상학의 본래 의도를 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리꾀르에 이해된 해석학적 현상학은 인간의 존재와 사유를 절대적 존재나 사유로 보지 않고 겸손한 주체로 설정함으로써 인감 본래의 모습(기독교적 인간 이해)으로 접근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관념적인 자기 해석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본성에 표현이 나타난 신화나 상징을 해석함으로써 성서를 보다 잘 이해하고 반성된 신앙에 도달하려는 길을 열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리꾀르의 해석학의 리꾀르의 해석학적 공헌은 무엇보다 더 해석의 주된 노력을 텍스트의 의미를 해명하는 데로 돌려놓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먼저 믿어야 성서를 이해한다.’고 하는 명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신학과 철학의 간격을 중개하고 있다. 이러한 리꾀르의 텍스트 세계에 정위 된 해석학은 불트만에 의해 주관화되어 버린 실존론적 해석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그리고 리꾀르가 말하는 텍스트의 자율성은 성서의 계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고유한 해석학적 범주로 볼 수 있다. 그의 해석학은 텍스트 세계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강조함으로써, 역사 비판학적 세계관, 즉 객관주의적 실증주의 세계관에 의해서 제한당하고 있는 성서적 세계의 고유성과 복합성을 살리고 있다. 성서가 지니는 신적이고 초월적 진술의 차원은 따라서 불트만의 의도처럼 주체성 이해의 차원을 환원되어야 한 차원이 아니라, 그 고유한 자율적 차원의 세계로 다루어져야 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불트만과 리꾀르의 해석학은 우리들의 학문과 삶의 현장에서 보다 더 겸손한 주체가 되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2005/ 06/20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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