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 카푸토 Caputo, John D, 마르틴 하이데거와 토마스 아퀴나스: 형이상학의 극복에 관한 시론 Heidegger and Aquinas 이 책은 부제 (형이상학에 관한 시론)에서 말해 주듯이 하이데거와 아퀴나스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의 의의와 한계를 밝혀보려는 책이다. 이러한 의도를 위해 저자가 택한 방법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주요 개년과 아퀴나스 형이상학의 주요 개념을 대결시키는 방법이다. 이 책은 3가지 중요한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여기에서 존 카푸토는 하이데거의 카톨릭적 배경과 초기의 저술과 역정이 상세히 소개한다. 두 번째로 스콜라학에 관한 하이데거의 전기 후기의 비판을 잘 정리되어 있다. 세 번째로 하이데거와 토마스의 관계를 논한 이전의 주요한 논의들이 검토되고 평가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에크하르트는 거의 동시대의 사람이다. 물론 토마스가 에크하르트보다 조금 앞서서 태어났기 때문에 에크하르트는 토마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당한 양의 에크하르트의 저서에서 나타나는 사상 역시 토마스 아퀴나스의 흔적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에크하르트는 현대 철학자들에게도 중요한 사상적 자료를 공급해주고 있다. 우리는 에크하르트를 알기 위해서는 토마스를 먼저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만큼 두 사람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토마스와 에크하르트의 연결고리의 공통과 차이를 고찰함으로 우리가 알지 못한 두 사상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직관은 앎의 최고의 형태이며 인간에게 가능한 존재의 최고 양태이다. 그것에 의해 사람들은 신 자체와 합일된다. 인간의 목적은 신을 봄(visio dei)이고 이것은 “신을 순수하게 현재에 가짐”이다. 사랑으로 신을 지향하는 의지는 지성과 마찬가지로 신을 현재에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직관은 후설이 지적하듯이 충만함이다) 인간의 행복은 자신의 완전한 대상에로 향해진다. 이것이 신적인 존재자의 지성적 직관이다. 토마스에게서 지성 작용은 현재 가짐의 하나의 방식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현전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토마스의 철학이 형이상학, 형이상학적 신학, 그리고 신비적 신학이 존재를 현전으로 보고 사유를 현전의 바라봄(intuitus)으로 보는 범례들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형이상학을 극복의 커녕 오히려 신비주의는 형이상학의 정점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적인 경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경향성은 표상적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이성적이고 추리적인 논거를 버리고 더욱 깊은 합일에로 들어선다.토마스의 해체적인 해석에 있어서 또 하나의 발걸음을 내딛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비록 이성이 지성에 이른다는 것과 지성이 신비적인 합일의 장소라는 것을 보여 왔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신과 영혼의 합일은 여전히 봄과 현전의 형이상학에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더 이상 개념적인 봄의 문제가 아닐지라도 그리고 현전하는 것이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고 해도 참이다. 우리가 루쎌로의 종교적 지성주의나 토마스의 황홀이라는 언설에 집중하는 한 토마스 존재 이행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여전히 미지수이다. 이런 면에서 토마스의 언설은 “현실성”에 속하지 않고 사유이며 또한 사유에 들어있는 “가능성”이며 회복의 해석학에 의해서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존 카푸토 의하면 에크하르트에게 신의 존재가 현전인 동시에 부재이고 부재 속의 현전이자 현전 속의 부재라는 점이다. 또한 창조된 “지성”은 봄의 문제가 아니라 내버려 둠과 신비에로 개방되어 존재의 문제이다. 신적인 심연(Abrund), 무(das Nichts), 내맡김(Gelassenheit)에 관한 말에 하이데거 자신이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러한 말은 독창적인 에크하르트의 어휘에 속한다. 에크하르트 저서의 많은 부분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제들을 가지고 요리한다. 토마스의 어휘를 가지고 신비적 단계들로 몰아가기도 하고 철저하게 압축하여 신비적인 의미를 산출한다. 이것이 토마스의 저술 속에 말해지지 않는 것에 대해 주목해야하는 이유이다.
에크하르트는 루쎌로, 마레살, 마리땡같이 토마스 저술 안의 신비적 요소에 대한 주석가가 아니다. 토마스로부터 자신의 영감을 이끌어낸 사람으로서 신비적 삶에 대한 실천자였다. 베르나르 벨테가 언급하기를 토마스 안에서 가능성이 에크하르트 현실 속에서 전개된다. 그런 이유로 토마스에 대한 해체적 해석이 루쎌로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면 그러한 해석은 에크하르트에게서 초점을 맞출 때 완성될 수 있다. 에크하르트 신비적인 손에 영향을 받아 존재와 지성이 모두 변형되는 변화를 겪는다. 이 변화 속에서 신비적인 의미가 마침내 명시적으로 된다. 에크하르트는 존재가 신이라고(ess est deus) 말한다. 이러한 면은 신이 그 자신의 있음의 현실이라는 (deus est suum esse) 토마스의 논제가 더욱 철저화된 해석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는 창조물이 신의 순수존재에 철저히 의존하는 방식을 강조하는 것이다.에크하르트가 한 편으로 신의 존재의 벌거벗은 빈곤과 황무지에 관해 말한다면 토마스는 지성의 빈곤과 무성으로 이해한다. 지성이 토마스에게 있어서 직관을 의미하다면 에크하르트에게 있어서 그것은 “초연”(detachment)을 의미한다. 여기서 에크하르트가 자신의 설교에서 말하고 있는 해체는 형이상학의 해체이며 바로 신비적 해체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비적으로 지성이 초연, 벗어버림을 의미히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철학적으로 지성이 공허, 개방성의 의미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지성적 영혼과 자아가 하나 될 때 자신의 모든 이미지들, 자신의 모든 욕망들과 마음들을 벗어버리고 신만이 그 안에 들어설 수 있는 순수하게 열린 공간으로 되었을 때이다. 그런 까닭에 에크하르트는 지성을 종교적인 초연으로 변형시킨다. 초연은 내맡김(Gelassenheit)이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서 충실하게 철저화된 지성의 의미는 내맡김이다. 여기서 지성과 존재에 대한 토마스의 신학이 암묵적으로 신비적인 의미가 명시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하이데거로부터 토마스에로의 연결다리이다. 내맡김에 있어서 영혼은 그 자신을 신의 존재에 일치된다. 영혼이 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신에게 내어 맡긴다. 거기에는 신을 봄의 문제가 아니다. 그 분에게 모든 것을 내맡김의 문제이다.
은폐의 차원, 은폐와 숨음의 요소는 오직 내맡김이 언설 안에 유지된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문제들을 내맡기고 개념들로 부터 지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토마스는 밝음에로의 상승, 빛에서 빛에로의 이행이라면 에크하르트는 도리어 신의 심연, 미지의 것에로의 하강을 의미한다. 무와 신비주의는 에크하르트에게 있어서 인간의 우상이나 형이상학적 실체와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것은 초연이다. 초연은 확실성과 투명성의 환영을 부순다. 무와 신비주의는 신이 말하도록 하기위해 주관성의 우상들에게 눈과 입을 닫은 채로 비밀을 전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토마스의 신학이 지닌 무미건조한 글 안에서 하나의 역동적 무(無)와 신비주의를 발견했다.토마스에서부터 곧바로 에크하르트 의 설교에로 연결되는 여러 개의 고리가 있다. 존재가 신이라는(ess est deus) 이 말도 에크하르트의 무(無)와 신비적인 공식 아래서 신은 그분 자신의 있음의 현실(deus est suum esse)이라는 토마스의 언설이다. 에크하르트의 영혼근거(Seelengtund)론에서 영혼이 그 자신의 기능들이 흘러나오는 그런 근원이라는 토미즘적 영혼 실체론은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면 토마스의 이성의 작은 불꽃(scintilla rationis)은 에크하르트의 “영혼의 작은 불꽃” 명백한 전신이다. 그리고 아들의 탄생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사상도 토마스의 은총과 연결되어 있다. 이같이 에크하르트의 논리에 의하면, 신성과 신은 각각 잠재적 가능성(potentiality)과 현실성(actuality)으로 구분되어진다. 바로 이 점에서 에크하르트는 많은 신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데니플레 같은 중세 사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노선을 따라, 신을 모든 가능성을 지닌 ‘순수 현실태(actus purus)’로 이해했다. 이것은 에크하르트가 신성과 신의 구별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았기에 오는 비판이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신성에서 결정되어지는 부성(父性, fatherhood)과 ‘아버지(Father)’의 인격에서 형성되는 ‘아버지 됨(paternity)’의 관계를, 동정녀(Virgin)에게 주어지는 모성(母性, maternity)과 잉태함으로써 부여되는 모성 사이의 관계로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재성과 현실적 실재성의 차이를 보게 된다. 즉 가능성으로서의 신성과 현실성으로서의 신의 구별을 부성과 모성의 비유를 통해서 보게 된다. 에크하르트는 두 개념이 분명히 서로 구분됨을 언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 사상은 보다 독창적으로 체계화 시키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히려 그런 이유로 에크하르트의 신비사상은 더욱 깊이 연구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아들의 탄생에 관한 에크하르트의 언설도 많은 부분이 토마스의 언설인 은총과 연관되어 있다. 에크하르트는 또한 황홀에 관한 토마스의 물음도 인용한다. 에크하르트가 종교재판에서 자신을 고소한 자들에게 토마스 형제의『신학대전』에서 가르친 것만을 말했다는 말로 논박했을 정도였다. 이것은 토마스 안에서 말해지는 것이고 따라서 존재자-신-논리학이 포장이 벗겨진다. 그리고 신비적인 결론에 추진된 것이다. 이처럼 토마스의 ‘지성’과 ‘이성의 작은 불꽃’을 볼 때 토마스기 존재와 무 그리고 신의 공속성을 이미 담지하고 있으면 토마스가 출발점임을 알 수 있다. 토마스와 하이데거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토마스와 하이데거 둘 사이의 문제는 하이데거가 토마스를 공격함으로 시작된다. 하이데거는 토마스 신학을 “존재망각”이라는 관념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한다. 필자가 보기엔 그 이유는 존재자(ens)에 초점을 맞추고 존재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오해이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와 하이데거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퀴나스에게 잠재적이고 에크하르트에게서 신비적 경향성을 하이데거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두 사상이 정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은 아레테이아(비은폐성) 안의 레테(은폐성) 중요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의 은폐성, 곧 존재자들이 거기로부터 현전에로 나오는 그러한 철회된 심연은 어떤 최종적인 것이다. 이런 암흑에 빛을 비출 수 있다고 기대될 수 있는 심오하고 깊은 차원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런 신비적 심연에 대한 사유의 개방성은 내맡김이다. 내맡김은 사람들이 취할 수 아주 궁극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암묵적이고 에크하르트에게는 명시적인 무(無)와 종교적 신비주의에 있어서는 경우가 같지 않다. 왜냐하면 주체에게 있어서 암흑의 심연은 신의 신성 자체의 심연이기 때문에 만약 그 심연이 우리에게 보여 지지 않고 숨겨진다고 해도 그것은 신성 자체로부터 숨겨지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신성의 심연 위에서 신은 그분 자신에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여기 신성 자체에 있어서 있음과 앎의 은폐된 통일성이 지배하는 데 그 통일성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은 수도 없다. 신 안의 심연과 신비에 대한 언급을 할 수 있지만 신에 대해서는 그리 할 수 없다. 신은 신비이지만 그러나 신은 신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신비적이지 않다. 신성의 은폐된 심연은 신에게는 은폐되지 않는다. 그 암흑의 심연이 바로 신이다. 거기서는 인간의 어떠한 개념도 명명할 수 없다. 그리고 불가해성 자체이다. 여기서 신의 말씀이 발언된다. 종교적인 내맡김은 신비에의 개방성이다. 그러나 신비는 자신에게는 은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개방성, 자기-현전의 권역이다. 이것이 신앙인의 신앙이다. 신앙인에게 신이 언제나 심화되어가는 신비이며 암흑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비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는 어떤 믿음의 갖는 암흑이다. 비록 헤아릴 수 없지만 하나의 사랑의 손길이 있는 암흑이다. 종교적 주체에게 있어서 존재자-신-논리학의 용어로 묘사할 때 신이 우리에게 신비이지만 자신에 대한 신비는 아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는 자기-앎이 가능한 한 인격이 아니라 인간 앎 속에서 인간의 앎을 통해서만 자기 개방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존재는 언제나 원칙적으로 하이데거에 있어서 우리에 대한 존재로, 즉 인간의 앎과 공속에 있어서 존재로 간주된다. 하이데거의 앎은 경험적이고 유한한 관점에로 회복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자체적인(quoad se) 존재에 관해서는 심지어 신앙의 불확실성으로써 조차도 가능성이 없다. 존재는 언제나 앎과 공속에 있어서의 존재이다. 따라서 존재와 앎 모두가 이것들의 회복 불능적으로 유한한 의미에 있어서만 받아들여진다.
이점이 왜 하이데거가 존재는 앎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존재가 자신의 자기 개방을 위해서 앎을 요구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에서의 존재는 자신을 인간의 앎 안에서 인간의 앎을 통해서 개시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는 언제나 유한하고 인간을 필요로 한다. 이에 반하여 종교적 신비주의자의 존재는 신의 충만함이자 충분성이다. 하이데거 있어서 “신”은 이러한 트임 안에서 현상하거나 또는 이러한 뜨임 안에 있지 않은 채로 머문다. 그러나 신이 뜨임 자체는 아니다. 트임이 신의 선물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토마스 언설의 정점에 놓여있는 존재와 지성의 단순한 통일성은 본질적으로 시간과 역사를 넘어서는 것으로 발견된다. 이러한 합일(unio)은 가장 완전하게는 영원 속에서 일어나며 또한 신의 나라에서 즉 시간을 초월하는 영혼의 본향에서 일어난다. 토마스와 에크하르트에게서 있는 신과의 신비적 합일이 하이데거에 있는 존재와 앎의 공속과 혼돈될 수 없다. 토마스에 의하면 신은 역사적인 트임의 한 함수가 아니다. 오히려 신은 시간을 지배하고 역사의 주인이다. 창조된 세계는 신적인 존재의 모방이고 창조물의 목표는 에크하르트가 언급했듯이 창조되기 이전에 신의 마음속의 이데아에 불과할 때 신에 대해 지녔던 원초적 합일을 통하여 회복하는 것이다. 창조는 복귀에 의해 뒤따라져야 한다. 이 점이 신학대전과 에크하르트의 설교들의 건축술적 원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의 신은 사건에 의해 허용되어야 한다. 2016/10/02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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