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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인문학▣/종교철학산책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론 1

by 뜨르 K 2020.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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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론

이번 장에서는 긍정성 신학의 출발점이 되는 토마스 유비 이론에 대해 다룰 것이다. 토마스 유비 이론을 다루기 전에 전통적 유비 이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유비 이론을 먼저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 유비의 특징이 무엇이고 토마스 유비와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살필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의 존재 유비를 개신교 현대신학이 어떻게 해석을 하는 가이다. 또한 토마스가 지향하는 유비의 일반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또 토마스가 왜 유비의 다양함을 열거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토마스는 일차적 의미들과 이차적 의미들에 대한 얽힌 그물망에 따라서 어떻게 유비적 명칭이 의미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차적 내지 이차적(per prius et posterius) 구절을 사용한다. 이것은 토마스의 존재 유비가 단순한 술어를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술어들의 망으로 연결하는 토마스 의도가 무엇인지를 살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존재 유비는 신에 관하여 만드는 판단에 존속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것을 구성하는 바로 그 개념들을 초월하는 판단이다. 여기서 판단은 관념을 확장하여 모든 술어로 진리를 보여주고 추적하는 판단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신학적 유비는 신과 창조물에 대하여 진정한 판단을 감싸는 관계망 안에서 존속함을 고찰할 것이다.

4.1 전통적 유비이론: 아리스토텔레스 유비

유비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요한 자원인 주로 아리스토텔레스 유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가들, 몇몇의 중세시대에 유비의 입장을 아주 짧게 다루고자 한다. 유비는 수학적 혹은 기하학적 비례로서 소크라테스 이전에부터 시작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서구 철학적 전통에서 계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플라톤은 감각을 믿지 못함을 인지하고 순전한 사유에서만 참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앎이 감각으로부터 출발됨을 주장하고 있다. 종교적, 예술적, 수학적 영역들에 제한된 유비에 대한 전통을 받아들였던 플라톤은 유비의 제한을 받지 않는 가능성을 인지하였다. 그리고 그것 안에 발견되는 고유한 철학적인 면에 대해 인식론적 그리고 존재론적인 토대 안에 행위, 존재, 앎의 법칙, 비유 사성과 함께 얽힌 유사성을 관계의 유사성으로 바꾸었다. 플라톤은 다양한 실제들의 확인하는 그리고 새로운 유비를 발견하기 위한 도구로서 인식론적 유비를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존재 그 자체는 순수한 통일성도 순수한 다양성이 아니라 수평적 그리고 수직적 질서의 둘 다를 통하여 조화롭게 덮는 다른 실재들 사이의 관계들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수학에 기술적 의미와 밀접하게 머물러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관계들과 비례성의 유사성을 의미하는 특히 생물학의 영역 안에서 유비(analogia)를 사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유비의 종(species)에 대해 말한다. 왜냐하면 유비는 적어도 네 가지 용어들을 요구하는 의미(ratios)들의 동일함이기 때문이다. 먼저 유비를 수학적 측면에서 유비 개념을 살펴보면 보자. 가령 정의(正義)는 a:b=c:d 등의 비례의 동등함을 유지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正義)는 중도이다. 따라서 유비의 부정은 비례를 파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공의 소유물을 분배함에 의하여 확립되는 정의는 항상 비례를 따른다. 공공의 재화(財貨)를 분배하는 경우에도 서로 재화의 취득에 기여한 것과 동일한 비(比)로 분배하는 것이 올바른 분배라는 본다. 또한 그는 수학적 비례뿐만 아니라 개념에서도 비례의 유비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선(bonum, 善)은 어떤 양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적어도 우유로부터 나온 ‘하나의 이름의 다른 의미(homōymon)’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 명예, 기쁨은 동일한 방법 안에서 모두 선이 아니라고 언급한다. 따라서 선은 “하나의 개념에 따라서” 공통된 어떤 것이 아니다. 즉 일의적이 아니며 또한 순수 다의성으로도 서술될 수 없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유비의 고유한 근원인 수학적인 적용을 언급하면서 그것을 윤리학에 적용한다.

『범주들』에서 언급하고 있는 ‘순수 다의성’과는 구별되게 ‘존재’를 파악한다. 신체와 눈의 관계는 앎의 주체가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정신과 영혼의 관계는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이 처럼 ‘존재’로 파악하는 것들의 서술도 비례적으로 접근해야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환 정의와 분배 정의를 말할 때에도 이러한 ‘비례의 유비’를 언급한다.『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는 유비는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눈’에 대한 ‘신체’의 관계를, ‘정신’과 ‘영혼’에 비교하는 ‘비례성의 유비’이고, 둘째는, 분배의 정의(正義)에 대해 표시하는 ‘비례의 유비’이다. ‘존재’에 대해 서술할 때도 인간은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진술하는 대상과 이름의 관계에서 유래되는 관련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존재’ 중 감각적으로 파악되지 못하는 개념들과 동일한 것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부터 먼저 파악하고 진술을 해야 한다. 여기에서 ‘비례의 유비’가 적용된다. 이것은 ‘정신’과 ‘정의(justice)’의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비는 다른 범주에 속하는 사물들의 유사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예를 들면 앎은 앎의 대상과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그래서 감각도 감각의 대상과 연관되어 있다. 바다가 고요함 같이 그래서 공중에 잔잔함이다. 때때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 비례서 용어에 의해 구성된 더 낮은 다양한 속성들을 더 높은 범주로 축소한다. 따라서 바다의 고요함과 바람의 잔잔함은 고요(hēsuchia)의 공통 속(genus)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비록 물고기 의 등뼈, 오징어의 갑옷, 척추동물의 뼈가 공통의 이름이 없다 할지라도 그들의 공통의 특징은 단일한 그리고 일반적 속성에 참여한다. 따라서 유비는 종과 속 쪽으로 공통의 특징을 모으기 위한 도구이고 훨씬 더 폭넓은 범주 아래 그 자체가 합성된다.

4.2 유비의 일반적 의미와 다양성
4.2.1 유비에 대한 비평

필자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유비를 다루기 전에 먼저 다양한 비평들이 있음을 알아볼 살펴볼 것이다. 유비에 대한 비평의 핵심은 신의 초월성을 파괴하는 것과 신성모독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런 유비에 대하여 신학적 철학적 비평으로 대항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칼 바르트와 판넨베르크이다. 그리고 개신교 신학자들이 다수 존재한다. 현대 신학자를 중심으로 유비에 대한 비평을 개괄적으로 서술하자면 마르틴 루터는 유비를 십자가를 망각한 영광의 신학만을 강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칼 바르트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적 (Antichrist)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연신학에서 인간이성을 통해 신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교만함을 드러낸 것이라고 신랄히 비판한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논리적으로 유사성의 일의적 의미는 모든 유비적 설명 안에 담겨 있다면 아무리 그 사실을 반대한다 해도 결국 우리가 개념상 신의 실재를 다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 강조한다. 또 한편 20세기 들어서서는 유비에 대한 깊은 탐구는 부정론을 포함한 유비 이론의 복잡한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칼 라너는 유비가 일의성과 다의성의 혼합이라는 점을 거부하며 그보다도 유비적 관계의 핵심을 강조한다. 에리히 프르지바라의 유비 이론은 신의 계시에도 적용되어 신은 “언제나 더 위대한 분”이라는 생각으로 이끈다. 데이비드 트레이시는 유비론과 변증법을 교묘하게 비교하여 세상에 내재된 은총을 감지한 공동체의 깊은 종교적 체험과 비유를 연결시키면서도 동시에 부정적 방법론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여러 학자들의 연구결과로 오늘날 유비에 대한 이해도는 높아졌다. 이것은 바로 끊임없는 부정을 통해 계속 신비에 접하는 자세로서 신에 대한 표현이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결코 자구적 의미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유비 이론은 18세기와 19세기의 가톨릭 철학자들이 아닌 다른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칸트(Kant)의 영향의 영향을 입었던 철학자들은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무한한 신의 본성을 알 수 없으며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변증 할 때도 그 변증학의 토대를 철학적 회의주의에 놓았다. 또한 헤겔(Hegel)을 포함하여 관념 철학자들의 계열에 속해있는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이 신의 본성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아주 중심적인 유비를 제공하고 있다고 여겼다.

위에서 언급한 철학자나 신학자 중에서 가장 논란의 중심을 차지하는 인물은 역시 칼 바르트(Karl Barth)이다. 유비의 이론은 바르트(Karl Barth)에 의해 또 다시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공격을 당하게 된다. 칼 바르트는 이 유비에 대한 논의를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드러내며 부각한다. 여기에서 칼 바르트가 왜 유비를 반대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에 관한 유의미한 진술이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창조물에서 창조주의 본성에 대한 추론이 가능한가? 또한 자연신학의 토대는 무엇인가? 칼 바르트는 유비 이론의 두 번째 방법으로 자연신학의 토대로서의 유비 이론을 반대한다. 혼합된 그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계시를 믿는 신앙이 아니고는 인간과 신이 유사성을 있다는 것을 믿을 만한 토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에 의지하지 아니고는 자연신학을 확립할 수 없다. 더욱이 유비 이론을 확립하려는 신학자들은 일반적인 신에 대한 앎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신의 행위에 관한 앎을 구별하게 한다. 이러한 구분을 또한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는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를 주장하면서 존재의 유비가 자연신학의 토대로 사용되는 것을 개탄하였다.

이처럼 바르트의 신앙의 유비는 존재에 대한 범 현실주의적 관념의 통치를 받고 있다. 이런 신앙의 유비는 지극히 논쟁적 형식으로 전개되었지만 프로테스탄트에서도 수많은 공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철학적 전제의 적합성의 부족뿐만 아니라 성서적 근거 역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가톨릭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과 신 사이의 유사성은 은총과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바르트의 입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가톨릭 사상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앙인들에게 deificatio(신과의 유사성)를 주었을 때 또는 아퀴나스가 신앙이 인간에게 신과의 "유사성"(similitudo)을 준다고 언급했을 때, 바로 그것을 나타난다. 그러나 은총에 의해서 가능한 이 같은 인간의 유사성 인정은 창조물 인간과 신 사이의 존재론적 유비를 전제한다. 만일 신과 인간 사이에 창조에서 오는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신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과 응답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개신교 신학은 신학적 과제를 유비라는 매체를 통하여 다루는 것에 대해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융엘(Jüungel)은 유비라는 의미가 과도하게 철학적이 되면서 신학의 원래의 문제를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에 있다고 지적한다.

유비라는 이 기본적인 개념을 과도하게 일정한 양식의 철학적 사유의 영역으로만 강제함으로써 신학적인 원래의 사태를 구성하고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신학적으로 유비라는 의미가 실제로는 계시적 앎으로 볼 수 있는데 계시라는 하는 구체적인 사건을 더 이상 이 개념을 통해서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못한다는 비판인 것이다. 융엘이 문제 제기한 그 원래의 사유에 의하면 사실상 유비에서 더 본래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간성, 성육신이다. 즉 신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은 그 역사적 계시의 근원에서 인간이 신을 사유할 수 있는 원천이 마련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융엘의 이러한 유비에 대한 설명과 신학적인 입장은 그의 스승인 바르트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융엘에 의하면 유비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신의 행동의 계약과 신이 안에서 밖으로 인간들에게 창조를 통하여 나타내신 신의 행동인 창조의 같음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의 행동의 일치가 사람들이 신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유비의 토대라고 말하게 된다. 따라서 유비라고 하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보여주신 은총의 완성에서 획득된 일종의 계시이고 인간의 말이다. 이러한 시각은 신에 담론을 철저하게 기독론으로부터 토대 지우는 것이다. 또한 바로 그 역사적 계시 안에서 기독교 신학 본래의 사유 가능성 18)이 탐구되는 것을 뜻하다.

융엘과 같은 유비에 대한 부정적인 분류와 다르게 또 다른 오랜 전통이 기독교 신학 안에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여기서 밝히고자 하는 존재 유비의 사유 전통이다. 이 오래된 전통인 존재 유비의 전통은 개신교의 특색들과는 또 다른 가톨릭 사유의 한 원형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들에서 프리츠바라(Erich Przywara)의 연구는 빠뜨릴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Przywara의 유비 이론에 대한 탐구는 서구 형이상학의 존재 이해를 가톨릭 신학의 근본인 토마스주의의 정신으로부터 재해석하면서 신앙과 계시, 신학과 철학의 근본 관계에 대한 가능성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해석학적 현실에 대한 이해와 종교에 관한 현상학적 깊이를 신학적으로 이론화하는 잠재성은 바로 유비의 언어인 것이다. 프리츠바라(Erich Przywara)의 존재 유비가 이렇게 우리에게 특별한 뜻을 내포하는 것은 프리츠바라와 바르트가 벌였던 논쟁에 원인이 있다. 초기에 바르트는 이 존재 유비의 사유에서 적그리스도의 가능성을 읽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르트로 하여금 무엇이 불편하게 하며 극도로 경계심을 갖게 하였는가? 바르트가 왜 프리치바라의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를 단순하게 철학적 신학의 한 유형으로 바라보지 않고 가톨릭적 사유의 원형으로 말하면서 그 근원으로부터 공격을 하고 있는가? 또한 왜 바르트는 그 존재 유비에 대립적 지향을 가진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를 개신교의 사유의 한 원형으로 표현하면서 존재 유비와 대립된 해석학적 원칙들과 차이를 얻으려고 하였는가?

또한 한스 우르 발타자르 (Hans Urs Von Balthasa)와 앙리 부이야르(Henri Bouillard)는 토마스 안에 가장 전형적인 고전적인 전통으로서 바르트 위치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폰 발타자르는 약속, 창조, 그리스도, 신앙에 중심이 되고 기초된 교회교의학의 신앙의 유비에 로마에 보낸 바울의 편지의 그의 주석의 두 번째 판에서 변증법적으로부터 바르트의 변화를 논의한다. 신앙의 유비는 바르트의 후기 작품들 안에서 발전된다. 이것이 프리찌바라에 의하여 설명되고 묘사됨으로써 존재 유비였다고 확신하는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는 바르트(Karl Barth)가 가톨릭의 기본적인 교리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선언한다. 폰 발타자르는 신앙의 유비와 그리스도의 우선성으로서 바르트와 일치하지만 존재의 유비와 신앙의 유비 사이의 실재적인 반대를 세우려는 시도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부이야르(Henri Bouillard)는 토마스가 존재의 유비의 표현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고 신과 창조물의 고유된 공통의 존재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사실상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신과 창조물에 대한 공통의 중간(tertium quid)을 거부했다. 따라서 개념주의 적이고 표상주의적인 유비에 반응한 반면에 부이야르(Henri Bouillard)의 유비는 판단적이다. 아마 이것은 은총으로부터 얻어진 자연적 일의성, 다의성의 겹치기일 뿐이다. 그러나 존재의 유비를 거부하는 바르트의 진정한 목적은 자연신학의 원리에 대항하는 오직 은혜로(sola gratia)를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프르찌바라가 그의 존재 유비로서 바르트의 변증법을 거부한다면 그리고 신앙의 유비로 대답한다면 우리는 폰 발타자르가 제공하는 관점의 보다 더 광범위한 유형 안에서 둘은 연관되어 있다. 고전 신학에서 유비는 일의성과 다의성에 반대되는 반면에 폰 발타자르의 종말론에서 유비는 변증법을 반대한다. 이것은 신과의 관계 바로 중심에 창조물에 대한 상대적인 자주성과 고유한 일관성을 표시했다. 이것이 신에 의하여 그리스도적 질서의 중심 안에 놓여있는 일관성을 표시할 때 신앙의 유비라고 부른다. 이것이 창조물에 대한 내적 구조를 예상할 때 이것을 존재 유비라고 부른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존재의 유비와 신앙의 유비, 즉 바르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쉽게 화해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판넨베르그(Pannenberg)는 유비 개념을 비판하면서 유비(analogy) 대신에 송영(doxology)의 개념을 제안한다. 그에게 송영의 서술은 “찬양(adoration)의 행위”이다. 그의 신학체계 안에서 송영(doxology)의 언어는 학문적 언어가 아니다. 따라서 송영의 사용은 신학에 대한 연구에 가능성을 부정하게 될 뿐 아니라 참에 대한 회의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또한 판넨베르그에게 유비는 오로지 보편성, 본질, 필연성, 본성으로서 우리를 신에게로 연결한다. 이것은 본능적인 속성에 의하여 결과로서 신으로부터 원인으로서 신 까지 논쟁하는 고유한 속성에 의하여 연결된다. 그러나 신에 대한 성서적 관념은 역사적 만남에 근거하고 있지 원인적 추론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체적으로,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신을 본다. 오로지 신에 대한 길은 신앙과 송영에 의해서 뿐이다. 사실상 송영은 유비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중심적인의 개념의 반대가 되었다. 송영이 신적인 작품들의 기초로서 경배 안에서 신을 말하다. 반면에 유비는 신적인 결과들로부터 신의 속성을 추론한다. 왜냐하면 경배는 자아와 개념적 일의성 둘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것이 유비이면 이것은 날마다 언어에서 송영적인 언어까지 운동의 수준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이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유비는 아니다. 따라서 송영은 신적 행위의 특별한 경험에서 생긴다.

판넨베르그는 유비를 송영으로 대체한다. 이것은 송영적인 다의성에 대한 그의 자신의 선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그는 유사성의 일의적인 중심에 대한 신과 창조물의 축소를 위한 신학적 유비를 비평한다. 이것은 신의 초월을 파괴하고 역사적으로 미래를 새롭게 하는 신의 능력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비는 송영에 의하여 대체되고 거부된다. 바르트와 판넨베르크의 유비에 대한 비평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비평에 대답하지 못한 유비 이론은 발전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우리는 여러 사람들의 유비에 대한 비평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유비에 대한 비평을 바탕으로 토마스의 유비에 접근할 것이

4.2.2 비례와 비례성으로서의 유비

토마스의 유비에 접근하기 전에 유비에 대한 용어의 정의를 살펴봄으로서 유비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자 한다. 유비의 그리스어 analogia는 종종 라틴어 analogia로 대치되어 사용하곤 하였다. 이것은 유사성 similitudo(likeness) 또는 비례성 proportionalitas (proportionality)의 의미를 주고 있다. proportio는 토마스 아퀴나스 자신이 선호하는 용어로써 비례 (proportion) 또는 관계(relation)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비례(proportion: 관계)는 어떤 면에서 서로 비교되는 두 사물들의 관계이다. 일치에 의한 또는 차이에 의한”것이다. 비례는 두 유형들이 있다. 비례는 또 다른 것에 대한 하나의 확실한 분량의 관계를 의미하지만 이러한 좁은 의미는 비례가 “질서의 관계”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례는 다른 것에 대한 하나의 어떤 것으로 확장될 수 있다. 아무튼 비례는 어떤 관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둘의 상호 관계적 실재들이 균형이 잘 잡힌(proportioned) 상태를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네 가지 비례성 용어로써 유비(analogia)를 이해한다. 여기서 비례성은 적어도 네 용어들로서 “비례들의 유사함(likeness)”이다. 이 두 용어는 동일한 ‘비례들의 관계’ 안에서 또 다른 둘과 비교된다. 이것을 “비례들의 일치” 혹은 “두 비례들의 조화” 그리고 “비례의 균등”이라고 불려진다. 이처럼 토마스는 여러 텍스트에서 이 비례에 따른 일치가 두 분류가 있다는 것을 언급한다. 유비도 두 종류가 존재함을 추론한다. 그 이유는 비례에 따른 일치는 두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종류에 따라서 유비의 공통성도 결정된다. 우선 특정한 비례관계에 있는 사물들 자체 사이에 일치를 들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특정한 거리나 다른 관계를 서로에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라는 숫자가 1이라는 숫자의 두 배이기 때문에 맺고 있는 관계와 같은 것이다.”이 첫 번째의 일치는 “비례의 일치”(convenientia proportionis)이다. 비례의 일치의 방법에 의하여 어떤 사물이 둘에 대해서 유비적으로 진술된다. 이러한 경우에는 하나가 다른 사물과 특정하게 연관되어 있다. 실체와 우유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 때문에 존재가 실체와 우유에 대해서 진술되는 예와 비슷하다. 그리고 사람은 오줌과 동물을 ‘건강한’이라고 서술한다. 그 이유는 오줌은 동물의 건강과 특정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때로 어떤 것은 비례성의 일치의 방식에 따라서 유비적으로 서술된다. “또 다른 하나는 비례관계에 서 있는 둘 사이에는 서로 아무런 일치가 없다. 오히려 두 비례 상호간에 유사성이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시각’이란 이름이 육체적인 시각 또는 지성에 대해서 진술되는 경우이다. 시각이 눈에 관해서 연관되는 것 같이 지성은 정신에 관해서 연관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6이라는 숫자가 4라는 숫자와 일치를 이루는 경우다. 6은 3의 갑절이고 4는 2의 갑절이기 때문이다.”두 번째는 “비례성의 일치”다.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5가지 영역의 비례성을 이용하다. (1)유사한 비례 혹은 기능들을 비교하는 방법으로서 (2) 모든 사물들의 원리들이 어떻게 비례적으로 동일한 가를 보여주는 방법으로서(3) 무한한 신과 유한한 창조물을 연결하고 비교하는 방법으로서(4) 비유를 설명하는 방법으로서 (5)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수단으로써 활용한다. 여기에서 마지막에 언급한 (4)와 (5)는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로, 두 사물들의 유사함은 유비 혹은 동일한 형태 안에서 공동의 참여에 토대를 둔다. 또는 유비에 관하여 은유적 특징들은 신에 대하여 서술될 때마다 발생하는 “비례성의 유의성”으로부터 구별된다. 그러나 신적 특징들의 은유적 서술들은 또한 비례와 비례성 둘 다 로부터 구별된다. 이런 이유로 비례성과 은유(metaphor)는 토마스에게는 비록 은유(metaphor)가 비례성을 통하여 설명된다고 할지라도 동일선상은 아니다. 은유적 서술로 표시된 용어들은 하나의 영역에서 또 다른 영역까지 의미의 변화를 표현한다. 왜냐하면 은유는 신체의 영역에서 정신적 영역까지 의미의 이동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삼위일체의 이미지를 찾는 것은 우리가 일시적 혹은 영원한 사물들을 아는 한에 있어서 정신 안에서 발견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르면서 유사성의 세 가지 입장을 발견한다. 이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표현이 “유비에 따라서” 일어나는 중간 입장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토마스 저작들 안에서 유일한 삼위일체는 비례성의 문제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비례와 비례성의 유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가끔 비례성의 용어를 언급하지만 두 비례 용어에 의해서도 그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유비와 비례를 언급하고 난 다음 비례성의 네 가지 용어를 설명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비례들의 관계나 유사성으로 비례성을 정의하는 비례와 비례성의 구분은 명확하다. 결론적 말하면 토마스는 유비에 대해 네 가지 비례성 용어를 사용한다는 분명하다.(그리스 철학의 전통적 의미) 그리고 때때로 두 가지 비례(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 그리고 실제로 그것들과 구별되고 혼합해서 사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토마스 왜 두 번째 종류만을 신과 창조물에 대한 연관에 활용하는지 숙고할 필요는 있다.

4.2.3 관계의 다의성으로서 유비와 우선성

토마스는 많은 사물들에 대한 하나의 명칭에 대한 다양한 술어로서 유비를 보았다. 이것은 어떤 하나의 실재에 대한 비례, 속성, 관계에 근거하고 있다. 비례(proportio)는 일반적으로 어떤 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의미를 전달한다. 그래서 토마스는 유비를 비례라고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에 관련된 비례’(proporio ad unum)이다. 토마스는 이런 상황 안에서 다의적인 술어로서 유비에 대한 해석을 암시한다. 여기에서 유비 (analogia)는 부재하거나 또는 네 용어들의 비례성에 대한 관례적 의미로 옮긴다. 토마스는 초기 저작인『자연의 원리들』에서 많은 주제들이 일의적으로, 다의적으로, 유비적 등의 세 가지 방법들 안에서 서술됨을 말한다. 그러나 토마스는 여기서 일의적 의미와 다의적 의미가 아닌 유비적 의미를 말한다. 토마스의 말을 들러보자. 내적인 원리를 말할 때 즉 질료와 형상을 말할 때 어떤 결과가 원리들에서 나오는 일치성과 차이성에 따라서 일치와 차이성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어떤 것들은 소크라테스와 이 사람 소크라테스를 지적할 때처럼 수적으로 다양하지만 다른 것들은 비록 그들이 사람 인간 종으로 일치할지라도 수적으로는 다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처럼 수적으로 다르지만 종에서는 동일하다. 또한 어떤 사물들은 종에 따라서 다르지만 유에 따라서는 같다 예를 들어 인간과 나귀는 동물류에서는 둘 다 동일하다. 그 반면에 어떤 사물들은 유에서는 다양하지만 유비에 의해서만 일치한다. 예를 들어 어떤 유에서는 일치하지 않지만 유비에 의해서는 관련할 수 있는 실체와 양과 것 왜냐하면 그것들은 있는 것에서만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는 그것이 일의적으로 술어화 하는 것이 아니라 유비적으로 술어화 되기 때문에 유가 아닌 것이다. 그런 이후에 토마스는 일의적 의미와 다의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마지막으로 유비적 술어에 대해 진술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것은 다른 사물들을 세 가지 방식으로 술어화 하는 데 하나는 일의적이고 다른 하나는 다의적이며 나머지 하나는 유비적인 방식이다 일의적 진술은 어떤 것이 동일한 명칭 동일 한 가지적 의미 즉 정의일 때 일의적으로 진술된다. 마치 사람과 나귀가 동물로 진술되는 것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동물로 불리며 각각은 감각할 수 있는 살아있는 실체이며 그러므로 동물로 정의가 된다. 다의적 진술은 어떤 것이 그 명칭만 같고 그것의 정의가 다양한 적용에서 다른 사물들을 다의적으로 진술될 때 나타난다. 예를 들면 개라는 말은 짖는 동물과 별자리를 말한다. 그 둘은 명칭에서는 일치하지만 정의에서는 다르다 왜냐하면 명칭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정의이기 때문이다 유비적 진술은 한 사물이 정의는 다르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사물과 동일 것에 관련될 때 유비적으로 진술된다. 이와 같이 토마스는 일의적 의미와 다의적 의미를 비교하면 유비적 진술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 비례나 비교와 일치하는 유비적 술어들은 하나의 목표에 기인한다. 마치 건강이란 술어는 건강의 하나의 목표와 궁극적으로 관련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하나의 작용과 관련된 것은 마치 의약의 모든 다양한 가능성의 의미가 궁극적으로 의학적 기술의 하나의 작용에 기인하는 것과 같다. 또는 하나 주체에 관련된 것은 마치 존재의 가장 높은 범주들은 그것들이 다른 것의 주체인 실체에 기인하는 사실 때문에 불려진다. 따라서 실체와 양은 “유비에 따르면 동일”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 장에서 토마스의 유비는 두 가지 비례 용어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유비적 서술의 다른 의미들은 그것들의 조화를 함유하고 있으므로 각각 모두에게 하나와 동일성에 대해 어떤 직접적 관계나 속성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실체의 질료는 실체와 관련되어 있고 양의 질료는 양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유비적 술어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증명하기 위해서 토마스의 후기 주석 아리스토텔레스의『형이상학 주석』에서 존재를 여러 가지 방식(legesthai pollachōs)으로 말해지는 것을 해명하기 위해 다시 언급한다. 존재는 항상 어떤 하나의 본성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토마스는 술어에 대한 형태를 예를 들고 있다. 의학과 건강은 다양한 사물들에 대해 말해진다. 다양한 방식(legesthai pollachōs)에 대한 텍스트에 대한 가능한 번역으로서 다의적 진술(dictur multipliciter)로 읽음으로 토마스는 유비적으로 서술된 사물의 존재와 다양한 방법들 안에서 말해지는 용어의 존재를 동일시한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비례(proportionaliter) 의해 유비를 설명한다. 여기에서 후자의 단어는 네 가지 비례성의 용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를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광범위한 의미 안에 있는 비례를 의미한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건강, 의학 그리고 존재의 예를 설명할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배제한 어떤 것을 첨가한다. 예를 들면 건강은 목적에 관련해서 서술하고, 효율적인 원리에 관련해서는 의학을, 주체와 관련해서는 존재를 언급한다. 토마스의 『형이상학 주석』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건강한’은 동물의 몸과 오줌과 의학을 말한다. 그러나 건강한은 정확히 그것들 모두에게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건강한 이란 말은 건강이 좋은 표로서 오줌을 말하며 건강의 주체로서 몸과 원인으로서의 의학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의미는 한 가지 목적 즉 건강과 관계한다.

이처럼 존재는 다양한 방식으로 서술된다고 할지라도 오직 한 가지 원리로 언명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것들은 존재라고 말해진다. 위에서 언급한 『자연의 원리들』,『형이상학 주석Ⅳ』외에 『형이상학 주석Ⅴ』,『니코마스 윤리학 주석 』등 네 가지 텍스트에는 토마스 사고의 일관성을 보여준다.『자연의 원리들』의 특성은 『니코마스 윤리학 주석 』의 언급과 아주 밀접하고,『니코 마스 윤리학 주석』의 비례는『형이상학 주석Ⅴ』의 관계와 비슷하다. 위에서 언급한 네 텍스트들은 하나와 관련하여 다의적 유비의 삼중 분할에 대한 세 가지 용어들 중 두 가지, 즉 원리나 목적을 준다.

그리고 토마스는 하나의 주체에 대한 관계를 첨가한다.『형이상학 주석Ⅳ』에서 가장 빈번하게 건강, 의학, 존재의 예들을 사용한다. 토마스는 다른 둘에 대한 두 사물들의 “동일한 비례”로 구성하는 유비/비례성의 유형의 하나로서 다른 비례를 포함하기 위한 지적 몸부림을 볼 수 있다. 비례(proportio)는 두 용어의 직접적인 관계나 비례성의 네 용어들을 의미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토마스는 하나에 대한 다른 관계를 의미하는 이러한 용어들과 둘이 또 다른 둘에 관련될 때 동일한 비례를 지키는 용어들로 유비를 나눈다.

토마스는 비례의 원칙으로서 유비와 비교하여(vis­à-vis) 관계적 다의성으로서 유비에 대한 우선성을 말하지는 않지만 두 종류의 자료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합리적 해석이 암시되어 있다. 첫째로 토마스에 의하면 용어들이 공통의 종 또는 종의 유사성들을 공유하는 것을 따르는 궁극적으로 일의성의 안에 있는 비례성들이다. “뼈가 동물들에게 있는 것처럼 가시는 물고기”에 있다는 비례성 안에서 마치 가시와 뼈는 단순한 일반적 혹은 특수한 본성과 일치하는 것을 언급한다. 다시 말하면 “존재는 육체를 덮는다.” 또한 선들과 숫자들은 동일한 유를 공유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비례가 번갈아 나오는 곳에 비례성들을 놓을 수 있는 방식 안에서 둘 다 일치된다. 어떤 텍스트에서는 메아리, 이미지, 무지개는 동일한 유의 다른 종이 된다. 반면에 다른 텍스트에서는 유비에 따르면 일치가 된다. 그 상황이 비례성의 유비로 보인다.

우리가 일의적 유(genus)를 공유하는 것이 적어도 비례성으로서 유비의 어떤 예로서 양립하지 않는 한 이것은 이례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공통 개념을 공유하는 비례성의 유비의 어떤 예들은 직접적 관계의 다의적 유비 안에 결국 근거 지워진다. 왜냐하면 후기 저작들 안에서 아주 보편적이고 구체적으로 토마스가 주장하기를 “모든 일의성 용어들은 하나의 일차적 용어로 축소된다. 이것은 일의성이 아니고 존재의 유비이다.” 그리고 존재는 근본적으로 관계 혹은 직접적인 관계에 따라서 사물들이 서술된다. 실체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그것을 실체라고 일컬어진다. 만약 자주 토마스가 실체와 아홉 가지 범주적 우유와 관련으로 비례성을 사용한다면 이것은 명확히 이차적 표현이다.

둘째로 토마스가 신과 창조물을 다루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논의에서 비례성의 유비를 사용하는 방법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비례성의 유비가 그 자체를 제공할 수 없는 일종의 이전의 앎에 의존하고 있다. 그가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에서 비례성을 다룰 때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신비적 신적 출생(generaton)과 생애(procession)의 유형을 이해하려고 하는 방법의 역할을 한다. 이것은 그가 삼위일체는 확실한 특징으로 존재하는 성서와 신앙을 통하여 이미 증명된 이전의 앎을 따르고 있다.

또한 토마스는 고유한 비례성 유비에 대한 어떤 다른 예들을 말하는 데 있어서 신과 창조물을 활용한다. 예를 들면 유한이 유한인 것처럼 무한이 무한과 동일하다. 인간의 유한한 이해가 유한한 사물들을 파악하는 것처럼 신의 무한한 이해는 무한한 사물들을 파악한다. 현실적으로 인간의 지성이 신에 대해 아는 것처럼 그가 아는 것도 신이다. 마치 인간들이 인간 상품을 분배하는 것처럼 신은 우주의 모든 상품을 분배한다. 그리고 인간의 정의가 신와 가정에 관련된 것처럼 신의 정의는 전체 우주를 다룬다. 마치 신이 그것을 소유하는 사물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창조물은 그것에 속하는 사물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관계적 다의성의 유비의 전유물인 신에 대한 의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비례성 유비는 인간들이 보다 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창조물의 특성과 다양한 인간들에 대해 서로 비교함으로 신성의 속성에 대한 본성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의 해석은 두 가지 방법 안에서 비례성의 유비가 관계적 다의성의 유비에 의존함을 주장한다. 또한 우리는 비례성 유비가 관계적 다의성의 유비보다는 이차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4.2.4 다의적 유비의 논리적 상황

토마스에게 관계적 다의성의 유비는 일의성과 순수 다의성 둘 사이 논리적 중도에 주로 존재한다. 이와 같은 것은 주어가 본질적으로 유비적 술어를 소유하든지 안 하는가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과 관련하여 보면 중도이다. 또한 토마스는 창조주 신과 창조물들 둘 사이 실재적 유사성 안에 신적 속성들의 유비적 술어에 근거를 둔다. 또한 그는 유비의 개념을 논리적 실재성들에 대해 언급할 뿐만 아니라 실재적 세계 안에 인과관계에 의한 형이상학적 구조를 사용한다.

토마스가 일의성과 다의성 둘 사이의 중도로서 다의적 유비를 묘사할 때 그는 명확하고 엄격하게 순수한 의미에서 다의성의 의미를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광범위하게 얻어진 다의성은 다의적 유비와 동일하다. 또한 순수 다의성은 때에 따라 운명적으로 다의성으로 불려진다. 그 기회를 위하여 다의성은 특별하게 여러 가지 다른 실재들로 서술되어진다. 비록 그것이 언어학적 우유 또는 역사적 우유 때문에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실재적으로 어떤 공통의 가지적 관계를 소유하지 못하다. 그러나 엄격하고 광범위한 다의성 둘 다는 일의성에 반대된다. 왜냐하면 후자는 항상 “동일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떤 종류의 다의적 용어들은 모두 그의 다양한 사용 안에서 동일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토마스는 이것을 자주 확실한 다의적 서술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일종의 다의성으로 의미된 것을 해석자가 결정하도록 남겨 두었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초기 저작의 하나인 『자연의 원리들』에서 언급하기를 유비가 어떻게 일의성과 순수 다의성 사이 중간의 토대인 것을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일의성의 명칭은 동일한 명칭과 동일한 의미 또는 정의에 따라서 다른 사물들에 서술되는 것이다. 다의적 명칭은 다른 명칭에 따라서 서술되지만 다른 의미 또는 정의가 다른 것은 아니다. 유비적 명칭은 하나와 동일한 어떤 것에 언급되는 다른 의미들에 따라서 다양한 주제들에 대하여 서술된다. 서술의 세 가지 모든 종류들은 다른 주제들에 대해 서술된 동일한 이름 존재를 수반한다. 그러나 일의적 용어들은 항상 구체적 의미를 전달한다. 그리고 순수한 다의적 용어는 다른 주제들에 적용됨으로써 완전하게 다른 의미들을 지닌다. 유비적 용어들은 어떤 하나의 것에 언급함으로 다른 의미를 수반한다. 유비적으로 서술된 용어들은 의미에 있어서 불완전한 유사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신학대전』에서 아래와 같이 유비를 서술한다.

유비적 서술은 순수 다의적인 것과 단순 일의적인 것 사이에 있다. 유비적으로 말해지는 것들에 있어서는 일의적 것들에 있어서 (in unvocis)와 같이 하나의 개념(이유, ratio)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다의적인 것들에 있어서와 같이 전혀 다른 개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수로 말해지는 명칭은 하나에 대한 다양한 비례들을 표시한다. 예를 들면 병에 대해 말해지는 ‘건강한 것’이란 명칭은 동물의 건강의 표징(signum)을 표시하고 의약에 말해지는 ‘건강한 것’ 이란 명칭은 동물의 건강의 원인을 표시한다.

토마스에게 유비는 본질적으로 유비적 서술을 지니든지 지니지 않던 지간에 상관없이 존재론적인 물음에 대하여 중립적인 논리적 실체이다. 이런 존재론적인 중립성은 유비에 대한 예들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볼 때 분명하다. 우선 첫째로 토마스는 유비가 하나의 실재에 관련되어 일차적이거나 이차적 의미들의 물질적인 것을 단순하게 보도록 한다. 어떤 존재론적인 것 없이 실체/우유와 건강의 예들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사용하고 있는 실체/우유의 예가 고유한 명칭의 예이다. 그러나 건강의 예는 본질적인 명칭에 대한 예라고 볼 수 없다. 건강의 예와 같은 것은 존재론적인 상황을 언급하는 것 없이 중립적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토마스는 창조물과 창조자 신 사이에 획득된 실재적 유사성에서 신적 속성에 대한 유비적 술어를 거절한다.『명제론』(Sentences) 주석에서 토마스는 창조물이 그것을 할 수 있는 만큼 신을 모방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유비의 공동체” 신과 창조물 사이를 유사성이라 부른다. 이런 존재론적인 모방은 창조물의 명칭들의 근거이다. “창조물은 첫 번째 존재자(ens)로부터 내려오는 한을 제외하고는 존재(esse)를 소유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첫 번째 존재자(ens)를 모방하는 한을 제외하고는 존재자(ens)를 지칭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예는 지혜와 같은 경우이다. 그리고 모든 다른 사물들은 창조물로 불려진다.” 이것이 신적 본성과 속성들에 대한 창조물의 존재론적인 모방에서 근거된 유비적 명칭들의 논리이다.

게다가 토마스는 또한 현실 세계 안에 인과성의 형이상학적 구조뿐만 아니라 논리적 실재들을 언급하는 유비의 개념을 사용하다. 여기서 그는 인과적 원인의 이중 또는 삼중 분할을 제공한다. 실제로 논리적 술어의 영역에서 본래 차용된 용어들은 세계 안에 실재적 원인에 적용된다. 여기서 가끔 우리는 세 가지 종류의 인과적 원인을 발견한다. 다의적 원인: 의미나 명칭과 일치하지 않는 원인과 결과, 일의적 원인: 의미와 명칭이 일치하는 원인과 결과, 유비적 원인 : 일차적 그리고 이차적 의미들의 질서에 따라서 일치하는 원인과 결과 등이다. 일의적 원인: 동일한 종의 형상을 초래하다. 이것은 그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사물들에 비례한다. 다의적 원인 : 결과가 그것에 대한 어떤 유사함을 단지 얻기 위하여 그의 결과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중적인 윤곽은 일의적 또는 비 일의적 사이의 분할로서『신학대전』에서 보인다. 또한 후자는 일의적 또는 유비적 원인으로 부른다. 토마스는 제일 먼저 유비의 기능들에 대한 영역들을 언급한다. 어떤 텍스트에서는 순수 논리적 다의성은 어떤 일의성을 추정하지만 반면에 현실 세계 안에서 일의적 발생은 다의적 발생을 추정한다. 그러나 『신학대전』에서는 존재론적 논리적 영역들 사이에 유질동상(isomorphism)을 주목한다. 여기서 순수 다의적 용어들은 일의적 용어들이 된다. 술어들 안에서 원인의 행위로써 모든 일의적 용어들은 존재인 일차 유비적 용어들이 된다. 토마스가 인식하기를 원인적 행위들과 논리적 술어들 사이에 근접한 연결은 마치 비 유비적 원인들과 같다. 그리고 행위의 영역 안에서 일의적 원인들에 선행한다. 이것은 논리학의 전유물 안에서 일의적 의미에 앞서 유비적 의미이다. 결론적 말하면 토마스에 의하면 다의적 유비는 단어와 의미들 분야에서 주로 활용하는 논리적 실재이다. 2016 / 11.22/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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