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 유비론 : 존재 유비의 방법론
4.3 존재 유비의 방법론
이 절은 다양성과 그의 통일성, 특별히 하나와 관련된 의미들에 대한 특별히 연관된 다의성에 대한 아퀴나스의 유비 중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4.3.1 일차적 의미들과 이차적 의미들
토마스는 일차적 의미들과 이차적 의미들에 대한 얽힌 그물망에 따라서 어떻게 유비적 명칭이 의미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차적 내지 이차적(per prius et posterius) 구절을 사용한다. 이것은 토마스에게 유비적 명칭(일차적 의미)의 중요성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항상 명칭에 다른 의미들(이차적 의미)이 포함된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명사 ‘존재’의 일차적 의미인 실체는 존재의 그 종류에 대한 정의 안에 포함된다. 실체는 그의 자신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존재의 이차적 의미이다. 그리고 범주적 우유는 실체를 통하여 실체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이다.
다른 예는 형용사 동물의 몸으로 서술된 건강(healthy)은 그것이 소변이나 약으로 서술되어지는 한에 있어서는 건강의 정의로 주어진다. 왜냐하면 건강한 소변이나 건강한 약은 건강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은 각각 건강한 동물의 몸에 산출이나 표시이기 때문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유비적 용어가 다른 의미들로서 다른 주제들로 서술될 때 신중하다. 기본적이고 일차적으로 생각되는 유비적 용어의 하나의 의미는 다른 이차적 의미들과 관련된다. 토마스의 일차적 내지 이차적(per prius et posterius)으로 서술된 유비적 명칭들의 예는 아홉 범주(predicamental)의 우유들과 실체로 서술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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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의미들의 하나는 일차적으로 불려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이차적 의미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일차적 의미와 이차적 의미에 대한 언급은 명확하다. 일차적 의미는 다양하고 절대적이다. 또한 완전하고 전체적인이며 고유한, 그리고 완전한 의미들이 일차적(prius)적 의미이다. 반면에 이차적(posterius) 의미는 상대적이며 불완전한 의미이다. 공통의 유비적 용어들의 완전한 의미가 사실로 발견되면 그 주체에 대해 일차적으로 서술된다. 명칭은 명칭에 대한 총체적인 의미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실재에 대해서 서술한다. 그 실제는 의미가 부분적으로 실현된 것은 물론 아니다. 사물이 유비적으로 주체에 대해 말해질 때 “명명되는 다른 것으로부터 오직 하나의 고유한 의미에 따라서 발견된다.”
여기서 문제는 유비적 묶음 안에 의미가 어떻게 고유하고 완전한 의미를 발견하는가이다. 의약과 건강의 분명한 예로에서도 가능하다. 즉 술어의 그물망 같은 사물에서도 가능하며, 보다 더 주석된 용어들 안에서도 가능하다. 토마스에게 어떤 유비적 용어들은 적어도 일차적 그리고 이차적 의미들의 용어들과 관련된 실제들에 대한 것이다. 또한 다른 텍스트에서는 공통에 대한 유비적 의미 안에 일차성과 이차성에 따라서 어떻게 유비 용어들이 서술되는가에 대한 예로서 존재자에 대한 술어를 말한다. 왜냐하면 존재의 의미 안에 자체인 실체는 다른 것 안에 다른 것을 통하여 존재하는 우유와 관련해서 일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차성은 존재론적이다. 왜냐하면 실체가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유는 그 주체의 존재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을 제외한 존재는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술어를 받는 실체의 일차성은 존재론적인 개체성에 기초한다. 마치 동일한 술어를 받는 우유의 이차성이 실체로부터 개체 안에 근거된 것 같다. 존재론적인 일차성 위에 술어의 일차적 토대에 두 번째 예는 신의 경우에 발견된다. 왜냐하면 신적 존재(esse)는 실체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통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은 주로 존재자에 대한 술어를 받는다.
결론적으로 토마스에 의하면 유비적 명칭의 과정은 오로지 일차적 그리고 이차적 의미들의 연결망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와 연관된 실재들에 대한 판단과 술어는 연결된 매트릭스 안에서 쉽게 의미가 통한다. 술어의 연결망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 많은 사상가과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특별하게 언어학적 역할의 생생한 의미는 현대인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지만 또한 많은 현대의 이론가들은 일차적 의미들을 결정하는 데에 전적으로 토마스의 용이함(ease)에 대해 보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차적 그리고 이차적 의미들을 결정하는 방법들에 대한 질문은 상당하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유비가 서로 상호 간에 연결되고 얽힌 술어들의 연결망이라는 사실은 본 논문에서 아주 중요한 핵심이다. 이것은 단순히 유비가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술어의 망을 통해서 우상의 실체를 부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같은 유비에 대한 해석은 토마스의 유비를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다음 단락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것이다.
4.3.2 개별적인 실재 또는 본질에 대한 언급
모든 유비적 술어는 “어떤 하나의 것에 대하여 관련되거나 질서에 따라서” 일어난다. 이것은 “하나”는 특별하거나 개념적으로 하나가 아니라 개별적인 실재 또는 본성으로서 하나다. 예를 들면 의학적 혹은 오줌의 건강은 동물의 몸에 있는 건강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의학적인 건강과 오줌의 건강은 의학이 산출하고 오줌은 의미한다. 이것이 다름 아닌 바로 동물의 건강이다. 건강함(healthy)이 동일한 술어로서 사용될 때 마다 동물의 건강은 구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토마스는 오줌(urine) 또는 의학적의 건강이 실재적으로 동물의 건강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유비적 용어의 다양한 의미들은 의미된 다른 관계들이 동일한 어떤 하나에 나타내는 한에 있어서 하나이다. 또한 토마스는 하나의 본성으로서 하나의 사물인 일의적 술어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동일한 의미 또는 본질(unum ratione)에 어떤 하나의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는 않다. 개별적인 “하나”는 유비적 용어들의 일차적 의미를 받는 것이다. 예를 들면 존재들에 대한 다양한 의미들은 하나의 그 자체가 존재하는 첫 번째 의미를 축소시킨다. 이것은 실체이고 다른 존재들은 일차적 대상이 된다.『신학대전』을 보면 더 보편적으로 언급된다.
많은 것에 대해 유비적으로 말해지는 모든 명칭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그 모든 것은 하나에 관련되어 말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 하나는 모든 정의에 들어 있어야 한다. … 명칭이 표시하는 개념(ratio)은 정의이기 때문에 이런 명칭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의 정의 안에 주어지는 것에 대해 일차적(per prius)으로 말하고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이차적(per posterius)으로 말해진다. 따라서 유비적 명칭들은 개별적인 실재나 혹은 본성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일차적 내지 이차적으로 서술되어진다. 개별적인 실재 또는 본성으로서 “하나”를 나타내는 방법을 언급하므로 순수 지성에 입각해 일의성의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하는 오해를 받는다. 또한 특별한 개념의 특징인 추상적인 통일성이라고 하는 점을 들어 토마스가 개념 주의자 혹은 일의성 주의자라고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 문제는 본 논문을 통하여 어느 정도 오해가 해소될 것이다.
4.3.3 신, 창조물, 그리고 유비적 공동체
토마스는 끊임없이 신의 초월을 방어하기 위한 몸부림을 한다. 그는 신에 대한 앎을 논의할 때마다 이러한 사실을 언급한다.『명제론』(sentence)의 첫 번째 주석 책에서 그가 주장하기를 신과 창조물 사이의 유비적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일차적 내지 이차적 절의 사용을 피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토마스에 의하면 창조물은 직접적으로 신으로부터 존재를 받기 때문에 유비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신을 모방하는 한에 있어서 존재로 불려진다. 그러나 그는 창조물과 창조자 사이의 유비를 묘사하기 위해 긍정적인 방식으로 그 구절을 이용하지만 신과 창조물이 공통 완전성을 공유하는 것을 암시적으로 나타날 때 그 절을 거부한다. 그러나 유비가 신과 창조물 사이 관계가 친밀한 관계인 상황을 포함할 수 있을 때는 수용한다. 토마스는 이러한 모호성을 없애기 위하여 오직 전자 유형들의 설명하는 장치로서 일차적 내지 이차적으로 이용하는 세 번째 대한 둘, 또는 “하나에 대한 다수”(many to one)의 관계로서 유비로 부터 “또 다른 것에 대한 하나” 또는 “하나에 대한 하나” 관계로서 유비를 구별한다. 토마스의『명제 집』에서도 세 번째에 대한 둘에 비해 “하나에 대한 하나” 관계로서 첫째로 유비 사이의 구별을 말하다. 여기에서 그는 신과 창조물이 그것들 너머에 있는 세 번째 실재에 공유할 수 없는 반면에 신은 존재(esse)에 자신의 행위 안에 있는 한에 있어서 존재자(ens)로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창조물은 신의 존재(esse)에 참여함에 있어서 존재자(ens)라고 불려진다.
따라서 신과 사물에 대해 언명되는 이름은 일의적도 아니요 다의적도 아니며 오히려 유비적으로 서술된다는 점이 남게 된다. 즉 어느 하나를 향한 질서나 관계를 따른다는 뜻이다. 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가능하다. 첫째, 많은 것이 어느 하나를 향한 관계를 가지는 경우다. 예컨대 하나의 건강과 관계하여 동물이 ‘건강’의 주체로서 의술이 건강의 원인으로서, 음식이 건강의 보존자로서, 소변이 건강의 기호로서 다 같이 건강하다고 언명하는 것과 같다. 둘째 두 가지가 다른 어떤 것과 맺는 질서나 관계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고려하는 경우다. 예컨대 ‘존재자’가 실체와 우유에 대해 언명되는데 이는 실체와 우유가 제삼의 것과 연관되기 때문이 아니라 우유가 실체에 대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인 것과 같다. 여기서 토마스는 신과 다른 사물에 대한 첫 번째 방법을 부정한다. 이런 종류의 명칭들은 첫째 방식에 따라서 유비적으로 말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신에 대해 일차적으로 서술되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 방법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또한 토마스는『대이교대전』에서 긍정 신학의 기교적 표현을 사용하여 언급하기를 “없는 것(無, nothing)도 마치 신과 다른 사물들에 대해 동일한 질서 속에 서술하지 않고 오히려 일차적과 이차적 의하여 서술된다.” 토마스는 또다시 유비적 서술의 이중 방식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토마스가 유비적 서술의 두 형태에 동일한 예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토마스는 신적 초월을 방어하기 위한 열정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초기 텍스트 안에서도 일차적 내지 이차적 구절을 거절한다. 또한 그는 명확하게 세 번째에 대한 둘의 유비로 양분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한 이차적 그리고 파생어의 신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상황에 따라서 그 구절을 거부하거나 수용하는 반면에 그가 생각하는 그는 신의 탁월성과 우월성을 위태롭게 하는 어떤 종류의 유비에 대한 그의 묵살은 변함없다. 그는 신을 비 결정적이고 측량할 수 없는 분으로 여긴다. 신에 대한 창조물의 관계이며 다른 것에 대한 하나의 직접적인 관계로서 초월적 유비를 이해될 때 우리가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의 공동체 혹은 통일성은 본 연구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유비적 공동체에서는 주제의 중요성 때문에 통시적 작업을 시도한다.『자연의 원리』에서 토마스는 일종의 공동체(communitas)나 일치(convenientia)로서 유비를 말하면서 사물들이 유비에 따라서 일치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토마스의 『명제집』에서 유비적 조화는 만약 그것을 너머에 있는 제 삼의 실재를 공유함으로써 이해한다면 신과 창조물 사이는 부정된다. 이것은 바로 일의성으로서 부정된다. 또는 만약 그것이 일의적과 유비적 일치 사이에 구별이 되면 가능하다. 그런 측면에서 신과 창조물 사이의 유비에 대한 조화는 창조물들이 존재 그 자체인 신의 존재에 참여할 수 있는 만큼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토마스의 후기 텍스트에서도 실제로 물리적이고 논리적 실재들이 유비에 따르는 조화(convenire secundum analogiam)라고 말한다. 하늘의 몸의 질료, 요소들의 질료 모든 자연적 물질들의 원리등이 다양한 실재들을 다루는 논리적 중간 용어들이다. 토마스에게 일치(convenientia)는 유비가 어떤 종류의 조화, 어울림, 또는 용어들의 일치인 것을 표시한다.『명제 집』에 서 조차도 그는 신적 초월성과 단순성이 손상되지 않을 때 오직 신과 창조물에 활용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런 측면에서 유비의 조화는 공통의 특성 안에 일의적인 공유가 아니라 차라리 창조물이 신의 존재 행위에 참여함을 암시한다. 유비의 공동체(communitas analogiae)와 유비를 따르는 공동체(communitas secundum analogiam)는 앞에서 언급된 2행 대구 일치(convenientia)/조화(convenire) 보다 더 자주 활용된다. 흔히 그것들은 형이상학 또는 윤리적 주제들에 대한 언급에서 유비가 사용된다. 존재는 유비적으로 모든 다른 실재들에 대해 공통이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사물들은 처음과 나중에 따라서 공통의 유비로서 구별된다: 죄, 선, 서약. 유비의 공동체는 네 가지 용어들의 비례성을 의미한다. 창조물과 창조자는 또한 유비의 공동체를 공유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세 번째 실재들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존재인 신을 모방하고 창조물이 신으로부터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에 한에서이다. 토마스의 초기 삼위일체의 신학에서도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은 유비의 공동체인 모든 창조물과 아들에게 공통된다.” 앎, 삶, 그리고 존재는 유비의 공동체에 따라서 신에서부터 동물, 식물, 돌까지 조차도 확장된다.
그리고 토마스의 사용하는 조화의 유비는 그의 작품들을 통하여 확장되지만 다만 신과 창조물 관하여서는『명제집』과『진리론』(De veritate)에서 제한된다. 토마스는 유비적으로『신학대전』에서도 공동체의 방식(modus communitatis)으로서 신과 창조물로 말한 존재를 지칭하고 언급하다. 이것은 일치의 유비(convenientia analogiae)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더욱이 그는 신의 초월을 보장할 수 있는 환경 안에만 유비의 공동체(communitas analogiae)가 신과 창조물 사이 관계를 묘사할 수 있는 것을 허용한다.
4.3.4 유비의 ‘공통의 의미’와 ‘다른 의미들’
신과 창조물에 대한 말과 앎을 특징화 하는 방법으로서 궁극적으로 유비의 ‘공통의 의미’와 ‘다른 의미들’ 사이에 대한 의미 구분으로 설명된다. 토마스에게 명사 ratio는 사물의 가지성의 어떤 측면, 수학적 비례, 어떤 것의 형상과 본성, 의미 또는 정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측면, 이성의 능력 또는 이성의 과정을 의미할 수 있는 풍부한 다의적 단어이다. ratio는 일반적으로 공통의 의미(ratio communis) 구절에서 ‘의미’를 뜻한다. 그러나 또한 “본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상호적으로 배타적인 두 가지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실체와 우유는 존재의 ‘공통의 의미’(ratio communis)에 참여라고 말해진다. 모든 실재를 가로질러 개체의 본성은 유비에 따라서 하나의 ratio 안에 참여라고 말해진다. 유비적 용어들에 대한 다양한 의미들은 또한 공통의 지향(intentio communis) 안에 참여라고 말한다. ‘공통의 의미’(ratio communis)는 신과 창조물 사이의 관계의 상황 안에서 이용된다. 그 완전성의 유비적 ‘공통의 의미’(ratio communis)에 따르는 명칭의 선(goodness)은 신과 창조물에 대해 공통이다. 즉 “모든 참여들과 상호 교통의 원리에 대해 둘 은 공통이다.”
신과 창조물과 관련된 다양한 사물들은 일의적으로 아니라 유비적으로 “하나의 ratio”에 대해 말한다. 여기에서 신의 아들의 탄생과 창조물의 산출은 유비적으로 하나의 의미(ratio)이다. 『신학대전』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과 창조물 안에 아버지가 유비적으로 동일한 의미(eaden ratio)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ratio은 다양성과 일치성 둘 다 존재한다.명사인 사람(person)이 일의적으로 아닌 신과 창조물이 유비적으로 말해진 논의의 과정에서 토마스는 사람의 의미가 일반적으로 구별이 됨을 암시한다. 이것은 모든 구별의 방식으로부터 추출된 것이다. 다른 방법들에 의하여 구별되는 것은 그 사물 안에 유비적으로 하나의 의미이다. 따라서 토마스가 무방비적인 일의성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유비적으로 공통 의미가 신과 창조물이 사람이라는 다른 방식에서 추출의 근거로 신과 이성적 창조물로 서술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후기 저작에서 토마스의 주목은 유비의 의미론적 다의성이 가능한 다른 의미들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신학대전』에서 숙성된 결실이 보인다. 유비적으로 서술된 이런 사물들에는 일의적으로서 하나가 아니고 다의적으로서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닌 것을 의미하지만 유비적 서술에서는 다양한 방법들에 의해 서술된 명칭이 어떤 하나의 것에 다른 관계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한 명칭의 다양한 의미가 유비적으로 어떤 하나의 것과 다른 관계를 나타낸다. 그가 유비적 명칭에 관련하여 단어 ratio을 기꺼이 사용한다 할지라고 단순한 하나 또는 완전하게 다양한 ratio을 부르는 것을 경계한다. 유비의 ratio가 하나 또는 다양한 것을 둘 다를 다른 곳에서 보았다. 왜냐하면 유비적 용어가 다양한 상황과 술어들 안에 사용될 때 어떤 하나의 것에 대해 다른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주석하면서 다른 의미에 대한 유비를 강조하는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존재는 많은 방법 안에 말해진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초기 저작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은 유비의 다양성(multiplicitas)과 존재의 다양성의 구절을 발견한다. 이것은 어떤 유비적 분류의 중심에 다수의 술어들에 대한 민감성을 보여주었다.토마스는 용어는 유비적으로 또한 부분적으로 다르고 부분적으로 다르지 않은 의미들에 따라서 서술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다른 실재들을 암시하는 한에 있어서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다른 실재들 한에 있어서 하나는 어떤 하나 그리고 동일한 것이다. 토마스는 주장하기를 유비적 용어들 안에서 다른 관계들이 언급된 하나는 숫자상(모두)으로 하나이다. 이것은 일의적 의미를 통하여 지시된 단지 의미로서 하나가 아니다. 사실상 유비적 “하나”는 의미의 통일성이 아니라 확실한 본성으로서 하나로 존재하는 하나이다. 토마스가 형이상학 주석에서 부분적으로 통일된 ratio가 유비적 용어들을 얻는다 할지라고 그 ratio는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통일성, 일의적 서술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개별적인 본성 또는 실제들 등 구체적인 관계는 다르다. 역설적으로 토마스는 일의성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서 유비를 개념화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토마스는 의미하고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유비의 뉘앙스를 정의하기 위해 의미에 대한 새로운 유비적 의미를 창조한다. 그리고 단어 ratio에 대한 유비적 의미를 풍부하게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를 돕고 의미론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토마스는 그의 초기 저작 이후에 완전하게 “공통의 의미”(ratio communis)의 사용을 중지하지 않았다. 사물이 유비적으로 많은 것에 대해 말해질 때 “이것은 다른 것들이 명명되는 오직 하나에 의한 고유한 의미에 따라서 발견된다.” 다시 말하면 유비적 용어의 ‘공통의 의미’(ratio communis)는 “완전한”하고 “고유한”의 용어들로서 실재적으로는 동일한 실재(same reality)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그것들이 유비적 서술들의 총체적인 영역 안에 포함되는 능력을 나타내는 한에 있어서는 다르다. 실제로 직접적으로 ‘공통의 의미’(ratio communis)는 하나의 서술에서 발견된다. 다시 말해 그 서술은 주어가 서술의 의미와 완전한 중심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서술이다. 반면에 다른 술어에서는 그것이 이차적 방식에 한에서 직접적으로 의미되지 않고 종속적으로 또는 상대적으로 의미되며 그것을 나타내는 공통 용어의 의미들을 확장한다. 이것은 유기체적인 술어들 안에 발생한다. 2016 / 11 /22 /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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