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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인문학▣/종교철학산책

비움과 무심(無心)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중세 신비주의 (c. 1260-1328)

by 뜨르 K 2021.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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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본 발표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신비주의를 다루고자 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독일 신비주의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요, 독일 신비주의자의 원조이다. 존 타울러(John Tauler)와 헨리 수소(Henry Suso)도 그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종교개혁자 루터도 이 신비가의 감화 속에 길러진 인물이다. 그런데도 에크하르트 사상은 이단으로 정죄당하였다. 우리는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와 그를 둘러싼 여러 갈등과 이단 논쟁을 통하여 당시 프란치스코 사상과 도미니코 사상 사이의 긴장과 대립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단 정죄 행간에는 에크하르트의 사상 자체의 정당성 여부를 넘어선, 도미니크와 프란치스코 사이의 불협화음이라는 역사적인 상황이 관여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중세는 <이성과 계시의 종합>이라는 장중한 정조 위에서 전개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점에서 중세의 황혼기를 장식하는 에크하르트 신비주의가 어떠한 모양으로 전개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2. Meister Eckhart 의 略傳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1260년경에 고다(Gotha) 근처인 호크하임(Hocheim)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르푸르트(Erfurt)에 있는 도미니칸(Dominican) 수도원에 입단하여 콜로뉴에 있는 수도회의 스투디움(studium)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그는 에르푸르트 도미니코 수도회의 원장(prior)이 되었으며 동시에 투린지아(Thuringia) 도미니크 수도회의 대리 주교(vicar)이기도 했다. 1302년에 파리에서 미스터(Master) 학위를 받고 1303년에는 삭소니(Saxony) 지방의 지역 관구장, 1307년에 보헤미아(Bohemia) 지방 교구장, 1312에 전 독일 도미니크 수도원 감독 관장직을 역임하였다. 1313년에는 스트라스부르그(Strassburg)에서 설교자와 수도원장으로 돌아온 그는 1313년에서 죽기까지 콜로뉴에 있으면서 가장 유명한 시대를 이루었고 수준 높은 설교를 하였으나 말년에 이단 시비로 휘말려 고통을 겪기도 하였으며 또한 그의 교리적 견실성에 대한 많은 중상을 받았으나 이에 대항하여 옹호하였다. 1327년에 그가 죽은 이후 이단 혐의로 조사되어 1329년 교황 요한 22세는 그의 저작 중 28개의 명제를 정죄하였고 그중 이단적인 것으로 17개를 선포하였으며 11개는 경솔하고 편협한 것으로 판결하였다.

 

3. SYNOPSIS

에크하르트는 「첫 번째 파리문집」(First Parisian Question)에서 존재(being)가 신의 속성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존재가 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피조물의 속성으로서 보이는 한 신은 가장 순수한 존재이시다. “한 처음 말씀이 이었다.” 는 것은 존재의 모퉁이 돌로서 지성을 자리 잡게 하다. 따라서 에크하르트는 한 처음에 말씀(Word)이 있었지 존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기자의 말대로 태초에 존재보다 말씀이 있었는데, 이 말씀은 ‘인식’을 뜻하기 때문이다. 즉, “말씀”과 “진리”는 앎과 관련된 것이지 존재와 관계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신은 일자이고 그의 속성은 일치이다. 신이 전적으로 지성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신을 일자(One)라고 말하는 것과 동등하다. 에크하르트의 존재론의 절정이 기독교 삼위일체에서 찾아진다고 할지라도 그 신비적 철학의 절정은 신적 존재의 근원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신적 존재는 그의 실재보다 차라리 일치이다. 신적 존재는 모든 존재의 손수 또는 존재의 충만으로 묘사된다. 피조물이 존재라면, 신은 존재를 초월하시고 존재의 순수이시다. 왜냐하면, 신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신을 존재라 부른다면 우리는 피조물을 무(nothing)라고 불러야 한다. 즉 피조물은 순수 없음(pure nothing)이다. 그러나 신과 일치된 것으로서 피조물은 영원히 존재하고 불변한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본성은 두 개의 본성을 갖는다. 즉 무(nothing)와 무한한 신성(Deity) 사이의 긴장 속에 놓이는 것이다. 즉, 피조물들을 신(God)과 무(nothing) 사이에 놓인 분리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신과 무로부터 자신의 실재를 끌어오는 대상으로 이해한다. 즉, 인간은 지적 이해(지성)를 통하여 일자(One)로 돌아온다. 따라서 에크하르트는 신의 모든 존재는 지성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에크하르트가 플라톤 전통(특히 플로티누스)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이유는 신을 존재보다는 이해(지성)로 부르기를 더 원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에크하르트는 모든 피조물의 근원을 無로 보지만 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고 신과 관여되는 것은 영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유한 자인 피조물은 신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 에크하르트는 영혼의 불꽃(the spark of the soul)을 통하여 인간이 신과 관계를 맺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영적 본질로서 영혼을 간주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의 여러 기능 - 예를 들면 보는 기능, 인식하는 기능 등 - 과는 구별된다. 이것이 바로 영혼 안에 있는 능력(faculties)이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에크하르트는 여러 가지 다른 어휘(영혼의 능력, 영혼의 성, 영혼의 빛 등 )를 사용한다….

피조물로부터 분리된 활동과 실존은 지성이기 때문에 인간이 신성과 하나게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인식능력, 즉 “우월한 이성적 능력” 또는 “영혼의 불꽃” 안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인간의 참 지성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신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지성은 창조되지 않으며, 창조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과 하나인 인간의 지성은 사물을 신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진정한 신적 연합이 발생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전적인 단순성과 일치 안에서 신적인 지성과 닮은 영혼이 깃든 육체로 진실하게 들어가는 것이다. 영혼은 신성만이 소유하는 자유와 순수성을 안다. 신은 영혼 깊은 곳에 거주하기 때문에 지성(intellect)은 심층에서 그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크하르트는 사람의 삶이 순결하고 가난할수록 신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가장 고귀한 것은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그는 무심(Disinterest)을 사랑보다 더욱 고귀한 것으로 평가한다.

에크하르트는 신(God)과 신성(Godhead)을 구별한다. 신과 신성은 활동하심과 활동하지 않음으로 구별된다. 신은 활동하신다. 그러나 신성은 활동하지 않는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신성은 신의 절대적 초월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인간의 어떠한 이름이나 개념이나 상징이나 그리고 어떠한 속성으로도 표현 불가능한 신의 고유의 실재성을 말한다. 그리고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철저한 ‘부정의 길’이라는 고유한 방법을 통하여 전개된다. 위 디오니소스(Pseudo-Dionysius)이래 전개되는 부정 신학(negative theology)은 중세 신비주의 정점에서 서 있는 에크하르트에게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에크하르트 신비주의는 인간의 영원히 어떻게 신과 창조 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하며, 또한 신에게 상승하여 그와 합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에 있다. 그에 의하면 그 가능성은 우리 인간이 신의 형상인 영혼과 지성을 소유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의 결합 그리고 육체적 감각과 욕망 때문에 혼탁해지고 어두워져서 신과 창조 세계의 참모습과 그 신비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신성은 존재 자체, 존재의 심연, 침묵이므로 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신과의 합일에 의해서는 우리 인간의 영혼도 자기 비움, 자기의 무화, 자기부정 또는 자기 포기, 영혼의 순수화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영혼의 자기 비움과 순수화의 최상의 방법을 에크하르트는 무심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에크하르트는 무심이 영적 가난, 자기 무화 그리고 버림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에크하르트는 인간이 이러한 최고의 인식 경지에 도달하면 우리 영혼이 완전한 무심을 이루어 순수한 영혼의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이 영혼의 순수 과정이 무심의 과정인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인간의 최고 가치는 사랑인 것이 분명하지만 자신은 무심을 사랑보다 더 위에 놓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사랑은 나에게 신을 사랑하게 하지만 무심은 신이 나를 사랑하게 하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는 무심이 이 세상과 모든 피조물로부터의 분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과의 분리로부터 분리까지를 의미한다. 이것은 이중 부정으로서 철저한 자기 부정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비록 한 인간이 한 왕국이나 전 세계를 버린다 해도 자기 자신에 집착한다면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서 무심의 목표는 철저한 자기 비움인데 이 철저한 자기 비움은 다름 아닌 자아의 순수화 곧 영혼의 온전히 맑아짐을 뜻한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신성의 모습이 비치게 되는 상태이다. 또한, 철저히 무심된 영혼의 상태가 마음의 가난한 상태이며, 또한, 신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청결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지금 이 시각도 신의 말씀 곧 진리인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탄생시킨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고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한 자기 부정과 자기 비움을 이룰 때 우리 영혼 속에 그리스도가 탄생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이 온전한 무심을 이루어 영혼의 비움의 상태, 무의 상태가 되었을 때 신의 말씀 곧 로고스가 우리 영혼 속에 탄생한다는 말이다.

4. SERMON
4-1. SERMON ON THE ETERNAL BIRTH(영원한 탄생에 대한 설교)
4-1-1. THIS TOO IS MEISTER ECKHART WHO ALWAYS TAUGHT THE TRUTH
(이 사람 역시 항상 진리를 가르쳐 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입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누가복음 2:49)

에크하르트는 영혼의 핵 속에서 일어나는 영원한 탄생을 인식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아버지 일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많은 힘을 드리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이러한 탄생을 경험할 수도 없고 또 그것에 접근할 수 없다. 또한, 영혼의 모든 기능을 억누르고 그들이 작용하지 못하는 데는 큰 힘이 필요하다. 에크하르트는 인간의 지성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곧, 능동적 지성과 수동적 지성, 그리고 잠재적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능동적 지성(active intellect)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마음(정신)이 신이나 피조물, 또는 신의 영예와 영광을 생각할 때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능동적 행위가 신에 의해 수행될 때 정신은 수동적으로 되어야 한다. 반면에 잠재적 지성(potential intellect)은 능동적 지성과 수동적 지성 모두와 관계되어 있다. 그것은 정신의 잠재성을 의미합니다. 어떤 경우에 정신은 스스로 어떤 일을 시작하지만, 또 다른 어떤 경우에 정신은 신이 바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수동적으로 있다. 그러나 정신이 먼저 시작하고 신의 끝이 맺기 전에 이루어질 일에 대한 잠재적 지식을 가져야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잠재적 지성”의 의미이다.

따라서 신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당신의 선하심을 감추기도 하시며, 드러내기도 하시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며 최선이라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이다. 신은 자연을 파괴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신을 위하여 준비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는 영혼의 기능들이 그 본성상 마땅히 취하게 되는 관념들과 활동으로부터 자유 로진 마음이 필요하다면 우리의 개인적인 덕을 위해서 신의 선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까?
관상과 덕의 행위들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관상으로부터 덕의 행위들에로의 이동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그 전망 속에 하나의 목적을 가진 과정에 불과하다. 관상을 통해 우리가 도달한 “단순성” 속에서 신의 행위라는 추수의 다양성을 예시하는 것이다. 또한, 선한 행위나 선행에 대한 그 관념은 자연을 초월한 신 의도로부터 유출되는 것이다. 정신의 대상과 정신의 현존은 본질적이다. 정신은 순수한 자기 존재를 소유한다. 그리고 진리나 본질을 발견하자마자 정신은 자신의 신탁을 전해야겠다는 충동하게 되며 그 일을 시작한다. 그 이유는 정신이 하나의 준거 점(point of reference)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준거 점(point of reference)을 갖지 못한다면, 정신은 그 어떤 말(신탁)도 진술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때 정신은 진리의 핵심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핵 속에는 진리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정신에 감추어져 있고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정신이 쉼을 얻을 수 있는 행위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준거 점(point of reference)을 갖고 있지 못하는 한 정신은 오로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본질만이 정신을 만족시킨다. 만족하지 못하는 정신은 최상의 선을 향해 아우성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은 영혼 속에서 당신의 아들이나 말씀을 탄생시키며,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영혼은 자신의 기능들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행위도 그의 것이며, 그 말씀도 그의 것이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영혼의 능력(agents)들과 그들의 기능들(functions)과 인간의 본성과 함께 자아를 그분께 복종시키기 때문이다. 이때 신께서는 즉시 우리들의 존재와 능력 속으로 들어온다. 이러한 상태는 우리 자신이 사막처럼 되는 상태이다. 그리고 외면적인 덕행(기도, 독서, 찬양, 철야, 금식, 참회 등)들도 겉 사람에게 신을 향하게 하는 동시에 영적인 삶과 모든 선한 일을 준비시킬 목적으로 시작되고 제정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참된 영적 체험하게 되었을 때 외적 훈련을 그만둘 수 있으며 그 모든 맹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4-1-2. ANOTHER SERMON ON THE ETERNAL BIRTH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전례를 좇아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누가복음 2:42)

에크하르트는 고귀한 탄생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영혼의 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영원의 기능들과 그것들의 활동들 곧 기억, 이해, 의지, 그 외의 모든 것의 변화 등을 떠나 원래의 출발점인 영혼의 핵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감각을 통해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들은 고귀한 탄생을 경험할 수 없지만 거룩한 탄생이 실제로 순수하게 그 빛을 발하려면 인간의 내면에 계신 신으로부터 인간에게로 흘러넘쳐야 한다. 그러는 동안 인간의 모든 노력은 중지되어야 하며 영혼의 모든 기능은 신 처분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탄생은 오로지 신의 행동에 의존해야 하며 그동안 인간들은 수동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지식과 의지를 버린다면 그때 신은 빛나는 자신의 지식을 가지고 틀림없이 들어오실 것이다. 신을 신적으로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의 지식은 순수한 무지가 되어야 하며 그 무지 속에서 자신과 그 밖의 모든 피조물을 망각해야 한다. 이러한 상태는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상태이다. 텅 비고 순수하게 될 때까지 인간은 비 자기의식이라는 어둠의 심연 속에 홀로 있어야 하지만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사막처럼 만들면 만들수록 우리는 신의 영지(領地)에 더욱 가까이 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진정 모든 피조물을 거부하고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고독하게 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와 신이 완전이라는 신성한 작업을 위해 함께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즉, 신은 우리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의 현존을 느끼는 것은 그분의 능력에 속하는 것이지 우리들의 능력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면 신이 그렇게 하시고 반대로 그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신은 숨기신다.
우리가 아무리 신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거나, 아무리 신의 현존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그냥 버려두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주인이신 신은 그 어떤 텅 빈 장소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거룩한 탄생이 실제로 일어날 때 이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방해할 수 없고 피조물들은 신의 영원한 탄생을 가리키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 주위에 있는 지상의 모든 것들과 함께 거룩한 탄생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거룩한 탄생을 향해 돌아서게 된다. 따라서 그 탄생을 향해 돌아섰기 때문에 우리가 그 무엇을 보며, 그 무엇을 듣든지 그것들로부터 오직 영원한 탄생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고행하는 생활들은(금식, 철야, 기도하기, 무릎으로 기어가기, 딱딱한 바닥에 눕기 등) 몸과 육체가 영혼에 끊임없이 방황하기 때문에 고안된 것들이다. 즉 육체는 영혼에 대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육체와 영혼 사이에는 끊임없이 갈등이 있다. 다시 말하면 고행은 육체를 복종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육체를 가장 빠르게 정복할 방법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가장 강한 속박에 붙들린 것이지만 그 속박은 바로 즐거움이다. 이 달콤한 사랑의 속박만큼이나 우리를 신의 소유로 만들고 신을 우리들의 소유로 만드는 것은 없다. 즉,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신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에크하르트는 오직 이 사랑의 고리를 바라보라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5. TALKS OF INSTRUCTION (교훈 담화)
5-1. ON SOLITUDE AND THE ATTAINMENT
(고독과 신 얻음에 대하여)

 

에크하르트는 신을 소유하고 있느냐 소유하고 있지 못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신만을 소유하고 있으며, 신만을 생각하고 있으며, 신 외에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 모든 행동과 모든 장소에서 신을 드러낸다. 더욱이 신은 수많은 일에 의해 분산될 수 없기에 그가 모든 분열된 일들이 통일성을 이루게 하시고 구별을 없애는 일자(One)와 하나인 한(for he is one in One), 그도 여러 가지 일들에 의해 분산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에크하르트는 우리가 모든 일속에서 신을 붙잡아야 하며 우리의 느낌과 생각과 사랑 가운데 신을 늘 간직하는 일에 우리 마음이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 속에 같은 마음과 같은 신뢰와 신을 향한 같은 열정을 가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런 종류의 일관성을 갖고 있다면 어떤 것도 신을 깨닫는 것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에크하르트는 신을 얻는 일은 어떤 특정한 방법(관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마음에 달려 있고 신을 향한 내적이며, 지적인 전향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신을 거룩한 분으로 여기면서 그 자신 안에 신의 실재하고 있을 때 신은 모든 것 위에 빛을 비추신다.

따라서 사람이 자진하여 그분에게서 떠나지 않는 한, 신은 결코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도피, 사물들로부터 멀어짐, 세상으로부터의 고립과 분리 때문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 고독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어디에서든 누구와 함께 있든 그는 사물을 꿰뚫고 들어가는 법을 배워야 하며, 자신의 마음에 새겨진 신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얻도록 애써야 한다. 따라서 사람은 신의 현존으로 충만해야 하며 자신 안에 계신 사랑의 신 형상을 알고 있어야 한다.
5-2. ABOUT THE BODY OF OUR LORD, HOW OFTEN SHOULD PARTAKE OF IT, WITH WHAT DEVOTION AND IN WHAT (우리 주님의 몸에 관하여, 어떤 신앙심과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자주 그것을 받아야 하는가에 관하여)

 

에크하르트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우리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세 가지 자세와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양심에 비난받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두 번째로, 그런 사람은 자기 뜻이 신을 향하게끔 해야 하며, 신께 뜻을 집중시킴으로써 신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서도 기쁨을 얻어서는 안 된다. 세 번째 규칙은 우리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이 매번 반복되는 성찬에의 참여와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것과 성체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에 대한 존경심이 감소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사람 속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심으로 기쁨을 누린다. 우리가 지치고 우울하고 분해서 주님께로 나아갈 용기가 없을 때 에크하르트는 신께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즉, 그와 결합하라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의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체적 힘들은 우리 주님의 몸의 현존이라는 최상의 힘으로 하나의 초점으로 볼일 것이며 분산되었던 감각들 역시 일치되어 조화를 이룰 것이며 신께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그분의 마음은 하나가 될 것이며 우리의 몸과 그분의 몸도 하나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각과 의지, 생각, 신체의 여러 기능이나 기관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우리가 모든 결함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고, 덕성과 은총으로 덧입기 원하며, 우리의 존재의 근원을 향해 기쁘게 인도되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몸을 받을 만한 준비를 하고 자주 성체를 받도록 하여 우리 주님과 결함이 됨으로써 그분의 몸을 통해 고귀하게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에크하르트는 신이 천상의 능력(higher power)과 지상의 능력(lower power)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천사의 능력으로 그분은 영원의 축복을 소유하며 누리신 동시에 지상의 능력으로는 여기 이 세상에서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으셨다. 그러나 지상의 능력이 천상의 능력이 작용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고귀한 기능들은 마땅히 신을 향해 단련되어야 하며, 그분께 바쳐져야 하며, 항상 그분께 성별 되어야 한다. 에크하르트는 만일 우리가 신을 값지게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천상의 기능은 신을 향하도록 하고 우리의 의지는 그분의 것을 추구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에크하르트는 이러한 태도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은총을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주님의 참된 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한다. 만일 두 사람이 같이 사는데 한 사람은 주님의 몸을 다른 사람보다 한 번 더 값지게 받는다면 신과의 특별한 일치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6. LOVE CANNOT BE LAZY : A FRAGMENT (Pfeiffer, 33)
(사랑은 게으름피울 수 없다 : 단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외적 봉사에서 면제될 수 있는 데까지 도달한 사람은 없다고 말하였다. 그가 관상적(contemplation) 삶에 내맡겨졌다고 할지라도 그는 밖으로 나가거나 생활 속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 전혀 아무것도 갖지 않은 사람도 자신의 의지가 자선을 베푸는 일에 관대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막대한 부를 갖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나누지 않기 때문에 관대하지 않을 수도 있듯이, 시간과 기회가 요구할 때 자신의 덕(virtues)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덕을 소유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관상적 삶을 살아가면서 활동을 피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며 잘못된 길에 접어든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관상적인 사람은 관상의 시기 중에는 이루어져야 할 행위들에 대해 생각조차도 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 후에 그는 분주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항상 관상 속에만 잠겨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며, 활동적인 생활은 관상의 유예이기 때문이다.

7. 에크하르트 신비주의의 역사적 의의

 

13세기 수도회의 학파를 전개해 나아가는 또 다른 조류는 도미니쿠스(Dominicus,1170-1221)가 창설한 도미니크 수도회이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상을 견지해 나아간다. 이 사상의 정점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형성된다. 이들은 인문주의에 대해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고, 이후 대학의 번창과 학문의 발전에 커다란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두 서클, 즉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칸 수도회는 중세기 말의 기독교 사상의 두 흐름으로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옴을 발견할 수 있다. 에크하르트는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사상적 세례를 받으며 자신의 신비주의 사상을 전개해 나아간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인간의 정서적 본성을 희생시키고 이성만을 강조하는 스콜라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며 새롭게 신비주의 사상을 전개한 정신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에크하르트는 이성의 빛을 추구하는 스콜라 사상에 어두움과 그늘진 곳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주의의 정서를 탁월하게 접맥 시킨 사람이다. 또한, 에크하르트는 역사의 전체를 일관하는 은총 신학과 성화 신학의 긴장, 개신교와 가톨릭의 긴장과 갈등을 극복하고 있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가톨릭은 에크하르트를 이단으로 선고함으로써 그의 신비주의 사상 속에 담겨 있는 종합의 가능성을 버렸으며 개신교는 타울러, 수소, 루터로 이어지는 신비주의 계보를 통해 성화 신학보다 은총 신학만을 강조함으로써 분열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에크하르트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의 반쪽의 영성을 극복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8.나오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에크하르트 신비주의의 개요와 설교 그리고 교훈 담화와 단편을 살펴보았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너무나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너무도 심오해서 전체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도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를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다른 종교의 신비주의와 깊은 관련성을 맺고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는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자신의 삶 가운데서 신비체험을 깊이 체험한 것과 이러한 자신의 체험을 신앙적인 사색과 사변(思辨)을 통하여 총체적으로 융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직면한 구체적인 그리스도교 신비체험을 종교의 보편성 영역으로 깊이 심화, 확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신앙과 이성의 종합을 구현하는 신학이 아니라 감정과 이성을 뛰어넘는 신학적 작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2003/11/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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