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의 불가해성
(The Incomprehensibility of God by Thomas Aquinas)
2장
이 장에서는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의 불가해성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토마스는 기본적으로 신은 파악할 수 없다는 신의 불가해성의 기본 전제를 상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의 불가해성을 중심을 전개할 것이다. 토마스에게 비본질적인 앎은 비직관적이고 불가해성이라고 본다. 신은 어떤 범주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대상으로 신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논리이다. 이것은 창조된 지성으로는 신의 본질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추적할 것이다. 토마스에게 이러한 신의 불가해성은 신은 모든 종류의 앎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신의 무한성 때문이다. 신은 어떤 창조물과 비교될 수 없는 초월적인 신이기 때문에 신의 불가해성은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암흑으로서 신, 신의 비본질적인 앎을 통하여 신의 불가해성을 논의할 것이다.
2.1 암흑으로서의 신
이성의 방법으로 신을 알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매우 어려운 과제중 하나이다. 위 디오니시우스가 언급한 것처럼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우리가 신을 알거나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알려지지 않는 신과 연합되어지기 때문에 어둠 안에 남게 된다. 출애굽기 20장 21절에서 모세는 신이 존재하는 것을 알지 못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는 신이 존재하는 어둠에 접근하다”을 표현을 사용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 확실한 무지無知에 의하여 최선으로 신과의 연합되어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무지는 일종의 어둠이고 신은 거기에 거주한다. 또한 신에 대한 불안전한 앎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토마스는 위 디오니시우스를 해석하면서 완전한 앎으로도 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으며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신에 대해서 언급한다. 또한 위 디오니시우스의 격언을 설명하면서도 우리는 무지를 통해서 신을 알 수 있다고 언급한다. 토마스에 의하면 우리가 신의 본질에 대한 무지를 알 때 신을 알 수 있다. 성서 로마서 11장 33절도 신의 길은 연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을 완전하게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정의 방법에 알려진 신에 대한 앎은 인간의 표상과 개념에 파악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에게는 우리의 표상이나 개념들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초자연적인 은총에 의한 통로마저도 현재의 삶에서는 신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은총의 계시를 통해서도 이 세상의 삶에 있어서는 신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위 디오니시우스가 언급한 것처럼 신은 인간에게 ‘신성한 어둠’(Divine Darkness)이다. 이것이 토마스가 말하는 부정 신학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적 앎의 능력으로는 본질적으로 신을 알 수 없다고 하는 인간의 성찰이다. 신을 알 수 없는 이유가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의미이다. 여기서 어둠은 인간에 대한 어둠이지 신에 대한 어둠은 결코 아니다. 비록 신이 존재론적인 질서로 볼 때 그 자체로는 가지적 대상일리지라도 인간의 앎의 차원에서 볼 때는 앎의 능력의 한계에 해당된다. 여기서 따라서 긍정과 부정에 대한 역설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창조물을 통하여 그것에 도달하는 어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에 의하면 신의 초월은 우리의 감각에 의하여 신을 파악 불가능한 앎과 연결한다. 신의 실재성은 우리의 지성을 능가하며 초월한다. 왜냐하면 신적 존재는 지성의 모든 개념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또한 신적 진리는 신이 우리의 정신 보다 더 크기 때문에 우리의 앎을 초월한다. 또한 신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신적 존재는 창조된 모든 것을 넘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인간의 앎은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무지 알 때 일어난다. 이것이 신에 대한 무지의 지이다. 신은 탁월한 흑암에 거주하며 인간이 신적 흑암을 알지 못하는 것은 신의 초월의 눈부신 빛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러한 무지의 지(無知의 智)를 최고의 지혜하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앎의 능력의 한계에서 발생되는 역설이다.
인간의 앎에 대한 의식은 흄과 칸트에게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 이유는 일종의 불가지론(agnoticism)으로서 그들은 인간의 앎의 구조와 그 체계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지를 찾으려고 하지만 거기에서는 부정과 긍정의 역설적 구조를 찾을 수 없다.
2.2. 신에 대한 우리의 비본질적 앎
앞 장에서 언급한 우리가 신의 본질을 알 수 없다고 하는 말에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비본질적이 앎이 무엇인지를 더듬고자 한다. Quiddity(essence)이라는 말은 라틴어 quiddity 에서 영어로 번역한 용어로서 다소 추상적이고 인위적인 요소이다. 어떤 것의 본질은 그것이 무엇인가의 대답으로 주어진 사물의 본질과 동의어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우리의 삶에서 신의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신의 그 존재가 무엇이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을 자주 언급한다. 우리는 신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지만 단지 “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안다.” 라고 하는 역설이 존재한다. 성서에서도 신을 본질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된 곳이 거의 없다. 또한 우리가 보는 신에 대한 앎은 거울에 비친 상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신의 본질에 대한 것은 아니다.(John 1.11) 비록 우리가 신의 존재를 안다고 할지라도 마치 신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적 본질과 동일한 신적 존재의 깊이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앎에 대한 토마스 관점은 무엇인가? 사물의 본질은 존재하는 것의 무엇이다. 그 정의는 사물의 본질을 드러냄으로 어떤 것의 본질을 의미한다. 이것은 명백하게 하는 가지적인 의미(ratio)이다. 본질에 대한 정의는 정확히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 안에 실재에 대한 특정한 본질적 그리고 범주적 의미이다. 따라서 본질적인 앎은 본질적이고 특정하고 한정적인 앎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토마스에게 신의 비본질적 앎은 비직관적이며 비정의적이고 불가해적 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신을 어떤 범주나 분류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정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정의는 범주 안의 그의 대상을 두기 때문이다. 대상은 파악됨으로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지성으로 신을 표현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시각의 언어, 그리고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언어도 신과 연합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적인 직감의 의하여 신을 보는 정신의 눈을 고정함으로 신을 볼 수 없다.
이처럼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리가 신을 붙잡거나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예를 들면 인간의 지성은 사물을 파악할 때(예를 들면 돌, 삼각형) 인간의 앎의 능력을 초과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신적 본질에 적용할 경우는 다르다. 사물의 본질 또는 본성 통한 가지적 형상은 그것을 나타냄으로서 그 사물을 파악한다. 따라서 이것을 우리는 본질을 의미하는 진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신에 대한 이름은 본질적인 앎을 정의하거나 동일화 그리고 이해하는 것도 한정하는 것도 아니다.따라서 비본질적인 앎은 비 정의적이고 비 직감적이고 비표현적이다. 그리고 비가해적이면서 심지어는 비근본적인 앎을 의미한다.
2.2.1. 지성이 가진 신의 불가해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창조된 지성은 신의 본질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의 본질을 보는 것은 영원에 속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자연의 문제 보다는 은총의 문제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적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모든 자연적 능력을 초월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을 넘어서는 은총의 빛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신적 본질은 창조된 지성의 고유하고 가지적인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신의 본질 대한 환상을 가질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 인간도 천사도 가능하지 않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신이 직관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존재와 본질 그리고 무한성 때문이다. “앎의 모든 행위는 존재하는 어떤 사물에 도달한다. 즉 존재에 참여하는 자연이다. 그러나 신은 참여되지 않는 존재 그 자체 행위이다. 따라서 신은 알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창조된 지성의 고유한 대상은 존재와 구별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또한 “존재는 본질을 능가하고 모든 지성의 능력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 안에서 존재는 본질과 다르지 않고 동일하다.” 존속적인 존재 그 자체를 아는 것은 오로지 신적 지성만 고유한 것이다. 존재 자체는 “어떤 창조된 지성에 대한 자연적 능력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가 있는 창조물이 아니라 참여된 존재만 가지고 있다.” 토마스는 여러 곳에서 지적인 환상에 대한 세 가지 매개에 대한 복합적인 논의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는 삶 안에서는 단지 거울로 그리고 개념들을 통하여 신을 알 수밖에 없다. 그 반면에 하늘에서는 은총의 빛 즉 오로지 첫 번째 매개를 통하여 신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창조물의 전체성은 우리에 일종에 거울”이고 우리가 “창조물을 통하여 신에 대한 보이지 않는 사물들을 아는 한에 있어서 거울을 통하여 볼 수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은 것들에 한에 있어서는 우리들로부터 감추어져 있고 예매하게 보일 뿐이다.
신앙을 통하여 얻어진 앎조차도 신에 대한 직관적인 눈을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신적 진리는 감각에 유래된 말들과 이미지에 의해 입혀진 신앙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한 신적인 앎을 표현하고 완전한 신적 앎을 나타내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또한 신앙의 앎은 거울로 그리고 예매하게 발생한다. 신앙은 존재하는 어떤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비록 존재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들었던 어떤 것을 승인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계시에서 조차도 감각에 근거를 둔 정상적인 방식으로 앎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물질적 실재를 통한 것이나 이미지에 의한 계시를 통해서든지 아니면 창조물의 결과에 근거되어진 자연적 이성을 통하여 발생하든지 간에 비물질적 실재들에 대한 앎은 항상 비정의적(nondefinitional)이다.
때때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떤 자연적 본질적 신의 앎을 부인하기 위하여 아담과 천사을 지목한다. 신의 본질적 앎은 신이 알려진 이미지나 유사성과 신 사이의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질 때만 발생한다. 그러나 창조된 지성에 받아들여진 신의 유사성은 단지 유비적 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유사함을 통하여 일어나는 앎은 신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실체가 우유의 유사성을 통하여 알려진다 하더라도 불완전한 앎일 수밖에 없다."
2.2.2 신의 본질의 축복된 비전
토마스는 신의 본질에 대해서는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밖에 알 수 없다. 신의 본질은 이성이나 은총의 방법을 통해서도 알 수 없는 완전한 不知의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다만 한 가지 확신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과 천사에게 축복된 신앙의 때문에 가능하다. 은총에 의하여 하늘에서 신에 대한 본질적이고 지복직관(至福直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는 아래와 같은 밀접하게 상호 연결된 네 가지 논제를 말한다.
1. 신에 대한 자연 본질적 앎을 소유하는 창조적 지성이 하나도 없다.
2. 창조적 지성으로 신을 보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3. 하늘에서 지복직관(至福直觀)을 소유하는 것은 은총으로 가능하다.
4. 이러한 환상은 은총의 빛을 통하여 일어난다.
이러한 네 가지 논제는 상당하게 서로 의존하고 있다. 아퀴나스의 신앙을 진술한 세 번째 논제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두 번째는 세 번째 논제의 결론이다. 첫 번째 논제는 부분적으로 세 번째 논제에서 유래된다. 이것은 토마스 부정신학 뒤에 놓여 있는 신의 신비적 탁월성의 의미로부터 유래된다. 네 번째는 은총을 통하여 발생하는 승인된 지복지관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다. 토마스에게 신에 대한 자연적 비본질적 앎에 관한 논제는 종말론의 상황 안에서 지복지관이 전적으로 신의 자유로운 은총의 문제인 것을 강조한다. 다른 논제에서는 신의 신비적 초월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다. 토마스는 신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지복직관(至福直觀)안에서 “지성은 신적 본질이 신적 본질 그 자체를 보는 것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논증하다.” 비록 우리가 신에 대한 환상을 소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설정했다 할지라도 지복직관(至福止觀)안에서 신앙의 믿음을 뒷받침하기 위한 성서들(마5:8; 요일 3:2)을 인용한다.
2.2.3. 신의 무한성과 유한한 지적 창조물들
토마스 아퀴나스는 현재의 삶에서 인간이 신의 본질을 보는 고유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논쟁을 지원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1) 신은 실체가 없는 반면에 본질에 대한 모든 인간의 직관적 앎은 감각의 정보로부터 물질의 이미지를 추론하는 것을 수반한다.
2) 신은 무한하며 참여되지 못한 존재인 반면에 인간은 존재 안에서 유한한 참여자들이다.
첫 번째 보다 두 번째 근거가 보다 더 근본적이고 예리하다. 왜냐하면 무한한 신은 신적 무한성에 기초하고 있으나 모든 창조물은 고유한 유한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 첫 번째 보다 두 번째가 더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쉽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들에 대하여 고유한 것이고 유한성보다는 차라리 물질, 존재보다는 앎을 다루기 때문이다. 게다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현재의 삶에서 인간이 천사의 본질을 보기 위한 본래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묘사하는 첫 번째 인간 근거로 이용한다. 왜냐하면 역시 천사도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비록 두 번째 근거는 더 기본적이고 신학적으로 풍부하지만 첫 번째를 교육적 이유를 선호한다.
토마스는『신학대전』에서도 신은 창조된 어떤 유사성에 의하여 보여 질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한다. 왜냐하면 존재와 본질이 구별되는 창조물은 존재와 본질이 동일한 신을 결코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창조된 유사성은 실재에 대한 어떤 부분적 측면에 제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한되지 않고 한계가 없는 일자와 신의 초월을 나타낼 수 없다. 그리고 존재에 참여 된 창조된 지성은 존재자체인 신의 본질을 자연적 능력에 의해 결코 볼 수 없다. 신의 무한성은 그 존재로부터 구별되는 본질에 의하여 참여되지 않는다. 이것은 존속적 존재의 행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신의 무한성은 자연적 능력에 의한 창조물이 본질적 통찰로 신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
첫 번째 근거로서 토마스는 신을 본질을 보는 불가능성에 대한 세 가지 이유들을 말한다. 한 가지는 물질적 실재로부터 얻은 이미지를 이용하는 앎의 자연적 방식이다. 또 다른 것은 앎에 대한 어떤 창조된 가지적 원리를 초월하는 신의 무한성에 근거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대이교대전』에서도 이성이 어떤 사물을 파악할 수 있다. 앎 전체의 원리에서 보아도 사물의 실체는 가지적이므로 인간 이성을 초월하지 않는다. 그러나 감각에 해당되지 않은 사물의 앎은 인간의 지성에 의하여 파악될 수 없다. 지성은 사물로 출발하여 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안다. 이것은 신에 대한 진리가 인간 이성에게 개방된 면도 있지만 인간이성의 능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들도 있다.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의 앎이 긍정과 부정의 얽힘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2.3. 신의 근거로서 불가해성
토마스에게 신의 불가해성은 신은 모든 종류의 앎을 항상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토마스는 자주 이런 불가해성을 신의 의지와 지혜의 불가해성을 다루는 성서의 텍스트들을 주석할 때 언급한다. “인간은 신적 판단의 이유를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지혜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의 본질은 인간들에 의하여 완전하게 추적할 수 없다” 인간에게 신에 대한 판단은 파악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적 의지가 훨씬 더 심오하며 불가해성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러한 신적 의지를 측량할 수가 없다. 예수의 신비에 의해 나오는 신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는 “모든 앎과 창조된 지성”을 뛰어넘는다. 또한 우리의 사유로는 파악불가능하다. 즉 신은 파악불가능하고 불가언적이다. 왜냐하면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 즉 모든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이다.(1Tim 6:3) 이러한 토마스의 통찰은 종교적 경외감과 신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심오한 깊이가 있다. 이것은 Hilary of Poitiers' De Trinitate에서 텍스트를 인용을 보면 뚜렷이 드러난다.
믿음으로서 “이런 진리들에 진입하고 정지하며 버틸지어다. 나는 네가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정진하라고 행운을 빌 것이다. 물론 무한한 것을 경건하게 추구하는 사람은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항상 정진을 통해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주제넘게 ‘앎의 총체’를 파악하려 하면서 신적 지혜의 비밀로 자신을 강요하지 말고 신 안에 태어난 아들이 지닌 무궁한 탄생의 비밀에 빠져들지도 말라. 앎의 총체야말로 오히려 ‘파악할 수 없는 것’임을 통찰할 것이다.
이 텍스트 안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의 탁월성 앞에서 느껴진 종교적 경외감에 의하여 알게 된 신의 불가해성은 신의 의지, 지혜, 사랑, 판단, 그리고 신의 섭리의 방법을 역설적으로 싸매고 있다. 신은 어떠한 존재로서도 파악될 수 없다. 그러나 하늘에서 축복된 자(the blessed)의 지성의 봄이 부여하는 대상으로서는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토마스의 의도는 신의 본질적 앎으로부터 신에 대한 파악과 또는 반대로 신의 생각함(incontemplabilia)으로부터 신의 불가해성을 구별한다. 실재로 신에 대한 천상의 본질적 앎은 파악할 수 있는 신의 앎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을 이해하는 것은 단지 보는 것 이상으로 무엇을 요구한다. 신은 그 자신을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측면에 따라서 그 자신을 알기 때문이다.
지성이 신을 이해가기 위하여 두 가지를 요구하다. 하나는 이해할 수 있는 지적인 빛이고 다른 것은 실재를 알기 위하여 갖추어진 알려진 실재에 대한 가지적 유사성이다. 만약 실재가 존재를 넘어선다면 지성은 실재를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실재가 지성이 실재를 아는 가지적 유사성을 초과한다면 지성은 실재의 본질을 보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인간에 대한 가지적 형상이 인간에 대한 이성적 측면이 아니고 오직 감각만 표현된다면 인간의 본질이 보여 지지 않을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실재가 바로 지성적 빛 그 자체를 초과하고 실재가 알려진 지성적 형상이 아니면 본질이 보여 진다고 할지라도 완전하게 보여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의 지적인 빛은 사람들의 이해의 강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지성은 하늘의 축복된 자 안에서 발생한다. 본질이 그것을 아는 가지적 형상과 축복된 행복으로서 연합되었을 때 신을 본질을 본다. 그러나 창조물의 지성의 빛은 신으로부터 받아드려진다고 할지라도 신적 존재에 미치지 못한다. 즉 인간은 신의 본질을 완전하게 볼 수 없다. 따라서 신을 파악하는 능력이 주어진 창조된 지성은 하나도 없다. 여기에서 인간에게 신을 파악하는데 실패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신의 불가해성 때문과 창조물의 유한성 때문이다. 만약 신에 의하여 지관지복의 은총으로 극복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의 불가해성의 엄격한 의미를 설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창조된 지성의 개념이 “신적 본질에 대한 전적인 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은 자신이 알고 있는 만큼 완전하게 알려진 존재에 의하여 파악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명제집』(Sentences)과 『진리론』(De veritate)에서 신의 불가해성, 즉 신의 능력에 대한 초월에 대한 근거로서 발전한다. 토마스에 의하면 알 수 있는 대상이 지성의 능력을 초월하지 못할 때 지성에 의하여 파악될 수 있다. 반대로 가지적 대상이 지성의 능력 보다 더 클 때 지성은 신의 본질을 파악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적 본질의 진리는 창조된 지성의 빛을 넘어선다. 따라서 지성에 의하여 파악될 수 없다. 또한 신적 본질의 능력과 신적 본질의 진리는 모든 창조된 지성의 빛을 넘어선다.
이것은 신에 대한 무지 때문만이 아니다. 신의 앎에 대한 완전한 방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불가해성에 대한 근거는 모든 창조된 지성을 넘어서는 신적 능력의 초월성이다. 이러한 신적 능력의 초월성은『대이교도대전』그리고 후기 저서들에서 신적 존재 자체의 무한성이 되었다. 신적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창조된 지성은 하나도 없다. 그 이유는 무한한 대상에 대한 적절하게 부합하는 유한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모든 창조된 지성은 분명한 종에 의하여 제한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적 존재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적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은총의 빛이 지복직관에 의해 부여받는다면 본질적으로 신은 보여 질 수 있다. 신에 대한 본질적인 앎은 증언에 의한 성서의 기록도 아니고 신적 존재의 충만한 의식의 부족 때문도 아니다. 그것들은 신에 대한 진실한 본질적인 앎을 향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질적인 신에 대한 앎에 대한 토마스의 역설은 독특하다. 유한한 창조물이 어떻게 무한한 신비 그 자체만큼 신비로움으로 남아 있는 신에 대한 무한한 존재를 유한하게 알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의 불가해성에 근거되어진다. 첫째로 토마스는 위 디오니시우스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부정신학의 강도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부정신학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최고의 불가지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신의 불가해성은 역사상 신의 의지와 지혜의 역동적이고 신비적인 기획에 뿌리를 두고 있고 성서적 그리고 초기 교부의 해석과 연관되어 있다. 토마스는 자신의 저서 안에서 신의 불가해성에 대한 관점을 요약한다. 즉 자연적 능력에 의한 창조물(특별하게 인간)은 신의 무와 존재, 신의 본질에 대한 본질적인 파악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 그리고 신적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비록 신에 대한 본질적 앎이 천상에서 신의 은혜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인간에게 신에 대한 포괄적인 앎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심지어 이러한 앎은 신의 은혜를 받는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의 불가해성의에 대한 가장 깊고 근본적 의미는 두 번째 논제에서 진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원함을 붙잡은 것 때문이다.
둘째로 토마스의 부정신학은 신의 초월성과 탁월성의 의미에 근거되어 있다. 신의 불가해성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신의 완전 저 너머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이런 점에서는 토마스는 위 디오니시우스의 제자이다. 더 나아가 신의 불가해성에 대한 의미들을 지지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신적 무한성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는 니사의 그레고리로서 유래하는 전통의 계승자이다. 사실상 신적 무한성은 신이 존속적 존재 그 자체라고 진술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만약 우리가 토마스의 신의 불가해성을 알기를 원한다면 신이 무한함, 탁월함, 그리고 존속적 존재 자체 신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3장에서 다룰 것이다. 2022/9/6 혜윰인문학연구소 /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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