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esse), 유비(analogy), 그리고 부정성(不定性)의 재해석 필요성
오늘날 인간은 다원화된 사회에 살면서 과학이 제공하는 수많은 정보의 혜택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아간다. 과학 기술시대의 인간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사실에 대한 앎은 배격한다. 특히 배금주의와 실증주의 사고방식에 물든 많은 현대인들은 신에 대한 사유를 거부하고 오히려 과학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으며 이러한 과학이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을 걸기도 한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삶의 태도는 근원적으로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망각하는 삶의 태도로 인간 존재의 상실뿐만 아니라 소외된 삶의 문화를 생산해 왔다. 또한 현대사회를 특징짓는 뚜렷한 징표 중의 하나는 ‘욕망의 과잉’이다. 가시성 · 효율성 · 물신성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체계는 질적인 행복을 양적 풍요로 대체하면서 인간을 ‘사물화’의 길로 내몰고 있다. 효율성에 대한 숭배와 물질에 대한 욕망의 우상화는 한 개인의 힘으로 거부하거나 전복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것은 같음의 잣대의 기준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삶’(Life)의 고유한 영역들이 동일성의 잣대에 의해 재단된다. 이러한 비극적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하다. 이런 탈출구를 모색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현대사회를 지배한 욕망이나 우상의 바탕이 된 서양의 형이상학과 신학의 신 담론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인간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앎으로부터 실존적인 불안을 경험되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원초적이고 초월적 힘을 동경하며 신을 숭배하게 된다. 이런 중심에 종교가 있다. 종교는 원초적이고 초월적 힘을 인간과 매개해 준다. 그래서 인간은 확실성을 보장하는 초월적인 힘을 신뢰한다. 인간에게 확실성이 없는 삶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인간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원초적이고 초월적 힘에 참여하므로 안정감을 획득한다. 또한 인간은 자신이 체험했던 힘에 대한 경험을 절대화하고 다른 경험의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안정감을 획득한다. 이러한 절대화의 과정을 통해 종교의 왜곡이 일어난다. 이것이 곧 종교의 우상화이다. 종교 우상화는 인간 자신을 절대화하거나 다른 사람들이나 자연세계를 억압을 정당화한다. 여기서 진리의 왜곡이 일어난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에 대한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결국 왜 종교가 종교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가에 철저한 물음이 제기된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에 대한 물음은 인간에 대한 문제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신에 대함 물음이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신을 믿는가? 신이 존재하다면 왜 이 세상은 변화지 않는가? 우리는 어떻게 신을 표현할 수 있는가? 신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끊임없이 묻는 물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에 해답을 속 시원하게 얻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신 담론이 주로 긍정의 측면에서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담론의 역사가 끊임없이 부정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반성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이 전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은 신 담론의 재해석을 통하여 성찰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에 대한 질문은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경험들도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신 담론도 인간이 상상하고 성찰하고 추론하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언어와 사유는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언어 이전적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무한(Infinite)이라고 하는 단어는 단지 고유한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한하지 않음 (not finite)’ 즉 유한의 부정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여러 가지 한계들과 제약들의 개념과 경험을 통하고 이런 제약들과 한계들이 제거되면 우리의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개념이다. 이런 측면 우리가 신학 작업을 하면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요소가 전통의 언어에 대한 재해석이다. 전통과 언어는 사실적 토대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한다. 전통적인 개념들과 범주들은 현대적 해석을 담지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전통과 언어를 현대의 시각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 신 담론의 문제는 불변성과 확실성에 있다. 근대 이전의 전통적인 신 담론이 여러 측면에서 시대착오적인 요소, 즉 신에 대한 개념의 모호성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의 신 물음에 대한 강력하고 예리한 도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접근하고자 하는 전통적인 신 담론의 특징들은 여전히 일정량 유효하다.
이제 토마스로 되돌아가보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은 고대 기독교 원천들뿐만 아니라 유다와 아랍의 사상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어서 풍요로운 사상이다. 예를 들면 유비적 표현, 부정신학, 신의 이름, 신의 불가해성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우리는 이러한 토마스의 아퀴나스의 요소들이 현대 기독교인 입장에서 볼 때 어떠한 의미로 재해석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신의 거룩함과 초월성은 유다 전통과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었다. 여기에서 신은 무한한 신비이며 신의 초월성에 근거한 불가해성이다. 인간의 유한성이 신을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의 개념이나 상상 등으로 신의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그 어떤 창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신이며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불가해성 한 신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고백 “만일 네가 이해했다면 그분은 이미 신이 아니다”에서처럼 신은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를 드러낸다. 이것은 인간이 신을 앎을 통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교부신학자인 아타나시우스, 바실리우스, 니싸의 고레고리우스, 나지안즈 그레고리우스 역시 이성에 맞서 신의 초월성과 불가해성을 주장한다. 이것은 우리가 신을 알 수 없다는 것이요 종교 앎의 기초가 무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고대나 중세에서도 이름 없는 신과 신성도 표현할 수 없는 분이라는 큰 물줄기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의 관심은 중세의 신 담론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해석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의 관심은 신에 대한 인간적 표현이 일의적이거나 다의적이 아닌 유비적이란 주장, esse에 대한 해석, 유비론의 긍정과 부정적 요소, 언어문제, 부정과 긍정의 신학의 역설적 얽힘 문제이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문제는 신의 불가해성으로 인한 우상파괴이다. 만약 인간이 불가해한 신을 대상화하여 신을 파악할 수 있다면 이것은 신에 대한 우상이고 욕망이다. 필자는 이런 측면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의 불가해성이 개념적이고 본질적 그리고 존재론적 측면의 해석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필자는 이러한 의문을 안고 신 담론에 대한 재해석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접근하고자 한다. 이것이 본 논문의 문제제기이며 본 논문을 이끌어 가는 동력이다. 이 논문의 연구의 목적은 첫째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 중에서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에 나타난 신 담론의 상호 역설적 얽힘과 종교언어로서 토마스에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유비 이론을 통한 우상파괴에 목적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역설”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표면적으로 긍정과 부정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토마스 신의 불가해성에 대한 재해석 과정을 통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장 가깝게 접근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것은 부정과 긍정의 모순을 통하여 상반된 의미만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과 부정을 넘어서는 공속성으로서의 신의 불가해성을 탐구하는데 의미가 있다. 기존의 신 담론은 긍정에 대한 해석만이 유효했을 정도이다. 그래서 기존신학은 참이 긍정신학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살펴보면 전통적인 신 담론이 긍정과 부정이라고 하는 양 측면의 역설적 얽힘으로 공존했음을 주목한다. 기존의 신 담론이 있음의 관점 즉 긍정의 측면만 부각되면서 결국 신 담론이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왜곡은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왜곡을 밝힘으로 신의 불가해성으로 인한 우상타파가 이 논문의 목적이 된다.
토마스에 의하면 “우리는 신에 대해서 그분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그가 무엇이 아니라는 것조차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있는 자일 뿐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분으로서도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은 신을 긍정적으로 ‘있음’으로 언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은 어떤 형이상학적 신론도 신비의 부정에 접촉할 수 없다. 토마스에 의하면 신은 언표 불가능하다. 이러한 근본적 부정성은 다음의 명제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신은 어떤 유(類)로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긍정신학 전통의 입장에서 신 담론을 서술하고 연구하는 것을 지양하고 부정신학과 긍정신학의 역설적 얽힘을 통한 신 담론을 밝힌다. 본 논문에서 필자가 관심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반적인 지식을 전개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다. 다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의 불가해성이 어떻게 공속성의 긍정과 부정이 얽혀있는가에 초점이 있다.
둘째로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이론을 통하여 통상적으로 이해한 유비에 대한 해석을 넘어서는 목적이 있다 이것은 유비가 역설적 방법이라고 하는 전제하에 출발한다. 유비가 단지 긍정신학의 일부분이라고 하는 도식에서 벗어나 긍정과 부정의 역설적 얽혀 있다는 사실과 유비가 우상숭배를 피하는 장치로서 우상타파가 가능한지를 가지고 살펴봄으로 현대 기독교에 문제가 되는 우상숭배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유비는 유한한 인간의 언어와 무한한 신의 언어가 상응할 수 없는 모순논리에서 출발한다. 즉 신의 언어가 상응할 수 없다는 논리에서 출발한다. 유비는 우상숭배적인 일의성을 피하는 장치이며 개념보다는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 즉 유비는 고정된 개념이나 명사가 아니라 유동적인 동사로서 은유적 의미를 내포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마저도 내적 운동의 부정과 긍정의 역설을 가지고 있다. 유비는 상호 잘 얽혀 있는 술어의 그물망이다. 이것은 동일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지닌 의미로서 긍정과 부정의 역설적 얽힘이며 같음과 다름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동일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지닌 의미로서 역설적 얽힘이면 같음과 다름의 함수이다. 여기서 유비는 같음과 다름, 긍정과 부정(초월)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또한 유비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담론에서 신에 이르는 데 있어서 목적이 될 수 없고 수단이다. 마치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본다” 말처럼 유비는 손가락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유비는 신에 접근하는 사다리이며 목적이 될 수 없고 수단일 뿐이다. 이러한 유비는 우상숭배적 일의성과 다의성을 넘어서서 개념보다는 판단에 기초에 하고 있다. 기존의 유비에 대한 연구가 유비이론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필자는 부정신학과 관련해서 탐구함으로 토마스 유비이론의 의도를 드러내는 데 있다. 이것은 유비가 신과 창조물과 인간의 거리두기 이고 긍정의 길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이자 신 담론의 정적인 개념이 아닌 역동적 개념으로 앎의 주체에게 다가온다는 현상학적 시도에 관심을 가짐으로 다양한 개연성을 가지는 데 목적이 있다.
셋째로 존재(esse)재해석 문제이다. 존재의 해석문제에서 존재(esse)를 존재자(ens)로 오해해서 해석하는 밝히는 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더 나아가 존재자체가 무이고 신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의하면 존재자의 모든 형태를 10개의 범주에 사유하고 언표 한다. 그러나 신은 이러한 범주의 체계 속에서 사유되고 판단될 수 없다. 범주에 입각해서 사유하는 것은 존재자이다. 신은 존재자가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도 개념화되는 대상이 아닐뿐더러 대상화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신은 어떤 유(genus)가 아닌 것이다. 존재(esse)는 어떤 범주적 방식으로 다가올 수 없다. 언어의 표현으로도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esse)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존재자체와 관련이 있는지 파악하는 목적이 있다.
넷째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부정신학은 파악할 수 없는 부정성을 너머서 그리고 이 부정성을 통하여 존재자체인 신과 접촉할 수 있고 합일할 수 있다. 여기에서 부정성은 긍정성으로 변화되는 역설이 존재한다. 언표 불가능한 이 신비와 정신이 접촉할 때 신비의 현실을 긍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의 존재 현실태를 파악하는 것과 접촉하는 방법에 대한 구별이 필요하다.『신학대전』에서 논의되는 이 문제는 존재가 신과 연관되어서 사유를 통하여 이중의 방식 속에서 논의가 가능하다. 우선 그것은 존재 자체의 현실성이 존재 현실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으로는 신의 존재를 알 수 없다. 또 다른 방법은 명제의 결합(compositio propositionis)이다. 이 결합은 지성이 술어를 주어와 결부시키는 데서 이루어진다. 다만 우리는 명제의 결합으로만 신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신비로서의 신은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본질 내지 존재자를 넘어서는 피안의 부정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 대한 언어의 표현 가능성을 열러 놓고 있다. 유한한 존재자로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가 보여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유비개념이다. 접촉하는 사유의 방법은 신적 신비 자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신이 인간과 근본적인 유사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접촉하는 사유를 통하여 유한한 창조물을 넘어 말할 수 없는 신비와 만날 수 있다. 이 가능성은 유비를 통해서 이다. 결국 토마스가 이해한 유비는 이해의 기술이 아니라 사유 속에서 신을 붙잡는 것이다. 유비는 오히려 파악과 소유의 모든 힘과 가능성 너머에 있는 충만함의 존재에 초점을 맞춘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연구를 위해 중요한 뼈대를 구성하는 것은 있음과 없음, 앎과 모름, 그리고 삶과 죽음의 역설적 공속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종교가 우상화 되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재해석을 통하여 형이상학의 있음과 앎 그리고 ‘종교언어’의 특성들을 살펴봄으로써 이해를 돕고자 한다. 또한 우상화된 있음과 종교언어가 어떠한 방식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되어야 할지도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성찰의 방법으로는 부정신학과 긍정신학의 상호관계를 부정성 논리를 통하여 역설적 재구성을 모색한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금까지 긍정(있음)에서 배재되었던 부정(없음) 즉 부정성의 원리를 통한 역설적 얽힘을 통하여 현재 기독교가 당면한 우상화 문제 등을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신 담론을 고찰하는데 목적이 있다. 2023/4/20/ 혜윰인문학연구소 /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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