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혜윰인문학▣/종교철학산책

토마스 아퀴나스 존재유비의 행위론

by 뜨르k 2023. 1. 6.
반응형
토마스 아퀴나스 존재유비의 행위론

 

 

4.4 존재유비의 행위론

 

앞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개인적인 실재와 관련을 유지하는 술어의 망으로서 관계적 다의성의 유비의 해석을 다루었다. 이것은 자립적인 개념, 추상적이고 고립적인 개념이상이다. 이 장에서는 판단으로서 유비를 다룬다. 여기서 판단은 관념을 확장하여 모든 술어로 진리를 보여주고 추적하는 판단이다. 따라서 유비는 신과 창조물에 대하여 진정한 판단을 감싸는 관계망 안에서 존속한다. 첫 번째로 우리는 참과 개념 관련 한에 있어서 토마스의 사유 안에서 판단의 본성을 다룰 것이다. 그 다음에 그의 초월적 유비가 어떻게 신과 창조물 사이에 발생하는지를 설명하고 신과 창조물에 대한 일차적 판단의 연속에 의하여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의 은총을 받은 판단에 대해 그의 관점을 논의 할 것이다.

 

햄프스 리텐스(Hampus Lyttens)는 신과 창조물에 적용되어진 유비적 개념은 오직 정도에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혜와 완전히 다른 신의 지혜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토마스가 창조에 가장 낮은 데로 가는 연결에 접속되는 정점에 신을 놓는 신 플라톤의 존재론을 지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에 대한 토마스의 유비적 진술 안에 비슷한 조건으로 파악했다. 이것은 ‘사물’이 더 높은 방법 안에서 신 안에 존재라고 말할 때 이것은 오로지 정도의 차이로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과 창조물 안에 있는 존재 안에서 많은 차이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지만 파악하지는 못한다. 만약 이런 다름의 차이가 강조되면 그 진술은 의미를 잃을 것이다. 따라서 유비는 신과 창조물 사이의 연결을 상정해야 한다. 또한 Jomes Ross는 유비적 용어들의 공통의 의미(res significata)를 방어하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토마스의 전체적인 이론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주장한다. 또한 J. H. Nicolas는 카예타누스의 용어들에 “불완전한 추상” 과 유비적 개념들의 “비례적 일치”를 말한다. 바티스타 몬디(Battista Mondin)은 유비가 불완전하게 추상화된 것 이고 “희미한 직관”의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말하다. 그리고 또한 유비가 불완전하고 유사한 것을 완전하게 나타낸다. 이것을 그는 유비가 본질적으로 유비적 개념의 개념주의적 방식이라고 말한다.

 

에드워드 스킬레벡스 (schillebeeckx)는 스코투스 학파 또는 카예타누스에 의하여 유비에 대한 인식론적 상태의 설명을 반대하는 개념적인 일치를 유도한다. 그러나 초기 스킬레벡스(schillebeeckx)는 유비에 대한 인식론적인 의식을 묘사하기 위하여 “경향적” 언어를 사용하는 첫 번째 사람 중에 하나이다. 이것은 “신에 대한 대상적 관점”을 제공한다. 따라서 그는 신에 대하여 전형적으로 순수 지성에 입각한 가치로 신을 잡으려고 한다. 이것은 신이 투영된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을 잡을 수 없다. 비록 우리가 접근하고 있는 정확한 방향에 신이 발견 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신에 대한 앎의 토대는 카예타누스 개념도 아니고 마레샬의 주관적이 역동성도 아니다. 이것은 지적 체계나 상상 안에 일어나는 존재 내용의 객관적인 역동성 이상이다.

 

윌리암 힐(Willian Hill)은 중도의 길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한편으로는 카예타누스(cajetanian)의 개념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적 상징주의 혹은 내포된 직관주의 안에서 중도이다. 윌리암 힐(Willian Hill)은 어떤 개념적 표상주의 또는 구상주의를 피하기를 원했다. 힐에게 유비 안에 판단의 행위는 신에게 개념 혹은 이성을 비추는 것이고 순수 완전성의 방향 안에서 신을 이해한 것이다. 판단은 “비 개념화된 용어와 무한하게 제거되어진 용어로서 신을 긍정한다.” 또한 윌리암 힐(Willian Hill)은 개념적인 어떤 표상주의를 피하기를 원했다. 힐에 의하면 유비에서 판단의 행위는 신에 대한 의미 ratio 또는 개념을 나타내고 ratio을 보여주는 순수한 완전성의 방향에서 신을 이해한다. 판단은 무한히 제거된 용어와 비 개념화될 수 있는 용어로서 신을 긍정한다. 그러나 판단은 이런 관점에서 개념에 대한 가지적 내용에 의하여 개방되었다. 신성에 대한 모든 인간의 의식은 신의 고유한 개념 없이 그리고 동시에 전적으로 개념의 방법에 의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구상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그렇지만 객관적인, 비형이상학적 그리고 비상징적인 신의 의식을 고려하다.

 

윌리암 힐(Willian Hill) 외에 다른 몇몇 사상가들도 유비의 판단에 대한 본성을 강조하기 위해 적절한 것을 발견했다. 질송은 토마스 안에서의 판단과 유비에 명확하게 관련된 가장 최초의 사람 중에 하나이다. 스코투스의 유비에 대한 관점은 개념적인 반면에 유비에 대한 토미스트 언설은 무엇보다도 유비의 판단의 교리이다. 이것은 사실상 본성의 변화 없이 비례의 판단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때때로 일의적으로, 때때로 다의적으로 그리고 때때로 유비적으로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 Henri Bouillard는 카예타누스와 수아레즈 안에서 유비는 직관적인 한에서 있어서 개념 그 자체의 속성이라고 말한다. 그는 스코투스의 존재개념의 일의성을 대신에 존재 개념의 유비적 속성 둘 다를 말하고 있다. 이것의 후자는 불완전하고 추상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혼란된 일의성의 경향을 가지고 이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유비는 카예타누스(cajetan)의 구절 “유비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판단들 안에서 개념을 사용한다. 여기서 판단은 신에 대한 참된 서술을 형성한다.

 

언어 철학적 전통과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을 의지하는 David Burrell는 의미론적인 표현인 유비를 설명한다. 유비는 판단에 근거되어진 사용법이다. 그리고 철학적 물음은 유비의 만남들과 상호관련이 있다. 유비적 언어는 실재들과 관련하여 응답하고 반영한다. 그리고 이것의 의식의 수준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언어의 살아있는 용어로서 유비는 스코투스 Scotistic 학파 개념주의적인 형식주의 그리고 “일의적 중심”을 탈피하다. 따라서 유비는 실재를 향한 통찰에 의하여 요구된 필요이다. 그리고 언어가 어떻게 판단의 문제인 통찰을 공정하게 보여주기 위해 작업을 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결실이다. 더욱이 David Burrell는 판단에 근거한 의미론적인 용어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의 관점을 파악한다.Colman O’Neill에게 유비는 술어가 보통 언어적 상황에서 새로운 것으로 변형된 형태일 때 발생한다. 따라서 유비는 신의 실재를 옮기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신앙 또는 신학적 판단이다. 이것은 토마스가 “유비적 개념”을 말하기 위해서 합리주의로 이끄는 “잘못된 오해”라고 말한다.  그래도 아직 판단은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신학적 논리의 역설을 말해야 한다. 판단은 “비록 제한된 개념에 의한다 할지라도 초월을 긍정한다.” 그러므로 모든 신학적 판단 안에서 개념들은 신을 향한다. 그리고 사유는 신으로 향하도록 한다.

 

결론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유비는 관계된 다의성에 대한 개별적인 실재적 관계를 유지하는 술어의 관계 망이다. 이것은 자족적인 개념, 분리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상이다. 그에게 모든 술어는 진리를 보여주고 찾는 하나의 판단이다. 따라서 유비는 신과 창조물에 대한 파악들 또는 참의 판단들을 싸매는 연결망으로 존속한다.

 

4.4.1 판단과 진리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토마스 아퀴나스의 판단의 인식론은 다양한 시각을 다룰 수 있는 풍부한 주제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판단, 진리, 개념의 사이의 관계로 한정할 것이다. 판단의 근본적인 지시는 법정소송에서 말하는 판단의 결정이지만 이 용어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결정을 의미하는 곳까지 확장된다. Benoit Garceau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판단의 중요한 세 가지 중요한 확장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보나벤투라 (Bonaventura)의 해석 에서 받은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확신을 가지고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판단은 적절한 대상에 대한 어떤 인식적 능력의 파악을 의미하는데 사용된다. 여기서 능력은 동물들 그리고 인간들, 또는 지성의 직감에 따른 능력, 모든 감각에 대한 공통의 지적인 장소 등의 외부의 감각들 중의 하나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초기저작에서 토마스는 진리, 실재적 존재, 그리고 합성과 분할에 대한 정신적 행위를 결합한다. 그러나 사유와 사물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진리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의미 안에서 아직 판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진리는 본질보다 사물의 존재에 기초된다. 진리의 본성과 일치되는 대응의 관계는 그것에 대한 확실한 동화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 같이 사물의 존재의 지적 이해의 작용 안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진리의 본성은 존재와 사물에 대한 존재의 비례된 인식적 능력의 파악 안에서 구성된다. 그리고 사물의 존재 안에서, 즉 두 사물들 안에서 구성된다. 토마스에 의하면 진리는 존재에 근거되어진다. 정신은 오로지 다양한 부정적 또는 긍정적 명제를 형성함으로써 존재를 안다. 그는 행위를 파악하는 합성존재와 정신의 구성하는 행위 사이 동형이성(isomorphism) 또는 병행론(parallelism)을 제안하고 있다. 그의 후기 저작들은 여전히 정신 안에서의 구성과 실재에서의 구성 사이의 병행론(parallelism)을 언급한다. 반면에 다른 텍스트에서 그는 사유와 실재 사이에 유사로서 그리고 관계성의 인식으로서 진리를 설명한다. 그리고 정신의 진정시키는 행위 안에서 진리를 고려한다. 이것은 행위와 실재 사이에 이종동형 때문이 아니고 행위는 정신에 대해 고유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정신 안에서만 발생한다.여기서 판단은 지성에 알맞은 행위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판단은 영원한 실재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신학대전』에서 토마스는 “지성과 실재 사이의 유사”로서 진리를 정의한다. 그리고 진리를 아는 것은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명제의 구성을 통하여 그 유사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의 능력이나 본질에 대한 지성의 간단한 이해로도 유사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감각 또는 지성의 파악 그리고 감지되거나 이해된 실재 사이의 관계(comparatio)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판단에서 발생하는 명제에 대한 긍정적인 합성과 부정적인 분할은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진리에 일치하는 동시주장이다. 더욱이 판단에서 지성은 두 행위를 소유하고 있다. 참을 찬성하는 긍정과 거짓으로부터 반대하는 부정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거짓으로부터 반대, 또는 참에 대한 찬성하는 명제적 분할과 합성으로서 상(reflection)에 근거되어 있는 판단과 동일시하는 지성의 두 번째 작용으로 여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on interpretation(1270-71)에 대한 토마스의 후기주석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많은 주제들을 통합하여 말한다. 참과 거짓은 하나의 단순한 개념 또는 비교에 의해 명제를 구성하는 한에 있어서 오로지 지성 안에서 발견된다. 참 또는 거짓을 만드는 것은 동사들과 명사들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 안에서 발생된다. 왜냐하면 “명확한 진술은 사물이 존재 혹은 비존재 관련된 것과 같이 참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지성은 자신의 상태가 실재 안에서 사물과 일치하든 아니하든 간에 상관없이 알 수 있기 때문에 홀로 참일 수 있다. 판단에 대한 앎과 참의 주장은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문법을 통하여 하나의 개념을 또 다른 개념에 비교하는 부정적인 또는 긍정적인 진술을 만드는 정신적 행위에 의한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부정 또는 분할 그리고 긍정 또는 합성이 존재와 비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성의 판단은 표현을 통하여 존재 또는 비존재가 첨가되어짐이 없으면 참 또는 거짓이 없다. 토마스의 초기 명제집에서 토마스에 의하면 존재(esse)하는 것은 세 가지 사물들을 의미한다. 정의를 나타내는 사물의 본질 혹은 속성이다. 어떤 본질의 중요한 행위, 즉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는 존재들의 존재이다. 명제 안에서 구성과 분할에 대한 진리의 마지막 의미는 합성하고 분할하는 지성 안에서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본질의 행위인 사물의 존재에 근거되어진다. 유한한 동사적 문법 “있다(is)”는 존재의 행위를 의미하는 결과로서 합성을 나타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대한 토마스 주석에 따르면 일반적 규칙으로서 대부분 명제들의 동사적 문법은 분할과 합성의 방법에 의하여 명제의 참과 참다운 존재에 대한 실재 둘 다를 말한다.

 

4.4.2 개념너머 판단

토마스 아퀴나스는 판단이 어떻게 긍정적 또는 부정적 명제로 만들어지고 주장되는지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정신의 두 번째 작용은 문법에 의하여 정신적 그리고 논리적 통합으로 결합되거나 비교된다. 문법에 의하면 단순한 개념들은 이해할 수 있는 추상에 대한 첫 번째 작용으로부터 물어진다. 또한 불가분의 이해로서 알려진 정신의 첫 번째 작용은 그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서 사물의 간단한 개념을 만든다. 그리고 두 번째 작용은 이러한 종류의 개념을 합성하거나 분할한다.그래서 단순한 앎은 합성의 앎을 선행한다. 첫 번째 작용은 두 번째 작용을 위하여 필수적이다. 그 이유는 합성과 분할은 파악된 사물들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성의 첫 번째 작용은 인간과 동물의 본질을 파악할 때 개별적인 두 실체들로서 단순한 개념들을 둘로 분리함으로 인하여 성공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 지성이 합성과 분할의 단순한 개념들로부터 형성될 때 동시에 주어와 술어를 이해한다. 토마스는 판단과 비교하는 간단한 문제로서 긍정적 또는 부정적 명제의 형성을 묘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판단과 개념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림을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다. 왜냐하면 토마스는 정신의 두 번째 작용에 대한 논의에서 표현된 것과 달리 다른 관점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2.4.3 판단으로서의 유비

토마스의 신학적 유비는 신과 창조물에 대한 참된 판단에서 발생하고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절에서는 토마스에게서 유비의 판단적 본성에 대한 논지가 어떻게 입증될 수 있는가를 논의할 것이다. 토마스는 유비를 일의성과 다의성 사이의 의미로서 묘사한다. 그는 유비의 논의에서 말하기를 참된 신학적 술어는 아마 항상 일의성 또는 다의성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대안의 길은 유비의 서술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따라서 제거의 과정에 의하여 결정된 술어는 오직 유비의 방법에 의해서만이 신에 대하여 말해진다. 우선, 그는 신과 창조물에 대하여 일의적 술어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기존에 신에 대한 앎의 진리들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는 일의적 술어에 대한 보편적 조건을 각각 서술한다. 따라서 이 조건들은 신과 창조물에게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는 반대로 일의적 술어에 대한 장애를 규정한다. 그리고 술어가 신과 창조물에 대해 말해질 때 어떻게 이러한 장애를 얻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일의성의 거부에 대한 다섯 가지 중요한 이유를 제공한다. 첫째로 일의적 이름들은 동일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창조물에 대한 정의이지 신에 대해 말하는 정의가 아니다. 따라서 신과 창조물에 대하여 말하는 술어는 일의적이 될 수가 없다. 창조물의 정의와 신적인 정의들은 동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적 정의에 대한 앎에 의해 신을 파악하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불가해성은 신에 대한 정의를 불가능하게 하다. 그리고 일의적 서술은 그것에 기초되어 있다. 둘째로 비록 창조물 그리고 신적 서술이 동일한 정의를 소유한다 할지라도 동일한 형태가 존재의 동일한 양식에 따라서 받아 들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일의적 서술에 대한 주장에 대한 근거는 아직 없다. 왜냐하면 신과 창조물은 존재의 동일한 방식에 따라서 무(無)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존재하는 집과 예술가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집은 존재의 다른 차원의 집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과 창조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이 동일한 형태를 공유한다 할지라도 존재의 동일한 수준에 따라서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창조물의 경우도 아니며 신적 존재 그 자체도 아닌 신 안에 무(無)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집은 물질적으로 집이 실재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이고 비물질적으로 건축업자의 정신에 존재하기 때문에 일의적으로 서술될 수 없다. 따라서 선도 신과 창조물에 대하여 일의적으로 서술될 수 없다. 둘의 경우 안에 있는 동일한 의미를 가졌다 할지라도 이것은 신 안에 단순하게 그리고 창조물 안에서는 다양하게 그리고 다양한 방법들 안에 아직 존재한다. 왜냐하면 창조물 안에 다양하고 결핍한 방식 안에 존재할지라도 신 안에서는 완전하게 그리고 일치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두 번째 이유에 대한 논쟁에서 명칭의 의미가 신과 창조물이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단순성, 완전성, 파악불가능성에 대한 동일성은 그 이름에 대한 일의적 술어를 금지한다. 無무는 신과 창조물에 대하여 일의적으로 서술되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적 술어 안에서 공통의 의미는 주체들 사이에 동일하게 공유되기 때문이다.

 

어떤 결과가 원인의 종에 이른다면 그 결과가 동일한 존재 방식에 따라 동일한 종적 형상을 취하지 않는 한 일의적 서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그러나 나머지 사물들이 온전히 동일한 사물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동일한 존재 방식에 따라 성취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데서 밝혀지듯이, 신 안에는 신적 존재 그 자체가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사물에는 이런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신과 다른 사물에 대해 일의적으로 서술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의성으로 두 사람은 인간성을 공유하기 때문에 본질과 존재는 존재의 행위와 같다. 그러나 신 안에서는 다르다. 존재의 행위는 본성이고 이름에 의한 의미된 형상은 신적 존재 그 자체와 동일하다. 따라서 무(無)는 신과 창조물에 대하여 일의적으로 말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신에 대하여 말해지는 어떤 완전성은 창조물에 결코 속할 수 없는 신적 존재 행위를 암시한다.

 

네 번째 이유는 신은 본성과 특성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진리 안에 근거하고 있다. 일의적 서술들은 서술되는 주체에 참여함으로써 속한다. 그러나 무(無)는 참여에 의하여 신에 대하여 말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사물 안에 참여는 부분적 방식이며 신은 모든 완전성을 가지는 동시에 본질적으로 존재한다. 다섯 번째 이유는 신은 일의적 원인이 아닌 진리로부터 유래한다. 왜냐하면 원인에 대해 형상과 본성이 동일하지 않는 결과는 그 형상에 대하여 일의적 서술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에 의하여 원인되어진 형상들은 신적 능력과 동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창조물은 “신이 단순하고 보편적으로 발견된 분할된 그리고 부분적 방식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일의적 술어는 유한한 창조물이 무한한 신과 동일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토마스에 의하면 무無는 신과 창조물에 대하여 일의적으로 서술될 수 있다. 신에 관한 확실한 진리들에 대한 우리들의 자각은 우리가 신에 관한 술어에 대한 비 일의적 특징을 깨닫기를 요구한다.

 

두 번째 움직임으로서 토마스는 무(無)가 아마 순수한 다의성에 의하여 각각 신과 창조물에 대하여 말해질 수 있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두 가지 기본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왜냐하면 만약 신적 이름들의 술어가 다의성을 포함한다면 신에 대한 앎은 파괴될 것이다. 신과 창조물 사이의 유사함과 질서는 신적 이름들에 대한 다의적 서술은 불가능하다. 토마스는 궁극적으로 다의성에 대한 반대를 근거지로 삼는다. 이전에 알려진 진리들 : 창조물들은 신에 대한 어떤 유사함을 가지다. 신은 본질을 통하여 창조물과 유사하게 되는 창조물들을 안다. 신의 앎에 대한 빈약한 사실은 순수한 다의성의 가능성을 막는다. 반면에 신의 초월에 대한 특별한 진리들은 일의성의 가능성을 거부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자기성찰과 칸트의 비평주의로 태어난 현대 사유에 대한 논점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첫째로 일의성과 다의성에 대한 무의식적으로 인식론적인 질문을 한다. 그 다음에 신학에 대한 존재론적인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토마스는 현대철학 시대 보다 훨씬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존재론 위에 인식론, 존재론 위에 앎의 근거에 전혀 문제가 없음을 보았다. 그는 그 자신의 체계 안에 미 증명 사항을 사실로 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신학의 존재론적인 진리들을 확립하는 과제에 대한 서론으로 인식론을 공식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신에 관하여 이미 알고 있는 진리들에 대한 영향의 반영으로 신적 술어에 대한 인식론과 의미론의 진행이 자유로웠다. 끝으로 토마스는 만약 신에 관해 기존에 알고 있는 진리들이 신적 술어들과 관련하여 일의성 또는 다의성을 지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제거의 과정의 유비를 통한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유비는 신과 창조물의 관계를 암시하다. 우리는 첫 번째 기원에 관해 신과 사물을 비교하고 완전성들의 이름들은 신에게 돌리다. 이런 공통성의 중간 형태는 순수 다의성인 것과 단순 일의성인 것 사이에 있다. 유비적으로 말해지는 것은 일의적 것처럼 하나의 개념(이유, ratio)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의적인 것들과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수로 말해지는 명칭은 하나에 대한 다양한 비례들을 표시한다. 예를 들면 병에 대해 발해지는 ‘건강한 것’이란 명칭은 동물의 건강의 표징을 표시하고 의약에 말해지는 ‘건강한 것’이란 명칭은 동물의 건강의 원인을 표시한다.

 

유비는 다의성의 다양한 의미의 다양성과 일의성의 고유한 의미에 대한 동일성을 피하기 때문에 일의성과 다의성 사이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의성 없이 유사함 그리고 다의성 없이 다름이 창조물과 신 사이에 신학에 대한 판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유비는 두 가지 중요한 추정들에 대응할 수 있는 오직 인식론적인 설명으로 밝혀진다. 왜냐하면 다의성은 신에 대한 앎이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을 해명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의 초월성을 무시한 일의성은 신으로서 신의 앎에 대한 요구를 인정하지 않는다.

 

2.4.4. 신앙에 대한 은총을 입은 판단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는 신에 대한 판단에서 유래한다. 왜냐하면 주로 신앙이나 이성에 뿌리를 둔 판단이 어떤 판단인지를 묻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에 대한 은총을 입은 판단으로서 신앙의 관점을 말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토마스에게 신앙에 대한 신학적 덕목의 목표 또는 대상은 진리로 충만한 신에 대한 신비로 인하여 접촉되는 신이다. 토마스의 『진리에 관한 정규 토론집』에서 신앙에 대한 중요한 목표와 신앙을 위한 중요한 증거로서 신을 확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 진리는 “원칙적으로 그 자체에 관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진리와 증언은 신 자신인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은 신 스스로 증언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지시성은 불안이 없다. 왜냐하면 신의 증언은 참을 선포하는데 실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신은 단순한 반면에 신앙을 믿는 사람의 행위는 복잡한 판단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정신은 항상 실재를 알기 위하여 명제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신앙조차도 복잡한 명제를 형성함으로 신적 진리를 승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대한 판단은 종말 이상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를 즉 신비적 실재와 신의 진리를 목표로 한다.

 

신앙의 판단 안에서 의지의 특별한 역할은 “동의로 사유” 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의 정의에 대한 토마스의 해석에서 분명하게 보여진다. 이러한 정의는 인간 지성에 대한 모든 다른 행위들부터 믿음 또는 신앙의 행위를 신이 구별하는 하는 것을 허용한다. 신앙의 판단에 있어서 의지의 특별한 역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인 “동의로 사유”로서 아우구스티누스 신앙의 정의에 대한 토마스의 해석을 볼 때 분명해진다.『명제집』에서 환상, 과학적 앎, 의견, 의심 그리고 무지로부터 동의와 사유로서 믿음을 구분한다. 환상은 지성이 어떤 문제에 대한 첫 번째 원리들을 보고 이해할 때 즉시 일어난다. 따라서 이것은 “사유 없이 동의”하기이다. 과학적 앎은 지성이 다양한 결론을 이해된 원리로서의 분석과 추론의 과정에 의하여 확신을 획득할 때 즉시 발생한다. 따라서 이것은 “동의 전에 사유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성이 해결에 의한 이해를 이끌기” 때문이다. 의견은 “완전한 동의 없이 사유”이다. 그리고 무지는 사유도 없고 동의도 없다. 그러나 믿음은 동의로서 사유이다. 왜냐하면 비록 문제의 이성이 인간의 지성의 연약함 때문에 신을 보고 또는 이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진리를 고수하는 지성이 판단을 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은 신에 대한 동의에 대한 확신으로 판단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존재 없이 그리고 직접적으로 신의 깊이를 응시할 수 있다. 또는 다른 알려진 원리들로부터 직감적으로 신에 대한 신비를 추론할 수 있다.

 

또한 신앙은 내적 증언이 아니고 외적 것으로 의지가 지성을 승인하도록 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동의로서 사유”이다. 왜냐하면 정신은 진리에 대한 내적 필요성을 보아왔던 것을 통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사유이고 동시에 동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는 동의로 이어지고 동의는 생각을 진정시킨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사유와 동의는 동일한 토대에 서있다. 왜냐하면 동의는 생각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에 기인한다.신의 사람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숙고하려 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그의 자신의 본성의 부분으로서 사유의 의문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토마스에게 더욱이 신앙은 내적 그리고 외적 둘 다를 포괄하는 신적 은총의 선물이다. 외부의 요소들은 신앙에 대한 외적 초대와 신앙의 설교이다. 내부의 요소들은 믿음에 대한 신적 본능 또는 신성화된 은총 등 내적인 빛으로서 다양하게 묘사된다. 내적 그리고 외적 요소들은 신앙의 행위를 가져오는데 서로 협력한다. 외적 요소들은 내적 은총에게 형태와 내용을 준다. 외적 요소들은 신앙의 행위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돕는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에 대한 내적은총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신앙의 동의에 대한 중요한 행위는 은총을 통하여 은밀히 움직이는 신으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에 반대하여 토마스는 신앙은 항상 신의 내적 은총의 산출이었다는 것을 유지한다. 그러나 토마스의 후기 저작에서는 신앙에 대한 내적 은총은 신성한 은총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신이 영혼을 움직인다. 신앙에 대한 내적 은총은 그것을 준비하는 신적 본능 또는 실재의 은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유비이론은 직접적으로 신 담론 (God-talk)의 표현을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신 담론에서 유비이론의 비판적 부정이 신의 모형과 개념에 엄격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우리가 신적 술어를 이용하는 이름들은 창조물에 사용되어지는 한에 있어서 단지 우리에게 알려진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런 주장은 즉시 아리송한 일의성의 망령을 떠오르게 한다. 만약 그 의미들이 본래적으로 창조물이면 따라서 우리가 창조물로부터 얻은 신이 서술될 때 언제든지 신에 창조물의 어떤 것을 단순하게 말할 수 없지 않는가? 신적 이름들이 신에 대하여 서술되어질 때 실재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신의 초월성과 유일성을 흐릿하게 만드는 일의성과 함께 다시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토마스의 길은 그 동안 지속적으로 일의성들을 초월하는 개념들을 생산하고 사용하여 판단으로 인식한다. 토마스는 이런 판단에 대하여 자신의 저서에서 명확하고 자세하게 논의 하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토마스 신학의 분명한 강조점은 신의 실재를 나타낼 수 없는 창조물에서 나온 신적 이름들을 주는 이미 완전하게 확립된 개념들에 대한 합성으로 판단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신학에 대한 실재적인 실천과 암시는 판단의 사유 안에서 함축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초월적 유비는 개념들을 초월하는 판단들의 문제이다. 여기서 광범위하게 이해된 개념들은 판단의 열매가 된다. 또한 토마스에 의하면 신학적 판단들 안에서 초월적 유비의 근거로서 두 가지 증거들을 제시한다. 유비로서 신에 대한 이름과 우리의 앎에 대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다른 가능성들은-일의성과 다의성-우리가 신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는 진리들을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마스는 판단의 이해와 본질주의자의 이해를 구별한다.

 

만약 우리가 개념을 광범위가 이해한다면 신적인 이름들은 창조물의 의미들을 초월하는 방법들 안에서 상상되어 질수 있다. 그러나 신에 대한 판단은 현장에 존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적 유비는 신에 관하여 만드는 판단에 존속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것을 구성하는 개념들을 초월하는 판단이다. 유비의 기본 단위는 완전한 진술이다. 또한 행위 안에 있는 유비는 자신의 판단 안에 발생한다. 반면에 유비에 대한 원칙은 본래적 신학적 판단들에 대한 반영을 볼 때 확립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연성을 분석할 때 확립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