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인문학여행 이야기 5 - 오사카: 문명과 문화 편집증 - 오사카성(Osaka Castle, 大阪城),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Universal Studios Japan), 오사카 역사박물관, 츠텐카쿠 히타치타워
여행 일정에서 처음으로 도착한 도시는 오사카이다. 오사카로 가면 처음으로 맞이하는 곳이 간사이 공항이다. 말 그대로 간사이공항은 간사이 지방의 대표적인 국제공항이다. 그리고 오사카, 교토, 고베, 나라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공항이기도 하다. 이 공항은 바다를 매립하여 조성한 인공섬 공항답게 공항 가는 길이 바다를 드라이브하는 느낌이다. 공항에서 오사카 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공항 리무진을 이용하는 것 외에도 난카이 전철이나 JR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필자는 오사카 중심부인 난바로 갈 때 가장 빠르고 편하게 이용 것으로 알려진 난카이 전철을 이용하였다. 이 전철은 세 종류가 있다. 가장 많이 사람이 이용하는 공항급행과 지정 좌석이 있는 특급열차 난카이 라피토 베타 등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난바까지 50분 정도 소요되지만 후자는 30분도 정도 밖에 안 걸린다. 물론 요금이 그 만큼 비싸다.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간사이 쓰루패스를 소지하면 편리하다. 간사이 쓰루 패스는 JR을 제외한 간사이 전 지역을 지하철, 전철, 버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패스로서 간사이 주요 관관지인 오사카, 교토, 고베, 나라 등을 쉽게 여행할 수 있고 특정지역 관광지에서는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옛날부터 오사카는 바다와 가깝기 때문에 해상 교통의 중심지였다. 고대에는 일본 텐노(천황, 天皇)가 이곳에 궁을 지었다고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고대 수도로서 역할을 했던 나라나 교토는 달리 오사카는 일본 전국의 물류를 이동시키고 거래하는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상업이 발전하면서 오사카인의 특유의 기질인 실리적이고 적극적인 성향이 생성되었다. 상업이 발달하고 거대한 부를 거머쥔 사람들이 생기면서 오사카는 말 그대로 일본 경제의 중심지로 발전하였고 현재 오사카는 일본 2의 수도로 거론될 만큼 성장하였다.
오사카는 경제, 물류 중심지로서 관광객들에게도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 이유는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고 간토지방과 다르게 간사이지방의 독특한 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해 여행한다면 오사카를 추천하고 싶다. 더욱이 각종 쇼핑몰이 밀집해 있어서 쇼핑을 원하는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여기에서는 오사카 주유패스만 소지한다면 더할 나이 없이 편리하다. 이 패스는 무제한으로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약 20곳 이상의 주요 관광지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여행 경비를 절약할 수 있다. 다만 이용 기간의 유효기간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오사카, 나라, 고베, 교토 여행 때는 한 가지 팁을 드리면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흥망성쇠를 사전에 알고 간다면 더 흥미로운 여행이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오사카성으로 부터 여행을 시작해 보자.
권력의 왕국: 오사카성(Osaka Castle, 大阪城)
일본이라는 나라는 섬도 많고 성(城)도 많은 나라이다. 봉건제의 나라답게 각 영지에 다이묘(大名)라는 영주가 살고 영주는 대부분 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성들의 특징은 주로 적이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해자를 두르고 돌로 성벽을 높이 쌓아 2중, 3중으로 방어막을 쳤다. 성의 제일 높은 곳에서 성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잘 보이도록 중심이 천수각인데 오사카 성처럼 적과 전쟁을 할 때 다이묘가 적의 동태를 살피고 명령을 하달하기 쉽도록 한 것이다. 문제는 '성(城)'이라는 같은 글자를 사용하고 있지만 일본의 성과 우리의 성은 조금 다르다. 보통 우리나라의 성은 마을과 도시 전체를 방어하기 위한 성이다. 하지만 일본은 다이묘를 중심으로 집단의 권력을 방어하기 위한 성이다. 일종의 권력의 왕국이다. 그 이유는 일본과 우리나라가 통치의 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조선과 같은 중앙집권제도의 국가에서는 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이 모두 하나가 되어 국토 전체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봉건제인 일본은 권력의 중심이 성이다. 성을 지키는 것이 권력을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주위 다른 다이묘(영주)를 경계하고 경쟁해야만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여 관백(關白)이 될 때까지도 다이묘들은 서로를 침략하며 상대 다이묘를 죽이는 것이 목표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다이묘를 죽이면 아무런 저항 없이 영지는 승리한 다이묘의 차지가 되는 것이다. 다른 다이묘의 권력이 손이귀에 들어오는 것이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세금을 내야할 다이묘만 바뀌었을 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러면 여기서 다이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살펴보자. 11세기 이후 일본에서 국토가 분할될 때 개인 사유지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우두머리들을 다이묘라고 불렀다. 일종에 지방 토호세력이다. 14-15세기에는 슈고 다이묘가 등장하고 쇼군의 부하로 지방 장관에 임명되어 법률적인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다. 15세기 후반의 센고쿠 다이묘들은 사유지를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벌이며 다이묘 등이 통합되어 갔다. 그뒤 노부나가나 히데요시는 다이묘들을 정복하려 했고 드디어 1603년에 이에야스가 일본을 하나로 통일했다.
흥미로운 것은 임진왜란 때 일본왜군 선봉장이 조선 왕 선조를 죽이기 위해 바로 20일만에 한양으로만 내달렸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통 영토를 침입할 때 차례로 점령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그것도 두 개의 다른 군대가 서로 경쟁을 하면서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은 모두 서로 다른 다이묘의 군대들이었다. 서로 다른 문장을 그린 깃발과 전투복을 입고 자기의 주군과 영주의 말만 따랐다. 이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경쟁했으며 서로를 속이기까지 했다. 전쟁마저도 철저하게 다이묘 중심으로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왕을 죽이기 위해 단시간에 한양으로 진격한 왜군은 도성 안에 선조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완전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상황들이 펼쳐진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각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공격할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습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재빨리 도성을 벗어난 선조의 선택은 물론 자기가 살려고 피신했다고 할지라도 '신의 한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두 나라 성의 역할과 문화와 제도의 다름은 사유의 차이로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오사카성으로 가는 길은 JR니시니혼 오사카 환상선의 오사카성 공원역(大阪城公園)이나 지하철 츄오선 타니마치 4쵸메역(谷町四丁目), 모리노미야역(森ノ宮), 타니마치선 텐마바시역(天満橋), 나가호리츠루미료쿠치선 오사카 비즈니스파크역이 근처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내려서 걸어가면 된다. 보통 천수각 까지는 내리는 지점에 따라 다르지만 약 600미터 이상 떨어져 있어 산책하는 마음으로 가야한다. 오사카성 전체를 들려보지 않고 바로 천수각 만을 보기를 원한다며 오사카 비즈니스파크 역으로 가면 훨씬 가깝다. 특히 봄에는 주변에 벚꽃 나무가 많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흥미의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오사카성은 항상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또한 오사카성의 특이한 점은 일본이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라 그래서인지 무너지지 않게 돌을 쌓는 기술이 독보적이다. 해자와 맞닿은 석축의 모양을 보면 석축의 기울기가 평범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돌담을 쌓을 때 직각으로 쌓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해자의 석축을 자세히 살펴보면 경사면이 아니라 살짝 곡선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된 형태이다. 또한 일본의 성은 석축이 2중, 3중으로 되어 있어서 철통방어벽이라 성을 쌓는 기술이 정말 남다르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성을 쌓는 기술과는 무색하게도 성들은 자주 파괴되었다. 당시 성의 석축은 석조로 되어있었지만 다이묘가 머무르는 천수각과 모든 전각들은 목조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오사카성도 전쟁 중에는 화재로 불타고 심지어는 낙뢰가 떨어져 불타기도 했다. 그래서 무너지고 다시 쌓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처음 오사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3년에 수운이 편리한 오사카에 천하 쟁탈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이런 원대한 꿈과 포부가 담긴 성은 겨우 30년이 지난 1615년에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모두 불타 버렸다. 전쟁에서 패배한 히데요시는 승자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성을 넘겨주고 말았다. 히데타다는 히데요시보다 훨씬 호화로운 성을 건축한다. 그러나 그 성 역시 1665년 벼락을 맞아 소실되고 말았다.
파괴된 모습으로 있던 오사카성은 쇼와(昭和)천황이 즉위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천수각 복원사업을 시작했지만 1931년 쇼와 6년에야 천수각을 복원할 수 있었다. 바로 이때 천수각 복원에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했던 것이다. 일본 내 철근콘크리트 복원 제1호였다고 한다. 그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산업의 중심지였던 오사카는 집중 폭격의 표적이 되었고 포탄의 일종인 소이탄(燒夷彈, incendiary bomb)은 오사카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이때 콘크리트로 된 천수각은 물론 무너지진 않았으나 조금 훼손이 되었고 주변의 부속 건물들도 많이 손상됐다고 한다. 이때부터 일본 천수각의 보수는 콘크리트로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콘크리트 천수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천수각은 겉모습만 보면 멀쩡하게 보이지만 내부로 들아 가보면 완전히 다른 구조로 되어 있어 실망스럽기 까지 하다. 그냥 평범한 현대식 건물이고 엘리베이터 까지 설치되어 있다. 모든 관광객이 순로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천수각의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오사카 시내의 전망을 구경하고 한 층씩 내려오면서 관람하도록 되어있다. 순간 오사카성이 중세 유럽의 성을 모방한 모조품처럼 보였다.
란도세루, 이이도코토리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
또한 일본인들은 전통을 고수하기로 유명하다. 고지식할 정도이다. 몇 백 년씩 된 노포가 전통적인 방법으로 고집스럽게 물건을 만들어 파는 것은 흔한 일이다. 지금도 일본 초등학생들은 100년이 넘은 전통을 지키며 '란도세루'라는 책가방을 메고 다닌다. 이런 전통을 유지하고 지키려는 일본인의 습성은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급하게 변해도 미련해 보일 정도로 꿋꿋하게 원칙을 고수하며전통을 유지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이 있다. 그렇게 보수적인 일본인이 전통적 방법을 무시하고 전국의 거의 모든 성을 콘크리트로 복원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 또한 일본인들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1941년 황순원 소설 <별>에서도 "란도세루"라는 가방이 등장한다. "책상 앞으로 가 '란도셀 ' 속에서 산술책을 꺼내다가 그 속에 인형을 발견하고 주춤 손을 거두었다. 누이가 비단 색헝겊을 모아 만들어 준, 낭자를 튼 예쁜 각시 인형이었다. 그리고 아이가 언제나 '란도셀' 속에 넣어 다니는 인형이었다. 과목은 요일에 따라 바뀌었으나 항상 '란도셀' 속에 이 인형만은 변함없이 들어 있었다. " 이 처럼 "란도세루"은 일제 세대에 한국에도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은 새로운 문화나 조류가 들어오면 거기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백제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다가 어느 순간 백제를 배척하고 중국과 직거래를 트더니 중세 이후에는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정치적으로는 쇄국을 지향했지만 문명적으로는 정반대였다. 다시 말해서 쉽게 이익을 좇아 쉽게 거래대상을 바꾸는 일종에 장사꾼 기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장사꾼 기질이 일본의 현재를 만든 것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것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일본인들은 노력하지 않아도 다들 친절하다. 이것은 언어와 문화에 관련되어 있다. 겸손이 생명이라고 여기는 문화가 일종에 말장난처럼 보일 때가 있다. 친절이 언어의 습관이고 일종에 문화이다.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비굴한 일로 몸을 굽히는 일을 교양의 수준으로 측정하는 문화 말이다.
또한 일본에서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쓰는 행위를 '이이도코토리'라고 부른다. 정착시킨 인물은 쇼토쿠태자이다. 이이도코토리라는 것은 좋은 것은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문화심리학 김정운 박사는 이것을 일종의 문화폅집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주제가 없도고 방법만 존재할 뿐이다. 서로 다른 것들이 대립과 갈등 없이 공존할 수 있는 바로 그 편집방법 자체가 일본의 정체성이라고 마쓰오카는 이야기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일본 문화를 ‘저수지 문화’로 비유한다. 모든 문화가 저수지의 물처럼 밀려와 고인다는 이야기다. 섞이지도 않는다. 들어와서 그저 차곡차곡 쌓일 뿐이다. 이것을 일본인들은 스스로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흔히 일본인들을 모방의 천재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서양에서 기술을 배워 서양보다 우수한 제품을 만드는 일본인들의 재주 이면엔 바로 이런 모방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인들의 모방 본능이 서양으로 향했다. 서양의 모든 문화와 문명이 그들에겐 본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모든 일본인들이 앞 다퉈 서양 문화와 문명을 배우려 했다. 그래서 종국에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쳤다.
서구화 바람이 동양을 향해 불어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모든 국가는 서구사회와 더불어 이 운동에 동참하여 문명의 열매를 맛보는 것 이외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명은 홍역과 같지만, 여러 이로운 점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홍역보다 이롭다. 그러므로 국가는 문명을 거역할 수 없으며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문명화 과정에서 보수적인 정부 (도쿠가와 막부)는 걸림돌일 뿐이며 이를 뒤집어야만 일본에서 문명화를 이룰 수 있다.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는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시아를 벗어나는 것'(脫亞)이다. 비록 일본이 이미 정신적으로는 아시아를 벗어났지만, 이웃의 두 나라 (한국과 중국)은 개혁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들의 유교적 가르침은 모두 위선적이고 뻔뻔할 뿐이다. 중국과 일본의 개혁이 실패한다면, 이들은 곧 세계열강에게 나라를 빼앗길 것이다. 서구인들은 언제나 일본, 중국, 한국을 같은 문화를 가진 비슷한 나라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일본에게 걸림돌이 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나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 나라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時事新報』1885(明治18)年3月16日
일본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1885년 3월 16일자 일본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탈아론(脫亞論)〉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기고하면서 일본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것을 일컫는 말이다. 서구 문물을 못 받아들인 우매함으로 개혁을 생각하지 못하는 다른 아시아의 국가들을 얕보면서 자기들은 재빨리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그와 동등한 위치에 선 뒤 우월한 유럽 열강 사이에 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조선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나라들까지도 계몽시켜야 한다며 침략을 강행하기도 했다. 일본의 아주 극단적인 일면을 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는 속성과 전통을 버리려는 속성이 단숨에 급격하게 뒤 바뀐다. 그 때 당시에는 일본인들은 전통적인 방식은 빨리 버려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도시는 온통 근대화된 서구식 석조 건물로 채워졌고 서양 커피와 위스키를 마시고 서양의 철학가를 읊조려야 지식인 반열에 들 정도였다.
이 때 서양 건축술과 함께 들어온 철근콘크리트 공법이다. 이 공법은 만능의 건축술이었다. 적어도 자칭 서구화된 깨인 지식인답게 모든 건축물을 콘크리트로 지으려 했고 문화재 복원마저도 콘크리트로 했던 것이다. 그들은 우수한 선진 기술력을 맹신했다. 일제 강점기 때 그들의 그 잘난 기술력을 자랑하고 싶어 처음에는 석굴암 보수를 위해서 해체를 하려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우리 석굴암을 보수해 준다며 주저 없이 콘크리트를 들이 부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신라인들이 결로현상을 막는 과학적인 장치마저도 파괴하고 붙이는 과정으로 석굴암은 형편없는 골동품 취급을 받았다. 아시아적 문화의 가치를 그저 골동품 수집 취미의 대상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골동품적 수집가치가 없는 것들은 모조리 부숴버렸던 것이다. 특히 골동품적 가치가 없는 대형 건축물이 희생양이 되었다. 전차와 길을 놓는다고 서대문과 성곽을 헐어 버리고 광화문과 경복궁, 창경궁 등을 제멋대로 파괴하고 골동품의 가치가 있는 것들은 모두 다 반출해 수집품으로 가져갔던 것이다.
오사카성은 히메지 성, 구마모토 성과 함께, '일본 3대 명성(名城)'중 하나이고 소사카이 상징으로 역사가 오래된 성이다. 넒은 수로로 둘러 싸여 고고하게 서 있는 마치 사무라이 복장으로 무장한 일본인들을 떠오르게 한다. 오사카 성 주변은 너무나 광범위하기 때문에 다 둘러보기는 무리이다. 오사카성만 탐방하는 것도 4-5 시간 걸리기 때문에 오사카성만 둘러보고 난 다음에 오사카 역사박물관을 둘러보는 것도 하나의 지혜이다. 최초의 오사카성은 오사카의 상징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세워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주군이었던 오다노부나가가 혼노지 난으로 자살하자 그의 복수를 주장하며 전쟁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천화를 통일을 꿈꾸며 오사카 성을 축성하였다. 그런 그의 의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일본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게 지어졌다.
오사카성 중심은 천수간이다. 광대한 오사카성 중심에 아름다운 자태를 나타내면 우뚝 솟은 것이 오사카성 천수간이다. 8층 전망대로 올라가면 오사카 성 공원을 볼 수 있다. 천수각 1층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오사카 성에 관련된 영상이 제공되고 2층에서는 오사카 성과 성곽 전반에 관한 기초지식을 패널로 소개하고 있다. 현재의 천수각에 사용되고 있는 샤치(용마루 장식), 후세토라(호랑이 릴리프)등의 복제품도 전시하고 있고 복원된 전국시대의 무장의 투구를 진바오니(갑옷 위에 입던 옷)와 함께 사진 촬영도 가능하다. 3층으로 가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 시대에 대한 역사자료 전시 및 알기 쉬운 오사카성의 역사와 에도시대의 오사카성에 대한 비디오상영이 있다. 시간이 있으면 감상해 보면 된다. 그리고 도요토미 오사카 성의 모형, 도쿠가와 오사카 성의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다시 4층으로 올라가면 도요토미 히데요시 연관 유물을 비롯해 전국시대와 오사카 성에 얽힌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도쿠가와 막부가 재축한 오사카성에 대한 비디오가 상영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 및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린 아들 히데요리에게 보낸 자필 편지도 공개되어 있다. 또 한 층을 더 올라가면 오사카 여름전투도 병풍의 세계를 영상과 미니어처 모형 등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아쉽게도 6층은 회랑으로 들어갈 수 없고 7층으로 올라가면 오사카 성을 축성하고 천하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를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디오라마를 통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대기가 미니어처 모형 안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특이하다. 오사카성 천수각에서 외국인들과 일본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체험 장소로는 300엔을 내면 사무라이의 투구와 옷, 칼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다. 아무튼 오사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적전시관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정도이다. 그만큼 그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면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의 패권을 차지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많은 일본인들이 자수성가의 상징이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그는 각종 드라마로 만들어져 상영되고 소설과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의 주범으로 한국인에게는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 사람들이 생각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일본 현지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참으로 씁쓸하다.
중국의 『명사』(明史) 「일본전」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부하로 있을 때 그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예부터 왕이 있고 그 밑에 관백이라는 하는 최고 실권자가 있었는데 그 관백이 노부나가였다. 노부나가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나무 밑에 누워있는 사람을 만나는 데 놀란 달아나다가 체포되어 물어 보니 노예 출신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말을 잘하고 행동이 뛰어나고 날쌔서 노부나가의 호감을 사서 마굿간 일을 하게 되고 그 뒤 계속적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셋쓰진 수비대장에 임명되면서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노부나가가 그의 부하 미쓰히데의 배반으로 급서하자 미쓰히데를 치고 관백에 오르면서 유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런 낮은 신분으로 태어난 그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은폐하기 위하여 관백이 된 다음부터 그 부하를 시켜 전기를 집필하도록 하여 자신의 신분을 미화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출생을 신비화시키는데 노력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의 전쟁을 끝으로 병사했다. 당시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6살에 불과해서 측근 다섯 다이로들에게 히데요리를 부탁하고 죽었는데, 다섯 다이로 중에 한 명이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15년 4월 30만 대군을 이끌고 오사카 성을 침략하였다. 결국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오사카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라는 조약을 이행하는 바람에 방어 기능이 현격히 저하되어 함락되게 되었고, 결국 히데요리는 오사카성 뒤편에서 자결을 하게 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간에 약속한 대로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딸과 결혼을 하고 손주 사위가 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임진왜란 때 수많은 다이묘들이 조선으로 출병을 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정작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출병을 하지 않아서 도쿄 지역에서 전투력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게 무기가 되어 돌아 올 줄을 도요토미 히데요리도 몰랐을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권력 앞에는 친족도 의미가 없다. 또한 영원한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여기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관계가 깊은 오사카성의 역사를 더듬어 보자. 일본의 성 중에서도 가장 큰 편에 속하기 때문에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것도 만만치 않다. 자료에 의하면 현재의 오사카 성이 에도 막부에 시대에 상당 부분 다는 것이다. 지금도 상당한 규모인데 그 때 당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웅장했을 것이다. 원래 성(Castle)은 아시아와 유럽 지역 공통적으로 17세기 까지만 권력의 상징이었다. 성(Castle)을 지으려면 엄청난 재료와 비용 그리고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성의 건축은 대형 프로젝트에 속했다. 그래서 시골 보다는 권력자가 거주하는 인구가 많은 대도시에 지었다. 주로 성의 역할은 높고 튼튼한 성벽을 통해 적이 도시로 진입할 수 있는 경로를 차단함으로서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즉 권력은 성을 쌓고 성은 권력을 유지한다. 오사카성도 마찬가지이다. 오사카성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력의 본거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건설한 오사카 성은 지금 남아있는 것과는 달리 대규모의 이중 해자가 성을 보호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훨씬 규모가 큰 성이었다. 그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후에도 오사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요토미 가에 충성하는 세력의 본거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도요토미와 도쿠가와가 격돌한 1615년의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면서 오사카 성의 건물들은 도쿠가와 측의 화포 공격 등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성의 바깥 해자(垓字)는 완전히 매립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을 말한다.
해자는 오사카성이 처음이 아니다. 옛날부터 존재했다. 원래 해자는 적으로 부터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 졌다. 해자
(垓子)의 다른 명칭으로는 주황(周隍), 구지(溝池), 외호(外壕), 호성하(城河)등이 있다. 안쪽에 물이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주로 해자는 성곽과 고분에서 발견된다. 선사시대 취락의 주위에 돌린 환호(環濠)와 무덤의 주위에 돌린 도랑을 일반적으로 주구(周溝)라고 불리는데 이것도 일종에 해자에 속한다. 삼국시대에서도 큰 고분을 둘러싼 도랑을 해자라고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국에서 청동기 시대에 처음으로 해자(환호)가 등장했고 이후 초기철기시대를 거쳐 삼국시대까지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일본도 중세시대부터 성을 건축할 때 반듯이 해자를 갖추게 되었다.
오사카 성 주변의 해자를 감상하고 싶다면 타니마치 4쵸메역 보다는 오사카 비즈니스파크역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다른 곳에 비해 사람 수도 적고 천수각이 한 눈에 보여 사진 촬영하기도 좋고 전망도 멋지다. 더욱이 오사카 성 내 해자에서 배를 타고 관람할 수 있는 오사카 성 고자부네도 근처에 있다. 또한 해년마다 8월 말에는 오사카 성 등불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 광경이 성을 은은하게 비추는 탐조등[探照燈, searchlight]과 소원을 비는 등불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볼거리를 자아낸다고 한다. 필자는 아쉽게도 사진을 통해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잠시 오사카 성 건축 역사를 더듬어 보자. 에도 막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으로 오사카성은 1620년부터 1629년에 걸쳐 다시 건축되었다. 물론 그 비용은 다이묘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마련했다. 안타까운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의 성벽과 해자를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석벽을 쌓아 옛 흔적은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성의 전체 규모도 4분의 1 정도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원래 높이 약 40미터이었던 천수각은 새로운 자리에 5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완성했다. 현재 천수각은 55미터의 높이 보다 더 큰 규모로 건축되었고 혼마루의 지반도 한층 돋워 더욱 웅장해 보이도록 했다. 이 정도의 대역사를 벌인 것은 오사카가 라이벌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의 중심지이기는 했지만 이미 서 일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거대한 도시로 성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도쿠가와 막부가 오사카 일대를 직할지로 만든 것을 보면 이러한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문제는 에도 막부가 오사카 성을 허물고 성을 새로 재건했다는 사실은 에도 막부 중기에서 쇼와 시대까지 사람들은 오사카 성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959년의 학술 조사 과정에서 에도막부가 다시 건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발표를 하지 못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아무튼 1931년 철골 콘크리트로 재건중인 오사카 성의 천수각 재건 후에도 여러 번 화재를 겪어 수리를 해야 했다. 1945년 3월 9일에 일어난 도쿄 대공습으로 오사카 성도 오사카와 함께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즉 현재 오사카 성은 종전 이후에 다시 건설된 것이다. 문제는 4층 까지는 에도 막부 시절의 양식을 따라 벽에 회칠을 했지만 5층은 도요토미 시절의 양식을 따라 검은색과 금색을 둘렀다. 지금까지가 오사카성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일면이다. 다음 탐방 장소로 우리는 오사카성 바로 옆에 있는 오사카 역사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사카의 변천: 오사카 역사박물관
오사카 역사 박물관를 관람하기 전에 대략적인 오사캉의 변천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오사카는 5세기 이후에야 국가에 형태의 갖추기 시작한다. 그 무렵에난바 고즈 궁이 세워졌고 5~6세기에 대륙 문물이 전래되었고 한반도 귀화인들도 정착하게 되었다. 실제로 일본이 고대 국가의 기틀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백제인의 기여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고도(古都) 오사카 중부 사카이(堺)시에는 불교사찰과 신사(神社) 건축을 전문으로 하는 ㈜ 곤고구미(金鋼組) 간사이(關西) 가공센터라는 회사가 있다. 이 곳은 건물에 들어갈 부자재들을 정밀하게 가공하는 곳이다. 곤고구미는 기네스북에도 세계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기업으로 등재될 정도로 긴 역사를 자랑한다. 서기 578년 창업하여 1천441년의 생명을 이어왔다. 그런데 이 기업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이 바로 백제인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645년에 고토쿠 천황은 오사카에 나니와노 나가라노 도요사키노 신사(미야)도 지었다. 특히 나니와노미야는 도심 밑에 조내하는 환상의 고대궁전으로 알려졌다. 6-7세기 오카와 강 주변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나니와즈는 한반도,중국광의 교통의 중심지로 국제적인 항구로 번성했다. 이 지역에 수도 나니와쿄를 만들었다. 이곳은 나니와이라고 불리는 현대적인 도시가 되었다. 이 이름은 현재에도 오사카 시를 구성하는 24개 구 중 하나인 나니와 구라는 명칭으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655년에 수도가 나니와교에서 아스카로 이전한다. 하지만 나니와는 한국, 중국을 연결하는 바다와 내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요한 중심지로 역할을 담당했다. 744년에 나니와는 다시 수도가 되지만 745년에 중단되었고 황궁은 헤이조쿄(현재의 나라 시)로 돌아갔다.
무로마치 시대인 1496년에 정토진종의 본거지로서 이시야마 혼간지가 옛 나니와 황궁 부지에 설립되었다. 1570년에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10년 후에 수도승들은 항복과 동시에 절은 파괴되었다. 1593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 성(城)을 이시야마 혼간지 부지에 건축하였다. 1614년부터 1615년에 걸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오사카는 1619년에 에도 막부의 직할 영지로 귀속되었다. 이 시대에 오사카는 요도가와 강의 치수를 위해 아지강을 개통하여 베네치아처럼 시내 각지에 물이 흐르는 물의 도시가 되었다. 또한 오사카는 오랜 세월 동안 일본의 경제 중심지로써 인구의 상당수가 상인 계층에 속했다.
에도 시대를 거치면서 오사카는 일본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였고 중요한 항구로서의 옛날 명성을 회복하였다. 대중문화는 에도의 삶 즉 서민들의 풍속화를 묘사한 우키요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사카의 문화는 교토와 에도의 문화와 평행하게 발전하였으며 마찬가지로 분라쿠와 가부키가 유행했다고 한다. 분라쿠(文樂)는 일종의 인형극이다. 분라쿠는 배우에 해당하는 인형과 인형 조정자, 인형의 대사와 극의 내용을 노래로 전개하는 다유(太夫), 그리고 사미센(三味線)으로 배경 음악을 연주하는 사미센 연주자 등 3자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인형극이다. 가부키(歌舞伎)라는 말은 원래 정상 궤도에서 일탈한 모든 행동을 가리킨다. 가부키는 노래(歌) · 춤(舞) · 연기(演技)로 구성되어 있는 종합 연극으로 후지산과 스시, 기모노, 스모와 함께 일본의 5대 국가 상징물에 포함될 정도로 일본이 자랑하는 전통 문화이다.
1837년에 하급 무사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도시가 많은 빈곤층들을 지원하는데 소홀한 것에 불만을 품고 농민 폭동을 일으켰다. 쇼군 들이 진압하기 전에 이미 도시의 대략 4분의 1이 파괴되었고 이후 오시오는 자결하였다. 막부에 의해 오사카는 효고(오늘날의 고베)와 함께 보신전쟁과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인 1868년 1월 1일에 외국과의 교역을 개방하였다. 지금까지 오사카의 역사의 변천사를 살펴 보았다.
오사카 성 인근에 위치한 오사카 역사박물관은 총 10층 규모로, 오사카와 오사카 성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관람 코스는 크게 두 가지로 실물 크기의 재현 전시물과 영상 등을 통해 오사카 역사를 알 수 있는 코스가 있고, 축소 모형으로 시대별 오사카 역사를 상세히 알아보는 코스가 있다. 각 층마다 간이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오사카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10층으로 가면 나라시대의 나니와노미야(나니와궁터)이다. 즉 일본의 고대 플로어이다. 실물크기로 복원된 공간에서는 직경 70㎝되는 붉은 칠을 한 원형의 기둥이 줄지어 있고 관인들이 정렬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3세기 고분시대부터 8세기 나라시대로 이어진다. 일본 전체가 아닌 오사카의 역사를 다루는 박물관이기 때문인지 나니와로 천도했던 나라시대가 더 비중 있게 전시되는 모습이었다.
오사카 역사박물관의 9층은 일본의 중세, 근세 플로어이다. 노부나가와 전쟁했던 혼간지의 시대, 에도시대의 분라쿠 인형 나니와야의 안내와 함께 물의 도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도시의 번화함을 20분의 1 크기의 모형에서는 도시의 번화함을 재현하고 있다. 그 때 당시 나니와 도시인들의 활기차고 생기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8층으로 내려가면 역사를 발굴하는 특집 전시 플로어이다. 여기에서는 고고학의 조사방법, 유구와 유물을 보는 방법을 학습할 수 있다. 체험하는 워크숍도 가능하다.
10층에서 시작한 시간 여행은 7층에서 멈춘다. 7층은 근대, 현대 플로어이다. 다이쇼 말기부터 쇼오와 초기에 번화가인 신사이바시수지, 도톰보리 등의 거리를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마치 오사카 거리를 산책하는 기분이다. 메이지를 지나 다이쇼와 쇼와 시대인 1900년대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픈 역사인 당시의 오사카 번화가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오사카의 랜드마크인 우메다 스카이 빌딩
오사카 우메다에 가면 멋진 빌딩이 하나가 있다. 우메다 스카이 빌딩이다. 위치는 우메다 역 근처인 오사카 기타 지구에 있고 이곳을 일컬어 "신 우메다 시"라고도 한다. 173m 높이의 이 건물은 40층의 "공중 정원 전망대"로 이어진 2개의 메인 타워로 이루어져 있다. 2개의 트윈 타워 최상층을 연결하여 공중 정원과 전망대를 만들어 일반인과 관광객들에게 유료로 개방하고 있다. 700엔의 입장료를 내면 된다. 그 모양이 특이하고 압도적이어서 한동안은 오사카의 랜드마크로 불렸다. 오사카 북쪽에서 오사카 시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전망대는 아직까지 이곳뿐이다.
1층에서 3층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투명한 고속 엘리베이터가 보이는데 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35층까지 투명 통로를 통해 올라간다. 39층에서 티켓을 끊고 40층 공중전망대에 입장한 후 한 번 더 올라가면 사방이 탁 트인 최상층 공중 정원이 있다. 전망대뿐만 아니라 22층과 39층에 오사카 전망을 보면서 식사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 있고 40층에 분위기 좋은 스카이 바가 있어 데이트 코스로도 현지에서 유명하다. 또 스카이 빌딩 지하에는 일본의 옛 거리를 재현한 다키미코지(滝見小路) 식당가가 있어서 식사 해결도 가능하다. 오사카의 야경을 감상하고 싶다면 꼭 우메다 스카이 빌딩 전망대를 가보기를 권장한다
먹자골목, 글리코맨이 있는 도톤보리
도톤보리 강에서 가장 유명한 에비스 다리(바시)를 찾아가는 길은 여러 방법이 있다. 먼저 미도스지선 난바역 지하상가의 14번 출구로 나와 뒤를 돈 다음 하천이 나오는데 바로 오른쪽에 보이는 첫 번째 다리가 에비스 다리(바시)이다. 출구에서 에비스 다리(바시)까지의 거리는 약 200미터 정도이다. 지하철 미도스지선 신사이바시역에서도 가까운 편이다. 하지만 난바나 우메다역 만큼은 아니지만 지하 상점가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복잡하다. 안내판을 잘 보고 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데로 가기 십상이다. 글리코맨이 팔을 벌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면 잘 찾아온 것이다.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도톤보리이다.
'도톤보리'란 이름은 전국시대 말에서 에도시대 초의 상인 '야스이 도톤(安井道頓, 1533~1615)'에서 유래했다. 1582년, 오사카 성 운하 개발의 공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오사카 성 남쪽 토지를 하사받았는데 토지 개발을 위해 자비를 털어 운하 개발을 시작하였으나 야스이 도톤은 오사카 여름의 진에 휘말려 죽게 된다. 운하는 후손들의 손으로 완성되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도톤보리'가 되었다. "먹자 골목"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오사카 미나미"의 메인 거리. "카니도락 본점"과 복어 요리 "츠보라야”등 유명 음식점이 많으며, 타코야키와 오코노미야키 등 오사카 전통 음식도 즐길 수 있다. 또한 "구리코 싸인 '은 세계 여러 나라 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촬영 장소입니다.
도톤보리는 좁은 길과 뒷골목을 따라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레스토랑과 바들이 즐비해있다. 이색적인 간판과 잘 꾸며진 입구는 눈을 부시게 하는 빛과 디자인의 교향곡을 만들어낸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거대한 게와 복어 조형물 그리고 드럼을 연주하는 마네킹 등의 도톤보리 거리의 레스토랑들이 자랑하는 흥미진진한 간판들을 볼 수 있다. 오사카를 대표하는 다코야키 집, 회전 초밥집, 긴류라면(금룡라면) 같은 음식점도 많다. 이곳에서 쿠이다오레의 진정한 의미를 경험할 수 있으며 합리적인 가격으로 만족할 때까지 오사카 최고의 맛을 만끽 할 수 있다. 그리고 거리의 연주가들과 예술가들을 위한 "쿠이다오레"가 현재 강을 따라 건설 중이라고 한다. 완성되면 이곳은 도시와 강이 만나는 장소, 좀 더 활기차고 생명력 넘치는 오사카의 심벌로 거듭날 것이다. 예전에는 오사카의 브로드웨이라고도 불릴 정도이다. 현재도 연극/연예인의 중심지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강을 따라 상점들이 늘려져 있고 번화가와 교차로는 거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신인해를 이룬다. 난바로 이어지는 에비스 다리(바시)에서 동쪽의 닛폰바시에 이르는 지역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독특한 간판이 많다. 특히 에비스 다리(바시)의 글리코제과점 옥외 간판은 이 지역의 트레이드마크이다. 특히 도톤보리와 신사이바시를 연결하는 다리를 에비스 다리(바시)라고 부른다. 글리코맨 전광판이 있는 곳도 바로 에비스 다리(바시) 앞이다. 이 다리 근처는 사람들의 약속의 장소이고 호객의 명소로 유명하다. 에비스바시는 젊은이들의 난파(なんぱ;젊은 남성이 거리에서 처음 본 여성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행동을 일컫는 일본말)로 유명하여 '난파다리'라고도 불린다. 난파를 당하지 않고 이 다리를 건너게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젊은 여성이 있을 정도로 이곳에서는 난파가 성행한다. 난바의 야경을 감상하기 원한다면 에비스 다리(바시)와 글리코맨 전광판의 주위를 추천한다. 여기에는 저녁 10시 넘어서도 사람이 많다. 도톤보리 리버크루즈의 안내자 말에 따르면 주중 22만 주말 35만에 달하는 유동인구가 발생한다고 한다. 그리고 축제일이 생기면 강 주변에는 열광의 도가니가 된다. 예컨대 한신 타이거스가 우승하거나 일본이 FIFA 월드컵 16강에 진출했을 때 '도톤보리 다이브'라고 하며 사람이 강에 뛰어드는 일도 가끔 있다고 한다.
자본주의 끝판: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Universal Studios Japan)
다음으로 간 지역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이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영화를 주제로 구성한 일종의 테마파크이다. 여기에는 탈것과 쇼, 어트랙션으로 어린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하게 할리우드를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운영은 오사카시, 유니버설 스튜디오사, 스미토모상사, 스미토모금속공업(주), 히타치조선(주) 등 지방자치단체와 많은 대기업 및 금융기관들이 공동 출자하여 설립한 유에스제이(주)가 맡고 있다고 한다. 도쿄에 디즈니랜드가 있다면 오사카에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이 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은 2001년 3월 개장하였고 지금은 세계적인 오락산업 및 음료제조기업인 시그램컴퍼니의 자회사로 되어 있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사(社)’가 1964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교외의 할리우드에 개장된 ‘유니버설 스튜디오 할리우드’, 1990년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개장된 ‘유니버설 스튜디오 플로리다’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이고 미국 외에서는 최초로 건설한 유니버설 스튜디오이다.
공원 안은 초호(礁湖)를 중심으로 총8개의 에어리어와 6개의 라이드 어트랙션과 9개의 쇼 어트랙션으로 나뉜다. 문제는 이러한 어트랙션이 수시로 생기고 사라지기 때문에 반드시 확인하고 이용해야 한다. 8개의 에어리어는 샌프란시스코, 뉴욕, 할리우드, 유니버설 원더랜드, 애미티 빌리지, 워터월드, 쥬라기 파크, 해리 포터 등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샌프란시스코 구역에 있는 인기있는 어트랙션으로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를 구경하는 백투 더 퓨처: 영화 백투 더 퓨쳐의 타임 머신 “데로리안호”차량을 타고 눈사태, 공룡, 화산들을 피하면서 미래를 여행하는 즐거움을 맛 볼 수 있는 곳이다. 자전거를 타고 우주를 여행하는 ET 어드벤처, 쥬라기 공원 더 라이더: 보트를 타고 공룡이 살아 있는 열대우림을 탐색하는 쥬라기 공원, 입체영상으로 보는 터미네이터 2: 인류와 사이보그의 전투가 펼쳐지고 스크린의 주인공이 무대에 나타나는 등 박진감 넘치게 재현되었다.
애머티 빌리지에서는 1975년 개봉된 영화 <죠스>는 신인이었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흥행 감독이 되는 발판이 된다. 영화 <죠스>는 긴장감 있는 음악과 함께 거대 백상어에 대한 공포감은 온 몸을 오싹하게 만든다. 무서운 백상어가 있는 바다를 항해하는 죠스 보트 여행 등이 있다. 애버티 빌리지 입구에는 영화 죠스의 배경이 되는 마을로 10m에 가까운 백상어가 매달려 있다. 이곳은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즐겨 찍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트랙션 ‘죠스’에서는 곳곳에서 공격해 오는 상어와 총격전을 벌이고 불쑥 뛰어 나오는 상어들 때문에 간담이 오싹거리는 생생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쥬라기 파크에서는 마이클 크라이튼이 쓴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시작되었다. 소설을 바탕으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1993년 <쥬라기 공원>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대히트를 쳤다. ‘쥬라기 공원 더 라이드’에서는 영화 속에서 공룡들을 복원해 무인도에 만들어 놓은 쥬라기 공원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또한 공원 주위에는 인간들을 위협하는 공룡들이 곳곳에서 서있어 긴장감을 더해 준다. 유니버설 원더랜드 구역은 대표적인 캐릭터 3종 스누피, 헬로키티, 스트리트가 모여 있는 아주 독특한 공간으로 상상의 나라의 세계가 펼쳐진다. 세 가지 중심 캐릭터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도 어트랙션, 캐릭터 사진 촬영, 다양한 상품들을 만날 수 있어 흥미를 더해준다.
헤리포터 구역에서는 영국의 작가 조앤 K 롤링이 쓴 판타지 소설 『헤리포터 』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속 그대로 재현된 공간이다. 압도적인 스케일과 디테일한 제작이다. 헤리포터의 마법가의 세계는 2014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 1995년에 개봉한 영화 <워터월드>에선 지구는 모두 물에 잠기고 사람들은 바다 위에 떠서 생활하는데 주인공이 도적질을 일삼는 해적들과 물 위에서 화려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이곳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연장으로 생생한 영화의 장면이 눈에 펼쳐진다. ‘워터월드’는 근미래 해양 액션 영화이다. 이 영화는 장면들을 50개 이상의 하이테크 특수효과와 파이로 테크닉(화약연출)으로 재현하는 수상 액션 스탠드 쇼, 폭발하는 드럼통, 솟아오르는 불기둥, 덮쳐오는 불길의 벽 등 40여 가지의 특수효과를 구사하여, 화염의 공포를 실감나게 그려낸다. 또한 초대작 ‘백 드래프트’의 장면을 재현하는 ‘백 드래프트 쇼’ 등도 흥미 있는 볼거리이다.
그밖에도 할리우드의 서부극을 일류 스턴트맨들이 라이브 액션 쇼로 보여주는 ‘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스탠드 쇼’와 연재 만화의 주인공 스누피와 친구들이 총출동하여 재미있는 어트랙션을 펼치는 ‘스누피 사운드 스테이지 어드벤처’, 드라큘라·늑대인간·프랑켄슈타인·프랑켄슈타인의 신부 등 영화 속의 괴인들이 록밴드를 결성하여 음악을 연주하는 ‘로킹 미드나이트 몬스터 축제’ 등 많은 어트랙션이 마련되어 있다.
유니버설 익스프레스 패스는, 어트랙션의 대기 시간을 단축하여 1회씩 체험할 수 있는 편리한 티켓이다. 이 티켓에는 어트랙션의 대기 시간을 단축하는 티켓과 퍼레이드 감상 에어리어를 확보하는 티켓도 있다. 당일 파크에서도 판매되지만 매진되는 대로 판매를 종료하기 때문에 미리 사두어야 한다. 또한 사전 판매에서 매진될 경우 당일 판매는 하지 않기 때문에 참고해야한다. 입장하기 위해서는 1DAY 스튜디오 패스 등의 스튜디오 패스(입장권)가 필요하다.
사람 너무 많이 몰려서 기본 2시간 기다리다가 하루 종일 어트랙션 얼마 타지도 못할 경우도 있다. 이 곳을 이용시 반드시 익스프레스가 필요한 것은 아닐지라도 있으면 편리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부분 사람들이 소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익스프레스 패스4 구매하면 총 8개 이상을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일종의 Express Pass는 공식적으로 앞줄 끼어들기 티켓이라고 보면 된다. 줄 서서 기다리다 보면 이 패스를 목에 건 사람들이 먼저 타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줄을 서 2시간 정도 기다린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억울할 수도 있다. 돈 있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대우를 해주는 것을 보면 철저한 자본주의 논리의 끝판으로 보인다. 참으로 씁슬하다.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을 주창한 이래로 ‘자본주의’는 인간사회에 최적화된 시스템인 양 군림했던 말이 귀가에 맴도는 하루였다. 일류가 선택한 자본주의 체재가 위대하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만으로 인류에게 구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신들의 천국: 츠텐카쿠 히타치타워
다음 날 츠텐카쿠 히타치타워를 방문했다. 츠텐카쿠 타워는 신 세카이 중심에 위치해 있다. 츠텐카쿠 타워는 '하늘에 닿는 타워'라는 뜻으로 오사카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랑을 받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물론 명소답지 못한 요소도 조금 있지만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아무튼 처음으로 츠텐카쿠가 지어진 것은 1912년(메이지 45)으로 파리의 개선문과 에펠 탑을 모티브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오사카의 상징으로 통칭「오사카의 에펠탑」라고 불려진다. 5층에는 오사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를 비롯하여, 발바닥을 문지르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신인 비리켄 상이 있는 곳이다. 츠텐카쿠의 수호신이자 행운의 신인 ‘빌리켄’은 1912년(메이지 45) 만들어 졌고 처음부터 서민적인 신으로써 모셔졌고 현재의 빌리켄은 3대째이다. 모금함에 동전을 넣고 빌리켄 상의 발을 문지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애기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주술 행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기가 있는 것을 보고 만지고 싶은 유혹이 있었지만 결국 만지지는 않았다. 무슨 주술에 알fp르기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이 다양한 모형들이라 어떤 것이 신상인지 마스코드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소원을 적어 넣는 장소도 따로 마련되어 있는 빌리켄 석상과 함께 복을 빌어주는 8 복신 석상을 비롯하여 2층에는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왔던 로마에 있는 ‘진실의입’을 따라 만든 빌리켄도 있고 4층에도 인도 가네샤 신상을 딴 ‘꿈이 이루어지는 코끼리’상이 있다.
이처럼 일본에는 신이 800만이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일반 가정에서도 불단이나 가미다나를 안치해 놓고 아침, 저녁으로 비는 모습이나 신사를 오가면 참배하는 모습은 흔한 일상이다. 그래도 사람들의 신앙 행위가 절대적이거나 내세적인 것이 아니고 현세적이고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에게 종교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에서 일어난,s 일본은 1993년 기준으로 1억1천7백만의 신도와 불교의 9천만, 백50만 기독교, 기타 천백만의 종교인으로 구성됐다. 이 들 중에서 2개 이상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는 주인을 위해 죽은 개를 모시는 신사가 있을 정도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신사에 가고, 결혼식은 교회에서, 장례식은 절에서 하는 일본에는 세계의 모든 종교가 공존한다. 빌리켄 상의 발을 문지르는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츠텐카쿠의 모습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재건된 새로운 구조물이다. 원래 츠텐카쿠는 1912년에 지어졌으며 당시 64m의 높이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다. 면적도 13만 평방미터 이상 규모로 최대였다. 당시 지역 주민들에게 파리의 에펠탑을 떠올리게 했으며 오사카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1943년 타워에 화재 발생으로 불타고 전쟁 때에는 전쟁 물자로 철을 공급하기 위해서 해체되었다가 어려움 끝에 1956년 새로운 츠텐카쿠가 재건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새로이 재건된 타워의 8면의 건축물은 전 세계 수만 명의 관광객에게 유혹이 되기는 충분했고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다. 특히 야간의 츠텐카쿠 타워에 있는 LED 조명은 현재 계절과 날씨에 따라서 변화하여 주요 관광객들에게 눈요기 로 충분하다.
현재 ‘츠텐카쿠(通天閣)는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의 높이가 103.3미터정도이다. 타워의 메리트 중 하나는 전망대에서 오사카의 거리를 360도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눈 밑으로 펼쳐지는 텐노지 동물원에는 기린이나 얼룩말 등의 동물들의 모습도 보이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나 전철, 그리고 사람의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게다가 텐포 산(天保山)의 관람차나 오사카 돔, 오카사 성 및 아베노하루카스 타워, 우메다 주변의 빌딩 등의 오사카의 주요 명소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뺑뺑 돌면서 올라가는 방법은 여행자를 피곤하게 한다. 츠텐카쿠 타워에 입장하려면 전망대 아래 지하 통로를 이용하여 입장해야 한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여 바로 전망대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인원만 엘리베이터 1-2대로만으로 전망대를 올라가기 때문에 대기시간이 길어져 입장과 출구 라인을 같은 레드라인으로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물론 천천히 이동하면서 상점 물건이나 잡동사니를 구경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물건에 관심이 없는 여행자라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보통 대기시간이 45분에서 길게는 1시간 넘게 걸릴 정도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신세계 100주년 사업으로 근육맨 프로젝트의 근육맨 박물관이 있다. 여기에서는 근육맨과 근육맨 마스크를 만날 수 있다. 3층에는 100년 전 타입슬립으로 안내한다. 루나파크의 디오라마나 영상,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주유패스를 이용하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전망대에서 오사카 시내를 바라볼 목적으로 간다면 정말 권장하고 싶지 않다. 시간과 체력 소모 등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장점도 있다.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오사카 선물들이 많아 눈요기하기는 좋다. 두근두근 랜드 100년 전에 타임 슬립을 할 수 있는 디오라마(diorama) 전시 등도 볼 수 있다. ‘츠텐카쿠(通天閣)의 또 하나의 특징 중 하나는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내진내수 공사로 보강하였으며 초대 츠텐카쿠에 있었던 통층 구조로 된 입구의 천장에도 천장 벽화를 복각했고 3마리의 공작과 모란 및 동백나무가 그려진 화려한 천장화는 밤에는 점등 시키며 더더욱 화려함을 더 해준다.
슬픈 사육장: 텐노지 동물원
텐노지 동물원은 1913년 일본에서 세 번째로 개장한 동물원으로 약 230여 종 1천여 마리의 동물을 생활하고 있다. 동물원 중에서 큰 규모는 아니지만 11만 제곱미터 규모에 연간 150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다. 1995년 '아프리카 사바나 존(zone)'과 코끼리를 생활하는 '아시아 열대우림 지역'을 신설하고 2006년에는 '아프리카 사바나 존'에 기린과 사자를 함께 사육하는 등 '생태적 동물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침팬지 사육장은 나무 대신 벽화가 그려져 있다. 생태환경 보다는 인위적인 냄새만 풍기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동물원에서 '생태적'인 요소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다. 대부분의 사육장은 낙후한 새장형 사육장이 대부분이고 공간은 몸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요즘 사회적 등장한 이슈가 바로 동물복지이다. 일반적으로 동물복지는 인간이 동물에 미치는 고통이나 스트레스 등의 고통을 최소화하며, 동물의 심리적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복지 측면에서 보면 텐노지 동물원은 한참 모자란다. 자연 친화적인 요소보다 인위적인 요소가 더 많다. 비록 나무와 타이어로 구조물을 설치해 놓긴 했지만,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고 거울을 볼 정도로 자의식이 강한 동물인 침팬지가 생활하기에는 너무나 단조로운 환경이었다. 수십 마리로 이루어진 무리 안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사는 습성이 있어 외로움을 잘 견디지 못하는 침팬지가 덩그러니 혼자 생활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참고로 필자가 23 전인 1996년에 방문한 캐나다의 메트로 토론토 동물원은 캐나다에서 가장 큰 동물원이다. 특히 한것은 동물원에 우리가 없다. 500마리의 동물들을 마치 숲속에서 만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자연 생태학적인 동물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만큼 동물 복지가 잘 되어 있다는 반증이다. 동물들도 동물답게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생태학적인 원리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텐노지 동물원은 안타까움이 남는다.
지금까지 다섯 번에 걸쳐서 기재한 일본 인문학 여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라, 고베, 교토, 오사카 여행은 필자에게는 아주 색다른 경험이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역사적으로 우리에게는 애증이 있는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현대인들에게 가고 싶은 곳을 가는 당연한 권리이다. 영어 속담에 '가장 사랑하는 자식은 여행을 떠나보내라'라는 말이 있듯이 필자는 여행이 단순한 여가를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소중한 경험을 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2019/4/3 / 혜윰인문학연구소
'▣혜윰인문학▣ > 인문학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영 인문학 여행 이야기: 시인 김춘수, 시인 유치환, 소설가 박경리, 작곡가 윤이상 (2) | 2020.11.14 |
---|---|
인도 인문학여행 (0) | 2019.07.18 |
일본 인문학여행 이야기 4 - 교토(Kyoto, 京都) (2) : 극단, 절대미, 정원 그리고 사찰 (0) | 2017.12.31 |
일본 인문학여행 이야기 3 - 교토(Kyoto,京都) (1) : 교토의 역사와 조선인들의 아픔의 흔적- (0) | 2017.12.28 |
일본 인문학 여행 이야기 2 - 맛과 멋, 지진의 고베 그리고 아리마온천 - (0) | 2017.10.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