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 오리같이 말라서 굴 껍데기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줏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 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 냄새나는 비가 내렸다”(백석 ‘통영’ 전문·‘조광’ 1935년 12월호)
통영 인문학 여행: 시인 김춘수, 시인 유치환, 소설가 박경리, 작곡가 윤이상
휴가로 통영에 다녀왔다. 수해복구 자원봉사를 해야 한다는 무거운 감정을 뒤로하고 가족과 함께하는 1년에 한 번 있는 여행인지라 떠났다.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통영은 바다와 섬이 있어 더더욱 좋다. 여름에는 산에 올라가는 것도 좋지만 바다가 더 매력적인 이유는 더운 날씨에 시원한 바람과 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저자 마르셀 프루투스는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 통영 인문학 여행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단순히 보는 여행만을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통영 출신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느끼고 대화하고 때론 비판할 것이다. 문학인도 만나고 음악인도 만나고 문화도 맛볼 것이다. 이제 그 여정의 여장을 서서히 풀어놓고 또롯한 눈으로 사물을 응시해 보자. 통영에는 통영만의 낭만이 있다. 바다도 있고, 꿀빵도 있고 충무김밥도 있다. 또한, 통영만의 술 문화 다찌도 있다. 그중에서도 문화 예술의 전통이 깊다.
통영이라는 지명도 현지 홍보지를 보고 안 사실이지만 삼도수군 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줄인 말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조선 시대에 삼도수군 통제영은 요즘으로 말하면 해군본부 창원시 진해 정도로 보면 된다. 통영이 옛날에 일종에 군항도시의 중심이었다. 문헌에 의하면 선조 37년 (1604년) 삼도수군통제사 이경준이 통제영을 통영으로 옮기면서 통영이란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데 아마 통제영을 통영으로 옮긴 이유도 삼면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150여 개의 섬이 있으며 해안선이 구불구불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으로 곶(串)과 만(灣)이 많이 있어서 전략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통제영이 옮기기 전에는 통영의 옛 지명을 두룡포(頭龍浦)라 불렸다고 한다. 옛날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두룡(頭龍)’은 용머리라는 의미로 후세에 길이 남을 위인은 두룡포를 의지해야 용으로 승천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치 이 말은 이 지역 출신 인사을 두고 한말 같다. (용으로 승천하다 떨어진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통영 출신 작가로는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2008)를 비롯하여 꽃의 시인 김춘수(1922-2004), 색채의 화가 전혁림(1916-2010), 시조 시인 김상옥(1920-2004), 깃발의 시인 유치환(1908-1967)과 유치환의 동생이며 연극인 유치진(1905-1974), 영어소설 ‘꽃신’의 작가 김용익(1920-1995), ‘상처 입은 용’ 작곡가 윤이상(1917-1995)등 있다. 이 사람들은 과연 두룡포를 의지한 사람이 일까? 분명한 것은 이들 모두 다 한국에서 알려진 소설가. 시인, 작곡가, 화가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통영은 많은 문화예술인을 배출한 고장이다. 통영이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그토록 많은 문화예술인이 배출되었는지를 위해 작가 고향을 찾아 인문학 여행을 떠나 보는 것도 감동스러운 일이다.
통영시 향토역사관 김일룡 관장은 통영에서 문화예술인이 많은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먼저 지역적으로 통영은 임진왜란 이후 군영 도시로 발전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가지게 됐으며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경치가 사람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역사적 내력으로 김 관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풍부한 해산물을 기반으로 한 부자들이 많았던 통영 사람들은 일본강점기 자식들을 당시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도쿄로 유학을 보냈다. 이곳에서 문학이나 예술을 공부한 이들은 조국으로 돌아와 시대상을 비관하며 동료 문화예술인들과 어울리게 됐고, 통영은 자연스럽게 이들의 집합소가 됐다.” 말한다. 통영이 이처럼 뛰어난 예술가를 다수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빼어난 경치와 일찍부터 어업이 발달해서 생긴 자금이 예술가들을 후원할 수 있는 경제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 같다. 실제로 통영의 가장 대표적인 업종이 멸치잡이(기선권현망)인데 일본강점기에 수산자원 침탈을 위해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거주해 신문물을 받아들인 선주들이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고 예술가를 지원하는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그렇다. 통영의 자연환경도 한몫했다. 아름다운 섬과 바다가 시성(詩性)의 자양분이었을 것이다. 통영은 동양의 나폴리라고 불릴 만큼 한려수도 해상 국립공원으로 바다와 산, 섬, 포구, 운하 등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펼쳐져 있다. 마치 도리샘처럼 말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물굽이마다 섬이 있고 포구마다 빨간 동백꽃은 남쪽 바다를 알린다. 아름답게 수놓은 기암괴석은 발아래 바다 황홀경을 노래한다. 바쁘게 드나드는 물새들은 세차게 비상한다. 그야말로 통영 바다는 잘 짜인 한 폭의 그림인 듯하다. 그 자체가 시(詩)이고 음악이 아닌가?. 게다가 바다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각종 해산물은 통영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 준다. 그래서 일찍이 시인들은 통영을 노래했다. 시인 이은상은 통영의 앞바다를
“결결이 일어나는 파도/파도 소리만 들리는 여기/귀로 듣다못해 앞가슴 열어젖히고/부딪혀 보는 바다”라고 읊었다. 백석은 ‘통영’이라는 시에서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
이라며 통영의 조촐한 삶을 찬양했다. 역시 통영이다. 우리 고향 같은 통영은 한 마디로 호두처럼 옹골지다. 이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먼저 통영 출신 두 시인의 시 리듬을 따라가 보자. 모든 시인에게 작품은 삶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작품을 떠나서는 어떤 존재 가치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사람의 삶에도 정답이 없듯이 시도 정답이 없다. 시는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시가 조선 시대 사대부나 선비들은 출세에 필수코스였다. 과거제도 말이다. 시를 짓지 못하면 친구도 없고 권력도 질 수 없었다. 그만큼 시는 삶의 일부분이었다. 시 한 구절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발견하기도 하고 자아를 성찰할 수도 있다. 우리의 아픔과 슬픔, 그리움과 기쁨 등이 시인의 입을 통해 시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시인의 노래가 우리 모두의 노래인지도 모른다. 이게 시의 힘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시는 신성하고 산문은 저속하다”라고 여겼을 만큼이다. 일찍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시가 우월한 장르라고 <시학>에서 설파했다.
역사가와 시인의 차이점은 운문을 사용하느냐 아니면 산문을 사용하느냐가 아니다. 헤로도토스의 작품을 운문으로도 고칠 수 있고 운문으로 쓴 것도 산문으로 쓴 것만큼이나 역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둘은 다르다. 역사는 실제 사건들을 다루고 시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다룬다. 그러므로 시가 역사보다 철학적이고 고상한데 시는 더 보편적인 것을 말하지만 역사는 특정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詩는 철학적이고 보편적 요소가 있다. 그리고 농축된 언어로 우리의 삶을 드러내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하지만 시인 그들에게도 흑역사도 있고 그림자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친일도 있고 권력에 눈먼 사람도 있다. 통영의 두 시인도 안타깝게도 그 오명을 남겼다. 아마 시인도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는 시인의 흑역사와 그림자를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리스 신화에서 시의 신(神) 뮤즈는 페가수스(Pegasus)라는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다닌다. 따라서 이 날개 돋친 말은 시적 영감 자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인다. 여기서 시인은 말을 타고 하늘을 난다. 시인이란 땅에서 세상을 보고 아울러 하늘에서도 세상을 보라는 통찰이 담겨 있는 대목이다. 즉 땅과 하늘이 일체라는 역설과 긴장이 들어있다. 현실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증언하라는 메시지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형이상학 시나 존재론 시 그리고 현실 참여시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시 자체에는 그만큼 시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하잖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이다.
통영 시인 두 분은 근대시에 해당된다. 대략적 우리나라의 근대 시 경향을 보면 1920년대 경향시와 저항시, 1930년대 순수시, 모더니즘 시 그리고 그 반동으로 탄생한 생명 파시, 1945년대 저항시, 그리고 1960년대 현실 참여시 등으로 분류된다. 지면에서 언급한 유치환은 생명 파에 속하고 김춘수는 존재와 현상시로 볼 수 있다. 생명파 시나 존재시(현상시) 모두 물론 참여시나 저항시는 아니다. 그러면 먼저 시 ‘깃발’로 널리 알려진 청마 유치환의 시 세계를 시작으로 인문학 여행을 떠나 보자.
1) 빛바랜 깃발 시인 청마 유치환
통영에 가면 호수 같은 항구가 눈 앞에 펼쳐지고 만선의 깃발이 펄럭이는 바로 이곳 망일봉 언덕에 청마 문학관이 자리 잡고 있다. 청마문학관 자료에 따르면 전시관에는 생전에 직접 쓴 15권의 詩集, 산문집, 수상록이 있다. 그리고 생전에 소중히 간직하시던 귀중한 유품 100점과 각종 문헌 자료 350여 점 등이 진열되어 있다. 전시관 바로 위쪽에는 복원된 생가에는 아담하게 ㅅ자 형태의 초가집이 자리 잡고 있다. 전시관에는 청마의 삶을 조명하는 ‘청마의 생애’ 편과 생명 추구의 시작을 감상하고 작품의 변천, 평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청마의 작품 세계’ 편, 청마가 사용하던 유품들과 청마 관련 평론, 서적 논문을 정리한 '청마의 발자취' 편, '시 감상 코너'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치환은 생명파 시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自然과 인간의 합일을 추구하는 경향의 시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남성적 詩 세계를 보인 시인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것 역시 대부분 시인의 시가 여성적 어조의 경향을 나타냈지만, 유독 유치환만이 남성적 경향의 시들이 있기 때문이다. 청마(靑馬)는 1908년에 경남 통영 출생하여 11세까지 한문을 수학했고, 일본 도요새 야마 중학(豊山中學)을 거쳐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1927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한다. 시집으로는 아래와 같다. 필자도 이 시집 전체를 읽지 못했다. 다만 몇 편을 선택하여 詩를 읽었을 뿐이다.
청마의 시는 시집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청령일기』(1949), 『보병과 더부러』(1951), 『예루살렘의 닭』(1953), 『청마시집』(1954), 『제9시집』(1957), 『유치환시선』(1958),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루나무와 남풍』(196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등과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1959), 수필집 『동방의 느티』(1959), 『나는 고독하지 않다』(1963) 등을 간행했다.
시 160편 중 그의 대표 詩이라고 볼 수 있는 깃발을 감상해 보자.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시인은 바닷가를 거닐다 바다를 향해 펄럭이는 깃발을 보면서 바다를 향해 날고 싶다는 상상을 한 것 같다. 하지만 깃대에 매달린 깃발은 바다로 자유롭게 날 수가 없다. 깃발의 좌절이 곧 人間의 좌절임을 형상화한다. 시인은 또 ‘깃발’을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으로 비유한다. 바다를 향해 펄럭이는 깃발의 모습이 마치 자신이 떠나온 바다를 향한 향수(노스탤지어)와 같다는 것이다. 그 향수는 이별의 아쉬움이고 그리움이다. 이것은 청마 유치환 '깃발'에 대한 일반적이 해석이다.
청마에게 고향 통영이 그의 시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증거는 시에 나오는 주제가 대부분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 중 특히 바다가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는 꽃, 동물, 바위, 바다 등 자연을 묘사하는 생명파 시인으로서 인간도 자연 일부분으로 보고 있다. 그는 삶의 참여, 연민과 회의 그리고 허무, 게다가 존재에 대해 자학과 회한, 허무 본질 추구와 극복이라는 다양한 주제로 접근한다. 일본강점기(1910~1945) 초기에는 일본의 압제 안에서 겪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모순에 인간이 겪는 고뇌 등이 시의 주제였다. 하지만 일본강점기 후반에 써진 작품은 친일시 논쟁에 휘말려 있다. 그 대표적인 時가 유치환의 詩 '수(首)'라는 작품이다. 1942년 3월 <국민문학>에 발표된 이 시는 만주 어느 동네 네거리에 참수되어 걸려 있는 비적들의 머리를 보며 법의 준엄 그리고 생명의 허무 혹은 의지를 읊은 시이다.
‘수(首)’를 감상해 보자.
수(首)
십이월의 북만(北滿)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비적(匪賊)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寒天)에 모호히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율(律)의 처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人命)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除)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험열(險烈)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명목(暝目)하라!
아아 이 불모한 사변(思辯)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 지고
여기서 문제는 ‘비적’이다. '수(首)'에 나오는 '비적'을 놓고 친일시 논쟁이 되고 있다. 과연 ‘비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즉 해석의 문제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비적'이 "글자 그대로 떼 지어 다니면서 살인 약탈을 일삼는 도둑의 무리"나 ‘토비’가 아니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장 투쟁한 항일 군의 총칭이라는 것이다. 그리 보면 시인이 항일독립군의 효수된 머리를 보고 조소하는 듯한 문구로 볼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 '친일시'에 불과하다. 이 문제는 보다 더 정확한 검증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유치환이 쓴 시 ‘전야’도 ‘북두성’도 문제가 되었다. ‘전야’는 ‘학병 독려’이고 ‘북두성’도 아시아 해방을 바라보는 시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1943년 12월호 〈춘추〉에 발표된 ‘전야’ 문제의 문구는 “화려한 새날의 향연이 예언”이다. 역사의 전야에 조선 출신의 학병들이 정복과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취지이다.
또한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그의 산문에서 “오늘 대동아 전(大東亞戰)의 의의와 제국(帝國)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비류 없이 위대한 것”이라고 썼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필자가 보기에도 유치환은 친일 논쟁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특히 생명을 존중하는 '생명 파' 시인 인지도 의심조차 들 정도이다. 마치 1700년대~1800년대 초에 1400만 명을 신대륙으로 끌고 간 “물 위를 떠다니는 지하 감옥”으로 불린 흑인 노예선에서 하루를 무사히 지냄을 감사기도를 드리는 무심하고 몰염치한 선장들처럼 말이다. 결국 유치환은 빛바랜 깃발 시인이 되었다.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은 극작가인 그의 친형인 동랑 유치진이 친일 반민족 행위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1941년에는 현대극장을 새롭게 조직하고 그 대표가 되어 1945년에 해방될 때까지 운영하였다. 현대극장은 일제 말기의 친일 연극을 주도한 극단으로 이 극단을 통해 <흑룡강>, <북진대>, <대추나무> 등 친일 희곡을 상연으로 친일 노선을 밟게 된다. 이 가운데 친일 성향이 가장 농후한 것으로 알려진 <북진대>이다. 그 작품이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유치진은 서울예술대학교의 설립자이다. 본래 조선총독부가 있었던 부지에 한국 최초의 현대극장인 '드라마센터'를 세우기 위해 록펠러센터와 박정희 정부에게서 불법적으로 지원받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에 몇 번 유치진의 극장 사유화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그 후에도 자기 아들을 총장 자리에 앉히고 그의 가족이 학교를 독재적으로 운영한 사실들이 적발되어 비난을 받았다. 씁쓸한 마음을 머금고 이제 시인 김춘수 집으로 들어가 보자
2) 존재를 탐하는 시인 詩人 김춘수
김춘수는 존재를 탐하는 시인이다. 그 이유는 대표 시 '꽃'을 통해서 아니 삶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김춘수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와 같은 변화와 굴곡의 흔적은 비단 작품 활동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도 간혹 나타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김춘수는 1922년 경남 통영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학교 성적은 늘 1등을 할 정도로 우수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친은 그를 서울의 경기중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가족 전체가 서울로 이사를 한다. 하지만 김춘수는 정신적 방황과 갈등 끝에 졸업을 석 달 앞두고 자퇴하고 그는 부친에 뜻에 따라 법대에 가기 위해 1941년에 일본 유학을 결정한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릴케의 시집을 읽고 방향이 180도 바뀐다. 결국, 니혼대학 예술과에 입학하지만 1942년에 천황과 조선총독부를 비판하여 1943년에 퇴학당한다. 그가 친구들에게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일본 경찰이 그를 체포해 7개월 동안 잡아 가둔 후에 학교를 퇴학시키고 강제 송환한 것이다.
그 후 국내로 돌아와 중고등학교 교사, 경북대 교수, 영남대 교수를 하다가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안동 출신의 민정당 사무총장인 권정달의 천거로 정계에 입문한다. 김춘수는 전국구(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고 방송심의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5공에 헌신했다. 심지어 전두환을 찬양하는 헌정 시까지 지었다. 그는 등단 이후 詩에는 정치적 견해도 현실도 잘 드러내지 않고 다만 허무주의에 기반을 둔 인간의 실존과 존재를 노래했던 시인으로서 정말 이해되지 않은 행보였다. 그래서 그에 시에는 군사 독재에 맞선 치열함도 노동자의 땀 냄새도, 민주주의의 열망도 없다. 하지만, 詩는 詩다. 이 말은 시는 시일뿐이라는 것이다. 김춘수가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릴케도 제2차 대전에 파리의 혼란 속에 살면서 현실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흔히 김춘수를 예술 지상주의자로 일컫는다. 시는 언어예술이고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 김춘수 시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는 비판, 리얼리즘의 부재 등 평가를 의식해 현실 참여시 시인으로 이름난 시인 김수영을 평생 맞수로 여겼다는 후문이다.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장석주 씨는 김춘수를 시 세계를 신랄하게 분석한다. "김춘수의 언어들은 실재의 세계로부터 끝없이 피하는 언어, 그 내부로부터 의미를 지워감으로써 현실에 대해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상상적 유희로 환원해버리는 비본래적인 언롱의 세계이다"라고" 라고 비판하면서 김춘수의 시 세계를 "몽환적 관념들이 춤추는 기표적 기호의 과잉의 세계"이자 "실체가 없는 허무의 유희"에 불과하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군부독재에 헌신한 것을 보고 그를 "부르주아 순응주의에 충실한 몽상가, 그저 잔뜩 겁에 질린 노예였을 뿐"이라고 설파한다. 이에 대해 한양대 국문학과 이승훈 교수는 “현실을 반영하는 시가 있으면 그렇지 않은 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겠느냐 하는 것은 문학관의 차이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라고 반박한다. 이에 대한 논란과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그의 시집으로는 1948년 첫 시집인 <구름과 장미> 출간을 시작으로 시 <산악(山嶽)>, <사(蛇)>, <기(旗)>, <모나리자에게>, <꽃>, <꽃을 위한 서시> 등을 발표하였다. 다른 시집으로는 <늪>,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타령조 기타>, <처용(處容)>, <남천>, <비에 젖은 달> 등이 있다. 김춘수는 꽃을 좋아하는 시인이다. 꽃에 관한 시로는 <꽃>, <꽃을 위한 서시>, <꽃의 소곡>, <꽃·Ⅰ·Ⅱ>등이 있다. 여기에서 김춘수 대표 시라고 할 수 있는 <꽃>을 감상해 보자.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식…. 하면 ‘꽃’이다. 김춘수 ‘꽃’이라는 시가 유명해서 그럴 것이다. 김춘식의 ‘꽃’은 철학적, 관념적 문제를 다루는 일종에 존재의 詩라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시적 언어로 형상화한 것으로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의미 없는 것을 상호 인식 작용을 통하여 의미 있는 것으로 치환한다. 존재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진리를 형상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말이다. 존재론적인 방향에서 형상화를 시도하는 틀이 돋보인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름을 부르는 행위 즉 존재 사건의 행위를 통하여 존재자(꽃)의 존재가 된다.
여기에서 이름은 허무(非存在)로부터 존재를 끌어내 줄 수 있는 존재 사건을 말한다. 시인이 말하는 ‘꽃’, ‘사랑’ 시어는 존재의 본질을 의미하고 존재론적 탐구가 닿은 절정에서 피어나는 형이상학적 존재이고 존재론적 기호이다. 허무의 상태, 즉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때 무의미한 사물에 불과한 것이 존재의 인식, 존재 사건이 일어날 때 그 본질을 밝히는 행위가 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꽃’은 단순한 현상적 존재로서 꽃이 아니다. 현상학적 현상으로 나타난 존재의 표상으로서 ‘꽃’이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의미 없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일찍이 철학자 하이데거는 『시론과 시문』에서 인간의 이런 존재 인식의 수단을 언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다. 그 때문에 “詩人은 神들의 이름을 부르고 만물을 그 본질에 따라서 이름 짓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의 본질을 규정해 준다.”라는 하이데거 시에 대한 견해와 일치한다. 여기서 언어라는 것은 단순한 일상어가 아니라 언어의 가장 압축된 형태로서의 시적 언어를 가리킨다. 아울러 이 말은 인간이 시적 언어를 통하여 자기 존재를 표현한다는 말이다.
‘꽃’ 1연에서 꽃은 내가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다만 홀로 있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수많은 이름 없는 사물의 하나였을 따름이다. 그런 사물에 대해 내가 ‘꽃’이라는 하는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그것은 ‘나에게로 와서’ 즉, 나와의 관계 속에서 꽃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름을 붙이는 일은 사물이 의미가 있도록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3연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기”를 바라는 내용도 존재의 추구 자세의 시적 변용이고 향기와 빛깔은 시인의 자기 존재로서의 현상학적인 인식이다. 즉 상대 존재에 대한 인식과 존재 확인의 통한 관계 설정이다. 4연에서 서로 간 무엇인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기대로 확대된다. 존재 의미를 설정한 릴케의 시 변용 기법을 김춘수도 수용한 것으로 보면 된다. 결국, 김춘수는 꽃의 존재론적인 의미를 현상학적으로 구현했다. 이런 의미에서 김춘수의 꽃은 단순한 현상적 존재로서 꽃이 아니고 현상학적으로 나타난 존재자의 표상으로서의 꽃이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존재 사건(essence)은 이해관계(interest)”라고 본다. 라틴어 Esse(존재, 실재, 실체, 본질)도 존재 사건 안에서 지속성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는 존재의 자기 보존성을 나타낸다. 김춘수 꽃에서 이해관계는 이름을 부르는 행위이다. 이 행위로 익명에 의한 “존재(存在)”로부터 일종의 “존재자(存在者)”인 자아가 새롭게 태어나고 이러한 자아가 자신과(存在)는 구별되는 “존재자”인 절대적 타자를 경험할 수 있다. 마치 익명의 존재(Esse)로부터 김춘수의 꽃(존재자)이 태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과연 김춘수는 존재를 탐하는 시인인가? 아니면 존재를 노래하는 시인인가?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그런데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때 당시 한국사회에 존재 (Esse)나 존재자(ens)라는 화두를 던졌다는 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제 김춘수의 흑막(黑幕) 존재를 뒤로하고 통영의 이웃집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치열한 자유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3) 자유의 세상을 향해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소설가 박경리
린 헌트(Lynn Hunt, 1945~)는 <인권의 발명>에서 프랑스혁명이나 미국의 독립선언도 소설을 통해 비롯되었다고 강조한다. 아마 소설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타의 삶, 성찰과 공감, 그리고 분노와 저항을 싹 뜨게 하기 때문이다. 소설이 저항을 싹트게 하고 이것이 쌓여 인권에 대한 보편적인 의식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 처럼 소설의 힘은 위대하다. 박경리가 소설에서 자유에 몸부림치는 저항을 한 이유이다. 그는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土地)의 원고를 썼다.”라고 회고 있다. 이처럼 박경리에게 소설은 삶 자체였다. 그러한 삶의 토대가 바로 통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나고 자란 통영은 본디 그리움이 짙다. 또한, 아름다움도 깊다. 필자도 삶과 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곳이 바로 통영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마 박경리는 자신의 가슴속에 늘 통영의 거센 파도가 출렁거렸을 듯하다. 이것은 박경리에게 글을 쓰도록 하는 문학의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단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보듯이 소설의 무대 전체가 통영이다. 그 외도 파시, 토지 등 많은 작품 역시 통영을 배경으로 쓰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지명 표지석 등이 현재 몇 개밖에 없어서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담는다. 옛날에 통영의 별명이 동양의 나폴리라는 말도 『김약국의 딸들』에서 통영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소개되었다. 그럼 이제 통영과 박경리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박경리 기념관을 둘러보자.
박경리 기념관을 가면 뜰 안에는 서울대 조소과 권대훈 교수가 제작한 박경리 동상이 있다. 동상 밑에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고 옆에는 박경리의 시 “삶”이라는 시 전문이 새겨져 있고
삶
대개
소쩍새는 밤에 울고
뻐꾸기는 낮에 우는 것 같다
풀 뽑는 언덕에
노오란 고들빼기 꽃
파고드는 벌 한 마리
애끓게 우는 소쩍새야
한가롭게 우는 뻐꾸기
모두 한 목숨인 것을
미친 듯 꿀 찾는 벌아
간지럼 타는 고들빼기꽃
모두 한 목숨인 것을
달 지고 해 뜨고
비 오고 바람 불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곳
허허롭지만 따뜻하구나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또한 문장 비에는 대하소설 ‘토지’ 中 서<序> /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 中 통영 부분이 돌에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다. 박경리를 소설을 쓰는 중간에 시도 종종 썼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아마 소설에서 할 수 없는 말을 시로 축약해 독자들에게 알리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박경리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 보자. 기념관 1층에는 음료와 박경리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북카페 '토지'가 있다. 2층에는 1926년부터 2008년까지 작가의 연보와 생애를 알 수 공간이며 박경리 선생이 평소 집필하던 원주(단구동)의 서재를 재현해 놓은 모습도 눈에 띈다. 그리고 작품 전시 및 작품 설명을 볼 수 있는 대하소설 『토지』 친필 원고를 전시해 뒀다.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 됐던 통영의 옛 모습을 복원한 모형도 있다.
필자에게 박경리 작품 중에서 최고를 꼽으라면 단연코 소설 ‘토지(土地)’이다. 작품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도 600명으로 최대이고 구성도 마치 숨은 그림 찾듯 복잡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다양한 삶과 개성 역시 뚜렷해서 하나의 인간학을 배우는 것 같다. 인간학을 배우고 싶으면 토지를 읽으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또한, 표현되는 단어와 문장 그리고 묘사도 훌륭해서 문학을 공부하거나 습작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금상첨화이다. 어떤 소설가의 표현처럼 토지를 ‘읽되, 뜨겁게, 맛있게 읽으라 하는 점이다. 건성건성 대충 읽어서는 소용이 없다.’라는 말에 귀 기울이면 분명 글귀의 자양분이 우리 핏속에 녹아들어 돌고 있을 것이다. 작가 유시민도 토지를 읽으면 어휘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 작가 유시민의 말을 들어 보자.
“어휘를 늘리는 동시에 단어와 문장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즐기고 익힐 수 있는 책으로는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1부 네 권만 읽어도 된다. 2부 다섯 권까지 읽으면 더 좋다. (...) 굳이 단어나 문장을 암기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읽고 잊어버리고, 다시 읽고 또 잊어버리고, 그렇게 다섯 번 열 번을 반복하면 박경리 선생이 쓴 단어, 단어와 단어의 어울림,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 저절로 뇌에 ‘입력’된다. 그리고 글을 쓸 때 그 단어와 문장을 자기도 모르게 ‘출력’하게 된다.” -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137~138쪽.
그렇다. 유시민의 말처럼 토지 속에는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와 일상어 등 다양한 층위의 문장과 어휘들이 어우러져 있다. 문학적인 표현도 뛰어나다.
‘밤의 냉기를 흠씬 머금은 강바람이 오싹오싹 스며든다.’ “일이란 억지로는 안 되지라. 하루아침에 성을 쌓지는 못허니께로 개미 뫼 문지듯이, 일이란 그렇기 허야제잉. 세월이란 것도 개미 뫼 문지듯 가는 거 아니더라고?” 여자의 목소리는 진달래꽃 이파리가 되고, 꽃송이가 되고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 바다, 그 속을 자신이 걷고 있다는 환각 속에 환이는 쓰러졌다. (별당 아씨가 죽는 장면)
이처럼 ‘토지’는 방대한 우리말 어휘가 담겨 있어서 소설 속 어휘 사전을 만들 정도이다. 소설에서 문장과 구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이제 25년간 집필된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를 만나러 가보자. <토지>는 최참판댁과 그와 얽힌 다양한 사람들의 변화를 시대와 역사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 형태로 들어 난다.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할 소설이다. 대강 줄거리는 이렇다. 때는 구한말인 1897년 무렵이다. 경상남도 하동의 악양면 평사리에는 5대째 지주로 군림하고 있는 만석꾼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벌어진 대하소설이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모두 5부 16권의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1894년 평사리에서 벌어지는 일을 중심으로 최참판댁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2부에서는 배경을 만주 용정으로 옮겨 최서희의 치부와 조준구에 대한 복수, 그리고 최서희와 두 아들을 비롯한 평사리 사람들의 귀향을 묘사하고 있다. 3부에서는 배경이 넓어져 만주와 일본 동경 그리고 서울과 진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특히 김환 (구천이)가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4부에서는 김길상의 출옥과 탱화의 완성, 기화(봉순이)의 죽음, 그리고 오가다 지로와 유인실의 사랑과 갈등을 그린다. 그리고 2세대인 이용의 아들 이홍과 최서희와 김길상의 두 아들 최 환국과 최윤국이 이야기로 서서히 전환된다. 5부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에 한국인들의 고난과 기다림을 묘사하고 있다. 주요 사건으로는 이상현과 기화의 딸 이양현과 최윤국 그리고 송관수의 아들 송영광의 삼각관계가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라디오 방송을 들은 이양현이 최서희에게 달려와 그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소설 ‘토지’는 생각하지 않고는 결코 집필할 수 없는 대작이다. 소설 쓰면서 박경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 시대적 배경, 인간, 소유, 관계 등 수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전체주의 기원> 저자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악의 평법성'을 말하면서 사유의 불능성을 주장한다. 즉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이 범죄라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칼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근면한 인간이다. 따라서 그의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다만 그가 유죄인 것은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그래서 박경리도 우리에게 늘 생각하라고 조언하고 있는지 모른다. “생각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배제합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자주 마주 앉아보세요. 모든 창작은 생각에서 탄생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토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생각한 ‘토지’는 아마 자연이 아니라 소유로 파악하는 일종의 문서로 본 듯하다. 이런 문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사람 사이에 욕망이 발동하여 분쟁을 유발할 수 있고 심지어는 죽음과 전쟁도 불사할 수 있음을 ‘토지’는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토지’를 통해 벌어지는 비열한 인간들의 다양한 삶이 고스란히 소설 속에 녹아들어 있고 남의 소유를 자기 소유로 빼앗아 챙기려는 탐욕과 폭력도 소설에서 구체적이고 치열하게 나타난다. 아마 박경리 선생은 이 모든 것을 빠짐없이 사실적으로 소설 속에 담으려고 했을 것이다. 소설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구한말 한국 사회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조선 왕권이 내부 및 외부의 요소에 의해 더는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암시한다. 1860년대에 이미 동학교도들이 10만이 있었고 제국주의 세력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판국이다. 조선은 이미 수명이 다해 가고 있였다. 더는 조선왕국의 계급주의 사회구조는 지탱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고 왕권 질서도 양반 계급도 도덕 체계도 모두 소설 도입부 표현처럼 ‘황혼빛’이었다. 이 문제는 25년간 박경리 소설의 몸부림이었다.
이처럼 박경리에게 소설은 몸 일부고 몸은 소설 일부이다. 박경리가 ‘토지’이고 ‘토지’가 박경리이다. 소설가 이호철의 지적처럼 “논리성과 내발성(內發性), 필연과 자유가 진정으로 얽혀서 하나의 유기체로 태어날 때, 비로소 소설인 것이다.” 그렇다. 그는 고독과 철저히 맞섰다. 그리고 철저히 자신을 소설 속에 유폐시키고 소설 속 자유의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손짓하고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이것이 박경리만의 문학이다. 소설 속 인물들도 삼베처럼 질긴 한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그것도 비극으로 말이다. 비극, 고대 그리스와 로마 글들은 대부분 비극으로 가득 차 있다. 글에 나오는 사람들은 참담하고 기고한 운명에 짓눌러 그들을 볼 때 여민을 일으킨 게 한다. 왜 그들은 비극의 글을 썼는가? 그러한 글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비극은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잠재된 본질을 가장 극단적으로 사건 속에서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인간의 정체를 성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나는 무엇인가 등 인간 본성을 파헤친다. 그래서 도덕으로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실존적으로 깨닫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아래와 말한다.
"비극이란 진지하며 완결된 일정한 크기를 가진 행위의 모방입니다. 여러 종류 속에서 각 부분에 맞게 양념된 언어를 사용합니다. 서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연민과 공포를 통해 그런 종류의 격정적인 것들을 깨끗게 합니다."( <시학> 1449b24-28)
아리스텔레스는 비극을 하나의 카타르시스로 파악하고 있다. 잘 짜인 구성으로 연민과 공포로 완결된 행위로 그리고 깨끗하게 모방해내는 창작의 작업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일종에 은유이다. 비극은 삶의 은유로서 삶의 본질을 해독할 수 있는 장치라는 것이다. 가장 치열하고 극단적인 행위 속에서 인간의 비극적 본질을 드러냄으로 깨끗하게 정화하기 때문이다. 마치 소설 <토지>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처럼 말이다. <토지>에서 비극 속 생명의 자유가 움틀 거리도 연유도 여기에 있다. 이 말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에 대한 대답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통영 이웃집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인문학 여행을 마칠까 한다. 잠시 통영 앞바다 신선한 바람을 마시며 통영 없이 통영다운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음악 세계로 인문학 여행을 떠나 보자.
4) 통영 없이 통영다운 작곡가 윤이상
통영 하면 윤이상이다. 윤이상은 세계적인 작곡가이다. 주로 해외에서 활동하셨고 해외에서 더욱 인정받은 분이다. 그런데도 고향 통영의 어린 시절이 음악적 모티브가 되었다고 되뇌었다. 생전에 "내 음악의 모태는 통영의 바다와 갈매기 소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통영이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1917년 출생한 윤이상 선생은 이미 14세 때 처음 작곡을 했고 1930년대 중반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항일 운동을 하다가 1943년 투옥되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함께 해방을 맞아 풀려나서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통영여고 교사로 있을 때 통영여중과 통영고, 욕지중, 통영. 충렬. 두룡. 진남. 용남. 원평초 등 당시 통영에 있던 대부분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다고 한다.
순수하게 통영에 거주한 시기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합쳐 20년 정도 된다. 그런데도 고향 통영에 대한 기억은 그에게 강렬한 흔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렬했다고 볼 수 있다. 통영시민이면 누구나 윤이상이 작곡한 노래 한두 곡은 부를 줄 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작곡한 교가가 많아서이다. 아무튼, 그리고 윤이상은 1956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공부하고 1958년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 참가하여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66년에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예악>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도 <나비의 미망인>, <율>, <영상> 등을 작곡하여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선생은 뮌헨 올림픽 전야제에 오페라 <심청>을 초연하는 등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을 작곡하여 1987년 독일 연방 정부로부터 베를린 정도 750주년 기념 대 공로 훈장을 받았으며, 5.18 광주 민주항쟁 시에는 김대중 석방 운동 등을 비롯하여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다.
통영에 가면 윤이상 생가터에 지은 윤이상 기념관이 있다. 매년 4월이면 통영의 바다가 아름답게 펼쳐 보이는 통영 국제음악당과 윤이상 기념관에서 통영 국제음악제가 열린다. 클래식 외 오페라, 재즈와 국악인 안숙선 씨의 심청가도 공연 등 다양하고 수준 높은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윤이상 기념관 유품 전시관 입구에 보면 북한에서 제작한 윤이상 선생의 흉상과 선생이 생전에 사용하던 첼로가 있다. 이 흉상은 정부의 반입 불허로 인천항 창고에 약 9개월간 보관 중이다가 2010년 3월 초 인천세관 통관을 거쳐 정식으로 국내 반입됐다고 한다. 무게 85kg에 가로 54cm, 세로 49cm, 높이 83cm 규모이다. 그리고 생전에 그가 사용했던 물건과 악보, 어록 등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다.
처음에는 윤이상 기념관이 2010년에 도천테마파크이란 이름으로 개관했다. 과거 정권에서 친북인사로 낙인찍힌 등 정치적 배경 등의 이유 때문이다. 국내에서 그를 언급하는 자체가 일종에 금기에 해당하였다. 그가 북한을 자주 방문했을 뿐 아니라 평양에 윤이상 음악연구소까지 생긴 영향도 클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1967년에 예술가와 학자 등 주로 유럽에 있던 대학교수와 유학생, 예술인, 의사, 공무원 등 194명이 동백임(동베를린) 사건으로 엮었다. 그리고 재서독 음악가 윤이상 선생과 재프랑스 화가 이응로 선생을 구속했다. 당시 발표 내용을 보며 1958년부터 1967년까지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간첩 활동을 해 왔다는 것이다. 특히 재독 유학생 등 7명이 직접 평양을 방문해 밀봉 교육을 받고 귀국해 간첩 활동을 했다고 중정은 발표했다. 그들을 한국으로 납치하여 34명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최고 사형 등 유죄를 선고를 받아 가혹한 고문과 수형 생활을 당했다.
윤이상 선생은 자서전 ‘상처받은 용(龍)’에서 동백림 사건 당시 겪은 고난을 말하면서 당시 사건은 중정(중앙정보부)의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고 폭로했다. 그리고 1970년에 광복절 특사로 풀려나고 다시 독일로 돌려보냈다. 결국, 윤이상은 고국(고향) 땅을 한 번도 밟지 못하고 1995년에 눈을 감게 된다. 윤이상 선생의 묘소는 2018년 베를린에서 꿈에도 그린 고향 땅 통영의 바닷가(통영 국제음악당 바닷가언덕)로 이장되었다. 늦게나마 고향을 찾게 되어서 다행이다. 이제 윤이상의 음악 세계로 들어가 보자, 윤이상이 작곡한 음악을 들어 보면 한마디로 이상야릇하다. 정해진 규칙이 없이 악기로 장난치는 것처럼 들린다. 물론 필자가 음악에 문외한 이유도 있지만 그런데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마 불규칙 속에서 규칙을 찾아가는 기법인 듯하다. 음악 속에는 불규칙과 규칙, 느림과 빠름, 여백과 충만, 연약함과 강렬함, 부드러움과 거침 등이 뒤섞여 혼란스럽게 조합을 이룬다. 장조도 아니고 단조도 아니다. 특유의 한국 전통음악에 가까우면서 다른 기법이 혼재되어 흐른다. 아마 동양사상과 서양 음악이 혼합된 듯하다. 실제로 조사해 본 결과 윤이상 음악에는 도교 철학의 요소가 바닥에 깊게 스며들어있었다. 또한, 유교나 불교, 무교 등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가미되었다. 이것은 유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실제 윤이상은 5세 때부터 서당에서 논어와 도덕경, 장자 등을 읽었다고 한다. 게다가 통영 지방에서 거행되는 마을 위령제나 사월초파일의 연등 축제 등도 윤이상 음악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필자가 참석한 2020.11. 20 세계 인문학 포럼에서 윤신향(아시아 독일 공연예술연구소/베를린)이 발표한 "공생과 상생의 예술 인문학 성악 텍스트를 통해 본 상호 종교적 대화를 중심으로" 글에 따르면 윤이상이 나치를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 간 후 자신의 어두운 기억과 현실을 시와 드라마로 승화시킨 유대 여류시인 넬리 작슨의 시 세계에 상당히 공감했다고 한다. 마치 그녀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가 같은 운명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넬리 작슨은 1966년 수여된 노벨상에서 "이스라엘 운명을 예리한 힘으로 해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흔적으로 윤이상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잔혹함에 대한 반응으로 작곡한 "밤이여 나뉘어라" (1981)에서 넬리 작슨의 싯구를 인용하기도 하고 또한 합창과 바이올린 독주, 타악기를 위한 "오, 빛이여"(1981)에서 불교의 기도문을 넬리 작슨시와 혼용하기도 한다.
박경리만큼이나 윤이상도 통영의 대표 주자로 손색이 없다. 그는 통영 없이 통영다운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제 윤이상을 비롯한 박경리, 유치환, 김춘수 등 문학과 예술 인문학 여행을 마무리하고 통영의 맛과 멋이 있는 강구안을 산책해 보자.
5) 맛과 멋 그리고 향유의 꿈
통영에는 문학예술기행 외에 풍부한 먹거리가 있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첫째로 그 유명한 충무김밥이 있다. 충무김밥은 다른 김밥과 분명 다르다. 김밥 속에 반찬을 넣지 않는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여름에 김밥 속이 빨리 부패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김밥과 속을 따로 판 것에서 비롯되었다. 김밥 따로 오징어 혹은 꼴뚜기, 아니면 무침과 깍두기로 구성되어 있다. 통영을 여행하다 보면 충무김밥집은 강구안 거리에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김밥과 함께 또 하나의 명물은 단연 꿀빵이다. 꿀빵은 밀가루 반죽에 팥소를 튀긴 것에 물엿을 입힌다고 한다. 필자가 먹어 본 결과 맛이 달콤하다. 단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간식거리로 손색이 없다. 그 외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선술집인 다찌집도 있고 짜장면에 우동 국물을 부어 먹는 우짜면도 있다. 그리고 막 썬 회도 멍게비빔밥도 있다. 이처럼 풍부한 먹거리는 통영 여행을 한층 더 신나게 해 준다. 그리고 또 가볼 만한 곳으로는 바다와 산, 그리고 섬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미륵산에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가 있고 일본강점기에 일본군에 물자 보급을 위해 건설된 섬과 육지를 잇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동양 최초의 해저 터널도 있다. 바다와 꽃들이 어우러져 시원한 이순신공원, 국보 305호로 객사의 용도로 지어진 통제영의 중심 건물로 면적이 175평 되는 세병관 등이 볼만하다. 정면 9칸 측면 5칸 기둥만 50개이란다.
그리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벽화마을 동피랑, 서피랑이 있다. 원래 피랑은 가파르고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나 절벽을 일컫는 말로써 토박이 지명이다. 동피랑은 동쪽 절벽이고 서피랑은 서쪽 절벽이다. 굳지 비교하자면 동피랑은 벽화가 많고 서피랑은 설치미술이 많은 게 특징이다. 동피랑 벽화마을은 2년마다 벽화 축제가 있어서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좋다. 그때는 벽화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되어 새로운 얼굴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또한, 동피랑은 여러 갈래의 골목길로 이뤄졌다. 마치 논 틀 밭 틀처럼 말이다. 혹여나 실수하여 잘못 들어서면 길을 잃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느 골목을 들어서라도 멋진 벽화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동피랑 보다 덜 알려진 곳이 바로 서피랑이다. 서피랑은 박경리 작가의 생가가 있는 곳이고 소설 <김약국의 딸들> 배경이기도 해서 곳곳마다 박경리 글들이 새겨져 있다. 서피랑의 유명 명소로는 피아노 계단, 서포루 중심의 서피랑 공원, 99계단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99계단이 인기가 좋다. 99계단과 가파른 언덕에 오밀조밀 붙은 집들이 어우러져 있는 다양한 조형물들이 다채로운 색상과 함께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이제 통영 인문학 여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통영 출신 거장들을 만났다. 문학인도 만났고 예술인도 만났다. 작가의 시나 소설 그리고 음악으로 들어가 잠시 휴식도 하고 대화도 했다. 그리고 맛과 멋도 즐겼다. 분위기 좋은 동피랑 카페서 커피도 마셨다. 어찌 보면 익숙한 풍경을 벗어나 낯선 풍경으로서의 여행은 우리에게 꿈을 꾸게 한지도 모른다. 때론 시인이 되게 하고 예술가가 되게 한다. 마치 달콤한 낮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통영이 그렇다. 이번 통영 인문학 여행은 필자에게 옹골진 여행으로 기억될 것이다. 2020/08/30 / 혜윰인문학연구소 / 뜨르
'▣혜윰인문학▣ > 인문학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2- 델리: 슬픈 역사, 식민, 그리고 권력의 흥망성쇠 - 쿠트브 미나르(Qutb Minar), 랄 킬라 Lal Qila (레드포트), 국립 간디 박물관, 라지가트, 찬드니 쵸크(Chadni Chowk)와 코노.. (0) | 2021.07.07 |
---|---|
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1 - 낯선 길 떠나기 (0) | 2021.06.25 |
인도 인문학여행 (0) | 2019.07.18 |
일본 인문학여행 이야기 5 - 오사카 : 문명과 문화 편집증 - 오사카성,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 오사카 역사박물관, 츠텐카쿠 히타치 (0) | 2019.04.04 |
일본 인문학여행 이야기 4 - 교토(Kyoto, 京都) (2) : 극단, 절대미, 정원 그리고 사찰 (0) | 2017.12.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