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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인문학여행 이야기 4 - 교토(Kyoto, 京都) (2) : 극단, 절대미, 정원 그리고 사찰

by 뜨르k 2017.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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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인문학여행 이야기 4 - 교토(Kyoto, 京都) (2) : 극단, 절대미, 정원 그리고 사찰

 


금각사(金閣寺): 킨카쿠지, 은각사(銀閣寺): 긴카쿠지, 철학의 길, 청수사(淸水寺): 기요미즈데라,

일본 인문학여행 네 번째 이야기는 교토 여행 두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금각사, 은각사, 철학의 길, 청수사 등을 탐방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여행의 깨달음은 발견하는 자의 몫이라고 했던가? 이말은 일정량 일리가 있다고 본다. 필자에게도 여행의 목적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인문학 여행은 더더욱 그렇다. 즉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옆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낯선 곳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인문학 여행이 더욱 값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상을 떠나 낯선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유물을 경험할 때 우리는 새로운 활력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인문학 여행이 필자에게 새로운 활력과 깨닫음을 얻은 좋은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번 일본 교토 인문학의 여행의 목적지는 금각사, 은각사, 철학의 길, 청수사 등이다.  철학의 길을 제외하고 금각사, 은각사,  청수사 등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있어 일본에서도 비중 있는 장소로 손꼽힌다. 이 곳들은 필자에게도 많은 물음과 의미를 던져준 장소이기도 하다. 

 

금각사(金閣寺): 킨카쿠지

 

제일 먼저 금박으로 빛나는 금각사(金閣寺)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일본에서 청수사도 유명하지만 금각사(金閣寺)도 역시 청수 못지않게 유명한 관광지로 교토의 양대 산맥이다. 만약 금각사(金閣寺)를 탐방하지 않고 교토를 왔다 갔다면 다시 와야할 만큼 아름다움의 자태를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금각사 입구를 통하여 처음으로 들어가면 호수 너머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금각사(金閣寺)가 눈으로 들어온다. 바라보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그야말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필자가 방문할 때가 한 여름이라 관광 비수기 임에도 불구하고 사진 찍을 수 없을 정도로 초만원을 이루어서 제대로 감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금각(金閣)은 금빛 자체만으로도 화려함을 주지만 금각의 형태를 보면 지붕의 선들이 자아내는 간결함은 더더욱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더욱 환상적인 것은 금각사(金閣寺) 앞에 있는 출렁거리는 호수에 비친 금각의 모습과 대칭을 이루어 마치 하나의 금각이 하나 더 물속에 있는 것처럼 착각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런지 호수를 경호지(鏡湖池)라고 부른다. 경호지란 의미는 거울 못이라는 뜻이다. 경호지(鏡湖池)에 비친 금빛 찬란한 전각의 모습 을 보면 금각이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하다. 

   

금각사(金閣寺): 킨카쿠지

 

원래 금각사(金閣寺): 킨카쿠지는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1397년 개인 별장 용도로 건축한 것이다. 원래 이름은 녹원사(鹿苑寺)였으나, 스님들의 사리를 보관하는 전각에 금박을 입혀 지금의 킨카쿠지, 즉 금각사(金閣寺)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정식명칭은 ‘로쿠온지’이고 선가의 종파의 하나인 임제종 소코쿠지파의 선사이다. 이곳은 가마쿠라 시대에 사이언지 긴츠네의 별장 ‘기타야마테이’가 있었으나 아시카가 3대 장군 아시카 요시미츠가 마음에 들어 1397년 사이온지 가문으로부터 물려받아 산장 ‘기타야마도노’를 건축하였다. 1950년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으나 1955년 복원된 모습의 현재의 금각사의 모습니다. 지금은 교토의 대표 관광지 중 하나다. 1994년 교토 문화재의 구성 요소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금각사(金閣寺): 킨카쿠지 중심으로 한 정원·건축은 극락정토를 이 세상에 표현했다고 한다. 여기에 고코마츠 천황을 초대하기도 했다. 요시미츠 사망 후 유언에 의해 무소 소세키 국사를 초대 주지로 하여 요시미츠의 법호 로쿠온인도노에서 두 글자를 따서 로코온지라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보통 일본 누각은 대개 2층이라고 한다. 그러나 금각은 3층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유홍준 교수의 말에 의하면 2층보다는 3층이 안정감이 있다고 말한다. 금각의 1층은 금박을 입히지 않고 목재를 그대로 두어 받침대 같은 느낌이 들고 금각은 이층과 삼층은 옻칠을 한 위에 금박을 입혔고 그리고 지붕은 널 지붕으로 위에는 금박 봉황이 날 듯 자리하고 있다. 일층은 침전 스타일이고 이층은 무가 스타일, 삼층은 중국풍의 선종불전 스타일로 무로마차 시대의 대표적인 건물이라고 한다. 이처럼 금각사는 1층, 2층, 3층이 조화롭게 어울러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금각사(金閣寺)는 소설의 제목으로 탄생하여 일본인들에게 많은 사람을 받고 있다.

 

일본의 탐미 문학의 대가이자 노벨문학상 후보로 세 차례나 거론된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대표작『금각사』이다. 작품에서는 말더듬이면서 추남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주인공 미조구치가 절대적인 미를 상징하는 ‘금각’에 남다른 애착과 일체감을 느끼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섬세한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금각사』는, 1950년에 일어난 실제 방화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어 쓰인 소설이다.

 

소설 금각사와 금각사(金閣寺): 킨카쿠지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전후 혼란시기에 젊은 비구승인 사미승이 너무나 아름다움에 질투를 느껴 없애버리려고 금각사를 불태워 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추남인 데다 말더듬이에 내성적인 성격의 주인공 미조구치는 유년 시절부터 고독한 삶을 살아왔다. 작은 절의 스님이었던 아버지는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라고 말하곤 했다. 미조구치는 추한 자신과는 정반대에 있는 ‘금각’을 미(美)의 상징으로 여기며 남다른 애정과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금각 자체를 자신과 일치 시킨다. 늘 아름다움에서 소외되어 있었다고 여기던 주인공은 전쟁 상황에서 비로소 절대미의 상징인 금각과 한낱 추한 말더듬이에 불과한 자신이 동일한 존재로 거듭난다고 믿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금각은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채 여전히 견고하고 빛나는 자태를 드러내는 반면에 자신은 다시 혼자가 된 기분에 휩싸이며 좌절한다. 아름다움(美)과 추함(醜)이 동시에 허무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금각은 절대미로 주인공 사미승의 정신에 군림하면서 숭배와 연모의 대상이면서 증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금각사는 대립되는 두 쌍의 치열한 대결의 소산이다. 미(美)와 추(醜) 즉 아름다움의 불멸의 금각과 추하고 말더듬이인 주인공과 대결이다. 절대의 존재인 금각과 상대의 존재인 주인공의 대결이다.

 

실재인 금각(金閣)과 그 금각에 대한 환상 속에 사는 주인공 즉 실재와 환상, 물질인 금각과 그 금각을 더없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주인공은 대립관계에 놓여 있다. 사미승은 불멸의 존재인 금각과 필멸의 존재인 나의 관계를 넘어서려고 시도한다. 금각의 죽음은 열등한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한다. 경계를 허물고 그래서 새로운 세계인 무화(無化)로 들어가기를 원했을 것이다. 마치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처럼 말이다. 그러나 전쟁 상황에서도 금각이 불타지 않아 실패로 돌아 간다. 그래서 주인공은 결국 금각사를 불태워 버린다. 소설은 정(正)인 금각과 금각 때문에 번민하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주인공은 금각의 영원한 미(美)에 이르고 소유하고 싶어를 것이다. 허무를 극복하고 무화에 이르고자 하는 주인공의 몸부림으로도 보인다. 필자가 보기엔 이것  역시 하나의 욕망일 뿐이다. 이것은 일본 교토학파가 서양철학의 주체와 대상을 극복하고자하는 했던 단어 “절대무”와 일맥상통하다. 더우기 소설 속의 주인공이 숭모한 절대미와 금각사 저자 미시마 유키오가 48세에 할복자살한 일 등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모두 상대를 넘어서서 극단(절대무, 절대미, 죽음)을 선택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왜 일본인들이 극단을이라는 단어를 선호하는지 대해서는 잘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본 철학이나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보기엔 이러한 것들은 아마 일본 선불교와 사무라이 전통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금각사의 정원은 금각이 위치한 연못을 중심으로 하여 크고 작은 섬들과 당시의 각 다이묘가 헌납한 바위들이 배치된 무로마치 시대의 대표적인 지천회유식 정원이다. 여기에서  지천회유식 정원이란 연못이나 호수를 중심에 두고 누각과 식물을 배치하여 돌아다니면서 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정원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지천회유식 정원은 가쯔라리큐(桂離宮) 정원이다. 가쯔라리큐는 교토의 서쪽 카쯔라 강 건너편 한적한 마을에 위치해 있다. 이 정원은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정원으로 도시히토 친왕과 그의 아들, 이렇게 두 대에 걸쳐 만들어진 정원이라고 한다.

 

 

금각사 정원과  가쯔라리큐(桂離宮) 정원

 

도시히토 친왕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한테 아들이 없자 양자가 되었던 사람이지만 곧 도요코미에게 쯔루마쯔라는 친아들이 태어나고 결국 친아들에게 후계자 자리를 주게된다. 그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안한 마음에 도시히토에게 영지 3천 석을 주어 독립된 왕가를 이루게 해주었다. 이 왕가가 하지조 궁가이다. 독립된 왕가를 얻은 도시히토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살려 가쓰라리큐를 세우기로 결심하지만 그는 가쯔라리큐가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그의 아들 도시타다가 1645년 완공을 하게 된다. 필자가 가쯔라리큐(桂離宮)을 소개하는 것은 이 정원이 지천회유식 정원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원이 자연친화적인 정원이라면 가쯔라리큐(桂離宮)의 정원이 보여 주듯이 일본 정원은 잘 짜여진 인위적 자연정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잘 짜여진 아름다운 분재들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일본 정원과 한국 정원을 비교하여 보면 차이와 다름을 확인 할 수 있다.

 

  은각사(銀閣寺): 긴카쿠지, 철학의 길

 

이제 은각사 여행 차례이다. 금각사(金閣寺)하면 은각사(銀閣寺)가 떠오르고 은각사(銀閣寺)를 하면 금각사(金閣寺)가 생각난다. 그만큼 금각사와 은각사는 잘 어울리는 쌍벽을 이루는 두 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각사와 은각사는 동시대에 세워진 절이 아니다. 금각사는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이 세운 것이고 은각사(銀閣寺)는 8대 쇼군이 세운 절이다. 일보 역사상 금각사(金閣寺) 시절에 이룩한 문화를 북산(北山)문화라고 하고 은각사 시절을 동산(東山)문화라고 한다. 북산문화는 우아한 품위를 지닌 공가 문화가 나타났다면 동산문화는 선가의 정신적 가치가 담겨있다. 금각사의 금색의 화려함과 대조적으로 은각사(銀閣寺)의 참선을 유도하는 은은함이 배여 있다. 동산문화에서 다시 무가문화로 넘어가게 되는 데 외형적 세련미와 내면적 깊이를 가지게 된다. 이런 무가문화가 일본의 전통사상에 뿌리내리게 된다. 따라서 은각사(銀閣寺)는 동산문화와 무사도의 분위가 서려있는 건축물라고 볼 수 있다. 은각사(銀閣寺)는 무로마치 막붕의 8대 쇼군인 요시마사가 1482년 47년 때 동산전을 짓어 거처함으로 시작된다. 요시마사는 8세의 어린나이 쇼군이 되지만 정치에 염증을 느껴 1473년 38세 쇼군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학문과 예술, 미술, 음악뿐만 아니라 건축과 정원 등에 심취하고 일가견이 있어 동산문화가 꽃피는 계기가 된다. 은각사(銀閣寺)는 아내를 위해 지은 서방사 정원을 모방하려고 했으나 오닌의 난으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그 뒤 동산전이 은각사(銀閣寺)의 모태가 되었고 서방사를 그대로 모방하여 그 보다 더 뛰어난 건물을 만들기를 원한 건물이 관음전이다. 오늘날 은각이라고 불리는 관음전이 1489년에 착공했지만 완공하지 못하고 요시마사는 중풍의 재발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참도: 동백나무 옹벽, 은각사 전경. 원형추 돌무지

 

그러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은각사(銀閣寺)를 탐방해 보자. 은각사(銀閣寺)는 통상 관음절을 은각사로 불리지만 은박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은각사로 들어가기전 총문, 중문, 당문 등 3개의 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방장과 고리들을 거쳐 은각이라고 불리는 관음절과 요시야마가 서재로 사용한 동구당, 백사마당과 연못으로 이루어진 정원이 있다. 일본에서 절로 들어가는 길을 참도(參道)라고 부르는데 총문에서 중문을 거쳐 절의 경내로 들어가는 은각사(銀閣寺)의 참도는 직각으로 깍여 6m의 담이 되어버린 동백나무가 50m정도 이어지는 데 동백나무로 옹벽을 쌓아올린 살아 있는 울타리이다. 이 길을 걸으면 아름다움, 참신함과 조화로움에 빠져 마치 저절로 마음이 참도(參道)를 향하는 경이로움마저 느껴진다.

여기서 참도(參道)는 마치 종교의 성역으로 들어가는 통과의례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중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가면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고 백사 마당에 굵은 물결을 새긴 은사탄(銀沙灘)과 비단 거울 못이라고 하는 예쁜 이름을 가진 금경지(錦鏡池)가 눈앞에 펼쳐진다. 처음에 필자는 정원에 모래가 있는 이유와 모래에 물결무늬를 있는 것을 보면서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게 은사탄(銀沙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사마당과 우뚝 솟은 원추형 돌무지는 신비롭기만 한다. 동구당(東求堂)을 비롯한 은각사(銀閣寺) 전체의 건물과 정원은 은은하면서도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치 자신이 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것이 동산문화의 선종적인 특징인 단아함이다.

 

 

은사탄, 숲속에서 본 은각사, 은각사 연못

 

필자는 은각사(銀閣寺) 정원을 걸으면서 메아리로 말하는 일본말 히비키( ひびき)가 생각났다. 무언가를 치면 울려나오는 메아리가 히비키이다. 히비키는 하이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이쿠는 단지 열일곱 자로 이루어진 세계 문학에서 가장 짧은 형태의 정형시 이다. 여기에서 히비키는 인간 내면에 깊은 곳에 깔려있는 것을 반영한 것이 히비키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은각사(銀閣寺)를 걸으면서 내면의 히비키를 듣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17세기 하이쿠 대가 바쇼의 시의 히비키를 감상해 보면서 은각사의 정원을 걸어보자.

옛 못에
개구리 뛰어드니
깊은 물소리

 

물소리가 신비를 푸는 열쇠인데 물속으로 뛰어드는 개구리만 보고 물소리의 울림을 듣지 못하고 그 다음 정원의 꽃 밖에 보지 못한다면 진정한 신비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은각사(銀閣寺)는 하이쿠 하나의 히비키 같았다.

 

은각사 숲속 길

 

은각사(銀閣寺)는 못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산책길에 따라 거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지천회유식 정원이다. 순로를 따라가면 은사탄 곁을 지나 돌아서면 방장과 동구당(東求堂)에 이르러서는 금경지 너머로 보이는 은각을 볼 수 있다. 은각사(銀閣寺) 뒤편을 오르면 숲의 한 중간에 들어선 기분이다. 거기에서는 은사탄과 금경지의 광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잘 정리된 소나무와 돌다리들이 아기자기하게 내려 앉아 있어 정숙하고 고요함이 묻어난다. 마치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더우기  숲속을 거닐면서 내려오다 보면  산길의 이끼가 양쪽으로 깔려있는 것이 보인다. 이끼가 깔려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초록 융단을 깔아놓는 듯하다.

 

철학자의 길 - 니시다 기타로(교토학파)

 

은각사를 돌아보고 조금 걷게 되면 철학자의 길을 만나게 된다. 은각사 긴카쿠지(銀閣寺)에서 남선사(南禅寺)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오솔길은 20세기 초반 일본에 서양철학을 들여온 일본 근대 철학자인 교토대 철학교수 니시다 키타로(1870-1945)가 즐겨 산책하는 길이라 하여 철학의 길이라 이름을 얻었다. 본래 철학의 길이라고 하면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철학의 길’이 원조이다. 이 길은 헤겔과 칸트, 괴테, 하이데거, 야스퍼스 등이 즐겨 산책했다고 하다. 필자는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철학의 길은 가보지 못했다. 일본 교토에 있는 철학의 길은 수평적이고 평평한 길이다. 대조적으로 독일의 철학의 길은 양 옆이 막힌 좁은 돌담길이고 가파른 언덕길이라고 한다.

 

철학의 길

 

아무튼 교토의 철학의 길을 지나다 보면 드문드문 작은 가게와 카페들이 늘어져 있고 법연원(法然院), 영관당(永觀堂), 냐쿠오지 신사, 노무라(野田)미술관 등이 자리 잡고 있어 산책에 즐거움을 더한다. 필자는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이 길을 산책하면서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니시다 기타로는 일본 교토학파의 한 사람으로 필자에게 아주 친숙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필자가 종교철학 박사과정(연세대) 중에 있을 때 관심 있게 연구한 분야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니시다 기타로는 교토학파의 선구자이다.  니시다 기타로의 주요저서는 《선(善)의 연구》, 《사색과 체험》, 《자각에 있어서 직관과 반성》, 《예술과 도덕》, 《철학의 근본 문제》등이 있다.  교토학파는 하나의 철학적 사고유형으로 교토대학교 종교 철학과에서 명치유신 이래 일본 최대의 철학자로 추앙받는 니시다 기타로에 의해 선도되어 발전된 것이다. 교토학파의 철학 속에는 서양 철학의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들어 있다. 이처럼 교토학파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철학자들로 구성으로 하나의 학풍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학풍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필자로서도 부러움을  숨길 수 없다. 교토학파로는 니시다 기타로《선의 연구》을 시작으로, 니시타니 게이이치《종교란 무엇인가 : 종교와 절대무》, 히사마쯔 신이지《무신론과 유신론 : 포스트모던시대의 종교와 철학이란》?, 아베 마사오 《선과 현대철학 : 선의 철학적 자리매김은 가능한가? 》 등을 들 수 있다.

철학의 길을 걷다보면 왠지 모르게 우리에게 사색의 무게를 실어 준다. 길 중간에는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의 비가 있는데 아래와 같이 쓰여 있다. “사람은 사람, 나는 나, 어찌됐든 내가 가는 길을 나는 간다.” 니시다 기타로는 일본 지식인의 필독서로서 여길만한 독보적인 존재이다. 서구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철학체계의 개척한 인물로서 일본의 최고의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일본 교토학파의 창시자이다. 니시다의 제자가 니시타니이다. 니시타니는 교토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니시타니는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와 교토대

 

“니시다의 제자로서 철학적 훈련을 받기 전에 나는 주로 니체(Nietzsche), 도스토예프스키(Dostoyevsky), 에머슨(Emerson), 카알라일에 끌렸고 또한 성서와 아씨시(Assissi)의 성프란시스(Francis) 에 관심을 가졌다. 일본인으로서의 소세키 나쯔메와 하꾸인 그리고 타쿠암 선상의 불교 저술을 가장 좋아했다. 이런 다양한 관심 속에 항시 계속된 근본적인 관심이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 즉 부처와 같은 ‘큰 의심(大疑)’ 이었다. 또한 바로 그때부터 선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다.”『내 철학의 출발점』 Ⅰ.229

 

이처럼 니시타니가 니시다를 만남으로 종교와 철학의 선입관에서 벗어나 ‘리얼리티의 본래면목’이라는 정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니시타니는 허무주의 정복을 현대철학의 과제로 보고 니시다의 동양적 무(無)에서 자신의 입장이 발견되자 ‘허무’나 ‘상대무’에서 ‘절대무’의 전환만이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엄청난 학문적으로 업적을 이룬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혹자는 일본 근대철학의 아버지이자 교토학파의 대부격인 니시다(Nishida)가 천왕일가를 "절대적 무"의 "장소"로 철학적으로 노래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교토학파의 초월론 역시 일본제국주의의 잔학성을 은폐하는 이론적 기반으로 작용했다는 설도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과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학문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여 일본의 군국주의로 나아가게 하고 제국주의를 동조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신성한 학문조차도 권력에 도구로 전락할 수 있음을 보면서 필자는 왠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청수사(淸水寺): 기요미즈데라

 

철학의 길의 탐방을 마치고 필자는 청수사로 향했다. 교토의 동쪽 끝에 가면 교토를 둘러 싸고 있는 히가시야마(東山)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 중턱 높은 언덕에 교토의 명물 청수사(淸水寺):기요미즈데라라는 절이 있다. 꽤 높은 언덕 위에 있기 때문에 이곳을 가려면 언덕길을 올라가야 된다. 필자는  우연히 대부분 사람이 올라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길이 순로로 알고 갔는 데 뒤에 보니 올라온 길은 순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필자에게는 색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공동묘지를 난생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색다른 경험에 감사할 뿐이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저자 유홍준 교수는 교토답사 일 번지는 청수사(淸水寺): 기요미즈데라이라고 말한다. 교토에 오는 관광객이 1년에 800만 인데 그중 거의 60%가 청수사를 다녀간다고 한다. 교토에 있는 많은 절중에서 유독 청수사가 인기 있는 것은 위치 때문이라고 한다.

 

청수사 가는 길 일본공동묘지

청수사는 원래 위치가 좋지 않아 절이 들어 갈 자리가 아닌데 벼랑의 가파름을 역이용해 무대를 건축함으로 깊은 산 속의 아름다움, 넒은 전망 그리고 맑은 바람을 끌어들인 장소로 변모되었다. 더우기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139개의 큰 기둥을 정교하게  12m의 나무로 축대를 만들어 그 위에 본당을 지은 것이다. 이 기둥이 큰 본당의 한쪽을 지탱하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인지 탐방객들에게 청수사는 가장 경탄하는 장소로 손꼽힌다. 기둥 위가  청수사 본당 마루의 무대이다. 특이한 테라스의 형태와 절벽이 잘 어울린 이 무대(舞臺)는 예배의식의 한 형태로 부처께 승무(僧舞) 등을 추워 올리는 곳이기 하다. 무대라는 이름도 예전에 십일면천수관음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현재는 탐방객들의 전망대로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며 언덕 위로 돌출된 본당 마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공중그네를 타는 것 같은 착각을 불로 일으킨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기요미즈의 무대에서 뛰어내리는 각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관음보살께 필사의 각오로 기도하라. 그러면 관음보살이 보살핀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할 때는 죽기를 각오하고 매진하라는 의미로 현재에도 널리 활용된다. 우리나라의 속담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일백 상통한 듯하다. 실재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에 이곳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 때문에 많은 사람이 생명을 담보로 뛰어내렸다. 실재로 청수사의 고문서에 따르면 1694년부터 1864년 동안 170년간 투신 사건이 234건 발생했고 생존율은 84.5%였다. 그래서 과감한 결단을 두고 ‘청수 의 무대에서 뛰어내릴 셈 치고’ 말이 생겼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청수사

기요미즈데라의 본당(本堂)에는 지금까지도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은 유명한 본존십일면천수관음상이 안치되어 있다. 본당 앞에 무대에 있는 바닥의 나무판은 20-30년마다 한 번씩 교체하고 본당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을 겹겹이 켜서 만들었는데 십일면관음보살을 상징한다. 아무튼 이렇게 지어진 본당은 1995년 교토의 대지진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의 견고함을 자랑한다. 게다가 청수사(淸水寺)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이고 2007년 7월 7일 발표된 ‘세계 신 7대 불가사의’의 후보로 거론될 만큼 일본 유산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청수사(기요미즈데라) 본당도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경내에 유물 15건도 중요문화재에 등록되어 있는 것처럼 청수사는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절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또한 청수사(淸水寺): 기요미즈데라는 아주 재미있는 창건 설화를 가지고 있다. 지금 창건설화의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가 보자. 778년에 나라(奈良)에서 온 승려 현심(賢心(뒤에 엔친:延鎭)이 꿈에서 계시를 받고 오토와야마(音羽山)에 도착했다. 이곳 암자에는 수백 년에 걸쳐 수행을 계속해오던 교우에이(行叡)라는 이름의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엔친에게 자신은 지금부터 동쪽 나라로 여행을 떠나니 뒤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엔친은 암자를 짓고 수행에 열중했는데 어느 날 한 명의 무사가 방문했다. 그의 이름은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인데 그는 임신한 부인 미요시 다카코의 병을 치료하는 데는 사슴의 생피가 좋다는 말을 듣고 사슴을 사냥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엔친은 살생을 금하고 부인의 순산을 기원했다. 덕분에 무사히 자식을 얻은 다무라마로는 엔친에게 깊이 귀의하여 기요미즈테라를 건립하고 십일면관음입상(十一面觀音立像) · 협사인지장보살 · 비사문천상을 안치했다.(Daum 백과사전 인용)고 전해지고 있다.

 

위의 설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청수사는 헤이안쿄(교토)로 천도하기 직전인 780년경에 지어진 절이다. 이 절을 창건한 사람은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가이고 백제계 도래인의 후손이다. 그의 문중은 원래 청수산 아래에 살고 있는 대대로 야마토정부에서 군사를 담당해온 가문이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주로 고구려 도래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도래인 이야기는 나라 편에서 언급되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라와 더불어 교토도 한국인들의 흔적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오토와야마(音羽山)에서 내려오는 세 줄기 물, 니오몬(仁王門)과 니시몬(西門)

 

원래 청수사(기요미즈데라)의 이름은 기타카논지(北觀音寺)이다. 그런데 오토와야마(音羽山)에서 내려오는 물이 맑아 기요미즈데라(淸水寺, 물 맑은 사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 줄기로 떨어지는 물줄기 중 왼쪽으로 학업, 연애. 건강을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 마셔야지 세 가지 물을 모두 마시면 효과가 없다고 한다. 또한 기요미즈데라의 입구에 두 개의 문이 있는데 니오몬(仁王門)과 니시몬(西門)이다. 앞에 있는 니오몬 기둥에 귀를 기우리면 멀리 떨어진 기둥 근처에서 하는 이야기도 들리고 이 기둥을 쓰다듬으면 귀가 좋아지고 좋은 소리만 듣는다는 전설이 있다. 속설과 전설은 말 그대로 속설과 전설이다. 때문에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다.

 

아무튼 필자는 이제 일본 인문학 여행 이야기 네 번째 이야기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빛나는 금박으로 입힌 금각사(金閣寺): 긴카쿠지를 시작으로 자연을 정원 안에 담아 놓은 은각사(銀閣寺): 킨카쿠지, 사색의 길인 철학의 길을 걸쳐 교토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청수사(淸水寺): 기요미즈데라을 탐방함으로 일본 네 번째 인문학 여행을 마치게 된다. 인문학 여행을 통하여 우리가 깨닫는 것은 여행이 답을 가지고 방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행을 통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또 다른 목적지로 가는 여정에 우리들이 있을 뿐이다. 인문학 여행은 아름다운 유물 앞에서 기념사진 한 컷 찍는 여행은 아니다. 그렇다고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감상 위주의 여행에서 벗어나 인문학적 시선을 가지고 뚜벅뚜벅 순례자의 길을 걷는 인문학 여행이 된다면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다음 인문학 여행의 목적지는 일본 인문학여행 이야기 다섯 번째 이야기로 오사카이다.     2017/12/31  / 혜윰인문학연구소 /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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