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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인문학여행 이야기 3 - 교토(Kyoto,京都) (1) : 교토의 역사와 조선인들의 아픔의 흔적-

by 뜨르k 2017.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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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인문학여행 이야기 3 - 교토(Kyoto,京都) (1) : 교토의 역사와 조선인들의 아픔의 흔적-
-교토: 교토역,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 교토국립박물관(京都国立博物館), 귀무덤, 도요쿠니 신사

 

우리가 여행하는 목적은 낯선 세계를 만나고 배움의 여백을 열려놓고 역사와 타자의 존재를 통해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앎과 편견의 벽을 깨뜨리고 성찰하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때때로 길을 잃고 헤매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풍경으로의 여행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준다. 또한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게 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찾아가도록 도와 준다. 20세기 위대한 성자인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한다.“길을 떠나기 전에 자기 자신을 이해하라.” 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여행은 무슨 신비로움을 느끼기 위해서 가는 길은 아닐 것이다. 다만 여행 중에 나 자신이 있을 뿐이다.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자기 자신의 벽을 깨뜨리는 작업인 것 같다.

이번 일본 인문학여행 세 번째 이야기는 교토이다. 교토 중심지역만 탐방한다고 할지라도 꼬박 3-4일 정도는 걸린다. 만약 짧은 시간에 교토를 탐방한다고 계획했다면 일정상 무리가 되기 때문에 조정하는 것이 좋다. 필자도 교토 탐방 일정을 이틀로 잡았지만 하루 더 갔던 이유를 굳지 설명하지 않더라도 알 것이다. 그 만큼 교토는 역사의 도시이며 일본 문화의 엑기스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에 등재된 사찰이 13곳이고 신사가 3곳, 성이 1곳 등 17군데이다. 무라이 야스히코(村井康彦)의『교토 사적견학』에 의하면 교토전체에 사찰이 3,030곳, 신사는 1,770곳이 넘어 사사(寺社)가 약 5,000곳이나 된다고 한다. 참으로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규모이다. 사람들이 교토를 역사의 도시라고 말한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것 같다. 필자 역시도 교토의 여러 지역을 탐방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사카에서 교토를 빠르고 쉽게 가는 방법은 JR 오사카 역에서 출발하면 된다. 특급 산다바도, 신쾌속, 쾌속, 보통 등 다양한 열차가 운행된다. 누구나 주의해서 탑승하지 않으면 엉뚱한 열차를 탑승하여 개고생을 할 수도 있다. 신칸센을 탈 경우는 북쪽에 있는 JR 신오사카 역까지 가야한다. 아니면 한규전철이나 케이한 전철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JR 선 보다는 15분정도 더 소요되는 불편함이 있다. 필자는 두 번은 JR 신쾌속으로 한 번은 한큐전철을 이용하였다. 그러면 먼저 교토를 탐방 전에 교토의 역사를 더듬어 보는 것도 여행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교토역과 교토시내 모습

 

교토는 794년 새로운 수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약 400년간 헤이안 平安시대를 거치면서 한 나라의 수도에 걸맞은 도시로 발전했다. 현재 교토에 남아 있는 대부분이 사찰은 이 때 지어진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당시의 모습이 많이 사라져서 과거엔 어떤 모습인지 찾아보기 힘들지만 남아있는 사찰의 수만 보더라도 교토가 얼마나 발전한 도시였는지 짐작케 한다. 교토는 1185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幕府 바쿠후)를 세우면서 그 영향력이 감소되기 전 까지 수백 년간 일본의 수도로 정치·경제·문화 중심이었다. 여기서 막부(幕府)란 무가(武家)에 의한 정치조직을 뜻한다. 에도 江戶시대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대부분의 정치·경제 영향력이 도쿄(에도)로 넘어가고 천황이 순수한 상징으로만 존재하게 되면서 교토는 수도로서 힘을 잃고 서서히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거치며 도쿄가 새로운 수도가 되자 교토는 완전히 과거의 영광을 잃고 사람들에게 점점 멀어져 갔지만 공업화와 수많은 유적지 개발로 인하여 옛 모습의 영광을 어느 정도 되찾고 있는 중이다.  

 

교토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금각사, 은각사, 청수사 등이 있는데 필자는 먼저 교토역,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 교토국립박물관(京都国立博物館), 귀 무덤 등을 탐방하였다. 그리고 교토 내에 있는 다양한 문화재와 옛 일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기온거리 등을 돌아보는 것도 여행의 팁이라고 볼 수 있다. 교토 여행은 시내버스로 이동을 하는 것이 편리하다. 필자 역시 버스 1일 패스 티켓을 구입하여 이동하였다. 교토 역에서 출발하는 몇몇 버스는 특별히 관광지 중심으로 노선이 짜져 있어서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역사의 도시 교토 탐방을 조심스럽고 차분하게 시작해 보자.

 

 교토 역 빌딩과 교토타워

 

교토 역에 도착하며 제일먼저 마주하는 것이 교토역과 교토타워이다. 교토역 빌딩은 JR 니시니혼의 카라스마츄오구 출구 쪽 건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1997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교토빌딩의 설계자는 히로시이다. 당시 유명한 건축가들이 경쟁하여 주변 환경과 조화를 강조한 히로시 설계가 선정되었다. 교토 역 빌딩의 특징은 4000장의 유리를 사용한 외벽과 1층부터 천장까지 펼쳐져 있어서 아름답다.

    

교토 역 빌딩과 교토타워

교토역 계단(LED)

 

교토 역 빌딩에 하늘광장이라는 곳이 있다. 몇 번의 에스컬레이터를 갈아타야 오르는 곳이다. 에스컬레이터는 건물 내부에 있지 않고 외부에 있어서 에스컬레이터 옆에 계단마다의 운치를 그대로 볼 수 있어서 더더욱 정감이 가는 장소이다. 이처럼 171개의 계단으로 이루진 대 계단에는 15,000개의 LED가 설치되어 있어 계절에 따라 다른 디자인으로 탐방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밤에도 더더욱 아름다움이 더한다. 171개의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하늘광장이 있다. 굳지 교토타워를 오르지 않더라도 교토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출구를 중심으로 양 옆으로 놓여 있는 에스컬레이터의 광경과 교토 역 빌딩의 동서를 연결하는 스카이웨이(Sky way) 역시 볼만하다. 이 곳을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이유를 아렴풋이 알 것 같다. 건축은 단지 사람을 수용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사람과 어울리며 즐기고 나누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교토역 건물이 그렇다. 그리고 교토 역 바로 앞에 보이는 교토타워는 교통의 상징으로 타워의 높이만 131m이고 전망대의 위치는 100m로 철골을 사용하지 않고 특수 강판을 사용해 원통형 구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지진이나 태풍의 영향을 받지 않아 안정성을 인정받고 있는 타워이다. 모든 건축물은 안전이 최우선이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건축물은 인간에게 재앙이 있을 뿐이다.  건축에서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산업적인 측면의 건축이 아니라 문화적 측면의 건축이다. 이제 건축은 문화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지진의 나라 일본의 교토타워를 보더라도 이 두 가지를 잘 실천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먼저 교토 역에서 가까운 교토국립박물관(京都国立博物館)으로 탐방해 보자.

 

교토국립박물관(京都国立博物館)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의 바로 옆에 위치한 교토국립박물관(京都国立博物館)은 도쿄국립박물관, 나라국립박문관와 함께 일본의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교토 국립박물관(京都国立博物館)은 1897년 5월에 ‘제국교토박물관’이란 아름으로 개관하였으나 1952년에 '교토국립박물관'으로 개명했다. ‘교토국립박물관’은 110년의 역사를 지닌 일본 제일의 박물관이다. 필자가 탐방의 결과도 마찬가지이다. 가치 있어 보이는 거대한 불상들과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역사적 유물들의 모습 앞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국립교토박물관 구관 신관

 

박물관 관람은 3층에서부터 관람을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명 일본에서 말하는 순로(順路)이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만나는 유물은 고대 교토의 유물과 당삼채를 포함한 외국 유입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주로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교토의 문화재를 수집, 보관, 전시하고 있다. 특별전시회가 한 해에 한 두 차례씩 열리고 있다고 한다. 박물관 내부는 일체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소지품을 맡기고 관람해야 하기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한다. 필자 역시 전혀 촬영을 할 수 없었다. 관람을 하다보면 다양한 불교와 관련된 유물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에 필자는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물관에 1만 2,700여점의 유물은 보유하고 있고 이중에 일본 국보가 27점, 중요문화재가 181점이 있다고 하니 문화재 보고임이 틀림없는 듯하다. 일본의 고대와 근대 회화 가운데 빼어난 작품만을 엄선해서 전시하는 회화 전시실은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박물관의 핵심 볼거리이다. 일본 조각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조각 작품 전시실과 도자기 작품은 몇 시간을 두고 감상해도 아깝지 않은 높은 수준의 작품성을 자랑한다. 유물은 자신과 대화하려는 자에게만 그 목소리를 들려준다. 아르놀트 하우저 (Arnold Hauser)는《예술사의 철학》에서 “예술은 침묵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침묵으로 대하고, 자기에게 질문하는 사람에게만 속삭인다.”라는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필자 역시관람하면서 여러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필자의 모든 지적 양식을 자극하면 메아리 쳤다.

박물관 건물 자체인 본관과 정문은 1969년에 중요문화재로 지정이 되었으며 현재 본관 건물은 특별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본관 건물은 메이지(明治:명치)건축의 진수를 보여주는 건축물이라고 볼 수 있다. 본관 건물의 설계자는 나라국립박물관을 설계한 가타야마 토쿠마(片山東熊)인데 아카사카리쿠(赤坂離宮:적판난궁)를 설계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프랑스의 도리아식 건축 양식으로 지워진 벽돌 건물이다. 자세히 보면 정면에는 인도의 공예와 조각의 신이 새겨져 있고 그리스풍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역시 일본건축의 문화습합은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물론 필자는 특별 전시기간이 아니라서 본관 상설 전시장은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본관 안에 지상 2층, 지하 1층을 합쳐 20실의 진열실이 있으며 수장품은 만여 점을 넘는다고 한다. 필자는 특별전시관에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교토박물관 바로 옆에 있는 산쥬산게도로 향했다.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

 

제일 먼저 교토여행에서 가야할 장소로 꼽으라면 교토역에서 가까운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라고 말한다. 산쥬산겐도가 교토 역에서 가까기도 하지만 1000개가 넘는 관음보살을 보기위해서 일 것이다. 산쥬산겐도는 금으로 된 천수관음상이 1001개나 있는 사찰로 유명한 곳이다.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은 정식 명칭은 렌게오인(연화왕원: 蓮華王院)이고 연화왕(蓮華王)이란 천수관음의 별칭이다. 사찰 본당의 건물의 길이만 해도 120m이고 일본에서 오래되고 가장 긴 목조 건물이면서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긴 건물의 길이 120m을 이용해 활쏘기 대회를 에도시대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산주산겐도에서 숭배하는 불교의 자비의 신인 관세음보살도 33가지로 변하여 중생을 구제한다는 전해지고 있다. 산주산겐도이라는 말도 ‘33개의 칸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라는 의미로서 본당을 옆에서 봤을 때 33개의 칸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산쥬산(삼십삼)이란 명칭이 붙었다.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

현재에 필자가 보고 있는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의 모습은 1249년 화재로 전소되고 1266년 재건된 것이다. 일본 건물의 특징이 그러하듯 지진이 많은 일본에서 건물을 오래 버티게 하는 방법으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짓곤 하는데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역시 그러한 방법으로 건축하였다. 우리나라의 영주 부석사도 못을 사용하지 않고 건축한 건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무려 1,000년의 세월 동안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일본 건축 못지않게 우리 조상들의 건축에 대한 기술의 놀라움을 되새기게 된다.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와 옆 건물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의 건축은 역사적으로 동기를 가지고 있다. 일본은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까지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어서 당시의 귀족들은 평화를 찾으려는 시도로서 교토에 많은 사찰들을 지었다고 한다. 어떤 사찰들은 불교 성상들을 모셔 두는 역할을 했는데 산주산겐도 그 당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종의 보관소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잠시 건축에 대한 역사적 배경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후지와라(藤原), 미나모토, 타이라, 타치바나와 함께 일본 4대 본성 중 하나로 헤이안 시대 때 섭정으로 전성기를 누린 가문이었던 절대 권력의 후지와라의 집안에 왕비들이 줄줄이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자 끝내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후지와라 가문이 쇠퇴를 하고 고산조 천황 때부터 왕권 강화를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바로 '인세이(院政,원정)제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인세이(院政)제도’란 천황자리를 후대에게 일찍 물려주고 자신은 상황이 되어 섭정하는 정치를 말한다. 상황이 머무르는 궁을 인(院)이러 불렀기 때문에 인세이(院政,원정)라고 말하다. 상황(上皇)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 시스템의 중요한 전략을 구상하고 작은 행정 실무는 아들 천황에게 맡기는 구조이다. 과거 귀족들의 셋칸정치(摂関政治)와 비슷하다. 그러나 인세이제도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는데 만약 천황이 후사가 없이 상황보다 먼저 죽게 되면 새로운 천황이 등극할 때 상황이 2명이 되는 경우가 생기는 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는 상황끼리 서로 권력 다툼을 벌렸다. 실재로 그런 권력 다툼의 혼란의 시기가 있었다. 그리하다가 설상가상으로 1156년에는 천황이 상황의 섭정에 대해 반기를 들면서 고시라카와 천황과 스토쿠 상황이 서로 다투는 ‘호겐의 난’이 일어난다. 이때에 무사들을 난에 끌여 들인다. 대표적인 무사가 겐지(源氏)파와 헤이시(平氏)파였다. 겐지는 상황 쪽으로 헤이시는 천황 쪽을 도와주는데 결과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승리가 된다.

상황의 섭정이 싫어서 구테타를 일으켰는데 결국 고시라카와 천황은 자신이 상황이 되어서 실권을 잡는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났다. 역시 행정실무는 천황에게 맡기고 자신은 권력을 휘둘리는 된다. 이런 어지러운 상황이 앞에 권력을 빼앗기고 되찾는 상태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다이라노 기요모리에게 명을 내려 절을 짓게 되었는데 그 절의 본당이 산주산겐도이다. 결국 천황과 상황이 권력 다툼을 하면서 무사들을 끌어들이고 무사들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 왕권이 쇠락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이것을 계기로 천왕의 권력이 약해지고 무사의 권력이 강해지는 일본 역사에서 바쿠후(막부: 幕府)가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결국 이런 연유로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는 지어지게 된다.

그럼 이제 산쥬산겐도 실내 안으로 들어가 보자.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의 전당 안으로 들어가면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1,001개나 되는 천수관음 황금상이 우리의 눈을 압도한다. 혼도에 천수관음상을 중심으로 양쪽에 500개씩, 1001개의 불상을 늘여져 있고 관음 주변에는 28개의 수호신 상들이 마치 잘 정렬된 군인의 열병 모습처럼 서 있다.

 

천수관음 황금상과 수호신들

천음관음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의 생김새, 성격 그리고 가치관이 다르듯 각각의 불상은 얼굴과 의상이 모두 다름을 볼 수 있다. 하나의 큰 얼굴에 10개의 작은 얼굴들이 붙어있는데 그 작은 얼굴의 표정이 다 보일 정도로 세밀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관람객들이 멈춰 서서 발을 떼기 힘들 정도로 앞으로 나아가지를 않는다. 천천히 자세하게 돌아보아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고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는 이 말을 실천한 듯 보였다. 각 불상 앞에 불상을 수호하는 신들의 상이 있는 데 그 신들은 나무 조각상이지만 살아있는 생생함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성실한 작품들이다. 여기서 필자는 일본 문화의 거대함과 섬세함, 그리고 다양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그것을 일본 문화의 극대, 극소, 극다라고 말하고 싶다. 본당 중앙에 있는 중존은 불상 조각가 단케이가 82세 때 만든 작품으로 가마쿠라 시대의 명작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등신입상 중 124구는 헤이안 시대 작품이고, 나머지 800여구는 가마쿠라 시대의 재건 때 작품인데 복원 기간이 무려 1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아무튼 일본인들의 다시 필자는 산쥬산겐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한국인에게 한 많은 귀 무덤과 도요쿠니 신사로 몸을 돌렸다.   

 

귀무덤과 도요쿠니 신사

 

먼저 귀 무덤으로 향했다. 귀 무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있는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건너편 공원에 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아주 작은 동네 놀이터와 접해있어서 귀 무덤인지도 구분이 안갈 정도 찾기가 어려웠다. 처음에는 귀 무덤이 아닌 줄 알았다. 왜냐하면 초라하기도 하지만 아이들 놀이터와의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원래 귀 무덤은 사람의 “귀”를 묻은 무덤이다. 그러나 그곳에 묻힌 것은 사람의 귀가 아니라 “코”이다. 왜냐하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목 대신 베어갔던 것이 귀보다는 코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코 무덤이 되어야 하는데 귀 무덤이 되었을까? 이 이야기는 뒤에 언급 할 것이다.

귀무덤와 비석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들은 코를 베어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코 영수증을 써주고 일일이 그 숫자를 센 뒤 장수들에게 감사장을 써 보냈다고 한다. 그런 다음 일본 전역을 자랑스럽게 순회한 뒤 지금 교토에 있는 귀 무덤 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심지어 죽은 사람뿐 아니라 산 사람의 코 까지도 베어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원래는 전쟁터에서 상대했던 조선 군인의 코만 잘라 보내야 했지만 더 많은 공을 인정받고 싶어서 일반 백성들의 코마저도 베어 가져 갔던 것이다. 필자는 참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귀 무덤은 일본인들의 잔인함 그 자체이다. 이러한 귀 무덤인 이총이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에  가슴은 더 먹먹하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필자가 보고 있는 바로 교토에 있는 귀 무덤이다.

 

처음에는 도요데미 히데요시는 조선인들의 목을 베어 보내라고 명령을 했다. 그러나 그 수가 많아지자 코와 귀를 잘라 보냈게 되었는데 그것도 소금에 절여서 보냈다. 이러한 방법은 상대방인 조선에 모멸감을 주고 자신의 공적을 나타내기 위한 최고의 행위였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저주를 받기가 두려워 무덤을 만들고 석탑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마치 일말에 양심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이런 코 무덤이 왜 현재의 명칭인 귀 무덤이 되었는가 하는 의문점이 많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에도시대 초기 유학자 하야시라산(林羅山)이 ‘코 무덤’은 너무 야만스럽다며 ‘귀무덤’이라고 하자 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귀 무덤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교토시가 세운 코 무덤 설명 팻말에는 ‘귀 무덤’이라 쓰고 괄호 안에 ‘코 무덤’을 덧붙여 놓았다. 이 코 무덤에는 조선인 12만 6000명분의 코와 귀가 묻혀 있다. 일부는 사천시로 옮겨갔으나 완전한 이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고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도 별도의 예산이 전혀 지원이 되지 않아서 개인이 3대째 무덤을 관리한다고 한다. 참으로 씁쓸하다. 필자는 이런 씁쓸함을 강연환씨 ‘귀 무덤’ 의 시를 읊으면서 달래고자 한다.

 

*귀무덤  / 강영환

낯선 이명으로 모국어가 울었다
날개 달아 가고 싶은 땅
그러나 끝내 불러 주지 않았다
귀 속을 날고 있는 박새와
물결로 밀려가는 서녘 구름떼
모시나비 날개 짓에 함께 춤추는
온 음계 위에서 떨어지던 귀
눈 먼 올챙이관이 혼자 울었다
귀를 잃고 버리지 못한 혀가
이명 속으로도 돌아오지 못한 채
귀에 익은 풀벌레 노래 속으로 걸어간다.
몸을 잃고 물선 땅에 묻혀 있을 때
수십만 귀를 모두 열어 두어도 모국어는
끝내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아
날개를 달고 싶은 귀다
*귀무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자신들의 전공을 보고하기 위해 코와 귀를 베어 자기나라로 가져갔다. 이들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귀 무덤이라고 하며 현재에 교토와 대마도에 있으며 우리나라는 이를 송환조차 하지 않고 방치해 두고 있다.<2017 소금시-귀>, 시와 소금사, 2017.10

 

우리가 흔히 어른들이 아이들이 위험한 행동이나 잔인한 행동을 하려 할 때 “에비!” 하고 겁주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때 ‘에비’는 귀와 코를 뜻하는 한자어인 이비(耳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지금 역시도 어린아이에게 주의 줄 때 사용되곤 한다. 이처럼 귀 무덤은 조선인의 한이 서린 곳이며 필자를 포함하여 한국인의 아픔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흔적이다.

 

  도요쿠니 신사(豊国神社)

 

도요쿠니 신사는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신으로 모신 신사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 같이 귀 무덤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시간이 허락되면 들려도 좋다. 처음에 귀 무덤에서 추모한 뒤라 그런지 왠지 묘한 감정을 들어 신사를 방문하고 싶지 않았었다. 그러나 필자는 가는 발길을 멈추지 못하고 결국 도요쿠니 신사를 들어가 버렸다. 방문할 당시에는 이 신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사인줄도 몰랐다. 뒤에 도요쿠니 신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 놀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의 아픔의 역사와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이름 도요토미 히데요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신경이 예민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일본 인문학여행 이야기 5편 오사카성에서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귀무덤과 도요쿠니 신사 탐방 내내 찝찝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를 한국 사람이면 누구든지 어렴풋이 알 것이다.  

 

도요쿠니 신사(豊国神社) 입구

그래도 역사는 재해석하고 반드시 성찰해야한다. 이것이 도요쿠니 신사를 더듬는 이유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은 후에 1599년 시신을 유언에 따라 호코지(方広寺)에 가까운 아미다 산정에 매장했다. 그 기슭에 도요쿠니 신사를 창건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요제이 천황으로부터 정1위의 신위와 호코쿠 다이묘진(豊国大明神/풍국대명신)이라는 신호를 받아 신으로 모셔지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 시켜버리려고 시도했다. 이 이야기는 토요쿠니 신사 옆에 있는 범종과 관련되어 있다.    

도요쿠니 신사(豊国神社)

도요쿠니 신사 옆에 호코지라는 절에 범종이 하나 보인다. 이 범종 적힌 글자 8자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이에야스에서 멸문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다이묘로 쫓아낸 후에도 그의 존재가 항상 마음에 걸렸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명사건(鐘銘事件)’을 계기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없앨 기회를 잡는다. 종명사건이란 호코지(方廣寺) 재건 당시 있었던 사건을 말한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호코지(方廣寺) 재건 공사를 하면서 그 절의 범종에 ‘국가안강(國家安康) 군신풍락(君臣豊樂)’이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다. 실재로 필자도 그 범종에는 여덞 글자가 하얀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 하였다. 이에 대해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은 ‘국가안강’은 이에야스(家康)을 安자로 잘라버린 것이고 ‘군신풍락’은 臣과 豊을 이어 도요토미(豊臣)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으로 이는 도쿠가와 가문을 저주하기 위해 새긴 글귀라고 트집을 잡았다. 그리고 이를 내세워 히데요리가 있던 오사카 성을 공격한다. 1615년 오사카성 전투를 끝으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하게 된다. 에도 막부로부터 신호가 폐지되었으며 신사가 소유한 땅은 몰수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범종와 국가안강(國家安康) 군신풍락(君臣豊樂)

이후 250년이나 지나서야 다시 신사를 재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1위에 신위는 신히요시 신궁으로 은밀히 이전되었다. 1868년 메이지 천황의 오사카 행차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했으면서도 막부를 열지 않은 점을 들어 임금을 받들 줄 아는 공신으로 추켜세워 신사를 재건했다. 그리고 1873년 관사로 승격되어 국가에서 관리하였고 1880년 호코지(方広寺)대불전 터였던 현재의 땅에 신사 건물이 완공되어 신위가 옮겨졌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도요쿠니 신사에 대략적인 역사적 배경이다. 도요쿠니 신사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인들에게는 영웅인지는 모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안겨준 사람이다. 필자는 도요쿠니 신사에 별 다른 관심은 없었고 일말의 경외감도 느끼지 않는다. 만약 신사가 아무리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할지라도 필자에게 대상화된 하나의 건축물에 불과하다. 신비로운 모습도 전혀 없으며 하나의 이국의 문화재로 스쳐갈 뿐이다.

 

필자는 이제 일본 인문학여행 세 번째 이야기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교토 시내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교토역(교토타워)을 시작으로 11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교토국립박물관(京都国立博物館)과 상상을 초월한 1,001개나 되는 천수관음 황금상 있는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 걸쳐 조선인의 한이 서린 귀 무덤, 외면하고 싶은 도요쿠니 신사 등을 탐방하였다. 어찌 보면 인문학 여행은 삶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인문학 여행의 주체이고 대상인 인간은 항상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보면 현재의 자신을 다듬어나가야 한다. 과거의 유적을 통하여 성찰하고 공감을 통하여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 여행은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현재만 있을 뿐이다. 다음 인문학 여행의 목적지는 교토의 금각사, 은각사, 철학의 길, 청수사이다.   2017/12/ 26  / 혜윰인문학연구소 /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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