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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2- 델리: 슬픈 역사, 식민, 그리고 권력의 흥망성쇠 - 쿠트브 미나르(Qutb Minar), 랄 킬라 Lal Qila (레드포트), 국립 간디 박물관, 라지가트, 찬드니 쵸크(Chadni Chowk)와 코노..

by 뜨르k 2021.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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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2- 델리: 슬픈 역사, 식민, 그리고 권력의 흥망성쇠 - 쿠트브 미나르, 랄 킬라(레드포트), 국립 간디 박물관, 라지가트, 찬드니 쵸크(Chadni Chowk)와 코노트 플레이스

먼저 델리는 슬픈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역사적으로 상처가 깊은 곳이 바로 델리이다. 처음부터 델리가 인도의 수도가 아니었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 콜카타(Calcutta, 2001년 캘커타에서 콜카타로 개명)에서 수도를 델리로 옮긴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슬람의 노예 왕국이 세워진 곳이고 영국 식민지 등 권력의 중심지로서 변화무상한 곳이 바로 델리이다. 힌디어 ‘딜리 두루 해’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은 ‘델리는 멀다’라는 말이다. 아직도 목표 달성이 멀었다는 뜻이다. 델리는 고대로부터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있는 고도(古都)이다. 서양인들이 풍요로운 힌두스탄 평원을 점령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1857년에 영국의 지배에 대항해 대반란을 일으켰던 역사도 있다. 아직도 델리는 환상도 펼칠 수 없고 평생 발을 디딜 수 없는 민중들에게 먼 도시인지도 모른다. 인도 정치, 교통 중심지이기는 하나 오래 머물러야 하는 흥미로운 도시는 아닌 듯하다. 일찍이 인도 간디가 말한 것처럼 ‘인도의 혼은 촌(村)'에 있기 때문이다.

델리, 도시는 잔혹하다. 빈부의 격차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물질문명을 비판 없이 받아들여 전통적인 인도의 혼이 퇴색된 모습도 눈에 띈다. 그런데도 무굴제국 시대의 분위기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올드 델리를 관광해 보면 새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좁은 골목길과 큰길을 지나다 보면 인도만의 색채와 내음 그리고 웅성거림을 온몸으로 음미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그 시대로 돌아가는 듯 착각이 들 정도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역사를 더듬어 보면 오늘날 인도의 모습을 바라보는 생각들이 사뭇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델리는 황금 삼각지대의 관문으로 5,000여 년 동안 인도의 수도이다. 또한 델리는 인도의 교통, 문화 중심지로 풍부한 문화유산과 볼거리,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하다. 보통 인도 관문인 델리를 비롯해 설레는 인도 여행이 시작된다. 인도의 관문인 델리를 중심으로 델리, 타지마할의 도시 아그라, 핑크 시티 자이푸르가 인도 여행의 핵심 코스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인도의 정체성이 가장 잘 담겨있는 인도여행의 황금의 삼각지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도인의 영적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바라나시를 포함하면 북인도 핵심 코스는 모두 돌아보게 된다.

 

 

델리는 화려한 색 무늬가 있다면 아그라는 예술의 극치와 로맨스 사랑 그리고 자이푸르에는 풍부한 색채가 있다고 혹자는 평한다. 델리는 뉴델리와 올드 델리가 모두 합친 말이다. 전통적이고 인구가 많은 올드 델리는 북쪽 지역에 있는 구시가지이고 정치의 중심지인 뉴델리는 남쪽 지역에 있는 신시가지이다. 델리는 영국 식민 통치를 기점으로 델리와 뉴델리로 구분되었다. 올드델리는 무굴제국 시대의 수도로 고풍스러운 성곽과 모스크, 기념비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반면 뉴델리는 식민 통치 기간에 영국이 조성한 도시로 현대 인도의 세련된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마치 흔히 볼 수 있는 현대도시처럼 말이다. 이제 서서히 도시 중심으로 들어가 보자.

영국 식민지 잔재: 코노트 플레이스(Connaught Place)

올드 델리에 찬드니 초크가 있다면 뉴 델리에는 코노트 플레이스가 있다. 영국에 의해 1930년대부터 계획적으로 올드 델리의 도심이었던 찬드니 초크를 대체하려는 목적으로 조성된 곳이 바로 코노트 플레이스이다. 널찍한 도로와 거대한 빌딩이 모여 있는 일종의 계획도시이다. 인도에서 고급 상점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곳곳마다 현대화된 상점들이 즐비하다. 현대 도시답게 맨 먼저 맥도날드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인도에서 만나는 맥도날드는 어떠한지 궁금했다. 해서 샌드위치와 콜라를 주문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먹는 것과는 별 차이는 없다.

코노트 플레이스는 뉴 델리의 쇼핑과 오락의 중심지이다. 영국이 뉴델리의 중심부에 건설한 현대식 쇼핑센터이다. 그래서인 가장 인도답지 않은 거리라고 말한다. 원형 광장을 축으로 많은 도로와 현대적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다. 고급 상점 및 레스토랑 그리고 다양한 외국 기업 등이 모여 있다. 또한, 주위에는 항공사 사무실, 은행, 여행사, 영화관, 관광안내소 등 편의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서구 도시 못지않게 세련된 차림으로 쇼핑을 즐기는 사람들과 서류 가방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서울의 명동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탄두리 치킨이나 커리 등 인도 전통음식을 파는 곳은 물론이고 패스트 푸드점과 예쁜 카페 등 다양한 레스토랑이 눈에 띈다.

코노트 플레이스는 전체적인 구조를 이해해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원형 구조이다. 세 겹의 복합 설계로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길을 잃기 쉬운 구조이다. 여기만 들어오면 보통 사람들은 길을 헤맨다. 겹으로 이루어진 건물 중 안쪽은 A~F 블록, 바깥쪽은 G~N 블록으로 나누어져 있다. 주소를 찾을 때 구역마다 표시된 알파벳을 보고 찾아가면 된다. 대개의 상점은 코노트 플레이스 근처에 있어 쇼핑하기에는 편리하다. 하지만 가격은 대체로 비싸서 호주머니 가벼운 여행자들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코노트 플레이스의 주위는 넓은 잔디 공원으로 나무 그늘에서 쉴 수 있도록 조성된 중앙 공원(Central Park)이 있다. 델리 사람들의 쉼터로 사랑받고 있는 곳이다. 여기에서 시내 관광을 하면서 잠시 쉬는 것도 좋을 듯하다.

서민들의 삶의 터전 - 달빛 광장: 찬드니 쵸크(Chandni Chowk)

레드 포트와 마주 보고 있는 대로가 찬드니 초크이다. 찬드니 초크는 올드 델리의 일종의 재래시장이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은 시장, 꽃 시장, 향신료 시장, 장식품 시장 등으로 구역이 나뉘고 카펫, 비단, 장신구, 가죽, 수공예품, 손으로 날염한 면사 등 다양한 제품들과 의류, 일용품, 과자 등 각종 상점이 펼쳐져 있다. 델리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거리이고 관광객보다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래서 인도 서민의 소박한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거리이다. 찬드니 초크 일대는 무굴제국의 왕도였던 샤 자하나바드(Shah Jahanabad) 시절부터 번화했다. 레드포트가 세워질 당시부터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찬드니 초크를 일명 ‘달빛 광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시끌벅적한 소음 그 자체이다. 그래도 흥미롭다.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한 인도만의 색채가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상점과 노점들이 들어선 거리에는 아무런 표정 없이 어슬렁어슬렁 지나가는 소, 인파 속을 달리는 오토 릭샤의 경적, 상인과 호객꾼으로 늘 북새통을 이룬다.

 

 

찬드니 초크 일대에는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상점들이 있다. 게다가 광장 중앙에는 분수대가 있고 주변에는 자이나교, 힌두교, 이슬람교 사원 등이 모여 있어 볼거리가 풍부하다. 다리바 칼란(Dariba Kalan)이라는 불리는 좁은 길은 은세공 바자르이다. 인도의 전통적인 액세서리류가 은의 무게에 따른 가격으로 거래된다. 독특한 디자인의 은 세공품과 각양각색의 액세서리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관광객들이 기념품 쇼핑 품목으로 자주 들리는 곳이다. 시장 안에 자리한 유서 깊은 빵집과 상점을 누비며 인도의 전통음식들을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음식도 뉴델리의 깨끗한 레스토랑보다 싸고 맛있다. 올드델리에는 거대한 적사암의 성채인 레드포트를 비롯해 라지가트, 간디 기념박물관. 인디아게이트, 쿠트브 미나르 등 볼거리가 많다. 붉은색 포트는 델리를 대표하는 명소로 타지마할을 건설한 무굴제국의 3대 황제인 샤자한에 의해 세워진 성이다.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레드포트는 성벽 높이가 대략 18m에 이르며 해 질 녘 더욱 붉게 빛나 아름답다. 델리는 무굴 황제 샤자한의 창조적인 재능에 의해 탄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강암의 성벽 안에 작은 상점, 다소 혼잡스럽다. 옛 도시의 대표적인 적사암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레드포드가 있다. 그러면 먼저 이슬람 통치 출발인 쿠트브 미나르 (Qutb Minar)부터 들려보자.

인도인의 상처와 이슬람 통치의 상징: 쿠트브 미나르 Qutb Minar

쿠트브 미나르는 인도인들에게 상처가 있는 탑이고 이슬람에는 통치의 상징이다. ‘쿠트브 미나르(Qutb Minar)’는 쿠트브(Qutb)가 미나르(Minar)가 합쳐진 단어이다. 쿠투브은 술탄(sultan)이었던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Qutab uddin aibak : 1150~1210)’을 일컫는다. 미나르는 첨탑(尖塔)을 뜻하는 미나렛의 인도식 표현이다. 그러므로 쿠트브 미나르는 쿠트브(Qutb)가 세운 첨탑이라는 의미이다. 뉴델리에서 남쪽으로 15km쯤 떨어진 교외의 넓은 평야에 우뚝 솟아있는데, 현재까지 델리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12세기 유적군이자 델리 최고의 볼거리이다. 쿠트브 미나르는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노예왕조를 세운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 왕이 델리에서의 마지막 힌두 왕조를 패배시키고 힌두교에 대한 승리를 기념해 1193년에 만든 것이다. 그는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승리의 탑을 세운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인도에서 무슬림 통치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본래 이곳에 있었던 힌두교와 자인교 사원을 파괴한 뒤 세운 이슬람 사원과 첨탑 등이 남아있다. 여러 명의 왕이 100여 년에 걸쳐 건설하는 동안 이슬람 사원을 중심으로 부속 시설이 하나씩 늘어났다.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승리를 또한 기념하기 위해 이 벽면에 이슬람 경전인 코란의 경구를 장식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장식된 이슬람 코란 경구이지만 힌두교도에게는 치욕스러운 역사로 기억될 것이다. 탑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잠무 탑을 모방한 것으로 높이 72.5m로 거대하다. 인도에서 가장 높은 석조 탑이다. 건축 양식도 독특하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양식이 혼합되었다. 기단 부분의 지름은 약 15m이고 가장 높은 부분의 지름은 약 3m이다. 1층은 힌두 양식으로 2층과 3층은 이슬람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각층 사이에 발코니가 있다.

1층~3층은 붉은 사암, 4층~5층은 대리석과 사암을 사용했다. 기록에 의하면 탑의 상층부는 지진으로 인하여 두 번의 복원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하지만 표면에 새겨진 섬세한 조각과 층을 구분하는 발코니는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었다. 탑 여러 곳에 코란의 글귀를 새긴 수평층이 둘려 있고, 발코니에는 입체적인 종유석 무늬를 새긴 띠를 둘러놓았다. 내부는 나선형의 379계단이 있다. 또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 탑 벽면에는 이슬람 경전인 코란의 경구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인도에서 이슬람교도 통치를 알리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쿠트브 미나르 유적군(遺蹟群)에는 쇠기둥이 하나 솟아있는데 그 쇠기둥을 팔로 안아 양 손가락에 깍지를 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팔이 매우 긴 사람만 가능하다. 게다가 요즘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호망으로 둘려 있으므로 소원을 이루기 힘들다. 인도 측면에서 보면 치욕스러운 역사일 것이다. 이 전쟁 이후 힌두의 나라였던 인도는 600년 동안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받게 된다. 쿠트브 미나리가 이슬람의 인도 통치의 시작이면 랄 킬라 Lal Qila (레드포트)는 인도 지배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초기 무슬림 통치는 인도 역사의 침체기였다.

하지만 16세기 바부르(Babur, 1480-1530) 집권부터 무굴제국으로 화려한 역사를 꽃피우게 된다. 바브르에 이어 후마윤(Humayun, 1508-1556), 악바르 (Akbar, 1556-1605), 자한기르(Jahangir,1569-1627), 샤자한(Shah Jahan, 1628-1657), 아브랑제브(Aurangzeb,1658-1707년)등으로 이어지는 무굴제국의 전성기인지라 훌륭한 문화유산을 많이 남겼다. 특히 건축 양식은 힌두 건축 양식과 달리 풍부하고 아랍과 페르시아 건축으로 화려한 신화를 재현하였으며 사원이나 궁전을 건축할 때도 꽃을 새겨 넣거나 기하학 양식과 코란을 장식하는 등 아주 독특하다. 독특한 이슬람 양식은 델리에 있는 무굴왕조의 두 번째 계승자인 후마윤 무덤(Humayun Tomb)에 잘 드러나고 있다. 델리에서 또 하나 유적지를 꼽으라면 타지마할을 건축한 건축왕 샤자한이 세운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레드포트이다. 이제 이슬람 무굴제국의 화려한 영광과 비극의 장소인 레드포트(랄 킬라)로 들어가 보자.

이슬람 무굴제국의 권력과 쇠퇴:  랄 킬라 Lal Qila (레드포트)

랄 킬라는 ‘빨간 성’을 의미한다. 즉 영어로 레드포트 (Red Fort)이고 올드 델리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아름다운 건축물과 장식의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여행 중 성벽 안에 있는 여러 궁전과 사원에 들러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이다. 레드포트는 궁궐터로 아치 모양의 장식이 돋보인다. 당대 페르시아의 한 시인이 이 건축물을 두고 “지상에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다.”라고 찬사를 남겼다고 한다. 실제로 석양 무렵에는 레드 포트 전체가 강렬한 빛이 반사되어 붉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또한 그곳에서 인도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모스트인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도 볼 수 있다. 이 역시 샤자한이 건축한 것이다. 이 사원의 규모는 2만 명이 동시에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정도이다. 또한 좋은 점은 언덕 위에 있어 델리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가보는 것도 쾌잖은 뜻한다. 다시 레드 포트로 돌아가 보자.

레드포트 (Red Fort) 건축 역사는 대략 이렇다. 무굴제국 왕조 제5대 황제인 샤자한은 수도를 아그라에서 현재의 올드 델리(당시 이름은 샤 자하나바드)로 옮기게 된다. 새로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1639-1648에 샤 자하나바드 도성을 지었다. 또한, 현재까지도 많은 관광객이 오는 위대한 건축물인 타지마할, 레드포트(붉은 성), 자나마 힘줄들을 건축한 사람도 샤자한이다. 이게 화근 되었다. 그는 건축 광이었다. 그의 지나친 건축으로 인한 국고의 고갈은 결국 그의 아들 아우랑제 브이 반란을 일으키는 명분이 되었다. 결국, 샤자한은 자기가 건축한 레드포드에서 거의 지내지 못했다. 아우랑제브는 반란을 일으켜 늙은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아그라 성에 가둬버렸기 때문이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는 나눌 수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500년 이어온 왕 씨 고려를 조선 왕조로 바꾼 이성계도 아들 이방원의 도움 없이는 그 혁명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태종 이방원은 그 권력 탈출에 지대한 역할을 했음에도 권력을 나누는 자리에는 배제됨에 따라 아버지 태조 이성계에 칼을 겨누게 된다. 권력의 속성이 그렇다. 그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권력만 잡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지와 형제를 죽이고 심지어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 권력이다. 태종 이방원이나 아우랑제 브이처럼 말이다. 원래 동양 고전 삼강오륜(三綱五倫)에서 삼강(三綱) 중 하나인 부위자강(父爲子綱)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근본이라는 것이고 오륜(五倫) 안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말도 부모는 자식에게 인자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과 섬김을 다하라는 교훈을 무색하게 한다.

아무튼,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는 이 빨간색 포트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무굴제국을 통치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강력한 통치자였다. 그래서인지 결국 그의 죽음 이후 인도의 통치는 흔들리고 헤매기 시작했고 무굴왕국의 영광도 사라졌다. 레드포드의 성벽을 보면 당당함이 인상적이다. 성벽의 길이가 무려 2.5 km에 달한다. 성의 서남쪽에 성벽과 몇 개의 성문으로 둘러싸여 발달했다. 무굴 시대에 지어진 성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전략적으로 지워졌다. 레드포드 역시 궁전이자 전투 요새의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없지만, 그때 당시는 성벽 앞에는 10m 깊이의 해자가 있었다고 한다. 각 성의 문도 전투용 코끼리가 전속력으로 들이받지 못하게 급격한 커브를 만들어 설계되어 있다.

지금 역시 성문과 성벽 일부가 차들이 지나다니는 도로 곁에 남아있다 당시의 그림을 보면 야무나강 변에 번성한 도시가 펼쳐진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찬드니 초우크를 마주 보는 라호르 문 Lahore Gate이다. 입장 시간도 일출에서 일몰까지 이기 때문에 여유롭게 입장해도 된다. 라호르 문은 성문으로서는 우아한 건축이지만 군사적으로는 결점이 있어 결점을 눈치챈 아들 아우랑제브 황제가 그 앞에 흙으로 성벽을 다시 쌓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문을 지나서 기념품점이 늘어선 상점가를 빠져나간 끝에 일반 알현의 문인 디와니암(Diwan-i-Am) 이 있다. 붉은 성 내부에 있는 건물로 왕의 공식 접견장이었던 곳이다. 정면의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왕좌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야무나강을 등지고 특별 알현의 문인 디와니카스(Diwan-i-Khan)과 랑 마할 Rang Mahal 등의 궁전이 늘어서 있다. 현재 남은 궁전은 비록 조잡하고 빈약해 보이지만 예전에는 대단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지금 이렇게 모습이 변한 것은 침략의 역사가 한몫을 했다. 영국 점령군에게 수없이 약탈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는 보석과 귀금속으로 장식되고 아름다운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특히 디와니카스에는 왕의 개인적인 만남 공간에 1톤이 넘는 순금과 루비,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진주 등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공작 왕좌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당시 궁전의 화려함을 상상할 수 있다. 더욱이 건축비용도 인도의 최고 유물인 타지마할보다 2배 이상으로 들었다고 하니 참으로 어마어마한 돈이 든 것이다. 디와니암, 디와니카스 등의 유적을 통해 우리는 호화스러운 이슬람 왕조의 과거가 희미하게나마 엿볼 수 있다. 궁전 안으로 연결된 수로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아름다운 궁전도 1739년 페르시아 군주(이슬람)의 침략으로 결국 무너진다. 1만 명의 무굴 군인을 죽이고 궁전을 꾸몄던 공작 왕좌를 비롯하여 수많은 보물을 약탈해 갔다.

더욱이 1857~1859년에 일어난 인도 독립전쟁(세포이 항쟁)으로 또한 레드포드(붉은 성)가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 당시 영국군은 무굴의 모든 상징을 파괴하려는 의도로 성에 엄청난 포격을 가했다. 마치 격한 감정으로 우상을 파괴하는 듯했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무굴왕국의 찬란한 영광과 인도인의 패배 이미지가 겹쳐진다. 그런데도 레드포드(붉은 성)를 다시금 인도의 영광으로 바꾸어놓은 이는 바로 인도의 초대 수상인 네루다. 1948년 네루는 붉은색 포트(붉은성) 위에 올라 인도의 독립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이것은 레드포트(붉은성)의 상징성이 어떤지를 감히 짐작할 수 있다.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레드포트 고고학 박물관(Red Fort Museum of Archaeology)으로 무굴 시대의 회화와 무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 인도는 11세기에는 이슬람교를 만났으며 16세기에는 기독교를 만났다. 600년간 이슬람 지배와 200년간 영국 식민지를 겪었다. 이런 역사를 겪은 후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의 갈등으로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는 아픔을 겼었다. 이처럼 델리는 이민족의 침략으로 수많은 전투가 벌어지고 거의 800년간 슬픈 역사를 간직한 것이다.

비폭력 저항운동: 왕의 무덤-라지 가트[Raj Ghat]

라지 가트(Raj Ghat)는 힌디어로 ‘왕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랄 킬라의 뒤편인 야무나강 변으로 달리는 Mahatma Gandhi Rd를 따라 내려가는 길목 강가에 있다. 비폭력의 저항을 역설하며 독립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가 화장된 곳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비폭력 저항운동 대명사이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 사상을 한국에서도 받아들인 예가 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고(故) 신효순, 심미선 양 사건 이후 평화적으로 진행되는 촛불집회이다. 대한민국 시위 문화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던 사건이기도 하다. 촛불집회는 비폭력 시위를 표방했고 이는 평소 집회에 참여하지 않았던 다양한 사람들을 집회에 참석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필자가 보기엔 비폭력 저항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간디의 삶과 사상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간디는 말로만이 아닌 온몸으로 실천하며 가슴 깊이 모든 사람을 사랑한 지도자이다. 그리고 비폭력 저항운동이 승리한다는 것을 인도인들에게 아니 세계인들에게 보여주었다.

미국 덴버대 정치학 교수인 에리카 체노워스(Erica Chenoweth)가 2013년 발표한 법칙으로 전체 국민의 3.5% 이상이 꾸준히 비폭력적인 반정부 시위나 집회를 이어가면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법칙이다. 에리카 체노웨스 교수는 2013년 20세기 이후의 시민 저항운동을 분석한 결과 한 국가 인구의 3.5%가 집회나 시위를 계속할 때 그 정권은 유지되기 어렵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일종에 3.5% 법칙이다. 3.5% 법칙은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시위나 집회’, ‘비폭력’이라는 두 가지 원칙을 전제로 한다. 에리카 교수는 비폭력 방식으로 시위가 계속되면 더 많은 시민의 참여를 끌어낼 수 있어서 비폭력 시위가 폭력 시위보다 성공 확률이 2배 이상 더 높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외국에서는 1986년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을 붕괴시킨 피플파워, 2000년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비폭력 저항운동 등을 들 수 있다. 국내에서는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5·6차 촛불집회에서 국민의 3.5%(약 180만 명)가 넘는 190만 명(주최 측 추산)이 국민이 참여하면서 이 법칙이 주목을 받았다. 아무튼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역사적으로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랄 킬라 뒤쪽 야무나강(江) 남쪽 마하트마 간디 거리에 있다. 이곳은 간디를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간디는 1948년 1월 30일 극우파 힌두교도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1월 31일에 화장되어 힌두의 관습에 따라 그 재를 강물에 흘려보냈다. 라지가트[Raj Ghat]는 다만 화장터일 뿐이다. 그런데도 묘소처럼 참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곳에 들어가기 전에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내부의 푸른 잔디밭 중앙에는 검은 대리석의 네모난 단상이 있는데, 언제나 참배객의 꽃으로 덮여 있다. 단상의 정면에 간디의 마지막 말 "Hai Ram(오, 라마 신이시여)"이 새겨져 있다. 지방에서 온 사람들도 재단 주변을 돌며 정중하게 참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모두 경건하다. 끊임없이 추모행렬이 이어진다. 그만큼 간디는 인도에서 존경의 대상이다. 재단 앞에 맨발로 무릎을 꿇고 꽃을 바치는 사람, 머리를 땅에 대고 읊조리며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간디가 ‘신은 진리이다. God is Truth)’라고 말한 것처럼 신은 참이지 대상성이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간디를 존경하는 것은 간디를 숭배하는 예배가 아니라 그의 삶을 되새기고 따르는 것이다. ‘진실과 정의보다 더 위대한 종교는 없다. (There is no religion higher than truth and righteousness)’ 라는 말처럼 말이다. 검은 재단에 바쳐진 화환의 색채가 선명하다. 하지만 재단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정면 뒤쪽에 있는 화로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있고 한쪽에는 헌금함이 놓여 있는데 ‘HARIJAN SEVA’-천민(신의 백성)을 돕자-라고 쓰여 있다.

라지 가트 북쪽 부근에는 산티 바나 Shanti Vana가 있다. 이곳은 수상 자와 할라 네루(Nehru)가 1964년 5월에 화장된 곳이다. 라지 가트 건너편에는 간디 기념박물관(Gandhi Memorial Museum)이 있다. 라지 가트 주변은 인도 유명 인사들의 화장터가 있는데 가까운 곳에는 네루 집안 3대(네루, 산자이 간디, 인디라 간디)의 화장터 샨티 버너가 있고, 북쪽에는 제2대 총리 샤스트리의 화장터 비자이 가트가 있다. 라지 가트에서 멀지 않는 곳에 ‘간디 기념박물관’으로 향했다.

인도의 국부 간디: 국립 간디 박물관 National Gandhi Museum

라지 가트를 바라보는 기념관이 바로 국립 간디 박물관이다. 간디 슴리띠라고도 부른다. ‘위대한 영혼’을 뜻하는 마하트마(Mahatma)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인도의 성자, 간디(Gandhi)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박물관이다. 이곳은 1948년 1월 30일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당하기 전까지 거주했던 공간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간디의 행적을 전시하고 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의 벽에 간디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순간 실제로 살아있는 간디를 만나는 것 같다.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간디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삭발한 머리, 윗옷은 벗어 왼쪽 팔에 걸치고 오른쪽 팔은 지팡이를 쥐고 있다. 온몸은 햇볕에 타서 까맣고 깡마른 뼈만 남아있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독립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를 짐작이 간다.

2층 위로 올라가면 마하트마 간디가 실제로 사용했던 물레가 보인다. 생전에 간디가 물레를 돌리며 스와데시(국산품 애용 운동)를 외쳤던 모습이 생생하다. “스와데시 없는 스와라지(자치)는 영혼이 없는 시체와 같다.” 간디는 독립을 위해 스와데시를 외쳤다. 실제로 간디는 양복을 벗어 던지고 물레를 돌려 손수 짠 투박한 수제품 ‘카디’를 입고 다녔다고 한다. 간디의 삶과 업적에 관한 책들도 전시되어 있다. 간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긴 그림, 전시물 그리고 인도 독립의 과정 전시도 눈에 띈다. 사진을 보면 민중에게 둘러싸여 있고 또 때로는 고독하게 고뇌하는 간디의 표정도 볼 수 있다.

인도 독립 운동사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준다. 간디와 함께 인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에 대한 자료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리고 총탄에 맞아 핏자국이 벤 마지막에 입고 있었던 검소한 의복을 보면 가슴이 찡하다. 소금 행진 때 짚고 다녔던 대지팡이도, 간디를 저격했던 총탄 세 발 중 한 개와 권총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화장하고 남은 재를 담은 단지, 안경, 손때 묻은 몇 권의 책, 오래된 일기장 등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인도의 모든 화폐에 그의 초상이 그려져 있을 정도로 인도인들에게 간디에 대한 자부심이 실로 대단하지만 이에 비해 간디 박물관에 전시 내용을 보면 간디의 명성에 비해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런데도 델리를 여행하는 사람은 꼭 방문하기를 권한다. 간디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독립운동 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에 부설된 도서관에는 간디와 관련된 책이 14,000여 권이 소장되어 있다. 매주 일요일에는 영화도 상영한다. 간디 사망일인 1월 30일과 탄생일인 10월 2일에는 간디를 추앙하는 대규모 예식이 열리는데 많은 관람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이다.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국부였던 간디를 향한 인도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목적지는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이다.  계속~ 2021/7/7 / 혜윰인문학연구소 /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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