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혜윰인문학▣/인문학여행

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3 – 아그라: 지독한 사랑과 광기(狂氣) 사이 - 타지마할(Taj Mahal), 아그라성(Agra Fort)

by 뜨르k 2021. 8. 1.
반응형

 

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3 – 아그라: 지독한 사랑과 광기(狂氣)사이 - 타지마할(Taj Mahal), 아그라성(Agra Fort)

어느 날 흘러내린 눈물은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맑고 투명하게 흐르리라.
그것이 타지마할이라네.
오, 황제여! 그대는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으로
시간에 마술을 걸려 하였다네.
그대는 경이로운 꽃다발을 짜서
우아하지 않은 주검을 죽음을 모르는 우아함으로 덮어버렸다네.
무덤은 자기 속으로 파묻고 뿌리내리어
먼지로부터 일어나 기억의 외투로
죽음을 부드럽게 덮어주려 한다네.

- 타지마할,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
오오, 부질없는 말을 용서하라
타지마할, 순수한 모순이여.
그대의 중심엔 죽음이 들었건만,
그 죽음 속엔 사랑이 들었기에,
차가운 아름다움, 흰 대리석의 꽃으로 피었구나.
다시는 시들 수도 질 수도 없는 그대.
영혼의 구조를 암시하는, 사랑의 성전이여,
거기 그대는 기적처럼 존재한다.
늘,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서,
시시각각으로 빛깔을 달리함은
해와 달, 별들도 번갈아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건물을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리, 타지마할.

박희진의 『타지마할』 중에서

아그라 Agra는 델리에서 약 200㎞ 떨어져 있고 인도를 대표하는 명소인 타지마할(Taj Mahal)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북부 인도에 있는 아그라는 인구 80만의 작은 지방 도시이다. 델리에서 당일 관광으로 다녀올 수 있다. 필자는 타지마할을 먼저 가고 자이푸르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타지마할(Taj Mahal) 사원은 델리에서 차로 야무나강을 따라 4시간 정도 가면 있다. 기차로 가는 방법도 있다. 필자는 물론 기차로 갔다. 요금은 뉴델리에서 아그라까지 134 Rs 정도이다. 아그라는 16세기 중엽 이슬람 왕국 무굴왕국 3대 황제 악바르 대제에 의해 도성이 되었고 웅장한 아그라 성도 그 무렵 건축되었다. 특히 이슬람 악바르 대제의 통치 기간 동안 예술과 문화, 경제, 교육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이제 인도인들아 밥 먹듯시 자주 마시는 짜이 한 잔 마시면서 천천히 타지마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타지마할(Taj Mahal): 지독한 사랑과 광기(狂氣) 이야기

야무나강 변의 언덕에 있는 타지마할은 무굴제국의 5대 왕이었든 샤 자한(Shah Mahan)이 그의 부인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애도하여 궁전 형식으로 지은 일종의 무덤이다. 무덤 같지 않은 무덤이고 죽은 아내를 향한 사랑이 만들어 낸 위대한 작품이다.

타지마할에 얽힌 이야기는 이렇다. 무굴제국 땅에 한 여인이 있었다. 뭄타즈 마할 왕비이다. 제국의 왕비이고 부러운 게 없는 여인이다. 샤자한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매혹적인 아름다움과 지성을 소유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인도 대륙을 지배했던 무굴제국의 황제 바로 샤자한이다. 그들은 사랑으로 결혼했고 해마다 자식을 낳을 정도로 금실이 좋았다. 무려 17년 동안 14명의 아들과 딸을 낳았다. 20살에 결혼하여 일생을 남편을 위해 헌신했고 샤자한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샤자한은 모든 국가적 문제를 그녀와 함께 의논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심지어 전쟁터에까지 왕비와 함께 생활할 정도이고 또한 신들도 질투할 정도로 깊었다. 심지어는 한창 전쟁 중이던 전쟁터의 막사에서도 출산을 감행했다고 한다. 지독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만 문제가 생겼다.

1629년 샤자한이 남부인도 데칸(Deccan) 고원으로 출정한 사이 뭄타즈 마할 왕비가 열다섯 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38세의 나이로 숨지고 말았다. 1629년 일이었다. 그녀는 임종의 자리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주세요”라고 샤자한에게 유언한다. 절세의 미인인 아내를 잃은 샤자한은 슬픔에 잠겼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제국의 활기는 사라지고, 삶은 이제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는구나.” 거의 2년 동안 슬픔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샤자한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무언가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무덤)을 지어 그녀에게 받치겠다고 마음먹었다. 왕비가 세상을 떠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온 힘을 쏟아 공사를 시작한다. 1632년부터 1653년까지 나라 재정이 기울 만큼 거액을 들여 22년간 완성한 것이 바로 타지마할이다. 22년 동안 막대한 인력과 공사비가 들었다. 사랑을 위한 영원한 무덤 궁전을 짓기 위해 터키,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선발하여 매일 기술자 2만 명의 인부와 건축 자재 운반을 위해 코끼리 1,000마리가 동원되었다. 건축 자재도 인도에서는 품질이 좋은 북서부 라자스탄에서 채취된 흰색 대리석을 가져왔고 적사암, 터키옥, 사파이어, 자수정, 산호 비취, 공작석 등 귀한 건축자재를 러시아, 아라비아, 중국 등지에서 공수했다. 그에게 건축비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역사상 어느 신전도 이만큼 호화롭게 짓지는 않았었다. 한마디로 한 여인을 위해 온 국력을 쏟은 것이다. 만약 요즘 이런 건축을 한다면 가능할는지 의문이 든다. 아마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지만, 필자는 일일이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타지마할(Taj Mahal)은 사방이 95m의 정사각형 초석으로 되어 있고 높이도 56m 정도로 거대하다. 타지마할 전체가 흰 대리석인 돔(dome) 양식의 건축이다. 또한 네 귀퉁이에 높은 광 탑이 세워져 있어서 전형적인 이슬람 사원의 모습이다. 이 사원을 설계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베르네오라는 설과 페르시아의 우스타드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인도 외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참여하여 이룬 걸작이라고 보면 된다.

 

타지마할의 핵심은 정원이다. 실제로 묘지 주변에 거대한 정원이 있다. 즉 정원이 중심이고 정원 안에 묘를 앉힌다. 담장의 사방 모서리에 탑을 세우고 중앙 가로축 양 끝에 누각을 두었고 정원은 세밀하게 사방 296m x 296m 정사각형이다. 전형적인 차바그이다. 델리에 후마윤 무덤도 차바그이다. 차바그는 이슬람교의 낙원 사상을 보여준다. 사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수로 축이 교차하는 지점에 연못이 조성되었다. 이것이 이슬람 정원의 특징이다. 이슬람 정원은 7세기 중반 아랍 제국의 건설과 함께 기존의 페르시아 정원을 만드는 기법을 수용하고 이를 코란에 나타난 내세의 파라다이스와 접목하게 시켜 탄생한 정원 양식을 일컫는다. 구체적인 이슬람 정원에 이야기는 인도 인문학 여행 탐구 부분에서 지면을 할애할 것이다.

타지마할을 멀리서 보면 마치 대리석으로 빚은 한 송이 꽃봉오리 같기도 하다. 정문 앞에서 보면 길 다란 정원의 직사각형 수로에 비친 타지마할과 조화를 이루어 더욱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하얀 대리석에 사랑과 영혼의 꿈이 깃들려 있는 듯하다. 장식은 이슬람 스타일의 아라베스크와 갈매기 무늬에 상감을 새기고 힌두교 스타일의 격자 세공을 첨가하는 등 당시의 최고의 기술을 발휘하여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어 냈다. 그야말로 아름다움의 집합체이다. 샤자한은 이 타지마할을 아내에게 선물로 주었다. 하지만 그의 슬픔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불교 법구경에서 붓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아마 사랑은 슬픔과 또 다른 업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샤자한은 사랑에 대한 믿음은 대단한 것 같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그는 ‘세상의 종말이 오면 죽은 자들이 모두 무덤에서 되살아나 신의 심판을 받게 된다.’라는 사실을 믿고 그날이 오면 마침내 그토록 사랑했던 왕비와 다시 만난 영원한 사랑을 이어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종교 종말론을 한 편을 보는 것 같다. 실제로 이슬람교 신자도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있음을 믿었다. 흙으로 인간을 창조한 알라는 인간이 죽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부활의 날이 오면 인간을 다시 살게 한다고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다. 무슬림인 샤자한도 화장하지 않고 호화스러운 타지마할 묘를 만든 이유이다.

그래서 샤자한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타지마할의 건너편 야무나강 언덕에 자신이 묻힐 똑같은 사원을 지으려고 했다. 타지마할이 마주 보이는 강 건너편에 자신은 무덤을 건축하고자 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것도 검은색 대리석을 사용하여 똑같은 모양과 크기로 건축하여 두 무덤을 연결한다는 구상이었다. 물론 그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져 연이은 계속된 공사로 엄청난 국력을 쏟은 결과이다. 재정이 궁핍해지자 그의 아들과 왕위 쟁탈전(두 형을 죽임)이 벌어졌고 결국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자기 아버지 샤자한 역시 왕위 쟁탈 과정이 마찬가지였다. 샤자한도 셋째 왕자로 태어나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없었다. 무굴제국의 지방 태수로 데칸의 전쟁터에서 대부분 보내면서 여러 세력을 모아 35세에 아버지를 밀어내고 마침내 무굴제국의 제5대 황제가 된다. 샤자한이 자신의 아버지를 밀어내고 왕에 오른 듯이 아들 아 부랑 제브도 역시 자신의 아버지를 제거하고 황제가 되었다. 첫 번째 왕비의 아들인 아 부랑 제브는 아버지의 명령에 불복하여 아그라 성에 유폐시켰다. 그는 아그라 성에 한쪽 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 샤자한은 거의 8년 동안 아그라 성 팔각형의 망루에서 망연히 강 건너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왕비의 무덤인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결국, 쓸쓸한 만년을 보내다가 7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는 죽은 아버지 샤자한을 이곳 타지마할에 함께 묻었다. 현재 샤자한은 아내 뭄타즈 마할과 함께 타지마할에서 묻혀 있다.

이제 타지마할(Tāj Mahal)로 들어가 보자. 타지마할로 들어가는 길은 마치 군 비밀 초소로 들어가는 길 같았다. 몸수색까지 한다. 더욱이 외국인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입장료도 비싸다. 언짢은 마음으로 순간 주춤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당황스러운 정도로 빛나는 대리석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리석 사이로 아지랑이가 가물거리며 웅장한 타지마할이 눈앞에 펼쳐진다. 참으로 우아하고 아름답다. 이런 매혹적인 건축물에 한 반쯤 와본 사람은 그 감격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타지마할은 사람이 사는 집도 신을 모시는 신전도 집회하기 위한 공간도 아니다. 일종에 묘이다. 그런데 많은 대중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흰 대리석으로 만든 조형미뿐만 아니라 한 남자가 그 아내를 지독한 사랑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건축물 1층 회랑 안쪽 팔각의 공간에는 샤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관이 나란히 놓여 있다. 공간에 보인 화려하게 채색된 대리석 관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한 가짜 관이고 진짜 관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검소하게 지하에 보관해 있다고 한다.

인도 작가 니할 싱의『인도의 낮과 밤』이라는 소설 처음 문장에서 언급한 “타지마할을 방문하는 꿈 없이는 누구도 델리에 살 수 없다” 말처럼 살아 있는 동안 한 번쯤은 볼 가치가 건축물이라고 여겨진다. 1920년대에 타지마할을 여러 차례 방문한 정원 작가 마리 루이제 고트하인은 “수없이 말을 듣고 여러 번 보았어도 볼 때마다 새롭고 경이롭다. 이 느낌을 표현할 말이 없다. 인류 문화의 클라이맥스인 것 같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도 “시간의 뺨에 흐르는 눈물”이라 묘사했다. 독일 사학자 크리스토프 클라크는 “시간이 멈추어 공간으로 변한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우리는 타지마할을 바라보면 사랑의 위대함을 무엇인지 깨닫는 동시에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는 처연함이 앞선다. 자신의 사랑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이 전국에서 끌려와 노역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사랑을 위해서 말이다. 분명 그들에게도 더 중요한 각자의 삶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강제 노동을 했다. 필자는 타지마할이라는 거대한 공사장에 투입되어서 고된 노동을 감당한 사람(인도인)들을 잠시 생각해 본다. 이런 일화도 있다. 500명에 이르는 장인들이 타지마할의 아름다운 장식을 모두 마치고 끝나던 날 다시는 이러한 건물의 탄생을 막기 위해 장인들의 손목을 일일이 잘랐다고 한다. 상상만 해도 너무 끔찍한 광경이다. 사랑에 눈먼 샤자한의 광기를 보는 것 같다. 또한 장인들의 울부짖는 고통의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과연 그들이 없었으면 타지마할이라는 건축물이 존재하였을까? 참으로 의문이 든다. 분명한 것은 위대한 건축물 이면에는 희생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희생 없이 가능한 일이 있는가?라고 합리화해서는 안될 것이다.

마치 중국 만리장성 축조처럼 말이다. 만리장성 축성에 들어간 돌은 51억 7,500만 개고 연인원 1억 3,500만 명(3교대)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만리장성 축조를 위해 30만의 군사와 수백만의 농민들이 동원됐다. 실로 엄청난 사람들이 희생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만리장성에 쌓은 돌을 일렬로 놓았을 때 달까지 대략 두 번 왕복이 가능하다고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공사 현장에 동원된 군사나 부역 나간 백성은 소식이 끊겼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처절한 고통의 현장이었는가는 ‘맹강녀의 전설’에서 엿볼 수 있다. 남편이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맹강녀는 남편의 시체라도 찾으려고 “여보, 여보…” 통곡하며 성의 주위를 맴돌았을 때 길게 둘러싼 성이 와르르 무너지며 그 속에서 남편의 시체가 나왔다는 슬픈 전설이다. 이같이 만리장성에 얽힌 슬픈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잦은 토목공사로 재정이 바닥나고 무거운 세금과 노역으로 불만을 가진 농민들의 선동으로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났다. ‘진승·오광의 난’으로 농민 정권을 세웠으나 6개월 만에 몰락했다. 이러한 농민반란이 진나라 멸망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마치 타지마할을 건축한 샤자한이 무리한 건축으로 그의 아들에게 아그라 성에 감금당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필자는 타지마할과 만리장성은 과연 누구를 위해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 그리고 수많은 백성의 고통도 생각해 본다. 건축의 화려함과 거대함에 도취하여 업적의 뒤안길에 지독한 고통이 있다는 을 혹시 간과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보자. 자신의 업적 때문에 수많은 백성이 피박 당하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물론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도 역시 언론에서 타지마할이나 만리장성을 연상케 하는 이런 기사를 종종 접할 때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타지마할 뒤편으로 흐르는 강이 있는데 그 강이 야무나(Yamuna) 강이다. 야무나 강에 얽힌 필자에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가 생각난다. 타지마할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 무려 1인당 입장료가 750Rs이었다. 현지인들은 50Rs에 불과하다. 750Rs를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그리 비싼 편이 아니지만 현지 기준으로 볼 때 결코 싼 요금이 아니다. 그래서 쪽문(일명 개구멍)으로 야무나강 쪽으로 내려가  들어가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물론 타지마할로 들어가는 통로는 예상대로 없었다. 아마 샤자한이 자기 무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샤자한은 죽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황제로 여전히 건재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아무튼 재미 삼아 야무나 강도 구경할 겸 불순한 의도는 없었다. 결국 설득 끝에 요금을 깎아 1인당 375Rs로 들어갈 수 있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야무나 강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는 아그라 성이 있다. 이제 이슬람 무굴제국 권력의 상징 아그라 성으로 들어가 보자.

이슬람 무굴제국 권력과 식민: 아그라 성 (Agra Fort)

타지마할을 나와서 바로 아그라 성으로 향했다. 아그라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아그라의 대표적인 유적지로 손꼽는다. 델리의 레드 포트와 같이 붉은 돌로 축조했다. 그래서 아그라 성은 아그라의 빨간색 포트로 불린다. 원래 아그라 성은 1562년 악바르 대제에 의해 군사적인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한때 샤자한의 왕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아그라 성은 철옹성 그 자체이다. 50m 높이에 달하는 성벽을 바늘구멍이 들어갈 수 없도록 아주 촘촘하게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성벽 곳곳에 요새가 있고 성의 둘레도 무려 2.5km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성 내부의 궁전도 섬세하고 호화스럽다. 8 각형 망루에서는 야무나 강을 따라 멀리 타지마할을 바라볼 수 있다. 샤자한이 자신의 아내가 묻힌 타지마할을 바라보듯이 말이다. 성 밖에는 10m의 해자가 만들어져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해자는 여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존재해 왔었다. 원래 해자는 적으로부터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해자(垓子)의 다른 명칭으로는 주황(周隍), 구지(溝池), 외호(外壕), 호성하(城河)등이 있다. 안쪽에 물이 있는 일도 있고 없는 때도 있다. 주로 해자는 성곽과 고분에서 발견된다.

선사시대 촌락의 주위에 돌린 환호(環濠)와 무덤의 주위에 돌린 도랑을 일반적으로 주구(周溝)라고 불리는데 이것도 일종에 해자에 속한다. 삼국시대에서도 큰 고분을 둘러싼 도랑을 해자라고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국에서 청동기 시대에 처음으로 해자(환호)가 등장했고 이후 초기철기 시대를 거쳐 삼국시대까지 이어진다. 세계 각 처에 있는 유명한 성은 거의 해자를 갖추고 있다. 일본의 오사카성 해자도 유명하다. 해자는 적군이 절대 침입할 수 없도록 하나의 방편이다. 샤자한은 역시 아그라 성에 해자를 설치하여 성을 철옹성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아그라 성은 인도 역사, 아니 아그라 역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아그라에서 펼쳐진 역사를 더듬는 것도 인문학 여행에 하나의 묘미가 될 것이다.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는 한때 무굴제국의 수도였다. 무굴제국 권력의 상징 아그라 성은 이슬람 문화가 짙게 풍기는 무굴 문화유산이다. 인도에 이슬람 점령 역사는 대략 이렇다. 몽골 계통 이슬람교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와 델리에 무굴제국을 세운다. 그리고 3백여 년간 인도를 다스렸다. 이 사람들이 바로 우즈베크 땅에서 내려간 바부르(Babur) 족속이다. 무굴제국은 인도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왕조 가운데 가장 많은 흔적을 남겼다. 무굴제국의 시조 바부르는 1483년 2월 14일 우즈베크 페르가나 분지의 안디잔(Andijan)에서 태어났다. 그의 5대 조부는 티무르였으며 외가로는 칭기즈칸의 15대손이라고 알려졌다. 1494년 페르가나를 지배하던 아버지 우마르 세이크가 죽자 12세에 통치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티무르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에 입성하였으나 권력투쟁에 밀려 중앙아시아를 전전하다가 아프간 카불을 점령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삼는다. 그러던 중 1526년 인도에 침입하여 델리 왕조인 로디조(1451~1526)의 이브라힘 왕을 델리 북방의 파니파트전투에서 승리하고 델리를 점령하여 인도에 무굴 왕국을 세운다. 바부르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인 제2대 후마윤은 벵골 비하르 지방에서 벌어진 아프간계(系) 수르 왕조의 셰르 샤에게 전투에서 패하여 1540년 페르시아로 도망간다. 그 뒤 1555년경에 다시 델리를 침입하여 무굴왕조를 부활시킨다. 이슬람 무굴제국은 13세에 즉위한 3대 악바르 대제 때 세력이 크게 확장한다. 그는 델리에서 아그라로 수도를 옮겼다. 아그라는 약 한 세기 간 동안 무굴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악바르 대제는 북인도에 지배력을 확보한 후 인도의 여러 지방으로 영역을 확대한다. 그는 전략적으로 라자스탄 지방의 왕들을 동맹 세력으로 끌어안았다. 반대로 1573년 서쪽의 구자라트 지방의 이슬람 왕조들을 적대시하였다. 1576년에 동쪽에 있는 벵골 지방까지 그의 손아귀에 넣었다. 1580년대에는 인도 북서부 지방의 펀자브에서 아프간의 카불까지도 군대를 파견하여 인더스강 하류 신드 지방을 정복하였고 1590년대에는 남하 정책으로 데칸 지방의 이슬람 여러 왕조에까지 영역을 넓혀갔다. 악바르 대제의 최대 성과는 탕평책을 둘 수 있다.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사람을 중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였다. 그들을 등용하여 각 지방의 토지측량이나 지세(地稅) 결정 등의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런 결과로 무굴제국의 행정지배체제는 거의 악바르 대제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굴제국은 악바르 황제의 사후 자항기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로 이어지면서 전성시대를 누렸다. 특히 제6대 아우랑제브는 데칸의 이슬람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최대의 영역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아우랑제브 말년에 강력한 적대세력이 출현하였다. 데칸 지방에서 힌두교의 마라타 왕국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무굴 왕국에 자주 반란을 일으켰고 괴롭혔다. 결국, 1707년 아우랑제브가 데칸고원 원정 도중 사망하자 왕위 계승을 위한 내부 쟁탈전이 벌어졌다. 결국, 무굴제국의 중앙 권력은 급속히 약화할 수밖에 없었다. 인도에서 무굴제국 권력의 약화와 더불어 18세기 말에 시작된 영국의 식민지 정복 전략은 인도까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나갔다. 영국은 무굴 황제의 지위는 명목상으로만 존속하도록 하고 그들을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이용하는 전략을 펼치지만 1857년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항쟁하는 ‘세포이 반란’이 북인도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무굴 황제로 바하두르 서 2세를 추대하여 새로 왕권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2년에 걸친 쳐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한다. 더욱이 탄압 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명목상으로 존재한 무굴 황제의 지위마저도 폐함으로써 무굴제국은 막을 내리고 이제 본격적인 인도 식민지 시대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인도 식민지 초기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1700년대 영국은 오랜 전쟁 후에 인도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때 인도에는 생각 이상으로 탐나는 물건들과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진귀한 보석과 향료, 찬란한 문화유적, 예술작품, 더욱이 인류문명 발상지로서 수학이나 과학 지식도 뛰어나기 때문에 그들은 인도 문화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인도인들은 문화적 자부심도 깊어 정복자 영국의 법을 따르지 않았다. 런던 귀족들은 인도 요리로 손님을 대접하거나 인도 궁전 모양의 집을 건축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나라의 이질감은 문화적 충돌로 나타났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 된 후 인도에서 근무하던 판사가 두 나라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인도에는 남편이 죽으면 시신을 화장할 때 부인도 같이 태워 죽이는 전통이 있다면. 그들은 나를 찾아와 자기들 관습대로 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나는 ‘영국에도 관습이 있는데, 멍청한 여자를 태워 죽이는 사람을 사형에 처한다. 당신네가 화장터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교수대를 준비할 테니 너희는 너희 관습에 따르고 우리는 우리 관습에 따라 행동하겠다.’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두 나라 사이의 문화적 차이가 분명했다. 결국 인도인들은 폭동을 일으켜 많은 영국인이 희생되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인도 전문가를 보냈다. 그가 월리엄 존스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 아랍어, 히브리어 그리고 한문까지 완벽하게 구사한 그를 현지에 파견해 대법원장에 임명했다. 존스는 서양 문화를 제대로 알려면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어야 하듯이 인도 문화를 이해하려면 인도 신화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도 학자들을 불러들여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면서 인도 신화를 학습했다. 그 과정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산스크리트어와 영어가 유사한 점이 많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인도 신화에는 아바타 Agata라는 단어가 있다. 그런데 인간사회가 부패해 손을 봐야겠다 싶으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세상에 나타난다. 신이 세상에 나타나면 ‘신이 하늘나라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다. 즉 Ava(아래로)+tara(건너다)라고 해서 ’avatara’라고 부른다. ‘tara’는 영어로 ‘지나가다’를 뜻하는 ‘through’와 너무 비슷하다. 라틴어로 ‘trans’ 역시 ‘지나가다’라는 뜻이었다. 이처럼 18세기에 영국이 인도를 점령했을 때, 월리엄 존스는 인도의 고전어(古典語)인 산스크리트를 학습하던 중 그리스어나 라틴어, 그리고 유럽의 다른 언어와 뜻과 같은 유형 등 공통점이 많은 어휘임을 발견한다. 월리엄 존스는 이 언어들이 일찍이 원래 어떤 하나의 언어로 분화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것을 인도유럽어족(Indo-European languages) 명명했다.

원래 식민이란 지배국이 식민지에 자국민을 옮겨 심는다는 뜻이다. 식민주의는 자국에는 승리의 영광을 주지만 식민지에는 패배의 굴욕을 안겨준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 한국 지배나 영국의 인도 지배가 그렇다. 인도는 거의 200년 동안 주권도 상실하고 경제적 수탈과 착취도 당하였다. 그리고 언어, 문화 그리고 전통을 상실하는 일련의 굴욕스러운 과정을 겪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행을 통해 여전히 인도에 존재하고 있는 식민지 흔적들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이제 위대한 아그라 성을 뒤로하고 타르 사막이 있는 자이푸르로 떠나 보자.  2021/8/1 혜윰인문학연구소 / 뜨르   계속~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