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마저도 바라나시에서 죽기를 갈망한다." - <시바푸라나> 중에서 -
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5–바라나시(Varanasi): 죽음을 위해 찾는 도시 그리고 인도 베다 수학의 비밀 - 바라나시, 갠지스강(Ganges River), 미술 박물관, 바나라스 힌두대학교(Banaras Hindu University), 비슈와나트(Vishwanath) 사원, 두르가(Durga) 사원,
이번 목적지는 죽음과 삶이 뒤엉킨 도시 바라나시이다. 열차로 자이푸르에서 바로 바라나시로 이동했다. 요금은 1인당 310 Rs 정도이다. 필자에게 인도 여행은 늘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 이유는 인도의 혼종성(hybridity) 때문이다. 야누스 얼굴과 순진한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가 하며 동양의 감수성과 서양의 이성의 예리함이 동시에 있기 때문이다. 가장 인도다운 바라나시가 그렇다. 전혀 익숙하지 않은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필자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때론 이런 낯선 풍경이 좋은 때가 있다. 수수께끼처럼 말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다른 나라의 삶과 문화를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필자가 인도를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점이다. 우리는 그만큼 다른 나라의 역사나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여행해야 한다는 방증이다. 혹자는 여행을 삶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여정이라고 했던가? 그렇다. 여행에서 성찰은 기본이다. 성찰이 없는 여행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없다. 왜냐하면 여행하면서 주변에 맞닥뜨리는 현상과 사건 모두가 삶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제 천천히 땅을 보며 성찰하는 마음으로 죽음과 삶이 공속(共屬) 하는 역사적 현장, 바라나시로 들어가 보자.
바라나시는 아리안들이 지금으로부터 2700 여전인 BC 700여 년에 바라나시에 이동하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갠지스강 중하류에 있는 도시이고 힌두교도들이 성지로 여기는 7개 도시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 갠지스강(강가)에 몸을 씻으면 죄가 사해진다고 힌두교도들은 믿고 있다. 시신을 태워 그 재를 뿌리면 열반에 든다고 생각한다. 또한 힌두교도들은 최대의 축복으로 여긴다. 바라나시의 위치는 북쪽의 Varuna 강과 남쪽의 Assi 강 사이에 있다. 현지에서는 베나레스(Banaras)라고 부르기도 한다. 독립 후 정식 명칭은 바라나시이다. 바라나시는 또 다른 명칭이 있는데 바로 Kashi이다. ‘Kashi’는 ‘영적인 빛으로 충만한 도시’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바라나시에 카시역(Kashi station)이 있다. 이처럼 바라나시는 영적으로 인도인에게 중요한 도시이고 인도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장소이기도 하다. 연간 100만 명 이상의 순례자가 찾아올 정도로 힌두교 대 성지이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인도를 방문한다면 바라나시를 다시 방문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리고 바라나시 하면 갠지스강이다. 그만큼 갠지스강은 “인도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성스러운 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에게 바라나시를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인도의 고갱이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만큼 바라나시는 인도의 엑기스이다. 이제 천천히 갠지스강으로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겨 보자.
인도의 어머니 강가(Ganges), 마니카르니카(manikarnika)가트
원래 ‘갠지스강’은 ‘강제스, 강가(Ganges)’는 발음법에 따라 갠지스가 되었다. 갠지스(Ganges)는 영어 이름이다. 성스러운 강이라는 뜻으로는 강가(Ganga)라고 부른다. 강 자체가 신격화되었고 여신 Ganga mati i(어머니인 강가)로서 숭배되었다. 히말라야의 만년설의 강고트리(Gangtri)에서 시작된 작은 물줄기가 인도 중북부 평양 지대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흐르다가 바라나시에서 신기하게 북쪽으로 흘러 시바 신의 이마에 걸린 초승달 모양의 구부러진 곳이 바라나시라는 것이다. 히말라야에서 약 2,500km 정도 거리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바라나시는 3,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힌두교의 최대의 성지일 뿐 아니라 시바 신의 성스러운 도시로 예로부터 인도 문화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12세기에 무슬림에 정복당한 이후 파괴되었다가 1738년에서야 힌두교 지배로 돌아온 이후 사원도 재건하고 순례지로서 명성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 치하에서는 민족정신의 중심으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바라나시는 강가(Ganga)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다. 여기에서 시간은 강가의 윤회이다. 그 이유는 인도인에게 모든 죽음과 삶이 돌아 결국 강가(Ganga)로 통하기 때문이다. 이제 좀더 가까이 갠지스강을 향하여 가보자. 갠지스강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갠지스강 변의 골목길과 바자르는 두 사람이 마주치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은 미로이다.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독특한 향냄새다. 골목에 향냄새로 진동을 한다. 향이 있다는 것은 신전이 있다는 것이다. 맞다. 가게마다 신기하게 신전이 있다. 바라나시 안에는 수만의 신전이 있다고 한다. 코끼리 상도 보이고 물고기, 거북이상도 보인다. 좁은 미로 사이로는 오토 릭샤와 자전거 릭샤가 경적과 고함이 섞여 귓전을 때린다. 미로는 좁을 뿐만 아니라 미끄러지기까지 한다. 미로는 끝이 없다. 게다가 순례자들과 상인들의 소리가 뒤엉켜 마치 우리나라 옛날 아주 시끄러운 시골 장터 모습처럼 보인다. 바라나시를 방문한 간디도 그 느낌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좁고 미끄러운 길을 통과해야 한다. 길은 아주 시끄럽다. 파리 떼와 상인들 그리고 순례자들이 만드는 소음은 참을 수 없을 지경이다.” 실제로 좁은 골목에 줄지어 있는 가방, 옷, 액세서리, 양말 가게 등 작은 가게, 순례자들, 아이들, 누워있는 소, 담벼락에 있는 원숭이 등과 함께 끊임없이 밀려오는 호객꾼들과 적선을 구걸하는 병자들을 지나야 강가로 향할 수 있다. 마치 통과의례처럼 말이다. 골목길을 잘못 들어서면 몇 시간을 동안 길을 헤매는 것은 다반사다. 더구나 강가로 향하는 시체들의 행진과 마주치면 무척 당황스럽다. 마치 인생의 종착역을 만나는 기분이랄까? 매일 100여 구의 시신들이 "신의 이름은 진리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면 바라나시 골목길로 들어온다. 역시 인도 바라나시이다. 그런데도 조금 위안이 되는 것은 크고 작은 사원들이 있고 순례자를 반기는 기념품점도 있다는 것이다.
바라나시 갠지스강은 인도 성지 중에 가장 성스럽게 곳으로 여기기 때문에 인도 전역에 있는 힌두인들이 갠지스강에 몸을 담그기 위한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힌두교에 의하면 강가의 성스러운 물에 몸을 씻으면 모든 죄가 사해지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여 그 재를 강가로 흘려보내면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얻는다고 믿는다. 이것은 힌두교도들에게 최고의 행복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바라나시에 연간 100만 명 이상의 순례자가 방문한다. 그리고 하루에 만여 명이 갠지스강에 몸을 담근다. 물론 여기에서 생을 마감하려고 오는 순례자도 있다. 아마 죽음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강가에서 몸을 씻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으로 여긴다. 강가 물 한 모금만 먹어도 수년간 쌓아온 나쁜 업이 사라지고 목욕을 하면 일생동안 잘못을 씻을 있어 다음 생애에 좋은 생이 되기를 염원한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죽음이 다가올 시간이 되면 바라나시로 와서 죽음을 기다린다. 죽음이 임박한 힌두교 사람들이 매달 100여 명이 바라나시를 찾아온다. 그 이유는 바라나시는 시바신의 삼지창 위에 세워진 도시로 이곳에서 죽으면 시바신의 도움으로 바로 천국에 간다는 믿음 때문이다. 바라나시에 와서 그들은 해탈의 집에 숙식을 하면 지낸다. 막상 바라나시로 왔지만 죽지를 않아 몇 년을 이곳에서 살았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더 깊숙이 들어가 보면 갠지스강에는 수십 개의 가트들이 있다. 강을 따라 거의 100여 개가 이어져 있다. 그 가트들(Ghat)은 바라나시로 불리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가트란 강변에 계단으로 이어져 있는 제방이다. 도시에서 각 가트로는 길이 연결되어 있고 강변에 나란히 지은 왕후의 별장과 사원들이 그사이에 채워져 있다. 가트에 가면 성스러운 강물에 몸을 담그는 사람을 온종일 볼 수 있다. 심지어 1년 내내 신선한 강물에 몸을 담그면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주변에는 제각각 사연과 또한 염원을 품고 멀리 있는 길을 달려온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차례로 강물 속으로 몸을 담근다. 또한, 꽃으로 만든 물지게를 들고 와 갠지스강에 담고 자신의 열망과 소원을 장미꽃 등잔에 담아 갠지스강에 흘려보낸다.
갠지스강을 사이에 두고 버닝 가트(Burning Ghat)에서는 매일 시신을 태우는 행위를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마니카르니카(manikarnika)가트이다. 마니카르니카(manikarnika)란 정산한다는 뜻이다. 그동안의 삶을 정산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이 많은 아래쪽을 피해 위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마나카르니카 가트가 한눈에 들어왔다. 눈앞에서 타인의 죽음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천으로 둘둘 말린 채 대나무 틀에 운반되어 온 사체는 어김없이 가트에 도착한다. 그리고 강물에 세 번 적신 다음 장작더미 위에 놓는다. 시신을 담그고 화장하는 이유는 그동안의 나쁜 업을 이곳에서 화장하면 해탈할 수 있다고 있기 때문이다. 화장이 끝나면 뼈가루를 강에 뿌리고 유족들은 그 물에 목욕을 한다. 화장터 맨 위에는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는 신성한 불 아그니가 있다. 대대손손 내려오는 이 불을 지키는 한 가문이 있는데 그 가문이 바로 조두리 가문이란다. 지금 역시 그 임무을 담당하고 있다. 만약 힌두교인이 사망했다면 반드시 이곳에서 이 불씨로 태워야만 해탈할 수 있다. 한쪽 가트에는 한창 불꽃이 치솟고 있었다. 연기와 함께 이상한 냄새까지 코끝을 자극한다. 영혼은 연기가 되어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 하늘나라로 올라간다. 상주가 긴 막대를 가지고 시신이 골고루 탈 수 있도록 뒤척인다. 아주 무덤덤하게 말이다. 주위에는 타다만 시신을 노리는 개가 어슬렁거린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름 모를 이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에는 삶과 죽음이 하나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있음이 없음에 삼키는 죽음의 사건이 그렇다. 여기에는 인간의 주체적 중심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직 ‘삶-죽음’만 허용할 뿐이다. 철학자 빈센트 비시나스는 죽음과 삶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설파한다.
밤이 낮을 낮으로 정립시켜 주듯이 죽음이란 현존재를 진정으로 현존재이게 끔. 만들어 주는 것이다. 밤이 없다면 낮은 결코 낮으로 파악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모습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삶이 곧 죽음, 생즉사(生即死), 죽음과 삶이 하나가 아닌가?
바라나시는 바로 그런 곳이다. 죽음과 삶이 이곳보다 더 격렬하게 공존하는 공간이 또 있을까?. 눈앞에선 시체가 불타고 있고 그 재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강가에 뿌려진다. 그런데 강가 주위 상점에서는 여전히 손님들로 붐비고 일상은 계속되고 있다. 그 와중에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주위에서 사라진다. 어느새 그들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으로 다가온 듯하다. 마치 유체 이탈처럼 말이다. 언젠가는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이다. 죽음의 현장에 있는 다른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곳 갠지스강 화장터가 그렇다. 우리의 매장 풍습과 달리 이 풍습은 고대 베다 시대부터 굳어진 독특한 힌두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풍습이다. 강가에는 시체를 태웠던 재와 타고 남은 장작개비, 신에게 바쳐진 금잔화 목걸이 등이 떠내려간다. 어떤 분은 계단에는 가부좌를 틀고 주문을 외우고 그 옆에서는 깨끗하지 않은 강물에 들어가 엄숙하며 기쁨이 있는 표정으로 목욕하는 남녀노소를 목격할 수 있다. 인도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그 옆에는 강물이 말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아무일 없는듯 말이다. 아무튼, 성스러운 강물에 몸을 담그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이 대단하다. 이방인 필자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사실 눈앞에 다가선 강가(Ganga)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더러운 물이다. 그래서 이런 농담도 있다. “바라나시에는 별도의 고기를 먹을 수 없다. 차만 마시면 된다.” 아마 이 말은 강가(Ganga)의 물의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화장터의 나온 재, 타다 남은 인육 등이 고스란히 강가(Ganga)의 흘러 들어가 다시 먹는 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물도 오물투성이에 시체의 한 부위가 둥둥 떠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남자는 이곳에서 태연하게 목욕한다. 심지어는 양치질하고 마시고 물을 담아간다. 충격적이다. 이방인의 눈엔 그저 화장터일 뿐인데 말이다. 다른 가트에서는 매일 저녁이면 강가의 여신에게 바치는 힌두교 전통 제례 푸자 의식도 열린다. 푸자(Puja)라 불리는 이 종교의식은 하루를 무사히 보냈음을 강가(Ganga)의 신에게 감사드리고 내일에 대한 희망과 소원을 비는 의식으로 대략 한 시간 반 정도 진행된다. 모두에게 안녕을 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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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신은 인간을 진흙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영’을 불러 들어가기를 명령했다. 그러나 자유로운 영은 더러운 육신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신이여 저는 더러운 육신에 들어가기 싫습니다.” 신이 진노하자 할 수 없이 들어가서 신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신이시여 이 안에 영원히 가두지 않고 때가 되면 밖으로 꺼내 준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그러면 들어가겠습니다. 약속을 받아낸 영은 육신에 들어갔다. 영혼만으로 할 수 없는 여러 가지가 육체를 통해 가능하고 육체를 통해 가능하고 육체의 오감에 흠뻑 빠졌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신이 방문했다. 나가기 싫었지만 약속한 대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처럼 힌두교에서 육체는 진흙 덩이일 뿐이고 오감에 지배될 뿐이다. 육신은 신이 부르면 그 자체도 분해해 버린다. 따라서 힌두교에서 육체는 푸줏간에 걸린 고기보다 못한 존재이다. 마치 육신은 벗어던져야 하는 낡은 옷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혼은 다르다. 그래서 힌두교 사두는 죽은 사람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향해 모든 죄를 사해달라고 축복의 말을 던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힌두교도는 다르마에 따라 살다 죽으면 다음 생애에는 더 고귀한 존재로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소를 숭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로 소가 인간의 전 단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환생을 믿지만, 환생을 권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삶은 고행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바라나시가 유명한 이유도 시바 신의 도시로 시바 신의 불로 화장을 하면 윤회의 고리를 끊고 즉, 더는 환생하지 않고 바로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윤회를 끊고자 하는 힌두인들의 열망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바라나시 갠지스강의 마력(魔力)이다.
일찍이 신라의 승려 혜초도 8세기 초 바라나시를 방문했다. 그만큼 불교도는 인도가 로망이었는지 모른다. 그때 당시 인도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음에도 인도를 가겠다는 의지가 강했는지를 시를 통해 표현했다.
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 붙었고
찬바람은 땅을 가르도록 매섭다.
넓은 바다 얼어서 단을 이루고
강은 낭떠러지를 깎아만 간다.
그리고 겨울날 투가라국에 있을 때 눈을 만나 그 느낌을 읊은 이 시에서 우리는 무시무시한 고행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그때 당시 천축국(북인도) 여행은 ‘떠날 때는 100명이나 돌아온 자는 한 명도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험난한 여정이었다는 이야기다.
용문(龍門)엔 폭포조차 끊기고 말았으며
정구(井口)엔 뱀이 서린 듯 얼음이 얼었다.
불을 들고 땅끝에 올라 노래 부르리
어떻게 저 파밀고원 넘어가리오.
신라에서 인도 여행이 바로 고행이었을 것이다. 도착한 그때 당시 바라나시의 모습을 그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남겼다.
“이 나라는 황폐화하여 왕도 없다. 구륜(九輪)을 비롯하여 다섯 제자 비구의 소상(塑像)이 안치된 탑을 보았다. 사자상(獅子像)이 있는 석주(石柱)가 있는데, 크기가 다섯 아름이나 되는데 특히 무늬가 섬세하다. 탑을 만들 때 석주도 함께 만들었다. 절 이름은 달마작갈라(達磨斫葛羅)다. 외도(시바교의 일파인 파수파타(Pāśupata)파)들은 옷을 입지 않고 몸에 재를 바르며 대천(大天, 시바)을 섬긴다.”
"며칠 걸려 피라날사국(바라나시)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부처의 다섯 제자의 모습이 새겨진 탑이 있다. 또 사자가 올라타고 있는 돌기둥이 있는데 그 돌기둥은 대단히 커서 다섯 아름이나 되고 무뉘가 섬세하다"
혜초 말고도 신라에서 출발해 인도에 들어가 승려들이 여럿이 있었다. 처음에는 중국까지만 가려다가 인도까지 가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불교 신자들의 인도에 대한 열망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들 모두 한번 가서 돌아오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아마 돌아오지 못해도 좋다는 신앙의 각오가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험난한 여행이었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다음 목적지는 바나라스 힌두대학교, 비슈와나트 사원, 두르가(Durga) 사원, 인도 베다 수학의 비밀의 여행을 떠나보자.
바나라스 힌두대학교(Banaras Hindu University), 비슈와나트(Vishwanath) 사원, 두르가(Durga) 사원, 베다 수학(Vedic mathematics)의 비밀, 부처가 깨달음 뒤 바라나시로 온 이유
여행 중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바라나시 구시가지 남쪽에 있는 바나라스 힌두 대학교(Banaras Hindu University, BHU)를 둘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이름 그대로 인도의 민족문화를 전반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1916년에 설립되었다. 전통이 있는 학교이고 힌두교를 대표하는 대학이다. 약 3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재학 중이고 아시아에서 가장 큰 기숙형 대학이라는 사실이다. 전 세계의 34개국에서 온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다. 힌두대학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공과대학, 언어학, 저널리즘 등 인문대학 관련 분야도 많다. 캠퍼스는 조용하고 청결하여 산책하기에 좋다. 또한 캠퍼스 안에는 인도 미술관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훌륭한 조각과 세밀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어 대형 미술관 못지않게 볼 만하다. 또한, 시내에는 18세기에 건립된 Golden Temple이라 불리는 황금빛 첨탑의 비슈와나트 사원이 모여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이 사원은 ‘세계의 중심’을 의미하는 비슈와나트 갈리(Vishwanath Gali)라고 불린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에는 양쪽에 상점이 있어서 마치 번화가처럼 복잡하다.
이 사원의 특이점은 본존이 시바 신의 상징인 링가(남근의 돌)라는 것이다. 다른 사원과 달리 시바 사원은 보통 링가를 본존으로 한다. 아마 링가는 선주민(先住民)의 남근 숭배가 생식의 신으로 여긴 시바 신 즉 힌두교와 결합하였다. 원래 바라나시로 이주한 아리안족은 다신교를 믿었었다. 그런 그들에게 새로운 신앙이 탄생했다. 바로 여성의 생식기 위에 세워진 남근 형상의 돌 링가이다. 링가 신앙은 아리안족에게 존재하지 않은 원주민의 신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리안들이 힌두교가 발전하면서 파괴의 신 시바의 머리카락을 타고 갠지스강에 내려왔다. 시바의 찬란한 빛기둥 링가가 솟아오르자 아름다운 도시가 창조되었다. 즉 시바가 바라나시를 창조했다. 그래서 카시(바라나시)는 빛으로 가득 찬 도시로 생각했다. 힌두교인들은 이곳에서 수행을 하면 다른 곳에서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빨리 깨달음을 얻는다는 믿음이 있다. 아무튼 링가 모양은 끝이 일반적으로 둥근 원통형 모습이다. 둥근 원통형에 시바의 머리 부분을 만든 것을 무 카링가(Mukha-linga)라고 한다. 애초 링가 숭배는 토착 종교로서 경시되었다. 하지만 8세기의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 베단타 파(派)의 개조 산카라 등이 힌두교 속에 크게 자리 잡으면서 시바 신의 상징으로서의 자리매김하게 된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링가 숭배를 남근 숭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마 링가를 상징성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비슈와나트 사원은 힌두교도 외에 실내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본전의 모습을 자세히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숙소 2층에서 살며시 엿보는 사람도 있다. 바라나시에 또 다른 사원으로 두르가 사원이 있다.
두르가(Durga) 사원은 원숭이가 많으므로 ‘멍키 템플’이라는 별명이 있다. 사원 안에는 많은 원숭이가 노닐고 있다. 하지만 잘못 접근하면 무는 경우가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이 사원은 인도의 대표적 힌두교 사원으로 6세기경에 건설되었고 시바 신’의 아내이자 전쟁의 여신인 ‘두르가’를 모시고 있는 사원이다. 두르가는 용감무쌍하고 싸움을 잘하는 무서운 여신이다. 두르가(Durga) 사원 역시 일반인은 사원 내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이 사원은 고대 인도의 불교사원 건축의 한 양식인 차이트야 홀의 형태를 바꾸어 만들어진 건축으로서 가장 발전된 대표적인 힌두교 사원이다. 특히 건물 전체를 돌아가며 줄지어 늘어선 기둥으로 회랑(回廊)을 만들었다. 이 회랑은 전면에 있는 홀에 연결되어 있다.
또한, 두르가 사원에는 수학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전설에 따르면 옛 사원 안에는 하노이 탑으로 불리는 세 개의 다이아몬드 기둥이 있었다. 그중 한 기둥에 브라마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황금으로 만든 원판 64개를 쌓아 놓았다. 원판은 아래부터 크기가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차례로 쌓여 있었으며 신은 승려들에게 이 원판들을 옮기도록 명령했다. 원판을 옮길 때 지켜야 할 원칙은 한 번에 한 개씩만 옮겨야 하고 반드시 큰 원판 위에 작은 원판이 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64개 원판이 모두 옮겨지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것이다. 게임은 옆에 있는 또 다른 한 기둥으로 모두 옮기는 데에 몇 번이나 옮겨야 다 옮길 수 있을까?라는 문제다. 큰 원반을 작은 원반 위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규칙 때문에 보조로 사용하는 기둥을 세울 수 있고, 이 원반을 다 옮기는 날이 세상 종말의 날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수학 문제다. 몇 번을 옮겨야 다 옮길 수 있을까? 한국에서 2014년 방송한 EBS 다큐프라임 『문명과 수학』 3부 - 신의 숫자 타이틀로 방송하기도 했다. 1개의 원반을 옮기는 데는 1번, 2개는 3번, 3개는 7번이 걸리는데, 여기에는 수학적 규칙이 존재한다. (원반의 수×2) - 1, 즉 1개는 (1 2) -1=1, 2개는 (2×2) -1=3, 3개는 (2×2×2)-1=7 이란 규칙이 생기는데, 이 법칙을 이용하여 64개의 원반을 전부 옮기는데 몇 번이나 옮겨야 할까. (2×2×2×2×2…. 2의 64승)-1=? 총 18,446,744,073,709,551,615번을 옮겨야 다 옮길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읽기도 어려운 이 숫자는 1,844경이다. 1초에 한 번씩 옮긴다고 해도 5,849억 년이 걸린다. 결국, 세상의 종말은 안 온다는 얘기다. 인도에 수학이 발달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인도 베다수학(Vedic mathematics)의 신비, 백팔번뇌(百八煩惱)
인도 사람들은 수학과 과학 분야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다. 미국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창업자의 15%는 인도계 혹은 인도 사람일 정도이다. 세계적 IT 기업의 요직에도 인도인들이 많다. 천재 과학도들의 이야기를 다룬 미드 '빅뱅 이론'에서도 인도계 캐릭터 라지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뛰어난 이면에는 인도 베다 수학이 있다. 베다 수학은 고대부터 입으로만 전해져 온 브라만의 힌두교 경전인 '베다'(Veda)에 기반한다. 그런데 베다 수학은 브라만 계급만이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어서 대중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인도 수학자 ‘스와미 바라티 크리슈나 티르타지’(Swami Bharati Krishna Tirthaji, 1884-1960)가 발견해 최종 정리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브라만의 경전과 베다 경전의 계산과 수학에 관련된 수트라의 야타르바 베다의 원문을 모두 해석하여 16개의 수트라와 13개의 술바수트라스를 재구성하여 만들었다. 그렇지만 베다 수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역사를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6세기의 인도 수학자인 아리아바타는 이미 몇천 년 전에 수학적 서사시에서 원주율의 값 3.1416으로 발견했고 오늘날 수학에서 사용되는 삼각법 ‘sin’ 기호 역시 처음 사용한 것이다. 7세기 브라마굽타도 인도의 수학자·천문학자이다. 천문학에 관한 저서《브라마시단타》에서 1차에서 다시 2차의 부정(不定) 방정식, 원에 내접(內接)하는 네 변형 등을 연구하는 등 인도는 오래전부터 수학의 선구자 나라였다. 게다가 0을 발견했고 십진법과 자릿수의 개념을 확립하는 등 서양보다 한 발 앞서 수학의 역사를 선도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도 아라비아 사람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인도 사람들이 발명한 것이다. 이것을 아라비아 상인들이 아라비아와 유럽에 전해 주었는데 잘못 알려져서 '아라비아 숫자'라고 불렸을 뿐이다. 다른 수학 체계와 달리 아라비아 숫자 체계는 10개로 단위로 덧셈이나 뺄셈, 곱셈, 나눗셈과 같은 계산을 하는데 뛰어나다. 이처럼 인도 수학의 발달은 종교적 수(數) 의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인도의 숫자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숫자 말이다. 예컨대 갠지스강의 한자 이름은 '항하(恒河)'이다. 갠지스강의 모래만큼 많다는 뜻의 ‘항하사’(恒河沙)는 10의 52승을 나타내고 10의 52승: 아승지(阿僧祇), 10의 60승: 나유타(那由他), 10의 64승: 불가사의(不可思議), 10의 68승: 무량대수(無量大數)를 의미한다. 1보다 작은 수에도 마찬가지이다. ‘모호’(模糊)는 10의 –13승이고, ‘찰나’(刹那)는 10의 –18승, ‘허공’(虛空)은 10의 –20승, ‘천재일우’(千載一遇)는 10의 -47승이 되는 수다. 이 같은 이름들은 인도에서 발생한 아마 불교의 영향으로 보인다.
우리는 주로 사용하는 단어 중에 번뇌라는 말이 있다. 주로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이지만 이제 일상어가 되었다. 여기서 번뇌(煩惱)란 몸과 마음을 괴롭혀서 깨달음과 열반에 장애가 되는 정신 작용을 말한다. 또한 우리는 번뇌라는 말과 함께 백팔번뇌(百八煩惱)라는 말도 많이 사용한다. 이 말은 불교에서 108가지로 분류한 중생의 번뇌를 말한다. 그러면 왜 백팔번뇌(百八煩惱)가 되었는가? 그 이유를 알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사람의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것으로는 눈, 귀, 코, 입, 손, 머리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 여섯 가지 감각은 다시 좋음(好), 나쁨(惡), 좋음도 싫음도 아님 (平) 세 가지로 나누어지고 (6×3) 총 18가지 번뇌가 된다. 이것을 다시 깨끗함(淨), 더러움(染)으로 나눠 36가지가 된다. 이 번뇌들은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3배 하면 모두 108(6×3×2×3=108)번뇌라는 계산이 나온다. 필자는 이 말은 한마디로 집착을 버리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우리말에도 재미있는 수 개념이 있다. 백을 ‘온’, 천을 ‘즈믄’, 만을 ‘드먼’이라고 했다. 지금은 주로 한자를 주로 사용하면서 없어졌다. ‘온몸’, ‘온통’이라는 말도 ‘온’이 백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지금은 ‘전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붓다가 깨달음 뒤 바로 바라나시로 온 이유
또한 재미있는 사실은 붓다가 처음 설법을 행한 장소도 바로 바라나시이다. 다섯 제자를 앞에서 설법 장소를 기념한 건물이 사르나트이다.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6km 지점에 있다. 아쉽게도 필자는 여행 일정상 방문하지 못했다. 2500여 전 35세 나이에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단숨에 달려온 곳이 바라나시라는 사실이다. 왜 부처는 11일 동안 219 Km를 걸어 제일 먼저 바라나시를 선택했을까? 필자 역시 궁금했다. 당시 바라나시는 인도의 교통 문화 중심지로 성장했다. 그래서 붓다는 이곳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붓다의 전략은 이렇다. 첫번째 이유는 바라나시에서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불법의 우수성을 많은 곳으로 전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바라나시에 있는 많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자신(붓다)의 깨달음을 검증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두가지 이유로 붓다는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를 첫 번째 설법 장소로 택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부다가야 편에서 다룰 예정이다.
그리고 바라나시 여행 중 시간이 허락된다면 인도 전통 악기 중 하나인 시타르와 타블라 연주를 들어도 좋다. 바라나시는 음악학교가 있는 음악의 도시로 곳곳에서 인도 전통 음악회가 열린다. 물론 비용을 조금 내야 한다. 약 30~50루피 정도이다.악기를 구입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필자도 과감하게 시타르를 430 Rs에 구입했다. 더 나아가 시타르와 타블라를 배워 보는 것도 인도 문화를 이해하는데 좋은 듯하다. 이 모든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두고 이제 바라나시 여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죽음과 삶이 뒤엉킨 현장을 목격했다. 그리고 인도 베다 수학의 비밀을 들추어 인도 수학의 저력을 확인했다. 필자에게 의미 있는 여행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제 바라나시의 수수께끼 같은 찬란한 암흑의 터널을 지나서 잠시 긴 호흡을 내쉬고 깨달음의 장소 부다가야로 발걸음을 옮기고자 한다. 2021/11/1 혜윰인문학연구소 / 뜨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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