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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7–콜카타(캘커타) : 식민지 그리고 사람, 동물, 소음 등으로 뒤엉킨 도시- 빅토리아 기념관(Victoria Memorial), 타고르 하우스(Tagore House), 칼리사원(Kalighat Temple), 마더 테..

by 뜨르k 2022.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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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7–콜카타(캘커타) : 식민지 그리고 사람, 동물, 소음 등으로 뒤엉킨 도시- 빅토리아 기념관(Victoria Memorial), 타고르 하우스(Tagore House), 칼리 사원(Kalighat Temple), 마더 테레사의 집(Mother Teresa)

 

캘커타는 사탄의 손아귀에 들어있고 사악한 안개의 어둠 속에 점점 더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라빈드라 라드 타고르의 『캘커타의 위기』 중에서

 

오 캘커타! 인도의 최대 도시
일천만 인구가 바글바글 끊는 도시,
중생이 자기의 분수를 알려면
이곳에 와야 한다.
천,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
육도윤회가 한눈에 전개되는.
도심지는 온갖 차량의 박물관,
인력거, 소달구지, 마차, 삼륜차에
전차, 자전거, 자동차, 이층 버스,
이마에 원색의 신상을 그려 넣은 퍼블릭 캐리어 등
맛대로 매연과 소음을 뿜는다.
보도엔 신발 신은, 또는
맨발의 온갖 남녀노소
모두 제 갈 길을 찾아간다.

박희진의 『오, 캘커타…』 중에서

 

이번 인문학 여행지는 불교의 성지 보드가야를 뒤로 하고 식민지 시대 150년 동안 인도 수도였던 콜카타(Kolkata)이다. 콜카타는 인도 서벵골주의 주도로 인도 동부에 자리 잡고 있다. 한때 영국령 인도의 수도였다. 인구는 약 1천4백만 명으로 인도에서 3번째로 큰 대도시이다. 2001년 1월 도시의 이름을 영어식 이름 캘커타(Calcutta)에서 전통 명칭인 콜카타로 공식 변경하였다. 필자가 여행한 다음 해 말이다. 그런데도 캘커타 블랙홀 사건이나 캘커타 대학살처럼 말 등은 대부분 옛 명칭 그대로 사용한다. 콜카타는 갠지스강의 지류인 후글리강 기슭에 있다. 강을 사이에 두고 하우라 다리, 제2하우사 다리, 밸리 다리로 후글리(Hooghly)와 연결되어 있다. 인도의 대도시 중 켈커타만큼 생활의 냄새가 지독하게 베어져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모든 게 인간의 격정적인 삶에 녹아버린 듯하다. 도로는 버스, 자동차. 인력거 등으로 넘치고 차 안에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차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차 간에 매달려 간다는 표현이 어울리듯 하다. 차는 빵빵거리면서 자주 멈춘다. 트럭과 버스, 그리고 인력거와 사람들이 홍수를 이룬다. 게다가 소나 개 그리고 비둘기 등도 뒤엉켜 마치 시내 전체가 마치 전쟁 중 피난민 행렬처럼 보일 정도이다. 캄캄한 거리에 넝마를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사람들, 죽은 듯 쓰러져 있는 개들, 어슬렁어슬렁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소들, 냄새와 먼지로 뒤범벅인 곳에서 너무나도 태연하게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디로 가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지향하는지 등 외지인 필자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튼, 콜카타는 혼돈 그 자체였다. 물론 그들에게도 각자의 삶이 존재할 것이다. 콜카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그렇게 흡수하고 창조하는 듯하다.

 

 

콜카타(Kolkata) 현재 인구는 1,200만의 최대 도시이지만 그 발전은 넉넉지 않았다. 1690년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켈카타에 자리를 잡을 무렵에는 세 개의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중 한 곳이 카리카타인데 여기서 캘커타가 유래되었다. 콜카타라는 이름은 여기서 숭배하는 여신 칼리와 연관이 있다. 이 문제는 뒤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벵골의 운명은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콜카타(Kolkata)가 어느덧 벵골의 중심이 된 것이다. 콜카타는 지리적으로 당연히 인도에 속한다. 하지만 콜카타 사람들은 ‘인도보다 벵골에 속한다’라고 생각한다. 남인도가 타밀나두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콜카타는 벵골 정체성인 듯 말이다. 콜카타 역사는 대략 이렇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1690년 갠지스강 지류인 후글리강(Hooghly江) 동쪽 강의 어귀에 교역소를 세우면서 시작되고 이때부터 콜카타는 변하기 시작한다. 콜카타는 무려 150년(1772~1911년) 동안 인도의 수도였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콜카타의 후굴리강이 제국 함대의 포성의 흔적으로 ‘슬픔의 강’‘저항의 강’으로 인식될 정도이다. 콜카타의 아픈 역사가 되었다.

1601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제1차 항해 때 인도에 보낸 선박은 고작 5척에 불과했다. 하지만 120년 만에 세계 최대의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했고 200년 후에는 광활한 인도 대륙을 점령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결국 인도는 1857년에 일어난 일명 세포이 항쟁으로 결국 영국에게 통치권을 잃게 되고 장장 250여 동안 인도 통치의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이 사건은 아마 세계 역사상 대사건으로 기록될 만큼 의미가 있어 보인다. 콜카타(Kolkata) 인구 변화를 보면 그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1706년 당시 콜카타 인구는 1만 명에 불과했지만 1752년 거의 12만 명, 1821년까지 18만 명에 도달한다. 현재 콜카타(Kolkata) 순수 인구는 600만 정도이다. 하지만 콜카타 광역권 인구가 1,500만 정도를 고려하면 과히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이런 성장에 이면에는 분명 암흑이 존재하는 법, 벵갈은 식민지 시대에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플라시 전투 이후 동인도회사를 통한 간접 통치와 세포이 항쟁 이후 직접 통치하는 동안 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빈곤과 기아 등이 만연했다. 식민 착취 100년 후부터 대기근으로 오릿사, 벵갈, 비하르, 마드라스 지역에 200만 명이 사망하는 등 대재앙이 일어났다. 또한 식민지 제국이 그렇듯이 경제적으로 인도의 재산과 부를 영국으로 반출하고 인도인의 땅을 교묘하게 지배했다. 그동안 콜카타(Kolkata)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 뒤 1912년 브리티시 인디아 즉 인도 수도가 콜카타에서 델리로 옮기게 된다. 그럼 이제 천천히 콜카타 역사적 숨소리를 들어보도록 하자. 제일 먼저 갈 곳은 영국 식민 통치 치욕스러운 역사 흔적인 빅토리아 기념관이다.

빅토리아 기념관(Victoria Memorial)

‘콜카타 1번지’ 빅토리아 기념관도 들렀다. 입구의 조각상 부조에 인도 병사와 신민을 이끈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코끼리를 타고 도도하게 앉아 있다. 콜카타가 ‘제국의 수도’였음을 과시하는 전형적 상징이다. 콜카타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빅토리아 기념관(Victoria Memorial)은 이름처럼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건축되었다. 영국과 인도제국의 황제를 겸임하던 빅토리아 여왕이 1901년에 사망하자 영국의 총독은 여왕을 추모하는 건축물을 세우기로 하고 샤 자한이 죽은 아내를 기리면서 만든 세계의 걸작 타지마할에 버금가는 기념관을 선물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건물을 구상한 사람은 영국 총독 커즌 경이다. 총독 커즌 경의 말을 들어보자. “건물을 짓자. 위엄 있고 … 장엄하여, 콜카타를 찾는 모든 이들이 돌아보게 될 그런 건물을.” 이 계획을 위해 인도 각지에서 성금을 모았다고 한다. 1906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921년 12월 28일까지 장장 15년 동안 공사를 하여 완공 정도로 대공사였다. 양식은 영국의 고전주의와 동양적인 요소, 그리고 대리석 원주의 무굴 건축과 서구 건축이 융합된 양식이 가미되는 듯하다. 모퉁이 돔은 희미하게 무굴 양식 냄새를 풍긴다. 또한, 건물 자재는 타지마할의 순백 대리석과 같은 석재로 조드푸르의 마크라나 채석장에서 가져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만큼 당시 영국인들은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의식하여 빅토리아 기념관을 건축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어찌 빅토리아 기념관(Victoria Memorial)을 타지마할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필자가 보기에도 어림도 없다. 자재만 같다고 똑같은 건축을 기대할 수 없다. 마음과 정성이 버무려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빅토리아 기념관(Victoria Memorial) 건물의 꼭짓점은 뭐니 뭐니 해도 청동으로 만든 꼭대기 여신상이 아닌가 싶다. 승리를 자축하는 듯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제국의 백성을 호령하는 듯 보인다. 그 높이가 무려 4.8m이란다

또한 빅토리아 기념관은 7만 5천 평 넓이의 넓은 정원 한가운데에 우뚝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아주 넓은 정원에 거대하고 아름다운 예쁜 집처럼 말이다. 전체적으로 전경과 공원의 모습은 한가롭고 아름답다. 기념관의 옆면은 야외 주량으로 길게 연결되어 있고 개선문 양식의 아치는 에드워드 7세를 기념하여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선문과 연결된 남쪽 현관에는 커즌 경의 동상이 있고 현관 홀에는 왕실 인물들의 청동 흉상과 대리석 동상이 있다. 벽은 빅토리아 여왕의 일생을 그린 벽화와 대영 제국 황제의 선언문에서 발췌한 글귀가 장식되어 있어 제국의 건물임을 입증한다. 내부에는 그림, 조각품, 공예품, 서적, 필사본 등, 모두 왕실과 대영제국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컬렉션들을 전시하고 있다. 물론 내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그리고 빅토리아 기념관(Victoria Memorial)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식민지의 건축의 양식이 대체로 자본력에 기초하기 때문에 건축의 내실보다는 그 특징이 ‘튀는’ 건축물이다. ‘자기과시’ 혹은 ‘겁주기’ 양식 말이다. 식민지 건축물 빅토리아 기념관도 마찬가지이다. 이탈리아 등에서 수입한 대리석 기둥과 바닥, 거대한 건축물, 즉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등은 대부분 시대의 건축물 등이 좋은 예다. 그래서인지 콜카타의 많은 건축물이 식민지 모국 영국의 ‘짝퉁’인 이유이다. 가령 최고법원 건물은 벨기에 양식, 성 바울 교회는 인도-고딕 양식이다. 그런데도 벵골(Bengal)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일종에 벵골 문화 운동이다. 현대 문학과 예술, 인쇄와 오락(레크리에이션) 등을 콜카타를 본산으로 만든 것이다. 실제로 시성(詩聖) 타고르를 비롯해 20세기 후반 인도 음악을 세계에 널리 알린 최고의 시타르 연주자 라비상카, 영화《아푸》3부작, 《불굴의 인간》 등으로 알려진 영화감독 사다릿 레이 등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예술가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 바로 벵골(Bengal)이다. 이제 식민지 문화를 뒤로하고 식민지 저항운동을 펼쳤던 벵골 시인 타고르가 기거하던 타고르 하우스(Tagore House)로 향했다.

타고르 하우스(Tagore House)

“일찍이 아시아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라고 한국을 칭송했던 타고르 하우스(Tagore House)는 1913년 아시아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인도의 시인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생전에 기거하던 집이다. 타고르 하우스는 일찍이 벵골 문예부흥 운동의 중심인물들이 모이던 살롱이었다. 타고르는 이 집에서 태어나 1941년 80세를 일기로 이 집에서 생을 마쳤다. 이 집은 현재 ‘라빈드라 바라티 대학’으로 사용하고 있다. 별관은 개조 후 타고르의 유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연간 방문객 수만 20만명에 달한다. 박물관 전체 규모는 35나 된다. 동시에 이곳은 타고르의 숨결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타고르가 태어나고 숨을 거둔 생가 등 타고르 가문의 저택 3채가 이 박물관으로 개조돼 꾸며졌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시인의 유물, 그림, 편지와 원고 그리고 사진 등도 을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타고르 관련 서적 2841점을 비롯해 사진 3297, 가구 53, 회화 16, 공예품 27, 유품 208점 등이 소장되어 있다.

 

필자가 방문할 당시에도 학교에는 사리를 입은 여학생들로 웅성거린다. 교정 한쪽에는 손에 원고를 들고 있는 타고르 흉상이 보인다. 타고르는 시집 <기탄잘리>로 전 세계에 익히 알려져 있고 식민지 시절에는 영국에 대한 저항운동과 교육에 힘썼다. 그는 간디만큼 잘 알려진 인도의 위대한 시성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마하트마도 타고르가 지어준 별명이고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존경했다고 한다. 다만 인도의 독립에 대한 견해가 달라서 같은 길을 가진 않았다. 타고르에 관한 책은 서점이나 공공건물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인도에서는 단순하게 시인만이 아니었다. ‘순수한’ 벵골 사람인 타고르 1937년 벵골 전통음악과 춤을 현대적으로 결합하여 벵골만의 독특한 문화가 창조해냈기도 했다. 그 전통은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그 덕분에 벵골만에서는 벵골어·영어·힌디어·우르두어 등 다양한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콜카타 항이나 수산시장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바로 이러한 언어들의 합창인 셈이다. 타고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 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8– 산타니 케스탄: 영원한 시성 타고르- 비스바 바라티 대학, 타고르 문학>에서 다룰 예정이다. 다음 목적지는 칼리 사원이다.

칼리 사원 (Kali Temple)

콜카타 번화가 초우링가 거리에서 남쪽으로 4km쯤 가면 힌두교 칼리 여신을 모신 성지가 있다. 바로 칼리 사원이다. ‘죽음과 파괴의 여신’ 칼리를 모시는 사원으로 유명하다. 콜카타에서 가장 오래된 숭배 장소이기도 하다. 원래 16세기에 오두막 형태로 처음 생겨났고 현재의 신전은 1809년에 창건되었으며 벽돌에 회반죽을 바른 전형적인 벵골 양식을 띠고 있다. 사원 안에는 여신의 상징인 검은 돌이 있다. 이곳에는 칼리 여신의 축복을 갈망하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칼리 여신은 과연 어떤 신이기에 벵갈 인에게 사랑을 받는 것인가? 힌두교에는 3억 명이 넘는 신이 있다. 그중 칼리 여신은 잔혹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도 피를 좋아하는 칼리 여신을 만족하게 하려고 아침마다 염소를 제물로 바치는 희생제를 치른다. 칼리 여신에게 피를 드리는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매일 아침 염소나 양의 목을 벤다. 그래서 길바닥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려 있다. 마치 길바닥이 뻘겋게 타는 듯 보일 정도이다. 희생제에도 검은 양과 염소와 수컷만 가능하다. 검은빛은 악을 상징하므로 검은 양과 염소를 바쳐야 하고 대신 암컷은 생산을 담당하기 때문에 죽여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실제로 필자가 인도 여행 때 칼리 사원을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피 냄새가 진동하여 이마를 찌푸린 기억이 있다. 이런 행위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생제가 끝나면 여신에게 바친 염소를 요리해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그 고기를 파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 비용으로 칼리 사원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원래 칼리 사원에 사람을 받쳤는데 영국 식민지 시대 이후 잔인하다는 이유로 사람 대신 염소를 바치는 의식으로 완화(?)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종교 사원에서 매일 신을 숭배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물론 다른 종교 제의에서 희생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구약성서에도 히브리어 성서 본문에 의하면 희생물이 된 숫양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대신하여” 희생제물로 드려졌다고 말한다. 이슬람 역시도 양이나 소 등을 잡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치른다. 이슬람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희생제를 드리고 난 희생제물을 여러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사실이다. 3분의 1은 가족에게, 다른 3분의 1은 친척이나 친구에게, 나머지 3분의 1은 불우한 이웃에게 말이다. 하지만, 힌두교 브라만교에서 칼리에게 받치는 희생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B.C. 6세기경에 ‘마하바라’에 의해 창설된 자이나교와 불교이다. 그들은 불살생 계율을 지키고 있어서 희생제를 거부한다. 특히 자이나교도들은 땅속의 벌레도 죽일 수 없어서 농사를 짓지 않고 대부분 상업에 종사한다. 불교도 십계 중 첫 번째 계율로 “살생하지 말라”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 티베트 불교에서 칼리는 잔혹한 여성 존재로 변신해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활동한다. 왜 사람들은 검은 살빛의 무서운 칼리 여신이 지배하는 사원에 참배하기 위해 줄을 서는가? 칼리는 산스크리트어로 칼라(kāla)라는 명사에서 나왔다. 칼라는 검은색·시간·죽음·죽음의 신을 뜻하고 칼라카는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칼리는 흔히 “검은 피부색을 가진 자” 또는 “파괴의 여신”으로 해석된다. 칼리의 배우자 시바도 영원한 시간과 존재라는 뜻으로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칼라(Kāla)라고도 불린다. 칼리는 “시간”과 “변화” 그리고 “죽음”을 상징하는 여신이다. 여기서 시간이란 만물이 산출되고 또 돌아가는 수수께끼의 심연이다. 이 여신의 이미지는 불탄 땅, 다시 말해 시체들이 불탄 장소에서 춤을 추는 것으로 묘사된다.

캘커타(콜카타)의 수호신 칼리에 대한 신화는 이렇다. 칼리 여신은 시바의 아내로 죽음을 관장, 싱싱한 피를 원한다. 악마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칼리는 너무 즐거운 나머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칼리가 추는 춤은 죽음의 춤이다. 그녀가 춤을 추고 지나간 자리는 죽음과 파괴뿐이었다. 어떤 신(神)도 피에 취한 칼리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결국에 나선 것은 바로 칼리의 남편 시바이다. 시바는 칼리가 춤을 추는 곳에 가서 드러누웠고 칼리에게 밟히게 된다. 안면이 있는 얼굴이다 싶어 보니 자기 남편이었다. 그제야 칼리는 이성을 되찾고 춤을 멈추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사납고 위험한 파괴의 신 시바는 과거, 현재, 미래를 볼 수 있는 세 개의 눈과 삼지창을 갖고 있다. 시바의 배우자로는 사티, 파르바티(우마), 강가, 두르가, 칼리 등이 있다. 사티, 파르바티(우마) 등은 시바에게 순종적인 여신들이다. 반면에 파르바티(우마)는 성미가 거칠고 피를 좋아한다. 칼리가 바로 우마의 화신이다. 사티는 자신의 아버지가 남편인 시바의 명예를 모독한 것에 분노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제 불에 던졌을 정도로 남편에 순종적인 여신이다. 화신의 화신이다. 이 사티 여신의 유명한 화신이 바로 헌신적인 파르바티(우마)이다. 이에 비해 두르가나 칼리는 독립성이 강한 여신이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숭배되기 때문에 배우자인 시바와 관계도 약할 수밖에 없다. 파괴의 신 시바는 아내 파르바티(우마)가 죽자 깊은 슬픔에 빠졌고 정신도 혼미해졌다. 시바가 이성을 잃고 세상을 파괴할까 우려한 비슈누가 우마의 시체를 52등분으로 나누어 분해했는데 그중 손가락 하나가 콜카타 근처에 떨어져 칼리로 재생하였다.

칼리는 파르바티 분노의 화신으로 그 모습이 흉악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악마를 죽이는 신으로 악명이 높다. 늘 싱싱한 피를 원한다. 예컨대 그녀는 악마인 슘부(Shumbhu)와 나슘부(Nashumbhu)와의 전투에서 악마를 물리치고 승리에 도취하여 죽음의 춤을 추면서 황홀경 속에서 살인적인 파괴를 계속한다. 악마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칼리는 너무 즐거운 나머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즉, 죽음의 춤이다. 그녀가 춤을 추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죽음과 파괴뿐이었다. 다른 모든 신들이 그 행위를 멈추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무아경에 빠진 것처럼 말이다. 다른 신들은 그녀를 도저히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어떤 신도 피에 취한 칼리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결국에 나선 것은 바로 칼리의 남편 시바이다. 그는 칼리가 춤을 추는 곳에 그냥 누워 버렸다. 시바는 칼리가 춤을 추는 곳에 가서 드러누웠고 칼리에게 밟히게 되었다. 여기는 살해된 악마들 시신들이 있는 곳이다. 이에 시바는 자연스럽게 칼리에게 밟히게 된다. 자신이 남편인 시바의 몸 위에서 춤추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린다. 그제야 칼리는 이성을 되찾고 춤을 멈추게 되고 슬픔과 놀라움으로 혀를 밖으로 내놓았다는 설이다. 붉은 혀를 내밀고 있는 칼리 모습이 실제로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칼리는 여성 해방의 상징체로서의 이미지 등으로 그려진다. 어떤 그림에서 시바는 불멸의 절대자 모습으로 마치 죽은 모습으로 보이는 반면에 그 죽은 모습 위에 잠에서 막 깨어나듯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아름다운 절대자가 있는데 바로 칼리이다. 칼리 여신의 발과 접촉함으로써 공(空)의 상징으로 여기는 시바는 활력을 얻는다. 그리고 머리와 왼팔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치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칼리는 파괴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다.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생산하는 여성성과 끊임없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파괴 말이다. 또한 칼리는 시바의 아내며 어머니로서 역할을 담당한다. 어렵고 두려울 때 악을 응징해 주기하고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이다. 즉 세계를 창조하고 파괴하면서 물고 물리는 관계 말이다. 마치 사나우면서 아름답고, 사랑하면서 살인하는 이중성이 같은 역설이 존재한다. 이것 또한 인도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칼리 모습은 이렇다. 일반적으로 칼리 상은 검은 피부에 벌거벗은 채 긴 머리를 내려뜨린 모습이다. 한 손에는 잘라낸 악마의 머리를 들고 서 있고 다른 손으로는 잘린 머리에서 떨어지는 피를 받고 있다. 또 두개골로 만든 머리와 목에는 해골로 만든 목걸이가 걸려있고 허리에는 잘린 손으로 만든 치마를 두르고 있다. 어떤 그림에는 아이들의 시체로 만든 귀고리를 하는 예도 있다. 필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다. 그녀의 얼굴은 항상 피를 갈구하는 검붉은 혀로 상징될 정도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시바를 밟고 있고 그 주위에는 까마귀들이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상황에서 칼리는 발밑의 시바와 성교를 나누는 모습도 있다. 기괴한 모습이다. 칼리는 음료수 대신 피를 마시는 듯하다. 이해하기 힘든 말이지만 그녀에게 파괴는 곧 생산이다. 즉, 모든 파괴 행위가 생산을 위해서라는 논리이다. 마치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과 약간 결이 다르지만 엇비슷하다. 그리고 중세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버리고 취하기의 궁극적 신을 버리고 신을 취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필자 앞에 성큼 다가온다. 또 칼리가 나오는 그림 중 재미있는 것은 가장 아래에 있는 시바가 죽은 듯 잠자는 턱수염이 달린 마치 나체의 금욕주의자 모습과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생명을 빼앗아가는 샥티 에너지와 접해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힌두교 종파 중의 하나인 샥티파 힌두교에서는 샥티를 최고 존재(Supreme Being)로 숭배한다. 반면에 시바파와 비슈누파 같은 다른 힌두교 종파에서는 샥티를 푸루샤(Purusha)의 활성화된 여성 에너지인 프라크리티(Prakriti)라고 본다. 기독교로 말하면 삼위일체 중 하나인 성령(Holy Spirit) 정도로 보면 된다. 아무튼 힌두교에도 다양한 종파가 존재함을 필자는 새삼 알게 됐다.

인도 신화를 읽다 보면 신들이 인간의 힘, 곧 제사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종종 묘사된다. 인도 신화의 신은 유일한 절대자가 아니다. 브라만 시대를 보면 신들은 인간의 제사 빈도에 따라서 운명이 결정된다. 신들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예도 있고 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때도 있다. 포에르 바흐 말에 따르면 신이란 인간이 생각하는 좋은 것들의 총체로서 존재라고 했다. 그렇다. 인간은 죽음이라고 하는 유한성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신은 죽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하지만 인도의 신은 죽을 수 있는 존재이다. 더구나 불완전하고 유한성을 지닌 인간의 힘이 있어야 하는 신마저 유한성을 지닌 존재로 묘사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또한,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신은 자신이 정한 규칙을 따라야 한다. 만일 그 규칙을 어기면 정한 규칙에 따라 처벌받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들의 세상처럼 말이다. 신들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더 톄레사의 집을 찾아가 보자.

 

마더 테레사의 집(Mother Teresa): 죽음을 기다리는 집

타고르 못지않게 인도의 위대한 정신적 스승은 마더 테레사이다. “나를 위로해줄 한 사람은 찾았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기에 내가 그 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마더 테레사의 말이다. 감동적인 말이다. 마더 테레사다운 말이다. 이처럼 ‘마더 테레사의 집’은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집으로 알려졌다. 1910년 알바니아에서 태어난 마더 테레사는 18세에 콜카타로 왔다.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그녀의 삶은 마침내 인도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녀는 전통의상인 사리 3벌과 5루피를 가지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1979년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그녀는 낙태 주의자들을 ‘살인자’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 공격 때문에 페미니스트들로부터는 ‘종교적 제국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녀에 대한 특별한 것은 없다. 그녀는 단순한 수녀일 뿐이다. 그녀는 매우 친절하고 풍부한 유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특별한 여성이었다. 가난한 사람의 어머니로 콜카타에서 일생을 보낸 것이다. 콜카타는 도시 인구의 80%가 칼리를 숭상하는 힌두교이다.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 자이나교도와 불교도, 시크교도 있지만 아주 소수이다. 마더 테레사는 인도에서 소수 종파인 기독교에 속한다. 아무튼, 죽음을 기다리는 집 마더 테레사 집으로 가보자. 이 집은 돌봄 사람이 없어 병들고 버려진 사람들을 편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다. 칼리 사원에서 ‘마더 테레사의 집’에 도보로 갈 수 있다. 가다 보면 길목에는 거리에 누워있는 사람들과 돌아다니는 개들의 행렬이 한 데 뒤엉켜 있어서 어수선하다. 이 광경을 본 필자의 마음은 착잡해진다. 과연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동등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필자의 눈앞에 펼쳐진다. 마더 테레사가 살았던 당시에도 그랬을 것이다. 지금 역시도 그렇다. 그렇다면 마더 테레사가 왜 이런 일을 시작했는지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마더 테레사는 슬럼가에서 교육과 의료 활동을 해온 2년쯤 신도 12명과 함께 수도회를 ‘신의 사랑 선교자들’을 창설한다. 그리고 2년 뒤 어느 날 슬럼가에서 마더 테레사는 쓰러져 있는 노파를 발견했다. 거리에서 짐승들에게 비참하게 뜯겨 죽은 줄만 알았던 한 여인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충격받았다고 한다.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떠나려고 할 때 노파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보게 된다. 쥐에게 뜯기면서도 생명이 남아 있었다. 노파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처음엔 진료를 거부당했다. 그녀는 원장을 설득해 간신히 노파를 입원시킬 수 있었다. 길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게 된 그녀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길가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적어도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해줄 시설이 필요했다. 칼리 사원 인근에 빈집을 무료로 임대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집’이 문을 열게 된다. 마더 테레사는 가난한 삶들이 누구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고독 속에 살다 누구 하나 슬퍼하는 이 없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슬럼가의 최대의 문제라고 여겼다. 그 뒤 고아들을 위한 시설 ‘칠드런 바완’ 만들어 병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았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서도 헌신하였다. 마더 테레사는 헌신이 무엇인지를 많은 사람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녀는 노벨평화상 수상 소감에서 상을 받는 건 자신이 돌봐온 가난하고도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면서 자신의 주어진 사명을 다했다고 말한다.

우리의 작은 행동이 얼마나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테레사 수녀가 죽은 이후 지금 역시도 세계 각국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와 테레사 수녀의 뜻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지속하고 있다. 마더 테레사의 운영은 수녀들이 맡고 자원봉사들은 빨래 등 청소, 그리고 환자 간호 등의 허드렛일을 한다. 중환자들도 쾌 있고 하루에도 2명에서 10명 정도 행려병자들이 들어 나간단다. 운영하는 데도 정부 지원은 받지 않고 전액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자신에게 이익이 돼야 움직이는 대부분 현대인보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이러한 행위야말로 종교에서 말하는 자비나 위대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테레사의 집이 콜카타에만 7~8곳이 있단다. 그렇다. 마더 테레사가 홀로 뿌린 고귀한 씨앗은 여전히 현재도 자라서 열매를 맺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 콜카타의 아름다운 헌신 모습을 뒤로하고 타고르 정신적 고향 산티니케탄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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