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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6 – 보드가야(부다가야)(Buddha Gaya): 힌두교에 흡수된 불교 성지 - 보리수나무, 마하보디사원 단지, 각국 사찰. * 별첨: 인도 인문학 여행 탐구 7: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

by 뜨르 K 2021.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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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6 – 보드가야(부다가야)(Buddha Gaya): 힌두교에 흡수된 불교 성지 - 보리수나무, 마하보디사원 단지, 각국 사찰. * 별첨: 인도 인문학 여행 탐구 7: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

부처의 승리는 패배한 적이 없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분의 승리에는 미칠 수가 없다. 부처의 경지는 너무 높아 끝이 없다. 발자취가 오래지 않은 그분을 어떤 방법으로 불러낼 수 있을까? - Dhammapada, <진리의 말씀>에서

 

깨달음의 땅: 보드가야(Bodh Gaya) / (부다가야)

이번 여행은 깨달음의 땅 보드가야(부다가야)이다. 보드가야(부다가야)는 인구 3만의 조용한 영적인 마을이다.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인 비하르주에 속해 있다. 대부분 여행자가 적응하기 힘든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가야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네란자라 강가로 가면 보드가야(부다가야)에 이른다. 이곳은 보리수 아래에서 수행하던 석가가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불교도에게 최고의 성지이다. 부다가야라는 지명은 현지에서는 보드가야 Bodh Gaya라고 부른다. 보드가야는 아직도 시골 풍경이 남아 있어 석가가 살던 시대를 짐작할 수 있다. 약 2500년 전 사카족의 왕자로 살았던 싯다르타는 생의 고뇌가 무엇인가에 물음을 던진다. 해답을 찾기 위해 해탈의 도를 찾아 세속의 삶을 버리고 고행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답을 얻지 못하고 우르베라 마을(현재의 보드가야(부다가야))의 커다란 보리수 아래에서 깊은 명상에 잠기게 된다. 명상은 길었다. 드디어 어둠이 걷히고 새로운 광명이 찾아왔다. 이것이 부처의 깨달음이다. ‘인간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이라는 의혹은 깨달음으로 투명해지고 고행의 확실함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부처가 된다. 그게 바로 필자가 지금 보고 있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일어난 일이다. 후에 부처의 깨달음의 내용은 사성제(四星制)와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으로 널리 전파된다. 이 깨달음은 불교도의 마음에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보드가야를 찾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어디를 찾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이다. 필자가 방문한 날도 그랬다. 마치 개미 떼의 대이동처럼 말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인도는 대다수가 힌두교다. 그런데도 보드가야(부다가야)는 석가가 수행한 보리수나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리수나무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나무는 크지 않았다. 현재 필자 앞에 서 있는 나무는 사실 2600년 전의 그 나무는 아니다. 그 이유 부처가 수행한 원래 보리수나무는 죽고 옆에 있는 품종이 같은 보리수나무를 옮겨 심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보리수는 사실 피팔(pipal)이라고 불리는 나무라고 한다. 현재 보리수 나무 높이는 25m높이 정도이다. 그리고 대보리수라고 불린다. 현재 보고있는 보리수는 원래 보리수의 손자 격으로 BC 3세기 경 아쇼카왕의 딸이었던 상가미타가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에 묘목을 옮겨 심었다. 그리고 다시 보드가야(부다가야)의 보리수가 베어진 후 아누라다푸라에서 묘목을 옮겨와 심은 것이 현재의 보리수나무라는 것이다. 약간 아리송한 이야기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대를 이어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종교 언어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보리수나무는 그늘이 있어 많은 순례객이 잠시 쉼을 얻는 장소이기도 하다. 나무 아래에는 수많은 촛불이 타오르고 있고 나뭇가지에는 여러 헝겊이 매달려있다. 마치 우리나라 토지와 마을을 수호하는 신을 모시는 서낭당처럼 말이다. 여기에 사람들은 자기의 소망을 흰 천에 적어 나무에 매달아 액땜한다.

과연 그들은 어디서 오는 사람일까? 필자는 궁금했다. 대부분은 동남아시아의 불교들이다. 특히 티베트인들이 눈에 띈다. 붉은색 승복을 보리수나무 밑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듯하다. 그들은 불교에 심취하려고 고향을 떠나 아예 타향살이하면서 말이다. 대단한 불심이다. 어떤 분은 하루에 3천 배 혹은 1만 배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손에는 가죽장갑을 끼고 가슴에는 가죽 치마를 입었다. 또한, 1보 일 배를 하는 수행자도 있다. 각국의 언어로 염불을 하고 경전을 외우고 참배하는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다. 경행대를 따라 걸으면 수행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그리고 보리수 아래 연인들의 다정한 모습, 아무 생각 없는 듯 서 있는 사람, 기념 촬영하는 모습, 경건한 모습으로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러면 잠시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는 과정을 잠시 더듬어 보자.

2천 600년여 년 전 히말라야 산기슭에 있는 룸비니 동산에서 카필라 왕국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탄생했다. 참고로 싯다르타라는 의미는 ‘목적을 성취하는 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붓다에 대해 예언한 사람이 있다. 카필라 왕국의 제사장이자 슈도다나 대왕(싯다르타의 아버지)의 스승인 아시타 선인이다. 그는 속세에서 벗어나 히말라야의 깊은 골짜기에서 수행자의 삶을 살고 있다. 아시타 선인이 예언하기를 “속세에 살면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장차 출가하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것”이라는 말한다.

“왕자님은 세속에 계시면 전륜성왕이 되어 온 천하를 다스릴 것이며 세속을 떠나면 최상의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실 것이니 반드시 중생을 연민하여 바른 법과 바른 진리로 많은 사람을 고통에서 구제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이미 수명이 다하여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 아시타 선인-

싯다르타의 아버지 슈도다나 왕은 아들의 출가를 두려워해서 계절마다 궁을 옮겨가면서 아들을 키웠다고 한다. 싯다르타는 열여섯 나이에 결혼하고 아들을 얻는다. 그리고 왕의 면모를 갖추지만, 어느 날 성 밖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걸인을 목격하고 생로병사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그 뒤 그는 오랜 고뇌 끝에 스물아홉 살에 성을 떠나 수행 길에 오른다. 여기서 싯다르타는 운명의 방향을 바꾸게 된다. 싯다르타가 출가했던 당시도 출가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았다. 무려 2만 명에 달하는 고행자와 구도자들이 주위의 숲과 산에서 수행을 했다고 한다. 붓다도 2만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당시 인도인들은 이 숲을 ‘고행림(苦行林)’으로 불렀다고 한다. 싯다르타도 출가 직후에는 다섯 명의 도반과 함께 수행했다. 한때는 하루에 쌀 한 톨과 콩 한 톨만 먹었다고 한다. 경전에는 ‘뱃가죽을 만지면 등뼈가 만져졌고, 등뼈를 만지면 뱃가죽이 만져졌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붓다는 그렇게 고행의 극한까지 갔다. 그렇다. 하루에 쌀 한 알 콩 한 개를 먹고 연명하면서 6년을 고행했다. 붓다의 수행법은 에고를 억누르는 수행법이었다. 하지만 에고는 끝없이 다시 깨어나곤 했다고 한다. 고행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풀뿌리를 뽑지 못할 채 말이다. 결국, 깨달음 얻은 데는 실패하고 고행을 접게 된다. 그 후 비쩍 마른 몸으로 강에 몸을 씻고 붓다는 차분히 지난날을 되돌아봤다. 그리고 어린시절 열대과일 나무 일종인 잠부나무(Jambu 산스크리스트) 밑에서 우주의 운행을 바라보며 법열에 젖어 명상에 잠겼던 때를 떠올렸다. 붓다는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리라의 현(絃)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리라는 하프의 일종이다. 기운을 얻은 붓다는 너무 마음을 억눌렀던 현을 조율했다고 한다. 그리고 새로운 방법으로 수행할 곳을 찾게 된다.

“여래께서 수행하시며 6년 동안 깨달음을 구하셨지만, 정각을 달성하지 못하자 그 뒤로 고행을 버리고 우유 죽을 받아서 마셨다. 그러고 나서 동북쪽으로부터 올라가서 이전 정각산을 두루 살펴보니 고요하고 그윽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정각을 깨달아 얻을 자리를 찾기 위해 동북쪽 언덕으로부터 산을 올라 정상에 이르자 대지가 진동하고 산도 기울고 흔들렸다. 산신이 놀라고 당황하여 구도자에게 고하였다. ‘이 산은 정각을 이룰 만한 복 있는 땅이 아니다. 만일 이곳에 머물면서 금강정(金剛定)에 든다면 땅이 진동하고 함몰하며 산도 기울어지고 말 것이다.’ 구도자가 서남쪽으로 내려가 산 중턱의 낭떠러지에서 바위를 등지고 깊은 계곡을 바라보니 거대한 석실이 있었다. 구도자가 이곳에 머물면서 가부좌하니 땅이 다시 진동하고 산이 기울어졌다. 이때 정거천(淨居天)이 공중에서 소리 높여 말하였다. ‘이곳은 여래께서 정각을 이루실 곳이 못 됩니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14∼15리를 가면 고행 처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삡팔라(Pipphala)나무가 있는데, 그 아래에 금강좌(金剛座)가 있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정각을 이루셨다. 부디 그곳으로 나아가소서.’ 보살이 막 일어나려 하자 석실에 있던 용이 말하였다. ‘이 방은 청정하고 훌륭해서 성인의 경지를 깨달아 얻을만하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이곳을 버리지 말아주소서.’ 구도자는 이미 그곳이 정각을 얻을 곳이 아님을 알았으나 용의 마음을 헤아려 그림자를 남겨두고 떠나갔다.”

현장 스님에 따르면 전 정각산은 부처가 새로운 장소인 보드가야를 가기 전 거쳐 간 곳이다. 아무튼, 싯다르타는 고행으로 혼미해진 상태에서 한 여인의 우유죽을 얻어 마시고 기력을 회복한 한 뒤 도반들을 떠나 수행하기 위해 필자가 서 있는 바로 이곳 보드가야(부다가야)에 있는 보리수 아래로 갔다. 그전에 함께 수행하던 도반 다섯 남자 승려는 우유죽을 먹는 싯다르타 모습을 보고 싯다르타가 타락하였다고 말하면서 녹야원으로 길을 떠나 버렸다. 수행과 좌절 그리고 절망을 얼마나 되풀이했던가? 하지만 그는 6년 동안의 고행 끝에 결국 깨달음을 얻는다. 바로 ‘중도(中道)’의 깨달음이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드디어 부처가 된다. 부처의 자격으로 세속으로 돌아와 먼 처음 한 일이 함께 수행했던 다섯 도반을 찾는 일이었다.

다섯 수행자는 부처가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때 도반이었던 싯다르타를 안 만나기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그들도 모르는 사이 다가오는 사람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맞이했는데 바로 싯다르타였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보는 즉시 명령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제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니 고타마라 부르지 말고 여래(如來)라는 호칭을 사용하라” 참고로 고타마는 인도의 크샤트리야 계급에 속하는 여러 성(姓) 가운데 하나인 석가모니의 성(姓)을 일컫는 말이고 여래(如來)는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이제 사제 간이 되는 순간이었다. 도반들이 부처의 첫 제자들이 된 것이다.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었고 붓다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처라는 말은 깨닫는다는 뜻이다. 부처가 된 이후 그와 연관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가 앉아 수행하던 <필바라>는 <보리수>가 되고 그가 거주하던 마을 이름이 <가야>는 <붓다 가야>로 고행하면서 앉았던 자리는 <고행림>은 <전정각산>이 되었다. 그가 앉아 도를 이룬 자리는 금강보좌라 불렸다.

탐욕이 영원히 다하고
성냄이 영원히 다하고
어리석음이 영원히 다하여
일체의 모든 번뇌가 소멸해 버린 경계
이것을 열반이라 한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 도반과 처음으로 재회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탑이 차우간디 스투파이다. 그리고 35세에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로 설법한 장소로 사르나트의 사슴 동산인 녹야원(鹿野園)이 있다. 깨달음의 성도(成道)의 보드가야(부다가야)와 더불어 입멸(入滅)의 땅 쿠시나가라를 불교의 4대 성지라고 말한다. 위의 불교 성지는 불교도들에게는 선망의 장소이다. 당시 당나라 승려 중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인 현장(玄奘)처럼 인도를 다녀와 고승의 반열에 오른 이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왜 낯설고 먼 인도 여행을 굳이 가려고 하였는가? 필자는 그 해답을 종교적인 이유에 있다고 본다. 혜초는 723년 바닷길을 통해 동천축국에 도착한 후 붓다가 태어난 가비야라국(룸비니 동산)이 있는 중천축국을 거쳐 남천축국, 서천축국, 북천축국을 두루 여행하였다. 천축국은 중국인들이 인도를 부를 때 쓰는 옛 명칭이다. 당시 천축국을 동쪽, 서쪽, 남쪽, 북쪽, 중앙의 5개 지역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각 지역에는 여러 부족 국가들이 있었다. 신라 스님 혜초(慧超, 惠超)가 집필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도 다섯 개 천축국 여행기이다. 여행기의 앞부분과 뒷부분은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바닷길로 동천축에 도착한 뒤 불교 성지를 참배하고 중천축과 남천축, 북천축 여러 곳을 돌아본 후 서쪽으로 대식국(大寔國, 아랍)의 페르시아까지 가서 다시 중앙아시아 호국(胡國:오랑케)을 지나 파미르고원을 거쳐 중국에 들어오는 여행이었다. 여행은 서기 723~727년까지 4년이 걸렸다. 혜초의 말을 들어보자.

“한 달 걸려 쿠시나가라(Kushinagar)에 당도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성은 이미 황폐해져서 사람 사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자리에 탑을 세워 두었는데, 스님 한 분이 그곳을 청소하면서 물을 뿌리고 있다. 해마다 팔월 초파일이 되면 비구와 비구니, 그리고 도를 닦는 사람들과 속세의 사람들이 탑 있는 곳에 모여 크게 공양을 베푸는 행사를 치른다.”

 

 

붓다의 열반 성지 쿠시나가라를 거쳐서 마침내 도를 이룬 보드가야의 마하보리사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 벅찬 감격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하지 않는데
어찌 녹야원(鹿野園)이 멀다 하리오.
다만 멀고 험한 길 근심될 뿐
업보(業報)의 바람 휘몰아침도 두렵지 않네.
팔탑(八塔)은 참으로 보기 어려우니
어지러이 오랜 세월에 다 사라져 버렸네.
어찌하면 한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질까?
오늘 아침 두 눈으로 똑똑이 보누나.

그 후 그는 천축국뿐만 아니라 서역 대식국(大食國)의 페르시아를 거쳐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둘러 본 후, '세계의 지붕' 으로 일컫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다시 당나라로 돌아왔다. 결국, 4년 동안 지구의 약 3분의 1을 돌아본 것이다. 오늘날 기준으로 약 40여 개 나라이다. 필자는 아마 멋진(?) 세계여행이었을 것으로 상상해 본다. 물론 수없는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이룬 인간승리의 결과이지만 말이다. 이제 보드가야의 중심 마하보디 사원으로 옮겨 보자.

보드가야의 중심: 마하보디 사원

마하보디 사원이 눈앞에 보인다. 사원이 너무 높아 고개를 들어야 전체를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높이가 무려 55m 정도로 금광 보좌를 모신 곳이기도 하다.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에 의하여 처음으로 세워졌다. 이 탑은 방추형의 9층 탑으로 3km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웅대한 탑이다. 그 후 이슬람의 침략을 대비하여 위해 흙으로 덮어 놓았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필자 눈앞에 보이는 현재의 탑은 아쇼카왕 때 세워진 것이 아니다. 중국의 법현과 현장의 기록에 따르면 후기 굽타 왕조 시대에 409년과 637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인도에서 현재 존재하는 초기 건축물로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이유는 건축학적으로 당대의 뛰어난 건축 기법으로 세운 벽돌 사원이기 때문이다. 사원은 전체가 벽돌로 되어있다. 이처럼 인도의 마하보디 사원과 같은 초기 벽돌 건축물은 몇 세기 동안 인도 건축술 발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특히 석재 조각 난간은 초기 건축양식의 특징으로 돌 위의 돋을새김, 즉 부조(浮彫)는 세간의 평에 의하면 눈에 띌 정도로 훌륭한 걸작이다. 이것은 불교를 무척 사랑한 아쇼카 왕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인도의 자랑 아소카 대왕의 흔적은 인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다멕 스투파, 산치 스투파와 같은 불교 건축물이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아쇼카대왕은 무굴제국의 악바르 대재와 함께 인도인에서 쌍벽을 이룰 정도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아쇼카호텔, 아쇼카극장, 아쇼카레스토랑, 아소카 쇼핑센터 등의 이름을 붙은 명칭을 보면 알 수 있다. “거석의 궁전의 사라지고 흔적도 없다. 그러나 아쇼카의 기억은 대륙 전체에 살아 있다. 그의 조칙은 우리가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말로, 아직도 우리를 향해 말을 걸어오고 있다.” 이 말은 인도 최초의 수상이며 독립운동하다가 아홉 번 감옥에 갇힌 네루의 <옥중편지>에서 나온 말이다. 이만큼 아쇼카 대왕이라는 이름은 인도인에게 강력한 표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는 증거이다.

 

또한, 마하보디 사원에는 붓다의 생애의 다양한 기록과 사후에 이루어진 예불 의식 등이 보관되어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기원전 531년에 부처는 보리수나무 밑에서 35세에 나이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쇼카 왕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기원전 260년경에 붓다가 명상했던 이곳을 성지순례(聖地巡禮)의 장소로 지정하고 최초의 불교 사원을 건축했다. 이 성지(聖地)는 보리수 주위로 설치된 난간들과 근처에 지어진 작은 사원을 포함한다. 게다가 1863년〜1881년에 발굴 작업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붓다의 참선 자리로 추측되는 금강좌도 만들었다. 이 금강좌는 현재 많은 불교도에 사랑받는 장소이기도 하다.

 

마하보디 사원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중국 동진의 승려 법현(法顯, 337~422)이 남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여행기록『불국기(佛國記)』이다. 약 404년〜405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는 사원의 본당과 보리수에 대해 대략 언급되어있다. 붓다의 삶과 관련된 중요한 네 군데(도시)에 대탑(大塔)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 한 사람은 당나라 고승 현장(玄奘, 602~664)이다. 그는 637년에 보드가야(부다가야)를 찾았다. 그는 견고하게 둘러싸인 담 안에 있는 보리수를 보았고 55m 높이로 솟아 있는 마하보디 사원과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소도 있다는 사실과 푸른 빛이 도는 벽돌, 석회, 금동 불상이 놓인 벽감 등 세세한 사항까지『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기록하고 있다. 그가 여행한 이 시기에 사원에는 웅장한 주랑 현관(porche), 각이 진 탑, 높은 토대 등이 본당 건물에 추가되었다고 한다. 그 뒤 7~9세기, 12세기, 19세기 등 여러 차례 복원 작업이 있었다.

 

마하보디 사원단지는 기원전 260년 즈음에 아쇼카 왕이 보리수 아래에 처음으로 사원을 건축하여 성지로 조성한 곳으로 붓다의 생애(기원전 566~486)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 기원전 531년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 앉아 깨달음, 즉 정각(正覺)을 이룬 곳이기도 하다. 붓다의 생애와 관련된 기록과 이후의 예불 의식 등이 잘 보관되어 있고 보드가야의 중심부에 있다. 사원은 6개의 불교 성지로 둘러싸여 있다. 단지의 핵심은 단연 보리수나무이다. 나무는 사원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첫 한 주일 동안 앉아 있었던 원래의 보리수에서 파생된 나무로 추정한다. 둘째 주에 보낸 곳은 탑원(塔院, Animeshlochan Chaitya)이다. 탑원(塔院, Animeshlochan Chaitya)은 언덕으로 기도하는 곳으로 추정된다. 셋째 주는 라트나차크라마(Ratnachakrama, 보석 장식 회랑)이다. 붓다는 여기서 앞뒤로 18보를 걸으며 보냈다고 한다. 북쪽 성벽 근처에 있다. 넷째 주를 보낸 곳은 라트나가 차이티아(Ratnaghar Chaitya)이다. 복합단지의 울타리 북동쪽에 위치에 있다. 다섯째 주를 보낸 곳은 아자팔라 니그로드(Ajapala Nigrodh) 나무가 있었던 장소이다. 붓다는 바로 이곳에서 바라문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고요히 명상했다고 한다. 붓다는 복합단지 울타리의 남쪽에 있는 연못가에 앉아 여섯째 주를 보냈고, 현재 나무로 표시된 라지아타나(Rajyatana) 나무 아래에서 일곱째 주를 보냈다.

 

또한, 마하보디사원은 인도 전통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인동덩굴나무와 거위 모양의 기둥 모서리나 문살의 표면을 모를 접어 두 골이 나게 하는 쇠시리 장식 기단이 그 특징이다. 기단 위에는 틈새마다 붓다의 형상을 장식하였다. 그 위에 쇠시리와 차이티아 벽감(壁龕), 곡선 처리된 꼭대기(shikara)가 있다. 이 위에는 인도 전통 불교 사원의 특징인 연꽃 모양의 아말라카(amalaka), 칼라샤(kalasha)를 얹었다. 난간 내 모퉁이마다 불상 4좌를 모신 작은 불당이 있다. 이 불당 위에는 작은 탑이 있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원의 동쪽으로는 작은 앞뜰이 있고 뜰 양쪽으로 불상이 있는 벽감이 있다. 보리수 옆에는 사암으로 만든 금강좌(Vajrasana)가 있고 그 위에는 불상이 단아하게 놓여 있다. 이는 아쇼카 왕이 붓다가 앉아서 명상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기원전 5, 6세기에 이곳을 확장하면서 화강암 석주를 세웠다고 한다. 사원을 향해서 남쪽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뒤에 붓다 입상이 있고 검은 돌에 붓다의 발자국(Padas)을 새긴 작은 불당이 나타난다. 이것은 기원전 3세기, 아쇼카 왕이 불교를 국교로 선포할 당시에 만든 것이다. 사원 방향으로 길을 따라 더 오르면 붓다 상을 비롯한 여러 보살을 모신 불당이 나온다.

보드가야(부다가야) 각 나라의 사찰

마하보디 사원을 중심으로 각국의 사찰이 세워져 있다. 각 나라의 건축양식으로 설계된 중국, 대만, 일본, 태국, 몽골, 티베트, 부탄 사찰 등이 눈에 띈다. 필자가 여행할 당시에는 한국 사찰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필자가 알기로는 최근에 한국 사찰 건축 중이다. 사찰 이름이 분황사이다. 인터뷰기사를 보니 설계자는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살리면서 순례객 참배와 숙박 등의 목적에 충실히 하고자 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분황사는 보드가야(부다가야) 기후와 부지, 주변시설 등을 고려해 대웅전과 숙소, 보건소를 갖춘 다목적 한국식 사찰로 설계되어 전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보드가야(부다가야)(Buddha Gaya)의 보리수나무를 중심으로 마하보디사원 단지, 각국 사찰 등을 둘러보았다. 보드가야는 붓다의 깨달음의 장소인 보리수나무, 그것을 기념하는 마하보디사원 단지 등 불교의 최대 성지이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인도인이 아닌 티베트를 비롯한 타국인들이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아 씁쓸한 맛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필자 역시 힌두교에 흡수된 불교의 성지라는 이미지를 떨굴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래도 보드가야는 불교 최대 성지는 맞다. 여전히 여러 나라에서 불교도들이 성지를 찾는 순례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졌는지를 탐구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2021/12/29 뜨르 / 혜윰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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