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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4 – 자이푸르(Jaipur): 라자스탄 사막의 슬픈 피리 소리- 자이푸르 암베르성(Amber Fort) , 푸슈카르(Pushkar), 하와 마할(Hawa Mahal)

by 뜨르 K 2021.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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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4 – 자이푸르(Jaipur): 라자스탄 사막의 피리 소리- 자이푸르 암베르성(Amber Fort) , 푸슈카르(Pushkar), 하와 마할(Hawa Mahal)

 

나라 전체에 종교적 활력이 넘치는 곳이 바로 인도이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종교로 색칠해져 있다. 그래서인지 여행자들이 꼭 가고 싶은 꿈의 목적지 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인도는 다양한 색채가 여행객들의 구미를 당기게 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하늘 아래 함께 공존하고 종교와 삶이 구분되지 않는다. 여행하다 보면 이 지구상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여행은 우리에게 많은 배움을 제공한다. 아마도 배움이 없이 그냥 의미 없게 맨송맨송 다니기만 한다면 여행의 재미는 반감될 것이다. 이처럼 여행은 낯선 세계를 배우는 공간이면서 타자의 존재를 통해 인식 차이를 발견하고 무너뜨리기 위해 성찰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필자는 인도 곳곳을 탐방하면서 이런 사실을 오감으로 느꼈다. 이제 또 다른 색감이 풍기는 인도 북부 지역으로 인문학 여행을 떠나 보자. 타르 사막이 있는 라자스탄 자이푸르 말이다.

델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266㎞ 떨어진 자이푸르는 광대한 타르 사막을 끼고 있는 라자스탄주의 주도이다. 사막이 있음에도 인구 밀도는 세계적으로 높은 우리나라의 반이나 될 정도이다. 지금의 라자스탄주 명칭도 타르 사막의 여러 유목민 집단과 힌두 부족들을 합친 군인 집단 씨족 공동체 라지푸트에서 기원했다. 라자스탄 명칭 자체는 왕들의 땅이라는 뜻으로 “왕자들”에서 유래되었다. 부족들이 많아서인듯하다. 또한, 라자스탄은 이민족들의 침략이 잦아서 그런지 군인들의 체력을 위해 힌두교도 상층 카스트들도 육식을 허용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여행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그래서 여행은 역사와 여행자가 합작하는 공사 현장 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역사의 현장을 보면서 역사의 사유를 우리의 사유로 전환하여 또 하나의 사유를 만들기 때문이다. 즉 재해석하고 재조립하는 것이다.

라자스탄의 주도인 자이푸르(Jaipur)는 무굴제국의 쇠퇴기인 1727년 이 지방에서 세력을 떨친 왕으로 무사이자 천문학이었던 마하라자 자이싱 2세(1699∼1744)는 고대 힌두교 건축 서적인 <실파 사스트라 shilpa shastra>에 참고로 우주의 행성을 의미하는 9개의 직사각형 블록으로 구획한 계획도시로 건설했다. 자이싱 2세가 왕 자신의 이름을 본떠 자이푸르(‘승리의 도시’라는 뜻)로 명명됐다. 자이푸르의 구시가지는 7개의 문을 가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안에 도시계획을 토대로 도로가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다. 현재도 옛날 모습으로 그대로의 궁전과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자이푸르는 델리와 아그라와 함께 골든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인도 여행의 주요 코스이다. 자이푸르는 도시 건물 전체가 아름다운 핑크빛으로 채색되어 있어 핑크 시티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곳은 라자스탄만의 색다른 분위기의 독특한 인도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사막문화가 주는 강렬한 색채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사막이 주는 쓸쓸한 음악 소리가 여행자에게 낭만을 더해 준다. 자이푸르에서 가볼 만한 것으로 꼽으라면 하와 마할, 잔 타르만 타르, 암베르성, 시티팰리스 등이 있다. 먼저 방문할 장소는 암베르 성이다.

 

 

라지푸트의 자존심: 암베르 성(Amber Fort)

 

암베르 성은 무굴제국 시대 만싱이 세운 성으로 1692년부터 지어졌다. 그의 뒤를 이은 자이 싱에 의해 오늘날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규모로 변모했다. 자이푸르 구시가지의 중심에 자리 잡은 시티 팰리스와 고풍스러운 중앙박물관, 오래된 천문대인 잔타르 만타르 등도 볼 만하다. 구시가지에 늘어선 집들이 모두 핑크빛이다. 핑크빛 일지라도 엷거나 밝은 색은 아니다. 붉은빛이 도는 흙색이다. 이 색이 파란 하늘과 대비되어 더욱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도시 전체가 핑크빛으로 물들게 된 이유는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이던 1876년, 마하라자 람 싱(Ram Singh)이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인 웨일스의 왕자(훗날 에드워드 7세)가 방문했을 당시 환대하기 위해 시내 모든 건물을 분홍색으로 칠해 도시 전체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속 사정은 이렇다. 당시 영국의 압력을 받은 자이푸르의 마하라자는 환경미화를 이유로 부랴부랴 도시 전체를 핑크색으로 칠했다. 자이푸르의 원주민인 라지푸트족이 핑크색을 환대와 관련된 색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착안한 선택이었다. 피지배자인 인도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역에 동원됐지만 이후 ‘핑크 시티’는 관광도시 자이푸르를 일컫는 대명사처럼 돼 버렸다. 이후 여전히 그 색을 유지하고 있으며 지금도 건물에 다른 색을 칠하지 못하도록 금지돼 있다. 그래서 여전히 핑크시티 Pink City라고 부른지도 모른다. 구시가지 북쪽에 있는 언덕에 올라가면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도시 전체가 화려하다.

자아푸르 시의 북쪽에 자리 잡은 암베르 성은 인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이다. 주변을 압도하듯 바위산 기슭 언덕 위에 세워진 ‘하늘의 성’이라는 뜻을 가진 거대한 성이다.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적 평면 형태의 정원들이 여러 곳에 놓여 있고 마오다(Maotha) 호수와 무굴 양식의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다. 암베르성 근처에는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던 만 호수(Man Sagar)에 떠 있는 물의 궁전 ‘잘 마할’이 있다. 호수의 중간에 자리 잡은 이 붉은 사암 궁전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석양의 황혼과 어울려진 궁전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모습이다. 물의 궁전(Water Palace)으로도 알려진 이곳은 18세기에 자이푸르의 통치자였던 사와이 프라탑 싱이 지었다. 이곳은 벽이 없는 정자 스타일로 지어져서 안쪽이 방이 없다고 한다. 아마 거주지는 아니고 왕족들이 사냥 파티를 즐기며 휴식을 취하던 장소로 보인다. 또한, 암베르성은 16세기에는 왕국(1037-1726년 카츠와하 왕조의 수도)이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약 1,000년 동안 라지푸트 들의 근거지이었다. 암베르성은 벽면에 그려진 다양한 문양 등이 독특하다. 라지푸트 건축물 중 최고이다. 암베르 성이 이러한 찬란한 전성기를 누렸던 것은 무굴제국과의 화친을 맺었기 때문이란다.

원래 라지푸트족은 5세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건너온 유목민이었다. 인도의 불의 정화의식을 거쳐 무사 계급, 즉 크사트리아로 탄생한다. 이처럼 그들이 크사트리아 계급의 후예인 것을 과시하여 왕권과 그 지배의 정당성을 꾀한 배경에는 이슬람 세력의 대결에서 힌두 문화의 주역이라는 입장을 선명하게 내세울 필요성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힌두족인 라지푸트 여러 왕조는 10세기 말부터 시작되는 이슬람의 침임으로 수 세기에 걸쳐 항쟁을 거듭했다. 12세기부터는 델리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교 들과 350년간의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16세기에 무굴제국이 들어서자 상황이 바뀌었다. 무굴제국의 시조는 바부르이지만 실질적 창시자는 악바르 대제이다. 악바르는 라지푸트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라지푸트와 혼인 정책으로 화친을 맺었다. 또한 그는 라자스탄의 강력한 힌두 세력 라지푸트 들을 제국의 군사 책임자로 기용했을 뿐 아니라 유능한 힌두 출신들을 고위직에 임명하기도 했다. 무굴제국과의 화친 정책에 따라 암베르 성의 라지푸트 왕은 자신의 여동생을 악바르 대제 왕비로 만들면서 무굴제국의 동반자가 되어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적과 동침을 한 것이다. 이후 라자스탄 일대에서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암베르성의 동쪽에 있는 ‘태양의 문(Suraj Pole)’은 왕이 출입하는 곳이고, 서쪽의 ‘달의 문(Chand Pole)’은 왕 외의 사람들이 사용했다. 암베르성의 주로 볼거리 중 단연 최고는 쉬시마할이다. 쉬지마할은 ‘거울 궁전’이라고도 불린다. 그 이유는 방 전체의 아름다운 조각들 사이로 작은 거울을 촘촘히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촛불 하나만으로도 온 방을 밝힐 수 있다. 성 안에는 왕의 접견실과 집무실, 그리고 왕의 침실과 후궁들의 방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고 2층에서 3층으로 그리고 정원에서 후궁으로 이어져 있다. 성 내부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면 아마 이 성은 자이푸르의 자존심으로 건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여기서는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알현 광장 Diwan Am이 있고 호화로운 내부와 훌륭한 기하학적인 거울 조각이 장식된 승리의 문 Jai Mandri 벽면을 감상할 수 있다. 이슬람 문화 영향을 받은 라자스탄 특유의 형식으로 보인다. 정면을 끼고 반대쪽 환희의 문 수크 니와즈 Sukh Niwas은 실내나 방으로 물이 들어오도록 설계되어 있어 더위를 식히는 역할을 했다. 환기 시설과 차양 시설 역시 잘 갖추어져 그들의 편리한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다. 승리의 문 옥상에서 보이는 연못 한가운데는 기하학 모양의 정원이 있다. 마하라자(군주, 대왕)는 자주 저녁에 만찬을 하면서 정원을 감상하면서 즐겼다고 한다.

 

 

암베르 성은 멀리서 바라다보면 황량해 보이지만 산등성이에 올라갈수록 그 형체가 드러나면서 멋진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성의 벽과 기둥은 하나하나 조각하고 색을 칠해서 화려하게 장식했는데 보존 상태가 좋아 당시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암베르 성을 오를 때 코끼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필자도 15 Rs정도 지급하고 암베르성을 올라가면서 감상할 수 있었지만, 코끼리의 힘든 모습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여행은 비움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여행의 길목에서 비워내는 자리에 허위나 허풍을 채우지 않았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암베르성을 지나 10km를 더 달리면 도시 전체가 핑크빛으로 물든 풍경을 눈앞에서 만날 수 있다. 바로 인도와 파키스탄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라자스탄의 주도 자이푸르다. 자이푸르에는 분홍빛 색채를 띤 건물들이 즐비해 '핑크시티'로도 불린다. 시가지는 온통 붉은빛을 띤 분홍색 건물들이다. 그 옛날에는 ‘동양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1727년 무굴 세력과 타협해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던 자이싱 2세가 조상 때부터의 터전인 암베르 성에서 벗어나 인도 풍수의 원리로 바둑판 모양의 계획도시를 세운 것이 자이푸르의 발단이다. 이제 바람의 궁전으로 불리는 하와 마할 궁전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자.

바람의 궁전: 하와 마할(Hawa Mahal)

자이푸르 볼거리 중 가장 대표적으로 하와 마할을 꼽을 수 있다. 입장료는 1인당 5Rs 정도이다. 하와마할은 1799년 스와이 프라탑 싱(Sawai Pratap Singh)이 건축하고 라찬드 우스타(Lachand Usta)가 설계를 맡았다. 여전히 성은 견고했으면 성채는 산맥을 이루어 자이푸르를 감싸고 있다. 중심가를 내려다보는 5층짜리 건물은 정교한 벌집 모양의 분홍색 사암 창문 등 라지푸트족의 놀라운 예술적 수완을 보여준다. 라자스탄만의 독특한 궁궐 문화도 맛볼 수 있다. 또한,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고 바람이 잘 통하는 격자형 창문이 벌집처럼 많아 ‘바람의 궁전’이라고 불린다. 필자의 느낌도 궁전을 오르면서 바람의 궁전답게 시원한 바람과 바람의 냄새도 나는 듯했다. 이 성은 세상 밖으로의 출입이 제한되던 왕궁 여인들이 도시의 생활을 엿볼 수 있도록 건축되었다. 특이한 것은 성의 외벽이 도로와 이어지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성의 1층과 2층은 정원으로 연결돼 있으며 성에는 약 953개의 작고 둥근 포대와 같은 공간이 층을 이룬다. 각 공간에는 작은 발코니, 아치형 지붕, 격자형 창문이 나 있다. 과거 왕실 여인들이 도시의 생활과 행렬 등을 지켜볼 수 있는 목적으로 만들어서 졌다. 지금 역시도 작고 깨진 창문으로 거리를 구경하기에 좋다.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이 테라스 형 궁전은 한 사람의 남성을 위해 세상과 단절된 채 평생을 보내야 했던 여성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이자 유일한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본 시장엔 지금도 화려한 빛깔의 비단 사리와 낙타 가죽으로 만든 수공예 신발, 장신구 등 매력적인 물건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명소로는 잔타르 만타르를 꼽을 수 있다. 자이싱 2세가 1726년 도시 중심에 세운 시티 펠리스는 7층 건물이다. 현재 그 일부가 박물관으로 개조돼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시티 펠리스 안에는 지금도 천문대로 이용되는 잔타르 만 타르(‘기묘한 기구’라는 뜻)가 있다. 자이싱 2세에 의해 인도에 세워진 다섯 군데의 천문대 중 하나다. 여러 곳 중에서 가장 큰 규모가 있는 곳으로 1940년대까지 사용됐다고 하니 그 정교함을 짐작할 수 있다. 언뜻 봤을 때 잔타르 만타르는 그저 거대한 조각들을 모아 놓은 곳으로 보이지만 사실 각 건축물은 일(월)식 계산 등과 같은 특별한 용도가 있다고 한다. 이는 대부분 석조 건축물로 20여 개의 주요 측량기구가 땅에 묻혀 있다. 직접 눈으로 천체를 관찰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이는 인도 역사에 길이 남을 천문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단지이자 잘 보존된 유산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오차가 거의 20초인 해시계, 별자리 계측기, 자오선의, 천체 경위 등으로 다양하게 갖춰져 있다. 정확한 관측을 위해 음력을 수정하거나 별자리를 통해 일월식 등을 예측하고 앞으로의 날씨도 점쳤다고 한다. 인도판의 세종대왕이 아닐 수 없다. 잔타르 만타르 바로 옆에 라자스탄과 무굴의 양식이 혼합하여 건축한 궁전 시티 팰리스를 만날 수 있다. 마하라자 궁전을 개조한 박물관으로 무척 호화스럽다. 궁전 안에는 라지푸트 시대의 병기로 다양한 전쟁 무기들을 수집해 놓은 전시장도 있다. 대부분 이곳에서 왕국을 이루었던 마하라자들의 흔적들이다. 라자는 산스크리트어로 부족의 우두머리이다. 마하는 그중 가장 강력한 통치자를 지칭한다. 그때 당시 오랫동안 여러 봉건 제후들을 마하라자로 불렸다.

16세기 자이푸르가 있던 라자스탄은 여러 작은 왕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들이 이슬람 세력에 항거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무굴 왕국의 엄청난 세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그들에게 복속하게 되었다. 라지푸트 많은 군사들이 무굴제국의 침략 왕 아우랑제브에게 항쟁하다가 폐망했지만 유일하게 자이싱 2세 만은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았다. 아우랑제브가 자이싱 2세에게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겠는가?”라며 호통을 치면 조롱하자. 그러나 불과 열한 살의 나이로 왕이 된 자이싱 2세는 아주 당당하게 “나를 보호해준다면,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아우랑제브는 그런 대담함을 높이 평가해서 자이싱 2세에게 자신이 정복한 지역의 4분의 1을 통치할 수 있는 황제 권한을 주었다. ‘사와이’란 칭호도 주었다. 자이싱 2세는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지도자이다. 그는 친척의 딸들을 무굴 황제의 첩으로 보내 무굴제국의 보호를 끌어냈고 경제적으로도 안전적 발전을 이루었다. 힌두교나 이슬람을 가리지 않고 고전과 언어, 종교 사상 등을 공부했고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열정을 쏟았다. 힌두교의 고전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이슬람의 기하학, 천문학 서적을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해서 활용할 정도이다. 선교사들을 통해 유럽의 여러 가지 문헌들도 받아들였다. 자이싱 2세는 아주 개방적이고 사유의 유연성을 가진 인물로 보인다.

삼국지를 읽어보면 유비, 조조 등의 흥망성쇠가 유연한 사고를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유비가 불리한 상황을 이겨내고 천하삼분지계에 따라 촉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제갈량을 얻었기에 가능했다.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나이가 적은 인재를 얻기 위해 삼고초려를 했다. 이것은 기존의 관습이나 관례 등 선입관 버리고 사유의 유연성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위기를 느낀 조조가 참모의 건의로 오나라와 손을 잡으려 하자, 오는 유비의 촉과 화친하려고 사자(使者)를 관우에게 보내 의사를 타진했다. 사자가 오나라 손권의 아들과 관우의 딸이 혼인을 맺고 힘을 합쳐 조조를 쳐부수자고 하자, 관우는 ‘범의 딸을 어찌 개의 아들에게 시집보낼 수 있겠는가’라며 거절했다. 지나친 자부심과 감정에 빠져 사유의 유연성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상황을 오판하는 실수를 범했다. 오와 촉의 화친 결렬로 유비는 중원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할 기회마저 잃었다. 더욱이 관우 스스로에게는 생명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관우가 자존심을 버리고 좀 더 사유의 유연성을 가지고 합리적인 외교를 펼쳤더라면 촉의 운명과 중국의 역사가 아마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브라만(Brahman)의 호수: 푸슈카르 (Pushkar)

다음 차례는 낙타 사파리를 하기 위해 달뜬 설렘으로 푸슈카르 Pushkar로 옮겼다. 아지메르에서 산을 넘으면 힌두교 성지가 있다. 푸슈카르(Pushkar)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파란색 연꽃'을 의미한다. 실제로 짙은 녹색의 자그마한 성스러운 호수와 그곳에 에워싼 25개의 새하얀 가트 주변의 작은 마을이 바로 푸슈카르이다. 호수는 이는 세상을 만든 창조의 신 브라만이 악마와 전쟁을 하다가 무기였던 천상의 연꽃잎이 지상에 떨어져 그곳에 물이 용솟음쳤다고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호수와 마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푸슈카르 호수의 신화는 이렇다.  태초에 브라만이 세상을 창조하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던 중 연꽃을 던져 그 연꽃이 떨어지는 지점이 좋겠다는 시바의 제안은 받아들였다. 브라만이 어깨 위의 거위를 날려 보내자 네 개의 신성한 산들로 둘러싸인 모래언덕 위에 꽃잎이 떨어졌고, 꽃잎이 떨어진 곳에서 샘이 솟아나 신성한 푸슈카르 호수가 되었다. 놀라운 마술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신화학자는 신화가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데 필요한 실마리라고 했던 것 같다. 이 이야기를 보더라도 창조의 신 브라만에 의해 모든 신이 창조된 것은 아니다. 시바 신은 이미 브라만 창조 이전에 있었다. 그것은 비슈누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시바 신은 아주 오래된 신이다. 기원전 2천 년, 혹은 2천5백 년의 것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인장에 이미 시바 신임이 분명한 이미지가 새겨져 있다. 아주 무서운 모습으로 말이다. 참 재미있는 신화이다. 호수는 바라나시와 하리드와르의 강가(갠지스)처럼 사람들이 마음을 정화하고 신에게 기도할 수 있는 가트가 있다. 가트는 목욕할 때 옷을 벗어놓거나 물속으로 들어가기 편리하게 만든 계단이다. 또한, 신선한 물을 향해 예배의 장소이기도 하다. 먼저 가트에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한다. 담배도 피울 수 없다. 더욱이 사진도 찍을 수 없다. 인도의 전통의상을 입은 성직자들이 다가와 리본을 달아주면서 힌두교의 종교의식 푸지를 해주고 엄청난 돈을 요구한다. 때론 꽃을 주고 물에 던지라고 하고 역시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다. 그것도 성스러운 터전에서 말이다.

마을 안에는 힌두 사원 있는데 본존이 인도에서도 보기 드문 브라만이다. 푸슈카르를 방문하는 순례자들은 성스러운 호수에 더러움을 씻어 낸 후 최고인 신인 브라만에게 경배한다. 호수 바로 옆에는 브라만(Brahman)을 모신 사원(temple)이 보인다. 사원 안에 브라만은 네 개의 머리가 있고 화려하게 치장한 붉은 옷을 입었다. 원래 다섯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시바 신에게 대들어 시바 신 가운데 눈에서 나온 빔을 맞고 머리 하나가 날아 가버린 것이다. 브라만의 머리 하나가 날아간 대가로 시바 신은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으면 구걸하면서 속죄 여행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목에는 몇 개의 꽃목걸이도 걸치고 있고 팔이나 팔뚝에도 장식품이 있다. 더 재미있는 장면은 낮잠을 자는 듯 보이는 거위 위에 신이 타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왕이 말을 타고 가는 듯하다. 여기서 네 개의 머리는 네 개의 베다를 뜻한다. 즉 리그·사마·야주르·아타르 바베 다이다. 그는 보통 네 개의 손에 제사에 쓰는 도구와 염주, 책을 들고 있다. 또한, 연화 좌나 거위 등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힌두교의 신들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요가를 수행해야 한다. 수행이 부족하면 그들 또한 곤경에 처하는 일이 많다. 브라만 사원 주위에는 신에게 바치는 예물을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설탕으로 만든 과자와 금잔화 조화 파는 가게들이 옹기종기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원래 500여 개의 힌두 사원이 있었으나 이슬람 왕조인 무굴제국 말기의 황제 아우랑제브(Aurangzeb)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다. 현재 브라만 사원(Brahma)과 사비트리 사원(Savitri) 등을 비롯한 몇 개의 사원이 복원되어 있다. 매년 11월에는 브라흐마를 숭배하는 축제인 '푸슈카르 멜라 축제(Pushkar Mela Festival)'가 열려 많은 성지순례객이 모여든다. 또한 이곳에서 매년 11월에 펼쳐지는 '푸슈카르 낙타 축제(Pushkar Camel Fair)'가 유명하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론리플래닛 등의 매체에 소개되면서 세계적인 축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 낙타 축제는 역사가 거의 100년 정도이다. 일 년에 한 번 낙타와 말을 비롯한 가축들을 사고, 파는 일종에 가축시장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수만 마리의 낙타가 한자리에 모이고 거래된다. 하는 활기찬 광경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이러한 이색적인 풍경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일 것이다. 푸슈카르는 타르 사막의 동쪽 끝자락에 있다. 사방에 산이 둘러싸여 있다. 무성한 나무들은 거의 없다. 모래 언덕들만 있다. 푸슈카르는 낙타 사파리를 하기 위해 반드시 가는 필수코스라고 한다. 필자도 그랬다. 삭막한 사막을 처음 본 지라 설렘과 낯설다. 그래도 사진도 찍고 새로운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럼에도 필자에게 라자스탄 사막에 슬픈 피리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듯하다.

다시 푸슈카르와 연관된 신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보통 인도 신화는 브라만교의 베다 신화와 힌두교 신화로 구분한다. 인도 종교 역사를 대략 구분해 보면 기원전 15-5세기는 브라만교이고 기원전 6-5세기부터 기원후 6~7세기는 불교이다. 그리고 6~7세기 이후에는 힌두교가 브라만교를 뼈대로 하여 불교를 흡수하여 거대한 종교 체제가 완성된다. 12세기 이후에는 이슬람교의 침범으로 이슬람교였다. 인도 신화는 브라만교 시대와 힌두교 시대에 형성된 것을 말한다. 브라만교를 다른 종교를 흡수하고 변형하여 발전시킨 거대한 바다와 같은 종교가 바로 힌두교이다. 거기에는 불교와 자연 종교 등 다른 종교도 포함되어 있다. 이른바 브라만교는 제식 중심의 종교다. 베다에서 노래하는 자연신들을 숭배하는 내용이 그렇다. 이 브라만교는 베다를 핵으로 해서『우파니샤드』로 완성된다. 이에 반해 힌두교는 창조의 신 브라만과 유지의 신 비슈누, 그리고 파괴의 신 시바를 주요 신앙의 대상으로 한다. 주요 경전은 서사시『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와 ‘옛 전설’을 뜻하는 ‘푸라나’가 있다. 베다의 신들로는 비와 번개의 신 인드라, 불의 신 아그니, 태양의 신 수리아, 달의 신이자 신의 신비로운 음료인 소바, 바람의 신 바유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모든 자연이 신이다. 강도 신이요 하늘도 신이요 땅도 신이며 심지어 원숭이와 개구리와 쥐도 신이다. 이것은 일종에 범신론(Pantheism)같이 보인다.

참고로 범신론은 우주, 세계, 자연의 모든 것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세계관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범신론은 “무신론의 완곡어법”이라고 평하였고 『만들어진 신』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도 범신론을 “매력적으로 다듬은 무신론”이라고 언급하면서 사실상 무신론처럼 말하지만 엄밀하게 점검하면 무신론과 필자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무신론은 신과 신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 베다를 계승한 우파니샤드 사상 역시 범신론에 가깝다. 한국의 민속종교나 샤머니즘 역시 범신론(pantheism)이다. 보통 범신론(Pantheism)과 범재 신론(Panentheism)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두 개념은 의미가 엄연히 다르다. 범신론은 ‘모든 것이 신이다.’이다. 하지만, 범재 신론은 ‘신이 모든 것 안에 존재한다.’이다. 다시 말해서 범재신론은 초월적인 신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 신이 동시에 온 세상 만물에 내재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제 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라자스탄 사막의 피리 소리가 있는 자이푸르(Jaipur)의 암베르 성(Amber Fort), 푸슈카르(Pushkar), 하와 마할(Hawa Mahal) 등을 둘러봤다.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여행이었다. 어찌 사시장철 갠 날만 있으면 그것이 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인문학적 눈으로 인도의 속살을 들려다 보는 일은 가치 있는 여행이라는 생각 해 본다. 2021/9/28 혜윰인문학연구소 /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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