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왜 지금 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도 연습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도 연습이 필요하다. 아프리카 속담에 ‘잔잔한 바다는 노련한 사공을 만들지 않는다.’말이 있다. 폭풍우와 파도 등 온갖 시련을 겪고 나서야 노련한 사공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민주주주의가 그렇다. 민주주의는 오랜 전통과 역사를 통해 훈련되고 다듬어지고 성숙된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한 민주주의는 유럽의 르네상스와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민주주의의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어떤가? 한국 민주주의는 오랜 전통을 가지지 못했다. 다만 한국에서는 식민지에서 분단 그리고 독재로 이어지는 특이한 역사적 상황에서 민주화라고 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급조 된 민주주의이다. 우리는 4.19혁명, 부마민주항쟁을 비롯하여 5.18 민주항쟁, 6월 민주항쟁, 그리고 광화문 촛불집회 등 민주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민주화의 전통만으로 민주주의 정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부족하지 않는가? 보는 입장에서 다를 수 있지만 혹자의 주장처럼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정착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여전히 실질적 민주주의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중론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그렇다. 왜 그런가?
민주주의의 조급증으로 나타났다.
불행히도 우리는 역사적으로 서구에서 볼 수 있는 민주주의 학습 과정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17세기 계몽주의 합리론과 이성의 세례도 받지 못했다.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조급증으로 나타났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조급증이 무엇인가? 타인보다 더욱 나아지고 싶어서 참을성 없이 생각보다 먼저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 사유하지 않고 결정하게 된다. 그 결정은 비천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조급증은 졸속한 합의를 생산하고 정치 불신도 초래한다. 그 곳에는 민주주의의 과정이 생략된다. 마치 정치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오직 정치권력 줄서기의 유일한 통로 쯤으로 여긴다. 슬픈 현실이다. 유대인 정 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은 사유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단정한다. 사유하지 않으면 당연히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른다. 물론 타인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도 의지도 판단도 하지 못한다. 즉 사유의 불능성이다. 여기에는 계략 전술만 있을 뿐이다. 당연히 민주주의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
광장정치 이대로 좋은가?
지난 10월 이철희 의원과 표창원 의원이 21대 총선 불출마을 선언하였다. 불출마 선언의 배경에는 정치 혐오와 당리당략에 대한 염증이 짙게 깔려 있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정치는 지독하게 모질고 매정하다.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사는 정치이다 여기에는 상대에 대한 관용과 아량을 찾을 수 없다. 오직 불신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원래 정치는 상대가 있다. 그리고 상대를 인정해야 대화가 된다. 아니면 독단이다. 모두 자신들의 ‘정치적 감정’에만 집중하면 정치는 실패한다. 보라. 의사당에서 이루어져야 할 정치가 결국 광장으로 옮겨지지 않았는가?. 조국 사태가 그렇다. 지난달 28일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인근에서 열린 ‘검찰개혁 촛불문화제’와 조국 사퇴를 촉구하는 보수 진영의 광화문 집회가 동시에 열렸다. 엄밀히 말하면 두 광장은 2017년 촛불 혁명 때 광장과는 다르다. 민주주의 시작인 아테네 아고라의 모습도 아니다. 의도와 관계없이 숫자로 지나치게 대결하는 양상을 보인다. 혹자는 이것을 파당적 광장 정치로 전락했다고 말한다. 토론을 통한 합의와 타협의 장소가 될 리 만무하다. 대결하는 정치적 구호만 난무하다. 막말도 있고 가짜 뉴스도 있고 정치 선동도 있다. 여론 조작으로 정치적 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참여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광장이 마치 거대한 정치 세력 싸움으로 변질된 것이다. 더욱 더 큰 문제는 상대방을 악마화 하는 데도 서슴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보고 혹자는 광장의 파시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혹평한다.
정치! 가 왜 민주주의이어야 하는가?
이제 우리는 이러한 비민주적인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주 도전적으로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정치! 왜 민주주의이어야 하는가? 의외로 그 질문에 대답은 간단하다. 민주주의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면 된다. 그게 잘 안 되면 연습하면 된다. 민주주의 연습이 제대로 안되면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다. 합리적 판단 자체를 거부하면 특정 정치인에 집중하려는 우상화의 유혹에도 빠진다. 그리고 절대적 믿음을 그에게 쏟아 붓는다. 마치 종교 광신도처럼 말이다. 여기에는 무조건 내 편이면 선이고 내 편이 아니면 악이라고 하는 이중성도 띄게 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언급하지 않고 뒤로 미루겠다. 지금 필자가 말한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이다. 열린 생각, 열린 마음이 있는 민주주의 말이다. 민주주의 핵심은 다양성과 비판이라고 본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끌어안으면서 토론과 설득으로 창조성을 가지고 만들어 가야한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비판도 눈여겨 봐야한다. 다름의 가치도 소중히 해야 한다. 건강한 민주주의 속에서는 갈등이 불가피하다. 오히려 모순과 갈등이 없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갈등이 존재해야 새로운 대안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래야 동일성 오류의 우상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다수결이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수결 대신 합의를 통해 결정을 하는 것이 훨씬 더 민주적이다. 정치가 무엇인가? 이러한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민주 정치가 아닌가. ?
정치는 사유의 유연성이 필요하다.
아테네 광장 민주주의를 보라! 1만 명이 넘는 아테네 시민들이 아크로폴리스의 광장에 모여 자발적으로 국정을 토론하고 숙의하고, 정책 결정에 참여하지 않았는가? 모든 시민들은 광장에서 발언을 할 수 있는 자유(isegoria)도 토론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수사학을 배웠다. 필자도 제안한다. 아테네의 수사학이 필요하듯 정치가 민주적이 되려면 인문학 교양 교육이 필요하다. 인문학은 하나의 쟁점을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사유의 유연성 말이다. 1980년 이후 한국 사회는 사유의 유연성을 잃어 버린 것 같다. 지나친 극단과 과잉 그리고 천박한 실용주의 만이 대세를 이룬다. 때문에 진지한 사유는 없어지고 버려지고 화석화 되어버렸다. 따라서 서로의 대화는 단절되고 사유는 획일화돠어 더 이상 건전한 소통이 불가능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를 보면 알 수 있다. 사유의 불능성과 경직성은 민주주의 대화의 최대의 적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정치에 사유의 유연성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러면 서로 간의 모순과 예매함이 불편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더욱 성숙되고 발전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에 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2019/10/28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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