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gel과 Kant의 신 존재 증명과 인식 그리고 Feuerbach, Karl Marx
1. Hegel과 Kant의 신 존재 증명
신 존재 증명은 일반적으로 중세철학의 소산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철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의 신 논의를 자신들의 체계에 인용하여 사용하였고 그것은 존재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으로 정식화 되었다. 칸트가 보기에 이러한 세 가지 신 존재증명은 형이상학적 독단론의 전형이다.
우주론적 증명은 실제의 대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의 개념을 추론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은 때론 필연적으로 때론 우연적으로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인과적인 선후관계를 가지며 도리어 우연적인 것은 인간에게 아직 밝혀지지 않은 필연의 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우주론적 증명은 이러한 인과율의 최종점으로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논리적인 선후관계상 무한퇴행을 막는 최종의 일점을 가정하고 그것이 바로 신이라고 말하게 된다. 필연적인 존재자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절대적이고 가장 필연적인 존재자는 그 본성상 가장 현실적인 존재인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존재라고 하는 단순한 개념은 이 존재의 절대적 필연성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증명은 존재론적 증명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칸트는 또한 존재론적 증명과는 별개로 다음과 같이 우주론적 증명을 비판한다. 첫째 만약 필연적인 존재가 있더라도 그 자체는 인과율상 우연적일 수 있다. 둘째 필연적인 존재와 다른 존재자들 간의 연쇄 역시 우연적일 수 있다. 즉 위에서 아래로 일정의 인과율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인과율의 이유나 목적을 찾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물자체의 개념을 통해 인과율 자체를 현상계에 한정시킨다. 목적론적 증명은 자연세계의 조화와 합목적성을 가정하고 이것을 궁극적 원인자의 의지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특수한 도에 따른 질서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합목적적인 질서가 우연적인 세계의 사물들에게는 완전히 낯설다. 따라서 우연적인 사물들이 필연적인 질서를 따라 자신의 본성을 따른다는 사실은 그것들을 조정하는 지혜롭고 숭고한 원인자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 그 원인자는 자유를 통해 이 질서와 조화를 수행하야 할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목적론적 증명의 역사적 권위와 합리적인 성격을 존중하지만 결과적으로 앞의 두 논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비판을 제기한다. 첫째, 결과로부터 출발하여 원인으로 소급되는 인과율은 오직 경험의 영역에서 타당할 뿐이다.
칸트는 이론이성의 이론적 증명의 독단론을 비판하면서 신 존재증명의 다른 방법으로 도덕적 행위와 관계된 실천이성을 제시한다. 즉 행위 하는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도덕법이 있으며 이것은 범주적 정언명령이다. 인간 자신의 마음속에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정언명령은 ‘삶의 규준을 보편적인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는 절대적 사실 앞에 존중으로서 복종함을 그 원칙으로 한다. 이미 내재해 있는 이러한 절대적 사실 앞에서 신은 그러한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제로 요청된다. 즉, 칸트에 따르면 실천이성은 전제와 요청이라는 방식을 통해 신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증명은 도리어 인식과 신앙을 분리시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주관 안에 있는 도덕법칙을 통해서만 신 자체의 존재와 상관없이 전제하고 요청한다는 개념은 사실상 신 존재증명이 아닌 신의 인간적 도덕화에 불과한 것이다. 칸트는 사실상 세계와 신에 대한 이원론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열망과는 다른 불가지론 주장하고 만다. 또한 인간의 도덕법칙에 의해 그 그림자만을 볼 수 있는 신은 사실상 존재에 대한 어떠한 관계도 불가능하게 도니다. 오직 인간의 도덕적 이상을 위해 봉사하는 신은 그래서 피할 수 없는 비판에 직면하게 도니다. 거기에 대한 가장 격렬한 입장 중 하나가 바로 헤겔이다.
헤겔에 따르면 칸트는 절대자의 인식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주관성이나 인식 능력에 대한 비판을 해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세계 안에 절대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무한과 유한은 더욱 더 절대적 간격을 가지게 될 뿐이다. 따라서 신앙과 인식은 분열되어 버린다. 인간의 현실에는 이원론이 형성되었고 신의 정신의 나타남은 단지 미신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성의 한계 안에 종교는 모든 전통적인 교의와 경험들을 말살해 버린다. 그러나 이성의 신학은 사유를 그의 원리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한 인식을 요구한다. 헤겔에 따르면 신은 진리이다. 인간은 그의 정신의 가치를 믿으며 진리에의 용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을 찾고자 하는 충동, 즉 무한한 충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곧 신을 인간의 주관성에서 탈피시켜서 전체 세계사의 주재자로 인식하려는 헤겔의 신앙동기의 차이이기도 한 것이다. 헤겔은 증명의 출발점을 ‘유한한 존재’와 ‘신’이라는 두 가지 항으로 나누어 각기 반대 극으로 향하게 한다. 전자에서 출발하는 것이 우주론적, 목적론적 증명 방법이고 후자에서 출발하는 것이 존재론적 증명의 방법이다. 신은 고양 자신의 활동성이면서 동시에 인간 자신 속에 고양을 일으키는 정신이다. 우주론적 증명에서 전재된 세계의 유한한 사물들은 신과 절대적인 차이를 가진다. 그러나 이 차이는 하나의 중재가 되어준다. 사물은 자신으로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버림으로써 무한하고 필연적인 것에로 고양되어 간다.
헤겔은 오직 존재론적 증명만 참으로 인정하는데 그것은 개념에 대한 정의가 칸트와 다르기 때문이다. 개념은 유한한 개념과 절대적인 개념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절대적인 개념은 존재와 개념이 분리되지 않는다. 신은 개념이며 자유롭고 순수한 개념이다. 상식적으로 존재 없는 개념은 참되지 못한 것이고 개념 없는 존재 역시 불가능하다. 신의 개념은 존재와 일치하며 도리어 존재를 자기 자신과 동리하게 정립시키는 영원한 활동성이다. 자기의 주관성을 지양하고 스스로를 객체화시키며 현실로 만든다. 절대정신은 스스로를 정립하고 구분하면서 정-반-합의 자기 활동을 행할 수 있는 자이다. 또한 오직 정신만이 이러한 정립, 구분 그리고 종합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셀름에게는 존재와 그 개념이 추상적인 전제로만 머물러 있는 뿐이다.
2. Hegel과 Kant의 신 인식론
칸트에게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무언가를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주어와 술어가 논리적으로 결합됨으로써 형성이 된다. 이러한 논리적인 결합으로 두 가지 판단이 가능하게 되는데 첫 번째는 분석판단이고, 두 번째는 종합판단이다. 칸트는 과학적인 판단은 두 번째인 선험적 종합판단에 속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않아도 형성되는 판단. 즉 선험적 종합판단을 통해서 우리는 보편타당성과 필연성을 가지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종합판단의 보편타당성과 필연성의 원천은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와 그의 오성에 있다. 여기서 칸트는 ‘감성’과 ‘오성’을 구분한다. 감성은 경험의 재료를 받아들이기만 한다. 그리고 오성은 감성이 받아들인 재료들은 12개의 범주를 통하여 능동적으로 종합한다. 물론 이 재료들이 감성의 직관에 의하여 오는 것이지만 오성의 12가지 범주로써 종합되면서 보편타당성을 가지게 된다.
또한 칸트는 ‘오성’과 ‘이성’을 구분한다. 오성은 개념을 형성하고 이 개념들을 판단으로 결합시키는 반면, 이성은 이 판단들을 추론으로 결합한다. 결국 이성을 통하여 더 높은 통일성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세 가지 “관념”을 칸트는 전제한다. 경험되어지지 않는 신의 관념이기 때문에 이성으로 증명될 수도 없고, 부인될 수도 없다. 즉, 초감각의 관념들은 신앙의 대상이지 이론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단지 실천이성에 의해서 요청되는 신의 개념이 있을 뿐, 대상에 대한 아무런 직관도 얻지 못한다. 이와 같이 칸트는 유한한 사물을 인식하는 이론적 이성에 대하여 하나님 인식을 거절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오직 실천적인 ”관계‘에서 가능하다. 실천적인 관계라고 하는 것은 “최고의 완전성”을 가진 세계의 원인자로 전제하는 신이다. 즉, 신의 개념 사변적 이성에 속한 개념이 아니라 도덕에 속한 개념이다.
결론적으로 칸트에서 있어서 신은 세계에 속하지 않은 초감각적 존재이므로 정확하게 인식될 수 없고 단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요청 내지 전제될 뿐이다. 헤겔에 의하면 칸트가 말하는 오성의 범주는 참되지 못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칸트는 이 오성의 형식을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사유의 규정으로써 대상과 분리된 것으로 생각한다. 즉 주관적인 것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주관적인 범주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인식은 사실에 있어서 아무런 객관적인 것을 포함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범주를 통하여 물 자체가 인식 될 수 없음을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칸트가 말한 “물 자체”의 개념은 헤겔을 통하여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물 자체는 다른 존재로부터 추상된 것,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것은 인식될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사물의 규정이 선행 되어야 하는데 물 자체는 어떠한 규정도 없다. 헤겔에 의하면 “물 자체”는 그 속에 하나라는 사실 외에 전혀 알 수 있는 것이 없는 절대자와 마찬가지의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것은 완전히 추상적이며, 피안의 것이다. 이 물 자체의 세계에 대하여 사유의 형식이 적용되지만 사유의 형식은 물 자체의 세계를 파악할 수 없고 단지 그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물 자체의 세계는 인간의 사유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머물러 있게 된다. 결국 사유하는 자아와 물 자체의 세계, 현상의 세계와 절대의 세계,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유한과 무한은 극복 될 수 없는 이원론으로 빠지게 된다. 더 나아가 절대자에 대한 오성의 범주의 사유는 추론과 모순으로 빠지게 된다. 칸트는 오성이 현상만을 인식한다고 하면서 오성의 인식이 유일하고 참된 인식이라고 말한다. 이것에 대해서 헤겔은 “오성은 단지 현상만을 인식한다고 하면서 이 인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가장 큰 모순이라고 한다.”라고 칸트를 비판한다.
헤겔에 입장에서는 신은 계시된 신이다. 그는 자신이 무엇인지 인간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에 피안의 신이 아니다. 정신으로써의 신이 그 자신을 대상화시켜서 정립되는 대상, 즉 계시의 현실은 먼저 인간의 정신이다. 신은 인간의 정신에 자신을 계시한다. 그것은 신이 정신이기 때문이며 “정신은 정신에 대해서만 존재한다. 정신에 대하여 존재하는 한에서만 그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은 존재양식을 뜻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을 더 잘 인식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유한한 정신이 신이라는 뜻은 아니다. 신의 정신이 그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유한한 정신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이며 그 상태에서 지양되어야 한다. 신에 대한 인식은 헤겔에 있어서 철학적 인식이기도 하다. 신 존재의 변증법적 운동은 논리학을 통해서 기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은 신학적 그리고 철학적 인식의 대상이기도 하다. 여기서 철학적 인식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이유로 신에 대한 인식은 보편성을 얻게 된다. 헤겔의 신 인식은 굳이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유가 본질이 되는 정신을 지니고 있다면 누구나 신을 인식할 수 있다. 신을 인식하기 위한 외부적 요인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르트는 신 인식은 신앙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Hegel, Feuerbach, Karl Marx 사상
헤겔에 의하면, 특수한 대상으로 자기를 외화시키는 정신은 그 대상 속에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재는 부정적인 것으로 내재하고 있다. 헤겔은 그 정신의 본질적인 규정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가 모든 특수한 내용을 지양시킨다. 그는 보편자요, 제한되지 않은 자이며, 가장 내적인 무한한 형식 자체요, 모든 제한된 것과 일치되지 아니한다.” 이미 세계 속에서 외적으로 대상을 가짐으로써 정립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반하여 새로운 대상성을 가지려고 하는 정신의 세계 부정성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정신의 부정성을 본질로 삼는 것이다. 그래서 사유한다는 것은 그 대상의 현재 상태를 “넘어감”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대상의 현재적인 상태, 그 특수성과 제한성을 넘어가는 사고의 운동, 즉 절대 지식에 이르고자 하는 정신의 운동을 말한다. 포이에르바하는 헤겔 철학과 마르크스 철학 사이의 교두보의 역할을 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그를 일컬어서 사변철학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에 있어서 현재의 연옥이라는 찬사까지 하였다. 포이에르바하는 헤겔의 환상적인 정신변증법의 철학을 비판하고 현실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마르크스는 또한 평하면서, 아래와 같이 몇 가지의 학문적 공적을 언급한다.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헤켈의 변증법은 절대적인 신의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변증법이다. “헤겔은 종교와 신학으로부터 출발한다.” 헤겔은 무한자를 지양시키고 그 자리에 감각적인 유한자를 대치시킨다. 이는 종교와 신학의 지양으로서의 철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 유한자를 다시 지양시키고 추상적인 무한자를 다시 회복시켜서 철학으로 지양되었던 기독교와 신학을 다시 회복시키는 일을 한다. 결국, 헤겔 철학은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헤겔의 역사 운동은 논리적이며 사변적인 표현만으로 발견되기에 현실적인 역사가 아니라 추상적으로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가 볼 때,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는 인간을 “개체화된 개인”으로 이해한다. 그는 분명 구체적인 인간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기는 하였으나 인간을 ‘감상적 대상’으로 파악하였으며 ‘감성적 활동성’으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을 그에게 주어진 사회적 관계와 삶의 조건으로부터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현실적으로 활동하며 실존하는 인간이기 보다는 인간이라는 추상적 존재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 우정, 등과 같은 관념화된 인간관계를 알 뿐이지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를 알지는 못하였다. 그는 종교의 본질을 인간으로 지양은 시켰으나, 그 인간의 현실 속의 사회적 컨텍스트를 간과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그는 완전히 헤겔의 관념주의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인간 이해에 있어서 차이는 바로 정신과 물질에 있다. 인간의 본질을 어디에서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헤겔은 정신에 인간의 본질이 있다고 여기며, 마르크스는 물질적 생산 활동, 즉 노동에 있다고 본다. 인간이 물질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 가에 따라 그의 존재가 결정된다. 그의 존재는 추상적 의식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물질적 생산 활동에 따라 결정된다. 헤겔도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중요한 계기하고 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볼 때, 헤겔이 말하는 노동은 인간의 노동이 아니라, “절대 정신의 노동”이며, 인간은 노동하는 절대 정신의 한 계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본래 노동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노동인데, 헤겔의 노동은 모든 사회적 관계를 결여한 개념이다. 하나의 추상적인 관념적노동이다. 200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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