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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인문학▣/종교철학산책

해방신학, 여성신학, 과정신학

by 뜨르k 2019.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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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 여성신학, 과정신학
Ⅰ.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 중심사상과 타당성, 문제점을 논하라
  1.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의 중심사상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은 라틴아메리카의 특정한 역사·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출현한 신학을 말한다. 라틴아메리카는 1950년대에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모델로 하는 ‘발전’ 혹은 ‘개발’이라는 이념 아래 사회·경제 발전을 통한 현대화를 추구했는데, 그것은 발전된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기구들에게 지배될 수밖에 없었다. 발전주의는 기존의 세계 경제 질서를 전제로 하고 있는 데 반해, 해방은 이것의 혁명과 이로부터의 정치·사회적 해방을 의미하며, 이 혁명과 해방이 실현되지 않고는 인류와 역사의 참된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고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는 이와 같은 역사·사회적 문제 상황의 과학적 분석이론으로서 원용되고 있다. 이같이 해방신학에 내포된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는 소련에 의해 대변되던 이른바 변증법적·형이상학적 유물론이거나 무신론도 아니다. 다만, 그것은 종말적 구원 또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로 박두해 가는 실천의 이론적 도구 내지 매체이다. 그리하여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은 앞서 말한 상황과 분석을 성서에 증언된 종말론적 구원신앙의 실천적 계기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해방신학은 어떤 신학인가 ? 해방신학은 해방의 실천으로 새로운 신앙의 이해가 가능해진다

고 보고 있다. 해방신학의 이러한 입장은 계시 전체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구티에레즈에 따르면 해방신학은 억눌리고 착취 받는 땅 라틴아메니카에서 일어난 해방의 과정에 투신하고 있는 남녀들의 체험과 복음에 기초해서 성찰해 보려는 하나의 시도라고 말한다.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은 서구의 전통적인 신학과는 다른 인식에서 출발한다. 한마디로 해방신학의 인식론적 전제는 “진리란 실천을 통해 인식 된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서구신학의 관념론적인 인식론을 거부하며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요시 한다. 실천이야말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정의와 법을 수립함으로써 해방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입증하는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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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해방이란 단어는 무슨 의미인가 ? 해방신학에서 이 단어는 성서의 핵심주제이며 구원이라는 전통적인 단어를 가장 적절히 대체할 수 있는 단어라고 주장한다. 성서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을 짓밟는 모든 억압의 근본 원인인 죄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자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참으로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신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그리스도와 교제할 수 있고 다른 모든 인간들과 형제애를 나눌 수 있음을 말한다. 또한 해방신학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전 인류를 새롭게 창조하심으로 달성하는 전체적인 구원에 입장에서 출애굽사건을 재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가슴 속에 간직되어 있는 유토피아의 실현을 의미하면, 인간과 우주의 총체적인 해방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를 계시의 장소로 보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계시가 계속됨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구원은 이미 현재의 사건임을 강조한다.

2.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의 타당성
그렇다면 이러한 해방신학의 타당성은 무엇인가?

첫째, 전통적인 신학은 세상과 괴리된 신앙만 강조한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초연한 자세를 지양하고 인간들의 삶의 터전에 동참할 수 있는 신학적 지반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해방신학은 과감히 현실에 참여함으로써 현대 세계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인류의 고난을 드러냄으로써 신앙이 현실과 무관하지 않음을 일깨워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해방신학은 현대 사회에서 나타난 타자에 대한 무관심을 해소하고 신앙적으로 타인에 대한 관심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는 타자에 대한 무관심 태도에서 관심의 방향으로, 교회는 또한 교회는 세계를 섬기는 신학적 지반을 제공한 측면에서 타당성을 가진다.

 

둘째, 신학적으로 보면 일반사와 구속사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는 데, 해방신학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대부분 전통적인 신학은 보편사와 구원사를 구분한다. 이것은 2원론적인 사고방식이다. 삶과 신앙생활을 분리하는 신앙은 위선적인 신앙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신앙을 성찰할 수 있기 때문에 위선적인 태도를 극복할 수 있는 예시를 보여주고 있다. 결코 창조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구분될 수 없다,

 

셋째, 해방신학은 저 세상의 가치보다 이 세상의 문제를 중요한 가치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단지 피안의 세계만이 아닌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피안적인 세계만 관심을 갖는다면 이 세상은 생태계문제, 지구 온난화 문제, 빈곤, 전쟁에 대한 아무런 신앙적 책임을 질 수 없을 것이다.

 

넷째, 해방신학은 제3세계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태동한 선교신학으로서 가난에 대한 문제를 신학적 주제로 설정했다. 이러한 해방신학의 출현은 더욱 폭 넓은 신학적 지평을 열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민중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등등)

 

다섯째. 해방신학은 유럽 및 미국의 신학자와 교계 지도자가 제3세계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의 대다수 신학자는 해방신학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의 연관성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는데, 이 비판은 신앙과 이데올로기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해방신학의 입장은 신앙의 초(超)이데올로기적 근거, 즉 하느님의 종말적 구원 또는 하느님 나라를 지시하면서도 그 같은 비판 자체가 현실적으로는 대체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바탕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논박한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종말적 신앙은 잘못된 역사·사회의 변혁을 위한 실천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내세운다.

 

3.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의 문제점

영원한 신학과 교리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학은 그 자체가 역사성과 상황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해방신학 역시 하나의 이론으로 머물거나 절대화할 수 있는 영원불변의 신학은 아니다. 신학은 어느 시대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해방신학도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해방신학이 실천만 강조하는 신학이라고 말하는 신학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해방신학이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강한 신학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 해방신학의 문제점을 더듬어 보자.

 

첫째, 해방신학은 모든 사회분석을 압박하는 자 압박받는 자로 양분하고 있다. Marx의 2분법과 동일한 방법으로 사회를 분석하고 있다. 그 결과로서, 기독교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가장 중요한 핵심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거기에 해방신학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와의 계급투쟁을 조장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비존재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 지 의문이다.

 

둘째 해방신학은 죄의 심각성을 경솔하게 취급하였다. 인간이 하고 있는 해방운동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행위하고 생각하는 것은 해방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죄인이란 점을 경솔히 취급한 것밖에는 되지 못한다. 모든 해방이 실현되더라도 더욱더 심각한 무제, 죄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적 모든 해방이 실제로 성취된 자유를 과연 옳게 사용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인간이 변화되지 않는 그 어떤 사회, 경제, 정치제도, 구조도 바르게 정의롭게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해방신학자들을 혹평하는 자들의 근본적 논리이다.

 

셋째 해방 신학 비판자들은 해방신학이 원죄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며 신학적 인간학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원문제 또한 체계 있게 다루지 않는다고 본다. 특히 고범서 교수는 “해방신학이 해방에 관심을 집중하고, 구원은 부수적으로 다루거나 혹은 그것을 개주해서 다룬다고 비판한다.

 

넷째 성서의 하나님은 어떤 특수한 상황, 곧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나 가난한 자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위정자나 백성이나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다 구원하는 분이라고 한다. 이런 입장에서 해방신학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드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에 대해 해방신학 비판자들은 “그리스도교적 구원이 마치 가난한 사람들의 독점물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구원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태도이며 ”계급투쟁의식에서 발생된 사고방식“이라고 비판한다.

 

Ⅱ, 여성신학의 중심사상과 타당성, 문제점을 논하라.              -로즈마리 류 터(Rosemary R. Ruether)를 중심으로-
1. 여성신학의 중심사상

여성신학은 서구 문화 속에 깊이 들어 있는 성차별주의 사상을 정당화시키고 신성화시켜 온 전통신학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나아가서 그러한 가부장제적 성격을 넘어선 기독교신학을 다시 형성하고 있는 신학이다. 메리 데일리(Mary Daly)와 엘리사벳 S. 피오렌자(E. Schüssler-Fiorenza), 그리고 로즈마리 류터(Rosemary R. Ruether)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여성신학은 재래의 신학이 모두 가부장제적 사고와 남성중심의 언어로 이룩된 남성 신학임을 비판하면서 그동안 일반 사회와 교회 안에서 차별받고 소외되어온 여성의 관점에서 신학의 주제를 

 

전반적으로 다루면서 탈 가부장제를 통한 전인적 구원관을 이룩해내고자 한다.

20세기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남김 여성신학자를 든다면 로즈마리 R. 류터이다. 자신의 신학을 여성해방신학의 범주에다 넣고 있듯이, 하나의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기독교신앙을 이해하고 정리하고 있다. 다른 해방신학에서처럼 여성해방신학의 현실이해의 관건은 “바닥”에서부터 보는 눈과 “다른 끝”에서부터 보는 눈에 있다. 지배하는 자의 편에서가 아니라 지배받는 자의 편에서, 억압당하는 쪽에서가 아니라 억압당하는 쪽에서, 위계적 질서체계에서 윗자리에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 신을 이해하고 학문을 논하는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가부장제도 밑에서 눌림 받으며 살아온 여성들의 경험이 신학의 출발점이요, 여성들의 한 맺힌 삶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그와 같은 한을 맺게 한 성차별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 포함되는 그런 신학이다. 따라서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볼 때, 성차별이 곧 죄인 것이고, 구원이란 바로 이 성차별에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로즈메리 류 터(Rosemary R. Ruether)의 여성신학사상에서 무엇보다도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비판적 차원이다.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볼 때 전통적인 기독교신학은 가부장 중심적인 사고양태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제도적 교회의 노선을 뒷받침해 온 소위 정통신학사상에는 성차별주의 이데올로기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가부장제적 사회와 교회제도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을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시키고 더 나아가 그것을 신성화시키기 위해서 신학을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여성신학의 비판 작업에서 밝히는 전통신학의 성차별주의 이데올로기성이다. 신의 이름으로, 교회의 거룩한 권위의 이름으로 여성들을 억압하고 비인간화시키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류터(Rosemary R. Ruether)의 여성신학에서 다른 하나의 주요한 차원은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제적 신학을 넘어서는 신학의 재건에 있다. 여기에 소요되는 자료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전통과 여성의 경험이다. 전통의 중심이 되는 성서에서 전통을 비판하는 기준이 되는 비판원칙을 끌어온다. “여성의 온전한 인간성을 촉진시키는 것”이 페미니스트적 비판의 규범이다. 튜터(Rosemary R. Ruether)는 이것이 성서에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 성서해석의 방법론에 관한 주장에서도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와는 다르게 경험과 전통의 상호관련을 기반으로 하는 페미니스트 비판적 해석학을 주장한다. 

2. 여성신학의 타당성

첫째, 여성신학은 온전한 인간해방 측면에서 타당성이 있다. 여성신학은 오늘날까지 서구세계에서의 지배적인 남성중심적 가부장제 문화, 사회구조, 역사인식에 대한 근원적 회의와 이의제기로부터 출발한다. 이 신학은 남성을 인간의 전형적 모델로 제시하면서 여성을 남성에 의해 규정시킴으로써 본래의 상태로부터 소외시켜 온 교회와 기존 신학 입장을 비판한다. “교회는 자유와 충만한 인간성을 갈구하는 인류 절반의 깊은 염원을 거절 내지는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한편, 교회의 구조를 현대의 여성조건에 알맞게 고치기를 거부하며 아직까지도 여성들에게 순명, 복종, 양순 등의 수동적인 덕행을 가르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시대착오와 편견의 마지막 요새로 나타나고 있다.”

 

로즈마리 류터는 교회가 성차별 제도의 정착에 기여했다고 지적한다. “고대문명이 영혼-육체의 이원론과 남성-여

성의 이원론을 동일시하고 따라서 여성의 예속을 새로운 형태로 재규정함으로써 여성해방의가능성을 진압했으며 그리스도교는 이 점에서 볼 때 고대 사회문화의 상속자이자 담지자로서 가부장제적 체제의 확립과 유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여성 신학은 여성의 관점에서 역사와 종교, 세계가 신학적으로 파악되어야 하며, 하느님께 대한 여성체험과 그 이야기가 권위있게 공개되고 선포됨으로써 남성문화를 상대화시켜 남성적 문화와 신학을 보완함으로써 전 인간 해방과 온 우주의 구원을 이룩해야한다는 기본 취지를 드러낸다.

 

둘째, 여성신학은 성서를 근거로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여성신학자들은 성서가 고대에 여성해방을 위해 비록 일익을 담당하고 기여한 면이 있지만, 성서자체가 바로 가부장제적 남성문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성서가 지닌 한계성을 예리하게 비판한다. 여성신학은 교회 안에 정착되어 있는 가부장 제도가 여성을 인간이 아닌 전혀 별개의 것 또는 비존재로 보아왔다고 비난한다. 그래서 여성이기에 억압과 예속을 인내하며 참아야 한다는 식의 가부장제적 설교는 반인간적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여성신학은 여성전체를 남성전체의 대립적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부장제적 권위를 고발한다. 여성신학은 종교적 억압체제로서의 가부장 제도를 극복하고 여성교회가 출현함으로써 기존교회와 문화전통이 정화되고 보완되고 완성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성교회는 결코 분리주의적 발상에 의한 것이 아니고 여성들의 품위를 기존 종교 문화권 속에서 강조하여 여성들을 남성들의 영적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여성을 보호하고 완성시키기 위한 하나의 대응적 방법의 모색이라는 주장이다.

 

셋째, 여성신학이 생태학적 측면에서 타당성이 있다. 대표적인 미국의 여성신학자 로즈마리 R.류터(Rosemary R. Ruether)는 페미니즘을 "공적 삶으로부터 주변화되게 하는 열등한 그룹으로 여성들을 규정하는 문화적인 그리고 사회-경제적 체계에 대한 비판"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에코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1974년에 프랑수아즈 도본느 (Francoise d'Eaubonne)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지구라는 이 행성에서의 인간 생존을 보증하기 위한 생태학적 해결을 가져올 여성들의 잠재성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생태학과 페미니즘의 복합어인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이라는 용어로써 생태 여성학자들은 생태학과 페미니즘 분야의 탐구들을 결합하며, 어떻게 여성과 자연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문화 이데올로기와 사회구조들에 있어서 상호관련 되어 있는가를 탐구해 내었다. 에코페미니스트들 혹은 생태학적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지위와 자연의 지위 사이의 상호관련을 분석하는 페미니스트들인데, 이 분석의 중심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주장들이 자리잡고 있다. 1)여성의 억압과 자연의 억압은 서로 관계되어 있다. 2)이 관계들은 여성의 억압과 자연의 억압을 이해하기 위해 밝혀져야 한다. 3)페미니스트 분석은 생태학적 통찰들을 포함해야 한다. 4)페미니스트 전망은 제안된 어느 생태학적 해결들이든지 그 해결들의 부분이어야 한다.

3. 여성신학의 문제점

여성신학 이러한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다.

첫째. 인간의 가치적 측면에서 문제점이 있다. 분명히 하나님 안에서 남성과 여성은 평등하다,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쓰여 졌던 텍스트나 왜곡된 문화나 교육으로 인하여 불평등이나 여성차별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성신학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여성신학이 주장하는 양성평등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말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다는 의미가 남성과 여성이 같아지기 원하는 여성신학이라면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충분히 가치를 인정되지 않는 여성신학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둘째, 이데올로기 측면에 문제점이 있다. 여성신학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어쩔 수없이 당파적 이익과 관련되기 마련이고 왜곡의 성격을 면할 수 없기 때문에, 만약 여성신학이 이데올로기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면 성차별의 왜곡을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당파성을 조장하는 결과와 새로운 남성 신학이 등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Ⅲ.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의 중심사상과 타당성, 문제점을 논하라.  -그리핀(D. Griffin)을 중심으로-
1. 과정신학의 중심사상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은 현대의 신학 인간과 세계의 진화론적 성격을 강조하여, 신(神)도 변화해 가는 세계와의 영적인 교류를 통하여 발전해 가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하는, 1960년대에 미국에서 새로 생겨난 신학 사조 가운데 하나이다. 이 용어는 영국의 철학자 A.N.화이트헤드가 기포드 강연에서 한 원고 〈과정과 실재 Process and Reality〉에서 유래하였다. 이러한 과정신학을 말하는 신학자는 많이 있지만 특히 여기에서는 그리핀의 과정신학 중심사상을 전개해 보자.

 

그리핀(D. Griffin)은 현대 사상의 전제 가운데 가장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감각론과 기계적 자연관을 지적한다. 이 두 이론 모두 초자연주의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으로, 전자는 감각 지각이 우리가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감각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없는 지식은 초자연적 교훈을 통해 공급된다는 주장인 반면, 후자는 세계의 구성 요소들은 자발성, 즉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그리핀은 기계적 자연관을 개정하여 자연적 유신론을 주장한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니라 모든 유한한 존재가 창조적 힘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현실적 개체들이 자발성의 원리를 구현하며, 감각 배후에 있는 실재를 세계와 상호작용 하는 유기체로 이해하는 견해다.

 

리핀(D. Griffin)의 생태학적 사유는 그의 과정 신학적 토대 위에서 생겨난다. 그에 따르면 모든 물질들은 자신 속에 작용인과 목적인을 동시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한다. 외부에서 물질(개체)을 볼 때는 작용인으로 설명되지만 내부에서 볼 때 그것은 자체 내의 목적인에 의해 지속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물질은 외부에서 본 경우 물리적 존재이지만 내부에서 볼 때는 정신적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은 자연을 유기체로 이해하는 과정 신학적 시각으로서 모든 개체는 인과율적 영향력에 대하여 언제든지 자기 결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의 내부에 있는 목적은 감각적으로 결코 지각되지 않으며 오히려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맺는 근본적인 양태로서 주어져 있다고 이해된다. 종교개혁 신학과 깊이 연루된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전체는 언제든지 부분의 합으로 정의되었으나 여기에서 부분의 특성은 전체의 역동성을 이해함으로써만 알려질 수 있다는 역전된 이해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즉 자연의 본성이 대상화된 물질로서가 아니라 유기체적인 상호 관계성으로 이해되면서 어떤 물질도 그 자체로 독자적인 속성은 지닐 수 없으며 일체의 속성은 그 사물이 맺고 있는 제반 관계성에서 파생되어 나온다고 보여 지는 것이다. 이처럼 비감각적인 지각으로서의 내부적 목적을 자연본성(새로운 애니미즘)으로 통찰하는 사유의 전이는 자연에게 창조성을 부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자연 자체가 죽어 있는 물질세계, 인간과 마주하는 대상적,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기존의 자연이해에 따르면 자연 속에는 기본 구조가 있고 그러한 구조에 근거하여 자연과정이 수동적으로 란 오히려 과정이 능동적으로 활동을 펼치며 드러내는 한 규칙일 뿐이라고 말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스스로 짜짓기(Self -Organization)'의 원리에 의하여 생명과정이 역동적으로 진행될 때 생명은 정해진 규칙과 방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그리핀은 결정론으로부터 자유로운 신(神), 곧 세계를 끊임없이 창조해 나가는 신적 존재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2.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의 타당성

첫째, 군림하는 신이 아니라 설득하는 신으로 현대인에게 설득력이 있다. 과정신학은 불변의 실체로서의 세계를 부인하고 모든 만물이 상호교섭의 영향을 주고받으며 역동적으로 성장해가는 세계를 강조한다. 신도 홀로 존재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만물들의 자아실현 과정에 동참하는 신이며, 새로운 가능성으로 초대된 신이다. 그러나 과정신학의 신은 모든 만물의 자아실현 과정에서 강제적인 힘을 행사하는 분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아를 실현해가도록 설득하는 신이다.

 

둘째, 인간 스스로가 모든 문제에 책임을 질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책임을 인간의 자유와 그로 말미암은 악의 결과는 인간이 져야한다. 그러나 신은 이러한 인간의 악의 고통을 수용하여 새로운 희망과 대안으로 바꾸어 제시한다. 역할 분담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이 세상에서의 악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믿는 기독교적 신앙이 약화되고 있다.

 

셋째, 자연에 대한 변화된 의식은 생태학적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의 새로운 모형전환도 가능케 한다. 본래 세계관과 종교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와 같아서 새로운 자연이해로부터 종교가 새롭게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이다. 바로 그리핀은 새롭게 구성된 종교가 생태학적 영성을 담지 한 포스트모던적인 기독교임을 우리에게 역설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3.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의 문제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과정신학은 보편적 전통신학 혹은 고백적인 신학에서 볼 때는 다소 경도된 경향들을 발견하게 한다. 그 내용들을 짚어보려고 한다.

 

첫째, 과정신학에서 이해하는 신론은 범신론에 가깝다. 과정신학에서는 “세계가 없이는 신을 생각할 수 없고, 또한 신을 떠나서는 세계를 생각할 수 없으며, 세계가 세계가 되기 위해서 신을 필요로 함과 똑같이 신이 되기 위해서 세계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면에서 과정신학의 신론은 범신론에 가깝다. 과정신학은 전체를 신과 동일하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범신론과는 구별된다. 오히려 ‘범재신론’(汎在神論)으로 불리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이러한 신에 대한 이해는 아무래도 기독교의 전통 신론인 ‘유일신’ 신앙과도 배치되는 신학이다. 성서는 여호와만이 유일한 신앙의 대상임을 천명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출 20:3). 여기서 선포된 여호와는 유일한 신이며, 비교의 대상으로서의 신이 아니며, 전능하신 완전한 하나님이시다(출 20장, 창 17:1 ; 35:11). 이처럼 모세의 십계명이 확정되면서 이스라엘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 참 신이요, 그 외의 모든 신들은 참 신이 아니라 우상이라고 했다 그는 철학자들이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것과 같은 삶을 가지시지만, 사람과는 다르게 완전하시다. 신약에 이르러서도 유일신론은 변함이 없는 성서의 증거다. 예수 그리스도는 날 때부터 초인간적인 방법을 통하여 나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특이한 삶을 사셨다. 이는 구속의 과정이며, 이 구속사역을 할 때 혼자서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보냄을 받아서 그 일을 수행했다고 함으로써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구약에서 보이지 않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 신약에서 보이는 사람으로 모양으로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전통적 신론에 비추어 볼 때, 과정신학에 등장하는 신, 하느님은 유일신이라기보다는 범재신론으로 불리는 것이 적합하다.

 

둘째, 기독교의 전통 신앙은 창조론에 있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신학을 믿음으로 고백한다. 그 고백 속의 창조는 온전한 창조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안 바버를 비롯한 과정신학에서는 이러한 창조신앙에 대한 고백이 유예된다. 판넨베르크는 이것을 이렇게 정리했다.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유일회적이고 절대로 돌이킬 수 없으며, 바로 이를 통해 하느님의 역사가 드러나게 된다.” 유일회적인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것도 포함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 속에서 사건들이 ‘유사한 형태’로 또 ‘일정하게 반복되곤’ 하는 것을 보면,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법칙이라는 개념과 통하는 뭔가가 있는 듯 싶기도 하다”. 과정신학은 후자의 경우에 의탁하는 신학이다.

 

몰트만의 경우도 판넨베르크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하다. 몰트만은 “진화론을 통하여 얻게 된 자연 인식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전통적 창조론보다 더 분명하게 태초의 창조와 계속되는 창조와 영광의 나라에 있어서 창조의 완성을 구분해야 할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면서 몰트만은 “태초의 창조는 시간의 창조”이며, 시간은 “오직 변화에서만 나타나고 인지”되기 때문에 “태초의 창조는 변화의 창조”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진화의 우연과 목적 지향성은 하느님의 창조의 신학적 개념에 있어서 모순도 아니고 대립도 아닌 것”이 된다(위의 책). 이런 전개는 과정신학에게서도 그대로 전이되어 나타나는 신학이다. 몰트만은 더 언급하기를 “진화론들은 창조의 질서와 그리고 태초의 창조를 뒤따르는 ‘계속적 창조’에 해당” 되기에, 진화론은 “무로부터의 창조론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창조론에 대한 개방성은 진화론을 신학의 영역에 편승시키는 영역의 확대는 이루었지만, 그러나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실체는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더구나 성서의 온전한 창조(창 1:1, 시 19:1-4, 7)에 반하는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셋째, 새로움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존재한다. 화이트헤드는 “창조성은 ‘새로움’(novelty)의 원리이다”라고 정의하였다 "현실적인 계기는 그것이 통일하고 있는 ‘다자’에 있어서의 어떠한 존재와도 다른, 새로운 존재“라는 것이다(위의 책). 그러므로 ”창조성은 이접적인 방식의 우주인 다자의 내용에 새로움을 도입“하는 것이며,”창조성의 궁극적 원리가 그 창조성이 만들어내는 각각의 새로운 상황에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성서는 죄에 노출된 인간이 사는 세상에 스스로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새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후 5:17).

 

그러므로 이 새로움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외형적인 것인가, 내재적인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달리한다. 과정신학에서의 “현실적 존재의 ‘있음’은 그 ‘생성’에 의해서 구성”되는데, 이것은 “과정의 원리”이다. 이것은 새로움에 대해 신앙적인 면에서 전혀 다른 이해를 갖게 한다. 과정신학에서의 새로움은 결국 과정을 통해 변화된 외형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그러나 신앙에서의 새로움은 내면적인 것이며, 고백적인 가치를 갖는다.

 

과정신학에서의 새로움은 다시 변형되어 다시 새로움을 추구해야 할 존재로 전락할 것이지만, 신앙에서의 새로움은 그리스도를 통한 온전한 새로움의 추구여서 변형되지 않을 새로움이다. 화이트헤드 자신도 변화를 통해 항상 새로워야 하는 부담감을 피력한다. “유기체 철학의 형이상학적 학설에 있어 근본적인 점은 변화의 불변적 주체로서의 현실적 존재라는 개념이 완전히 폐기된다.”고 한다. 또한 과정신학의 한계 또는 부담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우주에 있어서의 모든 요소가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 결국 과정신학도 모든 것을 수용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는 이론의 한계와 장벽에 닿게 된다. 하느님의 새로움에 대해서는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2005/06/25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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