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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Essence by Levinas, Emmanuel 『존재와는 다른 것, 존재사건 저편』

by 뜨르k 2016.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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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Essence by Levinas, Emmanuel  
『존재와는 다른 것, 존재사건 저편』

 

 

『존재와는 다른 것, 존재 사건 저편』-ChⅠ.Ⅱ.- 에서 레비나스는 『존재와 다른 것 또는 존재 사건 저편』의 서두를 ‘존재와 다른 것’, ‘존재 사건 저편’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존재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레비나스는“존재사건(essence)은 이해관계(interest)”라고 본다. 라틴어 Esse(존재, 실재, 실체, 본질)는 존재사건 안에서 지속성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는 존재의 자기보존성을 나타낸다. 존재의 이해관계는 서로서로 투쟁하는 이기주의에서 역동성을 가지고 다수의 이기성이 결국은 전쟁을 낳는다. 따라서 전쟁은 본질적으로 이해관계의 각축이며, 행위이다. 이해관계의 존재사건으로 정의되는 존재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이와 같이 갈등을 빚고 있는 개념들은 그들이 속하게 되는 영역이 서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부딪치고, 파괴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존재와 다른 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존재사건을 지배하는 운명의 붕괴, 파괴의 가능성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레비나스는 『존재와는 다른 것』의 시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초월성이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존재사건(essence)이 존재와는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사실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도대체 어디로 이행해 가는가?

 

그것은 존재의 사태, 존재의 있음, 존재사건으로부터 ‘존재와는 다른 것에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의미할 수 있다. 초월성은 존재의 다름으로, 존재와는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다르게 존재하는 것(to be otherwise)이 아니라, 존재와는 다른 것(otherwise than Being)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존재의 타자란 과연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존재의 타자를 밝혀내기 위해서 현상학에서 시간과 존재의 본질이 그려내는 시간화의 오류를 지적한다. 현상학적 전통에서 존재는 기억역사를 통해 모든 다양성을 회복하는 시간과 달리 레비나스는 이 같은 현상학적 시간에서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 회복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모든 동시성에 저항하는 통시성, 초월의 통시성을 나타내 주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통시성은 결합의 거절이며, 총체화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기에 무한한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시간은 존재의 모호성이나 ‘존재와 다른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시간성은 존재사건이 아니라, 존재의 모호성 안에 유지되는 ‘존재의 타자’와 관련된다.

 

그렇다면 어떤 근거에서 시간은 시간화 되고, 초월성의 통시성, 존재와 다른 것의 통시성으로 나타나는가? 시간과 관련된 하나의 방식인 ‘회고回顧’가 절대적 통시성인 원-근원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레비나스는 “절대적 통시성인 원-근원은 기억이나 역사에 의해 회복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기억할 수 없고, 표현할 수도 없이, 비가시적으로 현재를 우회하는 과거는 회고로 회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가 멀리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란 현재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자를 위한, 다른 이의 자유에 대한 책임은 나를 타자에로, 그 장면의 첫 번째 사람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그에게 접근하도록 하며, 나를 그의 이웃으로 만든다. 그것은 존재와 마찬가지로 무와도 다른 것이다. 그것은 나의 의지에 저항하면서, 나에게 타자를 代贖(substitution)하도록 하면서 책임을 일깨운다. 나의 모든 내면성은 나 자신을 희생함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위한 형태로 던져진다.

 

시간의 시간성 안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은 단순히 기억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회복을 넘어선 노쇠함 같은 것으로, 돌아오지 않는 잃어버린 시간의 통시성이다. 현재와 비교할 수도 없고, 현재 안에 모을 수도 없이, 그것은 항상 이미 과거 속에 있다. 현재는 그 뒤에 뒤쳐지게 된다. 이 같은 이행의 방식은 우리가 痕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흔적은 이웃의 얼굴과 연관된다. 여기서 바로 심판과 기소되는 얼굴의 수수께끼가 있다. 이 같은 맥락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나의 이웃과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 타자적 존재와의 관계가 형성되며, 타자가 나를 지명하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나의 책임의 문제가 발생한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형태의 책임을 가까움의 책임으로 나타내며, 이 같은 책임을 어떤 것보다 더 근원적인 것, 어떤 위임보다도 이웃에 선행하는 의무로 본다. 이웃의 가까움으로부터 오는 책임의 형태는 자발성과 무관하게 영향받게 되는 존재방식을 나타낸다. 레비나스는 “능동적 의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이 같은 관계는 타자에 사로잡힘이다.”고 말한다.

 

시간의 통시성은 동일자가 동일자로 결합될 수 없는 동일성의 분열이다. 동일성의 대자성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아 안에서 동일자의 동일성은 자신의 희생, 선임, 지명된 사람의 고유성 형태로,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주체는 다른 이를 위한 것이다. 자아는 타자를 위한 것으로 되며, 자신의 존재는 소멸되어간다

 

『존재와는 다른 것, 존재사건 저편』Ch Ⅲ.-Ⅵ.

 

『존재와는 다른 것, 존재사건 저편』Ch Ⅲ.-Ⅵ. 에서 인상 깊은 언어는 몸, 인간의 정신(psyche), 감성과 소유. 육화(incarnation), 책임과 대속, me 등이다. 여기에서 레비나스는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왜 전통철학이 배재한 살과 피를 지닌 몸을 부각시키는가? 여기에는 레비나스의 분명한 의도가 들어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몸적 존재로서의 주체야말로 신체이며, 피이고, 먹고, 빵을 나누고, 자신의 피와 살을 줄 수 있는 존재이다. 어떻게 타자에게 살과 피를 줄 수 있는가? 예수의 대속적 피와 살인가? 아니면 예수가 행했던 것처럼 인식을 거부하는 장치인가?

 

또한 레비나스는 인간의 정신(psyche)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것 역시 타자를 위한 의미 부여이다. 레비나스에게서 정신은 동일성을 약화시켜 주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 동일성의 약화란 타자에게 소외되고, 타자에게 종속되는 것으로서 동일자의 포기가 아니라, 타자에게 응답하는 자아로서의 의미이다. 이와 같이 응답으로서의 동일성은 ‘타자를 위한 책임’으로 발생하며, 타자에게 봉사하는데서 발생한다. 심지어는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영혼 안의 정신은 내 안의 타자이며, 동일성의 멜로디이며, 타자를 위한 동일자이며, 타자에 의한 동일자이다. 그것이 바로 代贖이다. 무슨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책을 읽는 느낌이다. 타자와의 합일의 경지 ! 인간의 정신(psyche)마저 새롭게 해석하면서 타자를 위한 레비나스!! 정신뿐만 아니라, 미각․후각․먹는 것․향유하는 것의 의미 역시 ‘타자를 위한 존재’의 의미에서 찾고자 한다. 그러면 감성은 보라. 감성은 ‘다른 이의 필요에, 즉 그의 불운함과 잘못을 배려함’으로써, 즉 주는 것으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주는 것은 나 자신을 희생하면서 나로부터 찢어내는 것일 때만 의미를 가진다. 또한 감성은 타자에게 노출되는 것, 보여 지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감성은 타자에 의해 영향 받는 것이다. 감성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개념은 ‘가까움’이다. 가까움은 접촉보다도 더 가까운 것이며, 모든 과거적 현재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레비나스의 말을 들어보자. 사물의 외재성에 관한 인식은 가까움에서 유지되지만, 가까움의 경험이나 주체가 대상에 대하여 가지는 인식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적 환경의 표상도 아니며, 제3자에 의해 관찰될 수 있는, 또는 나에 의해 연역될 수 있는 공간적 환경의 객관적 사실도 아니다. 주제화 되지 않는 가까움은 경험의 잠재성과 같은 접촉의 지평에 속한 것도 아니다. 감성 - 가까움, 직접성, 불안 - 은 의식을 몸과의 관계로 놓는 통각(Apperception)으로부터 구성되지 않는다. 육체의 감각적 경험은 처음부터 육화 되어 있다. 감성적인 것-모성, 상처의 가능성, 염려-는 육화의 끈을 자아의 통각보다 더 큰 구성에 연결시킨다. 이 같은 구성에서 나는 나의 몸에 묶인 존재이기 이전에 타자에게 구속된다.

 

더 나아가 레비나스는 주체성을 ‘me’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me’는 언어구조에서 목적격에 해당하는 것으로 ‘타자를 향해 있는 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me’는 너와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명칭이자, 말하고 있는 너에 의해서 붙여진 것이다. 그러면 레비나스가 말하는 육화(incarnation)는 무엇인가? 타자의 절박성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나의 존재를 넘어서는 의무이자, 빚이다. 여기서 의무는 소유를 넘어, 주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이 같은 전환을 레비나스는 육화(incarnation)로 본다. 레비나스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전환을 통해 새롭게 형성되는 윤리적 자아는 자기이해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존재, 박해받는 고통 속에서 타자의 고통을 돌아보고, 그의 고통에 대해 책임을 감수하는 존재이다. 결국 ‘윤리적 자아’는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과 선택으로부터 초래된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존재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 기존 윤리학은 구체적 얼굴로 나타나는 인간에 대한 윤리이기보다는 보편적 인간, 인간의 이념 일반에로 향하게 되어, 구체성과 실천으로부터 괴리되는 윤리학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감성과 얼굴로 나타나는 레비나스의 윤리는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나눠주고,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는 구체적인 베풂의 윤리, 실천윤리로 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윤리적 주체의 주체성은 에고(ego)가 아니라, 타자에 의해 지칭되는 대명사 ‘me’에 있다. 얼마나 멋진 복음인가? 비록 원본대로 실천하기 어렵다 할지라고 ......기독교인들의 윤리적 무감감성에 대한 진정한 복음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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