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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인문학▣/종교철학산책

찰스 하트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by 뜨르 K 2016.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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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하트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제1장 하나님에 관한 여섯 가지 일반적 오류

 

하트숀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아무런 의식 없이 믿어왔던 하나님 신앙에 대해서 과연 적절한 믿음이었는가 하고 물음을 제기한다. 그는 화이트 헤드의 과정철학을 바탕으로 잘못 이해된 전통적 개념의 하나님에 대해 부정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새롭게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다. 사실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성서적이라기보다는 희랍과 중세의 철학사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희랍의 철학적 개념에 의한 전통적 신관은 현대인에게는 도무지 설득력도 없고 신뢰할 수도 없으며 적절한 것도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트숀은 그동안 잘못 사용되어 온 하나님에 대한 여섯 가지 신학적 오류에 대하여 지적한다. 먼저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변함이 없으시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전통적 개념대로 말한다면 완전하다는 것은 더 이상 변할 것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히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변함이 없으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완전하시고 변함이 없으시다는 말은 그의 우리를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의에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무조건 절대적으로 이 말을 사용한데에 신학적 실수가 있다는 것이다. 세계와 역사는 지금도 계속 발전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이 발전되어가는 세상에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이미 과거에 그의 할 일을 완전히 다 끝마치셨기에 할 일이 없으시다면, 또 그럴 필요도 없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또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만약 내가 갑자기 암으로 죽는다면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인가? 그리고 우리의 모든 미래까지 나 알고 계시다면, 그래서 내가 어떻게 나갈 것이라는 것을 다 알고 계시다면, 또 그렇게 정해진 것이라면 오늘 내가 땀 흘려 일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만약 어떤 사람이 성실하게 살다가 갑자기 비참하게 죽었다면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죽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다 알고 계셨지만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어쩔 줄 모르면서 고통 속에 있었다면 우리의 기분이 어떨까? 또 전통적으로는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인간이 갖는 아픔, 고통, 슬픔 등의 불완전한 인간이 갖는 감정을 가지고 계시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약하고 완전하지 못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정도 없으신 하나님, 그래서 인간의 기쁨과 슬픔, 불행에 대해서 영향을 받지 않으시다면, 그리고 내가 당하는 고통을 당하시지 않으신다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줄 수 있겠는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서로 영향을 받으며 또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과 아픔, 슬픔과 기쁨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일 우리에게 영향력만 미치고, 우리의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느끼지 못하는 자가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을 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방적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이미 다른 형태의 폭력이 아닐까?

 

신의 무오한 계시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에 그가 우리에게 보내는 계시 역시 절대 무오한 것이다. 그러나 그 무오한 계시를 받는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의 현상태는 온갖 부조리와 잘못투성이다.

아무리 무오한 계시를 보낸다 하더라도 잘못투성이인 인간은 그 계시를 받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인간은 인간의 수만큼 다양함을 가지고 있다. 역사상 자기 계시의 절대성을 고집하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경우를 우리는 수 없이 보아왔다. 유한한 인간은 오직 자기의 한계내에서 계시를 받을 뿐이다.

 

제2장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플라톤의 두 개의 신개념으로부터 화이트헤드의 원초적이고 결과적인 신성에 대한 생각으로 하트숀의 이중적인 초월론이 도출된다. 과연 플라톤은 우주를 신에 몸으로서 ‘세계정신’이라고 부르는 신적 정신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았다. 플라톤의 신은 두 개의 신을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 신은 조물주라고 불리 우는 순전히 영원한 신으로서의 ‘세계정신’그 자체를 포함하여 모두 영원하지 않는 것들을 창조한 신이다. 하트숀은 신의 몸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에 대한 생각은 아날로지나 은유를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인간을 초월한 것에 대한 생각을 사람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의 우주적 몸은 개인들의 사회이며 하나의 개체가 아니다. 종합된 개체로서의 세상은 보통 적절하게 사용되는 단어로서의 ‘세상’이 아니고 신이다. 사람의 몸이라는 사회와는 달리 신의 몸이라는 사회는 세포나 분자 같은 여러 가지 인간 이하의 요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세포 식물과 동물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과 거의 비슷한 침팬지, 고래 등 그리고 우주의 수많은 별들에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형태의 생물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 자식간의 아날로지를 고려한다고 해도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가 신성의 상징에 훨씬 더 가깝다라는 것은 충분히 명확하다. 태아 어머니의 관계가 태아-아버지의 관계보다 결정적으로 더욱 친밀하다. 여기서 하트숀은 사랑이라는 개념을 끌어드리는데 사랑이 신을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연결시켜 주고 정신-몸의 세포의 관계 또는 극도의 일반성을 가지고 말하면 모든 관계 즉 피조물과 피조물, 피조물과 창조자,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에 모두 적용될 수 있다. 이원론에서 벗어난 두 개의 개념, 물질주의와 정신주의 중에 정신주의가 명확히 우위에 선다. 그것이 더욱 지성적인 일원론이다.

 

제 3장 진화를 통한 창조

 

하트숀은 진화론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어떤 원인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결정론을 비판하고 있다. 진화라는 것은 신 없이는 완전히 이성적으로 생각된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좀 작은 자유들을 다루는 최상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할 때, 확실히 자연에는 기회의 요소가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자유로운 창조물과 함께 기회를 갖는다. 그것은 신이 모든 것을 만들고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창조는 완전한 무를 전제하지 않는다. 창조과정의 절대적 처음에 관한 개념에는 어려움이 많다. 그러한 시초에는 종교적 요구가 없다. 그것은 신의 창조력을 과거 결과의 한정적인 범위에 제한시키고 신을 제한하는 많은 것들 중의 하나이다. 하트숀에게서 우주라는 몸의 정신으로서의 신은 아기들처럼 그 자신은 포함하지 않는 어떤 세계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우주라는 몸의 어떠한 단계도 이미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전의 단계에서 비롯된다.

제 4장 자신과 이웃에 대한 같은 사랑,       

 

전적인 사랑에 대한 전적인 사랑

 

하트숀은 사회적 유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말한다. 그는 강압적이고, 보복하고 벌을 줌으로써 자기 세계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전제적 군주와 같은 개념의 하나님을 거부한다. 가장 훌륭한 부모는 아이를 지켜보며 자기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듯이, 또한 훌륭한 민주 대통령은 인격적 호소와 매력으로 그리고 탁월한 지혜와 관계 속에서 통치를 하듯이 하나님 역시 민주적 아버지, 민주적 대통령과 같이 그의 백성과 함께 사랑과 인격으로 이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사회적 관점에서 보지 않고 그저 은혜를 물 붓듯 쏟아 붓는 마술적인 기계처럼 보려고 한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을 찍어내는 기계일 뿐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고, 그것은 같이 마음을 아파하고 같이 교통하는 것이다. 하트숀이 이 책에서 말하려는 하나님은 바로 이같이 우리의 아픔에 함께 동참하며 인격과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아버지-어머니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포함한 우주적 사회를 전적인 선과 사랑으로 다스리신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 우리의 사랑을 묻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건방진 자선가처럼 일방적 사랑을 쏟아 붓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진정한 사랑은 그 아픔을 함께 느끼고 동참하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김상일 교수는 하트숀의 신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하나"(one)와 "많음"(many) 가운데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전개된 신관(神觀)을 과정 철학자인 찰스 하트숀(Charles Hartshorn)은 단일극성적 유신론(monopolar theism)이라고 했다. 즉 "하나"에 치우칠 때는 이신론(theism)이 되고, "많음"에 치우칠 때에는 범신론(pantheism)이 된다. 그리고 전자는 절대주의 (absolutivism)에 빠지고, 후자는 상대주의(relativism)에 빠지게 된다. "하나"와 "많음", 이신론과 범신론,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를 통전시켜 어느 한쪽 극도 질적으로 비하시키지 않는 신관을 하트숀은 양극성적 유신론(dipolar theism)이라고 했다. 하트숀에 의하면, 서양의 전통적 신관은 다음의 다섯가지 요소들에 의하여 결정되었다고 한다.

 

1. 신은 자기의식(consciousness)을 가지고 있는가?(C요소)
2. 신은 이 세계를 알고(knowing) 있는가?(K 요소)
3. 신은 이 세계(world)를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는가?(W 요소)
4. 신은 영원한가?(eternal)(E 요소)
5. 신은 변하는 시간(time)에 의해 제약을 받는가?(T 요소)

이 다섯 개의 ETCKW 요소들의 결합관계에 따라서 하트숀은 아홉 개의 전통신관을 다음과 같이 나열하였다. ETCKW : 범재신론(panentheism)(쉘링과 화이트헤드) EC :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관 E : 유출신관(플로티누스) ECKW : 전통 범신론(pantheism)(스피노자) ECK : 전통 이신론(어거스틴, 안셀름, 아퀴나스) ETCK(W) : 반범재신론(제임스) T(C)(K) : 알렉산더의 신관 T : 와이먼의 신관

 

물론 하트숀은 서양사상에 나타난 신관들을 중심하여 분류하였다. 하트숀은 과정철학적 신관을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이라 하면서, 위의 다섯 가지 요소들이 모두 이 신관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하트숀에 의하면 기독교의 유일신관은 '절단된 신관'이고 "하나"(one)와 "많음"(many) 가운데 "하나"(one)에 치우쳐 전개된 신관(神觀) 즉, 단일극성적 유신론(monopolar theism)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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