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Philosophical Series) by Emmanuel Levinas, Alphonso Lingis published by Duquesne University
『전체성과 무한』(Totalité et Infini) 동일자와 타자 부분을 읽고 난 다음 수많은 영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나는 단어를 열거해보면 동일자, 타자(the other), 타자성(alterity) 자유(freedom), 존재(being), 유한, 무한성, 자의성, 동일화(identification), 내재성, 외재성, 욕망(désir, desire), 초월, 언어, 대화, 레토릭, 진리, 분리(separation), 신, 얼굴(face), 형이상학, 전체성, 인간 등이다. 과연 레비나스 (E. Levinas) 이 많은 단어를 왜 사용하는가? 결국, 이 모든 단어는 타자를 위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레비나스 (E. Levinas)가 말하는 타자는 무엇인가?
레비나스 (E. Levinas)가 말하는 타자는 부버가 말하는 ‘너’와 구별된다. 타자는 나와 너의 친밀한 관계 속에 용해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레비나스(E. Levinas)가 말하는 타자는 나에게 거리를 두고 있고, 나에게 낯선 이로, 나의 삶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사람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나의 밖에는 과연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것을 레비나스 (E. Levinas)는 ‘외재성’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 있다. 외재성은 의식의 외부에서 마주치는 실재, 의식에 의해 침해될 수 없는 초월적 영역이다. 초월적 영역? 이것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신이나 신과 합일에 이를 때 사용하는 용어가 아닌가? 이런 질문이 가능한다. 타자가 신이란 말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레비나스 (E. Levinas)도 어느 정도 문제를 해소해 주기는 하지만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레비나스가 말하고 싶어하는 신은 욕망과 초월의 대상이지만 타인의 얼굴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럼 과연 타자를 통해 신을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레비나스(E. Levinas)는 인간과 관계없는 별개로 신에 관한 앎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신과의 관계는 인간에 대한 실체를 외면하고 불가능하다고 것이고 더 나아가 타자는 그의 얼굴에 의하여 얼굴 속에서 신 계시의 파고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신의 계시? 계시라는 단어는 조직신학에서는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잘못하면 범신론에 빠지게 되거나 아니면 범재신론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레비나스(E. Levinas)가 무한의 이념을 통해 자아와 타자를 분리하는 것은 타자를 동일자 속으로 끄집어들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오직 타자와의 사회적, 윤리적 관계를 통해서만 신이 우리에게 현현하며, 타자와의 관계가 신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아울러 타자와의 분리는 동시에 자아가 그 무엇으로부터 소외될 수 없는 독립적인 존재임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타자의 타자성(alterity)뿐만 아니라 자아의 자기성과 독립성이 인정되지 않으면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 즉 진정한 초월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레비나스(E. Levinas)는 철저하게 윤리적인 것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래서 유한한 사유와 무한의 이념 관계를 설명해 주는 개념으로 욕망이라는 단어를 끌어들인다. 이런 무한에 대한 욕망은 우정, 에로틱한 사랑, 부성애, 등 사랑의 감성적인 만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절박성의 엄격함이다. 칸트의 정언적 명령처럼 들린다. 레비나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타자는 처음에는 또한 궁극적으로도 우리가 포착할 수 있거나 주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타자를 보는 것에도, 타자를 포착하는 것-향유, 감수성, 소유의 방식-에도 있지 않다. 진리는 절대적 외재성이 스스로를 표현하면서 모습을 드러내는 초월 속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외재성의 움직임은 해방된 기호들 자체를 매순간 다시 취하여 해석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이러한 레비나스 (E. Levinas)의 관점은 신학이 마치 윤리학으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처럼 들린다. 물론 레비나스(E. Levinas)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형이상학적인 것과 인간’ 안에서 언급하고 있다. 레비나스에 있어 형이상학은 어떤 신비주의와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윤리학과 관련된 문제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신의 문제에서는 신학의 문제가 아닌가? 또한, 얼굴이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방식을 레비나스(E. Levinas)는 ‘계시’라고 부른다. ‘계시’라는 종교적 언어를 굳이 사용하고 있는 까닭은, 얼굴과 만남은 절대적 경험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얼굴은 나의 입장과 위치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는 가능성이다. 얼굴의 나타남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부여한 의미보다 타인의 존재 자체가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타자의 얼굴 출현은 그러므로 친밀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측면을 보여 준다. 타자는 나에 대해서 완전한 초월과 외재성이다. 또한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이다. 이 무한성은 익명성도 아니고 얼굴 배후에 있는 어떤 낯선 힘이 도사리고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무한성은 내가 다른 모든 사람과, 지금 여기에 부재한 제삼자와 맺는 구체적인 결속을 뜻한다. 가까이 있는 타자는 다른 모든 사람과 결속되어 있으므로 타자는 나와 마주한 너가 아니라 제 3자, 즉 ‘그’이다. ‘낯선 이’로서, ‘고아’와 ‘과부’로서의 타자의 얼굴은 보편적인 인간성을 열어주는 길이다. 타자의 얼굴에 직면할 때 나는 그곳에서 모든 사람을 만날 뿐만 아니라, 나의 재산과 기득권을 버림으로써 타자와 동등한 사람이 된다.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인간의 보편적 결속과 평등의 차원에 들어간다.
결론적으로 레비나스(E. Levinas)는 윤리적 평등과 형제애는 인간 사이의 대칭적 관계를 통해 구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가 당하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 나의 주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지나친 우대가 아닌가? 과연 이런 상태가 가능한가? 물론 성서적으로 볼 때 타당한 면이 있지만, 전적으로 타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체성과 무한』 - 외재성과 얼굴
레비나스는 외재성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타인의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를 ‘감성과 얼굴’에서 논하고 있다. 얼굴은 인간의 얼굴, 즉 존재자를 나타내고 얼굴은 단적으로 다른 사람의 존재를 보여 준다고 한다.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40대가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옛말이 떠오른다. 더욱이 타자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면서 주시한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은 현상이 아니라 현현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얼굴은 무엇을 현현하는가? 우리가 타인의 얼굴을 바라볼 때, 대상을 향하는 것처럼 나 자신을 타자에게로 돌릴 수 있다. 그러나 타자를 만나는 최고의 방법은 눈의 색깔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얼굴과의 관계는 얼굴이 무엇인가의 문제 즉 본질의 문제가 아니다. 이 같은 방식은 타인의 얼굴을 의식의 대상으로 삼을 뿐, 타자와 사회적 관계나 윤리적 관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얼굴은 근원적으로 의미, 컨텍스트 없는 의미를 현현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타자의 얼굴 정직함은 그가 문맥 속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본래 ‘하나의 인간임’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의미는 문맥과 관련된다. 어떤 것의 의미는 다른 것과의 관련 속에 있다. 그러나 얼굴은 얼굴 그 자체로서 모든 것을 의미한다. 과연 맞는 말인가? 타자의 얼굴은 상황에 따라서 변한다. 때로는 선한 얼굴이 되었다가 때로는 악한 얼굴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레비나스는 타자를 강조하기 위하여 ‘당신은 당신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의 얼굴은 나의 사유의 내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얼굴의 근원적 의미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시이다. 얼굴은 소유에 저항하며, 나의 힘에 저항한다. 그것의 현현에서, 표현 속에서, 감각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이해에 대한 총체적 저항으로 된다. 따라서 자아성(Egoity)은 타인과의 접촉에서만 그 존재를 벗어날 수 있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 갖는 윤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얼굴은 소유되기를 거부하고 나의 힘을 거부한다. 얼굴의 현현, 그 표현으로 감지되는 것들은 전적인 저항으로 변모한다. 이런 변화는 새로운 차원의 개막으로만 가능하다. 얼굴이 보여 주는 표현은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얼굴은 나에게 말을 걸고 소유를 하는 힘은 갖지 않은 어떤 관계로 나를 이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얼굴 대 얼굴(face to face)이란 인격적 관계 맺음이다. 부버가 말하는 ‘나-너’의 상호대등의 관계보다 구체화한 관계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얼굴 대 얼굴에는 그 외 다른 무엇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얼굴 속에 나타나는 혹은 얼굴 그 자체로서 나타나기도 하는 무한자의 관념이라는 것이다. 특히 레비나스가 타인의 얼굴에 대해 구하는 의미가 유대적 전통 안에서 신의 존재에 대해 구하는 답과 유사하다.
창세기 16장 13절에서 신의 이름의 의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라는 뜻이다. 하갈이 사막에서 헤매다 신의 음성을 들었을 때, “나를 지켜보고 있는 이”라고 신을 부른 것처럼, 타인이 얼굴은 그저 육신의 하나로서 나와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신의 현현을 읽는다. 즉, 타인의 얼굴은 그저 감각기관으로 인지되고 감지되는 대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이기성을 깨닫게 하고 일상적인 사물의 질서를 흩트려 놓는 그 무엇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봄으로써 나의 이기성을 일깨워 나에게 부끄러움을 갖게 만든다. 따라서 나는 타인의 얼굴에서 나를 부끄럽게 하고 명령하고 책망하는 신의 현현까지 보는 것이다. 타인의 얼굴에서 무한과 초월을 읽는 레비나스는 타인이 나에게 갖는 힘을 윤리적 저항이라고 표현한다. 엄밀히 말해서 타자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을 바로 그때 타자가 행사하는 고유한 맞대응을 윤리적 저항이라 불렀다. 윤리적 저항은 타자로부터 힘을 빼앗아오려는, 혹은 타자를 제거하려는 나의 은밀한 이기적 경향에 대항한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얼굴의 술어적 혹은 지시적 기능의 표현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기보다 호소하고 명령하는 힘에 대해 말한다.
레비나스는 랍비 요하난의 말을 인용한다. “음식 없이 사람을 남겨 두는 것은 어떤 상황으로도 변명 되지 않는 잘못이다. 여기서 자발적인 것과 비자발적인 것 사이의 차이는 적용되지 않는다.” 인간의 굶주림 앞에서 짊어지는 책임은 단순히 객관적으로도 알 수 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얼굴의 근원 어가 의무의 원초적 대화를 열어준다. 그것은 어떤 자아의 주관적 내면성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귀 기울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확신할 수밖에 없는 힘, 그리고 진정한 이성의 보편성을 발견하는 담론으로 들어가도록 의무 지우는 담론이다.
『전체성과 무한』 - 얼굴을 넘어서
『전체성과 무한』-얼굴을 넘어서-(CH.Ⅳ. Beyond the Face)에는 자아와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다루고 있다. 자아의 유한성의 문제를 자아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해결하려고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어떻게 타자가 자아에 죽음을 뛰어넘어 무한한 미래를 열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질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레비나스는 이러한 문제를 에로스와 생산성의 방식을 통하여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정말 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다는 전제 위에 타자로부터 실마리를 추적하자. 타자는 무한성을 지닌 존재로서 나에게 다가오며, 자아가 도덕적 책임을 깨닫게 해준다. 이 같은 관계는 에로스적 관계에서 발현되는 연인의 타자성과 관계, 또 나로부터 타자로 나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또는 형제애 적 평등의 관계에서 실현되는 우애적 공동체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랑의 이원적 관계는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에로스의 본질로서 연인의 결합 욕망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설명을 수용하지만, 이 같은 결합 욕구에도 불구하고 결코 하나로 결합할 수 없는 연인의 이원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에로스의 이원성으로 부른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타자와 욕망의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지만, 사랑과 욕망은 전체적이고 초월적인 타자의 외재성, 애인의 외재성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욕망의 관계를 넘어선다. 과연 사랑이 초월적인 타자의 외재성, 애인의 외재성을 전제한다고 할지라도 가능한 일인가? 몹시 어려운 문제이다. 또한 레비나스는 연인의 애무를 대상화의 작용이나 타자의 자유를 지배하는 행위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무는 감각적인 것을 초월하는 것, 끝없이 찾아 헤매는 것, 보이지 않는 것에로의 움직임으로 설명하고 있다. 과연 애무 자체에 감각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또한 레비나스는 에로스를 대상과 얼굴을 넘어서는 것으로, 단지 주체의 사상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은 미래로 향한다고 설명한다.
에로스의 운동은 ‘모든 모험으로부터 자신의 섬으로 돌아가는’ 율리시스 적 주체의 구조와는 다르다. 나는 나의 자아로의 회귀 없이, 스스로 다른 이의 자아를 발견한다. 에로스의 주체성이 경험하는 다차원적 상황은 욕망의 에로스와 초월의 에로스이다. 동시에 에로스의 주관성은 실체변화를 겪는 것으로 설명된다. 여기서 ‘실체변화’는 자아를 확신하는 힘으로 향하지 않는다. 이것은 無 인격적 존재, 중재자 안에서 생산되는 것도 아니다. 레비나스는 에로스를 통해 실체변화를 가져오는 근본적 구조를 출산을 통한 어린이와의 관계, 미래와의 관계로 설명한다. 에로스는 주체를 용서하며, 현재를 제공하는 어떤 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시작을 일으킴에 의해 주체를 현재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러므로 미래의 약속으로 생각되는 시간은 타자로부터 흐른다. 따라서 에로스는 단순히 타자성에 의존하는 관계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사랑의 관계는 서로를 욕망할지라도, 욕망의 관계를 넘어서는 관계가 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상대를 자기화할지라도, 연인의 타자성은 보존된다. 사랑과 출산은 어느 한쪽만으로는 생성이 불가하고 필연적으로 다른 한쪽의 대상을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남녀 어느 쪽도 완전한 것은 못되고, 어느 한쪽도 우월한 존재일 수 없다.
『전체성과 무한』 - 내재성과 경제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내재성과 경제- 또한 여러 단어가 자리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2장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는 향유, 감성, 자아, 집, 몸, 거주, 노동, 소유, 분리, 요소, 내재성, 경제 등이다. 이러한 단어의 움직임은 분리를 통하여 내재성으로 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 과연 존재론을 전적으로 거부했는가? 존재론에 대한 흔적들을 2장『전체성과 무한』-내재성과 경제-에서 볼 수 있다. 인간은 향유적 자아로서 자기보존의 원리에 지배되는 한, 세계를 관리하고 노동하고 그 가운데서 집을 짓지만, 동시에 타자와 함께 거주하며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거주와 노동에는 사물을 전체화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경향이 엿보인다.
또한,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의 제2부 -내재성과 경제-에서 인간의 자기성(ipseity), 자아의 독립성이 실현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자아의 자기 확립 과정은 분리라는 개념으로 나타난다. 자기 스스로 선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타인과 사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고, 세계 안에서 자신이 설 자리를 소유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레비나스는 내재성이라고 말한다. 이같이 세계로부터 자신의 분리를 도모하고, 자신의 주거를 확보하는 자아의 원초적 상태는 향유라고 표현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향유적 자아의 관점으로부터 행복의 이기주의를 설명한다. 행복은 앞에서 타자의 영양과 관련지어 설명되었다. 행복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지, 억제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각자 그 자신을 위해서”(each for himself)라는 표현에 있는 것처럼 그 자신을 위한다. 그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귀를 갖지 않은 굶주린 이가 빵 한 조각을 위해서 살인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자신을 위한다. 과식하는 사람이 배고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이방인과 같이 접근하는 것처럼 그 자신을 위한다. 따라서 향유하는 것의 자기 충족성은 이기주의, 동일자의 동일성의 지표이다. 향유 안에서 나는 절대적으로 나 자신이다. 타자에 대한 참조가 없는 이기주의자인 나는 고독할 것도 없이 나 혼자이다. 타자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도 아니고, 나에 관한 것으로서도 아니고, 전적으로 타자에 대하여 귀를 막고, 모든 의사소통의 바깥에서 모든 소통을 거부하면서 나 혼자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의 철학이 또 주체 철학의 늪에 빠졌단 말인가? 레비나스는 몸이라는 장치를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한다, 레비나스는 자아의 내재성을 형성해주면서 자아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곳을 몸으로 본다. 몸적 존재의 독립성은 세계에 대한 사유에서가 아니라, 욕구충족을 위한 의존과 욕구충족의 궁극성에 있다. 몸은 나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나의 존재의 내재성과 외재성의 경계를 나타낸다. 정말 몸은 나의 소유가 아닌가? 몸적 존재는 한편 요소의 익명성과 불확실성으로부터 불안과 위협을 느낀다. 이와 같은 불가해한 익명에 의한 요소들은 노동을 통해 동일화의 세계로 전환되며, 나의 소유로 전환된다. 노동과 소유 때문에 향유적 존재는 의식과 주거의 구체화로 나타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레비나스는 집이야말로 향유적 자아의 몸적 존재의 완성이자 분리로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친밀성이 타자의 얼굴 안에 생산될 수 있을까? 타자의 현존재는 이미 언어와 초월성이 아닌가. 그리고 생명체로서의 몸된 존재의 존재 양태가 전체성을 띨 수밖에 없다면 타자로 이행한다는 것, 타자에 대한 욕망, 타자에로의 초월 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서 레비나스는 몸은 그것을 나라고 말할 수 없고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으며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이를 “존재의 바깥에 존재의 무게 중심을 두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레비나스는 몸을 통하여 타자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레비나스는 인간의 자족적이고 자율적인 이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이성에 앞선 감성, 의식에 앞선 몸이 인간에게 더 근원적이라는 사실로 출발한다. 우리 신앙은 얼마나 이성적인가? 성서가 말하는 신앙은 이성적인 신앙만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추상적이고 관념적 자아가 아닌 몸적 존재로서 인간에게서 타인에게 노출된 타인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신의 빵, 자신의 살,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의 윤리적 실천이다.
『전체성과 무한』의 Ⅳ부에서 ‘생산성’,
또한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의 Ⅳ부에서 ‘생산성’, ‘새로운 시간성’, ‘실체변화’를 관련해서 말하고 있다. 주체와 미래의 관계는 에로스와 출산의 관계를 통해 설명된다. 에로스의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은 에로스가 출산과 관련되는 것이다. 미래로의 초월성을 낳는 것은 성애적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통한 출산의 본래적 현상인 어린이와의 관계를 통해 가능해진다. 이 같은 관계를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 자신의 것이면서 나의 것이 아닌 것, 나 자신의 가능성이면서 또한 타자의 가능성이자 사랑하는 이의 가능성인, 나의 미래는 가능성의 논리적 본질로 진입하지 않는다. 이처럼 가능한 것에 대한 힘으로 환원할 수 없는 미래와의 관계를 우리는 출산으로 부를 수 있다. 생산성은 내가 파악할 수 있는 것들 - 나의 가능성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미래를 가리키지만, 동일자의 미래가 아니다.
레비나스가 ‘에로스의 출산’의 현상을 통해서 새로운 형태의 타자성 관계를 발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까지 레비나스에서 타자성과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다른 타인을 인정하는 문제였다면, 에로스의 출산을 통해 논의되는 미래 타자성의 관계는 불연속성을 띨지라도, ‘타자 안의 나’를 깨닫는 관계이다. 출산을 통해 존재하는 어린이는 나의 죽음을 넘어서 살고, 부단히 재개되는 시간으로서 절대적인 미래와 즉 무한한 미래의 시간과 관계한다. 그러므로 생산성은 보편적 역사의 순환을 파괴하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을 생산해낸다. 여기서 출산의 생산성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우리는 출산을 통한 미래와의 관계 덕분에, 끝없는 반복과 노쇠함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다. 즉 인간 주체는 죽음을 초월해간다.
레비나스는 “출산을 통해 형성되는 인간의 상호주관성은 자아가 자신의 자아를 벗어 던지는 지평을 열어준다.”라고 한다. 여기에서 출산을 통해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은 단순히 집합적인 것도 아니며 또한 다원성에 대립하지도 않는 유대를 보여 준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아들은 시나 사물과 같은 나의 작품인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아이를 소유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비록 아버지일지라도 아들을 자기화할 수 없다는 데서, 낯선 이와의 관계이지만, 낯선 이는 동시에 다자적 존재이면서 나이고, 나와 자아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닌 존재이다. 레비나스는 “모든 사람이 형제라는 것이 나의 고유성을 구성한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아로서의 나의 위치는 ‘우애’에서 실현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형제애적 우애에서 형성되는 얼굴의 관계에서, 타자는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나타내며, 사회적 질서를 형성한다. 사회질서를 다지는 사랑과 출산과 가족의 관계에서 나의 자아는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약속하게 되고, 선의 부름을 받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레비나스가 왜 인류의 우애를 정의로운 사회뿐만 아니라 마주보기의 관계에서 선의 실현을 위한 가능 조건으로 보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보면 레비나스가 선의 실현을 위하여 얼마나 고뇌했는지 엿볼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 외재성은 단지 내재성의 변증법적인 이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통하여 통일과 동일성 그리고 힘, 전쟁과 폭력의 전통 속에서 모든 형이상학을 지배해 왔던 동일자와 타자의 변증법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데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오직 통시성의 범 주 속에서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 통시성의 범주 속에서는 서로가 시간 속에서 분리되고 서로에게 다다를 수 없어 언제나 타자를 향해 말을 건널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과잉, 초월, 너머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도 전체성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전체성을 깨뜨리는 것이 화해의 시도에 응답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갇힘의 순환 그리고 동어반복의 지배구조를 끊고자 했다. 전체성 안에서는 타자에 대한 접근의 불가능 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가 '무한한 대화' 속에서는 절대로 '너'를 만날 수 없다는 통찰이다. 여기서 무한함은 누군가가 말을 걸어올 때만 존재하는 대화자의 가능성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레비나스 말이 현대사회에서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적용될 수 있는가? 혹은 얼마나 인간이 자기의 이기적인 욕구를 제한하고 타자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독자의 몫이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던져야만 레비나스가 말하고자하는 말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014/11/20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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