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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인문학▣/종교철학산책

레비나스의 존재에서 존재자로

by 뜨르 K 2016.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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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의 존재에서 존재자로

 

 

타자성의 철학으로 유명한 레비나스는 왜 『존재에서 존재자로』라는 제목을 달고 있을까 ? 이 책의 제목을 이해하는 것이 이 책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이 책의 핵심적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는 익명적인 “존재”로부터 일종의 “존재자”인 자아가 어떻게 새롭게 태어나면서 이러한 자아가 자신과는 구별되는 “존재자”인 절대적 타자를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책이 이처럼 “존재”로부터 “존재자”가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바로 『존재에서 존재자로』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피로, 휴식, 잠 등의 현상을 분석하면서 어떻게 이러한 현상 속에서 자아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가를 해명하려 시도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레비나스의 분석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으며 성공적인지는 문제이다.

 

 

혹자는 이러한 레비나스의 분석이 상당히 혼란스러우며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가 피로, 휴식, 잠 등의 현상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자아가 새롭게 태어나면서 익명적 “존재”로부터 “존재자”가 출현하는 사건의 단순한 “형식적” 구조를 해명함에 있어서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레비나스는 이 책에서 “존재에서 존재자로”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 이외에도, 새롭게 태어난 자아가 절대적 타자와 맺을 수 있는 관계의 구조 및 이러한 관계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의 구조도 분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레비나스는 “존재”로부터 “존재자”가 출현을 어떻게 전개하고 있는가? 이 문제는 하이데거을 도외시 하고서는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에게 공통된 문제는 동일화의 논리와 인식을 통한 존재자의 지배이며, 공통된 물음은 "지배될 수 없는 존재자는 어떤 것인가?"이다. 어떻게 존재와의 차이와 거리를 제거하지 않고서도 존재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와 구별된다. 레비나스는 모든 차이들을 동일자로 환원시키는 전통 철학을 하이데거와는 달리 "내재성의 존재론"이라고 명명한다. 모든 존재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있는 존재의 성격은 따라서 전체성이다.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으며, 또한 어떠한 차이도 결국은 제거되고 지양될 것으로 파악하는 전체성의 철학은 "전쟁의 존재론"이라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맥락에서 존재자에게 지배될 수 없는 거리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타자에로의 초월을 전제하는 형이상학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레비나스가 대상화될 수 없는 존재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사유하기 위하여 하이데거와는 달리 "존재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철학은 그의 초기 철학을 대변하는 저서의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길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와 레비나스 철학의 차이는 동일한 문제설정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전통 철학을 형이상학으로 그리고 후자는 전통 철학을 존재론으로 파악하는 데에만 있는 것인가? 존재자에게서 완전히 대상화될 수 없고 또 지배될 수 없는 것을 하이데거는 존재라고 하고 레비나스는 타자라고 한다면, 존재와 타자는 동일한 사태에 대한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인가?. 레비나스는 "존재자에서 존재론의 근거"를 발견하고자 한다. 존재자는 인식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다. 존재자에게 인식될 수 없는 타자성은 따라서 항상 부재의 형식을 취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존재자에게 고유한 타자성의 현재를 "존재자 없는 존재"라고 명명한다. 하이데거가 망각된 존재론적 거리를 현존재의 선험적 개시성을 통해 상기시키고자 한다면, 레비나스는 전통 철학이 지향하고 있는 거리의 제거를 철저하게 실행한다. 인식될 수 있고 대상화될 수 있는 사물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나면 "무"(無)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부재의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부재의 현재"를 밤과 불면에 관한 현상학적 서술을 통해 명사화될 수 없는 익명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레비나스의 주장과는 달리 존재를 존재 자체로부터 사유하고자 하는 하이데거도 무를 존재의 결여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로부터 물러서 있는 존재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무는 "규정성의 단순한 결여가 아니라 피규정성의 본질적 불가능성"이라고 하는 하이데거의 명제는 아무런 이의 없이 레비나스의 존재와 타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는 모두 모든 것을 동일자로 환원하고 현재화하는 전통적 내재성의 철학에 대립하여 부재의 존재론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부재의 방식으로 있는 존재와 현재의 방식으로 있는 존재자는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세계 속에 현재하고 있는 인간은 어떻게 우리로부터 물러서는 존재 자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지각하고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관념을 제시한다면, 레비나스는 존재자에게서 대상화될 수 없는 타자성을 인정하는 윤리적 태도를 내놓는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차이는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자 없이 존재를 사유하는 존재론적 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다. 하이데거는 주지하다시피 존재의 익명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에스 깁트"(Es gibt)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에스"(Es)는 비인칭 주어이고, "깁트"는 '주다'는 뜻의 동사이다. 다시 말해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줌"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특정한 존재자가 있다는 것은 동시에 존재가 자신에 고유한 것을 내어준다는 "탈소유"의 사건이다.

 

 

이와는 반대로 레비나스는 특정한 존재자를 객체화하는 존재의 부재방식을 "Il y a"로 표현함으로써 "존재가짐"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익명성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본 욕망은 항상 "존재의 소유"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실존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존재의 본래적 성격이 박탈된다는 점에서--존재의 탈소유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존재의 성격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존재의 소유이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는 각각 존재론적 차이와 타자성을 강조함으로써 존재가 현재하고 부재하는 방식의 두 측면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존재자의 존재는 불가피한 사실이다. 익명적으로 나타나는 존재도 그 자체에 소유와 폭력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듯이, 존재자도 그 실존 방식에 있어서 소유와 지배의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존재로부터 존재자의 출현을 대체로 두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 첫째, 동사로 서술될 수 있는 존재의 익명적 사건으로부터 명사로 지칭할 수 있는 존재자의 출현은 존재에 대한 지배와 소유로 이해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존재자는 존재의 지배와 왜곡인 것이다. 둘째, 주체의 출현은 하나의 존재자로 서있을 수 있는 "자리잡기"(Hypostase)의 방식으로 실행되기 때문에 그것은 동시에 시간적 현재와 공간적 물질성의 출현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레비나스가 존재에 대해 존재자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의 거주를 연상시키는 자리잡기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실존방식이다. 자리잡기의 개념을 통해 레비나스는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지배가 결국 내재성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자리잡기의 사건은 현재이다"라는 레비나스의 핵심명제를 두 가지 방향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존재자의 현재는 지속적인 자리 잡기의 사건을 의미한다. 둘째, 존재자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존재는 지속적으로 소멸되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되는 순간의 현재를 형성한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지배는 결국 존재에 대한 예속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존재자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소유할지라도, 모든 것과의 만남을 통해 결국에는 자기 자신 안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재성은 실존과 실존의 작품과의 동일화를 의미한다. 다른 어떤 것과도 대체될 수 없는 실존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타자와 구별하는 주체의 "홀로서기"이다. 주체는 현재의 방식으로 있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나아갈 수 있으며, 지속적인 자리 잡기를 실행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즉 현재의 방식을 고집하는 주체는 자신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대가를 치루고 자유를 획득한다.


그렇다면 자리 잡기를 통해 얻은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주체의 내재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내재성은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모든 차이와 구별을 제거하는 전쟁과 지배를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레비나스가 추구하는 새로운 초월은 동일자인 자기 자신에로의 회귀가 아닌 타자로의 이행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존재 이편에 머물면서 동시에 존재자의 물질성을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재의 존재 초월은 그 속에 철저한 개인화의 가능성과 필연성이 있을 때" 진정한 초월이라고 말한 하이데거의 명제는 따라서 레비나스의 반-하이데거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타당한 것이다. 하이데거가 대상화될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실존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파악함으로써 자신으로의 회귀를 초월로 파악하였다면, 레비나스는 자신으로의 회귀는 항상 내재성과 전체성으로 귀결된다는 이유에서 절대 타자에로의 이행을 초월로 이해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자신에게서 타자성을 발견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염려의 가능성을 논구하였다면, 레비나스는 타인의 타자성을 인정할 때에만 주체의 진정한 홀로서기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존재로 본다면, 결국 인간의 존재는 바로 초월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의 초월의 형이상학이다.  2016/12/13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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