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하이데거와 토마스 아퀴나스: 형이상학 극복에 대한 시론
이 책은 존 카푸토의 형이상학의 극복에 관한 시론이다. 또한 이책은 하이데거와 토마스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의 의의와 한계를 탐색하는 책이다. 여기에서 존 카푸토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주요 개념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요 개념을 대결시킨다. 이 책의 특징은 하이데거의 가톨릭적 배경과 초기의 저술과 역정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스콜라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이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존재론에서 하이데거의 이해와 하이데거 입장에서 전통적 존재론을 이해하는 도움이 된다. 토마스와 하이데거 둘 사이의 문제는 하이데거가 토마스를 공격함으로 시작된다. 하이데거가 비판하기를 토마스 신학은 “존재망각”이라는 관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초점을 존재자(ens)에 두고 존재자체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으로 해체되고 신비적으로 재건된 토마스 아퀴나스와 하이데거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퀴나스에게 잠재적이고 에크하르트에게서 명백한 이러한 신비적 경향성을 하이데거와 동일시하고 싶지는 않다. 이 일은 아레테이아(비은폐성) 내의 레테(은폐성) 중요한 문제에 대한 돌아감에 의해서 행해질 수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의 은폐성, 곧 존재자들이 거기로부터 현전에로 나오는 그러한 철회된 심연은 어떤 최종적인 것이다. 그러한 어둠에 빛을 비출 수 있다고 기대될 수 있는 더욱 깊은 차원은 없다. 내맡김, 곧 이러한 신비적 심연에 대한 사유의 개방성은 사람들이 취할 수 궁극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암묵적이고 에크하르트에게는 명시적인 종교적 신비주의에 있어서는 사정이 이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사유자등에게 있어서 심연은 신의 신성 자체의 심연이고 그래서 만약 그 심연이 우리로부터 숨겨진다고 해도 그것은 신성 자체로부터 숨겨지는 게 아니라 신성의 심연 위에서 신은 그분 자신에게 알려진다. 거기 신성 자체에 있어서 존재와 사유의 은폐된 통일성이 지배하는 데 그 통일성은 눈도 본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는 것이다. 신 안의 심연과 신비에 관한 이야기는 있을 수 있지만 신에 대해서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 신은 신비이지만 그러나 신은 신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신비적이지 않다. 신성의 은폐된 심연은 신에게는 은폐되지 않는다. 그 심연이 바로 신이다. 거기서는 인간의 어떠한 낱말도 명명할 수 없는 그런 영원한 말씀이 발언된다. 종교적인 내맡김은 신비에의 개방성이지만 그러나 신비는 자신에게는 은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개방성, 자기-현전의 권역이며 이러한 점이 신앙인의 신앙이다. 신앙인에게 신이 언제나 심화되어가는 신비이며 어둠이다. 한편으로는 신비는 신앙인이 된 것에 대해 어떤 신뢰를 갖는 어둠이자 그가 거기서 비록 헤아릴 수 없는 손길이긴 하나의 사랑의 손길을 느낀다고 믿는 그런 어둠이다.
종교적 사유자에게 있어서 존재자-신-논리학의 용어로 표현할 때 신이 우리에 대한 신비이기는 하나 그 분 자신에 대한 신비이지는 않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자기-지식이 가능한 한 인격이 아니라 인간 사유 속에서 인간의 사유를 통해서만 자기-개방을 성취하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 까닭에 존재는 언제나 원칙적으로 하이데거에 있어서 우리에 대한 존재로, 즉 인간의 사유와 공속에 있어서 존재로 간주된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경험적이고 유한한 관점에로 회복 불능적으로 빠져있고 그래서 하이데거의 자체적인(quoad se)존재에 관해서는 심지어 신앙의 불확실성으로써 조차도 가능성이 없다. 존재는 언제나 사유와 그것과의 공속에 있어서의 존재이다. 따라서 존재와 사유가 모두가 이것들의 회복 불능 적으로 유한한 의미에 있어서만 받아들여진다. 이점이 왜 하이데거가 존재는 사유를 필요로 하다고 곧 존재는 자신의 자기-개방을 위해서 사유를 요구하는가의 이유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줄곧 하이데거에서의 존재는 자신을 인간의 사유 안에서 인간의 사유를 통해서 개시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언제나 유한하고 인간을 필요로 한다. 반면에 종교적 신비주의자의 존재는 신의 충만성이자 충분성이다. 하이데거 있어서 “신”은 이러한 트임 안에서 현상하거나 또는 이러한 뜨임 안에 있지 않은 채로 머문다. 그러나 신이 뜨임 자체는 아니다. 트임이 신의 선물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토마스 교설의 정점에 놓여있는 존재와 지성의 단순한 통일성은 본질적으로 시간과 역사를 넘어서는 것으로 발견된다. 이러한 합일(unio)은 가장 완전하게는 영원 속에서 아버지 나라에서 곧 시간 밖에서 영혼의 고향에서 일어난다.
토마스와 에크하르트에게서 있는 신과의 신비적 합일이 하이데거에 있는 존재와 사유와의 공속과 혼돈될 수 없다. 신은 토마스에게는 역사적인 트임의 한 함수로 간주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은 시간을 지배하고 역사의 주인이다. 창조된 세계는 신적인 존재의 모방이고 창조물의 목표는 에크하르가 말했듯이 창조되기 이전에 신의 마음속의 이데아에 불과할 때 신에 대해 지녔던 원본적 합일을 다시 찾는 것이다. 창조는 복귀에 의해 뒤따라져야 한다. 그 점이 신학대전과 에크하르트의 설교들의 건축술 적 원리이다. 토마스의 신은 사건에 의해 허용되어야 한다. 2016/12/08/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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