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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동 헌책방골목 중부교회와 민주화 운동(부마민주항쟁, 6월 민주항쟁) – 최성묵 평전을 읽으면서 -

by 뜨르k 2020.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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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 민주항쟁 41주년을 맞이하며........

 

보수동 헌책방 골목 중부교회와 민주화 운동 (부마민주항쟁, 6월 민주항쟁) – 최성묵 평전을 읽으면서 

 

말씀은 몸을 통해서만 말한다.
그러나 패러독스는 몸이 부서져야만 말씀이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은 몸을 부수면서 다른 몸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 잔인한 리듬이 현존의 역사다
- 오재식

 

6월 민주항쟁 (왼쪽부터 문재인, 노무현, 최성묵)

1979년 10월 26일, 부마항쟁으로 계엄군의 총칼로 진압된 지 7일째 되던 날, 게엄 사령부 합동수사본부가 사용하고 있는 부산시 중구 영주동의  보안사 건물 밀실에는 중년의 한 사나이가 책상 앞에 놓인 철재의자에 앉아 있었다..... 사나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상태였다. 며칠간 잠을 못 잤는지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눈꺼풀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워 거의 반쯤 감겨 있었다. 눈동자도 초점을 잃고 있었다. 얼굴은 부어서 푸석푸석했고 창백한 모습이었다. 두 다리는 퉁퉁 부어 올라 겉으로 보기에도 위태로워 보였다..... 이 사나이가 바로 부산 중부교회 목사 최성묵이었다. 부마항쟁이 해일처럼 부산과 마산을 휩쓸고 지나간 후 점령군처럼 들이닥친 계엄군은 보복에 굶주린 듯 시민들을 짓이겨대었다. 그리고 최성묵을 비롯한 부산의 재야인사들은 일시에 체포되어 밀실에 구금되었고 부마항쟁의 배후조종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수사가 진행될수룩 최성묵은 박정희 유신정권이 자신을 부마항쟁의 희생양으로 지목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 최성묵 평전  프롤로그에서 - 

 

부산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최성묵 목사의 평전이 몇 년 전에 출간되었지만, 오늘에야 접하고 평전을 읽으면서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평전의 이름은 『최성묵 평전』이다. 평전에는 그의 치열한 삶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암울한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 민주주의를 지켜온 한 개인의 올 고진 삶이 부마 민주항쟁 41주년을 맞이하여 되살아나는 듯하다.

필자와 부산중부교회 그리고 최성묵 목사와의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0년도 후반쯤이다. 대학가에서는 한창 학생운동이 한참일 때이다. 물론 필자 역시 전두환 정권 폭압에 맞서 학생운동(호헌철폐, 노동자 대투쟁, 6월 항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거의 2일 한 번 정도 데모) 그 당시 대학 운동권에서 최성묵 목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상태였다. 그런 분을 한번 만나 뵙고 싶어. 결국, 찾아갔다. 그리고 그분을 드디어 뵈었다. 첫 만남의 인상은 포근하고 친절했다. 자상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감시당하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교회 문제로 고민했던 필자에게 교회를 옮기려는 마음을 굳게 만들었다. 청년 때에 다닌 예장(k 측, 김해) 교단에서 고등학교 때 (구미) 다닌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 구미교회) 교단으로 옮기게 되었다. 물론 최성묵 목사의 영향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대략 3가지 이유에서이다. 20대 청년시절 보수교단 교회(예장 k 측, 김해)에 다닐 때 일이다.

첫째로 어느 날 겨울, 교회에 기도하려 들렸을 때 이야기이다. 교회 입구에서 노숙자 두 사람이 추위 때문인지 교회에 추위를 피하고자 좀 잘 수 있도록 저에게 부탁한다. 교회 목사님에게 말씀드렸더니 예장(k 측) 목사는 단호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에 성전을 허락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노숙자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교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20대 청년은 이런 목사의 말과 행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과연 성전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왜 교회가 있는가? 성전은 거룩하여서 예배 외에 행위는 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그때 당시 필자의 고민이었다. 둘째로 새누리 신문 보급이다. 새누리 신문은 1990년에 김관석(전 기독교방송사장) 대표가 창간한 신문으로서 아주 진보적인 기독교신문이었다. 진보적인 신문을 보수적인 교회에 보급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목사께서 새누리 신문을 빨갱이 신문이라고 지칭하면서 보급을 중단하도록 요구하였다. 하지만 교회 역시 사회에 대한 책임이 가져야 한다는 청년의 사명감으로 일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 역시 신앙에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셋째로 교회의 사회적 책임 문제이다. 보통 교회는 1년에 한 번 공동의회를 개최한다. 공동의회 자료를 보면 교회 전체 예산을 볼 수가 있다. 전체 예산 중 구제(사회선교)가 차지하는 비율을 어렴풋이 알 수 있는데 사회선교(구제) 예산이 전체 예산 중 1% 정도도 안 되는 것을 보고 분노한 일이 있었다. 공동의회 중에 이 문제에 대해 목사와 설전을 벌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결국, 다시 기장(부산중부교회) 교인이 되었다. (참고로 기장은 개신교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이다. 문익환 목사. 문동환 교수, 함석헌 함께한 김재준 교수. 장준하 선생, 이해학 목사, 홍근수 목사, 민주당 상임고문 김상근 목사 등을 배출한 교단이다) 한 마디로 중부교회는 영남의 민주화의 聖地였다. 그리고 최성묵 목사는 민주화 운동을 위해 헌신하신 영남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었다. 그분과 만남은 신앙의 눈으로 社會 矛盾을 극복하려는 자세가 무엇인지,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정의에 대한 구체적인 활동을 배우게 되었다. 또한 그분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길도 열렸다. 그래서인지 중부교회와 최성묵 목사는 결국 잊어서는 안 되는 내 생애에 중요한 하나의 사건으로 새겨졌있다. 이제 이 이야기는 이쯤 하고 1970 후반-80년대에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펼쳐진  민주화 운동의 초석이 된 양서협동조합, 부마 민주항쟁, 6월 민주항쟁 읽기를 최성묵 평전을 통하여 짧은 여행이나마 떠나보자.

부산 중부교회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 언덕에 자그마한 교회가 있다. 그 교회가 바로 부산지역 유신 독재를 향한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인 중부교회이다. 그리고 당시 교회의 정신적 지주인 최성묵 목사가 있었다.  최성묵 목사가 부임하기 이 전에도 이미 교인 중에 박정희 정권 폭압으로 1974년 4월 조성삼, 황대봉 교우가 긴급조치 1, 4호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1976년 2월에는 김영일, 조태원, 이태성 교우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리고 1978년 4월 4.19 부산대 선언문 배포사건으로 중부교회 청년 정외영, 이성동, 전중근, 서연자 구속되고 1979년 3월 국민연합 3.1절 선언문 배포사건으로 노경규, 조태원 교우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처럼 중부교회는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깊다.

민주화 운동이 치열해지면서 중부교회는 더욱 권력의 감시가 집중되었다. 최성묵을 감시하는 중부서의 황선홍 형사는 아예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런 이유로 부목사라는 별명까지 얻을 만큼 집중적으로 감시했다. (최성묵 평전, p176)

서울 민주화의 중심, 서울에 향린교회(기장)나 서울제일교회(기장)가 있다면 부산에는 중부교회가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된 사건이 바로 양서협동조합과 부림사건이다. 양서협동조합 출발도 중부교회 청년들이 중심 되었다.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양서 협동조합(약칭 양협) 운동이다. 양협은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모인 청년 그룹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양서를 매개로 한 소비자협동조합 운동이다. (최성묵 평전, p164)
1977년 10월 가칭‘부산 양서판매이용 협동조합’의 조직을 결의하고 발기회를 구성했고, 1977년 10월 12일부터 1978년 2월 4일까지 매주 한 번씩 모여 양협 준비를 위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세미나는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중부교회 친교 실에서 열렸으며..... 참고로 당시 부산 양협의 조합원들이 가장 많이 읽었던 서작들은 다음과 같다. 《어느 돌맹이의 외침》《전환시대의 논리》《저 낮은 곳을 향하여》《뜻으로 본 한국 역사》《백범일지》《노동의 새벽》《미국 노동운동 비사》《소외란 무엇인가》《피억압자를 위한 교육학》《씨알의 소리》《대화》(최성묵 평전, p163-166)

 

양서협동조합의 최초 제안자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고 출옥한 김형기(당시 중부교회 전도사)이다. 양협은 일종에 소비자 협동조합이고 문화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군사정권은 1979년 10월 부마 민주항쟁이 일어나자 양서협동조합 회원들을 부마 민주항쟁의 배후로 지목하고 책과 서류를 압수하였다. 그리고 조합원 300여 명을 연행하였다.

양서협동조합 협동서점

부마항쟁은 이런 상황에서 터져 나왔다. 1979년 10월 16일 오전 10시 수천 명의 부산대 학생이 교내에서 유신반대 시위를 벌였다. … 최성묵을 포함한 재야인사들은 일단 중부 경찰서로 끌려갔다. 김광일 변호사는 그 이후에 연행되어 바로 보안사로 갔다. 중부산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최성묵 등은 계엄 합동수사본부(합수부)로 이송되었다. (최성묵 평전, p180, 192) )

그 뒤 조합도 강제 해산시켰지만, 해산 이후도 조합에 몸담았던 회원들은 민주화 운동을 계속하였고 이것이 1981년 부림사건(釜林事件)까지 연결되어 결국 수십 명이 구속되었다. 그리고 1982년의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모자 문부식·김은숙도 양서조합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양서협동조합은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부산의 경찰과 정보기관은 부마항쟁 당시 부산의 민주화 운동 세력을 그들을 ‘부림사건’이라는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만들고자 했다. 이때 최성묵 목사는 부림사건 구속자 가족에게 기도회 장소를 제공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중부교회는 구속자 가족들에게 기도회 장소를 제공하고 마음을 위로해 주는 넉넉한 비빌 언덕이 되었다. 그럴 때 최성묵은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전두환 정권의 경찰은 수시로 그에게 압박을 가해왔고, 교인들은 음양으로 당국의 압력을 받았다.… 게다가 수시로 경찰이 교회를 봉쇄하거나 경계근무를 하다 보니 교회 주변의 주민들도 불편을 겪었다. (최성묵 평전, p248)
부림사건과 관련하여 특기할 일은 부산의 민주화 운동에 노무현이라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었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잘 나가는 조세 전문 변호사였는데 김광일 변호사 요청으로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최성묵을 알게 되었고 최성묵은 노 변호사를 전점식(전점석은 1970년대 후반 구미공단에서 산업선교활동을 하다 경찰의 탄압으로 구속되었다가 10.26 정변으로 풀려났다.) 등 후배들에게 소개했다. … 부림사건 초기에는 노 변호사는 전점석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 교도소에 가서 부림사건 학생들을 만나고 오는 길인데 좀 개전(改悛)의 정(情)을 보이면 좋을 텐데 자기들이 잘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됩니다. 그 친구들이 어떤 책을 읽고 그렇게 생각하는지  나도 그 책을 한번 읽어봐야 되겠습니다.” "변호사께서 그 책을 읽어보면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전점석은 그렇게 책 읽기를 권하고 책을 소개하기로 했다. 노 변호사는 그 책을 밤을 새워가면 읽었다. 그러면서 노 변호사는 점차 사회 모순에 눈뜨게 되었다. 노 변호사는 구속자 가족들이 기대하던 것 이상으로 열심히 변론했다. 때로는 변론이 너무 과감하게 해서 가족들이 조마조마할 때도 많았다.(최성묵 평전, p248-249)

동그라미 노무현, 문재인,  그리고 제일 오른쪽 최성묵

부산 민주시민협의회 등 여러 활동을 이끌어가면서 군부독재에 맞선 최성묵 목사는 6월 항쟁에서 온몸을 던져 투사의 모범을 보였다.

1987년 5월 20일 2시 당감성당에서 부산 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와 종교계, 학생, 노동자 등 1백 명이 모여 ‘호헌반대 민주 헌법 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가 결성되었다. 경찰의 원천봉쇄 때문에 참여자는 많지 않았지만 열기는 높았다. … 6월 8일에 확대 개편한 부산 국본의 상임대표는 부민협과 부산사선의 회장 최성묵이 맡았다. 상임 집행위원장은 노무현 변호사였고 집행위원들은 개신교, 천주교, 불교 그리고 법조계, 재야, 민가협, 민주당의 대표적인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최성묵 평전, p305-306)

중부교회 농성에 참여하고 있던 최성묵과 노무현, 김재규, 고호석 등 국본의 지도부는 항쟁의 열기를 이어갈 필요성과 경찰에 강제해산당했을 때 손실을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아침 6시가 넘어 노무현 당시 국본 상임집행위원장과 김재규 상임집행위원이 먼저 중부교회를 나서자 교회 밖에 진을 치고 있던 경찰이 두 사람을 연행하여 중부경찰서로 끌고 갔다. 교회 안의 농성단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격앙하여 자진 해산하려던 농성을 풀지 않고 두 사람의 석방을 요구했다. 결국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났고 농성도 그에 따라 자진 해산하였다.   (최성묵 평전, p309-310)

그렇다. 이 처럼 그는 십자가 행진으로 나치에 저항한 독일의 본회퍼 처럼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독재 권력에 맞서 싸우고 저항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굴복시킴으로써 현재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 필자는 평생에 걸쳐 민중과 민주주의에 헌신했던 최 목사의 삶을 통해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실천하는 종교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기독교계의 지도자만이 아닌 재야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또한, 민중과 함께 호흡하며 사회운동의 길을 실천하는 지도자이었다.  (한울장애인자활센터 설립)  부마 민주항쟁 41주년을 맞아 역사의 한 토막이 된 그분의 삶을 되새겼으면 한다. (최성묵 목사는 민주당 최고위원으로서 국민통합을 위해 노력하시다가 1992년 62세로 과로로 돌아가심)  현재에도 그가 남긴  책들이  필자의 서재에  꽂혀있다.  그 책을 볼 때마다 그분이 생각나고 그리워진다.

부마 민주항쟁 41주년을 맞이하며....... 2020/10/16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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