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방콕(Bangkok) 인문학 여행 1:
왕궁(Grand Place), 왓 프라깨우(Wat Phra Kaew, 에메랄드 사원),
왓포(Wat Pho), 왓 아룬(Wat Arun)
이번 인문학 여행은 동남아시아 태국이다. 동남아 여행은 신혼여행 때 필리핀을 제외하면 처음이다. 태국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동남아 관광지 중 하나다. 독특한 향신료 들어간 요리와 열대과일이 풍부하다. 더욱이 자연경관이 뛰어날 뿐 아니라 쇼핑 등을 즐길 수 있어서 전 세계인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태국 방콕 인문학 여행은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뒤로하고 종교 사적 위주로 전개할 것이다. 본격적으로 여행에 앞서 태국에 대해 대략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태국은 특이한 나라이다. 모든 상황을 살펴보면 불교가 국교인 듯하지만, 국교가 아니다. 분명,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허락하는 종교도 따로 있다. 불교, 시크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이 5개 종교만이다. 그중에서도 불교가 전체 인구의 95%이다. 심지어 국왕은 반드시 불교(佛敎) 신자이어야 한다. 태국 문화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특히 남성들은 일생에 한 번이라도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어야 할 정도다. 물론 국가에서 법으로 규제하는 것이 아니어도 말이다.
한국 유명한 2PM 가수로 활동하는 태국 출신 닉쿤도 어린 시절에 삭발 후 출가한 적이 있다고 한다. 더 특이한 것은 태국 승려들은 머리카락뿐 아니라 눈썹까지 삭발한다는 것이다.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다. 이처럼 태국인들은 어릴 때부터 불교문화에 깊이 젖어 있다. 방콕 도시철도 BTS를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좌석에 임산부, 노약자와 함께 승려 좌석도 배려석에 분류해 놓았기 때문이다. 태국 등 동남아 불교는 동북아의 대승불교(大乘佛敎)와 달리 보통 소승불교(小乘佛敎)이다. 태국 절을 보면 우리나라 대승불교만 보았던 우리에게는 조금 생경한 장면이 눈에 띈다. 금박을 붙이고 합장한 손에 연꽃을 끼우는 등 행위가 필자에게도 매우 낯선 풍경이다. 또한, 태국의 절들은 우리가 상상한 이상으로 정말 크다. 절 규모가 보통 대학 캠퍼스만 할 정도이니 말이다. 뒤에 언급할 왓아룬과 왓포를 보면 그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런 유적이 모여 있는 곳이 올드 시티로서 태국의 랏따나꼬신 지역이다. 랏따나꼬신은 차오프라야강과 운하로 둘러싸인 작은 섬으로 1782년 라마 1세 짜끄리 시대에 이곳에 도시가 세워졌다고 알려졌다. 태국의 전성기였던 아유타야 시대의 왕조를 본떠 만들었다고 성벽을 쌓아 외부 침입도 막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럼 천천히 태국의 관광 명소인 왕궁 및 왓 프라깨우로 들어가 보자.
누구나 제일 먼저 방문하고 싶은 장소는 왕궁일 것이다. 왕궁은 그만큼 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매력 있는 장소이고 태국인에게 신성한 장소이기도 하다. 외국 방문자 역시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반바지나 민소매 차림은 입장을 할 수 없다. 왕국의 총면적은 218,000 평방미터(약 6,6000평)로 둘레가 무려 1,900m에 달하는 규모로 우리나라 대구에 있는 수성 못 크기와 거의 비슷하다. 왕국은 방콕이 수도가 된 해인 1782년 왕궁의 탄생과 함께 짜끄리 왕조의 호국 절로써 건축되었다. 주로 왕족의 주거를 위한 궁전, 왕과 대신들의 업무 집행을 위한 건물, 왕실 전용 에메랄드 사원, 옥좌가 안치된 여러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짜오프라야강 서쪽 새벽 사원 근처에 있는 톤부리왕조가 끊어지게 되자 짝끄리 왕조를 세운 라마 1세는 민심을 수습하고 왕권의 확립과 아유타야 시대의 영광과 번영을 재건하고자 강 건너 현 위치로 천도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천도를 결심하자 왕은 즉시 명령을 내려 이곳에 왕국을 건설하도록 하였다. 1782년 왕궁 일부가 완성되자 바로 이곳에서 라마 1세의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왕족의 거주를 위한 궁전과 업무 수행에 필요한 건물을 가장 먼저 건축하였는데 그중 제일 먼저 준공된 두 건물은 왕조가 안치되어 있는 “두씻 마하 쁘리쌋”과 “프리 마하 몬티연”이다.
왓 프라깨우(Wat Phra Kaew, 에메랄드 사원)
왕궁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가장 먼저 왕실의 사원인 '왓 프라깨우'가 나온다. 왕궁의 입구에서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왓 프라깨우'는 일명 에메랄드 사원(Temple of the Emerald Buddha)이라고 부른다. 왕궁의 북쪽에 있다. 그리고 왕궁과 직접 연결되어 있어서 왕궁에 가기 위해서는 반듯이 이 통로를 걸쳐야 한다. 에메랄드 사원의 공식 명칭은 왓 프라시랏타나삿사다람(Wat Phra Sri Rattana Satsadaram)이다. 이곳은 왕의 제사를 지내는 일종의 왕실 수호 사원이다. 사원 소속도 왕궁에 속해 있다. 그래서인지 승려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직접 관리하고 사원에는 승려가 없다. 대웅전 본당 우보솟(Ubosoth)에는 에메랄드 불상이 있다. 실제로는 에메랄드빛을 띠고 있지만, 사실은 에메랄드가 아닌 '벽옥(푸른색 옥)'이다! 녹색의 옥을 깎아 만든 것이다. 왕만이 그 불상을 만질 수 있어서인지 태국인들은 이 에메랄드 불상을 국왕의 수호신으로 여긴다. 그리고 1년에 세 차례 국왕이 직접 불상의 옷을 갈아입히는 의식을 집행한다. 이처럼 태국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 중의 하나로 에메랄드 사원, 왓 프라깨우(Wat Phra Kaew)가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이곳은 경건하고 기도하는 장소로 경내에서 최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 물론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다. 에메랄드 불상 본존의 높이는 75cm, 폭은 45cm이다. 이 불상은 1434년 태국 북부 치앙라이에 있는 무너진 탑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만 해도 이 불상은 흰 석고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저 평범한 불상으로 여겼다. 그러다가 탑에 벼락이 떨어져 석고가 벗겨지면서 녹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자 비로소 불상의 가치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녹색 옥으로 만든 불상을 에메랄드 불상이라고 이름 짓게 된 것은, 이를 처음 발견한 주지 스님이 녹색의 돌을 에메랄드라고 생각하여 그같이 불렀기 때문이다.
에메랄드 불상은 오랜 세월을 걸쳐 세 차례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1434년 발견 이후부터는 이 에메랄드 불상의 이동 경로는 역사 기록으로 남아 있다. 불상은 우여곡절 끝에 당시 태국 북부 란나왕국의 수도인 치앙마이로 옮겨졌다. 1551년에 라오스 루앙프라방으로 옮기게 된다. 당시 란나왕국의 왕이 아들 없이 죽자 라오스 왕에게 시집간 딸이 낳은 아들 즉 외손자가 유일한 왕위 계승자가 되어 왕위를 잇게 된다. 그리고 라오스의 왕이 죽자 란나 왕국의 왕은 라오스의 왕위 또한 계승하게 되어 불상은 루앙프라방에 모시게 된다. 하지만 미얀마가 또 침입하자 라오스는 수도를 루앙프라방에서 위앙짠(비엔티안)으로 옮기게 되고 에메랄드 불상도 이때 함께 옮겨져 1778년까지 약 200년 넘게 라오스의 위앙짠에 모셔졌다. 미얀마는 이후에도 여러 번 태국과 라오스를 침입했고 결국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는 미얀마에 의해서 멸망한다. 이때 미얀마의 식민 지배를 물리치고 다시 태국의 독립을 찾은 이가 톤부리왕조를 세운 딱신왕이다. 미얀마로부터 독립을 이끈 딱신대왕은 라오스와도 전쟁을 벌여서 승리하였고 이때 위앙짠에 있던 에메랄드 불상을 다시 태국으로 가져와 당시 태국의 수도였던 톤부리(지금의 방콕 짜오프라야강 서쪽)로 옮겨 왓 아룬에 모셨다. 그러나 톤부리왕조는 딱신왕 1대로 끝나 버린다. (결말이 우리나라 궁예와 비슷함) 라마 1세가 수도를 지금의 방콕 랏따나꼬신으로 옮기고 1784년 왕궁 내에 왓 프라깨우가 완성됨으로써 에메랄드 불상의 최종 안착지가 되었다.
사원의 째디(불탑)에서 발견된 이후 처음에 불상은 람빵으로 옮겨져 한동안 그곳에서 잘 보존되었다. 치앙마이를 거쳐 이웃 국가인 라오스에서 약 226여 년간 보존되다 짜끄리 장군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1778년 딱신 왕조 때 다시 태국 방콕으로 돌아왔다. 딱신 왕조가 1대로 실각하고 1782년 짜끄리 왕조가 들어섬과 동시에 왓 프라깨우의 본당으로 옮겨졌다. 대웅전 우보솟(Ubosoth) 내부는 에메랄드 불상과 더불어 세 개의 불상과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양옆에는 두 개의 불상이 있는데 이는 라마 3세가 1841년 선왕 라마 1세, 2세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것이고 그 앞에는 한 개의 불상이 있는데 이는 몽꿋 왕(라마 4세)이 왕위에 오르기 전 승려 생활을 할 당시 제작한 것이다. 태국인에게 기장 존경받는 불상 중 하나이다. 불상을 안치한 곳의 오른쪽에는 벽화가 나열되어 있다. 탄신, 유년 시절, 청년 시절, 출가 등 부처의 일생을 묘사했고, 동쪽 벽에는 부처를 유혹하는 악령의 모습과 부처의 해탈 장면이 어우러져 있다. 북쪽 벽에는 부처의 설법하는 장면과 마지막에는 열반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대웅전 뒤쪽 벽에는 장엄한 소승불교 우주관이 그려져 있다.
대웅전에서 시계 방향으로 이동하면 우보솟 외에도 두 개의 쩨디(Chedi, 불탑)가 있다. 라마 4세 때 스리랑카 양식으로 지은 황금빛 둥근 탑으로 프라씨 랏따나 쩨디이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사원 3층 지붕은 남색과 오렌지색으로 벽면에는 화려한 모자이크, 황금색으로 장식된 불탑이 있다. 왓 프라깨우 건축과 동시에 만들어졌다. 이 건물도 이후 여러 번 보수했다. 본당 왓 프라깨우의 돌담과 회랑을 걷다 보면 길게 이어지는 벽화를 볼 수 있다. 힌두교 신화 <라마야나(Ramayana)>라고 하는 힌두교의 대서사시를 그림으로 기록한 서사시의 장대한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라마야나의 태국어로는 '라마끼얀'이다. 인도와 동남아에서는 라마야나 속 등장인물들은 신들의 화신으로 태국인들이 신성시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현 왕조의 태국 국왕을 보통 라마 1세, 2세라고 부른다. 아무튼 이 벽화는 태국 화풍으로 묘사한 178개의 벽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사시의 첫 부분으로 가장 중요한 장면은 고대 인도의 “야요타야” 왕국의 현명한 “라마”가 “롱까” 나라의 “토싸깐”(라바나) 왕에게 납치된 자신의 왕비 “씨다”를 구출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그리고 서사시의 막바지에 이르면 “토싸칸”이 죽게 되는 최종 전투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그 밖에도 벽화에는 인도 남단의 바다 건너에 떠 있는 섬나라 “롱까”로 가기 위해 다리를 놓는 장면, “마이야람”과의 전쟁 장면, 잠이 든 “라마”를 지하세계로 데려가는 마술사 이야기, “라마”가 “토싸깐”의 동생 “꿈파깐”과 “토싸깐”의 아들 “인드라칫”과 전투하는 장면, “토싸깐”을 도우려는 친척 및 동조자들과 벌이는 전투 장면이 등이 그려져 있다. 라마 3세 때 제작된 것으로 지금까지 복원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라마의 적으로 악의 화신이었던 토싸깐은 왓 프라깨우 입구에 거대한 거인상이 되어 서 있다. 초록색 피부와 머리 위에 또 머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종의 야크샤(yakṣa)이다. 야크사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언급할 것이다. 또한, 라마를 도와주는 원숭이 대장 '하누만'이 나오는데, 이 원숭이 이야기가 중국으로 들어가 각색된 것이 바로 손오공이다. 이 밖에도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새의 형상을 한 낀나리 조각물도 보인다. 이 역시 라마야나에 나오는 전설의 동물로 하늘의 음악을 담당한다. 왓 프라깨우에는 이렇게 상상 속 동물 조각이나 조형물이 많다. 모두 앞에서 언급한 라마야나에서 나온 창조물이다. 왓 프라깨우에서 건물을 유심히 보면 건물을 떠받치는 듯 지탱하는 조각물이 눈에 띈다. 바로 가루다(Garuda)다. 가루다는 태국어로 힌두 신화에서 가장 높은 3신 중 하나인 비슈누를 태우고 다니는 새를 지칭한다. 인간의 몸체에 독수리의 머리와 부리, 날개, 다리, 발톱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다. 가루다는 우리나라 고대 전설상의 신령스러운 동물이자 모든 새 위에 군림하는 길조인 봉황에 해당하는 새로 태국에서는 정부의 문장을 상징한다. 방콕 여행 중 건물에 이러한 새 표시가 보이면 정부 관청 건물로 보면 된다. 또한, 이 가루다는 태국을 넘어서 동남아시아에서 상징적인 새이다. 인도네시아 국적기 이름도 가루다이다.
그 밖에도 법당 주변에는 라마 1세 때 지어진 도서관인 프라 몬돕에는 정교한 자개 장식의 책장 안에는 불교 서적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크메르양식으로 건축한 탑이 인상적인 쁘라쌋 프라 텝 비돈, 라마 4세 때 현재의 캄보디아 지역까지 통치한 흔적을 보여주는 앙코르 와트 석재모형 등이 눈여겨 볼만하다. 그런데 태국 왕궁 사원에 왜 캄보디아의 상징인 '앙코르 와트(Angkor Wat)'의 모형이 있을까? 필자는 궁금했다. 아마 역사적으로 서로 침략하고 침략당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안내장에서는 라마 4세 시절 앙코르 와트까지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던 영광스러운 역사를 기억하고자 만들었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상층 테라스 건물 사이에는 청동 코끼리와 신화에서 유래된 반인반조(半人半鳥)의 부조물 등도 볼 수 있다. 여기 청동 코끼리는 태국에서 왕위를 계승할 때마다 발견되는 신성한 동물을 상징한다고 한다. 상층 테라스 북쪽으로 가면 경전도서관(經典圖書館)인 “허 뜨라이 몬티연 탐”이 있다. 이 건물 서쪽 벽면의 장식이 섬세하고 정교하여 방콕 건물 중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필자를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인 수많은 불상이 있는 “프라 위한 엿”과 불상이 안치된 앞 단상의 아름다움도 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대웅전 서쪽을 바라보면 두 건축물의 장엄한 건물이 보인다. 한 곳은 현 짝끄리 왕조의 왕들에게서 헌납된 불상들이 있고 나머지 한 곳은 아유타야 왕국의 왕들에게 헌납된 불상들이 즐비하게 느려져 있다. 마치 불상만의 박물관에 온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였다.
왕궁(Grand Place)
이제 왕궁(王宮)으로 들어가 보자. 제일 먼저 마주하는 건축물은 서양식 건축물인 “보롬 피만” 맨션이다. 이 건물은 1903년 쭐라롱껀 왕이 황태자 책봉을 받은 아들 라바 6세를 위해 지어준 건물이다. 유럽 양식의 건물로 라마 6세부터 8세까지 이곳에서 거주했으며, 라마 8세가 총기 사고로 죽은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은 주로 외빈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지만, 방문객은 입장 불가이다. 그다음에 옆에 있는 건물은 “프라 마하 몬티연(Phra Maha Monthien)”그룹의 건축물로 “아마린 위닛차이” “파이산 탁씬” “짝끄리 피만” 등 3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아마린 위닛차이”는 왕을 알현하는 행사가 있을 때 사용되는 건축물로 라마 1세가 통치하던 1785년에 세워졌다. “파이산 탁씬”은 태국왕의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소다. 대관식 때 왕은 8각의 왕좌에 앉아 국내 각 지방을 대표하는 8인으로부터 추대받는 의식을 행한다. “짝끄리 피만”은 라마 1세, 라마 2세, 라마 3세가 차례로 기거하던 건물이다. 따라서 후대 왕들은 대관식(戴冠式)을 거행하는 날은 반드시 이 건물에서 하룻밤 묵는 것을 전통으로 여기게 되었다. 건물의 입구 양옆에는 정부의 부서를 상징하는 문양(文樣)들의 장식으로 내무부 상징은 사자, 국방부 상징은 코끼리, 외무부의 상징은 수정 연꽃이다.
그리고 왕궁의 중앙에 있는 앞뜰 바로 뒤로 있는 건물이 짜끄리 마하 프라삿(Chakri Maha Prasat)이다. 이 건물은 1882년 라마 5세가 짜끄리 왕조 100주년을 기념해 건축한 것으로 왕궁 내 건축물 중 지붕을 제외한 대부분이 서양 건축 양식을 빌려서 지은 듯하다. 지붕은 돔 대신 태국 전통 양식을 택했다. 그래서인지 ‘태국 모자를 쓴 서양인(Westerner with a Thai Hat)’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한다. 짝끄리는 이 건물의 중앙부와 양측으로 연결되어 요즘에는 접견 장소로만 사용되고 있다. 짜끄리 마하 프라삿을 지나 하얀 외벽이 인상적인 두씻 마하 프라삿(Dusit Maha Prasat)이다. 이 건물은 라마 1세가 자신의 시신이 화장되기 전 이곳에 안치되기를 바라며 지었다고 한다. 이 건물의 주요 사용 용도는 왕이나 왕비, 그리고 왕족들의 시신을 화장하기 전에 안치하는 곳으로, 일반인들의 조문을 받는 장소이다. 건물의 크기와 건축 양식이 아유타야 시대 때 왕족의 시신을 안치해 두었던 ‘쑤리야마린’를 모방했다. 건물 모양은 전체적으로 십자형이며 지붕이 4단이고 위에는 7층의 뾰족탑이 올려져 있다. 이 건물을 마지막으로 이제 왕궁 관람도 거의 끝이 난다. 출구로 나가기 전 왼편에 있는 왓 프라깨우 박물관에 들러 보도록 하자. 왓 프라깨우에 관한 전시를 볼 수 있다.
왓포(Wat Pho)
다음은 왓포(Wat Pho)로 이동해 보자. 왓포는 공식적으로 "왓 프라 체투폰 위몬 망클라람 랏차워람아하위한"이다. 왓포(Wat Pho)는 줄인 말이다. 아유타야 양식으로 16세기에 건립된 방콕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고 전체 면적이 80,000 제곱미터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왓포의 전성기에는 500명의 승려와 750명의 수도승이 이곳에 거주하며 수행했다고 한다. 이 사원은 전통 태국 마사지의 탄생지로도 알려져 있다. 방콕에 왔다면 반드시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사원 출입구에는 다양한 색의 꽃들이 모자이크 형식으로 장식된 왕관 모양의 첨탑이 있다. 중국식 도자기를 잘라서 꾸면은 데 라마 3세가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입구 앞에는 무기를 든 중국 거인 석상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다. 안에는 금빛 와불상이 미소를 짓고 누워 우리를 맞이한다.
라마 1세 때 본당을 건축했다. 본당은 전형적인 아유타야 양식으로 1835년에 복원했고 아유타야에서 가져온 불상을 본존불로 안치하고 있다. 본당 기단부에는 대리석을 조각한 회랑이 있다. 모두 152개 장면으로 인도의 유명한 대서사시 <라마야나>을 묘사했다. 왕궁의 벽화처럼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석조 부조가 정교하여 볼만하다. 외벽을 따라 394개의 황동 불상이 전시되어 있어 불상 박물관으로 손색이 없다. 주로 아유타야와 수코타이 양식의 불상으로 태국 불상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사원 마당의 코너에는 4개의 초대형 불탑 프라 마하 째디 (Phra Maha Chedi)가 있다. 녹색은 라마 1세, 흰색은 라마 2세, 노란색은 라마 3세, 파란색은 라마 4세를 상징한다. 라마 3세 때 만든 와불상은 16년 동안 복원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불상의 크기도 어마어마하다. 무려 길이가 46m이고 높이가 15m이다. 와불이 너무 커서 전체 모습을 보기 힘들 정도이다. 다행스럽게 발바닥은 밑에 있어서 그나마 자세한 윤곽을 볼 수 있다. 와불상의 발바닥에는 백팔번뇌를 의미하는 108개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그 밖에도 왕, 고승 등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째디 95개가 사원 안에 있다. 사원 박물관, 프라 몬돕(Phra Mondob), 쌀라 깐 빠리엔(Sala Karnparien)의 악어 연못 (Crocodile Pond) 등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원 밖도 천천히 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왓 아룬(Wat Arun, 새벽사원)
다음 목적지는 새벽사원 왓 아룬(Wat Arun)이다. 왓 아룬은 짜오프라야강(Chao Phraya River) 건너편 톤부리에 위치해 있어서 가려면 반드시 배를 타야 한다. 왓 포에서 왓 아룬을 간다면 타띠안 선착장에서 보트를 타고 왓 아룬 선착장까지 이동할 수 있다. 필자는 다른 루트로 고생 끝에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밤에 아름답다는 소문이 나 있는데 낮에 방문하니 조금 머쓱해졌다. 사원을 걷다 보면 흰색 사원을 휘감고 있는 알록달록 모자이크 장식 사이로 원형을 간직한 그릇들을 발견할 수 있다. 왓 아룬은 톤부리 왕조의 탁신 왕이 건설하였다. 수도를 톤부리에서 방콕으로 옮기기 전에는 현재 왓 프라깨오에 있는 에메랄드 불상이 이 절에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원의 별칭은 '새벽의 사원'이다. 새벽에 햇빛을 받으면 프랑(탑)의 자기 장식에서 형형색색의 빛이 영롱한 무지갯빛을 만들어내고 그 빛이 강 건너편까지 비추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태국의 사원은 황금색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왓 아룬은 흰색을 띠는데, 이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유타야 왕국 시대에 사원 이름은 '왓 마콕'이었다. 이후 탁신 왕이 왓 챙으로 개명했고 왓 아룬이 지금의 형태를 갖출 때는 대략 1820년 무렵으로 추정한다. 라마 2세는 왓 아룬을 70미터 높이로 증축 및 보수했다. 이후에도 지금까지 조금씩 꾸준히 개보수한다. 왓 아룬 사원 건물의 전체적인 양식은 크메르 풍이다. 크메르는 802년부터 1431년까지 629년 동안 캄보디아에 존재한 제국이다. 사실상 캄보디아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대제국으로 한때는 동남아시아 대부분과 심지어는 중국 남부 지방까지 직간접적으로 지배했다. 우리에게는 캄보디아의 상징으로 알려진 앙코르 와트를 건축한 국가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탑에는 오르내릴 수 있도록 계단이 있고, 탑의 표면에 여러 가지 화려한 장식을 했는데, 중국산 도자기 접시를 붙이기도 하였다. 탑 아래에는 중국에서 보내온 석상들을 세웠다.
왓 아룬에 중심에 있는 거대한 탑, 가장 높이 솟아 있는 탑은 프라 쁘랑(Phra Prang)이다. 프라 쁘랑(Phra Prang), 이 탑이 유명하다. 톤부리시대 까지만 해도 이처럼 높지 않았는데, 라마 2세부터 3세 시대 사이에 70m가량의 높이로 증축했다고 한다. 원래는 탑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지금은 중간층까지만 오픈되어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그마저도 개방되지 않았다. 계단을 올려다보면 경사가 유독 가파르다. 그 이유는 계단을 오르며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란다. 전체적으로 탑은 수미산(須彌山)의 중심에 있는 제석천의 선견성(善見城)이 있고, 주변에 있는 좀 작은 탑은 수미산 정상의 네 모퉁이에 있는 작은 봉우리가 있다. 즉 사원 전체가 상징적으로나마 도리천을 이루는 것이다. 실제, 불교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에는 수미산이 있고 수미산 정상은 네모의 평지이고 네 귀퉁이에 작은 봉우리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수미산의 정상에는 신들 33위가 산다고 삼십 삼천, 또는 도리천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제석천은 수미산 정상에 있는 하늘인 도리천(忉利天)의 주인이고 수미산 중턱의 사천왕을 거느리고 불법과 불제자를 보호한다. 부처의 거처를 우주의 중심이라는 수미산 정상, 그것도 제석천의 궁전인 선견성에 배치하려는 의도이다. 이처럼 중앙에 큰 탑을 만들고 중앙에 조그만 탑 개를 네모꼴로 배치하여 도리천의 형상을 흉내 내는 것은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 사찰 건축에서는 흔하게 나타난다. 실제로, 왓 아룬은 높이 약 30m의 프랑 4개가 사방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중앙에 크기 74m, 둘레 234m의 프라 프랑이 솟아 있다. 프라 프랑 내부에는 힌두교의 상징인 '에라완'과 힌두의 신 '안드라'의 상이 있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나타내는 4개의 불상도 존재한다. 심지어 태국 왕실 장례에서는 임금의 시신을 도리천을 흉내 낸 임시 건물에 모시고 조문을 받는다. 불교에서는 전륜성왕 역시 선견성에 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왕궁(Grand Place)와 왓 프라깨우(Wat Phra Kaew, 에메랄드 사원), 왓포, 왓 아룬 등을 둘러봤다. 방콕을 여행하면 반드시 돌아봐야 할 방콕 삼매경 코스였다. 왜냐하면 태국(방콕)의 역사와 문화 유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태국 사원 안은 우보솟(본당), 째디(불탑), 위한(예배당) 등 주요 건물이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별히 우리나라에 없는 왕립 사원에는 의식용 도구를 보관하는 건물, 몬돕과 사원의 격식을 나타내는 본당 지붕에 있는 파풍장식은 필자에게 낯설고 흥미로웠다. 사원의 구성을 보면 우리나라 절과 별반 다른 게 없다. 다만 절의 색감과 분위기 그리고 의식은 다르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는 대승불교이고 태국은 소승불교이기 때문이다. 소승(小乘)은 대승불교 측에서 낮추어 부른 말이다. ‘비교적 작은 탈 것’(smaller vehicle)을 의미한다. 자신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법당 등 어느 곳에서 오직 홀로 참선을 한다. 하지만 타인에는 관심이 없다. 타인을 위한 49재나 천도재 등도 없으므로 수입이 없다. 그러므로, 먹고살기 위해 밥 먹을 때가 되면, 마을이나 시내에 내려가 탁발 시주를 한다. 반면에 대승불교(大乘佛敎)는 ‘큰 탈 것’이라는 뜻으로 대승은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타인과 함께하려는 자비심의 보살행을 하는 것이다. 즉, “중생과 함께 하는 마음”을 가진다. 그래서 일정량 수입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소승불교인 태국 불교는 사람들의 생활에 깊이 침투하였다. 출산·결혼·장례 등 모든 일상을 불교의식으로 거행한다. 그리고 그 생활의 중심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원이다. 태국 하면 사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원은 주민의 모임의 장소이자 병원, 양로원 역할도 한다. 필자가 사원을 방문할 때 수많은 사람이 붐비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듯하다. 다음 장소는 태국 불교의 역사적 흔적 아유타야를 방문할 예정이다. 2023/7/1 혜윰인문학연구소/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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