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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9– 마드라스(첸나이): 남인도 드라비다 문화 - 까빨리슈와라르(카팔레스와라) 사원, 세인트 조지타운(St. George Town), 마드라스 고등법원(Madras High Court), 산토메 대성당(..

by 뜨르k 2023.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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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9– 마드라스(첸나이): 남인도 드라비다 문화 - 까빨리슈와라르(카팔레스와라) 사원, 세인트 조지타운(St. George Town), 마드라스 고등법원(Madras High Court), 산토메 대성당(San Thome Cathedral), 포트(요새) 박물관(Fort Museum), 마리나해변(Marina Beach)


 

드라비다 문화: 남인도 마드라스(첸나이)

이번 인문학 여행 목적지는 남인도 마드라스(첸나이)이다. 콜카타에서 마드라스(첸나이)까지 열차로 27시간 걸린다. 마드라스 가는 방법은 비행기도 있지만, 요금이 비싼 열차도 있다. 필자는 결국 열차를 선택했다. 인도 여행을 실감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은 역시 열차인 듯싶다. 왜냐하면, 창밖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풍경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차 안에는 인도인이 풍기는 사람 냄새가 있어서 좋다. 장장 하루를 지나서야 마드라스에 도착했다. 마드라스는 타밀나두주에 속한다. 인도의 남동부 끝 타밀나두주는 드라비다 문화이면서 카스트제도가 강한 지역이다. 이슬람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은 순수한 인도 문화의 보고이기도 하다. 종교적 측면에도 엄격한 색채를 띠고 있다. 그 때문에 전통 복장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북쪽의 문화와 대조적으로 드라비다의 독자성을 주장하며 델리의 중앙집권 정책에도 강한 불만을 품고 있는 듯하다.

 

 

드라비다의 중심 마드라스(첸나이)의 언어는 대부분 타밀어를 모국어로 쓴다. 타밀나두 지역이라 드라비다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영어와 힌디어 등 2차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과 벵골어, 펀자브어, 말라얄람어, 텔루구어를 쓰는 사람도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대부분 도시에서 그렇다. 하지만 외곽이나 전통이 있는 지역의 사람들은 여전히 타밀어가 쓴다. 그들에게 타밀어 사용은 하나의 자부심이다. 그리고 벵골만의 연안 지대에는 하리잔이 많이 살고 있다. 하리잔(Harijan)은 다른 말로 달리트이고 불가촉천민들이다. 달리트는 ‘카스트를 부여받지 못하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이란 의미로 ‘아웃 카스트(outcaste)’라고 불렸다. 즉 카스트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래서인지 하리잔 중에는 카스트제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하지만 현재는 이러한 차별적 호칭을 쓰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마하트마 간디가 ‘신의 아들’이라는 의미인 ‘하리잔(Harijan)’이나 자신을 스스로 ‘핍박받는 자’로 일컫는 ‘달리트(Dalit)’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트제도와 달리트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는 다른 지면을 통하여 언급할 것이다.

 

‘마드라스(Madras)’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첸나이는 타밀나두의 주도이다. 7백만 인구의 인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필자에게 마드라스는 뭄바이처럼 호화롭지도 콜카타와 벵갈루루처럼 복잡하지도 않아서 좋다. 다른 대도시와 비교하면 같은 인도인데 어딘지 모르게 수수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게다가 타밀어의 간판 글씨도 둥글고 대화의 말도 물 흐르듯 잔잔하여 더욱 그렇다. 콧대도 서양인처럼 높지만, 얼굴은 검고 몸매도 아담하며 작고 단단해 보여 외모가 한국인인 필자에게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들 정도이다. 최근 첸나이(마드라스)는 콜리우드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엔터테인먼트 사업과 의료 관광으로도 주목받기도 했다. 콜리우드(영어: Kollywood)는 인도 첸나이 지방의 영화 산업을 일컫는 비공식 이름으로, 타밀어로 제작되고 타밀나두 지역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말한다. 힌디 영화가 봄베이(뭄바이)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볼리우드(Bollywood)로 불리고 타밀 영화는 첸나이(Chennai)의 코담바캄(Kodambakkam)을 중심으로 해서 콜리우드(Kollywood)라고 부른다. 인도는 보통 1년 동안 1,000편의 영화를 제작한다. 이 숫자는 세계 영화의 메카인 미국의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그중에서도 마드라스(첸나이)는 뭄바이와 함께 인도 영화의 본산지로 꼽히고 경제적으로도 남인도의 중심지로 외국 공관은 물론 기업이나 은행 등이 많은 마드리스 지점을 두고 있을 정도이다. 필자가 보기엔 현재 마두라스(Madras)는(Madras) 옛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듯하다. 아름다운 사원과 유적지는 물론 현대 레스토랑과 쇼핑몰, 극장 그리고 유흥을 즐길 수 있는 바(bar)와 퍼브(pub) 등이 함께 나란히 거리에 놓여있어 흥미로 왔다. 첸나이를 여행하면서 지친 심신을 잠시 이곳에서 쉬면 좋을 듯하다. 다음은 식민지 흔적인 마드라스 고등법원(Madras High Court)을 발길을 옮겼다.

식민지 흔적: 마드라스 고등법원(Madras High Court)

영국식민지 시대에 마드라스 항으로 들어오는 상선을 대상으로 인도 상인들이 만든 도시가 조지타운(George Town)이다. 조지타운 바자르 한 모퉁이에 육중한 이슬람식 붉은 벽돌 건물이 고등법원이 건물이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법원 중의 하나이다. 영국령으로 인도의 3개 도시 마드라스(첸나이), 봄베이(뭄바이), 캘커타(콜카타)는 각각 1862년 6월 26일 서한 특허로 고등법원을 승인받았다. 특허는 1861년 영국 의회의 인도 고등 법원법에 따라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발행되었다. 하지만, 거의 30년 지나서야 1892년에 현재 건물이 준공되었다. 법원 규모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법원 중의 하나일 정도로 크다. 그 안에는 지방법원이 함께 있다. 법원에는 수목이 무성하다. 법원 주위에서는 법복을 입은 사람들을 자주 마주친다. 사리 위에 법복을 입은 사람들도 종종 있다. 한 손에는 서류를 들고 진한 검은색의 옷과 흰색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다. 영국은 여전히 가발과 정해진 의복을 입고 법정에 서야 한다. 그만큼 역사와 전통을 중요시한 듯하다. 다음 여행지는 식민지 전력기지인 세인트 조지타운(St. George Town)으로 자리를 옮겨보자.

식민지 전력기지: 세인트 조지타운(St. George Town)

여기서 우리는 세인트 조지타운(St. George Fort)이 왜 식민지 전략기지 역할을 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조지 포트(St. George Fort)’는 영국에 의해 건설되었다. 영국은 제국주의 후발주자이다. 그런데도 먼저 출발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점령한 식민지를 다시 점령하여 세력을 확보하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영국은 마침내 인도마저도 손아귀에 넣는다. 인도를 식민지배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된 곳이 바로 첸나이의 ‘조지 포트(St. George Fort)’이다. 세인트 조지타운(St. George Town)은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세인트 조지'란 성채를 구축하고서 시가지를 만든 곳이다. 이것이 마드라스(첸나이) 시(市)(첸나이)시(市) 발전의 시초란다. 하지만 실망스럽게 시내에는 성채는 안 보이고 거리에는 식민지 흔적인 몇몇 대포만이 초라하게 있을 뿐이다. 먼저 우리는 식민지 전력기지인 세인트 조지타운의 흔적을 더듬으려면 영국식민지 과정의 역사를 아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영국식민지 과정의 역사는 이렇다. 1600년경 무역 활동을 위해 인도에 진출한 동인도 회사(EIC)는 초기 보루였던 수라트에서 라이선스 거래를 시작으로 식민지 역사가 시작된다. 향신료 무역에 대한 무역선과 상업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말라칸 해협에 더 가까운 항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유럽인들의 향신료에 대한 애착은 상상을 초월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조미료가 발달하지 않았고 냉장 시설 부족, 그리고 향신료를 마약으로 사용 외에 특히 모든 병이 나쁜 바람에 의하여 발생하고 전염병이 창궐한다고 믿었다. 나쁜 바람이란 악취, 즉 썩은 냄새를 말한다. 유럽인들은 이 나쁜 바람을 없애기 위해 향신료를 사용해야 했다. 실제로 당시 많이 사용했던 로즈메리는 살균, 소독, 방충 작용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좋은 향을 맡으면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서구 열강들의 아시아 진출은 일종의 향신료 획득 전쟁이었다. 세계 식민화의 출발도 향신료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럽인들의 향신료에 대한 탐닉 탓에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EIC)도 향신료를 확보하기 위해 찬나파트남(Channapatnam)이라고 불리는 해안지 한 곳을 매입하여 항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조지아 성이다. 조지아 성의 건설비용은 3천 파운드 즉,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500만 원 정도이다. 건물의 완공도 영국의 수호성인의 기념일인 1644년 4월 23일 성 조지의 날(St George's Day)에 맞추었다. 그리고 세인트 조지 성(St. George Fort)으로 명명했다. 바다와 몇몇 어촌을 마주하고 있으며 곧 상인 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새로운 정착지 세인트 조지타운(St. George Town)이 드디어 탄생한다. 이것이 결국 첸나이(마드라스)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무굴제국의 공격을 받거나 1746년 프랑스군에 함락돼서 1749년까지 잠시 프랑스인의 소유로 넘어갔으나, 다시 영국으로 복원되었고 영국의 남인도 지배 거점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1749년 확장 공사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현재 이 성은 타밀나두주의 입법부를 위한 행정 본부 중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보안이 철두철미하다. 조지 타운은 때론 ‘블랙 타운(Black Town)’ 혹은 ‘화이트 도심지구(White Town)’라고도 불렸다. 그 이유는 블랙타운은 처음에 이곳이 염색공과 방직공이 정착했었기 때문이고 화이트타운(White Town)은 성채가 작은 도시와 같이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불렸다고 한다.

 

1639년에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당시 '마드라스(Madras)'에서 무역을 확장한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무역을 통해 상업 활동을 하는 말 그대로 하나의 사기업이다. 영국은 식민지 확장으로 모든 식민지를 직접 관리할 수 하는데 어려움에 부닥치자 동인도 회사 등 사기업 등을 이용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막강한 독점적 지위와 권한을 주었다. 무역과 특허, 외교권 및 지배권 등을 왕실로부터 대신하여 영국의 대리 기관으로 행세했다. 이처럼 동인도 회사는 인도를 손아귀에 넣기 위해 마드라스에 거대한 요새(Fort)와 항구(Port)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그곳에 ‘조지 포트(St. George Fort)’와 ‘첸나이 포트(Port)’라는 이름을 붙였다. 동인도 회사는 마드라스의 ‘조지 포트(St. George Fort)’를 인도를 삼키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조지 포트(St. George Fort)’를 건설한 이후 인도를 손아귀에 넣고자 했다. 영국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첸나이 포트'의 항구에는 영국의 해군을 주둔시켜 인도의 자원을 수출할 전초기지를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뭄바이(Mumbai), 콜카타(Kolkata) 등에도 포트를 건설하여 점령지역을 점점 확대하기 시작했다. 보잘것없는 마드라스가 거대한 도시가 형성된 것이다. 그 시발점이 바로 ‘조지 포트(St. George Fort)’이다.

 

식민지의 흔적: 포트(요새) 박물관(Fort Museum)과 세인트 메리 교회(St. Mary's Church)
포트(요새) 박물관(Fort Museum), 세인트 메리 교회

이제 식민지 흔적 또 다른 포드 박물관과 세인트 메리 교회(St. Mary's Church)를 방문해 보자. 1644년에 건립된 세인트 조지 성은 영국인들이 만든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물이다. 한때 동인도 회사의 본사였지만 지금은 박물관과 역사적인 유적지들과 정부 기관들의 보금자리로 사용하고 있다. 세인트 조지타운(St. George Town)에 있는 포트 박물관은 1948년에 설립되었다. 3층에 임시 전시 갤러리를 포함하여 무기갤러리, 메달갤러리, 도자기갤러리 등 10개의 갤러리가 있다. 어린이 야외 갤러리는 실물 크기의 대포 모형과 함께 정문 앞 성곽 정원에 있다. 물론 여기에서 대포에 대해 배우고 만질 수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들은 마드라스 총독들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국왕 조지 3세(King George III)와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그리고 아서 해브락 경(Sir Arthur Havelock)의 초상화도 있다. 방 하나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그림들이었다. 제국주의적인 색채가 아주 강한 물건들이다. 영국 통치자들의 생활양식을 조명하는 유물들로 과거 이 요새에 머물렀던 영국군의 무기와 군복 등도 전시되어 있다. 게다가 식민지 시대 스코틀랜드, 프랑스, 인도에서 온 무기, 동전, 메달, 유니폼과 다른 예술품들이다.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영국과 덴마크,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주화들도 보이고, 인도-프랑스 시계와 가구들, 자기류와 우표들도 볼 수 있다. ‘조지 포트(St. George Fort)’가 19세기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어떻게 건설되었는지에 대한 간략한 축적 모형과 발전 과정의 설명을 도표로 볼 수 있다. 다른 왕족과 존경받는 위인들 사이에서 이 박물관은 노벨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의 박물관'에 언급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노벨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 박물관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조지타운 안에서 볼거리라고 할 수 있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영국식 교회(성공회), 세인트 메리 교회(St. Mary's Church)이다. 비록 부식되었어도 하얀 외관이 마치 유럽의 풍경을 영상 캐한다.. 첸나이 시내에는 이것 말고도 성 도마 교회, 그리고 세인트 마운트 교회 등이 서양식 교회로 유명하다. 세인트 메리 교회(St. Mary's Church)는은 1678년에서 1680년 사이에 당시 Madras Streynsham Master 에이전트의 명령으로 지어졌다. 묘지에 있는 묘비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영국식 묘비이다. 내부로 들어가서 기념 비문과 복잡한 문양의 목제가구와 미술 작품 최후의 만찬(Last Supper) 등을 볼 수 있다. 위엄 있는 기둥과 아케이드로 특징이 부여되어 눈에 띈다. 이제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시민의 휴식처인 마리나 해변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자.

시민의 휴식처: 마리나 해변(Marina Beach)

마리나 해면은 세계에서 가장 긴 해변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길이를 자랑한다. 실제로 보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해안선을 따라서 공원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해변 입구 건너편에는 마드라스 대학교가 보인다. 마드라스 대학교는 시가 첸나이로 바뀌기 이전에 옛 이름이다. 해변은 첸나이 시내 남동쪽에 있다. 남북으로 약 13km 정도 뻗어 있는 해변은 다양한 기념 건축물들이 있고 먹거리를 파는 상인들이 해변 주위를 메꾸고 있고 해변 산책을 즐기는 인도인들로 항상 북적거린다. 특히 승마를 사람들도 눈에 띈다. 고요한 산책을 하고 싶다면 이른 아침이나 해 질 무렵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녹색 잔디밭이 잘 조성된 해변 산책로에서 한가로운 산책의 여유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북쪽에는 주 정부 수상이던 안나두라이 기념 묘가 있다. 해변도 설립자 안나두라이(Anna durai)의 이름을 딴 안나(Anna) 공원이 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델리의 중앙정부를 향해 드라비다의 독자성을 주장하였고 드라이다 진보정당(D.M.K) 당원이다. 그가 수상으로 있던 1967년에 처음으로 D.M.K 주 정부가 탄생했다. 또한, 영화배우이자 타밀 나두주의 주 수상으로서 카리스마를 지녔던 M.G.라마찬드란(Ramachandran)의 묘도 있다. 해변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타밀의 여러 학자, 애국자, 주요 인물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조각상이 있다. 바로 사리 차림의 여성상으로 소에 팔찌를 걸고 있는 정녀(貞女) 간나기상이다. 지금 역시 그녀는 타밀 여인의 이상형이라고 한다. 그녀는 일종에 사티이다. 사티(Suttee 혹은 Sati)는 남편의 죽음을 따라 죽는 인도 관습이다. 실제로 옛날 인도에서는 죽은 남편의 시체와 함께 아내를 화장하던 관습이 있었다. 사티에 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인도 인문학 여행 탐구에서 다룰 것이다.

남인도 고유한 드라비다 건축양식 고푸람(Gopuram): 까빨리슈와라르(카팔레스와라) 사원

첸나이 남쪽 산토메 성당 서쪽에 있는 카팔레스와라 사원은 첸나이에서 가장 유명한 힌두교 사원으로 규모가 클 그뿐만 아니라 무려 7세기에 지어진 건물이고 300년 전에 수리했다. 사원 앞에는 큰 연못이 잔잔하게 놓여있다. 물론 신전까지 출입할 수 없지만 화려한 드라비다 양식으로 시바를 모시는 사원이다. 입구에는 첨탑 또는 고푸람(Gopuram)이라 불리는 인도에 건설된 중세의 탑문이 있다. 고푸람 힌두교 사원의 울타리에 돌을 쌓아 만들었고 올라가면서 좁아지면서 사각형을 이룬다. 드라비다인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발전시킨 건축양식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매력을 뽐낸다. 드라비다 건축양식의 상징은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갖춘 힌두 사원의 탑문, 고푸람(Gopuram)이다. 고푸람에는 남인도 사람들의 문화·역사·신화가 녹아 있어 늘 성스러운 장소이면서도 현재도 많은 사람이 오가며 축복을 받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사원 안에는 수많은 신사가 있으면 사원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사원 단지에는 많은 사원이 있다. 남인도에는 인더스 문명의 주역인 드라비다인들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탄자부르의 브리하디스바라 사원(Brihadisvara Temple), 정문에 있는 두 개의 고푸람은 사원 건물 자체를 압도한다. 비슈누 신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사원인 이곳은 비슈누를 비롯한 신과 악마들, 동물의 섬세한 형상이 빼곡히 차올라 탑문을 이루고 있다.

 

괴기스럽거나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조각들에 천연 소재 염료로 칠해 조형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강렬한 색채가 시선을 끈다. 남인도 건축을 대표하는 또 다른 힌두 사원인 마두라이 스리 미낙시 사원(Sri Meenaksi temple), 탄자부르의 브리하디스와라 사원(Brihadisvara Temple), 함피의 비루팍샤 사원(Virupaksha Temple)까지 각각의 특색은 조금씩 다르지만 고푸람은 사원의 상징, 나아가 그 도시의 상징이 되면서 남인도의 문화를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산토메 대성당(San Thome Cathedral): 예수의 열두 제자 도마(Thomas)의 선교지 

까빨리슈와라르 사원과 마리나 해변 사이에 있는 대성당으로 예수의 12명의 제자 중 하나인 성 토마스(St. Thomas)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 이 교회는 기독교 1212 사도 중의 한 사람인 토마스가 마드라스(지금은 첸나이)로 포교하러 와서 사망하자 그의 묘 위에 세운 교회이다. 그는 1세기경(AD 52) 인도에 기독교를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무덤은 실제로 지하 예배당에 있다. 그 밖에 성 토마스가 숨어 지냈다는 Saidapet에 위치한 작은 산과 그가 순교한 성 토마스 산(St. Thomas Mount) 역시 첸나이에 남아 있는 기독교 유적지이다. 여기서 필자에게 흥미를 끄는 것은 도마의 인도 선교이다.

 

여기서 말하는 토마스는 성서에서 말하는 도마(Thomas)이다. 도마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우리가 도마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의심 많은 도마(a doubting Thomas)’ 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도마복음은 정경으로 분류되지 못하고 외경으로 취급되었고 도마복음, 도마행전 등 도마에 대한 모든 기록이 배척당하여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도마의 선교 활동은 바울보다 먼저였다는 사실은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의 선교 여행이 AD45-61이지만, 도마는 AD30~72까지이다. 도마의 남인도 선교 여행은 주로 후반기 약 22년 동안 이루어졌다. 선교 기간에는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소코타이 섬과 인도 케랄라의 마라바, 코치에 이어 인도 동남부인 마드라스(첸나이)에 가는 여정이었다. 약 40일의 긴 항해 끝에 도마(Thomas)가 A.D. 52년에 남인도에 있는 케랄라의 서해안 항구인 마라바(Marabbar)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으로 남쪽에 있는 코치에서도 선교하였다. 그 후 그 지방 일대에 7개의 교회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는 마드라스(첸나이)에서 선교하다가 AD72에 마이라풀(Mailapur)에서 이교도 원주민에게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실제로 첸나이에 가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2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기독교의 흔적을 직접 볼 수 있는 장소가 여러 군데 있다. 이런 영향으로 첸나이에는 인도 다른 지역에 비해 교회가 많은 편이다. 놀랍게도 첸나이는 인도의 케랄라와 더불어 세계 3대 성지순례 중 하나로 여겨졌다. 그 이유는 예수의 열두 제자가 선교지역을 제비 뽑기로 바티칸(베드로), 스페인 산티아고(야고보) 그리고 첸나이(도마) 등으로 할당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첸나이가 힌두교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속에서 기독교의 중요한 장소였다는 사실에 필자에게 놀람이었고 기독교 역사가 유럽보다 더 긴 역사가 있다 사실에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은 힌두교 중의 힌두교의 성지인 첸나이보다 더 남쪽에 있는 마드라이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2023/2/4 혜윰인문학연구소/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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