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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방콕 인문학 여행 2: 아유타야(Ayutthaya)-왓 프라시산펫(Wat Phra Si Sanphet), 왕궁터, 왓 프라마하탓(Wat Phra Maha That), 왓 로카야쑤타람(Wat Chaiwatthanaram), 위한 프라 몽콘 보핏(Wat Mongkhon Bophit), 왓 ..

by 뜨르k 2023.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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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방콕 인문학 여행 2: 아유타야(Ayutthaya)-왓 프라시산펫(Wat Phra Si Sanphet), 왕궁터, 왓 프라마하탓(Wat Phra Maha That), 왓 로카야쑤타람(Wat Chaiwatthanaram), 위한 프라 몽콘 보핏(Wat Mongkhon Bophit), 왓 차이 와타나람, 야크샤(yakṣa)

 

두 번째 태국 인문학 여행은 태국의 두 번째 왕국의 수도였던 아유타야이다. 방콕에서 약 80km 정도 떨어졌다. 필자는 나나역에서 철도 BTS를 타고 머칫(Mo Chit) 역에서 하차하였다. 그리고 택시로 콘쑹 머칫 이(북부 터미널)에 도착하여 25승 미니버스로 1시간 30분 소요로 고대도시 아유타야에 도착했다. 우리는 흔히 태국 하면, 방콕과 파타야, 푸켓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최근 태국 내에서도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장소가 바로 아유타야가 아닌가 싶다. 옛 왕조의 기억을 간직한 아유타야, 옛 왕조 숨결 품은 아유타야, 이곳에 오면 과거 찬란했던 700년 전 왕조 수도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원과 유적지를 볼 수 있다. 아유타야는 유네스코에 의해 도시 전체가 유적지로 지정된 곳이다. 처음 11350년 우텅왕이 아유타야를 세웠고 이후 33명의 왕을 배출하며 아유타야는 왕국을 이끌어갔고 417년간 태국의 수도였다. 그리고 태국 최초 통일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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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에는 3개의 왕궁, 29개의 요새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주와 비슷하다. 또한, 지정학적으로 짜오프라야강 하류에 위치해 서양의 접촉이 처음으로 이뤄졌던 곳도 물론 아유타야이고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서 도시도 형성했었다. 17세기부터는 중국을 비롯해 일본, 유럽 등과 교역했고 동남아 강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크메르 왕조를 이룬 앙코르를 정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는 침략과 파괴의 역사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화려했던 아유타야 왕궁은 이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만 남아 있다. 아유타야에 가면 ‘하루 9개 사원을 방문하라’라는 말이 있다. 아유타야는 1,000여 개의 사원이 있다. 하루에 9개 사원을 방문해도 약 111일이 걸린다. 400여 년이란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아유타야는 이렇게 역사 속에 숨을 쉬고 있다. 이제 태국의 과거, 아유타야로 들어가 보자. 제일 먼저 가야 할 곳은 왓 프라씨산펫과 왕궁터이다.

 

 

왓 프라시산펫(Wat Phra Si Sanphet), 왕궁터

 

왓 프라씨산펫, “Buddha Si Sanphet의 사원”은 멀리서 보이는 왕의 유골이 있는 3개의 커다란 째디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여기는 왓 프라마하탓의 보리수 불상과 더불어 아유타야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아유타야의 전성기에 가장 큰 사원이었다. 사원은 1448년 아유타야 8대 왕인 보롬마뜨라이로까낫(Borommatrailokanat)에 의해 왕실 사원으로 세워졌다. 1503년 16m 높이로 세워진 째디는 원래 금으로 칠해졌으나 1767년 아유타야 33대 왕이자 아유타야 마지막 왕인 보름마라차(Borommaracha) 9세 때 미얀마의 침략으로 모두 사라지고 없다. 현재 필자가 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이다. 왕궁 복합체 일부로 수십 개의 큰 왕실 수도원(royal monastery)이 있는데 승려가 없는 왕궁이기 때문에 주로, 아유타야 왕들만 사용했다고 한다. 사원의 구조는 중심에 3개의 째디(chedi)가 있고 그사이에는 비하른(viharn)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구체적인 구조를 보면 세 개의 커다란 도금한 종 모양의 스투파 stupas(chedis)의 높은 플랫폼에 있고 각 째디 옆에는 피라미드형 지붕으로 된 태국 건축의 몬돕(mondops)이 있다. 그리고 플랫폼은 부처의 이미지가 늘어서 있는 벽으로 둘러싸인 화랑에 있다. 동쪽은 16m 높이의 도금한 Phra Si Sanphet Buddha와 2개의 불상을 모시는 거대한 비하른(viharn)이 있고 동쪽 벽 근처에는 안수당(安水堂)과 가장 북쪽에 있는 본회의장인 사라촘톰 홀(Sala Chom Thong Holl)이 있다. 또한, 사원 단지는 각각의 기본 방향에서 출입문이 있는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왓 프라씨산펫(Wat Phra Si Sanphet)의 건설의 역사는 수 세기 동안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 구조물은 아유타야의 첫 번째 왕이 된 유통(U Thong)이 왕궁 근처에 여러 개의 째디(chedis)를 세운 14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17세기 후반까지 이어진다. Borommatrailkkanat 왕이 1448년에 건축된 새로운 궁전을 건축할 때 오래된 궁전은 왕 수도원으로 개조했고 1491년 라마 디Ⅱ 왕은 아버지와 형을 위한 두 개의 째디(chedi)를 지었다. 몇 년 후 국왕은 Phra Si Sanphet라는 50m의 째디(chedis)와 비한른(viharn)를 지었다. 사원은 그때 현재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30년 후 또 하나의 째디(chedi)가 건설되어 라마 디 Ⅱ 왕의 유골을 안치하고 17세기 후반에는 프라 사트 프라 나라이(Prasat Phra Narai)라고 불리는 큰 십자형 비하른(viharn)은 세 개의 스투파스(stupas)를 지지하는 중앙 플랫폼의 서쪽에 세워졌다. 다음 목적지는 태국인의 신앙의 중심지로 대형 불상이 있는 ‘위한 프라 몽콘 보핏’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위한 프라 몽콘 보핏 (Wat Mongkhon Bophit)

 

왓 프라 씨 싼펫 옆에 자리한 사원이 바로, 위한 프라 몽콘 보핏 Wat Mongkhon Bophit이다. 15세기에 만들어진 태국에서 대형 청동 불상이 있는 곳이다. 사원은 1767년 내 미얀마 침범으로 소실되었다가 미얀마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원형대로 복구했다. 재건 당시 거대한 불상 안에서 수백 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어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 프라 몽콘 보핏을 모시고 있다고 해 ‘위한 프라 몽콘 보핏'으로 불리기도 한다. 위한은 태국어로 불당, 사원이라는 뜻이다. 왓 몽콘 보핏은 1538년에 제작되었고 당시 사원 이름은 왓 치치앙사이(Wat Chi Chiang Sai)였다. 17세기 초에 낙뢰로 불당이 소실된 후 서쪽으로 옮겨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어서 다시 안치했다. 18세기 초에 다시 불이 나서 심하게 부서졌고,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불상과 불당이 다시 세워졌으나 1767년 다시 미얀마에 의해 파괴되는 불운을 겪었다. 다행스럽게 불당은 1956년에 미얀마(버마)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원형대로 복구했다.

많은 태국인이 ‘왓 몽콘 보핏(Wat Mongkhon Bophit)’에서 불공을 드리기 위해 아유타야를 방문한다고 한다. 특히 주말 및 공휴일에는 불공을 드리러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태국인들의 불심을 직접 목격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연인이 함께 사원에 들어가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인들이 함께 오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또한, 대부분 태국인의 불교는 테라바다 불교(Theravada Buddhism)이다, 즉 테라바다 불교, 즉 소승불교는 수코타이(Sukhothai) 왕국 시절부터 시작되어 태국왕국의 기초가 되었다. 대형 청동 불상으로 상징되는 수코타이 왕국이 쇠퇴하고 신흥 왕국 아유타야(Ayutthaya)에 합병되면서 아유타야는 태국만의 독특한 불교문화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사원의 특색도 크메르의 영향에서 벗어나 아라비아, 인도 등의 다양한 건축 양식이 접목되었다. 그전에는 불상과 힌두교 신들을 동시에 안치했으나, 특별하게 왓 몽콘 보핏은 태국인에게 이러한 문화적 영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사원으로 보인다. 다음 방문지는 그 유명한 왓 차이왓타나람(Wat Chaiwatthanaram) 사원이다.

 

 

왓 차이 왓타나람(Wat Chaiwatthanaram)

 

왓 차이왓타나람(Wat Chaiwatthanaram) 사원에는 태국 현지인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아유타야의 사원들 중에서도 왓 차이왓타나람(Wat Chaiwatthanaram)은 규모와 완성도 면에서 가장 손꼽히는 사원이다. 사원 중앙에 있는 육각형 탑은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를 모델로 건축한 사원이다. 마치 옥수수의 모양을 닮았다. 주변 8개의 작은 탑들도 스리랑카 양식을 보여준다. 드넓은 사원을 배경으로 눈을 감고 있으면 잠시나마 700년 전 왕조의 숨결이 느껴질 듯하다. 이 사원은 아유타야의 4대 1630년 프라쌋 왕이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사원으로, 아름답기로 꼽히는 곳이다. 과거에는 왕실 전용 사원이자 왕족의 화장터로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짜오프라야강 서편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몰을 바라보는 장소로 유명하다.

 

사원 중앙에 직사각형 모양의 크메르 양식의 불탑 35m의 대형 석조 프랑(Prang)이 있고 주변으로 4개의 작은 프랑이 둘러있다. 또한, 석조 안에 대형 불상이 놓여 있으며, 천장은 검정 칠기 바탕에 금색의 별 문양을 새겨놓았다. 중앙 사원은 태국의 메루(Meru) 산, 즉, 세상의 중심임을 의미하고 주위에 있는 작은 불탑 4개는 바다로, 즉, 세계로 향하는 길을 나타낸다. 태국의 14세기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프랑에는 붓다의 일생이 그려져 있었고 외벽을 따라 120개의 불상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767년 미얀마의 침공으로 아유타야가 무너지면서 사원 대부분이 훼손되었다. 그 뒤 1980년대까지 방치되어 약탈과 불법 거주자들의 아지트가 될 정도로 황폐해졌다. 그리하여, 태국 정부는 1987년에 역사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1992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지만, 2011년 또한 대홍수로 인한 침수로 인하여 또한 손상을 입었다. 현재는 태국 정부와 세계유산기금(World Monuments Fund) 등의 공동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다음 발걸음은 목이 잘린 불상으로 유명한 ‘왓 프라 마하 탓(Wat Phra Maha That)’으로 향했다,

 

 

왓 프라마하탓(Wat Phra Maha That)

 

아유타야의 ‘왓 프라 마하 탓(Wat Phra Maha That)’와 이름이 같은 수코타이 ‘왓 프라 마하 탓’가 방콕에도 있다. 수코타이 ‘왓 프라 마하 탓’처럼 국가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원으로, 1374년에 크메르 양식으로 건축된 아유타야 최대 규모의 사원이다. 14세기 보롬 마라차 1세기 만들기 시작하여 라메쑤언이 증축한 것이다. 여기에는 아유타야의 슬픈 역사와 함께 목이 잘린 불상들과 무너져 내린 유적들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유적지는 붕괴하고 심지어는 유물과 보물이 도굴꾼들에 의해 도굴되었다. 이에 태국 정부는 파괴된 유적을 재건하며 수습된 금불상 몇 점과 금, 루비, 크리스털로 만든 장식품들은 태국국립박물관에 보존, 전시되어 있다.

실제로 왓 프라 마하 탓에 가보면 무너진 유적지가 아닌 어느 나무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를 눈여겨보고 장면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나무뿌리에 휘감겨 있는 미얀마군에 처참하게 목이 잘린 불상의 얼굴이다. 왓 마하 탓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도 나무뿌리에 감긴 불상의 머리 때문이다. 1767년 미얀마(버마)침략 당시 아유타야의 힘이 사원과 불상에서 나온다고 믿는 미얀마(버마)군에 의해 아유타야의 모든 사원이 파괴되고 불상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그들은 땅바닥에 뒹굴던 잘려 나간 불상의 머리를 나무뿌리에 감겨 환생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아니 믿고 있다. 나무뿌리에 감긴 불상은 결국, 아유타야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고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그리고 매년 12월 “빛과 소리 축제”로 재현하고 있다. 다음 목적지는 거대한 와불상으로 유명한 ‘왓 로카야쑤타람’이다.

 

 

왓 로카야수타람(Wat Lokaya sutharam)

 

거대한 와불상이 있는 왓 로카야쑤타람은 도로변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 담장이 없는지라 밖에서도 잘 보인다. 물론 입장료도 없다. 야외에 있어서인지 와불상은 색이 변색하여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하다. 물론 태국의 날씨 우기로 인한 비와 습도의 원인이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와불상의 아름다운 미소가 약간 퇴색되어 보인다. 와불상은 태국어로 프라 부다사이야르트(phra Buddhasaiyart)이고 영어는 Reclining Buddha라고 한다. 와불은 부처가 숨을 거둘 때 열반에 드는 모습으로 사진처럼 머리는 연꽃 위에 있고 다리와 발은 비스듬히 누워있다. 자세히 보면 머리는 북쪽에, 다리는 남쪽에, 얼굴은 서쪽에, 등은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왼손은 몸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오른손은 굽혀서 머리 아래로 넣었다.

 

왓 로카야쑤타람의 와불상의 크기는 길이가 42m이고 높이는 8m에 이른다. 참으로 거대하다. 사원의 대부분은 미얀마군에 파괴되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근데 이것 역시도 1956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이 사원은 아유타야 왕국의 중반에 인타라차왕(King Intharacha)이 세웠다. 그는 전임 왕인 람라자(King Ramraja)를 폐위시키고 왕에 오른 브로마라자와(King Boromaraja)의 남동생이다. 나카린타라티랏(Nakharintharathirat)이라 부른다. 아유타야 왕국의 왕위 계보를 보면 정상적으로 계승된 경우는 거의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 대부분 처절한 권력투쟁으로 쟁취한 경우라고 보면 된다. 이런 사실은 역사를 통해서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잠시 간략한 아유타야의 역사를 더듬어 보자.

 

 

간략한 아유타야 역사

 

아유타야 왕국의 건국은 초대 국왕인 우통을 중심으로 세를 확장해 나갔다가 초기에는 자치적인 도시국가들이 아유타야의 국왕과 느슨한 조공 관계로 엮인 형태로 있다가 아유타야 왕국은 군대와 정략결혼을 반복하며 세를 불려 나갔고, 15세기에 이르자 크메르 제국을 공격하고 수도인 앙코르를 점령하기까지 하였다. 아유타야는 크메르를 몰아내고 지역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기존의 수코타이 왕국마저 멸망시키고 아유타야에 편입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 후 말레이반도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실패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아유타야 왕국은 16세기 초에 처음으로 유럽과 교류했다. 포르투갈의 사절이 1511년에 왕국에 도착하였고, 당시 왕이었던 라마티보디 2세에게 군사를 공물로 바쳤다. 이후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이 연이어 도착하였다.

 

그러던 중 아유타야 왕국이 1540년대부터 미얀마와 전쟁을 벌이고 결국 1570년에 아유타야 왕국의 수도가 함락된다. 이후 아유타야 왕국은 1584년에 다시 독립을 선언하기 전까지 미얀마의 봉신 국으로 남았다. 아유타야는 나레쑤언 국왕이 미얀마에서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 이전의 피해를 보상하고 황금기에 들어섰다. 아유타야 왕국은 18세기의 두 번째 사반세기 동안 예술, 문학 등을 눈부시게 꽃 피웠으며 교육을 중점으로 두어 다양한 문화 발전 정책을 펼쳤다. 또한 1715년에 캄보디아 지역의 통치권을 두고 베트남과 일부 전쟁을 벌인 것만 제외하면, 외교적으로도 매우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였다. 그러나 이런 황금기도 결국 끝을 맡았고, 피비린내 나는 계승 전쟁이 일어나며 내분이 발생했으며 장관들과 왕자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혈투를 벌였다. 이렇게 왕국이 약해지는 도중, 1765년에 4만 명에 달하는 미얀마 군대가 아유타야를 침략하였으며 14개월에 걸쳐 요새를 공격한 끝에 마침내 1767년 4월에 수도 아유타야가 함락되며 아유타야 왕국도 멸망하였다.

 

미얀마가 쳐들어와 수도 아유타야를 함락시키고 왕국이 멸망한 이후, 태국은 정치적 대혼란에 휩싸였다. 미얀마 군대는 아유타야에 주둔하면서 5명의 지방관이 서로 국왕을 자처하고 전쟁을 벌였다. 그중 군사령관이었던 탁신 장군이 점차 내분을 진압하고 통합하면서 톤부리를 장악한다. 이후 같은 해에 아유타야를 점거하고 있던 미얀마 군대도 모두 몰아낸다. 탁신 장군은 이후 왕으로 즉위하였고, 톤부리를 임시 수도로 삼아 톤부리왕조를 세웠다. 그는 즉위 이후 1775년에 미얀마 세력을 란나 지역에서 몰아내고, 1778년에는 비엔티안을 침략하고 1770년대에는 캄보디아에 태국의 왕조를 세우려고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고 톤부리왕조 말기에 탁신 장군의 ‘광기’에 그의 휘하 장군이었던 짜오프라야 차크리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탁신 왕과 아들들을 죽이고 1782년 4월 6일에 라타나코신 왕국을 건국한다.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프라야 짜끄리 왕조이다. 마지막으로 태국 사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크샤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야크샤(산스크리트어: yakṣa, Pali : yakkha)

 

태국 여행을 하다 보면 사원이나 사원 입구를 지키거나 건물을 떠받치는 조각물을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이 일종의 야크샤(yakṣa)이다. 야크샤(산스크리트어: yakṣa, Pali : yakkha )는 물, 비옥함, 나무, 숲, 보물 및 광야와 연결되어 일반적으로 자비로움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장난스럽거나 변덕스러운 자연 정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문헌,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고대 및 중세 시대 사원에서 수호신으로 등장한다. 불교 이야기에 나오는 대부분 야크샤는 인간으로서 전생에 지은 죄 때문에 그 형태로 다시 태어난 못생긴 도깨비이다. 왓 프라깨우로 들어가면 도깨비 수호상이 있다. 도깨비 수호상은 악령들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역할을 한다. 태국에서 Yaks는 사원 예술과 건축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적어도 14세기 이래로 사찰에서 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흔히 볼 수 있다. 주로 야크샤의 도자기 조각은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 수코타이와 아유타야 시대에 태국 북부의 가마 단지에서 제작되었다. 모습은 주로 동그랗고 불룩한 눈과 튀어나온 송곳니를 가진 특징적인 얼굴로 주로 묘사된다.

 

이제 아유타야 여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왓 프라시산펫(Wat Phra Si Sanphet), 왕궁터, 왓 프라마하탓(Wat Phra Maha That), 왓 로카야쑤타람(Wat Chaiwatthanaram), 위한 프라 몽콘 보핏(Wat Mongkhon Bophit), 왓 차이 와타나람등 태국 고대 왕국의 아유타야의 찬란했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비록 아유타야 전부를 다 돌아보지 못했지만, 침략으로 인한 파괴로 그 흔적이 많이 사라졌지만, 거대 왕국의 찬란했던 불교와 역사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2023/7/7 혜윰인문학연구소/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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