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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10– 티루치라팔리(Tiruchirapalli), 마두라이(Madurai): 스리 랑가나타 스와미(Sri Ranganathaswamy)사원, 미낙시 순다래슈와라(Minaksi Sundareshwara) 사원, 시바 신과 미낙시의 사랑, ..

by 뜨르k 2023.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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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10– 티루치라팔리(Tiruchirapalli), 마두라이(Madurai): 스리 랑가나타 스와미(Sri Ranganathaswamy)사원, 미낙시 순다래슈와라(Minaksi Sundareshwara) 사원, 시바 신과 미낙시의 사랑, 한글과 타밀어(드라비다어)

 

 

남인도는 첸나이가 속한 타밀나두(Tamil Nadu)주, 인도 향신료 특구 케랄라(Kerala)주, 인도의 실리콘밸리인 뱅갈로르시가 있는 안드라프라데시(Andhra Pradesh)주, 인도에서 가장 멋진 유럽풍 궁전의 야경이 있는 마이소르가 속한 카르나타카(Karnataka)주, 인도에서 진주와 다이아몬드 거래의 중심지 하이데라바드가 있는 텔랑가나(Telangana)주, 마지막으로 과거 특이하게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퐁디셰리(Puducherry or Pondichery) 특별자치구가 등이 있다. 남인도 여행은 북인도와 달리 드라비다 양식의 힌두사원들이 순수하게 잘 보존되어 있어 색다른 흥미를 줄 뿐만 아니라 생생한 인물 조각상을 비롯하여 화려한 색깔은 경이로움마저 들 정도이다. 드라비다인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발전시킨 건축양식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이런 의미에서 남인도로의 여행은 인도 문화의 퍼즐을 온전히 완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행의 만족감을 주었다. 이번 남인도 여행의 지역은 드라비다의 티루치라팔리(Tiruchirapalli)와 마두라이(Madurai) 여행이다.

 

 

전설과 역사가 풍부한 남인도: 티루치라팔리(Tiruchirapalli): 스리 랑가나타 스와미(Sri Ranganathaswamy)사원

 

드라티루치라팔리와 마두라이 지역은 고유한 드라비다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먼저 전설과 역사가 풍부한 남인도 최남단 타밀나두주의 ‘트리치’라고도 불리는 티루치라팔리(Tiruchirapalli)으로 떠나보자. 이 지역은 코베리 강기슭에 있는 곳으로 유서 깊은 사원과 유적, 교회, 그리고 모스크 등이 많다. 스리랑감 사원을 향하는 길에 먼저 83m 높이의 바위산에 세워진 록 포트(Rockfort) 사원도 있다. 계단이 무려 437개에 달한다고 한다. 이 중 특히 스리랑감 사원(Srirangam)은 그 규모가 대단하다. 스리랑감 사원의 정식 명칭은 스리 랑가나타 스와미(Sri Ranganathaswamy)사원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크고 정교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사원은 지상신 마하 비슈누(Maha Vishnu)의 한 형태인 랑가나타(Ranganatha)를 안치한 힌두사원이다. 지상 신 비슈누(Vishnu)를 모시는 108개의 디비아 데삼(Divya Desam)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디비아 데삼(Divya Desam) 사원은 Tamil Azhvars의 문헌에 기술된 108개의 비슈누 사원을 일컫는다. “Divya”는 “프리미엄”을 의미하고 “Desam”은 “위치”(사원)를 의미한다. 108개 사원 중 105개는 인도에 있고, 나머지 1개는 네팔에 있고 2개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한다. 사원은 11세기 스리랑감 성자인 라마누자(Ramanuja)와 그보다 앞선 나타무나, 야무나처랴의 업적으로 시작되는 비슈누파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사원에서는 종교의식 외 노래와 춤, 전통을 통해 초기 힌두교 박티(Bhakti) 운동의 중심 중 한 곳이었지만, 이 전통은 14세기에 중단되었다가 세월이 지나며 부활하게 된다.

 

사원의 면적은 19만 평으로 81개의 신전, 21개의 탑, 39개의 부속건물 일종의 세계 최대의 힌두교 사원 복합단지이다. 건축학적으로도 중요한 유적지로 인정받고 있으며 중세 초기와 중기, 남부 인도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러 비문에 따르면, 랑가나타 스와미사원이 영적 중심지 역할 뿐만 아니라 교육과 의료 시설을 운영하고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는 등 지역의 중요한 기관이자 자선단체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랑가나타 스와미사원에서는 덴칼라이(Then kalai) 전통을 따라서 해마다 마르가치(Margazhi)의 타밀(Tamil) 달 동안(12월-1월) 열리는 21일간의 축제에는 백만 명의 방문객이 모인다. 랑가라타 스와미 사원에는 고푸람이 21개나 있다. 중심 사원인 비마나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7개의 고푸람을 지나야 할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한다. 고푸람 중에서는 13층에 이르는 라자 고푸람(Raja Gopuram)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원 탑이다. 라자 고푸람은 비슈누 신을 숭배하는 스리 바이시나바(Sri Vaishnava) 힌두교 수도원인 아호빌라 마타(Ahobhila Matha)에 의해 1987년에 완성되었다. 네 번째 울타리 동쪽에 있는 흰색 고푸람은 가파른 피라미드 상부구조를 갖고 있어 다른 고푸람 보다 특이하게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면 길 양쪽에는 관광객들과 순례자들을 상대하는 다양한 상점이 즐비하게 서 있고 여러 고푸람이 겹겹이 서서 우리를 맞이한다. 마치 일렬로 환영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처럼 말이다. 4개 고푸람 중 가장 뒤에 있는 고푸람의 왕인 라자 고푸람이다. 또한, 입구에는 커다란 코끼리 형상을 한 가네샤(Ganesha) 신상이 세워져 있다. 지혜와 학문의 신으로 비교적 많이 알려진 힌두교 신 중 하나이다. 힌두교도들에게 코끼리는 매우 신성한 동물이기도 하다.

 

인도 사원의 건축양식에는 행운의 표시와 재앙을 물리치는 부적·상징·장식 등이 있다. 신들의 형상 외에도 동물, 신화 같은 존재, 악마의 탈, 그리고 장식 등이 사용한다. 그중에서 행운의 약속을 상징하는 만다라(Mandala)를 사용하는데 건물 지붕과 기둥 사이 공간에 들어가는 부조 형태의 조각인 프리즈(Frieze)를 구분 짓거나 그룹별로 종합하는 역할을 한다. 그 외 물병, 물고기, 거울, 다양한 동물, 신화 같은 존재 등이 행운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스와스티카(Swastika)라고 불리는 만(卍)자는 이미 아리안 이전의 인더스 문화의 인장과 테라코타(Terracotta) 등에서 나타나는데 다른 문화권에서도 태양과 불을 의미하며 행운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만(卍)자는 산스크리트어 스바스티카(Svastika) 또는 스와스티카(Swastika)로 시계방향, 또는 반시계 방향으로 꺾인 십자 모양의 무늬이다.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시크교 등의 인도 계통의 종교의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로 사용한다. 卍(좌만 자) 卐(우만 자) 모양은 방향이 다르지만 모두 같은 만자로 보면 된다. 보통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모양을 '스와스티카'라고 하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사우와스티카'라고 불리기도 한다. 만(卍)자 기원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인도 힌두교에서는 비슈누 신의 가슴에 난 털 모양이 ‘卍’자 모양이다. 태양을 숭배했던 아리안족은 태양의 방광을 본뜬 모습이라고 해 숭배했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방향이나 바람의 상징으로, 중국에서는 난간 무늬로 사용했다. 인도 이외에도 고대문명인 아시리아, 그리스, 로마 등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모양이 ‘卍’자다. 훌륭한 사람의 모습에는 ‘卍’자 모양이 많다고 인도인들은 믿었다. 부처의 가슴의 털 모양도 ‘卍’자 모양이었다고 한다. 불교《수행본기경》에는 부처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수도할 때 풀을 깔고 앉았는데, 풀의 모양이 ‘卍’자 모양의 길상초였다고 한다.

 

 

 

사랑 이야기가 있는 사원: 마두라이(Madurai)-미낙시 순다래슈와라(Minaksi Sundareshwara) 사원. 시바 신과 미낙시의 사랑

 

미낙시 순다래슈와라(Minaksi Sundareshwara) 사원

 

남인도 두 번째 방문지는 마두라이(Madurai)이다. 마두라이(Madurai)는 드라비다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고 남인도 최대의 순례지이다. 그리고 7세기부터 13세기에는 판드야(Pandya) 왕조의 수도이지만 불행하게 그때 당시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때 당시 마두라이 역사는 대략 이렇다. 14세기에는 할지(Khalji) 왕조의 장군에게 침략당하여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지만 50년 후에 비자야나가르(Vijayanagara) 왕조가 다시 지배하여 그때부터 다시 힌두교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1565년 비자야나가르 왕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패망하게 되자 나야크(Nayak) 왕조가 독립하여 1781년까지 이 지방을 지배하였다. 특히 티루말라이 나야크(Tirumalai Nayak, 1623~1659)의 통치하에서 번영하게 되었으며 이때 건설된 미낙시 순다래슈와라(Minaksi Sundareshwara) 사원은 근세의 힌두교 사원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지금 필자가 보고 있는 모습이 그때 당시 건축한 것이다.

 

북인도 무굴제국의 샤자한 왕(1592~1666)이 사랑하는 부인 뭄타즈마할을 위하여 타지마할을 건축했다면, 이곳 남인도의 마두라이의 스리미낙시 사원은 샤자한 왕과 같은 시대에 왕을 지냈던 티루말라이 나약 왕(1623~1655)이 시바 신과 미낙시의 사랑을 그리면서 봉헌한 건축물이다. 그런데 샤자한 왕은 타지마할을 건축 후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서 왕위를 박탈당한다. 정사에 관심이 없고 오직 건축물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국가재정이 파탄에 이르렀다. 나약 왕 역시 거대한 궁전을 짓고 그의 손자 쵸카나따 나약 왕 대에 이르러 그가 지었던 나약 궁전이 원래 규모의 1/4만 남고 파괴되었다. 참으로 권력 무상이다. 그리고 타지마할이 인도 사라센 양식을 대표한다면 스리미낙시 사원은 드라비다 힌두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북인도 또는 아리안적인 나가라(Nagara)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남인도 드라비다인의 비마나(Vimana)양식이다. 이 양식은 힌두교 푸라나와 인도 서사시에서 등장하는 비행 전차로 일명 ‘신들의 비행 전차’이다. 그리고 두 양식이 혼합된 형태가 인도 중간 부분인 데칸고원 북쪽에서 드물게 나는 데칸고원의 베사라(Vesara)양식이다. 남인도의 드라비다 사원들은 여러 영역을 걸쳐 고유한 사원 도시로 발전했다. 사원의 탑은 위치에 따라 피라미드 모양으로 솟아올라 수평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고 반원형 모양의 덮개가 그 위에 얹어져 있다. 화려한 조각이 주변에 층을 이루고 있으며 문과 벽으로 이루어진 건물들이 사원을 구성하고 있다.

 

이제 스리미낙시 사원으로 들어가 보자. 스리미낙시 사원은 넓이가 자그마치 65만㎡이고 6m 높이의 거대한 석벽인 외주벽(外周壁)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원은 처음 건축할 보다 범위가 몇 차례씩 확대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높이가 45m 이상의 거대한 고푸람이 본전인 미낙시 순다레스와라 사원을 동서남북에서 에워싸여있다. 그 사이에는 8개의 크고 작은 고푸람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모두 고푸림이 12개이다. 그중 남쪽 고푸라는 제일 높다. 무려 52m이다. 평상시에는 남쪽 고푸라[塔門]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동쪽 고푸라가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고푸라는 수많은 신상을 조각하여 장식되어 있으며 약 20년마다 천연 소재 염료를 사용하여 극채색으로 새롭게 색칠을 하게 된다. 고푸람은 힌두교 신화에 등장하는 신과 악마를 조각으로 새겼는데 그 수가 무려 3만 3천의 신과 악마가 새겨진 거대한 신전이다. 고푸람(Gopuram)은 중앙에 통로가 있고, 그 위에 몇 층 식 계단을 겹쳐 올려 맨 위 지붕에 아치 모형의 시카라(Sikhra, 꼭대기)를 얹은 일종의 힌두사원의 탑문이다. 고푸람의 기단은 견고한 석재로 건축되어 있고, 수직으로 우뚝 선 사다리꼴 모양의 탑신은 벽돌로 쌓아 올렸다.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벽체에는 소조(점토 등)로 만든 수많은 신상과 동물들이 총천연색으로 빼곡히 조각되어 있다. 기괴한 신상들의 표정과 동작, 그리고 현란한 색채가 혼을 잃을 만큼 화려하고 감동적이다. 신을 향한 인도인들의 믿음과 열정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해본다.

 

본전 안으로 들어가니 사원 북적대는 인파와 각종 종교의식, 코를 찌르는 향냄새, 현란한 조각, 황금빛 기둥, 주문과 기도 소리로 가득하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회랑에 죽 늘어선 기둥과 그 기둥에 새겨진 비자야나가르 양식으로 형형색색의 갖가지 모형의 조각들이 있다. 한쪽에는 여성의 관능적인 모습이 새겨져 있기도 하고 대조적으로 건장한 남성 이미지 동물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그 관능적인 모습이 신과 인간 간의 사랑을 이야기해주는 듯하다. 985개의 돌기둥으로 받쳐진 회랑은 “1,000개의 만다파(Thousand Pillars Mandapam)”라고 불리고 있다. 만다파(Mandapa)는 인도의 힌두 건축사원으로 열주가 있는 홀을 말한다. 잠시 고개를 들면 천장에는 수없이 많은 벽화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또한 사원 내에는 양신(兩神)의 사당을 감싸고 있는 안쪽 회랑이 있으며 "황금연(黃金蓮)의 목욕지(沐浴池)"가 있다. 여신의 황금 연지(Golden Lotus Tank)라 불리는 이 연못은 몸과 마음을 정화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만다파와 소사장(小祠堂)들이 있다. 마두라이시 최대의 축제는 시바 신과 미낙시 신비(神妃)의 결혼 행렬이다. 매년 연출하는 행사로 두 개의 신상을 태운 산차(山車)를 중심으로 하는 축제행렬이 시내를 누비고 다니게 된다. 마치 일본인의 마츠리 축제 때처럼 말이다. 여기서도 미코시와 같은 신을 모신 가마로 동내를 돌아다니는 것이 산차(山車)이다. 왜 산차(山車)일까? 그것은 산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신이 산맥과 산 정상의 바위와 나무에 강림한다고 믿었다. 산차(山車)는 축제의 사이에 신을 초대해서 축제하는 동안 머물게 하려고 것이다.

 

 

신들의 사랑 이야기: 시바 신과 미낙시의 사랑

 

미낙시는 “어안(魚眼)을 가진 여신”이란 뜻이며 처음에는 드라비다 타밀(Tamil) 민족의 토착 여신이었지만, 이것이 힌두교에 수용되면서 시바의 신비(神妃, 파르비타)와 동화되어 동일시하게 되었다. 후대에 힌두교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시바 신과 결합하여 시바의 부인으로 자리매김한다. 순다래슈와라는 시바 신의 이명(異名)이다. 미낙시와 관련된 신화도 전해지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스리미낙시(Sri Meenakshi) 사원은 원래 2천여 년 전 판디아 왕국 때부터 터를 잡기 시작한다. 판디아왕조(Pandya:BC 3세기~16세기)의 2대완 판디아는 시바를 위한 거대한 사원을 건축하기로 하지만 왕은 후손이 없어 시바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시바는 왕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었고 기도를 집전하는 사원의 불길에서 여자아이가 나타난다. 그런데 그 여아는 괴이하게도 물고기 모양의 눈과 3개의 젖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물고기 모양의 눈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자연스럽게 미낙시(Meenakshi : 물고기 눈을 의미)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아이의 괴이한 모습에 왕의 근심은 깊어만 가는데, 어느 날 한 예언자가 나타나 “이 아이는 자라나서 미래의 배우자인 남편 시바 신을 만나면 세 개의 젖가슴 중 가운데 젖가슴이 사라질 것이다"란 말을 전해 준다. 왕과 왕비는 감사해하며 아기를 타다 타가라고 이름 짓고 정성스럽게 키운다. 타다 타가는 평범한 소년처럼 자라났다. 군사학과 왕위수업을 착실하게 받은 뒤 왕위 계승식을 올려야 할 때가 되자 그녀는 전통에 따라 8방향에 있는 세계들에 전쟁해야 했다. 그녀는 이웃 나라를 비롯한 데바의 왕국, 브라마의 왕국과 비슈누의 왕국을 차례로 정복하고 세상 끝이 위치한 시바 신의 왕국 카알라스로 향한다. 히말라야로 여행을 떠나서 카일라스산에 머무는 시바 신을 만난다. 그런데 자신만만했던 그녀가 시바 신을 보자마자 싸우기는커녕, 사랑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절하게 된다. 그 순간 그녀의 세 번째 가슴은 사라지고 그녀는 시바 신이 그녀의 운명적인 남편임을 알게 된다. 동시에 그녀는 자기 본질이 여신 파르바티임을 깨닫는다. 이때 시바는 수행 중이라 그녀를 일단 돌려보내고 수행을 마친 8년 후에 ‘순다레슈와라’라는 화신으로 이곳 마두라이에 나타나 미 낚시와 결혼식을 올리고 마두라이를 통치한다.” 이후 이들은 미낙시 사원의 주신인 미낙시 여신과 순다레스와라 신으로 모셔져 오늘에 이르게 된다.

 

신들의 세계에서도 남신과 여신 사이의 사랑이 매우 중요한 듯하다. 신들도 성이 다른 두 신이 결합을 해야만 비로소 우주를 다스리는 힘이 생긴다. 다시 말하자면 신들의 세계에서도 서로 신들의 음과 양이 결합해야 에너지가 충만해진다. 그 에너지로 우주의 창조와 파괴를 하여 우주가 균형을 이룰 수 있다. 특히 시바 신은 강력한 힘으로 파괴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 힘의 원천이 바로 그의 부인 파루파티로부터이다. 미낙시(Meenakshi)는 시바의 배우자인 파르파티의 화신으로 다시 태어난 여인이다. 파르파티는 시바의 두 번째 부인으로 시바의 첫 번째 부인인 사티(Sati)의 화신이라고 한다. 결국 미낙시는 시바의 첫째 부인인 사티의 화신으로 다시 태어난 셈입니다. 파르파티는 모든 힘의 원천으로 시바는 파르파티와 결합을 해야만 비로소 세상을 파괴하는 힘을 가질 수 있다. 시바는 원래 사랑했던 첫 부인 사티를 기다렸고, 그들은 순다레슈와라와 미낙시라는 아바타로 다시 태어나 못다 한 사랑을 다시 이어가게 된다. 신들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나 '사랑'의 힘은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모양이다. 지금도 이 사원에서는 금실이 좋기로 소문난 시바 신과 미낙시 신과의 전설을 기리며 밤이 되면 순다레슈와라(시바 신) 신상을 가마에 태워 미낙시의 처소로 들여보내 합방을 시키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그 가마를 순다레슈와라의 처소로 옮기는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한다.

 

파르바티의 화신 미낙시

그래서 인도의 서민들은 창조의 신인 브라만이나 우주를 지탱하게 해주는 비슈누 신보다 영력의 힘을 가진 시바 신에 더 많은 애착을 두고 섬긴다. 시바 신은 정의와 싸우는 비슈누와 다르게 세상에서 존재하는 신 중에 가장 모호한 신이다. 항상 음경이 서 있지만, 결코, 사정하지 않는 남근, 화장터인 신인 동시에 부활의 신, 금욕을 지키는 신이지만 변화의 거센 바람을 상징하기도 한다. 시바는 창조자이면서 파괴자이고 금욕의 신이면서 생식의 신이다. 또 시바는 요가의 신이고 히말라야산맥에 앉아 명상하고 남근을 상징으로 삼아 링가 속에 추상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링가(남근)는 시바가 현현한 것으로 시바의 양면적 성격을 소유하고 있다. 시바는 세상을 초탈한 고행가 요가의 신이기도 하지만 에로티시즘과 정력의 상징인 남근으로 숭배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시바의 힘은 자신의 동반자인 사티와 파르바티 혹은 파괴의 여신인 칼리나 두르가 등 여신들 안에 나타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파르파티는 히말라야 딸이다. 그래서 파르바티와 시바에 관한 이야기는 배경이 히말라야이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코끼리 머리를 한 가네샤와 전사의 신 스칸다까지 시바와 파르바티 가족은 힌두교 신화에서 가족의 신을 형성하고 있다. 가네샤 탄생에 대한 신화는 다음과 같다. 파르바티가 목욕하다가 자기 다리에서 때를 벗겨 약초를 섞어서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다. 파르바티는 형상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자신이 목욕하는 동안 밖에서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감시하도록 했다. 남편 시바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시바가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가네샤는 그를 막고는 끝까지 들어가지 못 하게 했다. 시바는 화가 나서 그의 목을 잘라 버렸는데, 그러고 나서야 그가 파르바티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바는 자신의 정예부대원들을 불러 숲속에 나가 누구든 처음 만나게 되는 자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들이 처음 만나는 것은 코끼리였기 때문에 그들이 가져온 것은 코끼리 머리였다. 시바는 이것을 가네샤의 어깨에 붙여서 다시 생명을 찾게 했다. 가네샤는 시바와 파르바티의 환영을 받으며 함께 신이 되었고 ‘정예부대의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가네샤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 가네샤는 파르바티의 문을 지키면서 대범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문의 수호신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가네샤는 흔히 사원이나 가정의 집의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본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보리수나무 밑에 5개의 머리를 가진 코브라 뱀 신이 버티고 서 있다. 보리수나무에는 뱀 신에게 바치는 물건들을 나무상자에 담아 매달아 놓았고 이 공양물을 45일간 매달아 놓으면 뱀 신을 통해 영력을 가진 삭티(Shakti)로 부터 신선한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원을 기원하며 뱀 신에게 공물을 바친다. 인도의 종교와 예술에서 암소, 수소, 그리고 뱀(코브라)은 상당히 상징적 가치를 가진다. 뱀이나 소에 대한 숭배는 신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뱀은 독이 있어 생명을 파괴할 수도 있는 시바의 목을 장식하며 생명을 보호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시바의 아들인 가네샤는 발목과 가슴에 감은 코브라의 보호를 받고 있다. 원래 타밀 지방의 신이었다가 뒤에 시바의 아들이 된 무르간 신은 입에 코브라를 물고 공작새를 타고 다닌다. 코브라는 시바 링가를 지키는 수호신이기도 하다. 뱀 신에 대한 숭배는 여전히 남인도 지역에서는 성행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글 뿌리 찾기: 타밀어와 한글 그리고 문화

 

남인도에 여행하다 보면 여기저기 들리는 소리가 한글과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되는 데 왠지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한국과 남인도는 시간과 공간, 사회적 배경이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어와 드라비다어(타밀어)의 어휘 하나하나를 비교해 보면, 그 발음과 뜻이 너무나 일치함에 놀라게 된다. 그 종족이 바로 남인도 드라비다 종족이다. 드라비다인 종족은 유럽 아리아족의 침입이 있던 기원전 15세기 인도 남부로 쫓겨난 토착민을 말한다. 드라비다 종족의 말은 타밀어이다. 타밀어는 타밀나두를 중심으로 인도 전역에 정착했던 토착민이 쓰던 언어다. 드라비다어족 언어, 그중에서도 인구가 가장 많은 타밀어의 어휘 중에 우리나라 한글의 어휘와 소리 그리고 의미가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까? 더욱이 어휘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문법의 유사성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필자는 놀랐다. 둘 다 어순이 주어, 목적어 동사라는 공통점이 있고, 한글의 조사와 상응되는 품사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타밀어 문장의 단어만 번역한 후, 순서대로 배열하면 바로 한글이 될 정도이다.

 

 

2012년에 개봉한 Life of Pi 타밀어 영화가 한국에서 흥행했는데 영화 대사 중 한글과 비슷한 말이 나와서 사람들이 의아해했다고 한다. 가장 당황해한 것은 주인공이 엄마와 아빠를 부를 때였다. 실제로, 타밀어에는 ‘엄마(한국어)=엄마(타밀어)’ ‘아빠’=‘아빠’ 이외에 ‘아버지=아버치’, ‘나는=난’, ‘너=니’, ‘이라와=잉게와’, ‘봐=’바르‘ 등을 비롯해 많은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마루=산’과 같은 지형과, ‘웇치=위’, ‘울래=안’과 같은 위치, ‘아리달=알다’, ‘이루달=이다/있다’와 같이 동작이나 상태, ‘사리=맞음/정확함’, ‘이두=동의어/등가물’과 같이 추상적 개념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그 외에도 ‘말’은 드라비다어로 ‘마루’다. ‘비(雨)’는 ‘뻬이’다. ‘나무’는 ‘마누’, ‘풀’은 ‘뿔’이다. 동사 ‘안다.’는 ‘안’이고 ‘알다’는 ‘아리’다. ‘왕’은 ‘왕’이다. ‘태양’은 ‘수리야’라 불렀다. 수리야의 ‘수리’는 머리 꼭대기를 뜻하는 한글 ‘정수리’의 수리와 같이 ‘꼭대기’를 뜻한다.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나는 너랑 서울에 왔다’라는 말은 타밀어로 ‘나누 닝가룸 서울 완돔’이다. 어떤 학자는 우리말 어휘 중 500여 단어의 발음이 타밀어와 비슷하고, 어근의 2,000여 단어가 타밀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는 정서도 우리와 비슷하다. 이모작이나 삼모작 농사를 짓는다. 물론 주식은 쌀이다. 식사 때 마주치면 “밥 먹었어?”라고 묻는다. 잔칫날이면 거지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이 손님이 되어 식사를 대접받는다. 조상을 모시는 문화도 비슷하다.

 

이처럼 한글과 타밀어 사이에 있는 많은 유사성을 통해 보면 고대에 두 나라 사이에서 깊은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현재 드리비다 족을 보면 우리와 외모가 완전히 다르다. 피부도 검고 키도 우리나라 사람보다 평균적으로 작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문화를 보면 좀 다르다. 특히 부뚜막, 아궁이는 옛날 우리 시골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 솥을 걸고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모습 말이다. 그리고 우리 전통 민속놀이의 형태와 명칭도 거의 비슷하다. 우리나라 설날에 즐기는 윷놀이를 비롯하여 제기차기, 쥐불놀이, 팽이 놀이 등 민속놀이도 그렇다. 고대 타밀어로 ‘윳노린’, ‘제기노리’, ‘추불노리’, ‘팡이노리’로 불리고 그 놀이 방식도 거의 유사하다. 필자가 어렸을 때 보았던 아기를 출산했을 때, 귀신을 쫓거나 부정 타지 말라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려고 집 문 앞에 금줄을 달아놓은 전통문화도 닮았다. 우리는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고추를 여자아이의 경우는 숯 등을 달아놓는다. 타밀 전통 관습도 유사하다. 다만 열대지방이라 고추나 숯 대신에 망고 열매나 나뭇잎을 달아놓는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 민족의 구전 민요 ‘아리랑’의 노랫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와 같은 구절이 있는 노래도 있다. 타밀족의 대표적 노래인 자장가 ‘탈라뚜(Thalaattu)’에 나오는 후렴구 “아리라~ 아리라~ 아라리로”를 들으면 너무나 같다는 생각이 든다. ‘탈라뚜’는 타밀어로 ‘우는 아이 달래는 노래’라는 뜻이다. 탈라뚜가 우리나라의 아리랑이 타밀 자장가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추측할 수 있다. ‘도리도리, 짝짜꿍, 곤지곤지, 죔죔, 까꿍, 맴매’ 등 아기 몸짓 단어들도 거의 유사하다.

 

한글과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있다는 주장은 이미 100여 년 전부터 있었다.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963년~1949년)는 한글을 배우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인도 남부에 사는 드라비다족의 타밀어와 많은 어휘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가 1905년 저술한 ‘한국어(한글)와 드라비다어의 비교 연구(Comparatives Grammer of Korean and Dravidian, A Search for the Siverian Klondike)’에서 두 언어의 유사성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했다. 이 책에서 헐버트 선교사는 “두 말이 유사한 것은 한반도에 정착한 선주민이 최소한 일부 지역이라도 남방에서부터 들어왔음을 입증해주는 증거의 고리”라고 주장했다. 언어학자 강길운 박사도 그가 쓴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라는 책에서 고대 가야에서 지배층이 쓰던 말들은 거의 드라비다족의 타밀어라고 말한다. 그 근거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가야의 초대 왕비 허왕후(許王侯)가 인도에서 건너왔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2,000년 전에 이미 인도와 해상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도보다 훨씬 먼 아랍인들이 이미 당시 신라에 들어와서 교역했다는 기록을 보면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우리나라에 왔듯이 벼농사, 난생신화,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 역시 인도에서 한반도로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경주와 포항에서 대거 발견되는 고인돌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해양을 통해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존재하는 고인돌이 인도에도 많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가락국 신화에도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이 이주해 온 사실이 있다. 신라 진흥왕에는 인도 아육왕(阿育王)이 배에 실어 보낸 황금과 철로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바다 남쪽에 큰 배가 하유현 사포(현재 울주 곡포)에 정박했다. 조사해 보니 첩 문이 있었다. ‘서축(西竺)의 아육왕이 황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장차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고 했으나 아직 이루지 못해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다. 축원하여 바라건대 인연이 있는 나라에 이르러 장육존용(丈六尊容)을 이루어라.’ 아울러 일불이보살상(一佛二菩薩像)의 모형도 실었다. 현의 관리가 장계를 갖춰 왕에게 아뢰니, 현의 성 동쪽 시원하고 높은 곳을 골라 동축사(東竺寺)를 창건하고 삼존불을 맞아 안치했다. 금과 철은 서울로 옮겨와서 대건 6년 갑오 3월에 장육존상을 주성하여 한 번에 이뤘다. 황룡사에 안치했다.” 이 자료를 놓고 보면 가야와 신라가 인도와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락국기’의 아유타국은 과연 어디인가.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필자 남인도 드라비다족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남인도 첸나이는 과거 드라비다 문화의 중심지로 물고기 신앙, 고대 타밀어 등에서 가야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동명대 장재진 교수는 “언어학적 근거나 현지 풍속 등을 고려했을 때 남인도 타밀 지방이 허황옥 일족의 고향이라는 주장이 신빙성을 더 줄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아유타국이 남인도 첸나이 동쪽 바닷가 마을인 아요디아 쿠팜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허황옥이 가지고 온 파사석탑의 석재는 인도 내륙지방이 아니라 동부 바닷가에서 발견된다는 게 주장의 근거다. 허황옥이 가져온 비단은 아요디아 쿠팜에서 가까운 칸치푸람에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경상도지리지(1524)에서도 허황옥의 고향을 남천축국으로 서술되어 있다.

 

남인도 타밀나두주에 있는 드라비다 문화권인 고대 판디야 왕국과 가락국 지역에서는 공통으로 물고기를 숭배했다는 사실도 뒷받침한다. 판디야 왕국의 기장은 쌍어였다. 남인도의 고도 마두라이는 고대 판디야 왕국의 수도였다. 이 도시의 중심인 미낙시 사원은 물고기 숭배와 관련이 깊다. 언어학자인 강길현 교수는 가락, 또는 가야라는 단어가 고대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뜻한다고 했다. 특히 가락은 고어(古語)이고 가야는 신어(新語)였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가락국은 ‘어국(魚國)’으로 볼 수 있다. 옛 가락국 지역에는 '물고기 어(魚)'가 들어간 산이 여럿 있다. 필자가 살았던 동네 뒷산인 김해의 신어산(神魚山)을 비롯하여 밀양의 만어산(萬魚山), 양산의 어곡산(魚谷山) 등이 있다. 여기서 신어산의 ‘신어’라는 말은 ‘쌍어’와 같은 말이다. 쌍어는 김수로와 허황옥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허황옥의 오빠로 보옥선인(寶玉仙人)으로 불리는 장유화상(長遊和尙)이 불교 유입을 기념해 지은 사찰이 신어산에 있는 은하사이다. 필자도 물론 다녀왔다. 여기 은하사 대웅전 수미단에도 허황옥과 연관된 쌍어문이 있다. 이처럼 남인도는 여러 방면에 우리의 문화와 겹치는 부분이 예외로 많다는 사실에 필자는 새삼 놀랍다.

 

지금까지 남인도 지방 티루치라팔리(Tiruchirapalli), 마두라이(Madurai): 스리 랑가나타 스와미(Sri Ranganathaswamy)사원, 미낙시 순다래슈와라(Minaksi Sundareshwara) 사원, 시바 신과 미낙시의 사랑 이야기, 한글과 타밀어(드라비다어) 유사성 등 의미 있는 인문학 여행을 떠났다. 확실히 남인도는 인도의 다른 지역과 다르게 드라비다 문화의 원형을 찾을 수 있었다. 남인도와 북인도는 많은 면에서 다르다. 아마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서로 다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인도와 북인도가 통일한 왕조로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남인도에는 촐라 왕조, 판디야 왕조 등 북인도와는 다른 왕조가 오랜 기간 존속했다. 북인도는 난(Naan)을 비롯한 빵을 주식으로 한다면, 남인도는 우리나라와 같이 쌀을 주식으로 한다. 그렇다. 분명, 남인도는 다르다. 필자의 눈에는 남인도가 남인도만의 전통과 풍습으로 인도의 본질을 더 잘 보존한 지역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남인도 특유의 예술, 건축, 그리고 문화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하나 조각하고 색을 칠한 정성이 신께 대한 그들의 마음도 엿볼 수 있었다. 2023/10/11 혜윰인문학연구소/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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