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호찌민) 인문학 여행 2: 구찌 터널(Cu Chi Tunnels), 용과 농장과 고무나무 농장, 무이네(Mui Ne)-피싱 빌리지(Fishing Village)와 사막 투어, 요정의 시냇물, 포사누이 참탑사원(Posanui Champa Temple)과 와인캐슬(wine castle)
베트남(호찌민) 인문학 여행 두 번째로 호찌민 외곽에 있는 구찌터널(Cu Chi Tunnels)을 비롯하여 무이네 가는 길목에 있는 용과 농장과 고무 농장 그리고 무이네(Mui Ne) 피싱 빌리지(Fishing Village), 흰모래언덕과 붉은 모래언덕으로 알려진 아름다운 사막 투어, 무이네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눈에 보이는 옛 힌두교 사원 포사누이 첨탑사원과 RD 와인캐슬 등을 둘러보자. 먼저 구찌터널이다.
미군의 함정과 베트남의 지혜: 구찌 터널(Cu Chi Tunnels)
구찌터널은 호찌민 시내에서 차로 2시간 거리로 북서쪽으로 약 70km 떨어져 있는 곳으로 신기하게도 현재까지 밀림 안에 터널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터널 입구는 흙과 나뭇잎으로 교묘하게 위장해 가이드 안내가 없으면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터널에 도착하면 먼저 전시관에 들어가 비디오 상영을 통해 안내받는다. 구찌터널은 구찌 일대에 지하로 연결된 땅굴을 일컫는다. 구찌터널은 현대사와 베트남 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상징적인 공간인지라 베트남을 방문한 여행자라면 꼭 추천해주고 싶은 곳이다. 구찌터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되도록 긴소매와 바지를 착용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사람보다 체격이 작은 베트남 사람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통로는 가로 겨우 50cm, 세로 80cm 정도밖에 안된다. 겨우 사람 한 사람이 웅크린 채로 지나다닐 수 있는 아주 협소한 구조이다. 입구도 매우 좁아 한 명씩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야 겨우 갈 수 있다. 그리고 터널 안은 어두우면서 덥고 습하다. 필자도 조금 들어가다가 무섭고 답답함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오랜 세월 전쟁을 수행했는지 필자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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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터널은 1940년대부터 만들어졌다. 프랑스로부터 독립 투쟁을 벌이던 비엣빈(베트민)이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참고로 비엣빈(베트민)는 베트남 독립동맹회를 줄여서 부르는 말로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공산당과 민족주의 세력이 연합한 반프랑스 동맹을 일컫는다. 필자 귀에도 익숙한 한국에서는 ‘월맹(越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전쟁으로 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문제는 1954년에 베트남이 남북으로 갈라지게 된다. 게다가 미국이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여하면서 독립 전쟁은 베트남 전쟁(미국항전)으로 전쟁의 성격이 바뀌게 된다. 그 역사적 과정은 대략 이렇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베트남은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였다. 그 뒤 일본이 밀고 들어와 일본의 식민지였다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1945년에 해방을 경험한다. 비로소 베트남은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한다. 그 뒤 바로 프랑스가 다시 침입하고 프랑스와 8년간의 전쟁을 통해 프랑스를 몰아낸다. 그런데 사회주의 국가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던 유럽 열강들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베트남은 불행히도 남과 북으로 나누어졌다. 우리나라 38선과 비슷하게 말이다. 임시로 17도 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북베트남이, 남쪽은 미군이 관리하고 총선을 통해 통합정부를 세울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천명한 북베트남과 호찌민의 승리가 예견되자 미국은 총선을 거부하고 남베트남은 별도로 조직을 구성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베트남은 결국 분단된다. 이후 미국은 남베트남을 지키기 위해 20년의 간의 전쟁을 수행한다. 아무런 명분 없이 말이다. 이때 남베트남 지역에서 활약한 단체가 인민 해방군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다. 즉, 비엣꽁(베트콩)이다. 미국은 공산당을 의미하는 ‘비엣남 꽁싼’을 줄여서 비엣꽁이라고 불렀다. 구찌터널도 비엣꽁의 주둔지가 되면서 규모가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비엣꽁은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게릴라 작전을 수행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게릴라전을 수행한 군인들은 낮에는 구찌터널 안에서 숨거나 농사를 짓고 비엣꽁으로 활동하며 밤에는 작전을 세우고 기습 공격을 펼쳤다. 특히 1968에는 구찌터널을 통해 미국과 남베트남의 군사 시설을 공격을 감행하며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구찌 터널은 비엣꽁(베트콩) 뿐만 아니라 북부 베트남군에게도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북부 베트남 군사 보급로를 포함한 공격 루트인 호찌민 트레일 종착점도 바로 구찌터널이기도 하다.
전쟁 당시 미군은 지상군 투입과 더불어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하기 위해 터널 랫츠 (Tunnel Rats)라 불렸던 특수 부대를 훈련해 땅굴에 투입하기도 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에 실탄 사격을 가하기도 했다. 또한, 화염방사기와 사이공 강에서 물을 끌어다가 땅굴에 퍼붓고 고엽제를 대량 살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좁은 미로처럼 얽힌 꾸찌 터널 전모를 파악해 낼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터널 파괴 작전을 변경하고 8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B-52 전투기로 융단 폭격을 감행했다. 일종에 1966년 1월 무려 30t의 폭탄을 투하한 크림프 작전(Operation Crimp)이 바로 그것이다. 마치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총 길이 500km 깊이 30m 지하터널을 뚫기 위해 엄청난 폭탄과 바닷물을 터널에 쏟아붓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엄청난 길이의 터널 내부와 게릴라전을 위한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터널이 견고하게 요새화되었다. 터널 안에는 작전상황실, 회의실, 무기 저장실, 주방, 응급실, 수술실은 물론 침실과 부엌까지 있어 지하에서 모든 생활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밖에 현재에도 그때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된 꾸찌 터널은 미군의 공습이 가격해 질수록 더욱 견고해졌다. 지하 3층 규모인 10m까지 더 파 내려갔고 터널의 크기도 계속해서 호찌민 주변에서 캄보디아 경계까지 확장되었다. 전체 길이를 합치면 250km나 된다. 모두 사람의 힘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하다. 터널 입구는 철저히 위장했고 곳곳에 부비트랩이나 철침을 설치해 미군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함정을 만들기도 했다. 특히 부엌의 연기가 분산되어 밖으로 나가도록 위장을 하기도 했다. 터널 주위를 자세히 보면 상대방에게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아주 자연스럽게 위장한 부뚜막의 환기 시설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숲 일부분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만의 지혜가 응집된 듯하다. 다음 목적지는 용과나무 농장과 고무나무 농장이다.
용과 농장과 고무나무 농장
무이네 가는 길목에 용과 농장과 고무 농장이 있다. 먼저 용과 농장에 들렀다. 베트남 등 동남아 지방을 여행할 때 과일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일이다. 모양은 여의주 같다. 가지에 달린 열매 모습이 마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과 닮았다고 하여 용과(龍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래서 영어 이름도 드래곤 프루트(dragon fruit)다. 다른 이름으로 피타야(pitaya)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화룡과(火龍果) 또는 검화(劍花)라고 부른다. 용과(龍果, dragon fruit)는 멕시코 원산의 열대 과일로 알려져 있다. 선인장과 달빛 선인장 속(Selenicereus)에 해당하는 열매를 가리킨다. 나무 모양을 보면 실제로 나무는 선인장 비슷하다. 색깔이 특이하다. 선명한 붉은색이 시선을 끈다. 과일 표면을 보면 깃털 같은 껍질과 용의 비늘 같은 녹색의 돌기 물이 있다. 광택이 있는 아름다운 붉은색 껍질로 색이 아름답다. 껍질은 흰 용과와 붉은 용과를 기준으로 빨간색 같은 자주색 빛을 띤다. 새하얀 과육에 검은색 씨가 있어 수박 아이스크
림을 떠 오르게 한다. 과육은 젤리 형태에 풍부한 과즙을 포함한다. 다음 일정으론 고무나무 농장에 갔다. 흔히 우리가 집 화분에서 키우는 고무나무로 기대하고 갔다면 실망할 것 같다. 크기와 모양이 전혀 달랐다. 커다란 나무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어 마치 잘 정리된 상수리나무 숲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고무나무의 아랫부분에 나선형 형태의 흰 띠를 두르듯 좁은 구멍을 만들어 놓고 고무 원료 액을 받을 수 있는 둥근 통이 끼어 있었다. 수액을 채취하는 장면이다. 신기했다. 고무나무 경작지는 베트남에서 우리나라 경남과 경북을 합친 면적의 크기로 참으로 엄청나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고무 원료는 수술용 장갑이나 콘돔, 신발용 접착제 등의 모든 고무 제품의 원료로 사용한다고 한다. 다음 목적지는 베트남 휴양지 무이네이다.
무이네(Mui Ne): 남베트남의 휴양지와 사막 투어
호찌민시에서 판티엣 무이네까지 버스로 이동했다. 호찌민시에서 약 218km 떨어져 있어 무려 5시간 걸린 듯하다. 무이네는 베트남 남부에서 잘 알려진 리조트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가까워 주말 여행지 그리고 휴양지로 인기가 좋다. 12km에 이르는 기다란 모래 해변과 야자수가 어울려져 있어 휴식하기도 좋다. 필자가 묵은 호텔에도 야자수가 나란히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무이네 매력의 또 다른 이유는 소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경관 말이다. 습도가 낮은 따듯한 날씨까지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휴식과 힐링을 할 수도 있다. 또한, 지역의 전통문화와 역사도 탐방객들에게 한층 더 흥미를 더해 주는 듯하다. 무이네에는 크게 흰색 모래언덕과 붉은색이라 불리는 두 개의 사구가 있다. 마치 중동 사막처럼 말이다. 지프 투어와 사륜구동의 바이크 체험으로 지프차를 타고 언덕을 오르면 마치 영화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또한, 베트남 어촌 마을인 피싱 빌리지 투어도 가능하여 현지인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천천히 포사누이 참탑으로 올라가 보자.
포사누이 참탑사원(Posanui Champa Temple)과 와인캐슬(wine castle)
‘판티엣’에 있는 포사누이 참탑은 무이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 볼 수 있어서인지 많은 여행객이 찾아오는 장소이다. 현재는 판티엣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빼놓지 않고 들르는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포사누이 참탑은 8-9세기 베트남 남부 전역에 걸쳐 살았던 참파족의 전성기에 세워진 ‘참파 왕국’의 유적이다. 일종의 힌두교 사원이다. 약 1,200년 전에 베트남을 주름잡던 참파(Champa) 왕국의 탑이라고 해서 '참탑'이다. 베트남 전성기에 화려했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유적 중 하나이다. 원래 참파(Champa) 왕국은 무이네에서 중요한 역사의 한 부분으로 192년 베트남 중남부 지역에 세워진 나라로 오랜 시간 남부 베트남을 통치하면서 해상무역의 패권을 장악한 강력한 왕국이었다. 지금은 참족이라 불리는 소수민족이지만 말이다. 중국에 가까운 북베트남은 대부분 중국 문화를 수용했지만, 반대로 남베트남은 인도 문화를 수용했다. 참파족도 마찬가지로 인도 문화를 수용해 힌두교를 받아들였다. 현재 필자 앞에 있는 포사누이 참탑은 신을 숭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탑이다. 사원은 메인 사원과 2개의 보조 사원으로 구성되었다. 현재도 총 세 개의 붉은 벽돌 탑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하나는 ‘불의 신’ 사원이고 다른 하나는 ‘시바 신’을 모시는 사원 그리고 시바 신이 타고 다니던 황소 ‘난디’를 모시던 사원이다. 사원은 호아 라이(Hoa Lai) 건축 양식으로 특수 접착제에 의해 매우 견고하게 연결된 붉은 벽돌로 만들어졌다. 비록 탑의 규모는 크지는 않지만, 참파 왕국의 전성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고대 ‘참족’의 장식 예술이 가미된 건축 양식으로 참족의 걸작이라고 한다. 또한, 이것은 캄보디아 사원과 유사한데, 4세기경 바로 옆 후난 왕국에서 유입된 힌두교의 미술과 문화가 수 세기 동안 참파 왕국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내부에는 고대 숭배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제단들이 있어 여전히 신앙의 맥을 이어 오는 듯하다. 탑은 세월이 흘러서 곳곳이 훼손되었지만, 10여 년의 복구 작업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무이네 사람들의 바다의 안전을 기원했던 사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포사누이 사원(Posanui Champa Temple)
은 고대 참파족의 건축적 정수를 맛볼 뿐만 아니라 공주의 사랑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사원 단지의 탄생은 포사누이 공주의 이루지 못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와 연관이 있다. 포사누이는 오늘날 투뽕(Tuy Phong), 박빈(Bac Binh) 및 함 투언 박(Ham Thuan Bac) 지역의 사람들에게 농업 생산뿐만 아니라 삼림 개간 및 쌀 재배, 면화 심기 그리고 천 짜기 및 건물 건축에 큰 도움을 준 사람이다. 포사누이 공주는 많은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고 이슬람교도인 포 사하니 엠파스(Po Sahani empar)와 결혼했다. 포사누이의 남동생 포담은 누나가 외부인과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슬람법에 따라 포담(podam)은 이 둘을 나누기 위해 음모를 꾸었다. 포 사하니 엠파르(Po Sahani empar)는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후 아내가 약속을 지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배신하고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하면서 마음에 원한을 품었다. 이 사실을 포사누이가 설명을 하기 위해 왔을 때, 그는 차고(Chargo)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 뒤 그녀의 인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은 비아네(Bianeh)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 나중에 참파족 사람들은 그녀의 동상을 조각하고 탑에서 그녀를 숭배했다는 이야기이다.
무이네에 가면 꼭 들르려야 하는 곳 또 하나가 RD 와인캐슬이다. 와인캐슬은 시 링크 시티(Sea Links City) 내에 마치 중세 성처럼 웅장하게 꾸며져 있는데 미국 캘리포니아의 와인 계곡으로 유명한 '나파 밸리'를 모티브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와인캐슬은 미국 ‘나파 밸리’에서 생산한 와인을 보관하는 와이너리이다. 참고로 '와이너리(Winery)는 분쇄→발효→여과→보관까지 이루어지는 곳을 일컫는다. 쉽게 말해서 와인을 만드는 곳이다. 세계 3대 와인너리는 프랑스 상파뉴 모엣샹동, 프랑스 보르도 샤토마고,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 카스텔로 디 아모로사 등이 있다. 1976년 5월 26일 프랑스에서 스티븐 스퍼리어가 주최한 대회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가 와인라인이든 테이스팅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모두가 프랑스가 우승할 거라고 점쳤지만, 말이다. 프랑스 와인 보다 맛있는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라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필자가 보고 있는 RD 와인캐슬의 와인은 그 유명한 나파 밸리에서 공수한 와인이다. 베트남의 한 기업가가 미국 나파 밸리의 좋은 와인을 베트남인에게 제공하고자 만든 곳으로 무려 26종의 20만 8,000병이 지하 저장고에 보관돼 있다. 엄청난 규모이다. 실내로 들어가면 잘 정리된 포도주 저장고와 포도주 생산 과정을 둘러볼 수 있다. 실외와 마찬가지로 실내에도 곳곳에 장식된 조각상과 마차 등이 있어 풍미를 더 해준다. 그것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찍기도 좋다. 와인매장도 있어 갖추고 있어 다양한 종류의 와인을 구매할 수 있다.
사막 투어: 붉은 모래언덕, 화이트 모래언덕
무이네 해변에서 지프차로 40분 정도 가면 화이트 모래언덕이 나온다. 그림처럼 펼쳐지는 모래언덕은 마치 사막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건조해진 해변과 모래의 유입, 그리고 침식작용이 수백 년간 진행되어 생겼다고 한다. 무이네 주변에는 두 개의 모래언덕이 있다. 어촌 마을과 가까운 곳이 붉은 모래언덕이다. 해변과 사막이 공존하는 무이네의 명소인 이곳은 건조한 기후와 바닷바람의 영향으로 수백 년 동안 쌓인 하얀 모래로 이루어진 사막이다. 일출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모래언덕 규모가 크고 경사도도 높다. 크기 면에서 화이트 샌드가 압도적이다. 바로 옆에는 드넓은 호수가 있다. 언덕 모래 주위에는 사막을 둘러싸는 호수가 형성
되어 있다. 마치 오아시스처럼 말이다. 하얀 호수라는 뜻인 바우짱(BAU Rang)에는 연꽃이 피기 때문에 바우센(Bau Sen, 연꽃
호수)이라는 애칭이 있다. 화이트 모래언덕까지 가는 동안 비록 비포장도로로 오지 체험하는 착각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해안선은
아름다웠다. 사막 투어는 모래언덕이 일출로 아름답게 보이는 오전에 가면 좋다. 하얀 모래를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프차를 타고 언덕을 올라서 급경사를 내려오는 묘미는 아주 긴장감 넘치는 체험이었다. 화이트 모래언덕에서 약 20분 정도 이동하면 붉은 모래언덕이 있다. 해변 리조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황톳빛 모래와 함께 일몰을 맞이하면 뭉클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비록, 다른 사막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모래언덕과 바다가 어울려져 그림이 아름답다. 오후가 되면 태양 빛으로 인해 모래언덕이 더 붉게 물든다. 그래서 붉은 모래언덕(Red Sand Dune)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모래언덕의 경사면에 플라스틱 널빤지를 이용해 샌드 슬라이딩(sand sliding), 즉, 모레 썰매를 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음 여행지는 현지 주민들의 어촌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는 피싱 빌리지와 요정의 시냇물이다.
피싱 빌리지(Fishing Village)와 요정의 시내물
화이트 모래언덕에서 지프차로 30분 정도 이동하면 어촌 마을 피싱 빌리지(Fishing Village) 나온다. 피싱 빌리지는 무이네 해변 동쪽 끝에 현지인 마을을 가리킨다. 이곳에서는 무이네 현지 주민들의 어촌 생활 모습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곳으로 그들 대부분은 주로 어업에 종사한다. 마을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바다에 형형색색으로 칠한 둥근 바구니처럼 배가 보인다. 퉁짜이(Thung Chai)가 해안선을 따라 빽빽하게 떠 있다. 마치 색칠한 바구니를 일렬로 엎어놓은 듯하다. 이것이 바로 베트남 전통 배 ‘퉁짜이(Thung Chai)’이다. 그들은 이런 전통 배를 이용해 전통 방식의 그물로 고기를 잡는다. 예로부터 무이네가 위치한 지역은 베트남 내에서도 멸치를 절여 만드는 피시 소스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가룸(garum)’이라 불린 생선 소스 말이다. 고대 로마인은 지중해 바다에 풍부했던 멸치로 생선젓을 만들어서 먹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일종의 멸치젓이다. 이
젓갈의 이름은 '가룸(garum)'이다. 이 생선 소스가 1,000여 년 전 참파 왕국이 고대 로마와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베트남으로 전파되어 이 지역 특산품이 된 것이다. 그때 큰 나무통에 멸치와 소금을 켜켜이 넣고 바닥에는 쌀겨를 깔아 자연 여과를 시켰다고 한
다. 역시 조상들의 지혜가 대단하다. 피싱 빌리지에서 지프차로 15분 정도 가면 요정의 시냇물을 만난다. 무이네에서 가 볼 만한 곳이다. 무이네 해변 중간에서 이어지는 협곡으로 시냇물이 협곡 옆을 흐른다. 신기하게도 일 년 내내 일정한 샘물이 흐르고 건조하거나 비가 많이 내려도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신비로운 곳이다. 단단한 모래흙이 비와 침식작용에 의해 생겨났는데 붉은 흙과 모래, 하얀색 석회암이 함께 어우러져 풍경이 독특하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며 소원을 빌면 요정이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이야기가 있어 요정의 시냇물이라고 부른다. 또한,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을 닮아서 동양의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협곡을 흐르는 시냇물은 발목 정도의 깊이로 얕은 편이어서 숲 속에 흐르는 물길을 맨발로 걷는 것도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녀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지금까지 베트남 호찌민시 인문학 여행을 다녀왔다. 호찌민은 역사적으로 ‘동양의 파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식민지 흔적이 가
득하다. 시내에는 식민지 건축물들이 역사적 사실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통일궁에, 전쟁박물관, 꾸찌 터널 등과 같은 전쟁에 관련된 볼거리가 많다. 원래 베트남 남부는 '코친차이나'라고 불리던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 시절의 중요한 지역이었다. 원래 호찌민시는 캄보디아의 영토였다. 하지만, 베트남이 영토를 남쪽으로 확장하면서 베트남 남부에서 물러나고 남은 주민들은 베트남에 동화되었다. 베트남 전쟁 이후,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흡수된 뒤 사이공은 호찌민시로 바뀌었지만, 호찌민시의 일부 주민들은 호찌민시란 지명보다 사이공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아무튼 호찌민 인문학 여행은 여느 나라와 비슷하게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날 뻔할 소소한 일상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이었다. 호찌민 도심 여행은 굳이 여행 계획을 짤 필요가 없다. 이정표가 모두 지척에 있기 때문이다. 노트르담 대성당, 중앙우체국, 인민위원회 청사, 사이공 오페라하우스, 전쟁기념관, 통일궁 등이 모두 도보로 이동할 수 있다. 그런데도 필자에게 베트남 여행은 또 다른 슬픔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호찌민 시내에는 유독 식민지 건물이 많아서인지 식민지 경험을 한 한국인으로서 남
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프랑스 식민정책의 특이점은 식민지 지역을 자기 문화와 똑같은 건축물들로 채우는 데 집착했다. 호찌민 중앙우체국이 프랑스에 파리의 동역을 모방했고, 호찌민 인민위원회와 파리 시청의 판박이가 그렇다. 마
치 프랑스에 온 것처럼 말이다. 이런 문화 이식은 식민지였던 세계 곳곳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이기 하지만 유독 그렇다. 베트남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 프랑스 식민지 흔적을 없애기보다는 건물을 유지함으로 역사적 교훈을 되살리는 듯했다. 호찌민에 유럽의 건축과 베트남의 전통문화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분위기도 이 때문일 것이다. 호미 바바의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주장하는 혼성성(hybridity)처럼 말이다. 호미바바에 의하면 피지배자도 자신의 문화, 언어에 맞추어 지배자의 문화를 혼합하여 재구성하는 혼성 성을 띤다는 것이다. 여기서 혼성성(hybridity)은 지배의 도구이면서도 저항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도 문화에 대해서 ‘문화’란 순수하고 지고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이념들의 혼합체가 된다고 언급한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베트남(호찌민) 인문학 여행은 필자에게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뜻깊은 장소였다. 2024/02/17 뜨르/혜윰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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