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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호찌민) 인문학 여행 1: 호찌민 중앙 우체국(Saigon Central Post Office), 호찌민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Cathedral Basilica of Saigon), 호찌민 미술관(Ho Chi Minh City Fine Arts Museum), 베트남 전쟁박물관..

by 뜨르k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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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호찌민) 인문학 여행 1: 호찌민 중앙 우체국(Saigon Central Post Office), 호찌민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Cathedral Basilica of Saigon), 호찌민 미술관(Ho Chi Minh City Fine Arts Museum), 베트남 전쟁박물관(War Remnants Museum), 인민위원회 청사(People's Committee Building), 통일궁 (Independence Palace)

 

호찌민 시립미술관

이번 인문학 여행은 베트남 호찌민 여행이다. 베트남의 첫인상은 오토바이 행렬이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오토바이 행렬은 매우 인상적이다. 마치 베트남 현재의 역동성을 숨김없이 보여 주는 듯하다. 필자에게 처음 가는 베트남 여행은 설레기도 하고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그 이유 베트남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 지역이기 때문이다. 대략 우리나라 5만 명의 군이 베트남에 상주하였고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하며 장기, 단기 체류한 군인은 거의 대략 30만 명이다. 그 정도로 베트남과 한국은 관계가 깊다. 잠시 호찌민시의 사회와 역사를 간략하게 더듬어 보자. 호찌민시는 프랑스가 통치하던 코친차이나(Cochin china) 시절부터 사이공으로 불렸다. 참고로 코친차이나(Cochin china)는 프랑스에 의하여 점령된 베트남의 남부지역 땅을 일컫는다. 또한 호찌민시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수도 역할을 하면서 ‘동양의 파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현재 베트남의 행정수도는 하노이이지만, 경제 수도는 베트남의 경제와 교통의 중심지인 호찌민시로 보면 된다. 그래서인지 호찌민시는 ‘장사꾼의 사는 도시’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한다. 호찌민시에는 전체 인구의 10% 정도 살고 있어서 동남아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소란하고 분주하다. 특히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은 그전에 한 번도 보지 못한 장관이다. 날씨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무더운 날씨지만, 동남아의 기후가 그러듯 참을만하다. 그리고 호찌민시의 도시 그 자체로도 이국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새로 건축하는 빌딩과 명품매장들은 변화하는 호찌민시를 그대로 보여 주고 준다. 하지만 콜로니얼 건축물들은 과거에 베트남이 식민지였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고유의 아시아 냄새를 풍기는 차이나타운 쩌런도 볼 만하다. 통일궁과 전쟁박물관. 꾸찌 터널 등 베트남이 현대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호찌민시이기도 하다. 이제 여행을 떠나보자. 제일 먼저 방문할 곳은 식민지 흔적인 호찌민(사이공) 중앙우체국(Saigon Central Post Office)이다.

 

식민지 흔적: 호찌민(사이공) 중앙우체국(Saigon Central Post Office)

 

호찌민 중앙우체국은 베트남에서 가장 큰 우체국으로 동코이 거리 북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 1886년에서 1891년까지 5년 동안 지어진 건물로 에펠탑을 지은 구스타브 에펠 (Gustave Eiffel)이 설계했다고 한다. 호찌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이다. 루브르 및 퐁피두 센터와 더불어 프랑스의 파리의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실내 아치형 천장은 오르세미술관과 비슷하다. 외관도 매우 독특하다. 실제로 베트남에서 역사가 스며든 훌륭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건물의 외벽 색은 밝은 노란색으로 칠해졌고 흰색 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실내로 들어서면 아치형 건물 내부가 고스란히 속살을 드러낸다. 높은 천장과 아치형 출입문과 창문을 볼 때 전형적인 고딕 양식(Gothic art)과 르네상스 양식(Renaissance style), 그리고 프랑스 전통 양식 콜로니얼(Colonial)이 첨가되었다. 정교한 장식물과 외관의 장엄함이 매우 인상적이다. 높은 금속 아치형 천장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입구 정면의 벽에 걸린 거대한 호찌민 초상화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려한 타일 바닥도 확인할 수 있다. 우체국 내부는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넓고 웅장하다. 아마 베트남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듯하다. 우체국 입구의 양옆에는 기념품 가게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옆에는 우편 및 환전하는 곳도 있다. 여기서 베트남 각종 기념 우표와 그 외 각종 기념품도 판매한다. 베트남 국내외 우편물 접수뿐만 아니라 국제 택배와 국제전화를 할 수 있도록 부스가 있어서 여행자에게 편의를 돕고 있다. 편지지와 우표를 직접 사서 엽서를 부칠 수도 있어서 추억을 담을 수 있는 멋진 장소이다. 벽면에는 커다란 그림지도가 보인다. 코친차이나(Cochin china) 시대(1892년)의 남부 베트남의 사이공 지도와 1936년도의 프랑스령 캄보디아까지 연결되었던 전산망이다. 여기에 얽힌 에피소드도 있다. 중앙우체국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한 분이 있는데 바로 등 반응오라는 할아버지이다. 베트남 기네스북 소유자이신 이분은 27년 동안 글을 쓸 수 없는 분을 위해 하루 50센트만 받고 편지를 대필해 주었다. 영어와 프랑스에 능통하신 분으로 이 우체국의 아이콘(icon)으로 불렸고 87세까지 일하셨고 현재는 볼 수 없다. 다음의 목적지는 식민지 건축물 호찌민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식민지 건축물: 호찌민(사이공)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Cathedral Basilica of Saigon)

 

호찌민 노트르담 대성당은 오텔드빌(인민위원회 청사), 오페라하우스, 중앙우체국과 더불어 호찌민시를 대표하는 콜로니얼 건축물이다. 전형적인 식민 통치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다. 프랑스가 코친차이나의 수도 호찌민(사이공)에 이 성당 건물이 들어선 것은 1864년이다. 하지만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코친차이나 총독의 승인 아래 1877년부터 1883년에 걸쳐 노트르담 성당을 새로 건설했다고 한다. 붉은색 벽돌은 프랑스 마르세유(Marseille)에서 직접 공수해서 만든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유럽의 로마 가톨릭교회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이다. 여느 로마 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첨탑이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또한 건물 벽은 하나씩 정성스럽게 쌓아 올려 그 자체가 정교하고 아름답다. 교회 첨탑의 높이는 58m이고 여섯 개의 동종이 걸려 있다. 샤르트르(Chartres)에서 수입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성당 안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성당 안의 길이는 133m, 폭 23m, 높이 21m로 웅장하다. 무려 1,200명이 동시에 미사를 볼 정도란다. 다음 목적지는 현대미술과 고대 미술이 있는 고풍스러운 호찌민 시립미술박물관으로 떠나보자.

 

호찌민 시립미술관(Ho Chi Minh City Fine Arts Museum)

 

호찌민 시립미술관은 프랑스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미술관이다. 미술관에는 각종 유물이 전시되었다. 3개로 나누어진 건물에서 베트남 전쟁을 다루는 작품을 비롯해 고대 및 현대 미술품 등 21,000여 점의 다양한 예술작품을 볼 수 있다. 1층은 모던아트 갤러리 2층과 3층은 고대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은 호찌민시 인민위원회의 1987년 9월 5일 자 결정에 따라 설립되었다. 이 건물은 1934년 프랑스 식민지 당시 건축되어 중국인의 개인 저택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원래 이 건물의 주인은 19세기에 호찌민으로 이주한 화교인 후이 본 화(Hui Bon Hoa)라는 사람의 저택이다. 후이 본화는 많은 돈을 벌어 이 저택을 비롯하여 호찌민시에 많은 건물과 병원 등을 소유하였다고 알려졌다. 건물을 1989년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원래 미술관을 지을 목적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 건축양식 주택의 모습에 외부 장식, 타일 지붕, 기둥과 지붕에 세라믹 장식 등의 중국풍으로 조화롭게 결합했다. 미술관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는 것도 좋을 듯하다.

 

미술관은 주로 베트남 남부 화가들의 작품들을 주로 전시한다. 전시 공간은 세 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순서이다. 미술관 1동은 고전 미술, 전통 공예품 및 현대미술, 저항의 기화, 동양 화가의 작품, 작가 응우옌 지아 트리, 응우옌 상, 디프 민 차우, 킴 바흐, 딘 루, 쿼치퐁과 같은 귀중한 컬렉션이 있는 현대미술 등이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 2동에서는 정기적으로 국내외 기관, 단체이나 개인 전시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국제 전시회를 포함하여 매년 평균 10~25회의 전시회가 있으며, 아시아 국가의 작품, 러시아, 중국, 미국,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 태국, 싱가포르, 한국, 인도네시아 예술가들의 그림 등을 전시한다. 미술관 3동에는 도자기, 구리, 목재, 돌 등 다양한 재료의 고대~근대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고대 도자기 예술의 경우, 라이 티에우 도자기, 사이공 도자기, 비엔 후아 도자기와 동나이강에서 발견된 고대 도자기와 같은 전형적인 남부 도자기 등이 보인다. 석재 미술의 경우 박물관에는 참파, 오어 조각 모음이 전시되어 있고 청동 소재 미술의 경우 고대 작품 및 작가들의 조형물을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가구 등 목제 재료 작품의 경우 종교, 신앙의 요구에 부응하는 작품 및 가정용 가구, 조각품 등을 수집하여 전시했다.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에게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동원하여 감상하니 나름대로 흥미로웠다. 작품은 베트남의 독립 투쟁과 사회주의 혁명에 관한 내용에서 현대미술까지 소개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서 여성들이 차지하는 지위와 비중은 매우 높임을 전시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과거 다른 나라의 침입에 저항했던 여성들의 활약상을 비롯해 조각상이나 여러 작품 속에서 나타난 모성애 등 강인한 여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전칠기 기법을 이용한 회화와 유화와 서민풍의 작품과 비교적 사실을 재현한 듯한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었다. 특히, 응우옌 자 찌(Nguyễn Gia Trí)의 작품이 돋보인다. “중남부 봄 정원”이라는 작품 속에서 나타난 숙련된 옻칠 기술이라든지 높은 조형적 사고, 통일성과 연속성의 강한 미적 감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평생을 옻칠에 대한 탐구를 통해 이룬 모든 예술적 업적을 종합한 축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20년간 진행된 마지막 작품으로 2013년 12월 30일 국보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다음 목적지는 베트남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 베트남 전쟁박물관이다.

 

미국 전쟁범죄의 파노라마: 베트남 전쟁박물관(War Remnants Museum)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천부(天賦)의 권리를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았다.”— 베트남 독립 선언의 서문, 호찌민 -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 광장

 

베트남 전쟁 박물관은 호찌민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다. 원래 이 건물은 미국 정보부가 사용했던 건물로 1975년 베트남 통일 후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전쟁박물관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계속된 베트남 전쟁(Vietnam war) 당시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래서인지 원래 이름도 전쟁의 실상을 명확히 드러내는 ‘미국 전쟁범죄 박물관(Museum of American War Crimes)’이라는 명칭의 이름으로 쓰였다.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베트남과 미국이 수교(1995년)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보통 베트남 사람들은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칭하는 ‘베트남 전쟁 (Vietnam war)’이라고 부르지 않고, ‘미국전쟁’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대미항전(對美抗戰)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을 한국에선 흔히 월남전(越南戰)으로 부른다. 필자도 월남전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참고로 월남전이라는 이름 속의 '월남'은 베트남의 국명인 '越南'을 우리식 한자 독음으로 읽은 것이다. 아무튼 위에서 언급했듯이 전쟁박물관은 엄밀히 말하면 베트남 사람들의 측면에서 본 미국전쟁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을 전시한 곳이다. 박물관 전시를 통해 우리는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의 만행을 어떻게 포장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왜곡했는지를 조금만 자세히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 영화를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호찌민시에서 반드시 방문해야 한다면 전쟁박물관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국 전쟁범죄 박물관이었던 당시에는 철저한 반미(反美)를 바탕으로 전쟁의 잔혹한 참상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현재는 과거보다 전시된 사진들이 많이 순화되었지만, 여전히 끔찍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도, 평화에 대한 메시지는 잊지 않고 있다. 3층 전시실에 있는 흑백사진은 그 어떤 사진보다 필자에게 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왜냐하면, 잔혹했던 전쟁의 참상과 고엽제 피해자 상황을 전시한 사진 등을 비롯하여 종군 사진 기자들이 찍은 끔찍한 흑백사진, 미군이 버리고 간 군수 물자들로 전쟁 때 사용되었던 소총과 기관총 등의 무기, 전쟁을 선동하는 포스터와 신문 등, 전쟁 관련 수많은 자료가 아주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고엽제 후유증으로 죽은 기형아의 시체 등은 우리에게 고엽제의 위협과 심각성을 알려 주고 있다. 그 후유증이 여전히 후손들에까지 계속되고 있다. 무려 약 480만 명에 달하는 베트남인과 아이들이 심각한 장애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박물관 자료에는 아홉 개의 고정 전시실의 7개의 주제로 나누어 전시되고 있다. 그 안에는 10년간 계속된 전쟁 기간에 미군이 쏟아부은 폭탄이 785만 톤, 화학약품(화학무기)이 75만 리터라는 기록도 보이고, 1968년 3월 베트남 중부의 미라이 지방에서는 하루에 504명의 민간인이 미군에 의해 잔혹하게 떼죽임 당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 밖에 베트남 어린이들이 그린 전쟁 관련 그림과 감옥·포로수용소 등 참혹한 장면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교육도 여럿 있어서 들으면 좋다. 특히, 박물관에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비록 영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읽으면서 관람하면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박물관 밖으로 나가면 헬리콥터·전투기·전차·소총·유탄발사기·대포·포탄 등 전쟁 무기 등이 전쟁의 실상을 말하듯 나란히 놓여 있다. 아마 미국산으로 베트콩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 옆에는 고엽제 피해 등 전쟁과 관련된 각종 화보·스크랩 등도 전시되어 있고 꼰 썬 섬(Con Son Island)에 있던 감옥도 진짜처럼 재현해 놓았다. 이곳은 프랑스 식민지지배 시절 베트남 독립투사를 투옥하던 곳으로 ‘베트남 전쟁’ 중에는 비엣콩(베트콩) 전쟁 포로를 가두었다고 한다. 그 옆에는 사람들을 처형하던 단두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곳에 갇힌 이들의 비명 때문에 ‘호랑이 우리’(Tiger cages)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왜냐하면, 극심한 고문 때문에 수감자들이 내는 비명소리이다. 참으로 악명 높은 감옥인 듯하다. 참고로 베트남 총리를 지냈던 팜 반동(1906-2000)과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수상을 거부한 레득토(1911-1990)도 정치범으로 이곳에 수용되었다. 박물관 개관 당시에는 한국군과 관련 자료가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고 하다. 하지만 1992년 한국-베트남 수교 이후 한국군 관련 자료는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는 전쟁 중 5만 명의 한국군이 참전했다는 기록, 맹호부대원들의 수색 작전 사진 1장 등 일부 자료만이 전시되고 있다. 반면 전후 복구사업에 동참한 미국 등 지원단체의 사진들은 쉽게 볼 수 있었다. 조금 씁쓸했다. 여기서 우리는 베트남 전쟁의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중 하나는 한국군의 양민 학살 문제이다. 실제로 베트남엔 한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 위령비가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필자가 현지에서 들을 이야기이다. 불행히도 노태우-김대중 정권과 달리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베트남 전쟁(Vietnam war)과 관련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말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그런데도 일각에서는 베트남 전쟁은 가장 명분 없고 사악한 미국의 침략전쟁이라고 치부한다. 그 이유는 1964년 베트남 통킹만 연안에서 정찰 활동을 벌이던 미국 구축함을 북베트남 어뢰정이 먼저 공격했다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을 본격적으로 침공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온 세계가 반대한 이런 전쟁에 한국은 인구 비율로 따져보면 보면 미국보다 2~3배 더 많은 병력을 보냈다. 게다가 한겨레신문 기자로 20여 년 동안 취재한 모 기자는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말하면서 한국은 1964년부터 1972년까지 베트남에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그리고 ‘백마부대’ 등 5만여 명의 군인을 파병하면서 이 기간에 한국군은 베트남 130개 마을에서 군인이 아닌 민간인 1만여 명 이상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끔찍하고 일이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면 그때 당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의 ‘맹호부대’와 ‘청룡부대’가 베트남 전쟁(Vietnam war)에 참전 1965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때 당시 국민학교(초등학교) 학생들이 맹호부대 노래를 유행가처럼 불렀다고 한다. “자유 통일을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임들은 뽑혔으니…….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라는 찬가였다. 위문 편지도 썼다고 한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파월 장병 아저씨께” 말이다. 참으로 대단한 군부독재의 힘이다. 다음 목적지는 파리시청을 닮은 호찌미 시청인 호찌민 인민위원회 청사이다.

 

파리 시청을 닮은 호찌민 시청: 호찌민(사이공) 인민위원회 청사(People's Committee Building)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호찌민(사이공) 인민위원회 청사는 호찌민시를 상징하는 아이콘 같은 건물이다. 1898년 사이공에 주재하는 프랑스인을 위한 공회당으로 지어진 건물로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식민지 시기에 건설되었다. 1902년부터 6년에 걸쳐 완성한 사이공(코친차이나 수도)의 ‘오텔드빌(Hotel de Ville)는 프랑스어로 시청을 의미한다. 현재 파리 시청도 오텔드빌(Hôtel de Ville)이다. 파리 시청과 구조도 비슷하다. 시계가 장식된 높은 탑 스티플(steeple) 아치형 창문과 발코니, 박공(牔栱, gable)을 장식한 조각상들까지 전형적인 식민지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지금 파리 시청보다는 물론 규모는 작다. 그런데도 베트남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 건물로 여겨진다. 연한 레몬색 벽면에 흰 대리석 기둥과 조각상, 좌우 대칭을 이루는 회랑 등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외관이 웅장하고 인상적이다. 그래서인지 호찌민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현재는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된 후부터 호찌민시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베트남 공산당이 사용하는 정부 건물로 일반인들의 출입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호찌민시를 방문한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명소로는 유명하다. 청사 주변에 조명이 있어서 야경도 아름답다. 밤이 되면 건물에 은은한 조명을 켜 낮과는 다른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해서 더더욱 그렇다. 건물 앞에는 아름다운 광장이 있다. 그 앞에는 호찌민 동상을 세웠다. 민중을 향해 손을 들고 있는 ‘쭈띡 호찌민’(호찌민 주석) 동상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다른 사람이 그러하듯이 필자도 동상 앞에 아름다운 조명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런 호찌민 동상은 최근에 바뀐 모습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인자한 모습으로 ‘박 호(Bac Ho)’라고 적혀있는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호찌민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국부(國父)로 ‘박호(Bác-Hồ, 伯胡)’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호 할아버지’ 또는 ‘호 아저씨’라는 의미이다. 호찌민 동상이 바라보이는 방향이 응우옌후에 거리를 따라 고층 빌딩들이 가득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상 옆에는 명품매장이 가득한 렉스호텔과 유니언 스퀘어(쇼핑물)가 들어서 있다. 도로 옆 과장 거리는 서울 광화문처럼 넓고 사람들로 붐빈다. 여기서 젊은이들이 각종 공연도 하고 놀이도 즐긴다. 변화하는 베트남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다. 다음 장소는 ‘호 아저씨 유언’을 음미하면서 통일 궁으로 향했다.

 

호 아저씨의 유언
“내가 죽은 후 웅장한 장례식으로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시신은 화장하고, 재를 셋으로 나누어 베트남의 북부, 중부, 남부에 뿌려 주길 바란다. 내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대신 넓고 튼튼하며 통풍이 잘되는 집을 지어 방문객들이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만약 방문객들이 나를 추모하는 의미로 나루를 심는다면 세월이 지나 그 나무들이 숲을 이룰 것이다.”

 

비운의 식민지 건물: 통일궁 (Independence Palace)

 

통일궁은 베트남의 현대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면서 호찌민시 방문 시에서 반드시 가야만 하는 곳이다. 통일궁의 역사는 식민지지배 시대인 18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일궁은 이전에는 노로돔 궁전(Norodom Palace)이라고 불렸다. 프랑스 코친차이나 총독의 관저로 1954년까지 쓰다가 프랑스가 철수하고 베트남이 분단되면서 1956년부터 남부 베트남 대통령의 관저와 집무실로 사용했다. 이때 대통령궁(Presidential Palace)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대통령궁에 머문 첫 사람은 초대 남부 베트남인 응오딘지엠(1955년~1963년)이다. 불행하게도 응오딘지엠에게 끊임없는 암살 시도가 있었다. 1962년에는 남베트남 공군 장교들에 의한 대통령 암살 시도가 바로 그것이다. 전투기로 대통령궁 폭격했으나 건물 절반이 무너졌음에도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대통령궁을 재건축하면서 요새화하기 시작했으며 추가 암살 시도의 염려 때문에 현재의 호찌민시 박물관 지하에 벙커를 만들어 생활했다고 한다. 하지만 1963년에 군부 쿠데타로 도피하던 중 결국 살해되었다. 안타깝게도 대통령궁 완공을 보지 못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대통령궁이 재건축된 것은 1966년이기 때문이다. 대통령궁 전체적인 건물 구조는 ‘흥(興)’자를 형상화했다. 풍수지리 사상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대통령궁은 대통령이 수시로 바퀴면서 베트남 전쟁의 막바지에 비운의 건물이 되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10년 동안 9번이나 바뀌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마지막, 대통령 즈엉반민(1975년 4월 28일~30일)은 대통령궁에 단 3일간 머무른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건물은 과거에는 대통령궁, 독립 궁으로 불리다가 1975년 4월 30일부로 ‘통일 궁’이 되었다. 이는 북베트남군의 점령으로 사이공이 함락되어 베트남 통일되었고 베트남 전체가 사회주의로 통일되었음을 의미한다. 미군이 철수한 뒤 별다른 저항 없이 말이다. 결국 북베트남군은 대통령궁에 붉은 깃발을 게양하게 된다. 이제 통일 궁으로 들어가 보자. 정문을 들어서면 정원 오른쪽 나무 밑에 탱크 2대가 있다. 1975년 4월 30일 통일궁을 진격해 들어왔던 북부 베트남군의 탱크를 전시한 것이다. 실내로 들어서면 본관은 4층과 지하 벙커로 이루어져 있다. 대통령집무실, 국무회의실, 외국 대사 접견실, 외빈 접견실, 대통령 응접실, 부대통령 응접실, 대통령 관저, 영화관, 연회실, 등 100여 개의 방으로 이루어졌다. 1층 중앙에 있는 대통령집무실과 국빈 연회장, 국무회의실 등이 있고 마치 왕국의 집무실처럼 나전칠기를 이용한 대형 벽화도 걸려 있다. 2층에는 국가안보 회의실과 대통령 접견실 등이 있고 3층에는 도서관과 영부인 응접실, 영화관, 침실 등이 있다. 4층에는 연회실이 있고, 옥상에는 헬리포트와 헬기도 전시되어 있다. 계단을 이용하여 연결된 통로 아래로 내려가면 지하 벙커가 나온다. 지하 벙커는 철저하게 요새화되었다. 폭탄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한 콘크리트로 지어졌다. 이곳은 베트남 전쟁 동안에는 미군의 작전 본부로 작전상 황실,, 지휘 통제실, 통신실, 암호 해독 실, 주방 등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도 전시에 사용된 작전 지도나 라디오 장비, 취사도구 등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그때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듯하다. 지하 벙커를 지나면 출구 전에 특별 전시실이 있는데, 대통령궁이 파괴되던 장면을 포함해 흑백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에도 주요 국제행사나 외국 대통령의 접견 같은 국가행사가 여기에서 열린다고 한다. 통일궁 앞 공원에는 울창한 숲과 넓은 잔디 정원이 펼쳐져 있다. 호찌민 시민들의 휴식 장소로 마치 평화를 염원하는 듯 말이다. 다음 목적지는 구찌 터널(Cu Chi Tunnels), 용과 농장과 고무나무 농장, 무이네(Mui Ne)-피싱 빌리지(Fishing Village)와 사막 투어, 포사누이이 첨탑사원과 RD 와인캐슬, 용과 농장과 고무나무 농장을 방문할 예정이다.  2024/02/13 뜨르/혜윰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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