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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에게는 예(禮)를 차리지 말라." 『일본산고(日本散考)』: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은 미래가 없다. "

by 뜨르k 2024.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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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에게는 예(禮)를 차리지 말라.”

 

『일본산고(日本散考)』: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은 미래가 없다."

 

 

오랜만에 의미 있는 책을 읽었다. 우연히 동네 책방에 들려서 발견한 책이다. 책 이름이 ‘일본산고(日本散考)’이다. 산고(散考)가 말해주듯 흩어져 있는 글을 엮어 만든 박경리의 유고집이다. 우리에게 박경리 하면 소설『토지』가 생각난다. 토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설이고 박경리를 각인시킨 작품이다. 필자도 토지를 전부 읽지를 못했다. 지금 여전히 읽는 중이다. 『토지』가 소설로 쓴 ‘일본론’이면 ‘일본산고(日本散考)’는 박경리의 짧은 글을 모은 일종에 ‘일본론’ 산문집이다. 여기서 저자는 일본 문화를 매서운 논리로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의 논거는 아마테라스 신화에서 현대문학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통해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문화를 비판한다. 이런 문화를 생산한 일본 체제 역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저자 박경리는 일제 강점기를 몸소 살았던 사람이다. 총칼로 한반도를 짓밟은 침략자의 문화를 목격한 사람이다. 책을 통해서 보면 그 문화가 우월의식에 기반한 사실도 인지한듯하다. 필자도 이 책을 읽으면서 왜(Why)라는 물음이 귀 전을 맴돌았다. 왜(Why) 일본인은 역사(歷史)를 부정할까? 왜(Why) 일본인은 피해자로 스스로 자처할까? 그리고 왜(Why) 일본인은 한국을 싫어할까?라는 질문 말이다. 왜라는 물음은 근본적으로 ‘무엇’ ‘어떻게’가 지향하는 ‘있음’과 ‘앎’을 넘어서서 삶의 형식을 치닫는 물음이다, 이는 지금까지 참이라고 여겼던 일본 그들만의 보편적 본질을 파괴하는 동시에 자기 순환적 폐쇄성 족쇄를 풀고, 있는 그대로 일본을 바라보는 좋은 열쇠이기 때문이다. 박경리는 “왜”라는 물음으로 이 문제를 풀고 있지 않은가 필자는 생각해 본다.

 

먼저 박경리는 일본인이 우리에게 갖는 증오의 근원을 역사서의 씨줄과 날줄에서 찾은 단서를 갖고 작가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명쾌한 분석으로 통찰한다.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노출하며 때로는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일본인이 ‘진실의 상자’를 열지 못하는 근본 이유를 ‘거짓의 두 기둥’이 있다고 본다. 바로 만세일계(萬世一系)와 현인신(現人神)이다. 일본 황실의 혈통이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는 만세일계(萬世一系)와 일왕의 권위와 신성(神性)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종교로 발전한 형태인 현인신(現人神)이 그것이다. 전자는 천조(天祖)의 상속권 주장이고 후자는 왕을 치장한 신도(神道)이다. ‘초인적, 초자연적인 기틀을 만든 인도의 신의 나라처럼 말이다. 또한, 박경리는 일본의 신화,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 그리고 여러 문학작품의 분석한다. 여기서 제국주의 열망과 과거사의 문제를 칼의 문화와 ‘천황제’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그는 일본인, 일본 문화의 핵심이 바로 ‘신국(神國)’과 ‘천황’인데 신국이라는 허상에 사로 잡혀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실체는 본과 틀이 없다는 논리이다. 이것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필자가 보기에도 그렇다. ‘신국’이 자연스러운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폐쇄적인 세계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박경리도 이런 현상을 비판하는 듯하다.

 


또한, 박경리는 ‘나는 철두철미한 반일 작가지만 결코 반일본인은 아니다.’라고 언급한다. 자신은 분명히 ‘반일 작가’는 맞지만 ‘반일본인’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반문명적 모습과 기괴한 문화, 그리고 역사의식에 대해서는 가감 없는 비판을 가하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일본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 감정이 없다는 얘기다. 또한, 반일 작가로서 박경리가 비판하는 핵심 중 하나가 일본 문화의 기괴함이다. 기괴한 문화에 대해서는 일본 문화 전문가 박동균 교수가 쓴 『게이샤의 첫날밤에서 사무라이 할복까지』 책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들어 있다. 여기서 주요 언급된 내용을 보자면, 일본이 한글을 창제했다고 주장하는 사람, 한국을 혐오하면서도 한국에서 장사하는 사람, 전쟁터에서 굶주리고 목마른 자국 병사들에게 밥과 물을 팔았던 사람 등이 기묘한 습성에는 일본의 엽기적 문화가 깔려 있다. 그 외에도 알몸에 기모노를 입고 시아버지와 맞담배질을 하며 생닭을 일품요리라 먹는 나라, 참새 혓바닥을 자르는 할머니와 손톱깎이로 조선인을 학살하고, A형 혈액형으로 뭉치면서 마루타 생체실험으로 정로환을 만든 나라 등 이처럼 일본인의 근원적인 성격이 어떤 문화적 배경 위에 형성되었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부제 ‘기묘한 일본 풍속을 알면 일본의 국민성이 보인다.’라고 하는 말처럼 말이다. 박경리도 비슷하게 이런 기괴한 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또한, 박경리는 일본 지식인 다나카 아키라와의 논쟁에서 ‘일본인에게는 예(禮)를 차리지 말라’라는 다소 도발적인 발언을 한다. 아니, 대단히 감정적인 언사로도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일본이라는 국가와 역사, 인물들을 매우 객관화하여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에 책을 읽고 있는 내내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경리 작가가『일본산고』에서 비판하는 내용을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인은 통곡이 없는, 울지 않는 민족으로 본다. 한 개인의 결정보다는 사회 분위기에 강요당하고 강자의 복종으로 한 개인의 고통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할복(하라키리切腹)으로 나타난다. 또한, 본과 틀이 없는 나라이다. 기능과 세기(細技)가 뛰어나지만, 일본은 항상 남의 틀과 본을 훔쳐 오거나 얻어 와서 갈고 닦으려 한다. 그래서 본과 틀이 없는 일본은 창조의 활력이 위축된 민족이라고 비판한다. 일본 황실의 혈통이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는 만세일계(万世一系)를 주장하는 한편 일왕의 권위와 神性을 유지하기 위한 신도(神道)를 인위적으로 국가종교로 발전시킨 나라, 일본인의 집단적 심리 경향은 소심하고 겁이 많은 개인들이 집단에 복종하고, 권력에 약하고, 강자를 숭배하는 나라이다. 또한, 박경리는 말하기를 일본을 모델로 삼지 말라고 한다. 아첨하는 약자로 오해받기 쉽고 그러면 밟아버리려 든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인에게는 곰배상을 차리지 말라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곰배상이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상대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힘을 상차림에서 저울질하기 때문이다.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고 말한다. 일본이 이웃에 폐를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피해를 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것이며 민족주의도 필요 없게 된다는 논리이다.

 

 

그럼 책으로 들어가 보자.

 

한 사람 책임지는 자 없고 벌 받은 자 없는 그들에게 푼돈 얻어낸, 청풍 당상의 그야말로 더럽혀지지 않았던 양반들, 차라리 그것은 희극이다. 혹자는 말하리라. 그 푼돈도 우리 발전의 밑천이 되었노라고. 그러나 자로는 잴 수 없고 저울로도 달 수 없는 가치도 있다. 그 가치로 인하여 우리는 인간인 것(17)

 

한일합방을 늑대 이빨에 찢기는 양의 비극으로 비유한다면 수많은 이 강산의 딸들이 일본 병사의 화장실 역할을 했던 일은 무엇으로 비유해야 하는지 침묵하는 이 땅 남성들에게 묻고 싶고, 만일 저 아우슈비츠의 참혹함보다는 낫다고 자위하는 리얼리스트가 있다면 우리는 인간임을 사양할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 (17)

 

솔직히 말해서 일본은 도래인이라 표현하는 한족(漢族)이 그들 지배계급을 형성했던 것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심정일 것이며 가능하다면 일본 인종을 일본역도 고유의 인종이기를 바라는 것이 본심일 것이다. (20)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 일본이 이웃에 폐를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피해를 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것이며 민족주의도 필요 없게 된다.

 

날조된 역사 교과서는 여전히 피해받은 국가에서 논란의 대상이 돼 있고 고래 심줄 같은 몰염치는 그것을 시정하지 않은 채 뻗치고 있다. 가는 시냇물처럼 이어져 온 일본의 맑은 줄기, 선경 질적이리만큼 맑은 양심의 인사, 학자들이 소리를 내어 보지만 날이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 반대로 높아져 가고 있는 우익의 고함은 우리의 근심이며 공포다. 일본의 장래를 위해서도 비극이다. 아닌 것을 그렇다 하고 분명한 것을 아니라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그 무서운 것이 차츰 부풀어 거대해질 때 우리가, 인류가, 누구보다 일본인 자신이 환란을 겪게 될 것이다. (26-27)

 

괴기와 탐미는 약간씩 다르다. 그러나 상통하는 점도 많다. 감각에 충격을 주는 면에서 그렇고 보편성과 휴머니티의 결여. 윤리 부재 또는 반도덕적인 것에서도 공통된다. 그리고 특이하지만, 출구가 없는 것도 비슷하다. 그것은 총괄적인 인간의 삶 자체가 대상이라기보다 심층에 깔린 인간성 어느 부분의 의식을 끌어내어 그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일본 문학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 바로 그 같은 특이한 세계인데 일본 민족의 특이성이기도 하다. (49)

 

피해자가 불이익을 안고 과연 평등의 세계주의로 갈 수 있는 걸까? 허구요 망상이다. … 그들은 한국인의 분을 풀어주지 않았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피해였지만 그들은 거의 보상하지 않았다.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욕을 안 먹겠다는 것은 뻔뻔스러운 일이다. (62-63)

 

전쟁 말기 청소년들을 자살 비행으로 내몰던 가미카제를 나는 기억한다. 사이판 유황도 등 그들의 거점이 무너질 때마다 비전투원에게까지 옥쇄라는 것을 강요했고 차마 자결하지 못하는 모친을 아들이 목 졸라 죽였다는 얘기도 들은 바 있다. 그 무렵 일본은 본토 결전을 각오했으며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서 옥쇄한다는 것이 흔들 수 없는 명제였다. 어쨌거나 핵폭탄의 투하는 일본인 전원 옥쇄 전에 전쟁을 끝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폭 세례의 원인을 만든 것은 일본이다. (67-68)

 

일본은 거짓의 두 기둥을 박아놓고 국민을 가두어왔다.
하나는 천조의 상속권 주장인 만세일계요, 다른 하나는 현인신으로 왕을 치장한 신도(神道)다. (69)

 

일본인은 강하다. 흔히들 하는 말이지만 의외로 소심하고 겁이 많은 민족이라 했을 때 그들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일본인은 집단적 심리에의 경향이 짙다. 그것은 집단에 대한 복종을 뜻하며, 따라서 권력에 약하고 강자 숭배는 거의 생리적인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점에 대해서도 일부 한국인들은 매우 바람직한 장점으로 꼽는 것 같다. … 연약한 짐승들이 무리를 지어 포식자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면 생존해 가는 것과는 다르게 인간의 경우에는 생존의 한계를 넘어선 욕망이 있어서 왕왕 그것은 화약고가 되어 폭발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71)

 

일본 문학에서 탐미주의가 정점을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썩어가는 육체, 괴기스러움에 대한 쾌락, 그것은 일종의 도피다. 자살의 미학도 실은 일그러진 사디즘을 포장해 낸 것에 불과하고 삶을 정면 돌파하려는 의지의 결여로 볼 수 있다. (72-73)

 

“나는 철두철미한 반일 작가지만 결코 반일본인은 아니다.”(74)

 

낭만파 시인이며 평론가였던 가타무라 도코쿠(北村透谷)는 자기 앞마당 가에 있는 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으며, 지순한 감성의 소유자인 시인 이쿠다 슌게쓰(生田春月)는 세토나이카이에 투신자살했지요. 소설가로서는 가와카미 비잔, 아쿠타카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다자이 오사무(太宰治)가 있으며 아리시마 다케오는 유부녀와 함께 별장에서 정사(情死)를 했습니다. … 흔히 칼의 문화, 죽음의 미화라는 일본 전통에 원인을 두는 안이한 생각도 하는 모양인데 물론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배를 가르고 죽는 그야말로 몬도카네식의 처참한 셋푸쿠(하라키리, 腹切) 가 진정 아름다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83)

 

일본의 특수성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시초에서부터 지금까지 절대적인 가치관에 매달려 왔다는 점입니다. 사실 절대적이라는 그 자체가 기만이지요. 만세일계. 신도 사상, 그리고 칼, 본질에서 그것이 허위이며 허위이기 때문에 내용이 공동상태로서 빈곤을 면치 못하였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웃에서 틀과 본을 질려다가 내용을 채울 수밖에 없었겠지요. (85)

 

일본 문학의 탐미주의, 예술지상주의는 갇혀버린 사회에서 도피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선함도 진실함도 없고 오히려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농후합니다. … 자살한 일본 작가『라쇼몬』은 이래저래 유명해진 소설인데 … 아귀(餓鬼)라는 그이 호(號)에서 예술지상주의에 투신할 것은 작심한 만만찮은 의기를 엿볼 수 있고 그러나 그에게는 닫힌 세계였으면 출구가 없었습니다. (88)

 

후일 일본론을 쓸 생각입니다마는 너무나 학생들은 일본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고 사회 자체도 일본의 정체에 무관심하며 또는 일본을 모범으로 생각하는 부류의 확대되는 양상을 보며 걱정을 한 나머지 나로서는 이나마도 성급하게 엉성하나마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학생들이 일본을 모른다는 것이 학생들의 잘못은 아닙니다마는 마지막 꼭 해두고 싶은 말은 결코 일본을 모델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95)

 

피와 칼의 역사, 폐쇄되고 고립된 공간에서 간신히 수혈된 해외 문화는 그나마 만세일계라는 체제에 맞게 변조되어 종교든 철학이든 또 사상이 진실이 추구라는 방향을 잡지 못했고 황당한 신국 사상을 만들어 냈는데. 과학기술이 최첨단으로 달리는 오늘의 위치에서도 일본은 여전히 신구가(神國) 운운하는 것을 보면 진실, 진리라는 부분이 공동으로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물질이 풍요하고 기술이 상승한다고 하더라도 인간, 또는 생명의 본질적 탐구 없이는 야만성을 면치 못합니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 난센스, 그리고 황도주의(신국사상)라는 틀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111)

 

징병과 징용, 위안부, 농토를 빼앗기고 거지가 되어 도시를 헤매던 군상, 남부여대 정든 고향을 버리고 만주로 연해주로 떠나야 했던 사람들, 내 산천을 찾겠다고 만주벌판 눈보라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 고문과 인체실험으로 사라져 간 사람들, 죄없이 일본인 앞에서 떨어야 했던 어린 영혼들의 상처…. 일본에 대하여 향수를 느끼겠습니까? 이름도 우리말도 없애버린 그들, 반일의 피는 방방곡곡에서 들끓고, 꽃이며 심장이던 젊은 학도들은 결코 순종하지 아니하여 전쟁 말기에는 유치장이 미어졌습니다"(122)

 

그는 말했다. 그 시절이 좋았다고, 그 시절의 민족정신은 고귀하고 긴장되고 아름다웠다고. 한데 지금은 뭐냐, 그렇게 그는 말하고 있다. 우리 자신도 그 시절의 비극을 가슴 아프게 아름다운 것으로 회상한다. 그러나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은 것은 “천만의 말씀!”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우리는 현재 반일(反日)하는 것이며, 역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반일 하는 것이며, 다나카 씨 같은 일본인이 있어서 반일하는 것이다. (157)

 

"일본인에게는 예를 차리지 말라. 아첨하는 약자로 오해받기 쉽고 그러면 밟아버리려 든다. 일본인에게는 곰배상을 차리지 말라. 그들에게는 곰배상이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상대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힘을 상차림에서 저울질한다." (161)

 

이 책에서 박경리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지금의 일본 체제를 어떻게 형성했고 병들게 했는지 예리하게 밝힌다. 일본은 신국(神國)이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본과 틀이 없어진 나라로 신국의 과대망상은 군국주의를 만들고 탐미주의가 예술을 주도했다고 말한다. 둘째는 문화란 삶을 위한 본이자 틀로 ‘칼의 문화’는 본질에서 문화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수많은 문인이 자살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본과 틀이 없는 가운데 외래사상이 들어 왔고 의식의 한계로 괴기·에로티시즘에 탐닉하고 반생명적인 경향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한국인의 통속민족주의를 비판한다며 기고했던 글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일본이 내세우는 주장의 허구성과 논리적 비약, 왜곡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일본인이 사죄하지 않는 심리적이고 체제적 문제를 간파하면서 그들이 신국의 허상을 끊고 양심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한일 양국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2024년 현재에도 일본은 여전히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다. 아니, 일본의 우경화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목숨을 걸고 반일을 해야 할 때인듯하다. 그런데도 한국 역시 우경화 늪에 빠져있다.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한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전범으로 처단되었다. 하지만 전범 일본 히로히토는 일본군 총사령관 복장에서 중절모에 신사복으로 갈아입고 ‘원래 평화주의자’로 이미지 세탁에 성공했다. 그리고 장수했다. 패전도 ‘성스러운 결단’으로 포장해서 선전한 나라가 일본이다. ‘신국(神國)’과 ‘천황(天皇)’이 일본의 핵심 정치 언어로 작동하는 한 일본은 여전히 위험한 국가이다. 한일관계 정상화도 좋다. 하지만, “일본 사무라이 문화에서 한쪽이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는다”라는 것은 상대방에게 모든 처분을 맡긴다는 뜻이다. 그래서 ‘물잔의 반을 한국이 먼저 채우면 일본이 나머지를 채우며 적극적으로 호응해 올 것’이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이것이 박경리의 ‘일본산고(日本散考)’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2024/10/9 뜨르/ 혜윰인문학연구소

 

 

목 차(目次)

제1부 일본산고
1. 증오의 근원
2. 신국의 허상 I
3. 신국의 허상 II
4. 동경까마귀
5. 출구가 없는 것
6. 일본인들의 오해, 우리의 착각

제2부 “나는 반일 작가입니다”
1. 진실의 상자 못 여는 일본
2. 신들이 사는 나라
3. 미(美)의 관점
4. Q씨에게-신기루 같은 것일까
5. 다시 Q씨에게-망상의 끝

​제3부 일본 역사학자와의 지상 논쟁
한국인의 ‘통속민족주의’에 실망합니다
-8·15에 일본 지식인이 쓰는 편지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다
-한국 통속민족주의 돈에 대한 반론

​부록: 생명력 없는 일본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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