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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지금 ‘정보 (information)’에만 집착하는가? : 『서사의 위기』-스토리 중독 사회는 어떻게 도래했는가?-

by 뜨르 K 2024.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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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지금 ‘정보 (information)’에만 집착하는가? :『서사의 위기』
-스토리 중독 사회는 어떻게 도래했는가?-

 

 

보라. 이야기이다.

이야기하기 위해 인내하라.
그 후엔 이야기를 통해 인내하라.

페터 한트겐 Peter Handke

 

 

필자 아파트 집 바로 앞에 빵과 커피를 파는 베이커리 카페가 있다. 평일이나 주말이나 제법 큰 주차장을 메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어디서 온 지는 모르지만 젊은 사람뿐 아니라 가족 단위로 온다. 예전에 그 장소는 개업과 폐업을 거듭할 정도로 장사 몫으로는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럴까? 필자는 무척 궁금했다. 그 이유를 알아본즉 SNS에 Hot 한 장소로 유명한 핫 플레이스(Hot Place)란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핫 플레이스가 대세인듯하다. 어디에 사는 곳과 상관없다. 음식의 맛도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다만 SNS에 유명한 장소로 알려지면 제법 장사가 잘된다. 이것이 SNS의 힘이다. 즉, 정보의 힘이다. 이 책도 이 문제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피로사회』을 지은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다. 필자에게『피로사회』는 결코, 쉬운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잖은 감명과 시사점을 주었다. 저자가 이번에 피로사회에 버금가는 책을 발간했다. 바로 『서사의 위기』이다. 이 책의 핵심 낱말은 ‘서사(敍事)’와 ‘스토리(story)’다. ‘서사’와 ‘스토리’는 비슷한 단어처럼 보이지만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서사는 Story와 달리 Narrative이다. 내러티브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사람이 어떤 사건의 과정을 개연성 있게 전달하는 양식이다. 신화나 소설 등을 비롯하여 신문 기사와 취재 일지와 심지어는 의사가 쓴 환자의 병상 기록이나 과학자의 실험 일지 등이 넓은 의미에서 이에 해당한다. 스토리(Story)는 우리말로 하면 이야기이다. 어찌 보면 이야기도 서사의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에 헷갈린다. 여기서 스토리(Story)라는 단어는 단순한 이야기를 나타내는 뜻이 아닌 듯하다. 문학에서의 스토리(Story)는 줄거리에 가깝다. 즉, 사건들의 나열 말이다. 이 책 『서사의 위기』에서 말하는 스토리(Story)도 ‘이야기’와 짝을 이루지 않는 줄거리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좀 더 포괄적으로 ‘서사적인 요소들이 배제된 단순한 이야기’ 말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스토리(Story)를 정보(information)라고 번역하고 싶다. 저자도 정보를 언급하기를 새로운 것을 찾아 세상을 샅샅이 뒤지는 리포터의 매체라고 말한다. 정보는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고 정보가 또 다른 정보를 사냥하고 찰나의 소통을 몸소 보여준다. 그래서 오로지 순간만이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만 중요하게 만드는 스토리는 중독되면 될수록 깊은 허무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는 혼자 있을 때도, 다른 사람을 만나 대화할 때도 쉴 새 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실시간으로 나오는 뉴스를 확인하고 유튜브와 SNS로 짧은 영상과 사진을 읽어 들인다. 이 모든 것이 찰나에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길고 느린 호흡으로 내면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시간은 사실상 없다. 온종일 자극적인 스토리를 소비하느라 바쁘다. 또한, 끊임없이 게시물을 올리고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한다. 공허해진 삶의 의미를 모르는 척 말이다. ​나만의 생각과 맥락이 서사라면, 반짝하고 사라져 버리는 뉴스와 정보들은 스토리다. 저자는 우리가 억압도, 저항도 없는 스마트한 지배체계에서 자기 삶을 SNS에 게시하며 정보화하도록 조종당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에게 알 수 없는 착취와 제어가 이루어질 수 있다. 마치 우리 놀이터인 스마트폰이 디지털 파놉티콘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아름다운 꽃을 봐도 감동을 온전히 느끼며 내면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재빨리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는 데 그치며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고유한 이야기가 없다. 내 생각과 느낌을 말하지 못한다. 단지 입력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사회 말이다. 여기에 무슨 창조력이 있겠는가? 이것을 저자는 삶의 방향이나 의미를 제시하지 못하는 서사 없는 ‘텅 빈 삶’이라고 말한다. 이슈만 좇는 삶 말이다. 의미 없이 이슈에서 이슈로 이동하며 업데이트 강박에 시달리는 정보 사냥꾼의 삶은 공허하다. 왜냐하면 경험과 생각들이 차곡차곡 쌓이지 못하고 정보로 그저 나열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하기보다 새로운 정보를 공유하는 데만 집중하기에, 인간관계도 공동체 대신 커뮤니티를 이루는 데 그친다. 자기만의 역사를 잃고 우연성에 휩싸인 채 폭풍우 한가운데서 부유한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을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라고 부른다. 즉, 정보 과잉의 스토리에 중독된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저자도 이런 스토리의 중독 사회에 대해 중요하게 언급한다.

 

 

또한,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 등장한 정보가 이야기를 몰락시킨다고 말한다. 정보는 전달하거나 설명하지 않는 이야기와 달리 벤야민 말처럼 모든 것을 내보이기 때문에 서사적 긴장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그리고 현재도 스토리텔링을 통해 이야기하는 시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스토리셀링’ 시대라는 것이다. 즉, 이야기를 상품화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토리에 중독된 현대인은 삶의 주체가 아니라 상품의 소비자로 전락한다. 기업에서는 그 자체로 가치 없는 사물에 스토리를 부여해 우리가 ‘상품’을 구매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현상에 ‘스토리셀링(Story selling)’이라고 이름 붙인다. 스토리텔링은 일차적으로 상업과 소비를 지향한다. 스토리셀링(Storyselling)으로서 스토리텔링은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 그래서 영원히 편히 쉴 곳을 찾게 되고 어떠한 서사도 필요로 하지 않는 ‘편리함’ 또는 ‘좋아라’에 예속되어 ‘아우라’가 없는 상태를 지향한다. 저자는 책에서 스토리에 자기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빼앗긴 작금의 시대를 ‘서사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서사의 위기’는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겪고 있는 우리 시대의 문제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 시대의 문제를 파악하는 동시에 예리하게 짚어내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안타깝게도 현대인에게는 이야기를 경청할 시간과 인내심이 없다.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빠르게 흡수해 결과를 내야 하는 효율의 세계는, 길고 느리게 펼쳐지는 서사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서사 없는 삶에 행복은 없다. 오늘은 그저 어제에 이어진 날이며 인생을 의미 있게 하는 어떠한 서사도 일어나지 않는 생존의 연속일 뿐이다. 누구도 이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 또한, 저자는 거품처럼 잠깐 있다가 바로 사라질 스토리는 그 어떤 삶의 방향과 의미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사의 위기가 결국 삶의 위기로 연결된다고 설파한다. 인간은 어떤 순간에만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삶 전체가 출생과 죽음의 연결고리로 이루어질 때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이야기만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이야기는 스토리와 다르다. 이야기는 정신적 이완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게 하고 지혜를 담고 있으며 새로운 세계로의 시각을 확장하는 힘을 갖고 있다. 또한, 사회적 응집성과 공동체를 형성하는 힘이 있다. 서사는 나의 일관된 맥락과 고유한 이야기와 삶을 이루며 스토리와 다르게 삶의 방향과 의미를 부여한다.​​

 

정보의 나열을 뛰어넘는 진실한 이야기만이 삶의 의미를 찾아줄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을 보면 한마디로 이야기다. 그래서 인간은 서사적 동물이다.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궁극적으로 이야기에는 새로운 시작을 향하는 힘이 존재하기에 스토리보다 서사에 주목할 것을 말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서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 해결책으로 이야기의 경청과 접촉을 제시한다. 저자는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를 예로 들며 ‘경청’을 말한다. 소설에서 주인공 모모는 상대방의 말을 사려 깊게 들어줌으로써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이끈다. 이를 통해 상대방이 자기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고 심지어 사랑받는다는 느낌까지 받게 한다. 오로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 서사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넘쳐흐르는 정보를 맹목적으로 소비하기만 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나만의 맥락과 삶과 이야기를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또한, 책에서 저자는 철학자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 테오도르 아도르노부터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 베르톨트 브레히트, 폴 마르, 미하엘 엔데까지 다채롭게 인용하며 서사의 의미를 해석한다. 나아가 서사의 회복만이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서 불안에 떨지 않고 사는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회복된 서사는 아픔을 치유한다. 저자는 발터 벤야민과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며 치유의 힘을 다시 강조한다.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환자의 병은 의사에게 증상을 이야기하는 데서 치유가 시작”된다. 한나 아렌트는 “모든 슬픔은 이야기에 담거나 이야기로 해낼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 고 말한다. 모든 것은 이야기로 시작해야 한다. 일상성에 매몰되어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대로 공허하게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자신만의 맥락으로 고유한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삶 말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내면의 서사를 회복하기를 기대한다. 현재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하고 삶의 가치를 온전히 음미하면서 삶의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2024/5/12 뜨르/ 혜윰인문학연구소

 

 

스토리는 서사가 아니다. 스토리, 즉 정보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다음 스토리로 대체되어 사라진다. 반면 서사는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 자체다. 나의 저 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기에 방향성을 띤다. 곧 사라져 버릴 정보에 휩쓸려 자신만의 이야기를 잃은 사회, 내 생각과 느낌과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입력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사회의 끝은 서사 없는 ‘텅 빈 삶’이다. -p.7 -

 

프랑스 일간지《르 피가로》를 창간한 이폴리트 드 빌메상(Hippolyte de Villemessant)은 정보의 본질을 다음의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우리 독자들은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혁명보다 파리 라틴 숙소에서 일어난 지붕 화재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를 더욱 구체화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는 멀리서 오는 지식이 아닌, 바로 다음에 일어날 일의 단서를 제공하는 정보만이 공감을 얻는다.” 신문 독자들의 관심은 코앞에 놓인 것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호기심 거리로 축소된다. 근대의 신문 독자들은 시선을 멀리 두고 머무르는 대신, 하나의 뉴스거리에서 다른 뉴스거리로 관심을 이동시킬 뿐이다. p.13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디지털 플랫폼의 ‘스토리’도 진정한 의미에서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은 어떠한 서사적 길이도 보이지 않는다. 일련의 순간 포착일 뿐이며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들은 빠르게 사라지는 시각적 정보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p.46

 

 

이야기한다면 삶을 순전한 현 사실성 위로, 즉 적나라한 상태 너머로 고양할 수 있다. 이야기는 시간에 유의미한 과정, 즉 시작과 끝을 부여함으로써 형성된다. p.59

 

디지털화된 후기 근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게시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면서 벌거벗음, 공허해진 삶의 의미를 모르는 척한다. 소통 소음과 정보 소음은 삶이 불안한 공허를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위기는 ‘사느냐, 이야기하느냐’가 아닌 ‘사느냐, 게시하느냐’가 된 데 있다. 셀카 중독마저도 나르시시즘 때문이 아니다. p.64-65

 

오늘날의 위기는 ‘사느냐, 이야기하느냐’가 아닌 ‘사느냐, 게시하느냐 ‘가 된 데 있다. 셀카 중독마저도 나르시시즘 때문이 아니다. 내면의 공허가 셀카 중독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에게는 안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의미 제공이 결여되어 있다. p.64

 

발터 벤야민에게 어린이는 신비로운 세계의 마지막 시민이다. 어린이에게는 단지 눈앞에 존재하기만 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의미심장하고 매우 의미 있다. 마법적인 친밀성이 이들을 세계와 연결해 준다. p.79

 

무지의 기억으로부터 나오는 이미지의 특징이 아우라를 가진다고 볼 때 사진은 ‘아우라의 쇠락’ 현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p.80

 

이야기는 빛과 그림자,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가까운 것과 먼 것의 유희다. 투명성은 모든 이야기에 근거하는 이러한 변증법적 긴장을 없애버린다. 세계의 디지털적 탈신비화는 기존 막스 베버MaxWeber가 과학을 통한 이성화로 일으킨 과학적 탈신비화를 훨씬 넘어선다. 지금의 탈신비화는 세계의 정보화로 인한 것이다. p.85

 

보들레르처럼,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예술가 형은 오늘날엔 시대에 뒤처질 뿐만 아니라 거의 그로테스크하다고 여겨진다. 제프 쿤스Jeff Koons는 현대에 알맞은 예술가 형이다. 그는 스마트한 예술가로 여겨진다. 그의 작품들은 충격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매끄러운 소비 세계를 반영한다. p.98

 

니체가 말한 모든 가치에 대한 가치 전도는 모험과 향연으로서의 이야기, 즉 탐험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미래를 열어준다. p.108

 

프로이트도 고통을 개인의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막힘을 드러내는 증상으로 이해했다. 막힘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다. 심리적 장애는 막혀버린 이야기의 표출이다. 치유는 환자들을 이야기의 막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p.114

 

경청에서 중요한 것은 전달되는 내용이 아니라, 사람, 즉 타자가 누구인가다. 모모는 자신의 깊고 다정한 시선을 통해 타자를 그 사람의 타자성 안에 그대로 둔다. 이는 수동적인 상태가 아닌 능동적인 행위다. 경청은 상대에게 이야기할 영감을 주고 이야기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이 소중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심지어 사랑받는다고. p.118

 

실제로는 자기 묘사에 다름이 없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스토리‘도 사람들을 끊임없이 고립시키고 있다. 이야기와 달리 스토리는 친밀감도 공감도 불러내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시각적으로 장식된 정보, 짧게 인식된 뒤에 다시 사라져 버리는 정보다. 이들은 이야기하지 않고 광고한다. 주목을 두고 벌이는 경쟁은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다. p.121

 

오늘날 우리는 더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과도하게 소통한다. 우리는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를 건다. 집단적 의식 내용을 허용하던 이전의 ‘의례적인 관조’는 소통과 정보의 도취에 자리를 내주었다. 소통 소음은 마을 주민들이 하나의 이야기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뭉치게 해 준 ‘노래‘를 완전히 침묵하게 만들었다. p. 125

 

이야기는 사회적 응집성을 만든다. 이야기는 의미를 제공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가치를 전달한다. 이들은 체제를 만드는 서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기초가 되는 서사는 공동체 형성 자체를 방해한다. 신자유주의적 성과 서사는 모든 사람을 스스로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게 한다. 모두가 다른 사람과의 경쟁 속에 존재한다. p.126

 

스토리텔링은 최근 매우 인기다. 인기가 너무 많으니만치 우리가 다시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스토리텔링은 이야기의 귀환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를 도구화하고 상업화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자기 자체로는 가치 없는 사물을 가치 있는 재화로 변화시킨다. p.133

 

스토리를 판다는 것은 결국 감정을 판다는 말과 같다. 감정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신체의 본능 층위에서 행동을 제어하는 대뇌변연계에 그 시스템을 두고 있다. 감정은 이성을 거치지 않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p.134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animal narrans)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이와 반대로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다.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텔링 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 p.136-137

 

이야기에서 정보로
경험의 빈곤
설명되는 삶
벌거벗은 삶
세계의 탈신비화
충격에서 ‘좋아요’로
이야기로서의 이론
치유의 스토리텔링
이야기 공동체
스토리셀링

 

2024/5/12 뜨르/ 혜윰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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