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바바의 탈식민주의 전이(translation)
Ⅰ.
우리나라는 1945월 8월15일 해방을 경험한 민족이다. 우리나라와 만찬가지로 다른 나라들도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終戰)을 기점으로 식민 제국들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떤 방식으로든 식민 통치를 지속하려는 식민 제국의 의도와, 식민주의의 유․무형의 잔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볼 수 있다.예를 들면, 미국이 무기를 공급하고 적대적인 분위기를 조장시킨 걸프 만에서 이라크를 무력 침공한 것에서도 볼 수 있고, 박애주의란 이름으로 소말리아에 군대를 파견한 것은, 제국주의가 과거 식민 통치 기간에 행했던 양상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신(新)식민지적, 또는 제국주의적인 실천들이 지속되고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식민주의의 청산은 독립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나씀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해체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경제적 하부구조의 영역에서는 식민 본국에 의한 간섭과 통제가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식민주의의 영향력이 가장 끈질기고 견고하게 남아 있는 영역은 의식의 영역이다. 식민주의의 영향력이 의식의 영역에서 그럴 수 있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식민주의의 영향력이 의식의 영역에서는 아직 견고하게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대부분이 눈앞에 확연히 드러나는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즉 탈식민(de-colonizing)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도 탈식민의 과제를 해결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는 최근의 친일파 명단 발표 시비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났듯이, 식민주의의 문제를 기억하고 되새겨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억누르거나 회피해서 망각할 수 있는 문제로 치부하려는 목소리가 더 크다는 점에서, 올바른 해결의 모색과 실천이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인 것이다.
Ⅱ.
최근 몇 년 사이에 문학과 역사 분야에서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포스트식민주의주의론(postcolonial theory)이 거론되는 것은 바로 그런 문제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필자는 호미 바바의 포스트식민주의 전이를 통하여 돌파구를 모색하려고 한다. 포스트식민주의 전이에 대한 이해는 각양각색이지만 대체적으로 두 가지로 볼 수 있다.전이는 식민화의 도구인가, 아니면 탈식민화를 앞당기는 촉진제인가? 어떤 학자는 전이의 긍정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학자는 전이의 부정적 영향을 주장하기도 한다. 전자에는 전이(translation)를 제국의 철저한 도구로 이해하고 전이(translation)의 악마성을 주장한 E 체이피츠가 있고, 후자에는 정복당했던 ‘원주민’의 주체성을 되찾기 위한 방식으로 ‘재전이’를 주장한 T 니란자나,‘오역’을 역설한 V 라파엘, 그리고 문화적 언어적 ‘잡종교배’ 상태를 잘 활용하자는 S 메헤레즈가 있다.
데리다는 이전의 그의 많은 저작에 흩어져있는 주장에 바탕을 두고 "관련된 전이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1998년 ATLAS의 연례 세미나에서 강연을 했다. 데리다는 관련된 전이(translation)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관련된 전이(translation)에서 자민족중심적인 폭력과 투명해 보이는 언어를 통해 그 폭력이 동시에 신비화된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관련된 전이가 수용언어와 수용 문화의 관심과 이해에 따라서 기의를 고정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데리다는 모든 전이(translation)는 언어와 문화 간의 틈새의 경제 속에 참여할 수밖에 없고, 절대적 관련성 및 가장 정확한 투명성과 가장 일탈적이고 기울어진 비 관련성 사이에 전이가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전이를 직접 거론하면서 관련된 전이의 문화적이고 정치적 의미를 민감하게 인식한 것은 최근에 들어서이지만, 그의 사상은 포스트식민주의주의 및 포스트식민주의주의 전이(translation)이론의 거대한 자양분이 되었다. 포스트식민주의주의 문화이론에서 전이(translation)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한 텍스트에서 다른 텍스트로 의미를 전이(translation)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 보다는 문화 간의 혼합과 한 세계와 다른 세계 그리고 한 언어와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묘사하는 하나의 은유가 된다. 즉 여성은 가부장제의 언어로 자신을 전이하고 이민자는 자신의 과거를 현재로 전이한다.
Ⅲ.
그렇다면 호미 바바는 전이(translation)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포스트식민주의주의 이론의 선두 주자 중 한 명인 호미 바바는 전이(translation)를 혼성성(hybridity)의 한 형태로서, "새로움이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의 일부로 파악하고, '전이 문화'(translational culture)를 새로운 문화의 장으로써 제안한다(Location 212). 호미 바바에게 전이(translation)란 문화적 교환의 새로운 양상으로써 기존의 문화 개념을 탈 안정화하고 새로움에 대한 감수성을 창조하여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구현하는 활동이다. 호미 바바의 전이(translation)개념은 다른 동시대 문화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국가, 언어, 주체 등의 개념과 더불어 문화의 고정된 개념을 문제시하면서 등장한다. 전통적으로 문화는 민족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을 동일하고 일관된 의미로 안전하게 묶어 준다고 생각되어왔다. 하지만 근대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탈 근대론자들은 우리가 보편불변의 진리로서 생각해왔던 절대 개념들을 해체하면서, 문화 역시 안정되고 고정된 영역이 아니라, 가장 난해하고 중층 결정된 개념으로써, 그 속에 어떤 유일하거나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는 믿음이 하나의 신화이자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식민주의 이후의 거대한 이주와 더불어 고도 기술의 발전에 의한 범지구화는 기존의 문화 개념의 근본적 탈안정화를 촉진한다. 다시 말해 문화란 불균등하며 민족의 경계를 초월한다. 호미 바바는 이 과정에서 생겨난 국가나 민족 간의 간극의 공간(liminal space), 중심과 주변이 겹쳐지는 혼성성(hybridity)과 혼합주의(syncreticism)의 공간을 주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 경계 문화, 혹은 '제3의 공간'(the Third Space)에서 전이(translation)는 근본적인 활동이며, 그것은 국가 간의 소통의 매개로서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다.
전이(translation)개념은 그의 대표적인 용어인 혼성성(hybridity) 뿐만 아니라, '흉내 내기'(mimicry), '교활한 공손함'(Sly Civility) 및 '이산'(diaspora) 개념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이 모두는 용어는 다르지만, 모두 연관되어 있는 개념들이다. 우선 '흉내 내기'(mimicry)가 제국을 모방하고자 하나, 제국과 결코 완전히 동일해질 수 없는 혼성화된 피식민지인의 제국에 대한 자기식의 전유라면, '교활한 공손함'(Sly Civility)은 식민 치하에서 소극적 전복의 전략으로, 피식민지를 식민 주체의 닮은꼴로 만드는 문명화 과정을 수동적으로 받아들면서도 그것을 교묘하게 전복하는 양가적 과정이다. '이산'(diaspora) 은 원래 유태인과 같이 모국을 상실한 민족의 경우, 그 문화적 일체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던 개념이다. 하지만 최근의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에서 이 용어는 특히 식민주의의 '대량의 이주'로 인해 문화의 혼성화가 가속화된 상황의 은유인 동시에, 21세기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출신지와는 다른 곳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대표한다.
따라서 전이(translation) 역시 자본의 전지구화라고 볼 수 있는 식민화의 한 현상인 '대량의 이주'에서 기인한 혼성화의 새로운 문화적 양상이다. 물론 이 모든 개념은 (포스트)식민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이름들이다. 이 맥락에서 전이(translation)는 하나 이상의 국가 혹은 지역 문화와 관련된 문화적 언어적 재능을 지닌 소수의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작업이기 보다는 일상적 의사소통의 기초로서 새로운 문화 생산의 장으로 부상한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 생산의 장으로서의 전이(translation)는 이질적인 문화들의 조화로운 만남의 장이 아니라, 문화 간의 불균등한 권력 관계로 인해 각 문화들이 '동일한 척도로 비교 불가능함'(incommensurablity)을 나타내주는 지표이다. 호미 바바에 의하면, 문화는 '전이 불가능' 하다. 이것은 각 문화들을 동일한 척도로 비교할 수 없으며, 문화 간의 동질화가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그는 제임슨(Fredric Jameson)을 인용하면서, 전이이 탈근대의 다국적이고, 탈중심화된 네트워크를 지형화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호미 바바는 제임슨이 말하는 '재현 불가능성' (Post modernism)을 포스트식민주의주의의 문화 간의 문제, 즉 결코 약분될 수 없는 차이의 공간인 "제3의 공간"과 연결시킨다. 이것은 서로 다른 동질화될 수 없는 문화가 만나는 지점으로써 경계선 상의 존재의 불안정성과 간극성의 공간이자, 전이(translation)의 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전이(translation)는 "불연속적 다시 쓰기"(disjuctive rewriting)로서 "국가라는 상상된 공동체의 동질성을 전복하고 새로운 집단 정체성들을 협상"하는 과정이 된다. 즉 전이(translation)는 서로 이질적인 문화들이 만날 때 생기는 현상으로 재현의 과정에서 작용하는 불확정성을 통해 제국에 저항하는 주변인이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전이(translation)는 두 문화와 두 언어 간의 차이는 복원될 수 있는 것으로, 전이(translation)는 이에 교량을 놓는다. 그러나 문화와 언어 간의 혼합은 전통적인 의미의 전이(translation)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서로 다른 문화권 내에서 통용되는 개개의 기표는 그 의미가 서로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완벽한 의미의 전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혼합이 또한 전이(translation)를 완벽하게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매일의 업무로서 만든다. 예를 들어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지대나 카리브 해 등에서 2개 국어 구사자는 끊임없이 전이(translation)한다. 경계 지역에서의 전이는 평범한 일상생활이다. 여기서 호미 바바는 벤야민(W. Benjamin)의 변형의 과정 속에 들어 있는 저항의 요소인 전이(translation)의 간극성(liminality)과 전이의 외래성(foreignness)을 전경화시켜서, 이분법의 경계와 범지구화의 동일화 논리에 맞서는 혼성화의 "실행 담론"으로써 전이(translation)를 부상시킨다.
이렇게 호미 바바는 포스트식민주의과 이민자의 관점에서 전이(translation)를 문화 간의 경계를 재형상화하는 범주로서 부상시킨다. 이러한 호미 바바의 전이(translation)관은 문화간의 '혼성화'가 진행되고 있는 영역, 다시 말해 문화간의 연결에서 파생하는 불안정성을 기초로 한다. 하지만 그의 문화 개념은 재현이나 지식의 범주라기보다는 언표화(enunciation)의 범주로서 국가·문화·언어·주체의 관습적 안정성이 사라져버린 개념적 세계에서 가능하며, 이 용어들은 부정의 과정인 차이의 논리에 의해서만 말해질 수 있다. 따라서 호미 바바는 전이(translation) 언어의 권위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호미 바바가 멀리 떨어진 문화적 소재의 언어적 함의에는 별로 주의하지 않는다. 포스트식민주의과 이민자 사이의 차이를 주장하면서, 호미 바바는 전이(translation)를 혼성성(hybridity)의 간극적 공간(liminal space) 내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이 공간은 중심과 주변의 더욱 양극화된 공간에서 진행되는 텍스트들 간의 교통을 괄호로 묶어버린다. 그에게 있어서 전이(translation)는 동화의 전략이나 의미 전이의 메카니즘이기 보다는 혼성화나 이산 등의 개념과 같이 가는 하나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호미 바바의 전이(translation)개념이 탈근대의 조건으로 확장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따라서 호미 바바의 논의는 관점에 따라서는 영미 문화 연구에서 새로운 국제화의 표상이 될 수 있다. 오늘날의 전이(translation)가 일어나는 교통은 영어에서 다른 언어들로 옮겨진다. 영어의 문화 생산의 경계가 확장되어 점점 더 넓은 영역을 점하고 있는 상황을 대변하며, 그의 글은 영어의 지배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를 표하고, 문화적 표현의 단일 언어성(즉 영어)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호미 바바와 스피박은 전이(translation)를 문화적 차이의 불완전한 양극 사이의 어렵고, 끝나지 않는 거래로서 정의한다. 최근의 문화와 국가의 맥락에 적용해본다면 이는 데리다적인 근본주의적 개념에 대한 도전이 깔려있다. 민족, 문화, 언어나 주체성을 분리하는 경계를 재확증하는 대신, 전이(translation)는 그 경계가 흐려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것은 차이를 규정하는 체계로서 전이(translation)의 바로 그 경제학이다.
Ⅳ.
이 글에서 전이(translation)의 입장을 편의상 두 가지로 나누자면 그 한 가지는 호미 바바에서 보듯이 전이(translation)로서의 문화 혹은 전이(translation)의 일상화가 발생하는 문화전이의 입장이고, 다른 한 가지는 구체적 텍스트의 실제 전이(translation)에서 생겨나는 스피박과 같은 입장이다. 물론 이 두 가지가 명확한 선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개념적 틀 역시 서로 중첩되고 맥락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이이 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문화와 역사 등의 여러 담론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많은 외국의 텍스트들 중에서 어떤 특정한 텍스트들이 선별되어 전이되는지, 그리고 그 선별에 있어, 전이가가 수행하는 역할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순환하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담론들을 고려할 때 이것은 보다 명확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이(translation)담론을 다른 담론과 구분하여 전이(translation)담론을 중립적이며 투명한 담론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섞자는 것이 아니라 담론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전이(translation)를 상호 학제적 분야로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이(translation)는 단순히 언어 간의 등가성이나 중립적 언어전이의 문제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전이(translation)가 특정한 담론과의 관계에서 표현될 때, 우리는 각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같은 관련 문제들을 간과해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전이(translation)연구는 민족지학, 사회학, 역사학에서도 현재 연구가 진행 중이다. 그것은 텍스트의 분석에 있어서, 그리고 특히 통문화적 전이 혹은 전이과정의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관심사는 원래 텍스트의 생산과 권력 관계의 망이 문제로 떠오른다. 권력 관계는 원문의 컨텍스트와 수용 문화의 컨텍스트 모두에 존재한다. 우리가 전이(translation)의 역사에 의문을 제기하고, 특히 소수자의 입장에서 전이(translation)에 관심을 가질 때, 기원, 등가성, 지식, 재현, 투명성, 리얼리티와 같은 개념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문화 전이(translation)와 전이(translation)의 실천은 같이 가는 것이다.
Ⅴ.
최근의 연구는 전이(translation)를 식민주의와 관련시키고, 특히 종속과 주체화의 식민적 관행의 연구를 통해 나타난다. 이는 포스트식민주의 연구가들이 그들 개념의 일부로써 혹은 지나가는 말로써 전이(translation)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의 맥락 내에 전이(translation)를 위치시키고, 그 구체적 역사 과정을 통해서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연구를 통해 우리는 전이 연구에서 전이(translation)의 휴머니즘적 전통을 벗겨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인도와 필리핀 타갈로그 사회 등 기존의 연구를 중심으로 몇 가지 예를 들겠다. 이러한 시도들은 체이피츠(E. Cheyfitz)의 『제국주의의 시학』, 라파엘(V. Rafael)의 『식민주의의 계약』, 그리고 니란자나(T. Niranjana)의 『전이의 위치』 등이 가장 대표적이다.
체이피츠의 저작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식민화와 전이의 관계를 살핀다. 그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인디언의 소유 개념의 문제이다. 소유와 관련된 식민지의 '전이' 문제를 단순화시키자면,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 땅을 소유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문명화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땅을 훔치지 않는다. 체이피츠는 소유되지 않은 땅을 소유로 변형시키는 것은 전이의 과정을 통하여 효과를 발휘한다고 제시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소유되지 않은 땅을 인디언에게서 양도받기 위해서, 인디언의 소유로 '전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소유나 전이(translation)의 개념에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 쉐이피츠가 분석한 식민주의자들의 중심 주제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와 똑같아야만 한다. 당신이 우리와 이미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면, 당신이 우리와 동일하게 되도록 개종되어야하거나 '전이'되어야만 한다."이고, 이 과정을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전이』(translation)가 언어를 지배와 통제의 1차적 기술이자 사회의 형성과 교화를 위한 강력한 채널로서 간주한다. 예를 들면 그가 보기에 '인디언들은 단지 땅을 경작하는 것이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등의 논리는 식민주의 문화와 이데올로기이며, 지배하는 개념 체계이다. 니란자나의 저작은 인도인의 입장에서 영국민들이 인도의 법률과 문학을 영어로 전이할 때, 인도어를 열등한 것으로 호명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니란자나의 주제는 영어 혹은 영문학이 인도인들에게 '새로운 품성을 각인하는' 과정이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 과정은 전이(translation)를 통해서―인도의 법률과 문학을 영어로 전이함으로써-이루어진다. 나란자나는 이 과정을 알튀세의 용어로 '호명'이라고 부른다. 즉 영문학은 인도인들을 이중적인 방식으로 '부르거나' '호명'한다. 즉 그들이 토착적 방식을 고수한다면 열등한 자로서, 그리고 '그들의 야망이 영국인과 유사해진다면' 진보된 자로서 호명된다.
타갈로그 필리핀계 미국인인 라파엘은 『식민주의의 계약』에서 필리핀의 한 종족인 타갈로그인들과 스페인인의 개종과 정복, 전이와 고백성사 사이의 상호 얽혀진 과정들을 탐구하면서, 스페인인과 관련해서 세 언어 간의 서열화가 생겨난 방식을 보여준다. 여기서 가장 상위어는 신과 가장 밀접한 라틴어이며, 중간은 제국의 언어인 카스티야어, 그리고 가장 하위어는 타갈로그어가 된다. 전이(translation)는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신에게서 멀어질수록 언어와 그 문화는 기독교의 진리의 개념에 점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하위어로 내려갈수록 전이(translation)는 더욱 힘들어진다. 라파엘이 연구하는 스페인의 필리핀 정복과 식민화라는 맥락에서 타갈로그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역사적 변형에서, 개종과 정복은 같이 가는 것이며, 식민지 통치자의 이미지에 따라 '원주민'을 변형하고 전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종, 전이, 정복은 사실상 동일한 과정이다. 즉 라틴어와 스페인어 텍스트와 용어들을 타갈로그어로 전이하는 것은 타갈로그인을 변형시키고 그래서 또한 타갈로그 화자들을 다른 어떤 것으로 '전이하고' '개종하는' 것이 된다.
역사를 거꾸로 돌릴 수 없는 현시점에서 최선책이 영원히 사라져버린 현재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차선책이란 잡종성의 상태와 어떤 식으로든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잡종성을 영원한 악으로써 완전히 추방해버릴 수 없다면, 그 속에 들어있는 다양성과 창의성을 그들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잡종성이나 전이는 그 개념이 지니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식민적이거나 그 이후에도 여전히 잔존하는 포스트식민주의 권력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재위치 지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방식들을 탐구한다. 이것은 제임슨이 『정치적 무의식』의 결론에서 부정적 이데올로기 분석과 더불어 미래를 위한 길을 탐색하는 "유토피아적 " 비전 사이의 변증법으로 제시하는 바이기도 하다. 니란자나의 경우는 탈식민화를 촉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전이"를 주장한다. 이것은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각인되어온 열등한 자로서 인도 호명을 거부하는 한 방식인 동시에 동화적이고 자국화 논리에 따라 전이된 영어 판본에 대한 거부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니란자나의 재전이(re-translation)는 스피박의 경우처럼 직역에 충실하고 원본 텍스트에 가능한 한 근접해 있는 것이어야 한다.
라파엘의 경우 고해성사를 예를 들자면 타갈로그 조상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죄를 고하러 오는 등 언제나 스페인 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타갈로그식의 서구 문화 수용이 서구와의 순수한 동질화가 아닌 혼성화를 일으키고, 이런 식의 혼성화가 서구를 전유할 수 있는 발판이라고 그는 논의를 전개한다. 즉 동화 과정이 아닌 혼성화 과정으로써 전이는 그에게 차선의 대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장소와 시간, 크게 말해 역사적 대상을 서로 달리 하고 있긴 하지만, 호미 바바가 흉내 내기나 문화 전이 개념을 통해 주장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Ⅵ.
어쨌든 실제 전이에 기초해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자면 충실성의 문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아주 중차대한 과제이다. 비록 제3세계의 텍스트를 제1세계 언어로 옮기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는 하지만, 스피박의 논리만이 아니라 수사성에 대해서까지 원본 텍스트에 충실해야한다는 주장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전략이다. 그것은 충실성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 때, 그들의 이론을 올바르게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피박 뿐만 아니라 베누티, 니란자나 등의 거의 대부분의 포스트식민주의주의 전이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외래화주의 전이는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이 모두는 제3세계의 텍스트를 제1세계로 옮기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화 전이는 옳은가 자국화 전이 혹은 동화적 전이는 옳은가의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언어 자체가 정치적 힘의 관계망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이는 국제 언어로서의 면모를 갖춘 영어와 동양의 한 주변국의 언어인 한국어 사이의 관계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전이는 우리에게 중심부의 담론들이 주변부로 전이되는 중심적 메커니즘으로써 우리에게 서구와의 동질화 이데올로기를 엄청난 속도로 각인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서구화 혹은 근대화 속도와 맞물리는 것이다.
그러나 전이(translation)를 다시 생각하면서 생겨나는 문제는 우리와 같은 주변국의 민족어(혹은 민족정신)를 더욱 주변 화시키는데 전이가 기여하기 때문에, 전이(translation)를 이 땅에서 추방해야한다는 본질주의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혼성화를 핵심적 전략으로 내세우는 호미 바바로 돌아가 그의 개념들이 가지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 전이(translation)란 앞서도 말했듯이 동질화가 아닌 혼성화 과정으로 이해할 때, 그 전유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메흐레즈(Samia Mehres)는 '잡종교배'(metisses), 안잘두아(Gloria Anzaldua)는 '메스티자'(mestiza) 의식', 데이비스(Carol Boyce Davies)는 '이주의 주체성' 등의 용어로 과거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차선의 방법을 찾는다. 이것은 '이주', '혼성성(hybridity)'과 '전이'의 은유에서 미래를 위한 새로운 희망을 찾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호미 바바가 말하는 문화 전이나 전이(translation)의 일상성이 많은 비판의 소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이론에 주목해야할만한 이유가 된다. 1세기에 걸친 영국의 지배와 1세기에 결친 미국의 간접 통치로 인한 국제 언어로서의 영어의 헤게모니적 역할을 특히 영미 문화의 범세계적 확산을 동반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와 같이 비교적 단일한 민족적 혈통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에서도 민족어를 오염시키는 언어적 혼성, 그리고 우리 고유의 것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서구적인 것과의 문화적 혼합은 나날이 가속화되고 있다.
문화 간의 혼합이 포스트식민주의주의가 주 대상으로 삼는 인도나 카리브해 국가들, 혹은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아 모국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국가들에게 당면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전이에 대한 포스트 식민적 사고나 그 전략들이 유용성보다는 위험성이 훨씬 더 크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이의 충실성만을 강조하는 풍토 속에도 맹목적 서구지향성만을 가속화시킬 위험은 언제나 내재해 있다. 이러한 입장들을 고려해 본다면 포스트식민주의주의 전이이론은 헤게모니 문화의 침투가 보다 가속화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려는 하나의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포스트식민주의주의 이론에서 배워야 할 것은 독립 이후에도 끊임없이 각인되어온 중심주의 문화의 올바른 극복을 고민하는 자의식이며, 전이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다. 이것은 지난 과거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길인 동시에, 진정한 탈식민화의 방향을 고민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식이다. 2014/11/21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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