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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by 뜨르k 2016.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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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 『장미의 이름』 줄거리

 

『장미의 이름』의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327년 성자와 이단자가 공존하는 북부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이다. 이 글의 주요 인물은 윌리암 신부와 그의 조수이자 이 글의 화자(話子)인 아드소이다. 이 글은 기독교적인 내용을 주로 하고 있으며, 주변 인물들 또한 모두 기독교적 빛깔을 띠고 있다. 또한 이 글은 철학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그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다. 이 글의 사건의 발단은 사본사 아델모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델모 수도승의 죽음은 수도사들에게 커다란 정신적 동요를 일으키게 되었는데, 윌리암 신부는 이 수도원에 방문하자마자 이 죽음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조사하였다. 윌리암 신부는 추리력이 뛰어난 인물로 보여지며, 그가 추리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한 예가 바로 처음 간 수도원에서 화장실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탐닉하였고 합리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기 때문에 이것이 나중에 사건을 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베르티노 신부는 수도원에 악마가 있어서 아델모 신부가 죽었다고 하며 묵시록의 예언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윌리암 신부는 아델모 신부가 자살이라고 하였는데, 최고의 그리스어 번역승이며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하던 베난찌오 수도승이 돼지우리에서 죽은 이후 이 사건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죽은 두 명의 수도승의 공통점은 모두 사본실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윌리암 신부는 사본사 아델모가 주검이 되어 발견된 장소에서 범인에 대한 단서를 수집하게 되는데, 그것은 눈 위의 발자국이었다. 그 발자국은 뒷발꿈치가 더 깊이 들어가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들키지 않기 위해 뒷걸음으로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신발 자국 역시 사건에 단서로 남게 된다. 사본실에서 죽은 사본사들이 일하던 자리를 조사하던 중에 발견한 사실은 이들이 모두 희극을 번역하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윌리암 신부는 호르헤 신부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윌리암 신부의 빈틈없는 언변에 호르헤 신부는 고함으로 말문을 막았다. 논쟁의 원인은 성직자는 웃어서는 안된다는 호르헤 신부의 주장을 윌리암 신부가 반대되는 말로 대항했기 때문이었다.

 

2. 『장미의 이름』의 리뷰

 

1) 이 소설의 제목에 붙어 있는 “장미”는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이런 아름다움은 영원할 거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들고 역시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진리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고 없어진다. 다만 이름만이 있고 형상이고 이미지만 남을 뿐이다. 한때 호화찬란했던 수도원이었지만 작품의 마지막에 묘사된 모습은 폐허와 죽음의 형상이었다. 장미가 부귀·영화·영광·권위·세력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영원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2)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호르헤 신부를 통해 그림자 이름뿐인 절대 진리에 목숨을 거는 것에 대하여 암시하고 있다. 호르헤 신부가 말하던 '지식은 돌고 돈다'는 말은 새로운 지식을 거부한다는 의미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호르에 신부는 이 말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식은 돌고 도는 것이므로, 과거의 지식을 반복해서 배우기만 하면 된다."

과연 그런가? 전통적인 신학인 서구신학이 진리가 아니라 일리라는 사실이다. 어떤 신학이든 신학은 역사・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으면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신학은 마찬가지로 역사․ 문화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문화‧ 역사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신학은 없다는 말이다. 전통적인 신학도 일종의 토착화 신학이면 일리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 김영민은 진리・일리・무리를 아래와 같이 정의 하고 있다.

 

진리는 시공을 초월해서 언제나 참인 절대적 지식이고 진리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가치를 전달하는 불변의 보편적 지식에 가깝고 일리는 특정상황에서 특정 사람들에게만 한시적으로 의미 있는 잠정적, 국지적 지식이다. 상황에 따라 참 일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지식이 바로 일리이다. 그리고 무리는 억지 지식이나 진리도 일리도 아니며 어떤 상황에도 유용한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는 지식이다

김영민에 의하면 오직 일정한 상황에서만 가치를 지니는 ‘일리’만이 숨 쉴 뿐이고 진리와 무리는 해체시켜야 함을 주장한다, 일정 기간 동안만 진리인 일리가 설득력을 갖게 되었고, 진리는 무너지기 위해 존재한다. 보편타당한 진리가 있다고 우겨 봐도‘무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 중세신학도 결코 보편타탕한 진리가 아니라 일리일 뿐이다. 세상은 정체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보편타당한 진리라고 여겼던 것에 대하여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이다.

 

3)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윌리엄을 통하여 마치 14세기에 서구에서 일어났던 기독교와 철학과의 관계, 타락한 심판자, 성경 외적 지식에 대한 탄압, 성경의 번역을 둘러싼 세계 해석의 문제 등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결과적으로는 당대 기독교 문화의 어떤 맥락에 대한 매서운 비판의 메스를 가하고 있다. 작가는 윌리엄과 아드소가 수도원에서 보내는 일주일간의 생활을 통해 중세의 생활상과 세계관, 각 교파간의 이단논쟁과 종교재판, 수도원의 장서관 등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종교적 독선과 편견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던 14세기 유럽의 암울한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4) 호르헤 신부가 "웃음" 때문에 연쇄살인을 저지른 이유 무엇인가? 호르헤 신부는 인간은 웃음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웃음, 즉 현세의 행복이 신의 은총이라는 르네상스 철학에 대해 중세의 경건주의와 어긋나므로 반대한 것이다. 현실을 즐기자는 것은 교회의 엄숙주의와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둘째 권 『희극』(첫째 권은 『비극』임)을 금기했고 이 책을 열람할 경우 독약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때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이단으로 여기고 있었고 플라톤 철학이 정설로 여겨졌기 때문에 죽음의 사건이 일어 날 수 밖에 없었다.  요즘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계보가 보편화되었지만 말이다.  베네딕트파에서 말하고 있는 단면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통해 드러난다. 식사 때 한 수도사가 '묻기 전에는 대답하면 안 된다. 웃어서는 안 된다. 품위를 떨어뜨리면 안 된다.'라는 말을 한 것. 또 호르헤 신부가 윌리암 신부와의 논쟁에서 '웃음을 두려움을 없애며 이것은 악마에 대한 두려움까지 없애는데 이것 없이는 신에 대한 믿음이 없어진다.'고 말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 대해서 비판하는 장면 등등. 반면에 프란체스코파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신앙에서 이성을 강조하며 웃음을 받아들인다.

    

5)『장미의 이름』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요소를 지니고 있다. 지식과 진리의 상대주의로서 해체주의라는 측면에서는 일치한다. 지식이란 당시의 주된 사상이며 매너리즘이다. 되돌아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었다. 여기의 현실이 가능 유일한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계에는 상이한 질서와 규칙을 지닌 다른 세계, 다른 현실들이 공존함을 암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세계의 유일성이나 불변성이 훼손되고 세계의 존재론적 가변성과 불확실성, 다원성으로 환기할 수 있다는 논지이다. 지식은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고 사라지면  또한 헤겔이 말한 변증법적으로 융합되기도 한다.  2004/9/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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