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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읽기

by 뜨르k 2022.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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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읽기

 

 

3.1절 백주년을 맞이하여 3.1절에 가족들과 함께 항거: 유관순 이야기를 관람했다. 물론 모든 가족들이 흥쾌히 동의 했다. 감사한 일이다. 영화는 제목부터 의미 심장하다. “항거” 즉 레지스탕스(resistance)이다. 원래 레지스탕스는 저항이라는 뜻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점령 하에 놓였던 프랑스,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폴란드, 소련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저항운동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서는 독일점령군과 비시정권에 대한 프랑스의 저항운동을 가리킨다. 아시아의 일본점령하의 저항운동, 나치즘과 파시즘 체제에 대한 저항 등도 일종 레지스탕스(resistance) 운동이다. 사람들은 항거나 저항은 반감이 가는 용어라고 말하지만 때론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그렇고 유관순도 그렇다. 

 

심지어는 반나치 레지스탕스 운동가로 세계 인권 선언문 초안 작업에 참여한 외교관으로 살아온 스테판 에셀은 젊은이들에게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이다. 레지스탕스의 동기는 분노이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라” 라고 말한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를 지키려면 분노할 일에 분노할 줄 아는 것이 필요하듯 때론 사람이자기 존엄성을 지키고 자신의 행복을 지키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우리들이 사회적 관심과 저항의식인 분노가 없다면 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겠는가? 때론 저항이 없어도 가능하지만 저항이 필요할 때도 있다. 저항할 때 저항하고 분노할 때  분노하자. 우리는 지금 분노할 때인가 라는 질문을 항상 던지고 살아야 한다. 레지스탕스 즉 항거 정신을 보여 주고 분노할 일에 분노할 줄 아는 분이 유관순 이었다. 영화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듯이 유관순은 독립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아마 이러한 질문을 던졌기에 항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유관순에 대한 영화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때 당시 대략적인 시대적 역사적 배경과 전게과정을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한국사 공부를 통하여 우리가 익히 알듯이 1919년 3월1일 오후 2시에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는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 가운데 29명이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선언식을 마친 뒤 29명인 대표는 바로 경찰에 연행되었고 독립선언서 낭독에 "민족대표"로 참여한 사람들은 특이하게 모두 종교인들이었다. 물론 유관순도 물론 기독교인이었다. 현재 이 땅에서 종교인들의 빛과 소금의 역활이 얼마나 소중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또한 민족 대표 33인 이라고 해서 민족과 나라를 위해 모두가 끋까지 항거한 것은 아니다. 모진 고문와 회유에 못이겨 중간에 변절자도 생기기도 하였다.(4명) 그래서 죽음을 불사하고 끝까지 항거한 유관순이 빛나는지도 모른다. 유관순의 만세운동 전개과정을 보면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관순은 이화 여자 고등 보통학교 1학년이었고 한 달 후에는 2학년이 될 예정이었다.

 

유관순은 공주 감리교회의 제이 햄몬드 샤프 여사의 추천으로 공부하고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사촌 언니 유예도도 샤프 여사의 추천으로 1년 먼저 이화 학당에서 입학하여 3학년 졸업반이었다.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학생들과 청년들 그리고 시민들의 시위 행렬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덕수궁 뒤편에 있는 이화 학당 교문 앞에 다다르자 시위대는 이화학당 학생들의 동참을 촉구했다. 프라이 교장은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교문 앞에 서서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막았고 학생들은 항의했다. 하지만 유관순은 몇 명 친구들과 함께 학교 담을 몰래 넘어 서울 시내 만세 운동에 합류했다고 한다.

 

또한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앞에서 학생들 주도하에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제2차 대규모 만세 운동이 있었다. 이때에도 유관순은 시위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경무 총감부에 감금되었다. 다행히 이화 학당 당국이 경무 총감부와 설득하여 다른 학생들과 함께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러한 시위가 있기 전에도 유관순은 평소 태극기를 그려 교실과 기숙사 벽에 붙이는 등 다섯 명의 친구들과 5인의 결사대를 만들어 태극기와 애국가를 적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유관순의 애국 의식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고종의 승하와 2·8 독립 선언 이후 이화학당에 다니던 16세의 어린 소녀 유관순도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물론 서울 3.1운동과 서울에서 만세 운동은 이 영화에서는 언급이 없다. 학생들의 독립운동 참여가 늘어나자 일제는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유관순은 어쩔 수 없이 고향 천안으로 내려간다.

 

 

3월 13일 유관순과 사촌 유예도는 고향 천안으로 내려와 함께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독립 자금을 모금하고자 하였으나 가난한 동네라 모을 돈이 없었다. 어른들이 “우리도 차라리 만세 운동을 벌이자.”라고 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유중권과 숙부 유중무, 동네 어른 조인원(조병옥의 아버지) 등이 나섰다. 이들은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날에 만세 운동을 하자는 거사 계획을 세웠다. 유관순은 각 동네를 돌면서 유림 대표와 지역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만세 운동에 나설 것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쓸 태극기도 만들었다.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 약 3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후 1시 조인원이『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유관순은 앞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 대에 앞에 함께 동참한 사람은 조인원, 유중권, 이소제 부부, 김상헌, 김주헌, 김교선, 김상철, 조병호, 유관순 등이다. 3천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대한 독립 만세 소리로 온 장터에 진동했다. 기세를 몰아 시위대는 일본 헌병 주재소로 다가서자 시위 대열의 기세에 놀란 일본 헌병이 총검을 휘둘렀다.

 

이때 일본 헌병들이 총검으로 선두에 선 유관순의 옆구리를 찔렀다. 헌병이 상처를 입은 유관순의 머리채를 잡고 주재소로 끌고 가는 것을 본 유중권은 부인인 이소제와 함께 끌려가는 딸을 뒤따르며 필사적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결국 유관순 부모는 일본 헌병이 휘두른 총검에 찔려 숨을 거두게 된다. 병천 일본 헌병 주재소의 헌병들이 시위대를 제지했고 그 상황에서도 유중무는 빈사 상태에 빠진 유중권을 등에 업고 김용이, 조인원, 조병호, 유관순 등과 함께 약 40명과 함께 주재소에 몰려갔서 항의했다. 유중무는 두루마기 끈을 풀어 헤치고 일본 헌병에게 큰 소리로 항의했고 조인원도 저고리를 벗고 소장과 헌병의 총을 잡아 제쳤다. 유관순은 “우리는 나라를 찾기 위하여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왜 무기를 사용하여 우리 민족을 죽이느냐?”고 외쳤다. 헌병이 총을 들이대자 “죽이려면 죽여 보라.”고 하며 달려들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것이 대략적인 역사적 배경이다. 

 

그럼 이쯤하고 영화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영화『항거:유관순 이야기』는 1919년 3.1 만세운동 후 3평도 안 되는 서대문형무소 8호실 안에서 몸은 감옥에 있지만 영혼만은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유관순과 8호실 여성들의 일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영화『항거:유관순 이야기』의 포스터는 3.1만세운동 이후 고향으로 내려간 유관순이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시작하기 직전 모습이다. 흑백으로 처리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 뒤로 홀로 칼라 색을 띠고 결연에 찬 표정을 한 유관순의 모습은 경이롭기 까지 하다.

 

 

대체적으로『항거: 유관순 이야기』영화는 차분하며 덤덤한 톤으로 그려져 있다. 관람하기도 다큐처럼 편했지만 첫 장면부터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는 이미 응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유관순은 서울에서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만세운동을 전하면서 천안에서도 운동을 다함께 하자고 태극기를 열심히 베껴 그리고 있는데 오빠가 판화로 만들어다 주는 장면과 밥 먹기 전에 식전기도를 하는 기독교 집안이고 본인도 기독교 신자이지만 기도 중에 밥을 먼저 한 숟가락 뜨기도 하고 십자가 대한 애기도 하고 의심이 믿음의 반대말은 아니라고도 말한다. 기독교 믿음을 다시 생각하는 대목이다. 믿음을 불변인 명사로 보면 의심의 반대말일 수 있지만 믿음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아마 영화에서 유관순은 믿음을 명사가 아닌 삶의 영역으로 확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날 일본 경찰이 유관순의 집에 순찰을 하러 들어와서 아버지와 오빠가 호통을 치는 사이 유관순은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들고 뒷담을 넘어 빠져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에 의하면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에서 4월 1일 만세운동을 주동한다. 일본 경찰 차량이 태극기를 달고 있어서 일본사람이라 의심을 못했지만 갑자기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칼로 베는 모습이 그려진다. 한 순간에 한자리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본이 쏜 총에 목숨을 잃는 장면이 펼쳐진다. 그리고 바로 영화 화면은 전혀 새로운 장면으로 안내하듯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뀐다. 항거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렵고 특이하게 영화의 몇몇 장면들이 시간 순서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뒤죽박죽 뒤엉켜서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문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복선인 것 같다.

 

아무튼 유관순은 이 사건으로 3년형을 선고받고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게 된다. 유관순 여자 교도소 8호실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사건이 빠르게 전개된다. 3평정도 아주 비좁은 방 안에는 25명이 수용되었다. 사실 일제는 독립을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들려 서대문 형무소에 방이 없었기 때문에 한방에 많은 사람을 수용한 것이다. 한 방에  25명이 들어 갔다. 방이 너무 비좁아서 앉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었다. 가만히 서 있으면 발이 퉁퉁 붓을 수밖에 없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안해 낸 방법이 다함께 강강술래를 하듯 빙글빙글 도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다른 방도 마찬가지이겠지만 8호실에도 다양한 사람들 수용되었다. 영화는 사연이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로 고리를 이어간다. 고향에서 알던 아주머니도 있고 서울에서 알던 선배도 화류계 출신인 독립운동가 향화언니도 있다. 그들은 방 안에서 빙빙 돌다가 누군가 아리랑을 부르면 다함께 따라 부른다. 그러자 간수들이 와서 모두 조용하라고 다그친다. 그 모습을 보고 유관순이 울다가 누가 오면 뚝 그치는 개구리 같다고 말한다. 이번엔 아리랑 대신 모두 다함께 개굴개굴 개구리 소리를 낸다. 이 사실을 안 형무소 소장은 조선인 간수 정춘영(니시다)을 시켜 일본말로 개구리가 아니라고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주동자를 찾아내라고 명령한다.

 

아무튼 감방 8호실 사람들이 합심하여 지혜롭게 개구리 주동자를 찾는 데 실패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그들은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또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 몇몇을 호명하며 건강검진 한다고 한명씩 불러내 사과를 주고 면담을 하면서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미끼를 던진다. 오직 한 사람이 걸려들었다. 8호방 있는 임산부이다. 임산부 수감자에게 감옥에서 아기를 키울 수 있게 해준다는 거래조건을 내 걸어서 회유하여 결국 유관순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다. 그로인하여 유관순은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손목으로 허공에 매달아놓고 옷을 풀어헤쳐서 수치심을 주거나 서있는 관에 가두는데 일주일 동안 옴짝달싹 못하게 하여 실신하게 만든다. 그 고문으로 나중에 문을 열어주어도 걷기는커녕 움직이지도 못해서 산송장처럼 바로 쓰러지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후반부에서도 더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심지어 손톱을 들어내고 자식도 못 낳게 해야 한다며 배를 발로 차서 방광과 자궁을 파열시켜버린다. 이런 고문은 독립을 위해 항거하지 않으면 피할 수 있는 고문들이었다. 더 나아가 유관순은 부모님 기일이자 아우내 시장 만세운동 1주년이 다가오는데 뭐라도 해야 된다는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원래는 모범수들만 시키는 노역을 자원해서 양잿물을 만져야 하는 빨래 일을 자원하게 된다. 그래서 손은 온통 엉망이 되고 그 손으로 밥을 먹으면서 만세운동 날짜 4월 1일을 알기 위해 니시다(정춘영)에게 알려달라고 머리 숙여 부탁한다.

관순이 무언가를 일을 꾸미는 것을 눈치 챈 같은 방 사람들은 형무소 나가서 하자고 제안하지만 결국은 그날 유관순은 빨래노역장에서 쓰러지는 연기를 하여 방으로 돌아온 후 독립선언문을 읽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따라 외치고 그 외침을 들은 다른 방 사람들도 함께 했으며 남성 수감자들 까지도 대한독립만세에 동참한다. 이윽고 대한민국 만세가 온 형무소에 울려 퍼지게 되고 이 소리를 들은 간수들은 어쩔 줄 몰라 당황해 한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형무소 밖에서도 그 만세소리를 듣고 대거 거리로 몰려나와 만세를 외친다. 제2의 만세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유관순의 독립에 대한 의지가 또 다시 만세운동으로 울려 퍼진 것이다.

이 사건에 조사를 맡은 니시다(정춘영)는 만세운동이 여성수감자들의 방 쪽에서 먼저 시작되고 그날 유관순이 노역장에 없었던사실을 알아낸다. 그리고 유관순을 주동자로 지목하고 고문하게 된다. 반면에 그러는 사이 8호실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특별사면으로 형을 모두 반으로 줄여주고 석방하게 되지만 유관순만 제외된다. 유관순은 그에 개의치 않고 자신은 애초에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형이 반으로 줄든 말든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만세 운동을 시킨 사람이 누구야고 물으니 너희 왜놈들이라고 대답하고 “후회는 당신들이 할기다.” 라면서 도리어 항거한다. 항거의 대가는 아주 혹독했다.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유관순 오빠와 향화언니가 면회 왔을 때도 유관순은 제대로 걷지도 못했지만 이미 몇 개월 밖에 남지 않은 형기를 채워서 나갈 생각도 없었다. 단식을 하는 유관순에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요?” 다른 노역자가 이해가 되지 않아 물을 정도이다. 유관순은 “그럼 누가 합니까” 대답한다. 결국 유관순은 8호 감방에서 숨을 거두면서 화면은 흑백에서 다시 컬러로 돌아온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서대문 형무소 8호실의 배우들이 직접 부른 “석별의 정” 노래가 흘러나오고 엔딩곡과 함께 실제 서대문 감옥 8호실 여성들의 사진들이 나온다. 열일곱 유관순의 모습, 수원에서 30여 명의 기생들을 데리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김향화, 개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권애라, 임산부의 몸으로 만세를 외쳤던 임명애 등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인물들의 사진이 나온다.

 

영화『항거: 유관순 이야기』은 끝이 났지만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관객들은 영화관람 내내 숨소리마저 멈추어 있는 듯 했으나 영화가 끝나고도 마찬가지였다. 한 동안 침묵만이 흐른다. 이 순간 유관순의 항거는 우리들의 항거가 되었다. 이 영화가 우리 모두에게 한이 서려있고 가슴 아픈 영화 때문일 것이다. 영화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고향에 내려온 유관순은 동네 사람들을 설득시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은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성공적으로 이뤄지지만 유관순은 주동자로 잡혀가게 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의 경찰의 지독한 고문으로 항거하였지만 처참하게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영화에서 보았듯이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을 때 잔인하게 고문한 일본 헌병이 있는데 바로 니시다 ‘조선인 정춘영’이다. 같은 조선인인데도 유관순 에게 상상 하지 못할 아주 잔인한 고문을 가했던 악랄한 인물이다. 유관순을 직접 체포해 서대문형무소로 끌고 간 사람도 정춘영이다. 을사오적 이완용처럼 일제의 앞잡이 되어 일본 헌병 보조원으로 일했던 사람이다.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에도 나오지만 가혹한 고문을 행한 '정춘영'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통곡할 일이다.

'정춘영'의 만행은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충청남도 조사 위원회에 의해서 만천하에 공개되며 체포된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 때 반민특위를 해체시키면서 처벌받아야 할 '정춘영'이 아무런 처벌도 없이 풀려나게 된다. 이후 호텔 사업을 하며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통탄할 일이다. 아무튼 '정춘영'은 유관순에게 가지각색의 고문을 행하며 유관순 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직접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고문으로 알려진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손톱 및 발톱 뽑기, 머리 가죽 벗기기, 달군 쇳덩이로 음부 지지기, 미꾸라지 고문 등이 있다. 지독한 고문 중에도 유관순은 아래와 같은 유명한 유언을 남긴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더욱이 항거 유관순 영화에서는 삭제되었지만 가장 충격적인 고문 중 하나인 미꾸라지 고문이라고 한다. 미꾸라지 고문이 무엇인가? 미꾸라지 수백 마리를 알몸인 사람이 있는 독이든 양동에 풀어놓는 고문이다. 원래 미꾸라지는 습하고 어두운 곳을 좋아해서 구멍이 있으면 비집고 들어가려는 습성이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상상에 맡기고 생략하겠다. 더욱 분노할 일은 미꾸라지 고문이 비도덕적이고 잔인한 행위인지를 알았는지 일본의 필사적인 은폐작업으로 인하여 현재 정식적인 고문 기록에서 빠져있다고 한다. 아무튼 유관순 열사는 고문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지고 방광 및 자궁이 파열되어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녀는 거리에서도 감옥에서도 끊임없이 대한독립을 염원하여 항거했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문들을 버텨냈다.

 

영화『항거: 유관순 이야기』에는 3명의 독립영화 배우들의 비중 있는 역할로 나온다. 기생 역으로 나오는 김새벽과 유관순의 이화학당 선배 역의 김예은 배우, 다방종업원으로 나오는 정하담 배우 등이다. 특히 수원에서 제일 유명했던 기생 김향화 역으로 출연해 유관순이 난처한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도와주며 끝까지 항일 투쟁 열의를 불태우는 역할로 나온다. 마지막까지 유관순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독립운동의 의지를 다지는 역할이 인상 깊다. 또한 영화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유관순은 독립에 대하여 서대문 형무소에서 온 몸으로 말하려고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3·1 운동에 참여하여 목숨을 잃거나 옥고를 치렀다. 또한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유관순 열사의 가족 및 집안사람들 가운데 독립운동가로 훈장이나 포상을 받은 사람은 유관순과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오빠 유우석, 작은아버지 유중무, 사촌 언니 유예도, 오촌 조카 유제경, 종조할아버지 유도기 등 총 8명이다.

 

 

유관순 영화는 『항거 : 유관순 이야기』(2019년)가 처음이 아니다. 1949년에 윤봉춘 감독의 영한 영화『유관순』을 시작으로 1959년 영화 『유관순』, 1966년도 영화 『유관순』 그리고 1974년도 영화『유관순』등이 상영 되었다. 특히 1949년 영화 『유관순』에서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여성들의 힘으로 독립운동을 조직해나가는 유관순의 모습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독립 하나만을 바랐던 유관순 열사를 포함한 많은 독립 열사들의 레지스탕스(resistance)가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고 우리가 있는 것이다.​ 영화『항거 : 유관순 이야기』에서 보여 주듯이 유관순은 독립을 위한 진정한 레지스탕스(resistance)였다.

 

첨언하자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될 때 찍은 사진은 유관순의 평소 모습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 사진은 일본군이 열사가 만세를 부를 때 저지하면서 가혹한 폭행을 했기 때문에 얼굴 전체가 부어올랐다 실재로 옆모습을 자세히 보면 눈과 볼 부분이 심하게 부어 오른 걸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얼굴과 가깝다는 의견도 있다. 고문을 겪어 조금 부었다고 할지라도 흔히 보는 구타, 가혹행위 피해자의 사진들과 비교하면 좌우 대칭도 잘 맞고 멍든 흔적도 없다는 생각도 존재한다. 아무튼 우리는 열사나 영웅이 보통 사람보다 잘 생겨야 한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외모 지상주의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꽃다운 나이에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유관순 열사의 유해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1920년 당시 유 열사는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묘비도 없이 묻혔다. 이어 일제는 군용기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이태원 공동묘지를 중랑구 망우리공원으로 이전했다. 당시 유관순 열사의 무덤을 포함해 이름 없는 2만8000여개 분묘를 한꺼번에 이장하는 과정에서 유해가 유실됐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2019/3/1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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