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성찰] 과잉 욕망의 메카리즘 : 왜 강남 아파트를 더 선호할까?
요즘은 아파트가 대세다. 주택 단지가 아파트로 급속하게 뒤덮이고 있다. 주택난 해소라는 명목 아래 새로 개발되는 주택단지의 70%이상이 아파트 등 공동주택으로 건설되고 있다. 기존 도심권은 물론 농촌이나 산촌, 어촌 취락지조차 단독주택이 헐리고 아파트를 짓는다. 아파트 중에서 강남아파트가 최고 인기다. 강남아파트는 우리들의 로망이고 꿈이 되어버렸다. 몇 달 사이에 몇십억이 올랐다는 뉴스를 자주 접한다. 정부는 이런 강남 아파트 값을 잡겠다며 3년째 대책을 내놓고 있다. 유동성 공급을 극대화하는 경기 침체 상황에서도 부동산 가격만큼은 잡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심지어 노무현 정부 때 ‘버블 세븐’으로 대표되던 규제지역도 이제 수도권 전체로 확대하는 초강수 대책을 발표했다.
1970년도 중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마오쩌둥이 지방을 시찰하던 중 참새들이 농민들이 정성들인 벼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대대적인 참새 소탕 작전을 지시하자 참새는 줄었는데 이듬해에는 병충해가 창궐하여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경제학에서 이것을 ‘풍선효과’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면 그 문제는 해결되지만 거기에서 또 다른 문제가 등장한다는 의미이다. 팽팽한 풍선의 어느 한쪽을 누르면 반대편이 불거져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그랬다. 특정 지역만 규제를 하다 보니 그 지역 밖에서 풍선효과가 반복해 벌어졌다.
최근 경실련은 3년 동안 서울 아파트값이 52% 올라다고 말하고 국토교통부는 14.2% 올랐다고 반박했다. 누구 말이 옳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몇 달 만에 몇억이 올랐다는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린다. 여러 부동산 대책에도 불구하고 많이 올랐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정부는 서울 집값이 오른 이유를 공급 부족으로 진단했다. 그래서 “주택 공급 확대를 위해 그린벨트 해제까지도 검토할 수 있다.” 발표할 정도이다. 모두가 ‘공급’을 말했다. 수요공급 법칙을 적용하면 공급이 답이다. 그린벨트 해제 검토 즉시 그린벨트에 맞붙은 아파트 호가가 2억원 정도 올랐다. 그래도 여전히 모두가 ‘공급’을 말했다. 지금 공급을 늘리겠다는 말은 강남 대체재로 ‘값비싼 아파트’를 공급하라는 뜻으로 보인다. 서울시가 ‘민간’ 재건축·재개발 활성화”라는 제안이 덧붙는 이후 서울 재건축 단지 바로 미터 삼는 대치동 은마아파트 전용 74㎡ 호가는 18억원대 후반에서 21억원 까지 올랐다. 정부가 22여 차례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고도 말이다. 정부가 ‘아파트’라는 단어만 꺼내면 오른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러면 사람들은 왜 강남 아파트를 더 원하는가? 요즘 유행하는 말 중 ‘영끌 해서’(영혼까지 끌어다가) 강남 아파트를 사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단체 채팅방에 떠돈다고 한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실에 따르면 30대의 2년간 주택담보대출액은 102조 7000억원으로 전체의 35.7%에 달한다. ‘똘똘한 한 채’가 더 낫다고 하는 말이 유행이다. 이제 지방 고액자산가들까지 강남 아파트에 끼어들고 있다. 이제는 아파트가 주거공간보다는 재테크의 특급 대상이자 부의 척도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부동산 가격 폭등과 만연된 투기 바람은 ‘아파트는 돈’이라는 등식을 만들어냈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구분 짓는 잣대가 되었다. 결국 아파트를 사려고 하는 사람들만 패닉 바잉(panic buying)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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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부동산 현상을 단지 수요공급법칙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가?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오래전에 수요공급 법칙의 균형은 무너졌다. 따라서 부동산 정책은 수요와 공급 법칙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신호이다. 가격이 오르면 오히려 상승 기대심리로 수요가 더 증가하고 공급 소문은 오히려 수요 욕망을 북돋운다. 게다가 투기 열풍이 불 때 공급을 확대하면 반대로 투기에 불 지르는 꼴이 된다. 이 말은 공급 자체가 수요 욕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부동산 정책은 경제학 개념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특수성이 존재한다는 반증이다. 이것을 경제용어로 투기성 가수요(假需要)라고 한다. 투기성 가수요는 실수요와 다르다. 실제로 수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가상수요이기 때문에 물가가 오르거나 물자가 부족할 것 같을 때 발생한다. 즉 앞으로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에서 나오는 일시적인 수요이다. 또한 투기성 가수요는 심리학적 현상과 인간의 욕망이 연결되어 있다. 이 때문에 심리적 불안에 의한 방어 기제까지 작동한다.
본디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개체의 생존과 종족 번식을 위해 원초적인 욕망이 존재한다. 이런 욕망은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명의 과정일 뿐이다. 즉 욕망의 메커니즘은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생명력을 잃을 때 비로소 욕망은 사라진다. 우리가 모든 욕망을 무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욕망은 존재하는 필수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결핍으로 재생된다. 철학자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도 욕망 자체는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지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욕망을 민낯으로 바라보라고 말한다. 니체가 말하는 욕망은 분명 욕심(과잉 욕망)과는 다르다. 니체 역시 자기 생존을 위한 개인적인 욕망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욕망을 충족하지 못하는 삶도 문제이지만 욕망의 과잉이 문제다. 과잉 욕망은 욕망을 왜곡하고 맹목적으로 향하고 삶의 필요성(need)을 넘어선다.
현상학자 장 뤽 마리옹(Jean-Luc Marion)은 과도한 현상의 주어짐을 ‘과잉된 현상’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낸다. 그리고 과잉된 현상은 우리의 인식 능력마저도 무능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인식의 규범에 포섭되지 않을뿐더러 일상을 압도하는 계시의 방식으로 다가온다고 설파한다. 예측불허 방식으로 마치 강남 아파트 집값처럼 말이다. 이때 과잉 욕망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강남아파트의 집값은 우리 예상을 뛰어넘는 현상을 보여주는 이유이다. 서민들 처지에서 볼 때 상상을 초월하고 일상을 압도하는 방식으로 다가오고 상식과 개념도 벗어나는 현상이 눈 앞에 펼쳐진다. 여기에는 경제학 기본 개념인 수요공급 법칙이 작동할 수 있겠는가? 이런 과잉 욕망으로 형성된 시장을 억제하면 그 정책은 실패한 정책(?)이 될 수 있다.
12세기 말에 북부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 영국, 중남부 독일에 세어진 고딕 성당들이 있다. 이 성당을 세운 이유가 가관이다. 중세시대에는 돈을 더러운 것으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부와 세를 과시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가 바로 돈이다. 돈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고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국가가 발전하는데 필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돈을 잘못 사용하면 욕망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과잉 욕망의 늪에 빠지게도 한다. 게다가 사회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욕망이 나쁜 것도 돈이 나쁜 것도 아니다. 욕망이 없는 삶은 열정이 없는 삶이요 생명이 없는 삶과 같다. 하지만 과잉 욕망이 문제이다. 우리가 강남 아파트를 더 선호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우스 푸어도 마찬가지이다.
과잉 욕망과 왜곡된 욕망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불행하게 만든다. 부동산에서 과잉 욕망의 결과는 불로소득이다. 부동산 불로소득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것은 수요공급 법칙만 의지하겠다는 것이다. 규제(욕망의 억제)한다고 할지라도 투기(과잉 욕망)는 틈새를 통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즉 불로소득 환수 장치가 없으면 안 된다. 한 보고에 의하면 지난 6년간 3600조 이상의 자본이득이 부동산에서 발생한 거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연평균 600조에 달하는 금액이다. 600조의 금액이 가진 자들에게 배분된다는 서글픈 현실이다. 아무튼 불로소득은 정당한 노동의 결과가 아니므로 문제가 된다.
그래도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욕망의 메커니즘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다. 욕망 과잉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줄도 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욕망의 절제를 아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특히 절제를 통해 쾌락의 욕망을 다스릴 필요가 있다.’라고 말한다. 과잉 욕망은 때로 우리 지각 경험을 과장하고 왜곡시키며 철저하게 자기 합리화로 이데올로기화되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 보호와 자기방어 기재이다. 정신분석학자 라캉(Lacan, Jacques)은 말한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그렇다. 타인의 가지고 있는 명품을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욕망은 결국 자신의 욕망이다. 즉 비 주체화가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도 강남 아파트 선호하는 이유도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보이기 위한 보이지 않는 욕망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욕망 절제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건가? 욕망의 무한확장은 자기성찰 기회마저도 없애버린다. 맹자(孟子)는 일찍이 “사람이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운 마음이 없다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워할 일이 없다”(人不可以無恥 無恥之恥無恥矣) 라는 통찰을 주었다. 순자(荀子)도 부자가 되기를 욕망하는가? 그렇다면 부끄러움일랑 잊으라”라고 충고하고 있다. 언제까지 ‘성냥갑 같은 둥지’ ‘현대판 물물교환’ ‘자기만의 섬’에 목숨을 바칠 것인가? 욕망 과잉의 노예에서 머무를 건가? 우리가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ÜUbermensch)는 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공동체 윤리는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020/08/06 / 혜윰인문학연구소 /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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