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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산책 3: 왜 힌두교는 암소숭배에 몰두하게 되었는가?

by 뜨르k 2024.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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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산책 3: 왜 힌두교는 암소숭배에 몰두하게 되었는가?

 

 

인도 거리에서는 주인 없는 소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어슬렁거리는 늙은 소 앞에 자동차도 멈추고 사람도 비켜서서 길을 양보한다. 이런 소들이 5,000만 마리의 물소를 제외하고도 인도 재래종 소만 하더라도 2억 마리에 가깝다고 한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소를 잡아먹으려 하지 않는단 말인가? 인도 인문학 여행 중에 가장 궁금한 내용 중 하나이다. 인도연방 헌법에도 소 도살 금지 조항이 있다. 대부분 주에서도 ‘소 보호법’을 제정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1996년에 인도에 들어간 맥도널드도 햄버거에 쇠고기 대신에 대부분 양고기나 닭고기, 물소고기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인도에서 소 숭배 사상은 인도 힌두교의 중심사상이다. 왜냐하면 힌두교도들에게 흰 암소는 여신과 같이 신성한 힘을 가진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암소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힌두교도들은 흰 암소를 돌보거나 앞에 서 있기만 해도 행운을 얻고 악을 물리치고 악으로부터 보호받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힌두교 사원에 가면 암소 상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암소숭배 사상이 힌두교에서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암소와 관련된 힌두교 소고기 금지 및 암소 숭배역사를 더듬어 보면 대략 그 윤곽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힌두교의 역사에서도 원래 소 숭배가 힌두교 중심 원리는 아니었다. B.C. 2,000년경, 인도의 정복자 아리아인은 본래가 유목민이었다. 인도에 정착한 뒤 그들은 여전히 육식을 즐겼다. 오히려 베다 시대의 브라만 계급은 소의 숭배가 아니라 아이러니하게 소를 도살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힌두교 경전인『베다』에서 나타난 기원전 약 1800년경에서 800년경 시기에 북부 인도의 생활상을 보면 암소를 숭배하지도 쇠고기를 멀리하지도 않았다. “유목민이 축제에서 암소를 도살하고 먹었다”라는 기록이 나오고 ‘사람들이 나에게 열다섯 하고도 스무 마리의 황소를 잡아 요리해 바쳤다’라고 나온다. 베다 해석서 「따잇 띠리야 브라흐마나」에서는 “아띠티니르(atithinir)”라는 용어는 ‘손님용 암소’라고 해석하고 “바로 음식이다(autho annam vai gauh)”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또한, 결혼과 같은 행사가 열릴 때도 암소를 잡았다는 구절이 언급되어 정도로 당시 유목민이었던 아리아인들에게는 소가 매우 귀중한 식량자원이었다. 소는 고기뿐만 아니라 똥과 오줌까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사랑과 희생을 주는 어머니와 같은 동물이었다. 그러나 그때 당시의 종교는 제례 종교로 제사 지낼 때 희생 제물 중에서도 가장 으뜸도 소였다. 이처럼 최초의 힌두교 경전인 ‘리그베다’는 소고기를 금지하거나 암소숭배도 없었다. 그리고 종교행사를 치른 뒤 제물이 된 소나 가축의 고기를 포식했다고 한다. 게다가 희생제와 축제를 했고 희생제 마치면 고기를 나눠 먹는 풍습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힌두교 초기에는 소에 숭배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례는 형식화되고 성대하였다. 그리고 많은 수의 소가 필요하였고 소의 마릿수가 경제력과 권력의 척도가 될 정도였다. 즉 소가 바로 권력인 셈이다. 더욱이 브라만 계급의 제사장들은 이것을 자신의 권위로 삼았고 제사를 마친 후에는 고기를 나누어 줌으로써 원주민의 충성과 호감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기원전 7세기 이후 아리안족은 소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자 통치 위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인도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유목보다는 농경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는 확대되고 밀·수수·콩과 같은 곡물을 식량자원으로 선호하자 소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가격은 상승했다. 반대로 소를 위한 경작지는 줄어들고 소고기의 소비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소가 필요 없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왜냐하면, 인도 북부의 척박한 땅을 경작하기 위해서는 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수소는 귀중한 노동력이고 암소는 우유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식량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그 발단은 브라만 계급 등 지도자들의 타락에 있었다. 홍수나 가뭄 등으로 가난한 백성들이 굶주림에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많은 소를 도살하여 먹었다. 백성들은 안중에 없이 말이다. 이런 과정에서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고 그런데도 지도자들은 백성의 분노를 읽지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많은 백성이 모든 육식을 금지했던 새로이 출현한 종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바로 불교이다. 브라만의 권위에 반기를 들고 불살생이라는 교리를 내세워 소를 보호하자는 주장한 불교는 그 당시 백성들의 성향에 맞는 종교였다. 불교는 힌두교와 아주 달랐다. 금욕을 말하고 제례조차도 살생을 금지했다. 더욱이 그들은 농업의 주요 수단인 소를 도살할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점점 더 많은 백성은 불살생 운동에 동참했고 소고기를 즐기는 지도자들에게는 분노하고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민심은 이반 되고 제사장 중심인 힌두교는 그 위상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렇듯 힌두교의 카스트제도에 의한 사회질서가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자 브라만 제사장들은 그들의 종교 생활에서 불살생을 하나의 실천계율로 채택하게 된다. 이후 불교는 인도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9세기 동안 브라만과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결국은 힌두교가 승리했지만, 힌두교는 많은 불교 교리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또 많은 사람이 소를 향한 애착이 있음을 안 당시 사제계급 브라만은 힌두교의 부흥을 위해 소의 신성함을 더욱 강조했다. 이때부터 힌두 경전에 암소는 성스러운 신들이 사는 영물로 등장한다. 소를 죽이는 것은 브라만을 죽이는 것과 비유되었다. 이제 힌두교는 소에 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다. 도살을 금지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옹호하면서 또한 변명까지 한다. 힌두교도들은 신들이 실제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리그베다 경전에 묘사된 것처럼, 어떤 상징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로 브라만 계급은 힌두교 제식에서는 고기 대신 우유를 섭취하게 된다. 더 나아가 소 숭배 의식까지 부추겼다. 2024/03/14 뜨르/혜윰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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