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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인문학 산책 4: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가 무엇인가?

by 뜨르 K 2024.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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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인문학 산책 4: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가 무엇인가?

 

 

왜 불교는 인도에서 사라졌는가? 아주 자극적인 질문이지만 대답은 예외로 간단하다. 삶과 분리된 종교나 교리는 결국 대중들에게 외면을 받는다는 사실을 불교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민중들에게 외면받는 종교는 결국 사라진다는 것이다. 종교 발상지일지라도 말이다. 불교가 그렇다. 그 이유를 천천히 더듬어 보자.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인 불교가 발상지에서 사라진 이유가 무엇인가는 종교인은 물론 일반인에게 궁금증으로 다가온다. 불교는 6세기, 인도의 작은 왕국의 왕자였던 싯다르타의 출가와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당시 인도는 힌두교의 모태인 브라만교(Brahmanism)가 주류였다. 당시 인도의 종교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브라만교는 특권 계층화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카스트 제일 밑바닥에 있는 민중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불교의 탄생과 교리는 민중들에게 하나의 혁명이었다. 카스트제도를 부정하고 인간의 평등사상을 설파하는 불교는 백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초기 불교는 카스트제도의 억압과 가중한 세금으로 고생하던 민중들에게 구원과 평등은 하나에 희소식이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왕족들과 귀족, 상인들이 후원에 나섰다. 권력과 결탁한 불교 교단은 초심을 잃고 민중보다 권력 집단을 옹호하는 편에 서게 되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통치를 위하여 불교의 성장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종교가 권력과 결탁한 것이다. 왕족들과 귀족들이 후원하면서 불교는 이미 집권 세력의 종교이지 이미 민중의 종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Asoka)왕 때 불교는 인도 전역은 물론 인근의 나라에까지 전파되면서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때가 불교의 최전성기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불행의 씨앗이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우선 불교 교단이 너무 재산이 많은 것이 문제였다. 왕족이나 귀족 그리고 상인들의 막대한 후원으로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 승려들은 더는 탁발 시주를 하러 다니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태해진 승려들은 먹을 것이 넘치는 사원에서 나오지 않으려 했다. 불교를 민중에게 전파할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대신 승려들은 사원에 틀어박혀 온갖 경전 이론만 만들어냈다. 더구나 빨리어 등 일반 민중들의 언어를 사용하여야 한다는 석가모니 가르침과 달리 극히 일부 지식인들이나 아는 산스크리트(saṃskṛtā)어로 경전을 만들고 의식을 행했다. 물론 민중들은 그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민중들이 이해하기에 너무 철학적이고 학문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중세 시대 라틴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모습과 흡사했다. 존재에는 반드시 그것이 일어난 인연이 있다는 연기(緣起)나 불교의 핵심 교리인 사성제(四聖諦),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법인 팔정도(八正道) 등 불교의 가르침은 하나같이 지식인들이나 이해할 수 없는 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참선이나 고행 같은 불교 수행법 역시 결코 민중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관혼상제 같은 가정의식이나 종교의례를 전혀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인의 일상에 뿌리내릴 수 없었다. 인도인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신상, 그 신에게 복을 비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고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불교 무소유 역시 당장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싸우는 민중들에게 사치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불교에 등을 돌리고 이해하기 쉬운 힌두교로 넘어갔다. 이때 한편 한때 불교에 밀려났던 브라만교는 대혁신에 나섰다.

 

불교가 지배집단의 후원으로 나태할 때 불교에서 밀려난 브라만교는 힌두교란 이름으로 부활한다. 브라만교의 재기는 불교의 여러 교리를 수용하여 새로이 변신한다. 그 예는 7~8세기경부터 불교의 교리와 의식을 받아들여 우리가 익히 아는 힌두교로 탈바꿈한 것이다. 힌두교는 불교의 명상 수행법과 열반 개념을 가져갔고, 불교는 불살생 계율을 받아들였다. 원래 브라만교는 다량의 소를 죽여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의식으로 악명 높았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것은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힌두화하면서 이게 더욱 확대되어 오늘의 인도에서 소 숭배까지 가게 된 것이다. 절대 소를 죽이지 않는 신앙이 출현한 것이다. 힌두교는 한발 더 나아가 부처를 아예 힌두교의 신으로 편입해 버렸다. 석가모니를 힌두교의 최고의 신 중 하나인 비슈누의 환생이라는 것이다. 위기에 빠진 불교는 이 대목에서 대 악수를 두었다. 인도에서 불교의 쇠퇴를 언급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소위 “불교의 힌두화”이다. 문제는 불교가 힌두교의 움직임에 제대로 방어조차 하지 못했다. 이런 모습은 불교가 힌두교와의 유사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힌두교와 유사한 탄트라 불교까지 등장하자 구분이 거의 어려웠을 것이다. 대중들의 관심이 불교보다 힌두교에 집중되자 인도의 왕국들도 점차 불교에 대한 지원을 줄이기 시작했다. 아마 카스트제도와 윤회를 믿는 힌두교가 불교보다 자신들의 통치가 유리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왕족과 귀족의 후원에 의존하던 불교 사원 경제는 급속히 악화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불교는 대중들에게 호감을 끌기 위해 힌두교를 대폭 수용한다. 불교는 힌두교 신들을 여러 보살로 신격화하고 소원을 빌도록 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상에 힌두신처럼 팔이 여러 개 있는 것이 그 흔적이다. 석가모니 생전에 강력하게 비판했던 주술과 복을 비는 기복신앙이 불교에 도입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9-10세기경부터 불교는 힌두교와 구분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불교의 정체성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결과는 불교의 기대와 달리 오히려 불교 인구는 급속도로 감소하였다. 어차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불교도들조차 사원 대신 가정에서 가까운 힌두 사원을 찾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인도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아류 정도로 대접을 받는 이유이다. 이렇듯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불교에 결정타를 날린 종교는 이슬람이다. 7세기 아라비아 사막에서 시작된 이슬람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화 된 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인도를 넘보기 시작했다. 우선 이슬람의 출현으로 유럽으로 향하던 인도 무역로가 모두 막히게 된다. 이는 당연히 인도의 왕족과 상인들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들은 막대한 재정적 후원을 불교에 쏟아부었다. 지배층의 후원에만 의존하던 불교의 재정은 바닥나고 회생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후 이슬람은 끊임없이 인도를 침입해 크고 작은 왕국을 만들었다. 특히 10세기 말 아프간을 지배하던 튀르크 혈통의 가즈니 왕조와 구르 왕조는 986년부터 시작된 일련의 약탈 원정에서 인도에 막대한 피해를 줬다. 불교의 총본산이었던 사원은 물론 수없이 많은 불교 사원이 파괴되고 승려들이 살해되고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재산도 약탈당했다. 이미 쇠락해 가던 인도 내의 불교는 이로써 치명타를 받았다. 살아있는 승려들은 경전을 수레에 실어 대거 네팔과 티베트 등지로 탈출해 갔다.

 

인도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카스트제도를 부정하는 인간 평등사상 덕에 빨리 거대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다. 불교의 존재 이유가 바로 평등이라는 일종에 이데올로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슬람이 불교와 힌두교 사이에 문득 끼어들었다. 문제는 불교와 이슬람은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이다. 상업 세력이 기반, 반카스트제도, 인간 평등 등이 그렇다. 그런데도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불교는 반카스트제도, 평등주의 등을 구현할 권력이 없는 반면에 이슬람은 시행할 권력이 있었다. 어찌 보면 인도에서 이슬람은 힌두교에 대항할 불교의 완벽한 대체재였다고 볼 수 있다. 불교가 가장 많았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가 모두 이 과정에서 이슬람 땅이 되었다. 물론 이슬람의 무력과 힌두교로 개종할 때 불가촉천민이 된다는 아픈 이유도 있었다. 인도에서 불교는 13세기 초에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그 요인은 불교의 귀족화와 불교의 힌두화 등이 있다. 하지만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불교가 담당했던 역할을 이슬람이 수행했기 때문에 존재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나 종교의 발상지라 할지라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도태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2024/3/21 뜨르/ 혜윰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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