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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산책 6: 왜 이슬람은 인도를 점령했는가?

by 뜨르k 2024.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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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산책 6: 왜 이슬람은 인도를 점령했는가?

 

이슬람은 왜 인도를 침입했을까? 아마 모든 종교가 그러듯이 이슬람도 일차적으로 종교적인 목적이 제일 클 것이다. 처음 이슬람은 8세기 초에 현재의 파키스탄 남서부 지방인 발루치스탄(Balochistan)까지 진출했다. 10세기에는 지금 인도 북서부지방이고 파키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펀잡(Punjab) 지방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11세기까지 이슬람의 침입 목적은 힌두교 성전을 파괴하고 이슬람교 전파가 주목적이었다. 즉, 이슬람교 선교를 위한 것이었다. 그 당시 인도는 쿠샨 왕조의 멸망 뒤 고전(古典) 인도 문화의 최성기인 굽타왕조가 들어섰지만 5세기 중엽부터 유목민족 훈족의 침략으로 쇠퇴하다가 6세기 중엽에 결국 멸망된다. 이처럼 북인도는 다시 많은 왕국이 세워졌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7세기경에는 하르샤 왕조가 잠시 북인도를 통일했지만, 금방 사라진다. 그 뒤 인도 북부에는 라지푸트족이 세운 크고 작은 나라들이 갠지스강 유역을 차지하려고 각축전을 벌인다. 그래서 이 시기를 ‘라지푸트 시대’라고 하고 어떤 학자들은 ‘이슬람 침입 이전의 힌두 왕국’ 시대라고 일컫는다. 그 뒤 인도는 약 300년 동안 새로운 국가가 출현하지 못하는 정치적으로 대혼란 상태에 빠져든다. 8세기에서 13세기까지이다. 이때 인도는 한 나라가 무너지면 또 새로운 왕국이 생겨나고 다시 나라가 둘로 갈라지고 하는 무법천지 시대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이슬람의 인도 점령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인도 군인은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막강한 군사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오합지졸에 추풍낙엽이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이슬람은 꾸준히 성장하여 남의 나라를 침범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인 가즈나왕조 제7대 왕(998~1030) 마흐무드는 이슬람권의 역사에서 위대한 통치자로 꼽히는 왕으로 술탄 칭호를 받은 최초의 왕이다. 인도의 이슬람화를 시작한 최초의 왕으로 보면 된다. 그는 27년 동안 인도를 무려 17번이나 침입했다. 이슬람에서는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지하드’(성전, 聖戰)이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슬람교를 전파하거나 신앙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흐무드의 인도 점령은 다른 데 목적이 있었다.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도 점령의 일차적인 목적은 종교적이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바로 넓은 땅에 매장된 천연자원과 힌두교 사원의 수많은 금화보화(金銀寶貨)이었던 것이다. 즉,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 맘이 있다’는’ 한국 속담처럼 말이다.

 

마흐무드는 1001년에 1만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펀잡 지방의 카불 샤히 왕조(Kabul Shahi Dynasty)를 공격했다. 자이팔왕은 300마리의 코끼리와 3만 명이나 되는 병사로 용감하게 싸웠지만 크게 패하고, 결국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첫 전투에서 승리한 마흐무드는 엄청난 재물을 약탈해 갔다. 인도 국경 지대의 점령과 약탈을 성취한 마흐무드는 점점 인도 내륙으로 진출했다. 1018년에는 야무나강을 건너 델리 근처까지 이르러 5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힌두교도를 죽였다. 그리고 간다라와 불교의 불상이 탄생한 곳인 힌두의 성지 마투라로 진격했다. 크리슈나 신이 탄생한 마투라는 천여 개의 힌두 사원이 있을 정도이다. 더욱이 불교 승려도 2천 명이 될 정도로 마투라는 종교의 중심지였다. 마흐무드의 군인들은 사원의 신상에서 금은보석을 벗겨내서 몽땅 가져갔다. 그리고 사원을 부수고 불태워버렸다. 이처럼 마흐무드 군대는 인도의 여러 도시를 공격해 금은보화 등 재물이 있는 힌두 사원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약탈했다. 1026년, 16번째 침입으로 마흐무드는 간디의 고향으로 알려진 인도의 서부 구자라트를 쳐들어갔다. 구자라트는 아랍과 페르시아와의 무역으로 인한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던 지역으로 대부분 재산은 힌두 사원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힌두 사원에는 보물과 보석 등 금은보화가 많다. 특히 시바 신을 모신 사원에는 금 신상이 천여 개가 넘을 정도라고 한다. 사원에는 천 명 이상이나 되는 브라만이 거주하면서 매일 신에게 제례 한다. 3천 명의 이발사들이 순례자의 이발을 담당할 정도로 사원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슬람 마흐무드는 이런 사원이 탐이 났다. 사원의 파괴를 저지하는 5만 명을 죽이고 신상을 부수었다. 어떤 기록에는 약탈한 금(金)만 8톤이나 된다고 한다. 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잔인한 모습인가?

마흐무드의 17번째 인도 침입은 1027년에 있었다. 그 뒤 1191년에는 구르 왕조의 술탄 모하메드가 신드를 정복하고 이제 아예 정착하여 나라를 건설하게 된다. 라지푸트 왕국들은 서로 간의 전쟁을 멈추고 연합군을 조직하여 싸웠으나 모하메드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결국, 12세기 말 터키계 고르왕조의 모하메드(Mohammed Ghori)에 의해 인도는 이슬람 손에 들어가게 된다. 델리를 점령하고, 그 지역 총독으로 쿠투브 우딘 아이박를 임명한다. 아이박은 독실한 무슬림으로 델리뿐 아니라 바라나시와 벵골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해 간다.. 그리고 인도 북부에 있는 많은 힌두 사원을 모스크로 개조하는데 열정을 쏟는다. 또한, 힌두교 사원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나온 건축 자재를 쿠투브 미나르 복합단지 등을 건설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리고 모하메드가 가즈니로 돌아가던 중 살해된다. 모하메드가 죽은 1206년, 그의 후계자이고 노예이기도 한 ‘쿠투브 우딘 아이박(Qutab uddin aibak)는 인도 최초의 이슬람 지배자가 되고 이슬람 왕조가 시작된다. 아이박은 독립해서 ‘술탄’을 선언했다. 이슬람의 나라를 세운 것이다. 술탄이란 이슬람교의 최고 종교 지도자인 칼리프가 인정하는 정치 지도자이다. 즉 한 나라의 왕이다. 아이박은 현재 델리 상징이라고 불리는 쿠투브 미나르(Qutab Minar)를 건축한 왕이다.

노예 출신으로 최고의 자리 왕에 오르고 그의 후계자들도 노예 출신이다. 그 뒤에도 40명의 노예 출신들이 나라를 다스렸기에 그래서 이 왕조를 노예 왕조(Save dynasty)라고 부른다. 노예 왕조를 시작으로 킬지(Khilji) 왕조, 투글라크(Tughluq)왕조투글라크(Tughluq) 왕조, 사이드(Sayyid)왕조사이드(Sayyid) 왕조, 로디(Lodi)로디(Lodi) 왕조 등 5개 왕조의 무슬림 국가가 델리를 중심으로 16세기 초까지 북인도를 지배했다. 이슬람 통치가 시작된 노예 왕조부터 16세기 무굴제국(Mughal)이 건국되기까지 약 300년 동안 5개의 이슬람 왕조를 ‘델리 술탄(Sultan) 시대’라고 부른다. 여기서 술탄은 아랍어로 ‘통치자’를 의미한다. 그중 마지막 왕조는 로디왕조이다. 그 전은 대부분 터키계 왕조이었지만 로디왕조는 아프간 계통 왕조로 첫 번째 왕조이다. 결국, 마지막 왕조인 로디왕조가 무굴제국의 창시자인 바부르(Babur)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그 막을 내리고 무굴제국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제 본격적인 이슬람의 인도 점령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아무튼 왜 이슬람은 인도를 점령했는가? 라는 물음은 물론 선교를 위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도 사원을 공격하고 금은보화를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는 면을 볼 때 선교 본래의 목적은 상실한 듯하다.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을 위하여 당신의 도시를 점령하라’(수 1:3)라는’(수1:3) 말이 과연 그런 의미일까? 아니다. 물리적 점령이 아니라 영적인 측면일 것이다. 그런데 중세와 근세에서도 식민지 점령의 정책을 이용하여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점령과 약탈 그리고 통치가 먼저이고 선교는 나중 일로 보인다면 그때 당시 그들의 인도 점령은 선교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2024/4/13 뜨르/ 혜윰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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