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인문학 산책 7: 왜 이슬람 악바르 대제는 힌두교에 포용 정책을 채택했는가?
이슬람교는 인도 북서부에서 꾸준하게 인도 대륙으로 세력을 넓혀서 여러 이슬람 왕조의 흥망성쇠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1526년 무굴제국이 세워진다. 한국에 찬란한 조선 왕조가 있다면 인도에서는 무굴제국이 있었다. 인도 역사에 찬란한 문화 전성기였다. 무굴제국은 바부르를 시작으로 18세기 초 무굴제국의 6대 왕인 아브랑제브 왕까지 200년 가까이 남인도 일부를 제외한 인도 전역뿐만 아니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일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대제국이었다. 무굴제국은 건국자 바부르와 2대 황제 후마윤에 이어 그 무굴제국의 3대 황제가 악바르 대제이다. 1556년부터 1605년까지 무려 49년을 통치하면서 영토를 세배로 확장하였다. 서쪽 끝 영토인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이르기까지 도로망과 조세 제도를 정비하고 통일된 화폐도 발행하는 등 무굴제국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만들었다. 아마 우리나라에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이 있다면 인도에서는 무굴제국 악바르 대왕이 있다. 그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인도 역사상 가장 번성하고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을뿐더러 330년 지속된 무굴제국의 기반을 닦았다. 이처럼 악바르 대제가 무굴제국을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던 것은 종교 관용 정책 때문이다. 그는 종교적으로는 힌두교도나 시크교도 등 타 종교에 포용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사회적 통합에 온 힘을 기울였다. 피지배자인 힌두교도를 포용하는 정책이었다. 아랫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나하고 신앙이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여 나와 똑같게 만들려고 하였으며, 그것을 신에 대한 귀의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식을 쌓아 감에 따라 나는 후회하는 마음에 사로잡혔다. 강제로 개종을 시킨 사람에게서 어떻게 성실한 신앙생활을 기대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은 자신의 처지에 따라 각각 자기가 최고로 여기는 존재에 대해 각기 다른 이름을 붙여 놓는다. -악바르나마-
또한, 악바르 대제 때 종교 간 대화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는 직접 기독교 선교사들과 교리에 대해 열성적으로 토론할 정도이고 왕궁의 이슬람 학자들의 입장을 중재하는 역할도 했다. 힌두교, 불교, 기독교, 자이나교, 시크교, 이슬람 종파들, 조로아스터교 등 다양한 종교에 관심을 기울인 특이한 인물의 소유자로 자신의 종교만이 유일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양한 종교와 사상을 받아들였다. 심지어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통합을 꾀하였다. 그 예로 악바르 대제는 라지푸트 지역을 점령한 후 라지푸트의 족장들에게 여러 관직을 개방하고 라지푸트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도 하였다. 또한 타지마할로 유명한 인도 아그라에는 파테푸르 시크리(Fatehpur Sikri)라는 지역이 있다. 이 파테푸르 시크리의 궁에 힌두 출신 왕비 조다 바이의 궁이 있다. 여기에 힌두 왕비의 궁을 다른 이슬람교도 왕비들보다도 더 크게 건축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악바르 대제의 포용 정책을 엿볼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제상(총리)에는 힌두 브라만 출신 비르발을 등용했고 재무장관에는 펀잡 출신 토다르 말을 등용했다. 포용 정책의 효과를 보듯 비르발은 실제로 악바르 대제의 고민을 해결하는 인도의 명제상이었다. 악바르 대제에 얽힌 하나의 일화가 있다. 악바르 대제는 길에서 비르발을 만나 재상으로 전격 발탁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의 비범한 통찰력과 놀라운 지혜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떤 문제를 만나도 무릎을 치게 만드는 해결책을 찾아내는 비르발의 총명함에 완전히 매료당한 악바르 대제는 마침내 해결책을 찾아내는 문제와 상황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비르발의 놀라운 해결책들을 즐기려는 듯 말이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매일매일 벌어지게 되는, 때로는 두뇌 싸움, 때로는 선문답과 같은 일화들을 모은 책이 있다. 이 책이 바로『비르발의 지혜문답』이다. 악바르 대제와 신하(총리) 비르발이 지혜를 겨루는 이야기로 54편으로 엮어 국내에도 펀저 번역 출판되었다. 16세기 초의 비르발이 악바르 대제를 상대로 풀어내는 엉뚱한 이야기, 재치와 유머 등이 들어 있고 인도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통해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지혜가 담겨있다. 또한, 악바르 대제가 만들어 내는 딜레마와 엉뚱한 과제들, 이에 대해 남다른 지혜와 통찰, 재치와 유머로 맞서는 비르발의 통찰이 담겨 있다.
어느 날 저녁, 악바르 황제가 막 어전회의를 파하고 퇴청하려는 때에 전갈이 왔습니다. 남쪽 지방에서 한 판디트(경전 연구하는 학자)가 와서 황제와 비르발을 만나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폐하의 지혜와 비르발의 재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비르발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어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하지만 학식 높은 판디트를 실망시킬 수는 없지. 들여보내라.”
그리고 악바르는 비르발에게 당부했습니다. “오늘은 힘든 하루였어. 비르발, 이 판디트를 빨리 돌려보낼 수 있도록 해보게.”
비르발은 황제께 자신 있게 대답하고 판디트를 맞았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판디트지(판디트를 높여서 부른 말). 무슨 질문이신가요?” “오, 지혜로운 비르발, 백 가지의 쉬운 질문을 할까요, 아니면 어려운 질문을 하나만 할까요?” “어려운 질문을 하나만 해주십시오. 판디트지.”
비르발은 황제가 백 가지 문답이 끝나도록 앉아서 기다릴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닭이 먼저인가요, 알이 먼저인가요?” “그야 물론 닭이 먼저지요.”
비르발의 거침없는 대답에 놀란 판디트가 반문했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습니까?” “아, 죄송하지만 이건 두 번째 질문이로군요. 판디트지, 우리는 한 가지 문답만 하기로 했지요?”
판디트는 말로만 들었던 비르발의 재치에 그만 입을 딱 벌린 채 서 있었습니다. 악바르 황제의 흐뭇한 기분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비르발의 지혜문답』 -지혜로운 대답- 중에서
이처럼 악바르 대제의 포용 정책은 비르발 같은 재상을 만나게 했고 지혜와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무굴제국 6대 왕 아우랑제브 힌두교도 그리고 비이슬람 사람에게 높은 인두세를 부과하는 등 억압정책을 펴 악바르 대제에 길들어 있던 사람들의 원성이 높았을 정도이다. 그만큼 악바르 대제의 포용 정책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종교 억압정책을 편 그 전의 왕과 이후의 왕들과는 분명 다른 정책이었다. 비이슬람에만 부과했던 인두세(Zizya)와 성지 순례세(Pilgrimage taxes)를 일부 사람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폐지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편안해야 나라가 바로 서고 외세도 이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악바르 대제는 사회개혁도 단행했다. 남편이 죽어 화장할 때 산 아내도 함께 화장하는 인도 힌두교의 대표적인 악습 중 하나인 사 띠(Sati) 제도를 폐지하려 한 것이다. 사 띠(Sati) 문제는 따로 다룰 예정이다. 또한, 과부가 재혼할 수 있도록 권장하기도 하였다. 특이한 점은 이슬람에는 가장 위협적인 적대국이고 비협조적인 라지푸트(Rajput) 왕국과 동맹 관계를 맺은 것이다. 라지푸트(Rajput)는 인도 북부의 전사 계급이다. 라지푸트(Rajput)의 정치적 군사적 장점들은 살리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악바르는 힌두 세력인 라지푸트를 자신의 오른팔로 만들기 위해 차별과 억압정책을 과감히 버리는 포용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들에게 정치적으로 참여권을 인정하고 협력을 만들어 냈다. 더욱이 이슬람과 결혼도 장려하고 힌두인들을 왕비로 맞이하는 등 여러모로 채찍과 당근을 사용하여 융화정책을 펼쳤다. 필자가 보기엔 이러한 혼인 정책은 힌두교를 회유하여 무굴제국의 영향권 안에 두려는 속셈으로 보인다. 아무튼 포용 정책은 무굴제국의 막강한 나라로 자리매김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이슬람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타지마할 건축자 손자 샤자한까지 이어지지만 6대 왕 아브랑제브에 의해 힌두교 관용 정책이 깨지고 무굴제국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게다가 18세기 들어 아브랑제브가 사망하고 이슬람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서구 열강들의 인도 진출이 본격화되자 중앙집권적 정치는 사실상 붕괴한다. 결국, 이슬람은 1857년 세포이 항쟁을 마지막으로 사라지고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2024/4/18 뜨르/ 혜윰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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